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직이는 국가, 거란 - 거란의 통치전략 연구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총서 109
김인희 엮음 / 동북아역사재단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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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거란전쟁> 사극을 계기로 고려 당대의 역사와 관련 인물들이 재조명되었다. 더불어 당시 강력한 힘을 가졌던 거란이라는 국가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되지 않았나 싶다. 사실 이 책을 구입한 것은 한참 되었는데 이제야 펼쳐보게 되었다. 뒤늦게 읽었지만 기대만큼이나 만족스러웠다. 


《요사》는 거란의 전체 역사를 시기별로 세세하게 조명한다면 이 책은 거란이라는 나라와 거란을 구성하는 사람들에 대한 특징을 서술함으로써 거란을 전체적으로 조망하는데 도움을 준다. 더불이 이 책을 읽으면서 송, 고려 등 주변 국가의 역사를 교차하여 읽는다면 통합적인 이해에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거란의 국호 중 한자로 ‘요’라고 표기한 것은 한족들이 위화감을 갖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으로 거란의 국호는 계속 ‘거란’이었다. - P24 


거란의 국호는 요, 대요, 거란 등 여러 개를 사용했다. 그래서 무엇이라고 불러야 하는지 헷갈리기도 한다. 거란이 '요'라는 국호를 사용한 것은 함께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한족과 충돌하지 않기 위한 자구책이었다. 그래서 거란인은 개국 초부터 끝까지 거란이라는 국호를 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거란 성립 초기 석경당이 유주를 거란에 바친 사건은 중국 역사에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다. 베이징이 북방 민족의 손에 들어가게 됨에 따라 만리장성은 더 이상 병풍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후 중국 역사는 북방 민족과 중원의 대립에서 북방 민족의 우세로 기울기 시작했다.(P59) 태종은 938년 당의 유주성을 중수하여 남경성을 건립하고 유주를 남경으로 승격시켰다. 유주는 지금의 베이징으로 중원이 북방 민족을 만나는 경계 지점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거란국의 고유성과 문화는 어떤 것이 있을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있었다면 나는 장례 풍경과 거란인의 외모, 황제의 '날발'이 있었다.


거란 황제는 1년 중 어느 도성에도 상주하지 않고 대신들과 호위병들과 함께 계절에 따라 움직였는데 이것이 '날발'이다. 중원의 황제가 황궁에서 고정적으로 업무를 보며 생활하던 방식과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황제는 날발 기간에 중요한 국가 대사를 논하며 결정했다. 특히 춘날발(봄에 진행하는 날발)을 중요하게 챙겼다고 한다. 날발은 거란의 고유 습속이자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는 가장 중요한 통치 방식 중 하나였다고 할 수 있겠다. 


또 거란은 장례식에서 굿을 할 때 얼굴에 구슬을 늘어뜨리고 금속 가면을 씌우며 망자의 영혼을 달래고 귀신들로부터 보호하였다. 


거란 이전에도 중국에는 흉노, 돌궐, 위구르, 북위 등 다양한 민족이 거쳐갔지만 거란은 이전 국가와 다르게 '자신의 근본을 초원에 두고 전통과 정통성을 지키려 노력하였다. 그러나 백성의 2/3을 차지하는 한족문화도 부정하지 않았다. 거란 사회는 유목과 농경 그 사이 어디쯤에서 길을 모색한(P90)' 최초의 국가였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 거란은 거란족 뿐 아니라 한족, 발해인 등 다양한 민족들로 구성되었는데 이전 국가의 통치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의 통치를 도모하려했기 때문에 약 200 년의 시기를 이어갈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거란은 본래 ‘인속이치’ 방침으로 ‘나라의 제도로 거란을 통치하고, 한인의 제도로 한인을 대한다’는 ‘북면관’과 ‘남면관’을 두는 이원적인 통치 방식을 채택하였다(P182). 그러나 거란 중기 이후에는 한족과의 교류가 늘면서 유학을 통치 이념으로 받아들였고 한족 문화를 많이 흡수하는 방향으로 변화한다. 


북방 유목민족 가운데 첫 번째로 중원 유가문화를 접수한 거란은 유가문화가 확산되는 데 큰 공헌을 한 셈이다. 서하 등 이웃 나라에서도 이를 모방하였고, 모두 한족문화를 학습하였다. 거란은 말 위에서 천하를 얻은 다음 문으로 다스리는 문치 사상을 확립하였으며, 이는 사회 발전의 수요에 상당히 부합하였다고 볼 수 있다(P247). 그러나 거란이 유학을 통치에 이용한 것은 자신들이 이미 예법을 갖추었으므로 중화와 대등한 관계에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유학과 중화라는 개념을 자신들보다 상위로 보거나 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는 역사를 정주의 역사의 기준에서 바라보려고 하는 나의 인식을 개선하는 데도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다음으로 살펴볼 부분은 거란과 주변국의 외교, 군사적 관계이다. 


10세기 말 거란은 송과 여전히 충돌하고 있었고, 고려와는 교류가 거의 끊어졌으며, 만주와 초원의 여진과 여러 부족들을 완전히 제압하지 못했고, 대하와도 원만하지 못하였다. 거란은 송과 1004년 전연의 맹약을 맺음으로써 비로소 둘 간의 국경을 획정하고 연운 16주의 땅을 얻는다. 송은 연운 16주 이남의 땅을 확보하였지만 거란에 세폐를 내주어야 했고, 반대로 거란은 연운 16주 이남의 땅을 포기하는 대신 세폐를 받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고려와는 총 3차에 걸친 전쟁을 치루면서 많은 피해를 낳았다. 


그러나 이후 40여 년간 다원적 국제질서의 맹약체제를 구축하면서 1020년대 이후부터 12세기 초까지 1세기 동안 전쟁을 피하고 평화를 누렸다. 거란은 한족 중심의 조공체제와 천하관의 명분에 얽매이지 않고 송, 대하, 고려 등 이웃 국가들과 공존을 추구하였다(P129). 


얼마 전 종영한 <역사저널 그날> TV 프로그램에서 거란어에 대해서 다룬 적이 있다. 거란어를 연구하시는 분께서 직접 출연하셔서 거란 문자가 어떤 식으로 구성되는지, 거란어와 몽골어가 얼마나 다른지 비교해주었던 기억이 난다. 참고로 <고려거란전쟁>에서는 사정상 거란어가 아닌 몽골어를 사용하고 있다고 했다. 거란어와 몽골어는 비슷할 것 같았지만 문자도 다르고 발음도 달랐다. 동호계의 하나인 선비어를 이은 거란어는 사어로 현재 사용되지 않는다. 거란어는 알타이어족 언어에 속하며, 지금도 사용되고 있는 몽골어의 조상어로 추정된다(P140). 

거란어는 현재 거의 사용되지 않고 있어 비석의 탁본 등에 남아 있는 것으로 연구가 진행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거란의 문자는 왜 현재까지 살아남지 못했을까. 거란 대자의 경우 글자 수가 3,000여 자나 되고, 한자의 소리와 뜻 두 가지를 모두 활용하여 사용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거란 소자의 경우도 원자가 450여 자나 되어 널리 사용하는 데 제약이 많았다. 결국 두 종류의 거란 문자는 제정할 때부터 여러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비록 거란 문자가 대중화에는 실패하였으나 이웃한 여러 민족의 문자 창제에 영향을 끼쳤다. 특히 1036년경 서하가 서하 문자를 만드는 데 영향을 미쳤으며, 금의 문자 정책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금은 1119년 거란 대자를 본받아 여진 문자를 만들었으며, 이후 여진 소자도 제정하였다(P170). 


이 책은 거란의 정치 체계와 문화, 외교, 사회적 모습을 핵심을 담고 있다. 비교적 대중적으로 쓰여져서 일반인이 접근하기에도 좋을 것 같다. 


다민족 제국 거란은 필요에 따라 한족 제도와 전통문화를 부분적으로 활용하기도 했지만 거란과 한족의 전통 사이에는 긴장과 충돌이 존재하였다. 거란 제국은 정치 제도 사회 문화 등 모든 면에서 일원적 체제였던 한족 왕조 송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정복왕조 거란은 지배자로서의 지위와 특권을 보장하고자 본래의 유목민족적 사회조직과 언어 전통 문화 종교에서 차별되는 이원적 체제를 시종일관 유지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거란은 자신의 민족성을 잃지 않은 상태에서 한족과 한족 지역을 효과적으로 통치하여 최초의 정복 왕조가 될 수 있었다. 거란이 연 정복왕조의 문을 통해 이후 금 원 청은 중원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더욱 세차게 내딛을 수 있었다. - P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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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4-03-11 21: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사책은 거리의 화가님 서재에서 검색해야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