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의 쉐이크 - 영혼을 흔드는 스토리텔링
김탁환 지음 / 다산책방 / 2011년 8월
평점 :
절판


추천권유도 6

   

나는 언제가 될 지 모르겠지만 글을 쓰고 싶고, 글을 쓸 것이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인생 여정을 살아가고 있는 나는, 내가 살아 오는 과정에서 보고,

듣고, 느낀 점을 기록하고 싶어서 또 인생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한 편의 멋진 연극같은

생각이 들어 내가 감동했고 느꼈던 생각과 경험을 타인들과 공유하고 싶어 글 쓰기에

도전하려는 것이다.

나의 글을 누구도 보거나, 읽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실망하거나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주 먼 훗날 내 자손 혹은 완전한 타인이

나의 글을 읽고 어떤 조상이, 어떤 이름 모를 무명 작가가 인생을 살면서 이런 점을

느꼈고, 감동했었구나 하고 생각 정도만 하면 더 이상 바랄 것도 없다.

그러다 보니 함부로 휘갈겨 쓰기가 뭐해서 이런 저런 글쓰기 공부 차원에서 이런 작품을

골라 읽게 되었다.

 

금번에 고른 작품을 포함해 작가로서의 기본 소양에 관한 여러 권을 섭렵했지만 뭔가가

부족한 듯하여 또한 작가로서의 갖춰야 할 기본 소양을 더욱 더 조련해 보고자 하는

마음에서 해당 작품을 선택해 읽어 보았는데, 내가 이제까지 읽은 글쓰기와 관련된 작품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내용이었다고 생각한다.

(본 작품의 저자께서 나의 이런 글을 읽어 보면 웃겠지만...ㅋㅋㅋ)

 

아무튼 저자의 생각 중에서 내가 취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나름 정리해 본다.

 

좋은 이야기꾼이 되기 위해서는 가장 넓게, 가장 자주, 가장 빨리, 가장 깊게 스스로를

흔들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은 절대적으로 공감하며 여기에 첨언을 한 개 더 한다면

 

"깨달음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의미가 생겨나지 않는다

 

는작가의 주장에 완전 공감하는 바이며 작가의 강조점을 정리해 보면

 

첫째 주제를 선정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조사와 공부가 수반되어야 한다.

- 아이디어가 떠올랐다고 바로 쓰지 마라. 치밀한 준비가 있어야 한다.

- 준비단계 : 초고단계 : 퇴고단계 = 1:1:1의 비율로 시간을 할애하라

 

둘째 오감훈련을 부지런히 하자.

-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오감으로 감싸는 연습을 해 보는 게 중요하다.

- 인간을 오감으로 감싸 두는 것이 그 인물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가장 빠른 길이다.

- 공간을 오감으로 휘감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답사이며 시각을 제외한 나머지

  감각은 직접 그 장소에 가 봐야 파악이 가능하다.

- 시각에 의한 부분을 줄이고 미각, 후각, 촉각에 의지한 부분을 확대하라.

 

셋째 목적성을 가져라.

- 이야기를 잘 만들려면 누구에게, , 어떤 형식으로 얼마나 길게 할 것인지 명확히

  설정하라

- 이야기의 핵심은 소통이다.

 

넷째 100권의 책, 10권의 공책을 사라

  - 까뮈의 유려한 문체와 독창적인 구성, 무거운 주제와 세련된 호흡은 천재성에서 비롯

    되었다기 보다는 일곱 권의 공책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 자신만의 도서실을 만들고 한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최소한 작품에 쓰일 소재를 연구

    하기 위해 100권의 서적은 사서 읽고, 연구해야 한다.

   - 10권의 공책의 활용법은

   1) 기자수첩 

   2) 독서록

   3) 몽상록 : 이야기하고자하는 내용이 무엇인지 단 하나의 문장으로 정리해 놔라

   4) 습관론(등장인물)

   - 곧바로 등장인물을 이야기 속에서 다루다 보면, 자기가 잘 알지 못하는 것들이 계속

      나오고, 그땐 그 인물의 습관이 아니라 작가 자신의 습관으로 메워 버린다.

   - 작가는 습관이 탄생한 과정과 습관의 의미 등을 자세히 알고 있어야 함

   5) 답사기(소재가 되는 배경에 관한 사항) : 답사 계획을 세우는 것이 전체의 절반임

   6) 이야기를 위한 공간(작품에 사용될 소재)

   - 이야기는 머리로 쓰는 것이 아니라 온 몸으로 쓰는 것이다.

   - 이야기를 만들 때는 객관적인 시간과 주관적인 시간으로 나누어 진행 연월일시로

      확실히 구분되는 것이 객관적 시간이라면 개개인의 마음에 따라 그 길이와 속도가

      달라지는 것이 주관적인 시간이다

   - 어떤 사물과 상황은 이야기 속 주인공의 개인사와 맞물려 그들이 살아온 특정 시간에

      각별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이것들은 미리 설정해야 한다.

   - 이야기를 만들 때는 처음과 끝을 함께 생각하는 습관을 들여라.

   - 어떤 이야기의 시작점은 그 앞 이야기의 끝 점에서부터 비약하는 순간을 잡는 것이

      좋다.

   - 예상 밖의 결말이기는 하되, 그 결말이 시작과 교묘하게 연결되도록 만드는 것,

      그것이 이야기꾼의 역량이다.

   - 이야기 전개 방식 중 가장 좋은 방법은 이야기꾼의 개입 없이 '주인공 스스로 자신의

     삶을 말하게 하라'는 것이다.

   - 주장을 펼 때는 문장을 짧게 끊어 칩니다. 이야기꾼이 되기 위해서 먼저 갖추어야

     것은 '테크닉'이 아니라 자세.

     즉, 활을 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궁수의 자세이다. 테크닉 몇 개로 완성할 수 있는

     이야기는 이 세상에 없다. 이야기를 만드는 자기만의 자세가 없다면 진정한 이야기꾼이

     아니다.

   - 결과물을 갖고 이야기할 게 아니라 결과물이 나올 때까지의 그가 취한 자세를 점검하고

      교정하는 게 중요하다.

   - 이야기란 인간이 세상을 인지하는 방법과 내용 속에서 탄생하는 것으로 좋은 이야기꾼

     이 되기 위해서는 오감 훈련을 반드시 열심히 해야 하고, 그 훈련이 어느 정도 숙달되면

     '육감'을 개발하는 훈련에 돌입해야 한다.

   7) 단어장 

   8) 주제록

   9) 소품기(작품에 사용될 소재들

  10) 한결같음의 힘

 

- 개인적인 일과도 '이야기를 만드는 시간''이야기를 만들지 않는 시간'으로 나누어서

   활동하라

 

- 반복과 단순함만이 좋은 이야기를 만들 가능성을 높인다.

 

작가가 주장하는 [그물망 퇴고법]

   1. 이야기의 큰 흐름을 고쳐라

   2. 캐릭터를 고친다.

   3. 갈등을 따라 초고를 고친다

   4. 공간을 따라 초고를 고친다.

   5. 시간을 따라 초고를 고친다

   6. 주제를 확인하라

   7. 문장을 고치라

로 기술되어 있으나 이 내용만 갖고는 절대 알 수가 없으니 이 글을 읽는 모든 작가 

지망생이나 글 쓰고자 하시는 분들은 작품을 꼭 사서 읽어 볼 것을 강추합니다.

(저는 작가나 출판사와는 전혀 관계없는 사람입니다)

 

- 다사(多思)는 정신을 죽이고 포식은 육식을 죽인다.

 

- 내가 예술가라는 것은 사실이지만, 예술을 실현하는 과정을 보면

   나 역시 하나의 육체 노동자이다.(엘버트 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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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12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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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권유도  7

 

그녀는 소리없이 내 마음에 들어왔다. 하지만 나는 그런 그녀를 단순히 사랑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녀에게 다가설 수 없었다.

 

작품을 이야기하기 전에 일본에 이런 훌륭한 작가가 있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

- 많은 일본 작품을 접하지는 않았지만 대체적으로 일본인 작가의 글을 읽노라면 무슨

  3류 작품집을 접하는 느낌이 들어 그간 일부러 회피해 왔었다 -

솔직히 외국 작품의 경우 번역가의 수준이 작품의 수준이 되는 경우가 많은데 작품과

함께 번역자의 미려하고도 섬세한 번역에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부분은 번잡하지도, 사랑을 갈망하는 미사려구도, 상대와의 갈등을

유발하는 복잡다단한 복선도 없이 그저 담담히 사랑하는 이의 심리상태와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를 진솔하게 그리고 있었다는 점이다.

 

내가 이제가지 읽었던 여러 사랑을 주제로 한 작품과 비교해 보아도 크게 손색이 없는

그런 작품으로, 작품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나열하는 것보다는 모두가 한번쯤 읽어보고

느꼈으면 하는 그런 작품이 아닐지라도 우리가 순수하게 가졌던 사랑에 대한 추억을

반추시키기에 전혀 손색이 없었던 작품이었다고 생각한다.

 

감히 작품을 통해 나는 내가 좋아하는 여인 앞에서 어떤 종류의 인간인가를 생각해

보았는데 아마도 작품 속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있는 K와 주인공의 성격을 조금씩

갖고 있는 인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런 마음은 나도 나지만 대개의 인간이

갖고 있는 사랑에 대한 마음이 아닌가 생각한다.

다른 이야기를 쓰고 싶어도 문필력(文筆力)과 사고력(思考力)이 일천하여 더 이상 글

쓰기가 버거울 뿐이다. 사랑에 대한 마음 앞에서는 말이다.

나는 사랑 앞에서 어른이 아닌 노인이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그런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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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 이이 직간
이이 지음, 오세진 옮김 / 홍익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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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권유도 9

 

조직과 군주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용기가 없다면 공직을 맡지마라

 

작품은 율곡 이이가 어린 제왕(선조 임금)에게 군주로서의 기본자세에 대해 제언하고 있는

두 개의 작품 즉, <동호문답(東湖問答)><만언봉사(萬言封事)>의 내용에 대해 풀이한

내용이다.

알고 있는 바와같이 동호문답은 중국과 조선의 역대 임금과 신하, 그들이 겪은 정치적

성공과 실패의 예를 살펴보고, 당대 정치 제도의 폐단과 개선방향을 논하는 내용이며

만언봉사는 기이한 자연 현상이 일어나자 선조가 제언을 구하는 교서를 내린 데 대해

율곡이 올린 상소로 동호문답에 비해 제도의 폐단이 상세히 언급되면서 대안도 더

구체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특징이 있다.(소새글 작품에서 일부 발췌)

따라서 본 작품 중 특정 부분을 발췌하여 이를 집중적으로 논하거나 율곡 선생이 주장한

내용에 대해 그 깊이를 논하는 것은 역사학자나 사학자들이 할 몫이고 평범한 범부인 내가

할 소임은 읽고 느낀 점에 대해 개인적인 의견을 피력하는 수준에서 작품에 대한 소회를 정리하는 것이 바른 자세가 아닌가 생각한다.

- 한가지 분명한 것은 동호문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전에 대한 해박한 사전

  지식이 있지 않고는 쉽게 이해하기가 어렵다 -

아무튼 상기 두 문건은 율곡의 정치 개혁론이 요약적으로 담겨 있는 귀중한 자료로 조선

후기의 경세 사상가들은 이를 자신들의 사상적 자원으로 활용했다 한다.

 

작품 내용에 들어가기에 앞서 저자는 작품 서두에 본 작품을 통해 오늘날 이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치 상황과 비교해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1) 정치 개혁에 시기를 탓하지 마라

   2) 정치가들은 무사안일에 젖어 나라를 개선하려 노력하지 않고 있다

   3) 정치가들이 몸을 사리며 눈치만 보고 자신의 견해를 개진하려 않고 있다

   4) 인재를 힘들게 뽑아 놓고도 전폭적으로 신뢰를 하지 않고 있다

   5) 관료집단의 무능력과 부패 문제가 심각하다

   6) 최소한의 생계가 해결된 다음, 도덕적인 시민과 윤리적인 사회를 만들 수 있다

   7) 좋은 정치란 부모가 자신을 돌보듯이 하는 정치다

   8) 통치 지도자의 엄정함은 공정함에서 나온다

   9) 과거사를 청산하는 것이 좋은 정치의 시작이다

  10) 교사의 처우개선과 교사직에 대한 인식 개선이 이루어져야 양질의 교육이 가능하다

  11) 지도자는 측근은 경계하고 올곧은 관료를 가까이 해야 한다

  12) 간신을 경계하라

  13) 공직을 파고 사는 행위를 근절해야 한다

  14) 정치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지 제도로 하는 것이 아니다

  15) 정치인은 언제나 비방을 받는다. 옳은 일이라면 소신을 가지고 비방에 흔들리자 마라

 

등을 제시하고 있는데, 구구절절 우리의 가슴을 찌르는 내용이 아닌가 생각한다.

저자의 이런 주장은 작품 전체를 집필하면서 저자 나름대로의 소회를 적은 것으로 나는

이해하고자 한다.

분명하게 드는 생각은 오늘날과 같이 정치, 경제적으로 혼돈과 혼란의 깊이가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한 작금, 우리에게 사회의 변신과 개혁을 위해, 국가의 백년대계를 위해

율곡 선생만큼 혼신의 힘을 다해 변화를 외칠 수 있는 지도자가 절실히 필요한 시기라고

생각하지만 어디를 둘러보아도 우리의 위정자들은 한심한 계파 싸움과 당리당략의 울타리

안에서 영역 싸움만을 하고 있는 모습이 한심스러울 뿐이다

[대통령에게 욕을 퍼붓는다고 생각할만큼 직언을 할 용기가 없다면 그 자리에 남아

 있어서는 안 된다. 비난받지 않는다면 많을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니다. 모든 사람

 을 만족시킬 수 는 없다]

이 이야기는 미국의 백악관 비서실장과 두 번의 국방부 장관을 역임한 럼즈펠드

이야기인데, 이 시대 이 땅에서 이런 용기를 갖고 우리의 지도자를 보필하고 있는 인물이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든 독서의 시간이었다.

 

[동호문답(東湖問答)]

- 군주의 명철함은 바른 견해를 가졌느냐 아니냐에 달린 것이지 총명한지 아닌지의

   문제는 아니다.

- 큰일을 할 임금은 존경하고 신임하는 신하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 지위에 걸맞는 임금과 재상이 있으면 그런 때가 곧 이상적인 통치가 실현될 수 있는

   시대이다.

- 나라가 잘 다스려지거나 그렇지 않음은 사람에게 달려 있지 에 달려 있는 게 아니다.

   ‘라는 것은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

- 간사한 신하를 변별해내는 방법에는 이치를 궁구하는 것(窮理)보다 좋은 것이 없고

   어진 신하를 알아보는 방법에는 공정한 마음(公心)’을 갖는 것보다 좋은 수가 없다

   이치를 궁구하는 것과 공정한 마음을 유지하는 것은 모두 욕망을 적게 하는 것(寡慾)’

   에서 시작한다.

- 형벌은 후손에게 미치지 않게 하고 포상은 후세에 미치도록 하라

- 백성을 다스리는 방도에 궁함이 있으면 성왕의 법제라도 고쳐야 한다

 

[만언봉사(萬言封事)]

- 사람이 성실함이 없으면 어떤 일도 안 된다(자사, 子思)

- 지극한 성실로 임하는데도 다른 사람을 감동시키지 못하는 사람은 없다(맹자, 孟子)

- 잘 다스려지는 세상에서는 덕을 높은 가치로 여기고, 어지러운 세상에서는 말을 높은

   가치로 여긴다(소옹, 邵雍)

- 임금의 자기수양 중 성학을 열심히 배워 성의와 정심의 효과를 최대한 끌어낸다것은

   큰 뜻을 세웠다고 해도 반드시 배움으로 그것을 충실하게 해야 합니다.

   그런 후에 말과 행동이 일치하고 안과 밖이 서로 의존하고 도와서 품은 큰 뜻에 실제가

   위배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학문하는 방법은 성인의 가르침 속에 주어져 있는 데 요약

   하면 크게 세 가지로 궁리(窮理, 이치를 깊이 탐구하는 것)‘, ’거경(居敬, 경건함에 머무

   는 것)‘, ’역행(力行, 도덕 원칙을 힘써 실천하는 것)입니다.

   궁리는 반드시 독서를 통해 밝게 이해하고 옛 역사를 조사해 검증하는 것이며

   거경 은 마음을 다잡을 때는 반드시 경계하고 조심하며 두려워하는 태도를 가져야 하며,

   ‘역행 은 끊임없이 힘쓰며 밤낮으로 게으르게 행동하지 않는 것이다

- 정치 지도자는 엄정해질 필요가 있는데, 그 엄정함은 외적인 모습보다는 공정함, 명료한

   상황 판단에서 나온다.

- 임금(지도자)은 엄한 것인지 아닌지를 걱정하지 말고 공정한지 그렇지 않은지를 걱정

   하여야 합니다. 공정하면 사리가 분명하게 되고, 사리가 분명하게 이해되면 엄함이

   그 속에 있다.

- 조선시대에도 최고 통치자의 비자금과 그것을 관리하는 관원이 있었는데, 비자금은

   내수사(內需司)’라는 국가기관에서 관리했다

    내수사는 하나의 관아이지만 관리인이 조정 신료가 아닌 환관으로 구성되었고,

    내수사에 관한 공무는 승정원을 거치지 않고 환관이 임금에게 직계하는 형태로 운영

    되었다. 내수사 노비는 왕실이 소유한 농장을 경작하거나 공물을 납부하는 일을 했는데

    그들은 상전이 왕실이라는 점에서 일반 공노비나 사노비보다 실제적으로 높은 지위와

    권한을 누렸다. 특히 내수 혁파론의 주된 내용은 내수사의 고리대 운영에 관한

    것이었다.

    '환관'의 주요 업무는 궁궐의 음식을 감독하거나 주방, , , 왕실의 농토, 내수사를

    관리하거나 창고나 문을 지키고 왕명을 출납하는 일 등이었는데 그 중 왕명의 출납을

    맡은 환관을 승전색(承傳色)이라 하였다. 환관은 님금의 비자금을 관리해줄 뿐만

    아니라 정치에 개입할 정도로 권력을 가질 수 있는 자리였기 때문에 조선 후기에는

    혁파의 대상이 되지만 내수사와 환관이 갖는 공통점이 임금의 사적인 영역인 관계로

    개혁의 어려움이 따랐다. 따라서 율곡은 가장 공적이어야 할 임금이 사적인 재물,

    사적인 하인을 갖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하였다.

 

작품을 덮으며 이 시대를 살고 있는 한 사람으로써 정치와 경제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비상식적 사항을 사주하거나 행동을 하고 있는 인간들에 대해 지적하고,

질타하고 싶은 이야기가 어디 한 두 개이겠는가,

앞을 봐도 답답한 마음이요 뒤를 보아도 깜깜한 그런 절벽인 상황인데 말이다.

그런 내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지금 몸담고 있는 우리 회사와 조직을 위해

율곡 선생께서 피를 쏟는 심정으로 올린 내용을 근간으로 회사 발전에 도움이 되는 것을

발췌해 이를 응용하여 회사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일부 전개를 해 보았다.

그래서 그런지 과거 내가 근무했던 중소기업에는 외국인 근로자들이 20여명 있는데 그들

은 한결같이 나를 향해 외치는 말은 항상 고맙습니’, ‘감사합니다이다.

내가 그들에게 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로지 마음으로 다가갔고, 그들을 자국인과 동일

하게 대우해 주었을 뿐이고, 어렵고 힘든 일이 있으면 그들의 부모나 형제같이 행동하고

그들 입장에서 그들을 이해해 주었을 뿐이다.

그랬더니 품질의 안정화는 물론 생산성과 직원들간의 단합이 그 어느 때보다 돈돈해지고

있음을 느끼고 있다.

계약이 만료되어 한국을 떠나게 된 외국인 근로자가 나를 찾아와 그들 전통 방식으로

작별 인사를 하고 떠날 때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었다.

그 직원이 떠나며 한국인 특히 나에 대한 인간적인 정과 함께 한국 사람이 참 좋다는 것을

확인하고 떠난다는 이야기를 할 때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무엇이 올라왔음을 이야기

하고 싶다.

이 땅의 위정자들이여 제발 정신차리고 국민의 심정을 헤아리는 그런 정치를 하소서!!!

그것도 싫으면 나 정도만이라도 해 보시라!!!!!!

그럼 최소한 욕은 먹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는데 내 생각이 틀렸나요???

 

작품을 읽으며 올바른 신하참 신하의 길에 대해 여러 문헌과 자료를 찾아 작품과

어울린다고 생각되는 내용 두 가지를 첨부해 본다.

중국 전한시대에 유향(劉向)’이라는 학자가 바른 신하와 나쁜 신하를 각각 여섯 가지로

구분한 육정육사(六正六邪)라는 지침이 있는데,

  

[바른 신하]

   - 앞일을 헤아려 군주에게 선정을 베풀도록 유도하는 성신(聖臣)

   - 좋은 계획을 진언하고 옳은 길로 가도록 보필하는 양신(良臣)

   - 어진 사람을 적극 추천하는 충신(忠臣)

   - 일을 잘 처리해 군주를 편안하게 하는 지신(智臣)

   - 원칙을 존중하고 검소한 생활을 하는 정신(貞臣)

   - 잘못을 거침없이 지적하는 직신(直臣)

 

[나쁜 신하]

   - 녹을 탐하고 지위에 안주하는 구신(具伸)

   - 아첨을 일삼는 유신(諛臣)

   - 겉과 속이 달라 판단을 흐리게 하는 간신(奸臣)

   - 남을 참소해 분열을 일으키는 참신(讒臣)

   - 개인적 이익만 추구하는 적신(賊臣)

   - 군주의 혜안을 가려 나라를 망치는 망국신(亡國臣)

 

순자(荀子)신하의 길을 다섯 가지로 나누었는데,

   1) : 명령을 따르고 군주를 이롭게 한다. 현군 아래 현신이 있는 경우로 올바른

                지시를 올바르게 잘 따르니 매사 순조롭다.

   ​2) : 명령을 거스르며 군주를 이롭게 하는 것으로 무조건적 충성이 아니다.

   ​​3) : 명령을 따르는데 군주를 이롭게 하지 못하며 군주의 잘못을 눈 감는 것.

   ​4) : 명령을 거슬러 군주를 이롭지 못하게 한다.

   5) 국적國賊 : 군주의 명예나 치욕, 나라의 흥망에 관심없고 구차하게 영합해 녹봉이나

                       받는다.

 

   책으로부터 얻는 지식

 

- 동호(東湖)란 조선의 유망한 젊은 문신들이 왕으로부터 사가독서를 받아서 책을

   읽으며 학문을 정진하던 곳 

- 겸선(兼善) 모든 사람을 선하게 함

- () 벼슬의 유무와 상관없이 도학에 종사하는 사람

- 자수(自守) 행동이나 말을 스스로 조심하여 지킨다

- 우활(迂闊) 뜻이 지극히 높지만 현실의 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

- 간담상조(肝膽相照) 서로 간과 쓸개를 꺼내 보일 정도로 숨기는 것이 없고 속 깊은

   이야기까지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교제를 말함

- 늠양(廩養) 관리에게 봉급을 주는 양속

- 하재(下齋) 성균관에 있던 학생 기숙사로 서재(西齋)라고도 함

- 나직법(羅織法) 없는 죄를 만들어 내어 무고한 자를 처벌하는 법

- ‘재이란 하늘이 내린 재앙이나 괴의한 일로써 천재지변과는 다르다.

   피전감선(避殿減膳)이란 임금이 재이를 당했을 때 근심하는 뜻으로 궁궐을 떠나

   더 누추한 곳에 거처하고 임금님의 밥상의 가지수를 줄이는 것

- 조등(刁蹬) 간계를 써서 공납 물품의 시세를 크게 올리는 것

- 채수(債帥) 뇌물을 주고 관직을 사서 장군이 된 사람

- 척간(擲姦) 부정이 있는지의 여부를 조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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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지혜 - 오천 년 역사 속에서 얻은 선현들의 가르침
리슈에청 지음, 이지은 옮김 / 미래북 / 2016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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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권유도  7

 

작품을 읽으며 일과가 끝나면 자신의 방에 들어가 아무도 안 만나고 오로지 인터넷과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소통하신다는 그 분께서 이런 책을 더 많이 읽었더라면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그런 분을 입만 열면 욕하고 폄하하며 비아냥거리는 인물들, 자신들은 뭐가 그리도 엄청 

잘났는지는 모르겠으나 국민 대다수가 볼 때는 그 밥에 그 나물인 듯한데 요새 여기저기 돌아

다니며 그 분을 조롱하고 비아냥거리는 꼴과 말투를 보면 마치 조선시대에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넘어졌던 송시열과 그 일파들이 살아 돌아온듯한 느낌을 크게 받고 있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이미 엎지러진 일에 대해 모든 국민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국가의 책임감 있는 리더로서의 기본

수습 방안 제시는 뒷전이고 오로지 권력자를 그냥 권좌에서 끌어내리려는데에만 전력을 다해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수습 방안 같은 것에는 안중에도 없고 오로지 집권욕에 불타 

불난 성난 민심에 기름을 끼얹는 작태만을 벌이는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가 하늘같이 떠받들었던 리더가 극단의 행동으로 치달을 때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해 쓸쓸히 

생을 마감하게 만들었던 문제적 인물과 그 똘마니들이 하는 행동을 보면 왕권의 정통성 문제가 걸린 체이부정복제 문제로 조선시대의 한 때를 정쟁의 소용돌이로 몰고 갔던 송시열과 

그 일파가 생각났고, 계엄령 운운하며 여기저기 떠도는 소문을 여과 없이 그대로 떠드는 인물과 

그런 인물을 옆에서 부추기는 하수인들을 보면 이 역시국정 농단으로 한 시대를 장식했던

문정왕후윤원형일파가 생각났으며, 말의 화려한 성찬으로 국민과 사회를 헷갈리게 하는 

전과자 아저씨를 보고 있노라면 추후에 부관참시까지 당한 한명회라는 인물이 생각나는 그런 

시간이다. 역사는 되풀이 된다는 단순한 진리를 저들은 왜 그리도 모를까?

 

본 작품을 통해 그런 위정자들 모두가 정화되고 생각의 깊이를 높여서 우리 국민 모두가 믿고 

의지하는 그런 리더들이 되었으면 한다.

이와는 별도로 이참에 뭔가 해보려는 곁가지 잠룡으로 위장한 지렁이 무리들은 제발 자신들의 

본분을 좀 더 잘 알았으면 한다. 서울 시민이 뽑아 줄 때 여기저기 표나오는 장소에 가서 인기 

영합적 발언하라고 뽑아 준 게 아님에도 살수차 물이 어떻고, 식수 단수를 어찌한다고 똥폼 

잡으라고 뽑아 준 것이 아님에도 또 외국에 나라일 상의하러 출장가서 우리 리더의 문제를 

고자질한다고 해서 본인들의 위상이 올라가는 것이 아닌데 왜 그리도 저급한 난리를 치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요즘 벌어지고 있는 여러 위정자들의 행태를 보면 누구든 죄 없는 자들은 

이 여인에게 돌을 던지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절실히 생각나는 오늘이다.

이런 저런 모습을 접하면서 나는 정신 차려 이 친구야....’라는 어느 노랫말 가사가 생각

나는 그런 나날들이다.


[작품을 통해 본 되새김이 필요한 문구들]


- 겸손함으로 다른 사람을 품을 줄 아는 아량은 성공을 위한 소중한 밑거름

- 신뢰는 떻게 만들어지고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만 입에 올리고, 자신이 한 말을 그대로 지키면 된다

- 솔직함이 곧 자신의 모든 생각을 있는 그대로 꺼내놓는다는 뜻은 아니다.

  솔직할수록 'TPO(시간, 장소, 상황)‘을 따져야 한다

- 공손함은 개인이 지닌 인격적 소양이자, 상대의 존중을 부르는 주문.

- 다름 아닌 자신에게 전력을 다하고 충실하라. 자기를 내버려두고 남의 일에 정신팔려 있는 

  사람은 자신의 갈 길을 잃어버린 사람이다.(공자)

- 오만하지 않아야 비로소 다른 사람을 제압할 수 있고, 교만하지 않아야 위엄을 세울 수

  있다.(제갈량)

- 인애로운 사람은 사람을 귀히 여기고 예의 바른 사람은 사람을 존중한다.(맹자)

- 구하라, 그리하면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끊임없이 구하기만 한다면 얻게 되는 것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중국 격언)

- 남의 선한 것을 보면 나의 선을 찾고, 남의 악한 것을 보면 나의 악을 찾아라 그와 같이 하면 

  바야흐로 유익이 있다.(性理書)

- 작은 것을 보면 큰 것을 알 수 있고, 처음을 알면 끝을 알 수 있다.(한비)

- 리더는 상대의 진정한 동기를 간파하는 동시에 세속적인 관점을 배제한 채 사람을 대하라.

- 누군가 지금 나를 깍듯이 대한다고 해서 영원히 그럴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 오직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는 사람에게만 지혜가 밝아지는 법이며 지혜가 밝은 사람만이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는 법이다. 이 둘은 결코 떨어질 수 없는 것이다.(중국 격언)

- 상대가 스스로 자신의 실수를 되돌아보고 반성하게 만들도록 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관용임.

- 진정한 의미의 안목은, 나와 정반대에 있는 경쟁자에ㅔ게서 장점을 찾아낼 수 있는 힘

- 능력이 뛰어난 자가 인생이라는 경주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잘 버티는 자가 승리함.

- 영원히 행복으로 가득한 인생이 없듯, 평생 불행으로 점철된 삶도 없다.

  운명은 오로지 자신의 두 손으로 만들어가는 것.

- Q 정신은 자신이 직면한 위기와 불안, 실패를 알고도 그것을 이겨내려 하지 않고 자기 위안에   빠져 그 속에서 위안과 만조글 얻은 채 현실을 외면해 버리는 심리다.

- 아는 것보다 힘써야 할 것은, 당연히 무엇에 힘써야 할 것인가를 깨닫는 것이 급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물에는 먼저와 나중, 가벼운 것과 무거운 것의 구별이 있고 아는 것보다는 

  행하는 것이 먼저다.(맹자)

- 다른 사람을 원망하고 사회를 미워할 바에야 자신의 재능을 입증할 수 있도록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는 것이 더 현명하다.

- 성공한 삶의 노하우는 자신의 장점을 효과적으로 경영하는 것이다. 큰 성공을 거둔 인물들의 

  특징은 모두 자신의 장점을 효과적으로 발휘한 인물들이며 이러한 강점을 이용해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 성공하려면 포기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 닥치는 대로 버리고 비운다고 해서 능사는 아니다. 비우기에도 목적을 지녀야 하고 채우는 

  것 역시 선택할 줄 알아야 한다.

-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성공하지 못한 사람이 아니라 우유부단하고 망설이는 사람이다

  성격은 운명을 결정한다.

- 예로부터 자신을 낮추는 마음가짐은 군자, 나아가 성공한 사람이 갖춰야 할 도덕적 소양 중 

  하나였다.

- 다투자 않는 마음이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원칙, 소신을 가지고 

  ‘만족함을 아는 범위안에서 실제 여건에 따라 자신의 능력과 업무관계를 조율하는 것이다.

- 나무는 나뭇가지가 벗겨지는 걸 두려워하고, 사람은 사기가 높아지는 걸 두려워해야 한다.

- 자기가 나서고 싶으면 먼저 남을 내세워 주고 자기가 발전하고 싶으면 남을 먼저 발전시켜 

  준다. 이것이 인자(仁者)의 태도이다.

- 느리게 성장한다고 걱정하지 말고, 오직 멈춰 서 있는 것을 두려워하라.(중국 속담)

- 남에게 좋은 말을 해 주는 것은 포백(布帛, 베와 비단)보다도 따뜻하고, 남을 상처 입히는 말은 

  포격(砲擊, 창으로 찌르는 것)보다도 깊다.(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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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은 왜 고려를 멸망시키지 않았나 - 교과서에서 배울 수 없는 한몽관계사
김운회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5년 7월
평점 :
품절


추천권유도  9

 

학창시절,

역사 시간에 몽고의 침입에 대해 배울 때 고려와 고려인들은 무수한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적개심으로 불타올랐었다.

그리고 이에 대항하는 우리의 삼별초들은 몽골군에 맞서 끝까지 저항했던 충성스러운

애국 집단인줄만 알고 살아왔기에 대학시절 독일 모 팝 그룹이 불렀던 칭기스칸이라는

팝송이 우리 주변에 마구 흘러나올 때 우리의 역사가 한 때 칭기즈칸에 의해 얼마나 능욕

당했는데 이런 노래를 즐겨 듣느냐고 한탄하면서

이런 노래는 반드시 금지되어야 마땅하다고 외쳤었다.

세월이 더 많이 흘러 다문화 가족이 생기며 몽골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괜히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면서 우리를 괴롭힌 후손들이라는 막연한 생각에 곱지 않은 시선을

갖고 바라본 게 사실이다.

하지만 작품을 통해 내가 당혹스러웠던 것은 더 많은 연구와 자료조사가 밑바탕이 된

작품을 읽어 보아야 알겠지만 몽골인과 우리는 한 핏줄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크게 들게    한 작품이었다.

반면에 이 작품 하나만 읽고 우리와 몽골의 관계에 대해 단정적으로 이야기하기가

상당히 혼란스런 순간이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작품에서 저자께서는

[한국의 지식인 사회는 이상하리만큼 몽골을 오랑캐로 치부하려는 심리가 있으며

 이런 현상은 이성계정도전에 의해 주도된 것으로 이들의 책임이 크다]

고 주장하고 있으나 이 역시 관련 역사서를 많이 섭렵해 보지 않고 쉽게 동의할 수 없는

대목인 것은 사실이나 여러 역사적 작품을 통해 간접적으로 판단해 보았을 때 저자의 그

주장은 어느 정도 개연성이 있는 추론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아무튼 이번 기회를 통해 지속해서 여러 역사적 사료에 나타난 고려와 몽골간의 특수한

관계성을 심도 있게 엿볼 생각이다.

부끄러운 우리의 과거라 할지라도 진정성을 지닌 우리 역사의 한 단면이라면 반드시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며 더 이런 생각을 갖게 해 준 인물은 바다 건너 툭하면

도발적 발언으로 우리의 속을 뒤집어 놓는 아베 존마니 색히때문이다.

 

[몽골 설화 할흐곰솔에 나타난 고려]

설화에 보면 고리(코리) 족이 동남쪽으로 이동했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몽골 전문가들

코리족 일파인 솔롱고스가 남쪽으로 가서 고구려 칸이 되었다라고 한다.

, ‘까오리 또는 코리라는 한 뿌리에서 시작되어 한반도에는 부여, 고구려가 몽골은

대초원에서 몽골족이 나왔다는 것이다. 칭기즈칸의 후예로 알려진 바이칼 인근

'부리야트족' 구전에 따르면 이 일대는 고리국(코리국) 발원지이며, 이 부족 일파가

먼 옛날 동쪽으로 가서 부여, 고구려의 뿌리가 되었다고 한다.

 

[몽골과의 첫 만남과 위상]

고려군과 몽골군의 첫 만남은 121812월 강동성에 웅거한 거란족을 격퇴하기 위해 연합

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이때 몽골과 고려 사이에는 깊은 우정이 싹트게 된다.

, 이 만남에서 이루어진 형제의 맹약은 고려측의 김취려와 조충() 장군이 몽골 측에서

는 카치온(동생) 장군에 의해 만들어진다고려에 남다른 사랑을 보인 대표적인 원나라의

인물은 황제인 세조 쿠빌라이칸이며 고려사를 보면 고려는 몽골 전체 종친 서열 4위에서

7위에 해당하는 강력한 세력이었다. 세조 쿠빌라이칸이 죽은 후 장례에 참석할 수 있는

사람은 몽골인과 고려인만이 허용되었다고 할 정도로 높은 위상을 지닌 국가였다

원나라는 점령국의 종교와 문화를 보호해 주고 철저히 능력에 따라 등용하는 사해평등

주의에 입각한 나라였는데 같은 점령국이었지만 남송인들에게 매우 각박했던 반면,

고려와는 형제 관계를 맺기 위해 인내하고 또 인내했다.

 

[몽고(원나라)에 바쳐진 공녀가 무수히 많다]

- ‘고려사절요에 근거한 결과, ‘공녀는 충렬왕 때 몰려 있고 고려 원종13년부터 공민왕

3년까지 총 82년간 원나라에 공녀로 받쳐진 여인들의 수는 공식적으로는 713명이라 한다. 이를 더욱 자세히 살펴보면 1274년부터 1276년까지 3년간 송출된 공녀의 수가 전체의 91%

이고 이후 80여 년간은 매년 1~2명씩만 공녀로 차출되었다고 한다.

- 공녀는 원나라만의 문제가 아니었고 명나라 시대에도 총 12회에 걸쳐 공녀를 요구해

146명이 공출되었는데 중종대에 이르러 조선은 명나라에 공녀 공출 금지를 요구해

이를 관철시켰다.

 

[결혼동맹]

몽고가 세계를 지배하던 시기에 그들이 지배했던 지역에서 유독 고려만은 독립국으로

남아 있었다고 한다. 또한 고려 외에 원나라가 전쟁을 치르고 정복한 나라를 부마국으로

삼은 경우는 없었다.

특히 원나라의 코앞에 위치하면서 수십 년의 긴 세월 동안 항복도 아니고 항전도 아닌

상태로 있었던 나라도 없었고, 원나라의 강력한 협박에도 고려의 대응은 이상할 정도로

여유로웠다고 한다.

몽골과의 결혼동맹에 매달린 쪽은 고려측이었다. 그 이유는 고려가 국가의 독립성도

강화하고 다루가치(점령군 관리)’를 귀찮아했고, 무신정권의 잔재로부터 왕권을 강화

하면서 원나라의 내정 간섭도 줄여야 했기 때문에 고려 원종(1219~1274)이 처음 추진하였

으며 원의 세조는 이를 적극 장려했다고 한다.

결혼동맹이 활발한 당시 원나라 여성 20만 명이 원나라에서 고려로 이주했다고 한다.

 

[충선왕 세계 제국의 2인자]

원나라 정치에 큰 영향을 끼친 이는 충선왕(1273~1325, 몽고 이름 이지리부카)이다.

그는 부왕인 충렬왕과 원 세조의 딸인 쿠툴룩켈레쉬(대장공주)’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인 대장공주가 일찍 죽는 바람에 아버지의 양위로 이른 나이에 왕위에 오른다.

사냥과 유흥에 빠진 아버지와는 달리 어려서부터 총명했다고 하며, 1298년 즉위한 후

과감한 정치, 경제, 사회 개혁을 시도하다 기득권 세력에 의해 철퇴를 맞는데, 원 세조의

손녀인 왕비 부타시리와의 관계가 소원하여 즉위 7개월만에 폐위당한다.

원나라로 끌려 들어간 충선왕은 이 기간 동안 훗날 원나라의 왕이 되는 무종’, ‘인종

등과 형제 이상으로 가까이 지내게 되는데, 성종의 후임자로 왕권을 쟁탈하는 과정에서

충선왕이 무종의 편을 들면서 태자태부’(왕의 스승)개부의동삼사에 오르게 되는데,

개부의동삼사는 황제 다음가는 위치로 원나라 권력의 2인자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충렬왕 서거 후 고려로 돌아와 왕위에 복귀하나 대부분을 원나라에서 지내고 명령을 내려

고려를 통치한다.

 

[30년 대몽항쟁의 진실]

칭기즈칸은 만주와 요동 지역을 안정시킬 필요를 느끼던 차에 거란 반군을 소탕한 뒤

고려에 형제의 맹약을 맺자는 제의를 해 온다.

(당시 사항은 고려사’ ‘열전에 상세히 나옴)

 

1차 침공

- 몽골이 조공을 요구하였으나 이를 무시함은 물론 몽골의 사신(저고여)가 피살되고

   칭기스칸도 죽는 등 정국이 혼란한 상태에서 몽골 정권의 전권을 위임받은 대장군

  ‘살리타는 자신들의 목표는 고려가 아닌 동진국임을 밝히면서 고려로부터 항복만을

   원하였으나 고려의 무신 정권(최이)은 이를 무시하고 살리타의 사신을 구금하자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 침공해 평주성 일대의 주민과 가축을 모조리 도륙(1231~32)

 

2차 침공

- 몽골이 고려에 72명의 다루가치를 주둔시키고 철수하자 이들의 존재를 귀찮아한

   무신정권은 강화도로 천도하며 다루가치들을 살해한다.

   이에 격분한 살리타가 재침공하자 무신정권은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변명하면서

   몽골군의 철수를 요청하지만 이를 거부하다 사령관인 살리타가 고려 장수(조윤후)

   의해 전투에서 전사하자 몽골군이 철수(1232)

 

3차 침공

- 몽골군이 침공하면 친 몽골파를 이용해 애걸복걸과 눈물로서 호소를 하여 위기를 돌파

  하는 작전을 구사하지만 몽골군이 철수를 하면 친몽골파를 숙청 및 제거하는 등

   믿지 못할 행동으로 일관되게 행동하자 고려에 우호적인 몽골 조정에 큰 반감을

   일으킨다. 친 몽골파의 숙청에 격노한 오고타이칸이 고려 정벌을 명령하자 고려

   국왕이 몽골 황제를 알현한다는 조건으로 몽골군의 철수를 유도하지만 고려는 매번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1235)

 

4차 침공

- 몽골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음은 물론 공물까지 받치지 않자 오고카이칸의 장자면서

   후임 국왕인 퀴위크가 다시 침공한다. 고려는 사신을 보내 무마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일전도 불사한다는 양동작전을 구사하지만 퀴위크가 사망하면서 소강상태에 빠진다.  

   최이가 죽고 최항이 권력이 잡자 원나라는 고려에 국왕의 천조를 요청하고 수도를

   육지로 천도할 것을 종용하지만 고려는 이를 거부(1247~1249)

 

5차 침공

- 12516월 헌종이 즉위하면서 고려가 원나라 황제와의 약속(국왕의 천조 및 육지

   환도)을 지키지 않은 점에 군사적 압박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보고 고려 정벌에

   나선다. 하지만 고려는 원나라 사신에 대한 환대와 거짓말, 애걸복걸, 한편으로는 몽골

   병사를 죽이는 등의 이중 행태로 원나라의 불신을 받는데, 고려 조정의 알 수 없는 치기

   치기 어린 행태들이 계속 원나라에 보고되는데 이런 무신정권(최항)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외교적인 관례조차 무시하면서 백성들의 고통은 배가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1253)

   그 결과, 무신정권을 혐오하는 분위기가 팽배해지고 왕정의 복고를 갈망하여 몽골에

   우호적인 분위기가 크게 싹트게 된다.

      

6차 침공

- 1254년 고려가 원나라에 파견한 사신을 감금하는 등 사태가 악화되자 고려 고종은

   원나라 사신을 환대하기 위해 직접 육지로 나왔으나, 무신정권의 실력자(최항)가 직접

   육지로 나오지 않자 실질적인 항복으로 볼 수 없서, 최항 정권을 믿을 수 없다면서

   1255지랄타이정동 원수로 삼아 재침공하는 데 당시 포로가 208천여 명에 이를

    정도로 고려의 피해가 컸다.(1253~1254)

 

7차 침공

- 1255년 고려가 고종의 입조와 출륙을 맹세하자, 지랄타이는 우선 압록강 쪽으로 군대를

   물리치면서 관망하지만 고려가 역시 원나라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자 또 다시 고려를

   침공해 12개월 이상을 고려를 유린한다.(1255)

   몽골군이 재침공하자 백성들도 항전 의사가 없었고 오히려 최항 정권의 무모한 대응을

   비판하기 시작하는데 이는 고려의 백성들이 몽골군을 환영하는 사태로까지 번진다.

 

8차 침공

- 몽골군이 철수하자 다시 무신정권(최항)은 모든 약속을 파기를 결의한다.

   1257년 정월, 고려는 원나라가 해마다 우리를 침범하니 공물을 바쳐도 소용없다

   구실로 몽골로 보내는 공물을 중단한다. 이즈음 최항이 죽고 그의 아들 최의가 권력을

   이어받는다. 고려가 약속을 어기자 몽골군은 재침공을 하여 개경까지 진입한다.

   1258년 대사성 류경, 별장 김인준, 박희실 등이 주축이 되어 정변을 일으켜 실권자인

    최의를 살해하면서 고려의 대몽항쟁은 끝이 난다.

 

남은 무신정권의 잔존 세력들이 삼별초라는 이름으로 진도, 제주도 등지와 무인도를

전전하다가 3년 만에 진압된다.

최씨의 무신정권은 강화도에 화려한 집을 지어놓고 안락한 생활을 했다고 하며 거대한

격구장을 지어 놀이에 열중하는 등 근검절약이나 솔선수범이라는 것은 없었고 백성들

에게는 대몽골 항전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있었으나 이는 무신정권의 기득권자들이

자신들의 정권 유지와 안락한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구호에 지나지 않았다.

결국 우리들이 배운 삼별초의 항쟁1970년 대 군사 정권이 만들어 낸 신화에 불과하다.

 

[솔롱고스와 칭기즈칸]

- ‘몽골비사에 따르면 칭기즈칸의 시조모(국모)는 알랑고아로 그녀는 고구려의 시조

   고주몽(코릴라르타이메르켄, 코리족)의 딸로 알려져 있다.

   또 주몽이 코리족에서 일부지지 세력을 이끌고 남으로 이동해 나라를 세운 뒤 코리의

   나라 중 하나임을 나타내기 위해 국명을 고(, 으뜸) 구려(코리 또는 꾸리)라고

   불렀다고 한다. 알랑고아의 12대 손이 칭기즈칸이다.

 

- 코릴라르타이메르켄을 한국어로 풀이하면 고주몽으로 활의 명인이라는 뜻이다.

 

- 몽골인은 한국을 솔롱고스또는 고을리’‘ 등으로 부른다. ‘몽골비사에 따르면

   솔롱고스라는 단어 옆에 한자로 고려(高麗)’라 표기하고 있다.

   13세기 이전에 몽골에서는 솔롱기스라는 널리 퍼져 있었는데 당시 몽골인이 신라의

   존재를 알았고 신라라는 이름이 전달되는 과정에서 솔롱고스로 변형되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어원으로 본 몽골과 고려]

- 한국 어디에서나 쉽게 접할 수 있는 아리랑의 경우 이 말의 뿌리에는 정설이 없다.

   만주어와 관련해 산()의 만주어는 아린(阿隣)’ 또는 아리라이므로 이 말과 연관성이

   있을 수 있으며 이 말은 퉁그스어, 터키어와도 일치한다.

   만주인이 자신의 본관을 말할 때 모(), () 사람이라고 한 것을 보면 아리라

   고향 또는 본관이라는 의미일 수 있다. 그러면 아리랑은 고향 즉, 마음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바이칼 주변의 민족들이 아리랑이나 쓰리랑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이성계의 조상들]

- 이성계 부자가 고려에 귀순하기 직전까지 근 100년간 몽, 원제국 옷치긴 분봉왕 휘하에

   속한 엄연한 몽골인이었다.

 

- ‘조선왕조실록태조실록총서에 따르면 이성계의 고조부는 삼척에서 동해안을 타고

   올라가 동북면 일대를 근거지로 구축했고, 1255년 옷치긴 왕가를 통해 몽골제국에서

   천호장 겸 다루가치의 작위를 받는데, 다루가치는 몽골족이 아니고는 좀처럼 수여받지

   못하는 고위 관직이다.

 

- 또한 이성계의 고조부인 이안사와 그의 후손들이 살았던 곳은 함경도 또는 현재의 옌지

   지역으로 당시에는 고려 땅이 아니라 몽골의 영토였다.

 

- 이성계의 할아버지 이춘은 원나라로부터 아버지 이행리의 천호 관직의 계승과 함께

   발안첩목아라는 몽골식 이름을 받았으며, 이자춘을 낳고 의주에서 화주(함흥 인근)

   옮겼다.

 

- 이 모든 사항을 재정립할 필요가 있었던 새 왕조의 이성계와 정도전에 의해 조선의

   역사는 새로 쓰여지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 ‘기왕후에 대한 이야기는 이 작품을 읽었음에도 여기에 언급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나의 관점으로 보았을 때 아직도 재검토 할 여지가 많은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 본 독후감은 2015년에 작성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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