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내 심장을 쏴라 - 2009년 제5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09년 5월
평점 :
정신병원에 갇힌 두 젊은이의 탈출기를 그린 이 소설은 초반부는 지지부진해서 고전했다. 그쪽 세상의 사람들을 이해하는 것은 참 힘들구나 하는 생각을 저절로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단 그들의 일상과 그들에게 익숙해지니 그네들도 우리와 똑같구나. 다만, 그들이 감당하기 힘든 마음의 상처를 지니게 된 사람들이란 점이 다르구나 이해하게 된다.
대개 우리는 평범한 사람과는 다른 정신세계를 갖춘 그네들이 혹여 가까이 접근이라도 할까봐 두려워 피하게 된다. 아마도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행동하고 말할지 예측할 수 없다는 데서 오는 막연한 불안감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마 그들은 순수하고 마음이 착해서 그들이 받은 상처를 세상에 분노하고 타인을 해하기 보다 세상에게서 도망쳐 자신 안에 또아리를 틀었는지도 모르다. 여리고, 상처받기 쉬운 영혼인지도 모르겠다 생각하게 된다.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던 엄마의 죽음을 목격한 고등학생인 수명인 그 충격적인 사건을 계기로 세상과 담을 쌓는다.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서 세상에 나서는 걸 두려워한다. 정신적 트라우마가 너무도 커 그 파고를 극복하지 못한 수명은 이후 정신병원에 들락거리는 삶을 이어온다. 수명의 증세가 점점 더 악화되자 아버지는 그를 수리희망병원이라는 병원으로 보낸다.
그곳에서 수명은 자유로운 영혼인 승민을 만나게 된다. 세상이 두려워 세상으로부터 뒷걸음질치는 수명과 달리, 세상에 당당히 맞서는 승민. 그룹 회장님의 혼외자. 외롭고 불행한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불을 지르던 소년은 미국의 광활한 자연과 하늘을 날게 되면서 비로소 나를 만나게 된다.
"날고 있는 동안 나는 온전히 나야. 어쩌다 태어난 누구누구의 혼외자도 아니고, 불의 충동에 시달리는 미치광이도 아닌, 그냥 나, 모든 족쇄로부터 풀려난 자유로운 존재, 바로 나." (p.286)
그렇게 하늘을 날면서 스스로 자신을 치유해 가던 승민은 아버지인 회장님이 돌아가시면서 유산상속의 희생양이 되어 정신병원에 갇히게 된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서 탈출시도를 반복해가며 미쳐가기 시작한다.
"정신병동에는 두 부류의 인간이 있어요. 미쳐서 갇힌 자와 갇혀서 미쳐가는 자. (p.213 )"
수리희망병원은 희망이 없었고, 가졌던 희망도 갈취당했던 곳. 보호자가 세상으로부터 연약한 영혼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보낸 그곳은 보호라기 보다 세상과 단절시키는, 격리시키는 곳에 더 가깝다. 그 공간에서 수명은 희망을 품었고, 자유를 갈망했다. 바로 승민을 만나면서 수명은 자신과는 너무나 다른 승민을 통해서 그의 탈출기에 엮이면서 서서히 변해간다. 그리고, 자신 속에 내재되어 있던, 숨기고 싶었던 진실과 맞딱뜨리면서 서서히 변해간다. 진실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그래서 자신 안에 숨어버렸던 과거의 나에서 벗어나게 된다. 승민이 수명에게 던진 질문은 그래서 자신의 존재에 대해 고민하게 한다. 근원적이면서 자문하기 어려웠던 자신의 본질을 꿰뚤어 보게 본다. 그래, 나는 누구일까? 그 질문에 고민하기 시작하면서, 답을 찾기 시작하면서, 벗어나고 싶었던 그 날의 나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그날의 나를 용서할 수 없었던 나를 용서하고 화해함으로써 그는 비로소 진정한 나를 만나게 된다.
"가끔 궁금했어. 진짜 네가 누군지. 숨는 놈 말고, 견디는 놈 말고, 네 인생을 상대하는 놈. 있기는 하냐? (p.240 )"
세상에 맞닥뜨릴 용기가 아직은 많지 않지만, 수명은 그래도 용기를 내본다. 진실에서 도망치는 것이 해결책이 아니란 것을, 너무 많이 너무 멀리 도망쳤지만 이제 다시 시작할 것이라고 조심스레 말하는 수명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정신병원의 시계에는 숫자판이 없다. 허구, 망상, 환각, 기억, 꿈, 혼돈, 공포 따우의 이름들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시간은 바다처럼 존재하고 사람들은 폐허의 바다를 표류하는 유령선이다.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어디쯤에 있는가, 어디로 가는가, 하는 것들은 알 길이 없다. 의미도 없다. 자신이 서 있는 지점과 시간의 흐름이 곧 삶이 되는 곳은 반대편 세상뿐이다. (p.164)
사람들이 병원 규칙에 열심히 순응하는 것은 퇴원, 혹은 자유에 대한 갈망때문이다. 갈망으 궁극에는 삶의 복원이라는 희망이 있다. 그러나 그토록 갈구하던 자유를 얻어 세상에 돌아가면 희망 대신 하나의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다리에서 뛰어내리는 것 말고는 세상 속에서 이룰 것이 없다는 진실. 글하여 병원 창가에서 세상을 내다보며 꿈꾸던 희망이 세상 속 진실보다 달콤하고 안전하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p.291~2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