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은 왜 고려를 멸망시키지 않았나 - 교과서에서 배울 수 없는 한몽관계사
김운회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5년 7월
평점 :
품절


추천권유도  9

 

학창시절,

역사 시간에 몽고의 침입에 대해 배울 때 고려와 고려인들은 무수한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적개심으로 불타올랐었다.

그리고 이에 대항하는 우리의 삼별초들은 몽골군에 맞서 끝까지 저항했던 충성스러운

애국 집단인줄만 알고 살아왔기에 대학시절 독일 모 팝 그룹이 불렀던 칭기스칸이라는

팝송이 우리 주변에 마구 흘러나올 때 우리의 역사가 한 때 칭기즈칸에 의해 얼마나 능욕

당했는데 이런 노래를 즐겨 듣느냐고 한탄하면서

이런 노래는 반드시 금지되어야 마땅하다고 외쳤었다.

세월이 더 많이 흘러 다문화 가족이 생기며 몽골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괜히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면서 우리를 괴롭힌 후손들이라는 막연한 생각에 곱지 않은 시선을

갖고 바라본 게 사실이다.

하지만 작품을 통해 내가 당혹스러웠던 것은 더 많은 연구와 자료조사가 밑바탕이 된

작품을 읽어 보아야 알겠지만 몽골인과 우리는 한 핏줄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크게 들게    한 작품이었다.

반면에 이 작품 하나만 읽고 우리와 몽골의 관계에 대해 단정적으로 이야기하기가

상당히 혼란스런 순간이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작품에서 저자께서는

[한국의 지식인 사회는 이상하리만큼 몽골을 오랑캐로 치부하려는 심리가 있으며

 이런 현상은 이성계정도전에 의해 주도된 것으로 이들의 책임이 크다]

고 주장하고 있으나 이 역시 관련 역사서를 많이 섭렵해 보지 않고 쉽게 동의할 수 없는

대목인 것은 사실이나 여러 역사적 작품을 통해 간접적으로 판단해 보았을 때 저자의 그

주장은 어느 정도 개연성이 있는 추론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아무튼 이번 기회를 통해 지속해서 여러 역사적 사료에 나타난 고려와 몽골간의 특수한

관계성을 심도 있게 엿볼 생각이다.

부끄러운 우리의 과거라 할지라도 진정성을 지닌 우리 역사의 한 단면이라면 반드시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며 더 이런 생각을 갖게 해 준 인물은 바다 건너 툭하면

도발적 발언으로 우리의 속을 뒤집어 놓는 아베 존마니 색히때문이다.

 

[몽골 설화 할흐곰솔에 나타난 고려]

설화에 보면 고리(코리) 족이 동남쪽으로 이동했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몽골 전문가들

코리족 일파인 솔롱고스가 남쪽으로 가서 고구려 칸이 되었다라고 한다.

, ‘까오리 또는 코리라는 한 뿌리에서 시작되어 한반도에는 부여, 고구려가 몽골은

대초원에서 몽골족이 나왔다는 것이다. 칭기즈칸의 후예로 알려진 바이칼 인근

'부리야트족' 구전에 따르면 이 일대는 고리국(코리국) 발원지이며, 이 부족 일파가

먼 옛날 동쪽으로 가서 부여, 고구려의 뿌리가 되었다고 한다.

 

[몽골과의 첫 만남과 위상]

고려군과 몽골군의 첫 만남은 121812월 강동성에 웅거한 거란족을 격퇴하기 위해 연합

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이때 몽골과 고려 사이에는 깊은 우정이 싹트게 된다.

, 이 만남에서 이루어진 형제의 맹약은 고려측의 김취려와 조충() 장군이 몽골 측에서

는 카치온(동생) 장군에 의해 만들어진다고려에 남다른 사랑을 보인 대표적인 원나라의

인물은 황제인 세조 쿠빌라이칸이며 고려사를 보면 고려는 몽골 전체 종친 서열 4위에서

7위에 해당하는 강력한 세력이었다. 세조 쿠빌라이칸이 죽은 후 장례에 참석할 수 있는

사람은 몽골인과 고려인만이 허용되었다고 할 정도로 높은 위상을 지닌 국가였다

원나라는 점령국의 종교와 문화를 보호해 주고 철저히 능력에 따라 등용하는 사해평등

주의에 입각한 나라였는데 같은 점령국이었지만 남송인들에게 매우 각박했던 반면,

고려와는 형제 관계를 맺기 위해 인내하고 또 인내했다.

 

[몽고(원나라)에 바쳐진 공녀가 무수히 많다]

- ‘고려사절요에 근거한 결과, ‘공녀는 충렬왕 때 몰려 있고 고려 원종13년부터 공민왕

3년까지 총 82년간 원나라에 공녀로 받쳐진 여인들의 수는 공식적으로는 713명이라 한다. 이를 더욱 자세히 살펴보면 1274년부터 1276년까지 3년간 송출된 공녀의 수가 전체의 91%

이고 이후 80여 년간은 매년 1~2명씩만 공녀로 차출되었다고 한다.

- 공녀는 원나라만의 문제가 아니었고 명나라 시대에도 총 12회에 걸쳐 공녀를 요구해

146명이 공출되었는데 중종대에 이르러 조선은 명나라에 공녀 공출 금지를 요구해

이를 관철시켰다.

 

[결혼동맹]

몽고가 세계를 지배하던 시기에 그들이 지배했던 지역에서 유독 고려만은 독립국으로

남아 있었다고 한다. 또한 고려 외에 원나라가 전쟁을 치르고 정복한 나라를 부마국으로

삼은 경우는 없었다.

특히 원나라의 코앞에 위치하면서 수십 년의 긴 세월 동안 항복도 아니고 항전도 아닌

상태로 있었던 나라도 없었고, 원나라의 강력한 협박에도 고려의 대응은 이상할 정도로

여유로웠다고 한다.

몽골과의 결혼동맹에 매달린 쪽은 고려측이었다. 그 이유는 고려가 국가의 독립성도

강화하고 다루가치(점령군 관리)’를 귀찮아했고, 무신정권의 잔재로부터 왕권을 강화

하면서 원나라의 내정 간섭도 줄여야 했기 때문에 고려 원종(1219~1274)이 처음 추진하였

으며 원의 세조는 이를 적극 장려했다고 한다.

결혼동맹이 활발한 당시 원나라 여성 20만 명이 원나라에서 고려로 이주했다고 한다.

 

[충선왕 세계 제국의 2인자]

원나라 정치에 큰 영향을 끼친 이는 충선왕(1273~1325, 몽고 이름 이지리부카)이다.

그는 부왕인 충렬왕과 원 세조의 딸인 쿠툴룩켈레쉬(대장공주)’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인 대장공주가 일찍 죽는 바람에 아버지의 양위로 이른 나이에 왕위에 오른다.

사냥과 유흥에 빠진 아버지와는 달리 어려서부터 총명했다고 하며, 1298년 즉위한 후

과감한 정치, 경제, 사회 개혁을 시도하다 기득권 세력에 의해 철퇴를 맞는데, 원 세조의

손녀인 왕비 부타시리와의 관계가 소원하여 즉위 7개월만에 폐위당한다.

원나라로 끌려 들어간 충선왕은 이 기간 동안 훗날 원나라의 왕이 되는 무종’, ‘인종

등과 형제 이상으로 가까이 지내게 되는데, 성종의 후임자로 왕권을 쟁탈하는 과정에서

충선왕이 무종의 편을 들면서 태자태부’(왕의 스승)개부의동삼사에 오르게 되는데,

개부의동삼사는 황제 다음가는 위치로 원나라 권력의 2인자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충렬왕 서거 후 고려로 돌아와 왕위에 복귀하나 대부분을 원나라에서 지내고 명령을 내려

고려를 통치한다.

 

[30년 대몽항쟁의 진실]

칭기즈칸은 만주와 요동 지역을 안정시킬 필요를 느끼던 차에 거란 반군을 소탕한 뒤

고려에 형제의 맹약을 맺자는 제의를 해 온다.

(당시 사항은 고려사’ ‘열전에 상세히 나옴)

 

1차 침공

- 몽골이 조공을 요구하였으나 이를 무시함은 물론 몽골의 사신(저고여)가 피살되고

   칭기스칸도 죽는 등 정국이 혼란한 상태에서 몽골 정권의 전권을 위임받은 대장군

  ‘살리타는 자신들의 목표는 고려가 아닌 동진국임을 밝히면서 고려로부터 항복만을

   원하였으나 고려의 무신 정권(최이)은 이를 무시하고 살리타의 사신을 구금하자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 침공해 평주성 일대의 주민과 가축을 모조리 도륙(1231~32)

 

2차 침공

- 몽골이 고려에 72명의 다루가치를 주둔시키고 철수하자 이들의 존재를 귀찮아한

   무신정권은 강화도로 천도하며 다루가치들을 살해한다.

   이에 격분한 살리타가 재침공하자 무신정권은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변명하면서

   몽골군의 철수를 요청하지만 이를 거부하다 사령관인 살리타가 고려 장수(조윤후)

   의해 전투에서 전사하자 몽골군이 철수(1232)

 

3차 침공

- 몽골군이 침공하면 친 몽골파를 이용해 애걸복걸과 눈물로서 호소를 하여 위기를 돌파

  하는 작전을 구사하지만 몽골군이 철수를 하면 친몽골파를 숙청 및 제거하는 등

   믿지 못할 행동으로 일관되게 행동하자 고려에 우호적인 몽골 조정에 큰 반감을

   일으킨다. 친 몽골파의 숙청에 격노한 오고타이칸이 고려 정벌을 명령하자 고려

   국왕이 몽골 황제를 알현한다는 조건으로 몽골군의 철수를 유도하지만 고려는 매번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1235)

 

4차 침공

- 몽골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음은 물론 공물까지 받치지 않자 오고카이칸의 장자면서

   후임 국왕인 퀴위크가 다시 침공한다. 고려는 사신을 보내 무마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일전도 불사한다는 양동작전을 구사하지만 퀴위크가 사망하면서 소강상태에 빠진다.  

   최이가 죽고 최항이 권력이 잡자 원나라는 고려에 국왕의 천조를 요청하고 수도를

   육지로 천도할 것을 종용하지만 고려는 이를 거부(1247~1249)

 

5차 침공

- 12516월 헌종이 즉위하면서 고려가 원나라 황제와의 약속(국왕의 천조 및 육지

   환도)을 지키지 않은 점에 군사적 압박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보고 고려 정벌에

   나선다. 하지만 고려는 원나라 사신에 대한 환대와 거짓말, 애걸복걸, 한편으로는 몽골

   병사를 죽이는 등의 이중 행태로 원나라의 불신을 받는데, 고려 조정의 알 수 없는 치기

   치기 어린 행태들이 계속 원나라에 보고되는데 이런 무신정권(최항)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외교적인 관례조차 무시하면서 백성들의 고통은 배가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1253)

   그 결과, 무신정권을 혐오하는 분위기가 팽배해지고 왕정의 복고를 갈망하여 몽골에

   우호적인 분위기가 크게 싹트게 된다.

      

6차 침공

- 1254년 고려가 원나라에 파견한 사신을 감금하는 등 사태가 악화되자 고려 고종은

   원나라 사신을 환대하기 위해 직접 육지로 나왔으나, 무신정권의 실력자(최항)가 직접

   육지로 나오지 않자 실질적인 항복으로 볼 수 없서, 최항 정권을 믿을 수 없다면서

   1255지랄타이정동 원수로 삼아 재침공하는 데 당시 포로가 208천여 명에 이를

    정도로 고려의 피해가 컸다.(1253~1254)

 

7차 침공

- 1255년 고려가 고종의 입조와 출륙을 맹세하자, 지랄타이는 우선 압록강 쪽으로 군대를

   물리치면서 관망하지만 고려가 역시 원나라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자 또 다시 고려를

   침공해 12개월 이상을 고려를 유린한다.(1255)

   몽골군이 재침공하자 백성들도 항전 의사가 없었고 오히려 최항 정권의 무모한 대응을

   비판하기 시작하는데 이는 고려의 백성들이 몽골군을 환영하는 사태로까지 번진다.

 

8차 침공

- 몽골군이 철수하자 다시 무신정권(최항)은 모든 약속을 파기를 결의한다.

   1257년 정월, 고려는 원나라가 해마다 우리를 침범하니 공물을 바쳐도 소용없다

   구실로 몽골로 보내는 공물을 중단한다. 이즈음 최항이 죽고 그의 아들 최의가 권력을

   이어받는다. 고려가 약속을 어기자 몽골군은 재침공을 하여 개경까지 진입한다.

   1258년 대사성 류경, 별장 김인준, 박희실 등이 주축이 되어 정변을 일으켜 실권자인

    최의를 살해하면서 고려의 대몽항쟁은 끝이 난다.

 

남은 무신정권의 잔존 세력들이 삼별초라는 이름으로 진도, 제주도 등지와 무인도를

전전하다가 3년 만에 진압된다.

최씨의 무신정권은 강화도에 화려한 집을 지어놓고 안락한 생활을 했다고 하며 거대한

격구장을 지어 놀이에 열중하는 등 근검절약이나 솔선수범이라는 것은 없었고 백성들

에게는 대몽골 항전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있었으나 이는 무신정권의 기득권자들이

자신들의 정권 유지와 안락한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구호에 지나지 않았다.

결국 우리들이 배운 삼별초의 항쟁1970년 대 군사 정권이 만들어 낸 신화에 불과하다.

 

[솔롱고스와 칭기즈칸]

- ‘몽골비사에 따르면 칭기즈칸의 시조모(국모)는 알랑고아로 그녀는 고구려의 시조

   고주몽(코릴라르타이메르켄, 코리족)의 딸로 알려져 있다.

   또 주몽이 코리족에서 일부지지 세력을 이끌고 남으로 이동해 나라를 세운 뒤 코리의

   나라 중 하나임을 나타내기 위해 국명을 고(, 으뜸) 구려(코리 또는 꾸리)라고

   불렀다고 한다. 알랑고아의 12대 손이 칭기즈칸이다.

 

- 코릴라르타이메르켄을 한국어로 풀이하면 고주몽으로 활의 명인이라는 뜻이다.

 

- 몽골인은 한국을 솔롱고스또는 고을리’‘ 등으로 부른다. ‘몽골비사에 따르면

   솔롱고스라는 단어 옆에 한자로 고려(高麗)’라 표기하고 있다.

   13세기 이전에 몽골에서는 솔롱기스라는 널리 퍼져 있었는데 당시 몽골인이 신라의

   존재를 알았고 신라라는 이름이 전달되는 과정에서 솔롱고스로 변형되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어원으로 본 몽골과 고려]

- 한국 어디에서나 쉽게 접할 수 있는 아리랑의 경우 이 말의 뿌리에는 정설이 없다.

   만주어와 관련해 산()의 만주어는 아린(阿隣)’ 또는 아리라이므로 이 말과 연관성이

   있을 수 있으며 이 말은 퉁그스어, 터키어와도 일치한다.

   만주인이 자신의 본관을 말할 때 모(), () 사람이라고 한 것을 보면 아리라

   고향 또는 본관이라는 의미일 수 있다. 그러면 아리랑은 고향 즉, 마음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바이칼 주변의 민족들이 아리랑이나 쓰리랑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이성계의 조상들]

- 이성계 부자가 고려에 귀순하기 직전까지 근 100년간 몽, 원제국 옷치긴 분봉왕 휘하에

   속한 엄연한 몽골인이었다.

 

- ‘조선왕조실록태조실록총서에 따르면 이성계의 고조부는 삼척에서 동해안을 타고

   올라가 동북면 일대를 근거지로 구축했고, 1255년 옷치긴 왕가를 통해 몽골제국에서

   천호장 겸 다루가치의 작위를 받는데, 다루가치는 몽골족이 아니고는 좀처럼 수여받지

   못하는 고위 관직이다.

 

- 또한 이성계의 고조부인 이안사와 그의 후손들이 살았던 곳은 함경도 또는 현재의 옌지

   지역으로 당시에는 고려 땅이 아니라 몽골의 영토였다.

 

- 이성계의 할아버지 이춘은 원나라로부터 아버지 이행리의 천호 관직의 계승과 함께

   발안첩목아라는 몽골식 이름을 받았으며, 이자춘을 낳고 의주에서 화주(함흥 인근)

   옮겼다.

 

- 이 모든 사항을 재정립할 필요가 있었던 새 왕조의 이성계와 정도전에 의해 조선의

   역사는 새로 쓰여지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 ‘기왕후에 대한 이야기는 이 작품을 읽었음에도 여기에 언급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나의 관점으로 보았을 때 아직도 재검토 할 여지가 많은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 본 독후감은 2015년에 작성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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