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사는 ‘철학‘사이자 철학사‘이다. 철학사는 철학을 다루지만 어디까지나 역사적 지평에서 다루며, 역사에 속하지만 어디까지나 철학의 역사이다. 때문에 철학사의 서술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역사와 철학을 어떠헤 배치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 P13

역사와 철학은 논의 대상의 성격에 따라서 유연하게 달리 배치되어야 하며, 어느 하나의 극으로 기울어질 때 철학사상 고유의 높이를 해치거나 철학을 역사와 괴리시키는 결과가 초래된다. - P15

해양 문명의 발달은 그리스인들로 하여금 전반적으로 강한 모험심을 가지게 해주었고, 농사짓기 어려운 척박한 땅은 무역이 발달하도록 만들었다. 우직하게 땅만 파면 되는 농사와는 달리 장사를 하려면 말을 잘하고 계산이 빨라야 한다. 그래서 말, 계산, 화폐가발달하고 합리적으로 사리를 따지는 문화가 성립했다. 지중해 특유의 부드러운 날씨는 사람들을 집 바깥으로 끌어내었고, 이 때문에 그리스인들은대개 개방적 · 사교적. 외향적인 성품을 보이게 된다. 그리스문명의 이런 특징들은 ‘logos‘라는 말에 단적으로 압축되었다. 때로 하나의 단어가 잘 찍은 사진처럼 한 문명 전체를 드러내 보여주기도 한다. 말, 계산, 비례 등을 뜻하고, 더 고급한 맥락에서는 이성, 추론 등을 뜻하는 ‘로고스‘라는 말만큼 그리스 문명의 성격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말도 없다. - P30

현실 역사와 그에 맞물려 진행된 담론사는 그리스의 역사가 바로 이렇게 정의 개념이 확립되고 실현되는 역사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과정이 그리스 민주정의 핵심을 이룬다. 여성, 노예, 외국인은 배제된 불완전한 민주정이었지만, 다른 지역의 고대사에서는 전혀 볼 수 없었던 이런 민주정의 개화(開花)를 바탕으로 헬라스의 문화가 꽃피게 된다. - P44

허무의 시대를 배경으로 해서 철학이 탄생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 탄생설화가 지중해세계에서의 ‘철학‘이라는 담론의 성격을오랫동안 특징지어왔기 때문이다. 허무하다는 것은 참된 것, 영원한 것, 필연적인 것, 보편적인 것이란 그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뜻한다. 달리 말해, 우리가 삶에서 기댈 수 있는 것, 의지해서 살아갈 수 있는 것, 우리의삶을 근거 지어주는 것, 그런 것(들)은 없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을 절실하게 음미하면서 철학이 탄생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 P46

자연철학의 ‘탄생‘은 밀레토스 지방에서 이루어진 부분적인 ‘인식론적 단절‘을 통해서 가능했다. 흔히 밀레토스의 철학자들은 사물의 ‘질료‘를 찾았다고 한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규정이다. - P57

탈레스가 발견한 세계는 이전의 신화적 세계와는 판이한 세계였다. 그것은 더 이상 제우스가 번개를 던지고 포세이돈이 폭풍우를 일으키는세계가 아니었다. 자연은 자연 자체로서 이해되기 시작했으며, 또 수학적으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탈레스는 신들과 영혼들의 존재를믿었고 세계가 생명으로 가득 차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의 사유는신화와 구분되는 자연과학적 사유를 보여주면서도 동시에 종교적 세계관과 단절되지 않은 세계를 보여주기도 한다. - P67

아낙시만드로스에게서 우리는 거의 완벽하게 탈신화화(脫神話化)된 세계를 만나게 된다. 나아가 추상적 사유, 이론적 사유가 분명하게 나타났음을 감지하게 된다. 또, 지각을 통한 경험보다는 논리를 더 숭상하는, 논리에 굴복하는 태도도 만나게 된다. 요컨대 우리는 아낙시만드로스에게서 최초의 ‘과학적 세계관‘을 만난다고 할 수 있다. 아낙시만드로스는담론사의 핵심적인 한 지도리를 만들었다. - P75

퓌타고라스학파는 추상성을 아직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에게는 수 역시 어떤 사물이었다. (말하자면 남자가 3이고 여자가 4라면 결혼은 7이라는 식으로) 게다가 이들은 수를 신비화했다. 수비학(數學)의 원조인셈이다. 퓌타고라스학파는 특히 10을 ‘완전수‘라고 불렀다. ‘1+2+3+4" - P88

가 정삼각형을 형성한다는 이유에서이다. 여기에서도 대수적 맥락과 기하적 또는 물리적 맥락이 혼동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특정 수에특정한 의미를 부여하는 이런 수비학은 지금까지도 우리의 삶 곳곳에널려 있다.
결국 ①밀레토스학파는 질료를 탐구했고 퓌타고라스학파는 형상을탐구했다고 도식적으로 말하는 것은 일정 정도 수긍할 수 있지만 조심스럽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는 것, ② 퓌타고라스학파의 수론에는 신비주의적인 요소가 깃들어 있고 바로 이 점에서도 이 학파가 과학과 종교를, 합리와 신비를 기묘하게 뒤섞어놓은 학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 P89

철학은 분명 민주주의풍토 위에서 자란다. 그러나 자연철학자들이 전통적인 믿음들을 무너뜨렸을 때 그리스의 대중은 철학자들을 의혹의 눈초리로 바라보았으며, 특히 아테네 몰락의 원인들 중 중요한 한 가지가 (대부분 이방인들이었던) 소피스트들에게 있다는 의혹이 불거졌을 때 철학과 민주주의는알력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자연철학의 경우에는 민주주의가 철학을 못따라왔다고 해야겠지만, 소피스트들의 경우에는 이중적이다. 소피스트들이 한편으로 계몽적/비판적 역할도 수행했지만, 동시에 파괴적인 형태의 허무주의, 회의주의, 상대주의 사조들을 퍼트림으로써 아테네 몰락 - P90

의 한 원인을 제공한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철학과 민주주의의 상생(相生)이 그리스 문명의 영광을 가져온 한 요인이었듯이, 이번에는 철학과 민주주의의 알력이 그리스 문명의 쇠퇴를 가져온 한 요인이 되어버린 것이다. 철학은 늘 이렇게 시대와 복잡하고 미묘한 관계를 맺어왔다. - P91

아페이론은 어떤 x이다. 물로도 불로도 공기로도 흙으로도 아직 규정되지 않은 무규정의, 비한정적인 무엇, 그러나 그 네 가지로 규정될 수있는 후대의 개념을 쓴다면 ‘분화(分化/différenciation)‘ 될 수 있는무엇이다. 이 점에서 아페이론은 곧 ‘페라스(peras)가 없는 것‘, 즉 경계선, 극한(limit), 가름, 한정, 규정이 없는 것이다. 미규정의 (undetermined)무엇이 규정됨으로써 (determined) 일정한 사물이 된다는 것, 이것은 그리스 철학, 나아가 사유 일반의 기초 요소들-철학소(哲學素)들-중 하나이다. - P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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