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쓰자면 맞춤법
박태하 지음 / 엑스북스(xbooks)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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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호기롭게 읽어 나가다도 두통과 고통을 비롯한 어지러움을 유발하는 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복해서 읽다 보면 건지는 것이 있지 않을까 싶은 책이기도 하다. 


1장은 띄어쓰기, 2장은 한글 맞춤법, 3장은 외래어 규칙이 실려 있다. 개인적으로 띄어쓰기에 대한 공포가 커서 2장, 3장을 차례로 읽고 1장을 최후에 읽었다. 


저자는 띄어쓰기는 어느 정도 요령이 있다고 하는데 나는 선뜻 동의하기 어려웠다. 결국 기본적인 규칙은 외우고(기본적으로 다 뗀다) 나머지는 필요할 때 사전을 찾아보는 것이 맞지 않나 싶다. 하지만 그것도 다 적용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문제다. 때문에 문장에서 그 단어가 어떤 품사로 쓰이는지를 눈여겨 보아야 한다. 


“뭐는 붙이고 뭐는 뗀다” 식으로 구분해서 생각하기보다는 “띄어 쓸 수 있는 건 다 띄어 쓴다”라고 생각하는 쪽이 실제로 적용하기 편하거든요. 모든 단어는 띄어 쓴다는 큰 틀하에서 붙여서밖에 쓸 수 없는 조사, 접사, 어미 등을 익혀 두는 거죠. 즉, ‘띄어 쓴다’를 초기값(디폴트)으로 사고 회로를 바꾸는 겁니다. - P99


대부분의 틀린 맞춤법들은 “소리 나는 대로”, 하지만 “어법에 맞지 않게” 쓰는 데서 기인합니다. 게다가 우리가 발음을 항상 정확히 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 ‘소리’라는 것도 제멋대로이기 일쑤죠. 일단은 평소에 발음을 똑바로 하는 버릇이 중요하겠습니다. - P141


평소 내가 잘못 쓰고 있는 맞춤법이 뭐가 있는지 세어 나가다가 너무 많아서 중간에 적는 것을 포기했다. 

시답잖다(시덥잖다 X)

욱여넣다(우겨넣다 X)

해쓱하다(헬쓱하다 X)

예스럽다(옛스럽다 X)

퀴퀴하다(퀘퀘하다 X)

구시렁대다/구시렁거리다(궁시렁거리다 X)

면발이/몸무게가 붇다(불다 X)

흐리멍덩하다(흐리멍텅하다 X)

양말을 빪(빰 X)

그러고 나서/그러는(그리고 나서 X)

염치 불고(염치 불구 X)


학습서나 번역서 등을 많이 보면 이중 피동을 사용하는 것에 쉽게 노출된다. 평소 이중 피동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절감하게 되었는데 이 습관만 줄여도 문장이 조금은 나아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부록에는 보조용언(본용언을 보충해주는 역할)과 합성어들, 외래어 표기, 외국 인명과 지명을 실려 있다. 이 책이 눈 앞에 있다면 활용할 수 있겠지만 결국 언제든 찾아볼 수 있는 온라인 사전을 활용해야 하지 않겠는가. 애매할 때는 무조건 검색하기, 단 ‘기본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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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오 2024-02-13 02: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화가님 엄청 빨리 읽으셨네요?! 두통과 고통 매우 공감합니다!! ㅋㅋㅋㅋㅋㅋㅋ 결론은 저도 “사전”이었지만 큰 틀에서 규칙을 알게된 데 의의가 있었던 것 같아요! ㅋㅋㅋㅋ 자주 틀리는 맞춤법도 눈에 익혀둘 수 있었고요(지금 또 많이 까먹은 것 같지만....). 고생하셨습니다 화가님! 완독 축하드려요 😍

거리의화가 2024-02-13 08:59   좋아요 2 | URL
오래 붙잡고 있을수록 힘들 듯하여ㅎㅎ 마음 단단히 먹고 들어갔지만 역시 갈수록 피로감이 몰려들더라구요. 두달 정도만에 본 것 같은데 기억에서 사라진 것들이 많았습니다. 평소 제가 쓰는 잘못된 맞춤법도 다시 한번 체크해보는 시간을 가졌네요. 띄어쓰기 연습 문제 꽤나 틀려서 또 한번 충격이!ㅋㅋ 은오 님 덕분에 잘 읽었습니다. 감사해요^^

자목련 2024-02-14 15: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다 읽으면 왠지 든든한 기분이 들 것 같아요. 포털 검색이나 사전이 아니라 이 책을 찾아 맞춤법을 확인할 것 같기도 하고요^^

거리의화가 2024-02-15 09:04   좋아요 0 | URL
이 책이 옆에 있다면 바로 찾아볼 수 있겠죠. 든든하다는 말에 공감해요ㅎㅎ

자목련 2024-02-15 11:56   좋아요 1 | URL
그러니 책을 읽은 은오 님과 화가 님은 정말 대단하지요!!
 
칸의 후예들 라시드 앗 딘의 집사 3
라시드 앗 딘 지음, 김호동 옮김 / 사계절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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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역사 집사 시리즈 3권을 읽었다. 한반도와 관련한 몽골의 역사는 사실상 집사 2, 3권에 집중되어 있다.

나는 한반도와 관련된 역사를 읽는데 목적이 있어서 이번 3권으로 시리즈 읽기는 일단락짓고 이후 중국사 읽기로 넘어가려고 생각했다. 집사 남은 시리즈는 나중에 필요할 때 읽어봐도 될 것이기 때문이다.

3권의 핵심 주제는 칭기스칸 이후의 역사다. 구체적으로는 우구데이, 구육, 뭉케, 쿠빌라이, 티무르의 다섯 명의 대칸과 주치, 차가타이, 톨루이로 대칸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지만 중요한 역할을 한 3명의 제왕들의 역사를 담고 있다.

칭기스칸은 능력으로는 톨루이가 가장 뛰어나다고 여겨 그를 차기 칸으로 생각했으나 형제 간 분란이 일지 않도록 우구데이에게 보좌와 제위에 관한 사무를 맡기고 톨루이에게는 가옥과 목지, 재산, 군대 등 실권을 맡겼다.

중심 인물을 기반으로 아들딸, 손자들 이하 계보와 정비(카툰)와 후비에 관한 이야기, 연대기별 전투를 비롯한 사건의 역사, 주인공의 성격을 보여주는 일화들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나는 인물의 성격을 보여주는 일화들이 재미있었다. 비사에서는 이런 일화들이 더 많이 나올 것 같지만 정사에서 보여지는 일화란 또 다른 맛이 있을 거란 생각 때문이다.

우선적으로 알아두어야 할 것은 집사를 쓴 라시드 앗 딘의 제왕(주군)이었던 가잔 칸이 톨루이의 후손이라는 점이다. 그렇기에 톨루이 칸은 더 미화시키고 다른 형제의 기록은 상대적으로 낮춰 평가하는 측면이 있다. 특히 우구데이 칸의 경우 ‘애주가‘와 관련된 일화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칭기스칸도 술을 좋아하는 우구데이를 많이 혼냈다고). 또한 우구데이 칸의 정비들 중 가장 많은 아들을 낳은 투레게네에 대한 묘사도 부정적이다.

신기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구데이 칸의 역사가 3권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그의 일화들이 수십개가 실려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성정이 무던하고 포용력이 있었다는 평가를 받는데 반우구데이 정서를 숨길 수 없을 정도로 관련 일화가 많이 실린 것을 보면 정사이기 때문에 이런 일화들을 내치지 않고 싣지 않을 수 없었음을 느끼게 한다.

우구데이 칸은 칭기스칸의 셋째 아들로 13년간 집권하면서 키타이 왕국에 출정하여 1234년 금나라(집권자: 알탄 칸)를 멸망시켰다.

아주 늙고 병든 어떤 사람이 카안의 어전에 찾아와서, 자기에게 금 200발리시를 오르탁의 형식으로(bi-sabili ortâqi) 달라고 청원했다. [카안이] 주라고 명령하자 신하들은 ˝이 사람의 일생은 하루의 저녁에 다다른 셈입니다. 그는 거처도 자식도 친척도 없고, 아무도 그의 처지를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카안은 ˝그는 일생 동안 이러한 희망 속에서 살았고 [이러한] 기회를 잡으려 했는데, 그를 나의 궁전에서 낙담케 한 뒤에 돌려보낸다는 것은 고귀한 뜻과는 거리가 멀 뿐만 아니라, 지고한 신께서 내게 허락해 주신 이 같은 제왕의 지위에도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그가 청원한 것을 신속하게 그에게 주도록 하라. 그가 최후의 순간에 이를 때까지 자신의 희망을 성취하지 못할 수도 있지 않은가?˝ 라고 말했다. - P121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우구데이는 포용력의 아이콘이었다고! 위의 일화에서도 보듯 가난하고 어려운 백성들을 내치지 않고 보듬었다는 기록이 많았다. 다만 기록으로 볼 수 있을 뿐이고 보여주기 식일 수도 있으며 과장이나 허위가 있을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기록이 남았다는 것은 백성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겼던 것 같다.

주치 칸은 칭기스칸의 첫째 아들로 칭기스칸이 죽기 전 사망했다. 정비인 백투트미시 푸진과 사이가 좋았던지 대략 40명의 자손이 있었다고 한다. 차가타이와 우구데이는 사이가 안 좋았는데 그가 둘 사이에서 화합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전한다. 그가 있을 때 형제들과 함께 호라즘을 정복하였으며 칭기스칸이 북방 지역 정복을 명령했으나 이를 결국 이행하지 못한 채 사망하였다. 하지만 둘째 아들인 바투가 울루스에서 칸으로 즉위하면서 북방 지역에 있던 대부분의 왕국을 정복하였다(바투는 손자인 시레문을 후계자로 정했다).

차가타이 칸은 칭기스칸의 둘째 아들로 우구데이 대칸 시기 본인이 형인데도 동생을 깍듯이 대했다.

어제 나는 그와 속보로 말 달리기 시합을 했는데, 내가 카안과 시합을 한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법도인가? 그랬기 때문에 나는 죄를 지었고, 자신의 죄를 자백하고 야사에 처해질 수 있도록 온 것이다. 나를 처형할지 아니면 곤장을 칠지 명령을내려 주시오˝라고 말했다. 우구데이 카안은 이 말에 부끄러움을 느꼈고 그에게 더 많은 애정을 느끼며 공손하게 대하였다. 그래서 그는 사람을보내어 ˝이것이 무슨 말인가? 그는 나의 형이다. 이렇게 사소한 일에 어찌해서 신경을 쓰는가?˝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듣지 않았고, 마침내 카안이 그의 목숨을 살려 주는 대신 그는 말 아홉 필을 바치고 고두한다는 데에 동의하였다. 또한 카안이 차가타이의 목숨을 용서해 주고차가타이는 면죄의 대가로 고두한다는 사실을 듣고 또 알도록 하기 위해 비틱치들은 이러한 내용을 선언하였다. 그러고 나서 비로소 그는 오르두에 들어와 유창한 언변으로 모인 사람들에게 그 일화를 이야기했다. 이런 연유로 그들은 더욱 합심 · 단합하게 되었고, 다른 친족들은 [카안의] 명령서(khatti farman)에 머리를 조아리고 복종의 길을 다졌다. - P237

톨루이 칸은 칭기스칸의 넷째 아들로 이후 몽골의 역사에서 중요한 자손들을 내놓는다. 뭉케, 쿠빌라이, 아릭 부케 등. 고려의 역사와도 깊숙이 연관 있는 이름들이라 아마 친숙할 것이다. 톨루이 칸 때는 키타이 일부를 정벌하고 부하라, 사마르칸트 지역, 후라산 정벌이 이어졌다. 그는 어떤 의식을 치른 뒤 우구데이 칸 대신 병을 얻어 1233년 사망했다고 하는데 그만큼 우구데이에게는 각별했음을 방증하기 위한 이야기라고 여겨진다.
사실 톨루이 칸의 업적도 훌륭하나 그 어머니인 소르칵타니 베키의 현명함과 강단이 돋보였음을 지나칠 수 없다. 이후 몽골의 역사를 좌지우지하는 아들들이 대칸의 자리에 올랐으니 말이다.

구육 칸은 우구데이의 첫째 아들이다. 1245년 후계자 선정을 위한 쿠릴타이가 소집되었으나 바투가 후계자로 지명한 시레문은 나이가 어려서 성년에 이르지 못했기에 구육 칸이 대칸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그는 이슬람 종교를 거부하고 기독교를 받아들여서 그가 다스리던 때 기독교가 가장 융성했다고 한다.

뭉케 칸은 톨루이 칸의 큰 아들로 바투가 그를 적극 추대하면서 대칸의 자리에 올랐다. 우구데이 칸 일족 중 일부의 사람들이 음모와 반역을 기도하여 관련자들을 잡아서 소탕했다. 그래도 혐의가 있는 자들만 처벌하고 그렇지 않은 자들은 용서했다고 한다. 그는 특히 백성들의 부담을 경감시키기 위해 노력했고 귀족이나 행정관들이 뇌물을 받지 못하게 하고 아랫 사람들을 관용적으로 대하도록 지시함으로써 안정적인 치세를 이끌었다.

쿠빌라이 칸은 톨루이 칸의 넷째 아들로 아릭 부케가 알타이에서 기습적으로 칸의 자리에 올랐으나 1260년 다른 이들의 추대 하에 정식으로 대칸의 자리에 올랐다. 때문에 즉위하고 나서도 아릭 부케와 전투를 벌여야 했다.

‘쿨루카나 일‘ 즉 쥐해 - 662[/1264)년에 해당 - 에 그가 카안의 어전에 도착했을 때, 많은 수의 군대를 배치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또한 그로 하여금 고두(tikishmishi)하라는 명령도 있었다. 관례에 따르면 그같은 경우 고두를 할 때에는 [모포로 된] 천막문을 죄인의 어깨에] 씌워 놓는데, [아릭 부케는] 그런 식으로 뒤집어쓰고 고두를 했다. 그리고 한참 뒤 허락이 내려지자 천막 안으로 들어갔는데, 그는 비틱치가 있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카안은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격렬한 감정과 형제에 대한 사랑이 그를 흔들었다. 아릭 부케는 울었고 카안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다. 그는 눈물을 닦으면서 ˝오, 사랑하는 형제여! 이 반란과 분란에서 우리가 옳았는가, 아니면 자네들이 옳았는가?˝라고 물었다. [아릭 부케는] ˝그때는 우리가 옳았지만 오늘은 당신들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때 훌레구 칸이 보낸 칭쿠르(Chingqúr)라는 사신이 그곳에 참석해 있었다. 그가 돌아가 그 상황의 모습을 그의 어전에 설명했다. 훌레구 칸은 카안의 어전으로 전갈을 보내어 ˝야사를 생각할 때 어떻게 우리 일족을 이런 식으로 고두시키게 허락을 내려서 형 · 아우들에게 모욕을 줄 수 있단 말입니까?˝ 라고 했다. 카안은 그 말에 동의하고 ˝훌레구가 옳다. 내가 모르고 그런 행동을 하였다˝는 답신을 보냈다. 그 뒤 아릭 부케를 일년 동안 자기 앞으로 불러들이지 않았다. - P390

티무르 칸은 쿠빌라이 칸의 아들인 짐김의 아들이었다. 쿠빌라이 칸이 죽고 난 뒤 어머니가 일족의 어른인 바얀에게 보냄으로써 즉위에 대한 안정성을 미리 확보했고 쿠릴타이 개최 후 자연스레 그에게 대칸 자리가 추대될 수 있었다.
그는 군대와 왕국 정비를 위해 왕자와 아미르들을 각 지방에 파견하고 재상을 임명하여 통치를 하게 했다.

2권은 칭기스칸이 집권하는 과정을 비롯해 그의 일대기를 다루었다면 3권은 몽골이 가장 넓은 치세를 이루었을 때까지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이렇게 집사 시리즈 3권 리뷰를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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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해방 직후사 - 현대 한국의 원형
정병준 지음 / 돌베개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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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 저자나 분야에 대한 신간 알림이 오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주기적으로 알라딘 새로 나온 책이나 새로 나올 책 코너를 뒤지곤 하는데 간혹 놓치는 책이 있을까 해서다.

이 책은 12월 말쯤 새로 나온 책을 확인하다 발견했다. 보자마자 눈이 '하트'가 되었다. 한국 현대사, 그것도 내가 가장 관심 있어하는 해방 직후의 역사이기 때문이었다.


해방 후 3년이 한국 현대사의 중요 기점이 되었음에는 부인하기 어려운 측면이 많다. 내가 왜 이 시기에 관심을 갖는지 생각해보았는데 많은 자료들이 발굴되었음에도 여전히 빈 공간들이 존재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 시기의 역사를 볼 때마다 좋은 감정보다는 나쁜 감정이 일 때가 많고 답답함을 억누르기 힘들지만 갈수록 감정을 억제하고 거리를 두고 보려고 노력해야한다는 것을 배워가고 있다. 특히 이 시기 역사는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어느 한쪽의 주장에 휩쓸려서 다른 주장이나 입장을 배제하거나 무시하기 쉬워진다. 열린 자세로 보아야 한다는 의미다.


서문을 보면서 공감을 하는 부분이 많았다. 특히 한국 현대사의 제대로 된 통사를 찾기 어렵다는 사실 말이다.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이 있지만 한국현대사를 왜 미국인이 이렇게 잘 알고 있는가 하는 놀라움, (개인적으로) 한국인 연구자들은 이런 작업들을 해주지 않는가 하는 아쉬움 말이다. 지금은 그래도 발굴된 자료들이 늘어났지만 저자가 한국 현대사를 연구하던 시절은 자료 찾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한국 현대사 통사는 여전히 부족함이 많다. 



이 책은 해방 직후 1945년만을 다루고 있다. 그래서 '1945년 해방 직후사'다. 『김규식 평전』의 원고 4부 작업을 진행하다가 방대한 양에 출판사 입장을 고려하여 별도의 단행본으로 출간하게 되었다고 한다. 저자는 기존에 『몽양 여운형 평전』과 『우남 이승만 연구』를 내서 주목을 받은 바 있다.  


저자는 주한미군사령관 하지 중장의 개인 정치고문이었던 윌리엄스 소령과 관련한 기록(미국 장로교역사연구소에 소장된 윌리엄스의 강연)을 발견한다. 이는 이 책을 쓰는데 물꼬를 트는 역할을 했다. 


이 책은 주로 기존에 알려졌던 해방 직후의 통념인 역사에서 확인할 수 없었던 이야기들을 한다. 


먼저 해방 후 건준의 성립 과정에 대한 이야기다. 


지금까지 해방 직후 건준은 해방 당일 여운형과 조선총독부 정무 총감인 엔도가 만나 타협해서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져왔다. 그러나 총독부, 여운형, 한민당 측이 각기 다른 주장의 설명을 함으로써 도대체 진실이 무엇이냐 궁금함을 낳게 한다. 총독부는 종전 후 치안 유지를 위해 여운형과 거래를 했는데 여운형이 약속을 어기고 건준을 행정권 이양의 도구로 삼았다고 주장한다. 여운형 측은 건국동맹(건준 이전 조직)을 기반으로 한 건국 준비로 총독부의 교섭을 받아들였다고 주장한다. 한민당은 여운형이 총독부와 친일정부 수립을 위해 거래한 결과 건준이 탄생하였고 총독부로부터 자금 지원까지 받았다고 주장한다. 

그럼 결론이 무엇인가. 1945년 8월 10일부터 15일 사이에 총독부가 종전 대책 수립을 위해 여운형과만 교섭을 한 게 아니고 여운형과 한민당계가 교섭을 진행했으며 해방 후 여운형과 한민당, 총독부 간에 건준의 방향성을 둘러싼 협의와 교섭이 긴밀하게 진행되었다는 사실이다. 

여운형은 해방 이전부터 한민당 계열과 교섭을 진행했으나 한민당 측이 거부함으로써 협상은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건준은 단시간에 많은 변화를 겪었다. 미군정과 한민당의 공격으로 2차 개편, 3차 개편이 짧은 시간 내에 이루어졌다. 나는 건준이 초반에는 통일을 지향하며 좌우합작 조직으로 탄생했으나 이후 좌익이 확대되면서 우익이 탈퇴하여 성격이 변화가 되었다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애초에 한민당은 건준에 참여를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한민당은 해방 후 건준과 함께 치안유지회를 조직으로 변화시키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이 때의 조직의 명단(한민당 인사들이 포함 등)은 보여주기 식이라는 이야기다.


민족통일전선을 주장했던 건준은 좌익 중심의 인공을 건설함으로써 수명을 다했다. 북한에서는 소련군이 인민위원회로 정권을 이양하고 있었기 때문에 남한의 조선공산당은 이에 맞는 조직인 인공을 구성한 것이다. 그러나 인공의 수립으로 건준 내부에서 갈등하던 좌우익의 정권 수립 방략이 흐름을 잃게 되었다. 미군정은 인민공화국의 해체를 요구했고 지방인민위원회는 미군정의 요청을 거부하면서 중앙인민위원회와 지방인민위원회가 흐름을 달리 하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윌리엄스는 해방 후 초반 하지와 몇 개월을 함께 일했을 뿐이지만 미군정의 정책에 큰 영향을 미쳤다. 조지 윌리엄스는 공주 영명학교를 설립한 선교사인 프랭크 윌리엄스의 아들로 제물포에서 태어났다. 그는 해군 의무장교로 한국 땅을 처음 밟은 하지를 에스코트하는 역할을 맡았는데 유창한 한국어 실력으로 하지의 개인 정치 고문 역할을 맡게 된다. 그는 기독교, 연희전문학교, 친미, 반공의 입장에 따라 미군정에 인사를 좌지우지했다. 또한 이 무렵 한국에 있던 선교사 자제들이 미군정 초기 정책을 결정하는데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했다. 고문회의의 인사는 이렇게 기독교, 한민당 출신자로 채워졌다. 


미군정에 또 주목하지 않은 인물들이 여럿 등장한다. 하지의 공식 통역인 이묘묵, 조선총독부의 공식 영어 통역관 오다 야스마, 사상 전담 검사인 나가사키 유조 등은 여운형과 건준, 인공을 친일정권이자 공산주의자라고 매도했으며 한민당은 친미적이고 좋은 교육을 받은 민주주의자 애국자로 둔갑시켰다. 그러면서 미군정 하의 권력을 꿰차고 승승장구했다. 한민당은 미군정의 핵심 정당으로 부상하며 권력을 독점하였다는 사실이 뼈아프다. 


미군정은 미 국무부가 특정 정치 세력과 연계하지 말라는 지침(다자간 신탁 통치)을 위반하고 조선총독부의 정책을 답습, 공산주의를 배격했으며 임시정부를 적극 지지하는 정책을 펼쳤다. 미군정은 한민당의 조언에 따라 한국인이 인공을 부정하고 임시정부를 지지한다고 생각하여 임정의 귀국을 서두르면서 정무위원회를 만들었다. 이승만은 10월 한국에 들어와 한민당 계열과 함께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조직하는데 이것이 미군정 하의 정무위원회이다. 그러나 귀국한 임시정부는 물론 좌익 세력도 독립촉성중앙협의회 참가를 거부하면서 12월 모스크바 3상 회의 전 미군정 하 과도정부를 세우겠다는 계획은 실패하였다. 

모스크바 3상 회의 후 정국은 반탁 운동 vs 찬탁 운동으로 휘몰아치게 되는데 1945년 12월까지 반탁 운동을 주도한 것은 미군정과 이승만, 한민당 계열이었던 것이다. 이 무렵에는 임정이 반탁을 주도하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놀라웠던 점은 여운형이 건준이 만들어지기 이전에 건국동맹의 준비를 오랫동안 해왔고 건준을 위해 한민당계와도 협상을 시도한 일이다. 또 단 몇 개월간 일했을 뿐인 윌리엄스, 주한 선교사들이 한국에 끼친 영향이다. 한민당의 숨은 세력인 이묘묵, 오다 야스마, 나가사키 유조의 주장은 당황스러웠다.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나는 한민당과 이승만과의 조합으로 우익 정당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이것이 미군정과 연결되어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모스크바 3상 회의 전 물밑 작업이 그리 이루어졌을 줄도 몰랐다.


까도 까도 놀라울 정도로 양파 같은 것이 이 시기의 역사가 아닐까. 

저자가 해방 후 역사를 연구해주어 독자로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 앞으로도 숨어 있는 자료가 여전히 있지 않을까 궁금해하며 후속 작업이 이어지기를 고대한다. 특히 김규식 평전 작업이 얼른 끝마쳐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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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4-02-01 11:1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늘상 알라딘을 뒤지곤 한답니다.
제가 모르는 책을 놓치게 될까봐요.

어제 도서관 희망도서 마감일을 앞
두고 부랴부랴 3권을 신청했답니다.

예전에 몽양 평전을 읽으면서 일본
군이 민정 이양을 위해 몽양 선생
과 접촉했을 정도로 적에게도 인정
받았다는 점이 놀라웠습니다.

패전국이 분단되었어야 했는데,
왜 피해자인 우리가 분단이 되었
는지 아직도 억울합니다.

거리의화가 2024-02-02 09:06   좋아요 2 | URL
그러고 보니 희망도서를 놓치고 있었군요. 작년에 생각보다 일찍 희망도서 신청이 마감되는 바람에 신청 못한 책들이 꽤나 있는데 말이죠. 저도 확인해보고 신청해야겠습니다.

여운형 선생님을 생각하면 안타까움이 들 때가 많아요. 최근에는 그나마 공로가 인정되는 것 같지만 또 일부에서는 여전히 매도하거나 억측을 주장하는 경우도 있어서...
분단으로 인해서 잃은 것이 너무 많고 지금도 그 피해가 지속되고 있어서 답답하고 화가 나죠. 그래서 더 들여다보고 공부해야 하는 것 같습니다.

2024-03-06 12: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3-06 13: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도시로 보는 동남아시아사 2 도시로 보는 시리즈
신윤환 외 지음 / 사우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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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에 이어 2편을 읽었다. 이번 편은 동남아시아 국가의 수도가 상당수 포함된 것이 눈에 띄었다. 자카르타, 쿠알라룸푸르, 마닐라, 프놈펜, 비엔티안, 이렇게 다섯 곳이다. 수도는 국가의 대표성을 가진다는 측면에서 발전을 위해 인력과 기술을 집중 투입한다. 그래서 그만큼 개발이 이루어지고 인구가 집중되어 사람들로 붐비는 도시는 화려함과 역동성을 느낄 수 있는 장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들 수도는 근대에 들어와 제국주의에 의하여 개발이 이루어진 경우도 있으나 그 이전부터 왕국의 수도로 역할을 한 도시도 있다. 자카르타, 쿠알라룸푸르, 마닐라가 근대에 이르러 개발이 이루어진 경우라면 프놈펜과 비엔티안의 수도 역사는 그 시기를 꽤나 거슬러 올라간다.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은 크메르 제국이 멸망할 무렵인 1434년에 크메르의 수도가 되었으나 그 이후 캄보디아의 역사는 쇠락에 쇠락을 거듭해서 수도라는 게 별 의미가 없었다. 버려지고 잠시 수복되었다가 다시 버려지고, 나라가 힘이 없어지니 왕도 예전 같지 않았다. 더군다나 여기는 1975년 크메르 루주군이 권력을 장악한 뒤 벌어진 폭압의 상처가 깊게 패어 있는 곳이다. 미국의 지원을 받고 있던 론 놀 정권의 부정부패에 환멸을 느낀 시민들은 처음에 정권을 잡은 크메르 루주를 환영했다. 이들은 캄보디아 민족주의 정신으로 남베트남과 미국을 적대시하고 인민을 해방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하지만 막상 정권을 잡자 화폐와 사유재산, 종교를 없애고, 인류 역사상 전례 없는 대학살에 나섰다. 크메르 루주는 당시 프놈펜에 살고 있던 모든 주민을 강제로 시골에 이주시켜 이 지역은 사실상 페허가 되어 있었다. - P16

크메르 루주 정권은 1981년 자진 해체했으나 이 때 새 정부에 도움을 준 베트남이 경제적 어려움으로 물러나면서 1993년이 되어서야 캄보디아 왕국으로 국명이 바뀌고 시아누크가 왕이 되었다. 다행히 깊은 상흔을 뒤로 하고 현재 프놈펜은 빠르게 거점 도시로 성장하고 있다고 한다. 도로, 빌딩, 공원 등 기반 시설을 확충하는 등 이제는 제법 수도의 모습을 갖춰가고 있다고.

1353년 지금의 루앙프라방에 란상 제국이 세워졌다. 1479년 다이비엣 공격으로 수도가 페허가 되면서 1560년 수도가 비엔티안으로 옮겨졌다. 하지만 1828년 비엔티안은 시암 침략으로 폐허가 되었다가 프랑스가 들어오고 나서 1900년이 되어서야 재건되었는데 1940년 시암 공격으로 또 한번 파괴된 뒤 재건되는 우여곡절을 거쳤다.
현재 라오스의 수도는 비엔티안이다. 라오스하면 ‘루앙프라방‘만 익숙하고 ‘비엔티안‘이란 이름 자체가 낯설었는데 16세기부터 한 왕국의 수도였다는 사실에 놀랐다. 루앙프라방은 그 이전에 수도였고 당시의 왕궁과 사원이 남아 있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도시이기에 도시명이 익숙했던 것 같다.
작가가 라오스에 대한 역사와 관련 문물, 문화, 먹거리 등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주지만 그중에서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와 닿았다.
짧은 일정으로 가는 여행자는 여행지를 아무래도 깊게 들여다보기 어렵다. 그러나 그 곳의 사람들에게 특별함을 느낀다면 아무래도 그 여행지가 더욱 오래 기억남는 것 같다. 개인의 역사는 역사에서 찾기 어려울 수 있지만 현재의 사람들에게서 삶의 향기를 느낄 수는 있지 않을까.

바나나 잎으로 살포시 싼 소시지와 파파야샐러드 봉지를 들고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가만히 생각해보니 수많은 박물관과 기념관과 국보로 지정된 사원에서 찾으려고 했던 라오스의 역사는 하루하루를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안에 있었다.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이 역사책에서 빠졌을 뿐 그 땅에서 자신의 삶을 묵묵히 이어가는 사람들은 매일매일 역사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파탓루앙 회랑을 돌며 기도하던 사람들, 아누웡 왕 공원에서 과일을 팔거나 야식을 팔던 사람들, 빠뚜싸이 공원 분수대 근처에서 산책을 즐기던 가족들, 뚝뚝 택시비를 어떻게 흥정하면 좋겠냐고 물으니 수줍게 알려주던 호텔 직원. 그들이 없었다면 라오스라는 나라가 어떻게 지금까지 존재할 수 있었을까? - P345~346

참! 프놈펜 말고 캄보디아의 도시가 하나 더 소개되었다. 시엠립인데 앙코르와트에 가려면 이곳을 거쳐가야 하기 때문에 유명하다. 시엠립은 앙코르 왕조가 있던 곳이고 왕조가 몰락한 후 19세기 후반까지는 태국이 점령했다가 이후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다.

1860년 초 프랑스의 식물학자이자 탐험가인 알베르 앙리 무오가 방문한 후 책을 출발해 프랑스를 비롯한 서구 사회에 앙코르 와트의 존재를 알렸다. 당시 앙리 무오는 약 400년 전에 멸망한 옛 도시 앙코르의 유적을 본 것인데, 당시 그곳에는 1000여 명의 승려가 기거하고 있었다고 한다. 앙코르 유적의 소유권을 차지하기 위해 프랑스 정부는 인근 태국을 공격하여 캄보디아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고히 했고, 1863년 프랑스 보호령으로 삼았다. - P81

시엠립에는 앙코르 유적군인 프놈 바켕 사원, 앙코르와트, 앙코르 톰, 타 프롬 사원이 있고 앙코르 왕조가 성스러운 산으로 부른 프놈쿨렌산과 프놈쿨렌 폭포가 있다. 또 초기 왕코르 유적군인 프레아 코, 바콩, 롤레이 사원이 있으며 거대한 바다 같은 호수인 톤레사프도 있다. 올드 마켓 지역에는 프랑스 식민지 시절 건축물을 확인할 수 있다.

그 밖의 도시들을 간단하게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세부는 마젤란이 닿은 곳으로 필리핀에서 가톨릭을 가장 먼저 받아들인 곳이라고 한다. 세부는 스페인령 식민지일 때 멕시코 남미 문화가 들어와 대농장과 지금의 다운타운 지역에 석조 건축물들이 들어섰다. 이후 미국령 식민지가 되었을 때 도로나 근대 제도들이 만들어졌다.

자카르타는 17세기 초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무역항(바타비아)이자 식민 도시로 개발이 되었다. 1961년 수도가 된 이후 자카르타는 빠르게 늘어나는 인구 수 때문에 남쪽으로 도시를 확장하여 지금은 천만 인구가 되었고 규모가 커진 만큼 빈부 격차가 커졌다고 한다.

쿠알라룸푸르는 말레이시아 수도이자 최대 도시, 정치 중심지이다.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도시로 특히 중국인과 인도인의 비율이 높다고 한다. 우리가 흔히 잘 알고 있는 페트로나스 트윈타워를 비롯한 고층 빌딩이 즐비하고 잘 닦인 도로, 편리한 교통 때문에 관광객들이 관광하기에 좋은 도시이다. 다양한 사람들이 살아가기 때문에 도교 사원과 힌두교 사원이 공존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이 매력이다.

마지막으로 후에 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다. 후에는 베트남 중부 도시로 다낭보다 훨씬 덜 알려져 있지만 베트남 최초, 최후의 통일 왕조였던 응우옌 푹아인이 수도로 삼은 곳이었다고 한다. 현재 황성과 사원이 전하는데 안타깝게도 전쟁으로 많은 피해를 겪은 곳이라 온전하지가 않다.
1968년 1월 31일 북베트남군은 남베트남 전역에서 구정 공세를 감행해 100개 이상의 남베트남 도시를 기습했다. 다른 도시는 미군이 수비게 다시 탈환했으나, 후에에서는 예외적으로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었다. 북베트남에서 대략 5,000명 이상의 병력이 공격을 단행했고, 북베트남 인민군에 의해 후에 대학살이라 불리는 민간인 학살이 자행되었다. 미군은 폭격기를 동원해 후에를 휩쓸었고, 이 과정에서 후에는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 P273

다낭은 프랑스가 들어온 후 식민지 항구로 유명해졌다. 15세기까지는 강력한 해양 국가였던 참파 왕국이 있던 곳이기도 하다. 동서 무역의 요청지로 일찍부터 교통의 요지였다. 현재는 중부 최대의 상업도시이자 중부 유일의 직할지다. 만약 후에의 유적이 온전했다면 다낭만큼이나 많은 이들이 드나드는 곳이 아니었을까.

만달레이는 미얀마의 정신적 문화 수도의 역할을 하는 곳이다. 왕불사상(왕=부처)이 잘 구현되어 있는 곳이기 때문에 승려의 신분적 위치가 매우 높다고 한다. 윈난성과 가까운 위치에 있어 중국인의 비율이 50% 이상이라고 한다. 아마도 미얀마의 중국 같은 느낌이 아닐지…

인도에서 시작된 불교는 동남아시아에 일찍부터 전파되었고 동남아시아는 이렇게 인도화되었다. 고대 왕국은 종교와 뗄레야 뗄 수 없는데 이런 불교가 수입되었으니 동남아시아의 불교와 힌두교의 영향은 지금까지 이어져올 수 있었던 것 같다.

인도화의 핵심은 바로 왕권의 확립인데, 4~6세기에 동남아시아 각 지역이 받아들인 힌두교와 불교는 왕권의 확립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샤머니즘이나 토템, 애니미즘과 같은 토착 종교에 의존하던 지도자의 권력이 일시적이었다면, 힌두교 및 불교의 세계관을 받아들이면서 신과 왕을 동일시하기 시작한 인도화 이후 왕의 권력은 절대화, 영속화하기 시작한다. 힌두교 세계관의 절대 신인 비슈누나 시바와 자신을 동일시하거나, 자신을 신 혹은 부처의 화신으로 자임함으로써 공동체 구성원들의 충성을 이끌어내고, 권력을 정당화하는 통치 방식이 바로 인도화의 영향이었다. - P185

만약 나중에 인도 등 동남아시아 국가를 가게 된다면 불교와 힌두교(신과 경전 포함)에 대한 이해는 어느 정도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저자가 다양한 경우 글쓰기 스타일에 따라 호불호가 생길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고 해도 이 책은 역사를 담고 있기 때문에 소중하다.

총 13개의 도시를 소개하는데 나는 그 중 자카르타에 대한 소개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 도시 내부를 구석구석 소개시켜주는데 시기별로 가상의 인물 세 명을 등장시켜 그들의 일상을 따라 가며 알려준다. 이 방식은 마치 내가 그곳에 가서 그 사람들의 현장을 보는 느낌이어서 생동감을 느끼게 했다. 대중들이 그 나라의 역사와 도시, 문화를 이해하기에 탁월한 방식이 아니었나 싶다. 마지막에는 감동이 일었다.

‘완벽한 승리‘ 혹은 ‘승리의 행위‘를 의미하는 자카르타는 대략 400년 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무역항이자 식민 도시로 개발되었다. 17세기 향신료를 운반하던 상선의 선원, 19세기 가난과 차별이 일상이었던 식민지의 소년, 21세기 도시 빈민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노동자에게 아이러니하게도 지난 400년 동안 자카르타는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발전된 도시였다. 인도네시아 사람들에게 자카르타는 항상 최첨단의 문물을 경험할 수 있는 장소였지만, 때로는 엄청난 환희와 극심한 고통 그리고 좌절감을 안겨준 도시였다. - P279

이 시리즈가 뒤이어 더 나올 수 있을까. 아직도 동남아시아의 도시 중 많은 곳들이 비어 있다. 독자로서 더 만들어져서 많은 곳이 소개되기를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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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곤 과정 - 빈곤의 배치와 취약한 삶들의 인류학
조문영 지음 / 글항아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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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빈자'란 누구인가. '빈자'라는 개념 정의는 누구를 포함시키고 제외시킬 것이냐, 범위의 문제라는 생각을 했는데 그마저도 그 기준이 모호하다 느꼈다. 기초법 제도 하에 있는 사람 아니면 그 언저리에 걸쳐 있는 사람, 그도 아니면 아예 법의 사각 지대에 있는 사람? 돈이 없어서 밥을 못 먹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나. 대한민국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 집이 없는데 이는 어떻게 보아야 하나. 각자가 생각하는 부의 기준이 달라서 자신이 중산층이고 고소득자임에도 스스로를 부자라고 생각하지 않는 경우를 꽤나 많이 보았다. 저자는 인류학자이자 동종 업계의 교수로 이 책을 쓰게 된 경위를 이렇게 밝힌다. "우리가 어떤 빈곤을 어떤 방식으로 쟁점화하거나 외면했는지 톺아보면서' 빈곤을 어디로 가게 할 것인가'를 부단히 질문하려했다." 경제학자나 사회학자가 아닌 인류학자가 생각하는 빈곤의 개념 정의와 범주화, 빈곤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 등을 눈여겨보며 읽어내려갔다.


나는 1부 중 3, 4장을 먼저 읽고 다음 1, 2장을 읽은 후 나머지 2부, 3부를 마저 읽었다. 1, 2장은 이론적인 설명을 다루고 3, 4장은 구체성을 띤 사례를 들고 있어서다. 


3장은 우리가 하는 '노동'을 어떤 것으로 볼 수 있을지 고민하게 한다. 임금 노동, 비공식 경제 활동, 가사 돌봄노동, 자원 확보를 위한 분배 노동 등 노동의 형태는 아주 다양하다. 그러나 우리는 돈을 받고 하는 노동만이 가치 있다고 판단하는 경우가 많다. 그 밖의 노동은 도외시하며 가볍게 본다. 내가 당장 노동을 하지 않게 되었을 때 누가 나를 돌보는 사람도 없고 가진 돈도 없다면 무엇을 가지고 살아갈 것인가. 빈곤해지지 않기 위해서, 불평등한 대우를 받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분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4장은 홈리스, 이주자, 난민들에게 '집'이란 무엇을 뜻하며 '자격'을 증명하는 일은 무엇인가 생각해보게 한다. 자격을 의심 받고 자격이 없다는 것을 끊임없이 증명해내야 하는 과정은 자아를 분리 및 박탈시키며 사회에서 개인을 고립시키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 싶어 섬뜩했다. 이주자(난민), 기초법 대상자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서류를 제출하고 증명해내는 일 말이다.


자본주의의 불안정성이 심화되고, 금융의 일상화로 투자가 주업이 된 사람들이 허다하고, 기술이 인간 노동을 대체하는 속도가 빨라지면서 임금노동의 비중은 계속 줄고 있지만, 빈곤 통치에서 임금노동이 갖는 위상은 여전히 견고하다. 노동이라는 기준이야말로 근대 빈곤 통치의 기본적인 작동 원리이기 때문이다. 강제노역에서 근로연계복지에 이르기까지, 빈곤 통치의 역사는 인간에게 노동을 강제하기 위한 일련의 지식과 제도를 구축해온 과정이다. 여기엔 멀쩡한 노동자라면 수급을 신청할 이유가 없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빈곤 통치와 멀찍이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노동운동에서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계급은 물적 관계이지만 ‘노동자‘는 수많은 정체성 가운데 하나로 탈구된 지 오래이다 보니(신현우2022: 71) 이상적인 노동자의 ‘자격‘에 대한 암묵지를 발견하기도 어렵지 않다. - P105


인류학자들은 집home 을 건조물이나 자산에 국한하지 않고 일종의 희망이자 미래로, 세계에서 자기 자리place를 확보하려는 지속적 노력과 꿈의 표현으로 봤다. 사람들은 집에 관한 각자의 생각을 "물질성, 감정, 사회적 관계, 거주 실천의 교차 속에서 부단히 만들고, 이 실천 속에서 소속, 안전, 가치의 감각을 조율한다.(Samananiand Lenhard 2019 7) 이는 홈리스, 이주자, 난민에게 분명 더 위태롭고 고된 노동이다. - P151


1부는 가난을 우리는 왜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가 배경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기초법(국민기초생활 보장법)은 1999년 9월 공포되고 2000년 10월 시행되어 지금까지 사회 공공부조의 대표적인 법으로 기능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의 법이 빈자를 다 품고 있다고 보기도 어렵고 혜택이 충분한가도 의문이 든다. 게다가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기초법 대상자가 되는 것을 증명하는 것에서부터 스스로 박탈감을 느끼는 과정인데다 대상자가 이를 타인에게 알리는 것을 두려워함으로써 사회로부터 고립을 자초하게 하는 측면이 있다. 학교에서의 왕따 문제 등(임대 아파트에 사는 것으로도 타인을 차별하고 괄시하는 경향이 있으니 말이다). 


2부는 대한민국에서 개인이 사회에 '의존'한다는 것이 가능한가 생각해보게 한다. 대한민국은 미국식 자본주의를 도입하여 급격한 발전을 이루었고 신자유주의가 도래한 이후에는 개인주의가 팽배하고 일명 '각자도생'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인식되는 수준에 이르렀다. 나와 너의 일은 무관하며 나의 일만 신경쓸 뿐이라는 이런 사회에서 자립은 당연한 숙제가 되었지 않나. 사회에서 도태되어 빈자가 되면 부정적 인간으로 낙인 찍는 상황에 복지 혜택에 대한 논의가 순수하게 이루어질 수 있을지 개인적으로는 회의적인 것 같다. 보편적 복지를 하기에는 충분한 자금이 있는가의 문제가 있고, 선별적 복지라고 하면 혜택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를 않을테니 말이다.


수급이 빈곤네트워크의 의무통과점이 되었다고 내가 생각하는 까닭은, 정부 정책뿐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의 자기 서사, 그리고 이들과 연대하는 사람들의 움직임 모두 수급(기초법)을 경유해 그 존재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이 공공부조의 수급자로 구획되면서 가난은 특정한 양식과 문법 안에 고이고 말았다. 빈곤을 우리 시대의 정치적 핵심 의제로 삼는 일은 그렇게 점차 요원해졌다. 빈곤이 ‘우리의 삶‘에서 ‘저들의 문제‘로 고립되면서 취약계층에 대한 관심을 호소하는 메시지가 빈곤을 끝장내자는 결의를 압도해버렸다. - P28~29


의존성 논의가 복지 영역에서 특히 만연한 것은 사회복지야말로 후술할 사회적 빈곤 의제와 조응하여 등장한 지식과 기술의 복합체이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 사회 복지학 발전의 주요 참조국인 미국에서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발전해온 사회공학과 개척 서사를 중심에 둔 선별적 역사 서술이 결합하면서 자율적 개인과 독립을 이상으로 삼는 정치 이데올로기가 단단히 뿌리를 내렸다. ‘자립‘을 숭배하고 ‘복지 의존welfare dependency‘을 경멸하는 정치 이데올로기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특정한 시선을 부과하는 담론 권력으로 자리 잡고, 이들의 사회 안전망을 최소화하는 정치 전략으로 작동해왔다.(O‘Connor 2001; Fineman 2004) 이러한 흐름에 맞서, 진보적 사회복지학자들은 의존의 보편성을 환기하며 복지 의존에 씌우는 혐의를 거둘 것을 호소하기도 한다. 하지만 복지 의존을 "인간의 상호의존성을 증진할 수 있는 기초"로 재정의하는 움직임(김병인 2017 88)이나 돌봄 윤리의 선언만으로 의존이 문제가 된 현실에 균열을 내기란 불가능하다. 복지가 직업화·제도화·산업화를 거치며 ‘성장한 역사란 뒤집어보자면 사회복지 체제 구축에 관여해온 종사자들이 가난한 사람들한테 ‘의존해온 역사다. - P66~67


2부는 빈곤 현장에 현장 실습, 자원봉사 등을 떠난 청년들의 실태와 빈곤의 취약성에 따른 전염과 공포를 확인할 수 있다. 


글로벌 빈곤 레짐은 일관된 구조를 갖는다기보다 지역적·상황적 실천과 개입에 열려 있다. 한국이 이 레짐과 접속하는 과정에서 특징적인 것은 원조 수원국에서 공여국으로 전환한 나라의 위상을 널리 알리겠다는 국가주의적 사고가 팽배하다는점, 그리고 정부·대학·기업이 긴밀한 공조하에 (특히 대학생) 청년을 해외 자원봉사의 주요 주체로 구성해내면서 실업의 ‘위기‘를로벌 리더 창출이라는 ‘호기‘로 바꿔치기했다는 점이다. 저성장 시대에도 경쟁력만 부르짖는 환경에서 실존의 결핍을 호소해온 청년들이 열정 노동과 창의 노동을 불태우며 글로벌 빈곤 퇴치를 위해싸우는 가장 역설적인 전사가 된 것이다. - P211~212


이렇게 신자유주의 시대에 맞닥뜨린 개인으로서의 실존은 빈곤을 보듬는 치유 기제가 되었다. 끊임없이 자신을 보여주기 위해 에피소드를 찾아 나서는 활동은 일시적으로 기쁨(만족)을 줄 뿐 시간이 지나면 더 나은 에피소드를 찾아 나서는 과정이 이어진다. 이런 과정은 스스로를 자괴감에 빠지게 하고 나락에 빠지는 다름 아니다. 


빈곤은 특정 세대나 집단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무엇하다 중요한 것 같다. 빈곤은 안전한 집이어도 들어설 수 있기 때문이다. 


초국적 연결이 급증한 시대, 나락에 떨어질지 모른다는 불안이 빈곤 감각을 증폭시키는 시대에 빈곤·복지·노동 담론이 서로 맞물리면서 ‘빈민‘을 조립했던 문화 정치가 국민국가의 경계를 넘어 (이주자, 난민 등) 정치적·경제적으로 취약한 지위에 놓인 다양한 범주의 사람들을 겨냥하는 낙인, 열악한 사람들이 서로를 구별 짓는 표식을 전방위적으로 확산해낸다. 정상과 비정상은 특정 개인의 상태가 아닌 관점에 불과하지만(Goffman 1963: 137), 빈곤 전염의 공포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관점을 인격화하는 데 몰입한다. - P294~295


프레카리아트는 Proletariat (프롤레타리아트)에 불안정한 위태로운‘이라는 뜻의 형용사 precarious가 결합된 단어다. 이 단어는 신자유주의적 모델에 기반한 노동시장 유연화가 가속화되면서 노동조합과 사회보장 시스템의 보호 바깥에서 떠돌게 된 불안정 노동자들을 주로 지칭하지만, 여성, 청년, 노인, 소수 종족, 장애인, 범죄자, 이주민 복지 수급자 등 삶의 불안과 노동의 불안을 동시에 떠안은 다양한 집단도 포괄한다. 과거의 안정된 노동계급과 달리 "사회적 기억"이 부재하고, 소외, 아노미, 불안, 분노 등에 휩싸이기 쉽다는 점에서 가이 스탠딩(2014 58-59)은 이들을 형성 중인) "새로운 위험한 계급으로 명명했다. - P310


프레카리아트는 위계적인 질서 하에 만들어졌다. 그래서 불안정한 이들은 더 불안정해지기 쉬우며, 위험에 빠지기 쉽고, 망가지거나 전망이 없는 사람들이다. 


3부는 인류가 빈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취해야 할 자세와 태도는 무엇인지 나눈다.


우리는 흔히 인류세에 살고 있다고 말을 한다. 이 개념은 파울 크리천이 제시한 것으로 현재의 지구가 인류의 생태-존재론적 위급 상황을 맞이한 것에 대한 핵심 표지로서의 설명이다. 현재가 인류세인지 단언하기는 어려우나 지구의 환경이 오염 및 파괴되고 전쟁으로 난민이 생겨나며 빈자들이 새롭게 생성되는 상황은 앞으로 갈수록 늘어날 것은 확실해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각자도생하자라고 결론을 낼 수는 없다. 난민, 빈자, 이주자, 소수자 등은 기본적으로 취약한 위치에 서 있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내가 어느 날 사업이 망해서, 몸이 아파서 일을 할 수 없고 누군가에게도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 온다면 절망적인 상황이 될 것이다. 인간의 삶은 유한하고 늙고 병드는 것은 자연의 이치다. 그렇기에 이런 상황을 개별 인간에게만 맡겨서는 지구의 미래는 어두울 수밖에 없다. 비단 남의 일이라 생각하지 말고 공통의 인식과 감각을 가져야 한다는 결론을 내놓는데 뻔한 구호기는 하지만 사실 결국 명확한 해법을 제시하기는 누구도 어려울 것이다. 결국 구체적인 해결은 사회적 제도, 교육, 운동 등으로 메워나가야하지 않을까 싶다.


발전의 꿈이 아무리 집요하고 중독성 강하다 한들 누구도 삶의 취약성과 유한성을 피해갈 수 없다면, 지금 우리한테 필요한 것은 취약성과 유한성을 개별 인간의 불행으로 남겨두기보다 지구생활자의 공통 인식과 감각으로 받아들이도록 돕는 제도, 교육, 운동일 것이다. 기후변화와 팬데믹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위기를 논하는 공론장은 전례 없이 많아졌지만, 각자 알아서 방공호를 구축하던 사람들이 더 거대한 위기를 감지한다고 해서 곧바로 연결되는것은 아니다. - P386~387


이 책은 학술서 성격이라 다양한 이론의 인용 및 사례(논문 등)가 등장한다. 대중들이 읽기에는 약간 어려운 듯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책을 이해하는 데 무리는 없다. 저자가 직접 체험한 현장의 목소리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나도 인류학, 사회학, 경제학 등 낯선 용어와 이론 등은 사례를 통해서 이해했다. 2022년 말 발간된 책으로 당시에도 눈여겨보았던 책이었지만 바로 읽지는 못하다가 작년 말 신문사에서 뽑은 2023년 올해의 책 중 한 권이길래 읽게 되었다. 앞으로도 사회에 환기를 주는 이런 책들이 많이 나왔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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