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라클레이토스는 실재는 완전히 드러나는 것도 아니고 완전히은폐되는 것도 아니라는 점을 말하고 있다.(훗날의 ‘parousia‘ 개념을 예기하고 있다) 지금 식으로 말해, 실재는 어떤 기호(sign)로서, 징후로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헤라클레이토스 자신의 언어가 바로 이런 기호들이었다. 헤라클레이토스의 언어는 담론사의 새로운 문턱을 넘어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언어/글쓰기를 가져왔다고 할 수 있다. - P99

어떤 사물의 생성의 매 순간은 그것이 그 존재이자그 존재가 아니게 되는 순간이다. 때문에 매 순간은 모순을 함축한다. 존재이자 비존재라는 모순을 존재와 무는 결코 섞일 수 없다. 서로 절대 모순을 형성한다. 생성은 존재이자 비존재=무이고, 거기에서 존재와 무는 이어지고 있다. 이로부터 생성이란 그 자체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도래한다. 여기에서 존재와 비존재 그리고 생성, 시간, 모순관계, 동일성과 차이, 재인(再=recognition) 같은 개념들이 복잡하게얽히면서 하나의 개념군, 문제군을 형성하고 있다. 우리는 사유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거대한 존재론적 난제(難題)=‘ontological aporia‘에 봉착한 것이다. - P105

조화라는 것은 모든 투쟁이 끝난 조용하고 편안한 상태가 아니다.
우주의 영원한 진리는 투쟁, 갈등, 전쟁이며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근원적하나의 계기들이라는 것, 그런 계기들의 균형을 통해 우주는 조화를 유지한다는 것, 이것이 헤라클레이토스의 통찰이다. - P112

헤라클레이토스 같은 철학자들이 종교에 대해서 비판적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인식론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윤리학적인 것이다. 인식론적으로 볼 때 대부분의 종교가 말하는 내용이 학문적으로증명되기 힘든 것이기 때문이고, 윤리학적으로 볼 때 종교의 담당자들이어리석은 대중을 속여 부와 권력을 누리기 때문이다. 인식론적 비판은대체로 정당하다. 그러나 윤리적 맥락에서는 간단히 일반화하기가 곤란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헐벗은 민중과 함께하는 종교로부터 막강한 권력을 누리는 종교까지 무수한 경우들이 있기 때문이다. - P113

헤라클레이토스의 사유는 동북아의 사유와 몇 가지 친연성(親緣性)을가진다. 이미 언급했듯이, 만물이 흐른다는 생성존재론은 易의 기본 원리인 "生生不息"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또한 이 흐름이 사실상 로고스에 의해 지배된다는 생각 역시 역의 생성이 태극에 의해 지배된다는각과 상통한다. "가장 아름다운 질서는 아무렇게나 쌓인 쓰레기 더미이다" 같은 식의 역설적 사유는 『노자』에서 자주 만날 수 있다. 투쟁이 만물의 아버지라는 생각은 "일음일양지위도(一陰一陽之謂道)"를 비롯한 여러 구절들에서 그 짝을 찾을 수 있다. "죽음은 우리가 깨어난 뒤에 보는것들이고, 자고 있을 때 보는 것들은 잠(삶)이다" 같은 생각은 음양론의구조와 맥이 닿아 있다. 적어도 사유의 골격에 있어 두 전통은 적지 않게 상통한다 할 수 있으리라. 두 사유의 관계를 앞으로 면밀히 검토해볼필요가 있다. 헤라클레이토스가 서구 철학의 ‘주류‘가 되었다면 동서양의 관계는 사뭇 다른 것이 되지 않았을까. - P118

학이 갈마듦을 확인할 수 있다. 비판 위주의 사유는 세계에 대해 스스로적극적인 가설을 내기보다는 기존의 학설들을 비판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인식론이 대표적이다. 철학을 ‘메타적‘ 담론이라고 할 때 이 말의 한가지 의미는 비판적 사유에 있다. 이런 유형의 철학을 전개하는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형이상학에 대해서, 세계에 대한 거창한 사변들에 대해서부정적이다. 반면 종합 위주의 철학은 기존의 작업들을 비판하기보다는스스로가 적극적으로 큰 그림을 그리고자 한다. 인문·사회 • 자연과학을 종합해서 세계와 인간 그리고 역사에 대한 종합적인 이해에 도달하려고 한다. 이것이 ‘메타적‘이라는 말이 가진 또 하나의 의미이다. 칸트가 전자의 예라면, 헤겔은 후자의 예이다. 철학사는 비판철학과 종합철학의 대결의 역사이다. 종합철학자들이 큰 그림을 그려놓으면 비판철학자 - P119

들이 거기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다시 또 다른 인물이 나와 보다 발전된 그림을 그리곤 한다. 철학사는 인식론과 존재론, 비판철학과 형이상학, 메타적 분석과 종합적 사유의 길항(抗) 과정으로 볼 수 있다. - P120

크세노파네스는 퓌타고라스학파와 대조적이다. 퓌타고라스학파가 교조성이 강한 종교 단체였다면, 크세노파네스는 헬라스 전역을 유랑하면서 활동한 비판철학자였다. 종교적 신앙과 비판적 사유는 단적으로 대립한다. 크세노파네스는 헤라클레이토스보다 더 분명한 방식으로 퓌타고라스학파를 비판했다. 크세노파네스의 문화 상대주의와 신화/종교 비판_은 헬라스 문화사의 중요한 한 사건이다. - P123

파르메니데스는, 오로지 논변(argument)을 통해서만 사유할때, 다자와 운동은 인정할 수 없는 것이고 따라서 감각을 통한 그런 경험은 믿을 수 없다고 말한다. 실재는 오로지 ‘영원부동의 일자‘라는 것이다. - P126

파르메니데스의 말을 압축하면,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 이는 단순한 동어반복이 아니다. 있음은 가능하지만 없음은 불가능하다는말이다. 없음은 없다. 즉, 무(無)는 불가능하다. 오직 있음만이, 존재만이가능하다. - P128

결국 완벽하게 연속적이고 균일하며 영원하고 부동인 그런 것이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나 ‘존재‘라는 말은 추상 개념이 아닌가? 존재 개념과 세계, 우주, 자연 개념은 다르다. 하지만 파르메니데스에게서 일자=존재는 곧 세계이다. 퓌타고라스학파에서와 마찬가지로 파르메니데스에게서도 구체적인 것과 추상적인 것의 구분은 희미하다. 때문에 존재는곧 세계로 이해되고 있다. 파르메니데스는 존재가 완벽하게 연속적·균일적 · 영원적 • 부동적이라면, 결국 그것은 완벽하게 둥그런 구(球)가아닐까 생각했다.(따라서 파르메니데스의 세계는 유한하다) 우리에게 ‘구‘와 ‘존재‘라는 두 개념은 범주를 달리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파르니데스에게는 존재=일자=세계=구이다. - P135

그리스 존재론 및 자연철학의 역사는 이렇게 파르메니데스 극복의 역사, 영원부동의 일자가 다자성과 운동으로 화하고 다자들의 관계와 운동이 다양한 방식으로 해명되어간 역사라고 할 수 있다. - P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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