아주 사적인, 긴 만남 - 시인 마종기, 가수 루시드폴이 2년간 주고받은 교감의 기록
마종기.루시드폴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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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일단 젊은 음악인과 노시인의 소통이 부러웠다.  노시인과 그의 아들보다도 어린 젊은 청년이 나누었던 진솔한 대화들은 읽고 있는 내내 행복했고 즐거웠다. 두 사람의 편지는 조용히 흐르는 맑은 시냇물같은 느낌. 졸졸 흐르는 물소리가 정겹고, 기분 좋아서 잠시 그 언저리에서 마음도 몸도 쉬어가고픈 그런 느낌이었다.

 

마종기 시인의 시를 좋아하는 루시드폴(조윤석)은 스위스에서 생명공학을 연구하는 공학박사이다. 그러면서 음악을 하는 뮤지션이다. 그는 유럽에서 6년동안 공부를 하는 틈틈이 음악을 만들고, 한국에서 공연을 하는 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공학도이면서 음악을 하는 청년의 고뇌와 어떤 길로 가야할지, 둘 다 끌고 가야할지, 고민하는 청춘의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날씨와 여행, 자신의 소소한 이야기와 사회에 대해, 한국에 대해 느꼈던 생각들을 하나하나 풀어놓는다.

 

마종기 시인은 1966년 한국을 떠나 미국에서 의사로 살아오면서 꾸준히 시인으로써의 삶도 병행했다. 타국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외로움, 힘들때마다 시가 있어서 견딜 수 있었다던 시인의 모습에서, 치열하게 사는 중간중간, 외롭고 지칠때마다 낙오되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근간은 문학이었다는 시인의 말은 진실한 울림이 있었다. 그래서, 윤석군이 공학도의 삶을 포기하고 음악을 선택하려고 했을 때 아쉬워했고 안타까워했던 모습은 강요된 충고가 아닌 진심에서 우러나는 조심스러운 배려이었기에 더 와닿았다.

 

이제 70을 바라보는 시인과 30대의 젊은 청년은 때로는 시인과 독자로, 때로는 친구같은 우정을 나누는 모습으로, 때로는 아버지와 아들처럼, 때로는 인생의 대선배가 인생에 대해 고민하는 청춘을 이끌어 주는 모습으로 관계를 형성해간다. 

 

미국과 유럽, 지리적으로는 다른 공간이지만 고국과 타향이라는 점에서는 같다. 의사이면서 시인과 공학도이면서 음악인은 다른 듯 보이지만 비슷하다. 두 사람은 성격이 다른 두 분야를 놓치 못한다는 부분에서 비슷하다. 세대간의 격차가 크지만,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기에, 서로를 이해하기에 충분한 권역이 많기에 두 사람의 대화는 세대를 뛰어넘는 우정을 느끼기에 충분했으며, 그 둘이 가까워지고 마음에서 우러나는 대화를 조용하고 낮게 그렇지만 진실되게 소통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 즐거웠다. '그래, 서로의 마음이 와닿는데, 대화가 통하고 마음이 통하는데, 상대방을 이해하는데 나이가 무슨 의미가 있겠어.' 라는 생각을 절로 하게 된다. 이제 두 사람은 2년여의 편지 끝에 서울에서 얼굴을 맞대고 더 깊고 사적이 대화를 나누게 된다.

 

나는, 이제 어디에서 내 마음이 가 닿는 친구를 만날 것인가? 선뜻 편지쓰기가 쉽지 않은 시절에 살고 있기에 두 사람의 소통이 부럽고, 지켜보는 내내 따뜻했다. 추운 겨울이 이제 막 지나고 창을 통해 비치는 기분좋은 햇살같은 느낌. 이 느낌이 참 좋다. 

 
[책에서] 


...겨우 나 자신을 위로하고 나 자신의 깊이 침잠할 수 있는 영혼의 작고 따뜻한 방을 마련하고 싶어서 시를 썼습니다. 볼품없는 시를 하나 마치고 혼자서 목소르를 죽여 가며 울었던 날도 많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천천히 시를 만드는 시인, 언어의 연금술사보다 골목길 장돌뱅이의 목소리를 더 그리워하게 되었습니다....내 시는 그래서 실체가 미처 보이지 않는 내 상실감을 채워주었고, 내게 깊고 아늑한 위로를 주었으며, 한 세월이 그렇게 지난 후에 주위를 둘러보니 내 시에서 나같이 작은 위로를 받고 있는 분이 제법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누가 비웃을지라도 계속 그런 진심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가며, 그런 목소리에 화답할 수 있는 시를 쓰려고 합니다. <p.297...마종기>

 

언젠가 마음속으로 누군가 네가 사는 목표가 뭐냐는 질문을 한다면, 저는 'knowing'이라고 대답하리라 생각했던 적도 있지요. 알아가는 것, 깨달아가는 것, 무언가를 수동적으로 배운다기보다는 자극에 반응하는 내 내부의 앎. 이것을 저를 밀어가는 힘이자 목표라고 여겼어요. <p.220...조윤석>

 

유럽의 생활에서 비판적으로 그러나 깊게 깨달은 것은 '지금'의 중요성입니다. 왜, 영어로도 현재를 'present'라고 하지 않습니까. 지금 주어진 선물. 이 순간순간으 기쁨, 행복, 즐거움을 왜 우리나라 사람들은 놓치며 살아갈 수 밖에 없는가. 앞만 보고 인내하고 달려가라는 프로그래밍만 되어 있지, 왜 지금은 불행하다고 느끼는 것일까. 사람들을 온통 지배하고 있는 경쟁과 천박한 자본주의가 극복되지 않는다면, 저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살아갈 수 밖에 없을 겁니다. 우리 민족의 DNA가 그렇게 인코딩되어 있지는 않음에도 불구하고요......하지만 희망을 놓아서는 안 되겠지요. 제 위치에서 '재미있게' 그리고 당당하게 살아가겠다는 다짐을 이 아침에 문득 해봅니다. <p.223...조윤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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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심장을 쏴라 - 2009년 제5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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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병원에 갇힌 두 젊은이의 탈출기를 그린 이 소설은 초반부는 지지부진해서 고전했다. 그쪽 세상의 사람들을 이해하는 것은 참 힘들구나 하는 생각을 저절로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단 그들의 일상과 그들에게 익숙해지니 그네들도 우리와 똑같구나. 다만, 그들이 감당하기 힘든 마음의 상처를 지니게 된  사람들이란 점이 다르구나 이해하게 된다.

 

대개 우리는 평범한 사람과는 다른 정신세계를 갖춘 그네들이 혹여 가까이 접근이라도 할까봐 두려워 피하게 된다. 아마도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행동하고 말할지 예측할 수 없다는 데서 오는 막연한 불안감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마 그들은 순수하고 마음이 착해서 그들이 받은 상처를 세상에 분노하고 타인을 해하기 보다  세상에게서 도망쳐 자신 안에 또아리를 틀었는지도 모르다. 여리고, 상처받기 쉬운 영혼인지도 모르겠다 생각하게 된다.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던 엄마의 죽음을 목격한 고등학생인 수명인 그 충격적인 사건을 계기로 세상과 담을 쌓는다.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서 세상에 나서는 걸 두려워한다. 정신적 트라우마가 너무도 커 그 파고를 극복하지 못한 수명은 이후 정신병원에 들락거리는 삶을 이어온다. 수명의 증세가 점점 더 악화되자 아버지는 그를 수리희망병원이라는 병원으로 보낸다.

그곳에서 수명은 자유로운 영혼인 승민을 만나게 된다. 세상이 두려워 세상으로부터 뒷걸음질치는 수명과 달리, 세상에 당당히 맞서는 승민.  그룹 회장님의 혼외자. 외롭고 불행한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불을 지르던 소년은 미국의 광활한 자연과 하늘을 날게 되면서 비로소 나를 만나게 된다.

 

"날고 있는 동안 나는 온전히 나야. 어쩌다 태어난 누구누구의 혼외자도 아니고, 불의 충동에 시달리는 미치광이도 아닌, 그냥 나, 모든 족쇄로부터 풀려난 자유로운 존재, 바로 나." (p.286)

 

그렇게 하늘을 날면서 스스로 자신을 치유해 가던 승민은 아버지인 회장님이 돌아가시면서 유산상속의 희생양이 되어 정신병원에 갇히게 된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서 탈출시도를 반복해가며 미쳐가기 시작한다.

 

"정신병동에는 두 부류의 인간이 있어요. 미쳐서 갇힌 자와 갇혀서 미쳐가는 자. (p.213 )"

 

수리희망병원은 희망이 없었고, 가졌던 희망도 갈취당했던 곳. 보호자가 세상으로부터 연약한 영혼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보낸 그곳은 보호라기 보다 세상과 단절시키는, 격리시키는 곳에 더 가깝다.  그 공간에서 수명은 희망을 품었고, 자유를 갈망했다. 바로 승민을 만나면서 수명은 자신과는 너무나 다른 승민을 통해서 그의 탈출기에 엮이면서 서서히 변해간다. 그리고, 자신 속에 내재되어 있던, 숨기고 싶었던 진실과 맞딱뜨리면서 서서히 변해간다. 진실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그래서 자신 안에 숨어버렸던 과거의 나에서 벗어나게 된다. 승민이 수명에게 던진 질문은 그래서 자신의 존재에 대해  고민하게 한다. 근원적이면서 자문하기 어려웠던 자신의 본질을 꿰뚤어 보게 본다. 그래, 나는 누구일까? 그 질문에 고민하기 시작하면서, 답을 찾기 시작하면서, 벗어나고 싶었던 그 날의 나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그날의 나를 용서할 수 없었던 나를 용서하고 화해함으로써 그는 비로소 진정한 나를 만나게 된다.

 

"가끔 궁금했어. 진짜 네가 누군지. 숨는 놈 말고, 견디는 놈 말고, 네 인생을 상대하는 놈. 있기는 하냐? (p.240 )" 

 

세상에 맞닥뜨릴 용기가 아직은 많지 않지만, 수명은 그래도 용기를 내본다. 진실에서 도망치는 것이 해결책이 아니란 것을, 너무 많이 너무 멀리 도망쳤지만 이제 다시 시작할 것이라고 조심스레 말하는 수명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정신병원의 시계에는 숫자판이 없다. 허구, 망상, 환각, 기억, 꿈, 혼돈, 공포 따우의 이름들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시간은 바다처럼 존재하고 사람들은 폐허의 바다를 표류하는 유령선이다.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어디쯤에 있는가, 어디로 가는가, 하는 것들은 알 길이 없다. 의미도 없다.  자신이 서 있는 지점과 시간의 흐름이 곧 삶이 되는 곳은 반대편 세상뿐이다. (p.164)

 

사람들이 병원 규칙에 열심히 순응하는 것은 퇴원, 혹은 자유에 대한 갈망때문이다. 갈망으 궁극에는 삶의 복원이라는 희망이 있다. 그러나 그토록 갈구하던 자유를 얻어 세상에 돌아가면 희망 대신 하나의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다리에서 뛰어내리는 것 말고는 세상 속에서 이룰 것이 없다는 진실. 글하여 병원 창가에서 세상을 내다보며 꿈꾸던 희망이 세상 속 진실보다 달콤하고 안전하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p.291~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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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부탁해
신경숙 지음 / 창비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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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부탁해를 읽은지 한 달도 넘었습니다. 이상하게 책 읽은 느낌을 적기가 힘들었습니다. 그건 엄마에 대한 생각들이 다들 대동소이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제 한국경제신문에서 신경숙님의 인터뷰기사를 보았습니다. 기자는 이렇게 썼습니다.  "모두에게 '엄마'는 성역이다. 하지만 늘 굳건하게 우리를 돌보고 지켜줄 거라고 믿었던 성역도 언젠가 우리 곁을 떠날 수밖에 없는 '약한 인간'이라는 사실은 늘 잊혀진다."

 

이제 내일 모레면 일흔이 되는 엄마를 아직도 수퍼우먼쯤으로 여기며 영원히 내 옆에 존재할 거라고 믿는 오해는 지금도 머리로는 알지만 가슴으로는 절대 받아들여지지 않는 진실입니다. 받아들일 수도 없고요. 엄마없는 삶을 어떻게 상상할 수 있을까?

 

신경숙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멀리 있는 존재들에게 예의를 차리느라고 가까이 있는 존재들에게는 오히려 무심합니다. 저만 해도 엄마가 자신의 이야기를 할라 치면 '다음에'라고 미루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순간순간이 다음인데, 약속한 '다음'이 과연 언제나 다시 오겠어요?....신은 모든 곳에 존재하지 못해서 대신 어머니를 내려보냈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말은 감동적이기도 하지만 엄마를 고단하게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래요, 어쩌면 엄마라는 존재는 신을 대신해서 우리를 보살피는 그런 존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즐겁고, 소위 잘나가는 때에는 신을 잊었다가도 어렵고 힘들때 신에게 간절히 기도 드리며 매달리는 것처럼. 힘들고 지칠 때 찾게 되는 존재, 나를 위해서는 언제나 기꺼이 '당연하게'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으로 생각되는 존재가 엄마이겠지요. 나는 엄마를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소설 속의 가족은 지금의 나는 엄마의 사랑없이는, 희생없이는 만들어질 수 없었다는 것을 이제야 - 엄마의 부재를 통해서 - 깨닫습니다. 역설적이게도 가족은 엄마의 부재를 통해서 엄마의 존재를 깨닫습니다. 엄마 없이는  내가 할 수 있는게 거의 없다는 것을. 엄마의 부재가 가져다 주는 공황을 느낍니다.  내 삶에서 엄마의 존재가 얼마나 많은 부분을 차지했는지 어떻게 그걸 모를 수가 있을까요? 그러나, 나는 소설 속의 가족을 비난할 수가 없습니다. 나도 역시나 그렇게 살았으니까요.  가족은 엄마의 고단한 삶을 이제야 이해합니다. 그리고, 간절히 바랍니다. 지금 엄마만 돌아와준다면 엄마의 희생이, 사랑이 얼마나 소중한지 말하겠다고...고맙다고 말하겠다고...

 

친정엄마를 만나러 가는 기차에서 이 책을 읽었습니다. 아이들과 같이 떠나는 즐거운 기차여행에서 나는 주책없이 계속 눈물을 흘렸습니다. 예전에 엄마에게 날렸던 비수같은 말들을 기억해냅니다. 만약, 내 딸이 나에게 그런 말을 한다면 어떨까를 상상해봅니다. 상상만으로도 나는 마음이 아파서 살 수 없을 것 같은데,  친정엄마는 어땠을까? 죄송하다고 말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서 내가 엄마가 되고 보니 친정엄마를 이해하게 됩니다. 이제 엄마가 힘들 때, 외로울 때 그 하소연을 들어주는 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강했던 엄마도 엄마이기 이전에 여린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신경숙작가는 인터뷰의 말미에 이렇게 말합니다. 시대가 갈수록 잔인하고 흉포해지는 것을 보면서, 그럴 때일수록 가족끼리 보듬어야 하는데, 어머니의 마음으로 감싸고 보듬어야 하는데, 사회가 그러질 못한다고.  상황이 나쁠수록 극단적인 말을 지양하고, 애를 써서라도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는 말을 해야한다고.

 

마음이 고단할 때, 힘들 때, 아플 때 제일 먼저 찾는 사람, 엄마.  

엄마에게 말할 순 없겠지만, 엄마, 엄마가 내 엄마여서 얼마나 고맙고 다행인지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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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 시스터즈 키퍼 - 쌍둥이별
조디 피콜트 지음, 곽영미 옮김 / 이레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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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아이를 낳으면, 이전과는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보게 됩니다. 아이없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이상할 정도로 아이는 여자에게(남자에게도 마찬가지일 테지요) 가장 소중한 존재가 됩니다. 자신보다 아이를 더 사랑하게 되죠. 그걸 저 역시 경험하고 있는터라 쌍둥이별이라는 책을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하고 읽어낼 수가 없었습니다. 도대체 아이라는 존재는 어느 별에서 왔길래 내 삶의 많은 걸 바꿔놓았을까요? 아이가 아픈 것보다 내 마음이 더 아파서 대신 아픈 게 낫게다는 마음이 드는 것. 그런 마음이 부모가 되면 저절로 생기게 된다는 것을 알기에 더욱 더 그렇습니다.

 

한 아이가 있습니다. 이제 13살인 아이는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고민합니다. 나는 누구일까? 다른 아이들과는 다르게 이 세상에 나왔다는 것. 만약 케이트 언니가 아프지 않았더라면 나는 과연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었을까? 나는 언니의 치료를 목적으로 유전자 조작에 의해 태어난 아이입니다. 나는 언니에게 내 몸의 많은 것을 줍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도  언니때문에 포기할 수 밖에 없습니다. 나는 언제나 언니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아이입니다. 이제  엄나는 사그러져가는 언니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신장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안나는 그것을 거부합니다. 안나의 선택은 지금까지 함께한 가족이라는 성을 무너뜨리는 것일수도, 언니인 케이트의 생명에 종지부를 찍을 수도 있는 결정입니다. 안나의 선택이 과연 옳은 것일까요? 비난받아 마땅한 일 일까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이가 죽어가고 있습니다. 세상의 어떤 방법으로도 아이를 구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아이와 같은 유전자의 형제자매가 있으면 아이가 살 수 있답니다. 엄마는 그 아이, 케이트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 동종기여자인 동생이 있다면 케이트가 살아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유전자 조작을 한 아이를 낳습니다. 그리고, 동생인 안나는 케이트에게 제대혈, 골수, 혈액...등등 무수한 것들을 제공하기 위해 수술을 합니다. 그 어린 아이가 언니를 살리기 위해서 말입니다. 5살 밖에 살 수 없다던 케이트는 이제 16살이 되었습니다. 케이트는 언제 터질 지 모르는 시한폭탄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엄마인 사라는 늘 케이트를 먼저 생각합니다. 그래서, 안나가 꼭 가고 싶어하던 캠프에 가는 것도 허락할 수가 없습니다. 안나가 없는 동안 케이트에게 위험한 상황이 생길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우선순위는 케이트일 수 밖에 없습니다. 아들인 제시가 엇나가고 있지만 그 손을 잡아줄 여력이 없습니다. 케이트에게 신장을 기증해 줄 것을 요구한 사라의 말을 안나가 거절합니다. 그리고 딸에게 고소를 당합니다.

 

과연 사라의 이 같은 행동이 잘못된 것일까요? 한 아이를 살리기 위해 유전자 조작이란 방법으로 아이를 낳는 것이 도덕적으로 옳은 일일까요? 이 문제에 대해 이해보다 비난이 앞선다면, 아마도 그 사람은 부모가 된 적이 없는 사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만약 사라의 입장이었다면, 아이를 살릴 방법이 그 방법 밖에 없다면, 꺼져가는 아이를 그냥 보낼 수 없기에 사라처럼 선택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세상의 어떤 부모가 아이가 죽어가는데, 방법이 있다는데...

자식을 살릴수만 있다면 대신 날 데려가 달라고 기도하는게 부모이니까요. 아마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서라도 아이를 살릴 수 있다면 그러겠다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부모는 그런 마음이라는 걸 알기에 사라와 브라이언의 선택을 비난할 수가 없었습니다. 윤리? 도덕?을 헤아리기엔 너무 다급하고, 세상의 모든 부모는 어떠한 경우에도 아이를 포기할 수 없을테니까요.

그래서, 사라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린 안나가 감당하기엔 벅찬 수술을 끝도 없이 강요해서 미안하고, 당신에겐 아들인 나도 있다고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 비행을 일삼는 가엾은 제시에게 제대로 신경써주지 못하는 것도 미안하지만 죽어가는 아이가 우선일 수 밖에 없을테니까요.

 

책을 읽는 내내 울었습니다.  안나의 입장에선 억울하죠. 억울할거예요. 케이트를 위해서 존재하는 아이. 아픈 언니와 별반 다를 게 없는 삶을 살아가는 안나가 가여웠습니다. 아픈 동생때문에 늘 외로웠던 제시. 자신이 있다는 걸 알리기 위해 몸부림치는 제시가 가여웠습니다. 그리고, 케이트를 위해 희생해야 하는 안나가 가엾지만, 그렇다고 케이트를 포기할 수 없어 고민하는 사라와 브라이언도 가여웠습니다.

 

안나의 그 결정이 비록 자신만을 위한 이기적인 것이라도 그를 비난할 수가 없었습니다. 안나의 주장이 관철되어서 신장을 기증하지 않아 언니 케이트의 생명이 끊어지게 된다면 안나가 그걸 어떻게 극복할지 참 걱정이 되었습니다. 아마 작가도 그걸 염려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후~그래서, 안나가 가여워서, 사라가 가여워서, 브라이언이 가여워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처음엔 참 궁금했습니다. 생명을 골라서 낳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윤리적인 문제를 어떻게 풀어냈을까? 과연 부모가 자식에게 요구할 수 있는 수준은 어디까지인가? 자식이 그걸 거부했을 때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케이트만 잃는 것이 아니라 안나까지도 잃을 수 있는 상황을 작가는 어떻게 풀어냈을까를 고민하다보면, 작가의 결말이 충격이지만 작가가 꺼내놓을 수 있는 경우의 수는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책에서>

 

"...알렉산더 씨, 이 심리가 시작될 때 당신은 우리 중 누구도 불 속에 뛰어들어 불타고 있는 건물에서 누군가를 구해낼 의무가 없다고 말했어요. 하지만 당신이 부모이고 그 불타는 건물 속에 있는 사람이 당신의 아이라면, 모든 게 달라져요. 그런 경우라면 당신이 아이를 구해내기 위해 뛰어든다 해도 모두가 이해할 것이고, 실제로는 당연히 그러리라 기대할 거예요."

"그러나 내 삶에서는, 불타는 건물 속에 내 아이들 중 한 명이 갇혀 있었어요. 그 아이를 구해내는 방법은 다른 아이를 들여보내는 것 뿐이었어요. 그 아이만이 길을 알고 있었으니까요. 제가 위험을 무릅쓰고 있다는 걸 몰랐을까요? 물론 알았어요. 그것이 두 아이 모두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걸 깨닫지 못했을까요? 아니에요. 그 아이에게 그런 일을 부탁하는 게 공평하지 않다는 걸 이해 못했을까요? 천만에요. 그러나 나는 그것만이 두 아이 모두를 지키는 유일한 기회라는 것도 알았어요. 그게 합법적이었을까요? 도덕적이었을까요? 미쳤거나 어리석었거나 잔인했을까요? 나는 모르겠어요. 그러나 그것이 옳았다는 건 알아요."  <p.526>

 

슬픔에도 유통 기한이라는 게 있어야 한다. 울다 깨어나도 괜찮지만 한 달을 넘기면 안 된다고 정해 놓은 법령 같은 게 말이다. 42일이 지나면 그 애가 내 이름을 큰 소리로 부르는 소리가 들려 심장을 두근거리며 뒤돌아보는 일이 더 이상 없을 거라고. 그 애의 책상을 치울 필요성을 느껴도 벌금이 부과되지 않을 거라고. 냉장고에서 그 애가 만든 공예품을 떼버려도. 자꾸 보게 되어 마음이 아프지 않도록 지나가도 졸업 사진을 돌려놓더라도. 그 애의 생일을 손꼽아 센 것처럼 그 애가 가고 없는 시간을 세어도 괜찮다고 말이다. < p.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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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친 막대기
김주영 지음, 강산 그림 / 비채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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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백양나무의 곁가지입니다. 지금까지는 어미나무에 붙어있으면서 어미로부터 물과 자양분을 공급받으며 살아왔습니다. 햇살과 바람을 맞으며 평화롭게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어미나무로부터 떨어져 나오게 됩니다. 아직 기차의 기적소리도 제대로 들어보지 못한 한적한 시골에서 한가롭게 풀을 뜯어 먹던 암소가 기차의 기적소리에 놀라 날뛰면서 '백양나무의 곁가지'인 나는 어미의 곁을 떠나 놀라 날뛰는 암소를 부리기 위한 나무막대기가 됩니다.

어미나무의 곁을 떠나보니 언제 말라죽을지도 모르는 신세가 되고, 물과 양분도 쉽게 구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는 암소를 부리는 막대기가 되었다가 농부의 어린 딸, 재희를 단속하는 회초리가 되었다가, 뒷간의 똥을 휘젓는 똥친 막대기가 되었습니다. 누군가의 도움없이는 한 발도 움직일 수 없는 '나'는 이제야 거친 비바람에도, 눈보라에도 묵묵히 지탱해준 어미 백양나무의 고마움을 깨닫습니다.

"어미 나무는 그 자리에 서서 한평생을 상처를 입으면 입는 대로, 가뭄이 들면 또 그대로 볼멘소리 한 번 없이 묵묵히 살아갈 것입니다. 홍수가 지면 또한 그대로 눈보라와 폭풍도 의연하게 견대 낼 것입니다. 그저 그렇게 제자리에 솟아 있을 뿐 어떤 질곡과 수모와 고통에도 울지 않을 것입니다. 그 서러움을  대신하여 울어 주는 것은 나뭇가지 사이를 지나가는 바람이겠지요. 나 또한 어미나무처럼 하늘 끝자락까지 자라나서 의연한 모습으로 살아가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p.128~129"

 

이젠 하찮은, 아니 너무나 더러워서 똥친막대기를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남에게 위협이 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재희는 똥친막대기로 자신을 괴롭혀 온 동네아이들에게 통쾌한 복수를 하지요. 그래서 똥친막대기는 다시 한 번 꿈을 꿉니다. 생명에 대한 꿈 말입니다. 어두운 뒷간에서 다시 세상 밖으로 나왔으니까요. 

"꿈을 꾸고 있으면 언제가는 그 꿈이 현실로 연결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나는 그 것을 믿습니다. p.139"  

 

그 꿈을 포기하지 않았기에 범람하는 홍수에도 용케 살아남아 뿌리를 내리게 됩니다. 땅에 누워만 있던 내가 땅에 꼿꼿이 설 수 있게 되었지요. 땅 속 깊숙이 박힌 내 몸이 근질거립니다. 뿌리가 나려나 봅니다. 막대기인 내가 홍수에 떠내려올 때에도 살아야 겠다는 꿈을 접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그래서 말라 죽어질 내 운명에 곁들여진 행운을 겸허히 받아들일 것이라고, 살아있음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노라고 어린 백양나무가지는 말합니다. 어미나무가 그랬던 것처럼 뿌리깊은 나무가 되어 그늘 드리우는 아름드리 백양나무가 되겠다 다짐합니다. 

 

삶이 이전 어느 때보다 팍팍하고 힘겹습니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힘들다고 아우성입니다. 이럴 때, 우리 문학의 큰 나무같은 김주영작가는 슬그머니 백양나무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지금까지 세상이 힘들다는 걸 모르고 살아오던 여린 가지가 어미에게서 떨어져 나와서 그 막대기가 다시 뿌리를 내리게 되는 이야기. 그 이야기는 어쩐지 우리의 삶과 많이 닮아 있습니다. 어린나무처럼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그래도 백양나무 가지가 그랬던 것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꿈을 접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른인 나보다도 더 의연하게 어려운 삶을 헤쳐나가는 모습, 희망을 잃지 않는 여린 나뭇가지의 모습이 대견했습니다. 








 

사진은 http://blog.naver.com/jinheri/30026880525

그대의 창을 지나는 여우비 블로그에서 가져왔습니다.

 

 

 

나는 백양나무의 곁가지입니다. 지금까지는 어미나무에 붙어있으면서 어미로부터 물과 자양분을 공급받으며 살아왔습니다. 햇살과 바람을 맞으며 평화롭게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어미나무로부터 떨어져 나오게 됩니다. 아직 기차의 기적소리도 제대로 들어보지 못한 한적한 시골에서 한가롭게 풀을 뜯어 먹던 암소가 기차의 기적소리에 놀라 날뛰면서 '백양나무의 곁가지'인 나는 어미의 곁을 떠나 놀라 날뛰는 암소를 부리기 위한 나무막대기가 됩니다.

어미나무의 곁을 떠나보니 언제 말라죽을지도 모르는 신세가 되고, 물과 양분도 쉽게 구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는 암소를 부리는 막대기가 되었다가 농부의 어린 딸, 재희를 단속하는 회초리가 되었다가, 뒷간의 똥을 휘젓는 똥친 막대기가 되었습니다. 누군가의 도움없이는 한 발도 움직일 수 없는 '나'는 이제야 거친 비바람에도, 눈보라에도 묵묵히 지탱해준 어미 백양나무의 고마움을 깨닫습니다.

"어미 나무는 그 자리에 서서 한평생을 상처를 입으면 입는 대로, 가뭄이 들면 또 그대로 볼멘소리 한 번 없이 묵묵히 살아갈 것입니다. 홍수가 지면 또한 그대로 눈보라와 폭풍도 의연하게 견대 낼 것입니다. 그저 그렇게 제자리에 솟아 있을 뿐 어떤 질곡과 수모와 고통에도 울지 않을 것입니다. 그 서러움을  대신하여 울어 주는 것은 나뭇가지 사이를 지나가는 바람이겠지요. 나 또한 어미나무처럼 하늘 끝자락까지 자라나서 의연한 모습으로 살아가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p.128~129"

 

이젠 하찮은, 아니 너무나 더러워서 똥친막대기를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남에게 위협이 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재희는 똥친막대기로 자신을 괴롭혀 온 동네아이들에게 통쾌한 복수를 하지요. 그래서 똥친막대기는 다시 한 번 꿈을 꿉니다. 생명에 대한 꿈 말입니다. 어두운 뒷간에서 다시 세상 밖으로 나왔으니까요. 

"꿈을 꾸고 있으면 언제가는 그 꿈이 현실로 연결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나는 그 것을 믿습니다. p.139"  

 

그 꿈을 포기하지 않았기에 범람하는 홍수에도 용케 살아남아 뿌리를 내리게 됩니다. 땅에 누워만 있던 내가 땅에 꼿꼿이 설 수 있게 되었지요. 땅 속 깊숙이 박힌 내 몸이 근질거립니다. 뿌리가 나려나 봅니다. 막대기인 내가 홍수에 떠내려올 때에도 살아야 겠다는 꿈을 접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그래서 말라 죽어질 내 운명에 곁들여진 행운을 겸허히 받아들일 것이라고, 살아있음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노라고 어린 백양나무가지는 말합니다. 어미나무가 그랬던 것처럼 뿌리깊은 나무가 되어 그늘 드리우는 아름드리 백양나무가 되겠다 다짐합니다. 

 

삶이 이전 어느 때보다 팍팍하고 힘겹습니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힘들다고 아우성입니다. 이럴 때, 우리 문학의 큰 나무같은 김주영작가는 슬그머니 백양나무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지금까지 세상이 힘들다는 걸 모르고 살아오던 여린 가지가 어미에게서 떨어져 나와서 그 막대기가 다시 뿌리를 내리게 되는 이야기. 그 이야기는 어쩐지 우리의 삶과 많이 닮아 있습니다. 어린나무처럼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그래도 백양나무 가지가 그랬던 것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꿈을 접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른인 나보다도 더 의연하게 어려운 삶을 헤쳐나가는 모습, 희망을 잃지 않는 여린 나뭇가지의 모습이 대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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