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라클레이토스는 실재는 완전히 드러나는 것도 아니고 완전히은폐되는 것도 아니라는 점을 말하고 있다.(훗날의 ‘parousia‘ 개념을 예기하고 있다) 지금 식으로 말해, 실재는 어떤 기호(sign)로서, 징후로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헤라클레이토스 자신의 언어가 바로 이런 기호들이었다. 헤라클레이토스의 언어는 담론사의 새로운 문턱을 넘어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언어/글쓰기를 가져왔다고 할 수 있다. - P99

어떤 사물의 생성의 매 순간은 그것이 그 존재이자그 존재가 아니게 되는 순간이다. 때문에 매 순간은 모순을 함축한다. 존재이자 비존재라는 모순을 존재와 무는 결코 섞일 수 없다. 서로 절대 모순을 형성한다. 생성은 존재이자 비존재=무이고, 거기에서 존재와 무는 이어지고 있다. 이로부터 생성이란 그 자체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도래한다. 여기에서 존재와 비존재 그리고 생성, 시간, 모순관계, 동일성과 차이, 재인(再=recognition) 같은 개념들이 복잡하게얽히면서 하나의 개념군, 문제군을 형성하고 있다. 우리는 사유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거대한 존재론적 난제(難題)=‘ontological aporia‘에 봉착한 것이다. - P105

조화라는 것은 모든 투쟁이 끝난 조용하고 편안한 상태가 아니다.
우주의 영원한 진리는 투쟁, 갈등, 전쟁이며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근원적하나의 계기들이라는 것, 그런 계기들의 균형을 통해 우주는 조화를 유지한다는 것, 이것이 헤라클레이토스의 통찰이다. - P112

헤라클레이토스 같은 철학자들이 종교에 대해서 비판적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인식론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윤리학적인 것이다. 인식론적으로 볼 때 대부분의 종교가 말하는 내용이 학문적으로증명되기 힘든 것이기 때문이고, 윤리학적으로 볼 때 종교의 담당자들이어리석은 대중을 속여 부와 권력을 누리기 때문이다. 인식론적 비판은대체로 정당하다. 그러나 윤리적 맥락에서는 간단히 일반화하기가 곤란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헐벗은 민중과 함께하는 종교로부터 막강한 권력을 누리는 종교까지 무수한 경우들이 있기 때문이다. - P113

헤라클레이토스의 사유는 동북아의 사유와 몇 가지 친연성(親緣性)을가진다. 이미 언급했듯이, 만물이 흐른다는 생성존재론은 易의 기본 원리인 "生生不息"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또한 이 흐름이 사실상 로고스에 의해 지배된다는 생각 역시 역의 생성이 태극에 의해 지배된다는각과 상통한다. "가장 아름다운 질서는 아무렇게나 쌓인 쓰레기 더미이다" 같은 식의 역설적 사유는 『노자』에서 자주 만날 수 있다. 투쟁이 만물의 아버지라는 생각은 "일음일양지위도(一陰一陽之謂道)"를 비롯한 여러 구절들에서 그 짝을 찾을 수 있다. "죽음은 우리가 깨어난 뒤에 보는것들이고, 자고 있을 때 보는 것들은 잠(삶)이다" 같은 생각은 음양론의구조와 맥이 닿아 있다. 적어도 사유의 골격에 있어 두 전통은 적지 않게 상통한다 할 수 있으리라. 두 사유의 관계를 앞으로 면밀히 검토해볼필요가 있다. 헤라클레이토스가 서구 철학의 ‘주류‘가 되었다면 동서양의 관계는 사뭇 다른 것이 되지 않았을까. - P118

학이 갈마듦을 확인할 수 있다. 비판 위주의 사유는 세계에 대해 스스로적극적인 가설을 내기보다는 기존의 학설들을 비판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인식론이 대표적이다. 철학을 ‘메타적‘ 담론이라고 할 때 이 말의 한가지 의미는 비판적 사유에 있다. 이런 유형의 철학을 전개하는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형이상학에 대해서, 세계에 대한 거창한 사변들에 대해서부정적이다. 반면 종합 위주의 철학은 기존의 작업들을 비판하기보다는스스로가 적극적으로 큰 그림을 그리고자 한다. 인문·사회 • 자연과학을 종합해서 세계와 인간 그리고 역사에 대한 종합적인 이해에 도달하려고 한다. 이것이 ‘메타적‘이라는 말이 가진 또 하나의 의미이다. 칸트가 전자의 예라면, 헤겔은 후자의 예이다. 철학사는 비판철학과 종합철학의 대결의 역사이다. 종합철학자들이 큰 그림을 그려놓으면 비판철학자 - P119

들이 거기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다시 또 다른 인물이 나와 보다 발전된 그림을 그리곤 한다. 철학사는 인식론과 존재론, 비판철학과 형이상학, 메타적 분석과 종합적 사유의 길항(抗) 과정으로 볼 수 있다. - P120

크세노파네스는 퓌타고라스학파와 대조적이다. 퓌타고라스학파가 교조성이 강한 종교 단체였다면, 크세노파네스는 헬라스 전역을 유랑하면서 활동한 비판철학자였다. 종교적 신앙과 비판적 사유는 단적으로 대립한다. 크세노파네스는 헤라클레이토스보다 더 분명한 방식으로 퓌타고라스학파를 비판했다. 크세노파네스의 문화 상대주의와 신화/종교 비판_은 헬라스 문화사의 중요한 한 사건이다. - P123

파르메니데스는, 오로지 논변(argument)을 통해서만 사유할때, 다자와 운동은 인정할 수 없는 것이고 따라서 감각을 통한 그런 경험은 믿을 수 없다고 말한다. 실재는 오로지 ‘영원부동의 일자‘라는 것이다. - P126

파르메니데스의 말을 압축하면,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 이는 단순한 동어반복이 아니다. 있음은 가능하지만 없음은 불가능하다는말이다. 없음은 없다. 즉, 무(無)는 불가능하다. 오직 있음만이, 존재만이가능하다. - P128

결국 완벽하게 연속적이고 균일하며 영원하고 부동인 그런 것이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나 ‘존재‘라는 말은 추상 개념이 아닌가? 존재 개념과 세계, 우주, 자연 개념은 다르다. 하지만 파르메니데스에게서 일자=존재는 곧 세계이다. 퓌타고라스학파에서와 마찬가지로 파르메니데스에게서도 구체적인 것과 추상적인 것의 구분은 희미하다. 때문에 존재는곧 세계로 이해되고 있다. 파르메니데스는 존재가 완벽하게 연속적·균일적 · 영원적 • 부동적이라면, 결국 그것은 완벽하게 둥그런 구(球)가아닐까 생각했다.(따라서 파르메니데스의 세계는 유한하다) 우리에게 ‘구‘와 ‘존재‘라는 두 개념은 범주를 달리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파르니데스에게는 존재=일자=세계=구이다. - P135

그리스 존재론 및 자연철학의 역사는 이렇게 파르메니데스 극복의 역사, 영원부동의 일자가 다자성과 운동으로 화하고 다자들의 관계와 운동이 다양한 방식으로 해명되어간 역사라고 할 수 있다. - P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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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러시아-아메리카 회사의 모피 판매에 가장 좋은 시장으로 보였지만 서유럽과 특히 미국 상인들이 경쟁력에서 우위를 점하고있었다. 미국 상인들은 약 5개월 내에 미국 북서부에서 광둥으로 모피를 운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러시아-아메리카 회사의 모피를 캬흐타까지 운반하는 비용은 턱없이 높았으며 시간도 많이 걸렸다(모피를 알래스카에서 운반해오는 데 보통 2년 이상 걸렸다). 또한 알래스카와 캄차카에 있는 러시아의 전초 기지에 대한 물자 공급이 심각하 - P569

게 부족했기 때문에 외국 경쟁자들은 러시아-아메리카 회사의 전초기지에 물건을 팔고 그에 대한 대금으로 모피를 받아 광둥에 판매하는 식으로 이들 전초 기지의 핵심 기능 자체에 큰 타격을 입힐 수 있었다. 따라서 러시아-아메리카 회사가 성공하려면, 좀더 심하게 표현해, 살아남으려면 유럽과 미국처럼 러시아도 해로를 통한 교역 허가권을 청조에서 얻어내야만 했다. - P570

러시아정부는 예카테리나 2세(1762~1796년 재위)의 통치 때부터 줄곧 ‘카슈가르와 정치적·상업적 관계를 확립하는 데 지속적인 관심을 보였다‘
"고 한다. 그러나 알티샤르는 반란으로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었고청은 러시아의 영향력이 이 지역에서 더이상 확대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러나 1854년 크림 전쟁의 발발은 카슈가르와의 교역 접촉을바라는 러시아의 열망을 한층 더 부추겼다. 왜냐하면 이 전쟁이 영국과 러시아의 적대 관계를 악화시켰기 때문이다. 영국의 해상 교역, 특히차 교역이 성장하는 것을 보면서 러시아는 내지 교역에서 경쟁력의 우위를 점할 수 있기를 한층 더 갈망하게 되었다. 러시아 정부는 영국의 교역이 육로로 인도를 출발해 신장을 거쳐 중국 본토의 심장부로 침투할까 두려워했다. 1854년 러시아는 러시아-청의 접경 지역에위치한 카자흐와 키르기스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중국 변경을 탐사하는 한편 카슈가르로 가는 대상 노선에 주의를 기울였다. - P585

1824년과 1825년 러시아가영국 및 미국과 각각 맺은 조약들의 결과로 러시아는 북아메리카에서더이상의 남부 진출을 포기해야 했다. 이에 따라 러시아 정부는 아무르 강 북쪽의 청 영토에 보다 큰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1832년에디젠스키M. V. Ladyzhenskii 대령이 고르비차Gorbitsa 강 하류의 변경 표지.
치를 정확히 확정짓기 위해 파견되었다. 1840년에 러시아 외무부는베이징 주재 선교단을 통해 청조와 아무르강 문제를 논의하려 했으나 베이징 당국은 네르친스크 조약으로 그 문제는 일단락되었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지린성과 헤이룽장 성 군정 장관들은 만주의 변경 지역에 대한개발에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 청의 정책도 여전히 한족의 이주를 저지하는 쪽을 겨냥하고 있었기 때문에 북만주 지역은 관심 밖의 무방비 지역으로 방치되고 있었다. - P588

청은 특히 만주에서는 만주인이나 몽골인만이 만주 변경 지역의군정장관이 될 수 있다는 규정을 파기하고 1853년에는 한족 기인을지린성 군정장관으로 임명했다. 또한 지린성과 헤이룽장 성의 지방재정을 재편성했다. 이 조치 이전에는 중앙 정부가 지린성 행정비의약 4/5와 헤이룽장 성의 행정비의 거의 전부를 부담했다. 중앙 정부는이런 관행을 계속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호부는 지린성과 헤이룽장성에 대한 행정 보조금을 여러 다른 성에 분담시켰다. 이러한 조치는 책임을 맡은 성들이 종종 의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기 때문에그리 성공적이지는 않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 결과 만주 변경의 각성은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새로운 항목의 세금을 제정하고, 관전과군전을 개척하며 팔기군의 연간 수입을 보충하기 위한 특별 ‘수결지‘를 새로 만드는 등 자체 수입원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 P598

청 제국은 그곳의 가치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또 한족을 중국본토에만 가두어두려는 시대착오적인 정책에 계속 집착함으로써 극동아시아 북부의 넓은 귀중한 영토를 잃게 되었다. 그러나 이는 유익한 교훈이었다. 점점 더 한족 지향적으로 변한 조정은 이 교훈에서 깨달은 바에 따라 제국의 다른 변경 지역에 대한 한족의 이민을 허락했•다. 중국령 내륙아시아의 이후의 역사는 한족의 정주, 한족화 그리고 - P610

전에 비중국적이었던 사회의 보다 큰 중국으로의 통합 등으로 특징지어졌다.
이런 손실을 입기는 했지만 청조가 이룩한 것도 부인해서는 안 될것이다. 내부 반란과 유럽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왕조는 살아남았고청의 질서는 최소한의 변화만을 허용한 채 계속 유지되었다. 청조가처해 있던 상황을 고려해볼 때 청이 이보다 더 많은 일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이라고 기대하기란 매우 어려울 것이다. - P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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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사는 ‘철학‘사이자 철학사‘이다. 철학사는 철학을 다루지만 어디까지나 역사적 지평에서 다루며, 역사에 속하지만 어디까지나 철학의 역사이다. 때문에 철학사의 서술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역사와 철학을 어떠헤 배치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 P13

역사와 철학은 논의 대상의 성격에 따라서 유연하게 달리 배치되어야 하며, 어느 하나의 극으로 기울어질 때 철학사상 고유의 높이를 해치거나 철학을 역사와 괴리시키는 결과가 초래된다. - P15

해양 문명의 발달은 그리스인들로 하여금 전반적으로 강한 모험심을 가지게 해주었고, 농사짓기 어려운 척박한 땅은 무역이 발달하도록 만들었다. 우직하게 땅만 파면 되는 농사와는 달리 장사를 하려면 말을 잘하고 계산이 빨라야 한다. 그래서 말, 계산, 화폐가발달하고 합리적으로 사리를 따지는 문화가 성립했다. 지중해 특유의 부드러운 날씨는 사람들을 집 바깥으로 끌어내었고, 이 때문에 그리스인들은대개 개방적 · 사교적. 외향적인 성품을 보이게 된다. 그리스문명의 이런 특징들은 ‘logos‘라는 말에 단적으로 압축되었다. 때로 하나의 단어가 잘 찍은 사진처럼 한 문명 전체를 드러내 보여주기도 한다. 말, 계산, 비례 등을 뜻하고, 더 고급한 맥락에서는 이성, 추론 등을 뜻하는 ‘로고스‘라는 말만큼 그리스 문명의 성격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말도 없다. - P30

현실 역사와 그에 맞물려 진행된 담론사는 그리스의 역사가 바로 이렇게 정의 개념이 확립되고 실현되는 역사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과정이 그리스 민주정의 핵심을 이룬다. 여성, 노예, 외국인은 배제된 불완전한 민주정이었지만, 다른 지역의 고대사에서는 전혀 볼 수 없었던 이런 민주정의 개화(開花)를 바탕으로 헬라스의 문화가 꽃피게 된다. - P44

허무의 시대를 배경으로 해서 철학이 탄생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 탄생설화가 지중해세계에서의 ‘철학‘이라는 담론의 성격을오랫동안 특징지어왔기 때문이다. 허무하다는 것은 참된 것, 영원한 것, 필연적인 것, 보편적인 것이란 그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뜻한다. 달리 말해, 우리가 삶에서 기댈 수 있는 것, 의지해서 살아갈 수 있는 것, 우리의삶을 근거 지어주는 것, 그런 것(들)은 없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을 절실하게 음미하면서 철학이 탄생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 P46

자연철학의 ‘탄생‘은 밀레토스 지방에서 이루어진 부분적인 ‘인식론적 단절‘을 통해서 가능했다. 흔히 밀레토스의 철학자들은 사물의 ‘질료‘를 찾았다고 한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규정이다. - P57

탈레스가 발견한 세계는 이전의 신화적 세계와는 판이한 세계였다. 그것은 더 이상 제우스가 번개를 던지고 포세이돈이 폭풍우를 일으키는세계가 아니었다. 자연은 자연 자체로서 이해되기 시작했으며, 또 수학적으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탈레스는 신들과 영혼들의 존재를믿었고 세계가 생명으로 가득 차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의 사유는신화와 구분되는 자연과학적 사유를 보여주면서도 동시에 종교적 세계관과 단절되지 않은 세계를 보여주기도 한다. - P67

아낙시만드로스에게서 우리는 거의 완벽하게 탈신화화(脫神話化)된 세계를 만나게 된다. 나아가 추상적 사유, 이론적 사유가 분명하게 나타났음을 감지하게 된다. 또, 지각을 통한 경험보다는 논리를 더 숭상하는, 논리에 굴복하는 태도도 만나게 된다. 요컨대 우리는 아낙시만드로스에게서 최초의 ‘과학적 세계관‘을 만난다고 할 수 있다. 아낙시만드로스는담론사의 핵심적인 한 지도리를 만들었다. - P75

퓌타고라스학파는 추상성을 아직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에게는 수 역시 어떤 사물이었다. (말하자면 남자가 3이고 여자가 4라면 결혼은 7이라는 식으로) 게다가 이들은 수를 신비화했다. 수비학(數學)의 원조인셈이다. 퓌타고라스학파는 특히 10을 ‘완전수‘라고 불렀다. ‘1+2+3+4" - P88

가 정삼각형을 형성한다는 이유에서이다. 여기에서도 대수적 맥락과 기하적 또는 물리적 맥락이 혼동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특정 수에특정한 의미를 부여하는 이런 수비학은 지금까지도 우리의 삶 곳곳에널려 있다.
결국 ①밀레토스학파는 질료를 탐구했고 퓌타고라스학파는 형상을탐구했다고 도식적으로 말하는 것은 일정 정도 수긍할 수 있지만 조심스럽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는 것, ② 퓌타고라스학파의 수론에는 신비주의적인 요소가 깃들어 있고 바로 이 점에서도 이 학파가 과학과 종교를, 합리와 신비를 기묘하게 뒤섞어놓은 학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 P89

철학은 분명 민주주의풍토 위에서 자란다. 그러나 자연철학자들이 전통적인 믿음들을 무너뜨렸을 때 그리스의 대중은 철학자들을 의혹의 눈초리로 바라보았으며, 특히 아테네 몰락의 원인들 중 중요한 한 가지가 (대부분 이방인들이었던) 소피스트들에게 있다는 의혹이 불거졌을 때 철학과 민주주의는알력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자연철학의 경우에는 민주주의가 철학을 못따라왔다고 해야겠지만, 소피스트들의 경우에는 이중적이다. 소피스트들이 한편으로 계몽적/비판적 역할도 수행했지만, 동시에 파괴적인 형태의 허무주의, 회의주의, 상대주의 사조들을 퍼트림으로써 아테네 몰락 - P90

의 한 원인을 제공한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철학과 민주주의의 상생(相生)이 그리스 문명의 영광을 가져온 한 요인이었듯이, 이번에는 철학과 민주주의의 알력이 그리스 문명의 쇠퇴를 가져온 한 요인이 되어버린 것이다. 철학은 늘 이렇게 시대와 복잡하고 미묘한 관계를 맺어왔다. - P91

아페이론은 어떤 x이다. 물로도 불로도 공기로도 흙으로도 아직 규정되지 않은 무규정의, 비한정적인 무엇, 그러나 그 네 가지로 규정될 수있는 후대의 개념을 쓴다면 ‘분화(分化/différenciation)‘ 될 수 있는무엇이다. 이 점에서 아페이론은 곧 ‘페라스(peras)가 없는 것‘, 즉 경계선, 극한(limit), 가름, 한정, 규정이 없는 것이다. 미규정의 (undetermined)무엇이 규정됨으로써 (determined) 일정한 사물이 된다는 것, 이것은 그리스 철학, 나아가 사유 일반의 기초 요소들-철학소(哲學素)들-중 하나이다. - P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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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契丹)의 주군은 나이가 어리어서 나라의 일을 그 어머니에게서 결정하며 한덕양(韓德讓, 941~1011)이 총애를 받아서 가까이 가서 용사(用事, 권력을 쥠)하고 있어서 그 나라 사람들이 이를 괴로워하고 있으니 청컨대 그 틈을 타고서 유·계(幽·?)를 뺏으십시오."
황제는 비로소 속으로 북벌(北伐)할 뜻을 가졌다.
조서를 내려서 친정(親征)을 논의하게 하였는데, 참지정사인 이지(李至, 947~1001)가 말씀을 올렸다.
"유주(幽州, 河北 北部와 遼? 일대)는 거란의 오른쪽 팔인데 왕의 군사가 가서 치게 되면 저들은 반드시 항거할 것입니다. 성을 공격하는 사람은 수만 명 밑으로 가지 않을 것이며 병사는 많고 비용은 많이 들며 형세는 반드시 널리 후량(?糧, 말린 음식으로 군량)을 준비해야 합니다.

조빈 등은 나머지 군사를 거두어 밤중에 거마하(巨馬河)를 건너서 역수(易水)의 남쪽에 영채를 만들었고, 이계선(李繼宣, 950~1013)이 힘껏 거마하에서 싸우자 요의 군사들은 비로소 물러났는데 추가로 도망하여 고산에 도착하였다.

바야흐로 거마하를 건너면서 사람과 가축이 서로 짓밟으니 죽은 사람이 계산할 수 없었다. 지유주행부사(知幽州行府事)인 유보훈(劉保勳, 925~986)의 말이 진흙탕 속에 빠졌고, 그 아들인 유리섭(劉利涉)이 이를 구하려고 하였지만 꺼낼 수가 없어서 드디어 함께 죽었다. 유보훈의 성품은 순수하고 삼갔으며 관리의 업무를 처리하는데 정예여서 일찍이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명령을 받고서 아직 일찍이 피하는 말씀을 드리지 아니 하였고, 동료들을 맞이하면서 아직 일찍이 실의(失意)하지 않게 하였으며 집에 재물을 쌓아서 아직 천금(千金)에 이르지는 않았다."
죽기에 이르자 듣는 사람들이 모두 이를 아파하고 애석해 하였다.

전중승(殿中丞)인 공의(孔宜, 941~986) 역시 거마하에 빠졌다. 나머지 무리들은 고양(高陽, 河北省 保定市 高陽縣)으로 달아나다가 요의 군사에게 충격을 받아서 죽은 사람이 수만 명이었는데 사하(沙河)는 이 때문에 흐르지 않았고, 창과 갑옷을 버린 것이 언덕처럼 되었다. 야율휴격은 송의 군사 시체를 수습하여 경관(京觀)을 만들었다.

"짐이 지난번에 군사를 일으키면서 장수를 선발하였는데, 단지 조빈 등이 웅·패에 주둔하면서 양식을 싸고 갑옷을 갈고 앉아서 군대의 성세(聲勢)를 넓히면서 한 달여 동안에 산의 뒤가 평정되기를 기다렸다가 반미·전중진 등과 군사를 모아서 나아가서 직접 유주(幽州)에 맞닥뜨려 힘을 함께하여 몰고 가서 물리쳐서 옛 강토를 회복하고자 하였던 것이 짐의 뜻이었소.
어찌하여 장수들이 이루어진 계획을 준수하지 않고 각기 소견(所見)으로 달려가서 10만 명의 갑옷 입은 군사를 관장하여 요새를 멀리까지 나가서 다투어 속히 그 군현(郡縣)을 빼앗고자 하였고 또한 군사를 돌리어서 치중(輜重)을 도움 받고자 하여 왕복하면서 수고롭게 하는 폐단이 생겼다가 적이 올라타는 바가 되었소. 이 책임은 주장(主將)에게 있는 것이요.

요주(遼主)가 남경(南京)에 갔다. 정유일(5일)에 요주(遼主)가 백관들을 인솔하고 태후에게 존호(尊號)를 책서(冊書)하여 올려서 예덕신략응운계화승천황태후(睿德神略應運啓化承天皇太后)라고 하니 여러 신하들은 요주의 존호를 올려서 지덕광효소성천보황제(至德廣孝昭聖天輔皇帝)라고 하였다.

예전에는 관부에서 배를 만들고 이미 완성하면 한 척에 세 호구(戶口)를 징조(徵調)하여 이를 지켰는데 황하의 흐름이 여울지고 급하여 그것이 표류(漂流)하여 잃어버리는 것을 대비하면 1년에 부역(負役)하는 백성이 수천 명이었다. 장평은 마침내 연못을 뚫어서 물을 끌어들이고 그 사이에 배를 묶어두니 다시는 백성들을 징조(徵調)하지 않았다.
도적의 우두머리인 양발췌(楊拔萃)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관중(關中)과 삼보(三輔) 사이에서 왕래하며 도적질하자 조정에서는 여러 주(州)의 병사를 파견하여 이를 쳤지만 이기지 못하였는데 장평이 사람을 파견하여 유세하여 그들을 항복시켰다. 업무를 관장하고서 무릇 9년이 되자 관부(官府)의 돈을 아낀 것을 계산하니 80만 민(緡)이었다.
염철사를 맡기에 이르렀는데 겨우 몇 달 만에 섬서전운사(陝西轉運使)인 이안(李安)이 그[장평]가 옛날에 간사한 일을 한 것을 들추어내니 장평은 걱정하고 화를 내다가 병이 되어 죽었다. 황제는 오히려 조회를 하루 동안 열지 아니하고 우천우위상장군을 증직하고 장사 지내는 일을 관부에서 공급하게 하였다.

조서를 내려서 안변책(安邊策, 변방을 안정시키는 대책)을 물으니 전중시어사인 조부(趙孚)가 주문으로 논의하였다. 대략적으로 마땅히 안에서 전비를 잘 닦고 밖으로 기쁘게 결맹하는 것을 허락하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황제는 칭찬하고 이를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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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이는 국가, 거란 - 거란의 통치전략 연구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총서 109
김인희 엮음 / 동북아역사재단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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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거란전쟁> 사극을 계기로 고려 당대의 역사와 관련 인물들이 재조명되었다. 더불어 당시 강력한 힘을 가졌던 거란이라는 국가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되지 않았나 싶다. 사실 이 책을 구입한 것은 한참 되었는데 이제야 펼쳐보게 되었다. 뒤늦게 읽었지만 기대만큼이나 만족스러웠다. 


《요사》는 거란의 전체 역사를 시기별로 세세하게 조명한다면 이 책은 거란이라는 나라와 거란을 구성하는 사람들에 대한 특징을 서술함으로써 거란을 전체적으로 조망하는데 도움을 준다. 더불이 이 책을 읽으면서 송, 고려 등 주변 국가의 역사를 교차하여 읽는다면 통합적인 이해에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거란의 국호 중 한자로 ‘요’라고 표기한 것은 한족들이 위화감을 갖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으로 거란의 국호는 계속 ‘거란’이었다. - P24 


거란의 국호는 요, 대요, 거란 등 여러 개를 사용했다. 그래서 무엇이라고 불러야 하는지 헷갈리기도 한다. 거란이 '요'라는 국호를 사용한 것은 함께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한족과 충돌하지 않기 위한 자구책이었다. 그래서 거란인은 개국 초부터 끝까지 거란이라는 국호를 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거란 성립 초기 석경당이 유주를 거란에 바친 사건은 중국 역사에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다. 베이징이 북방 민족의 손에 들어가게 됨에 따라 만리장성은 더 이상 병풍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후 중국 역사는 북방 민족과 중원의 대립에서 북방 민족의 우세로 기울기 시작했다.(P59) 태종은 938년 당의 유주성을 중수하여 남경성을 건립하고 유주를 남경으로 승격시켰다. 유주는 지금의 베이징으로 중원이 북방 민족을 만나는 경계 지점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거란국의 고유성과 문화는 어떤 것이 있을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있었다면 나는 장례 풍경과 거란인의 외모, 황제의 '날발'이 있었다.


거란 황제는 1년 중 어느 도성에도 상주하지 않고 대신들과 호위병들과 함께 계절에 따라 움직였는데 이것이 '날발'이다. 중원의 황제가 황궁에서 고정적으로 업무를 보며 생활하던 방식과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황제는 날발 기간에 중요한 국가 대사를 논하며 결정했다. 특히 춘날발(봄에 진행하는 날발)을 중요하게 챙겼다고 한다. 날발은 거란의 고유 습속이자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는 가장 중요한 통치 방식 중 하나였다고 할 수 있겠다. 


또 거란은 장례식에서 굿을 할 때 얼굴에 구슬을 늘어뜨리고 금속 가면을 씌우며 망자의 영혼을 달래고 귀신들로부터 보호하였다. 


거란 이전에도 중국에는 흉노, 돌궐, 위구르, 북위 등 다양한 민족이 거쳐갔지만 거란은 이전 국가와 다르게 '자신의 근본을 초원에 두고 전통과 정통성을 지키려 노력하였다. 그러나 백성의 2/3을 차지하는 한족문화도 부정하지 않았다. 거란 사회는 유목과 농경 그 사이 어디쯤에서 길을 모색한(P90)' 최초의 국가였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 거란은 거란족 뿐 아니라 한족, 발해인 등 다양한 민족들로 구성되었는데 이전 국가의 통치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의 통치를 도모하려했기 때문에 약 200 년의 시기를 이어갈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거란은 본래 ‘인속이치’ 방침으로 ‘나라의 제도로 거란을 통치하고, 한인의 제도로 한인을 대한다’는 ‘북면관’과 ‘남면관’을 두는 이원적인 통치 방식을 채택하였다(P182). 그러나 거란 중기 이후에는 한족과의 교류가 늘면서 유학을 통치 이념으로 받아들였고 한족 문화를 많이 흡수하는 방향으로 변화한다. 


북방 유목민족 가운데 첫 번째로 중원 유가문화를 접수한 거란은 유가문화가 확산되는 데 큰 공헌을 한 셈이다. 서하 등 이웃 나라에서도 이를 모방하였고, 모두 한족문화를 학습하였다. 거란은 말 위에서 천하를 얻은 다음 문으로 다스리는 문치 사상을 확립하였으며, 이는 사회 발전의 수요에 상당히 부합하였다고 볼 수 있다(P247). 그러나 거란이 유학을 통치에 이용한 것은 자신들이 이미 예법을 갖추었으므로 중화와 대등한 관계에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유학과 중화라는 개념을 자신들보다 상위로 보거나 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는 역사를 정주의 역사의 기준에서 바라보려고 하는 나의 인식을 개선하는 데도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다음으로 살펴볼 부분은 거란과 주변국의 외교, 군사적 관계이다. 


10세기 말 거란은 송과 여전히 충돌하고 있었고, 고려와는 교류가 거의 끊어졌으며, 만주와 초원의 여진과 여러 부족들을 완전히 제압하지 못했고, 대하와도 원만하지 못하였다. 거란은 송과 1004년 전연의 맹약을 맺음으로써 비로소 둘 간의 국경을 획정하고 연운 16주의 땅을 얻는다. 송은 연운 16주 이남의 땅을 확보하였지만 거란에 세폐를 내주어야 했고, 반대로 거란은 연운 16주 이남의 땅을 포기하는 대신 세폐를 받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고려와는 총 3차에 걸친 전쟁을 치루면서 많은 피해를 낳았다. 


그러나 이후 40여 년간 다원적 국제질서의 맹약체제를 구축하면서 1020년대 이후부터 12세기 초까지 1세기 동안 전쟁을 피하고 평화를 누렸다. 거란은 한족 중심의 조공체제와 천하관의 명분에 얽매이지 않고 송, 대하, 고려 등 이웃 국가들과 공존을 추구하였다(P129). 


얼마 전 종영한 <역사저널 그날> TV 프로그램에서 거란어에 대해서 다룬 적이 있다. 거란어를 연구하시는 분께서 직접 출연하셔서 거란 문자가 어떤 식으로 구성되는지, 거란어와 몽골어가 얼마나 다른지 비교해주었던 기억이 난다. 참고로 <고려거란전쟁>에서는 사정상 거란어가 아닌 몽골어를 사용하고 있다고 했다. 거란어와 몽골어는 비슷할 것 같았지만 문자도 다르고 발음도 달랐다. 동호계의 하나인 선비어를 이은 거란어는 사어로 현재 사용되지 않는다. 거란어는 알타이어족 언어에 속하며, 지금도 사용되고 있는 몽골어의 조상어로 추정된다(P140). 

거란어는 현재 거의 사용되지 않고 있어 비석의 탁본 등에 남아 있는 것으로 연구가 진행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거란의 문자는 왜 현재까지 살아남지 못했을까. 거란 대자의 경우 글자 수가 3,000여 자나 되고, 한자의 소리와 뜻 두 가지를 모두 활용하여 사용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거란 소자의 경우도 원자가 450여 자나 되어 널리 사용하는 데 제약이 많았다. 결국 두 종류의 거란 문자는 제정할 때부터 여러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비록 거란 문자가 대중화에는 실패하였으나 이웃한 여러 민족의 문자 창제에 영향을 끼쳤다. 특히 1036년경 서하가 서하 문자를 만드는 데 영향을 미쳤으며, 금의 문자 정책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금은 1119년 거란 대자를 본받아 여진 문자를 만들었으며, 이후 여진 소자도 제정하였다(P170). 


이 책은 거란의 정치 체계와 문화, 외교, 사회적 모습을 핵심을 담고 있다. 비교적 대중적으로 쓰여져서 일반인이 접근하기에도 좋을 것 같다. 


다민족 제국 거란은 필요에 따라 한족 제도와 전통문화를 부분적으로 활용하기도 했지만 거란과 한족의 전통 사이에는 긴장과 충돌이 존재하였다. 거란 제국은 정치 제도 사회 문화 등 모든 면에서 일원적 체제였던 한족 왕조 송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정복왕조 거란은 지배자로서의 지위와 특권을 보장하고자 본래의 유목민족적 사회조직과 언어 전통 문화 종교에서 차별되는 이원적 체제를 시종일관 유지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거란은 자신의 민족성을 잃지 않은 상태에서 한족과 한족 지역을 효과적으로 통치하여 최초의 정복 왕조가 될 수 있었다. 거란이 연 정복왕조의 문을 통해 이후 금 원 청은 중원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더욱 세차게 내딛을 수 있었다. - P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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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4-03-11 21: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사책은 거리의 화가님 서재에서 검색해야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