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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 시스터즈 키퍼 - 쌍둥이별
조디 피콜트 지음, 곽영미 옮김 / 이레 / 2008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여자가 아이를 낳으면, 이전과는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보게 됩니다. 아이없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이상할 정도로 아이는 여자에게(남자에게도 마찬가지일 테지요) 가장 소중한 존재가 됩니다. 자신보다 아이를 더 사랑하게 되죠. 그걸 저 역시 경험하고 있는터라 쌍둥이별이라는 책을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하고 읽어낼 수가 없었습니다. 도대체 아이라는 존재는 어느 별에서 왔길래 내 삶의 많은 걸 바꿔놓았을까요? 아이가 아픈 것보다 내 마음이 더 아파서 대신 아픈 게 낫게다는 마음이 드는 것. 그런 마음이 부모가 되면 저절로 생기게 된다는 것을 알기에 더욱 더 그렇습니다.
한 아이가 있습니다. 이제 13살인 아이는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고민합니다. 나는 누구일까? 다른 아이들과는 다르게 이 세상에 나왔다는 것. 만약 케이트 언니가 아프지 않았더라면 나는 과연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었을까? 나는 언니의 치료를 목적으로 유전자 조작에 의해 태어난 아이입니다. 나는 언니에게 내 몸의 많은 것을 줍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도 언니때문에 포기할 수 밖에 없습니다. 나는 언제나 언니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아이입니다. 이제 엄나는 사그러져가는 언니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신장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안나는 그것을 거부합니다. 안나의 선택은 지금까지 함께한 가족이라는 성을 무너뜨리는 것일수도, 언니인 케이트의 생명에 종지부를 찍을 수도 있는 결정입니다. 안나의 선택이 과연 옳은 것일까요? 비난받아 마땅한 일 일까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이가 죽어가고 있습니다. 세상의 어떤 방법으로도 아이를 구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아이와 같은 유전자의 형제자매가 있으면 아이가 살 수 있답니다. 엄마는 그 아이, 케이트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 동종기여자인 동생이 있다면 케이트가 살아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유전자 조작을 한 아이를 낳습니다. 그리고, 동생인 안나는 케이트에게 제대혈, 골수, 혈액...등등 무수한 것들을 제공하기 위해 수술을 합니다. 그 어린 아이가 언니를 살리기 위해서 말입니다. 5살 밖에 살 수 없다던 케이트는 이제 16살이 되었습니다. 케이트는 언제 터질 지 모르는 시한폭탄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엄마인 사라는 늘 케이트를 먼저 생각합니다. 그래서, 안나가 꼭 가고 싶어하던 캠프에 가는 것도 허락할 수가 없습니다. 안나가 없는 동안 케이트에게 위험한 상황이 생길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우선순위는 케이트일 수 밖에 없습니다. 아들인 제시가 엇나가고 있지만 그 손을 잡아줄 여력이 없습니다. 케이트에게 신장을 기증해 줄 것을 요구한 사라의 말을 안나가 거절합니다. 그리고 딸에게 고소를 당합니다.
과연 사라의 이 같은 행동이 잘못된 것일까요? 한 아이를 살리기 위해 유전자 조작이란 방법으로 아이를 낳는 것이 도덕적으로 옳은 일일까요? 이 문제에 대해 이해보다 비난이 앞선다면, 아마도 그 사람은 부모가 된 적이 없는 사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만약 사라의 입장이었다면, 아이를 살릴 방법이 그 방법 밖에 없다면, 꺼져가는 아이를 그냥 보낼 수 없기에 사라처럼 선택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세상의 어떤 부모가 아이가 죽어가는데, 방법이 있다는데...
자식을 살릴수만 있다면 대신 날 데려가 달라고 기도하는게 부모이니까요. 아마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서라도 아이를 살릴 수 있다면 그러겠다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부모는 그런 마음이라는 걸 알기에 사라와 브라이언의 선택을 비난할 수가 없었습니다. 윤리? 도덕?을 헤아리기엔 너무 다급하고, 세상의 모든 부모는 어떠한 경우에도 아이를 포기할 수 없을테니까요.
그래서, 사라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린 안나가 감당하기엔 벅찬 수술을 끝도 없이 강요해서 미안하고, 당신에겐 아들인 나도 있다고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 비행을 일삼는 가엾은 제시에게 제대로 신경써주지 못하는 것도 미안하지만 죽어가는 아이가 우선일 수 밖에 없을테니까요.
책을 읽는 내내 울었습니다. 안나의 입장에선 억울하죠. 억울할거예요. 케이트를 위해서 존재하는 아이. 아픈 언니와 별반 다를 게 없는 삶을 살아가는 안나가 가여웠습니다. 아픈 동생때문에 늘 외로웠던 제시. 자신이 있다는 걸 알리기 위해 몸부림치는 제시가 가여웠습니다. 그리고, 케이트를 위해 희생해야 하는 안나가 가엾지만, 그렇다고 케이트를 포기할 수 없어 고민하는 사라와 브라이언도 가여웠습니다.
안나의 그 결정이 비록 자신만을 위한 이기적인 것이라도 그를 비난할 수가 없었습니다. 안나의 주장이 관철되어서 신장을 기증하지 않아 언니 케이트의 생명이 끊어지게 된다면 안나가 그걸 어떻게 극복할지 참 걱정이 되었습니다. 아마 작가도 그걸 염려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후~그래서, 안나가 가여워서, 사라가 가여워서, 브라이언이 가여워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처음엔 참 궁금했습니다. 생명을 골라서 낳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윤리적인 문제를 어떻게 풀어냈을까? 과연 부모가 자식에게 요구할 수 있는 수준은 어디까지인가? 자식이 그걸 거부했을 때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케이트만 잃는 것이 아니라 안나까지도 잃을 수 있는 상황을 작가는 어떻게 풀어냈을까를 고민하다보면, 작가의 결말이 충격이지만 작가가 꺼내놓을 수 있는 경우의 수는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책에서>
"...알렉산더 씨, 이 심리가 시작될 때 당신은 우리 중 누구도 불 속에 뛰어들어 불타고 있는 건물에서 누군가를 구해낼 의무가 없다고 말했어요. 하지만 당신이 부모이고 그 불타는 건물 속에 있는 사람이 당신의 아이라면, 모든 게 달라져요. 그런 경우라면 당신이 아이를 구해내기 위해 뛰어든다 해도 모두가 이해할 것이고, 실제로는 당연히 그러리라 기대할 거예요."
"그러나 내 삶에서는, 불타는 건물 속에 내 아이들 중 한 명이 갇혀 있었어요. 그 아이를 구해내는 방법은 다른 아이를 들여보내는 것 뿐이었어요. 그 아이만이 길을 알고 있었으니까요. 제가 위험을 무릅쓰고 있다는 걸 몰랐을까요? 물론 알았어요. 그것이 두 아이 모두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걸 깨닫지 못했을까요? 아니에요. 그 아이에게 그런 일을 부탁하는 게 공평하지 않다는 걸 이해 못했을까요? 천만에요. 그러나 나는 그것만이 두 아이 모두를 지키는 유일한 기회라는 것도 알았어요. 그게 합법적이었을까요? 도덕적이었을까요? 미쳤거나 어리석었거나 잔인했을까요? 나는 모르겠어요. 그러나 그것이 옳았다는 건 알아요." <p.526>
슬픔에도 유통 기한이라는 게 있어야 한다. 울다 깨어나도 괜찮지만 한 달을 넘기면 안 된다고 정해 놓은 법령 같은 게 말이다. 42일이 지나면 그 애가 내 이름을 큰 소리로 부르는 소리가 들려 심장을 두근거리며 뒤돌아보는 일이 더 이상 없을 거라고. 그 애의 책상을 치울 필요성을 느껴도 벌금이 부과되지 않을 거라고. 냉장고에서 그 애가 만든 공예품을 떼버려도. 자꾸 보게 되어 마음이 아프지 않도록 지나가도 졸업 사진을 돌려놓더라도. 그 애의 생일을 손꼽아 센 것처럼 그 애가 가고 없는 시간을 세어도 괜찮다고 말이다. < p.5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