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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뒤흔든 최대 역모사건 - 조선 천재 1000명이 죽음으로 내몰린 사건의 재구성
신정일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07년 10월
평점 :
작품의 에필로그에 보면
‘역사란 많은 거짓말 중에서 진실과 가장 비슷한 거짓말을 골라내는 기술이다’(루소)
라는 문구가 있는데, 정여립 모반 사건을 가장 잘 관통하는 문구로 여겨진다.
작품을 읽은 지 거의 한 달여가 되어 가지만 작품을 정리하기가 정말 난해하다.
나름대로 중심을 잡고 작품을 정리한다고 해도 글을 읽는 이들의 관점에 따라 글쓴이를 특정
계파나 사상에 전도된 인물로 평가해 버리는 순간 나름대로 중심을 잡고 썼다고 믿는 내가 받게
될 상처의 깊이를 알기 때문에 항상 책을 읽고 즐겨 해 왔던 작품 정리를 쉽게 하지 못하고 있다.
해당 작품을 두 번이나 완독하며 갖게 된 생각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관점으로 평가하고
기록해 놓는 것도, 나의 그런 글을 읽고 비난하는 이들의 관점을 받아들이는 것도 전부 올바른
독서의 한 방편이라는 생각에 정리를 해 보았다.
조선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하인리히 법칙’처럼 특정한 사건이 벌어지기 전에는 수많은 자잘한
사건들이 ‘씨줄’과 ‘날줄’처럼 얽혀져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한다.
지금도 우리의 역사학계에 여러 논쟁 중인 역사적 사실이 한 둘이 아닌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 작품도 그런 범주 중 하나가 아닌가 생각하고 있다.
본 작품 역시 그런 범주 - 개인적인 관심도에 따라 여러 사건을 들 수 있겠으나 – 에 속하는
사건이라 생각하며, 여기에 그런 애매모호한 사건 한가지를 더 들라고 한다면 아마도 '사도세자’
죽음과 관련된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 내용에 관한 것일 것이다
내가 두 사건에 관심을 갖고 있고 지금도 틈만 나면 관련되는 서적을 구매해 읽고 있는 이유는
역사서를 읽는 과정에서 접하게 된 두 사건의 이면에 감추어진 내용이 내가 학창 시절 배웠고
알고 있는 내용과 달라도 너무나 달라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이다.
특히, 정여립 역모사건의 경우는 작품의 에필로그에서도 언급하고 있지만 당초 ‘선조 실록’에서는
언급이 없었던 사건이 ‘서인’이 중심이 되어 기록된 ‘선조수정실록’에 나타나고 있다는 점으로
그런 국가적 혼란을 초래한 역모사건이 왜 이렇게 둘쭉날쭉으로 취급되고 있는지가 내 궁금증을
더욱 부채질하고 있기 때문이다.
분명한 사실은 해당 사건이 실제 있었다는 점이고, 그 파장이 장난이 아니었다는 점을 전제로
놓고 해당 사건에서 나타나고 있는 ‘의구심’에 대한 몇가지 개인적인 이야기를 해 보고자 한다.
정여립 사건을 접하면 접할수록 드는 의구심은
의문 1. 정여립은 여러 기성세대로부터 조정에 천거되는 큰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희망하는 공직(이조전랑)에서 좌천되자 스승과 조정에 반기를 들게 되었다고 하는데
단순히 그 내용이 사실일까?(작품 P 81쪽)
의문 2. 정여립의 모반 계획을 완성하기 전에 왜 학식과 덕망이 출중했었을 당시의 권력자들은
사전에 그런 ‘가식’을 사전에 알아차리지 못하였던 것일까?
* 이 의문점은 오늘날도 문제이기도 하다.
의문 3. 정여립이 모반을 획책하며 조직했다던 '대동계'의 진정한 실체가 무엇이며 진정 모반을
위한 결사대였을까?
의문 4. 본 사건이 왜 ‘선조 실록’에는 없다가 서인이 중심이 되어 만들어진 ‘선조수정실록’에는
기록되어 있는 것일까?
등 같은 수준 낮은 의문이지만 나는 작품을 읽는 내내 이 의문점으로 인해 마음 고생을 심하게
하였음을 고백한다.
선조는 재위 41년의 태반을 당쟁과 미증유의 전란에 시달린 시기를 지나왔다.
임진왜란 발발 3년 전 발생해, 1천 여 명의 선비의 목숨을 앗아간 ‘기축옥사’의 단초가 된
‘정여립 사건’은 ‘비밀 장계’로부터 시작되는데,
선조 22년(1589년) 만만치 않은 관직을 역임하다 전주로 낙향한 정여립이 왕이 되기 위해 일을
꾸미고 있다는 장계를 받게 되는데, 이를 보고 받은 선조는 금부도사를 파견해 주도자인
정여립과 그 일당을 잡아오도록 명하지만 그들은 자결해 버리고 그 시신만 확보하는데 그치고
세부 사항을 파악하지 못하게 되자 이를 철저히 규명한다는 미명아래 동인의 영수인 영의정
‘정언신’에게 책임을 맡기지만 증거라고는 ‘급보’ 외에는 없기에 조사가 답보에 빠지자 정언신을
대신해 재야에 있던 서인의 핵심‘정철’을 우의정에 임명하며 조사를 맡기자 비로소 반역이
기정 사실로 전환되며 ‘기축옥사’는 완성된다.
참고로 동인의 영수 ‘정언신’은 조선 역사에 드물게 전략과 군사에 뛰어난 인물로 인재를 알아
보는 안목이 뛰어났다고 한다.
예로서 ‘이순신 장군’을 등용하고 기회를 주었으며 장군이 수형당할 위기에 처했을 때 적극
변호하여 ‘백의종군’으로 감형될 수 있게 하였으며 임진왜란 당시의 김시민 장군, 이억기 장군을
위시한 많은 인재를 발굴했다고 한다.
작품을 접하면서 내가 위에서 제시한 의구심 못지 않게 상당히 나를 힘들게 했었던 부분은
정여립에 대한 인물평이 상당히 상반되는 내용과 주장으로 구성되어 있어 해당 인물의 정확한
실체를 잘 모르겠다는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정여립이 누구에게 학문을 배웠는지 알려져 있지 않다고 하며 기축옥사 당시
집중적으로 피해를 입은 ‘최부’의 제자들이 상당수였던 것으로 보아 최부의 후학이며 서경덕의
문인인 이중호(이발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측한다고 하는 점이다.
정여립이 조정에 나가게 된 배경을 다루는 부분을 살펴보면,
선조가 ‘영중추부사 노수신’에게 우수인재(선비)를 추천하라는 명을 내려 김우옹, 이발, 백유양,
정여립(추천 되었던 해당 인물들은 추후 기축옥사 당시 전부 큰 피해를 입게 됨)을 추천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그냥 과거에 급제해 두각을 나타내거나, 어느 명망 있는 가문의 후손이라는 잇점을
안고 기득권층에 발을 담근 것이 아닌 학식과 덕망이 어느 정도 겸비된 인물이었을 것으로
추측되며 한 때 선조를 가르친 적이 있는 ‘한윤명’ 역시 정여립을 당대에 가장 빼어난 유학자라
일컬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출발이 다소 이해되지 않는 부분을 굳이 들라고 한다면
당초 정려립은 전주 출신으로 당시 호남 출신들이 대부분 ‘동인’이었음에도 ‘서인’인 이이의
문하에 들어가 ‘나는 서인 당을 찾아온 것이 아니고 이이 선생님을 찾아온 것’이라 일갈하며
이이 밑에서 활동하며 이이의 추천으로 여러 중요 보직에 보임되었다고 하는데,
당시 사회 분위기와 권력자들의 행태를 보았을 때 그런 기개를 높이 살만은 하다고 여겨지나
그런 기개 뒤에 숨겨진 어떤 ‘야욕’이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서인들이 주도된 ‘선조수정실록’을 보면 그를 아주 다른 부정적인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
가장 눈에 띄는 내용은 ‘이이 선생’이 죽은 후 정여립이 서인을 버리고 동인을 선택한 이유가
서인 측에서 ‘이조전랑’으로 천거된 정여립을 이이가 한사코 막았기 때문이라고 기록하면서
이이는 겉과는 달리 속으로는 정여립의 과격성을 견제했던 듯하다고 설명하고 있는데
이 대목이 사실이라면 내가 위에서 언급한 정여립의 야욕의 그림자가 이이 밑에서 드러났다고
보여지는 대목이며 그런 이유가 아니라면 말 그대로 정여립이라는 인물의 인간성이 저급한
인물이라고 보는 것이 맞지 않을까 생각한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는 조정에 나간 인물의 인간성을 주변인들에게 잠시 잠깐은 속일 수 있어도
긴 시간 동안은 숨길 수 없다는 점을 놓고 보있을 때 역사서에 기록된 내용이 사실이라면
웬지 앞 뒤가 안 맞는듯한 느낌 즉, 결론을 만들어 놓고 정여립이라는 인물을 그쪽으로 몰고간
느낌이 든 인물평이라 생각되게 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작품 전반에 걸쳐 혹은 부분적으로 정여립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가 나오다 이런
이야기가 나오면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을 갖겠지만 뜬금없이 ‘선조수정실록’등을 이야기하면서
이이의 속마음을 전하면서 ‘정여립이라는 인물이 이런 사람이다’ 라고 기술하는 것은 내가 쉽게
납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특히, 더욱 웃긴 이야기는 아무리 역사가 승자의 기록물이라고는 하나 ‘전주 부윤’으로 정여립을
가까이할 기회가 많았던 ‘심의겸’은 윤두수에게
‘정여립은 아비와 임금을 시해하는 일이라도 할 만한 위인이다’
라고 언급하고 있는데 어떤 사례를 갖고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에 대한 예화도 없이 일방적으로
이런 이유로 정여립이라는 인물이 저급하다는 주장에 쉽게 동의하기가 어려웠다.
또한 문신 이경중 역시
‘만일 그를 쓰면 반드시 조정을 어지럽히고 선비들에게 욕을 끼치게 될 것이다’
라는 말로 정여립을 평하고 있는데 이 역시 특정 근거 없이 언급한 내용으로 위와 같이 나는
정여립에 대한 역사적 인물들의 인물 평가에 쉽게 동의하기가 어려웠다.
정여립이 그렇게 평가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아마도 선조의 눈 밖에 난 것이 가장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을 것으로 보는 게 타당할 것이라 생각한다.
선조가 정여립이라는 인물을 ‘나쁜 인물’로 찍자, 주변인들이 아부하느라 관련 인물의 과거
행적을 들고파서 위와 같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꾸며낸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정여립이 ‘선조’의 눈에 난 결정적인 사건은 아마도 ‘선조 17년’ 사직을 하고 조정을 떠났던
정여립이 1년 후 복귀하며 올린 글에서
‘박순은 간사한 무리들의 괴수이고 이이는 나라를 그르친 소인이며 성혼은 간사한 무리들을
편들어 상소를 올려 임금을 기만했습니다...(중략)’
라고 상소를 올리자 ‘선조’는 이이가 살아 있을 때 스승으로 섬기던 정여립이 스승인 이이를
비난하자 이를 크게 못마땅하게 여기면서라고 저자는 분석하고 있는데 나 역시 야기에 동감한다.
하지만 이런 정여립에 대해 ‘소설가 이병주 선생’은 정여립이 이이를 비방하고 나선 이유를
‘혼자 점잖은 태도, 자신만이 천하의 도리를 알고 있는 척하는 태도,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식의
독선에 대한 혐오 때문이었고, 그 위선의 가면을 갈기갈기 찢어놓고 싶은 충동 때문이었을 것’
이라는 분석을 내놓으면서 정여립을 편들고 있지만 이런 해석은 너무도 정여립 편에 선 해석이고
변명이 아닌가 생각한다.
정여립은 이이와 성혼을 비판함으로써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고 말았던 것이다.
의주 목사 ‘서익’의 상소로 인해 정여립은 완전 궁지에 몰리며 ‘기축옥사’의 서막이 열리게 된다.
선조는 ‘상소를 보니 그의 말이 허망해 헤아리기 어렵다. 내가 말하는 현인이란 이이와 성혼인데
이 사람을 공격하는 자들은 반드시 간사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서 정여립을 궁지로 내몬다.
선조의 그런 말을 들은 정여립은 선조 아래서는 어떤 일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동인들이 집권하던 시기에 신망을 한 몸에 받았던 정여립, 그는 벼슬을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
갈 수 밖에 없었던 데는 세간의 비난도 있었지만 선조가 자신에 대해 갖고 있던 감정도 한 몫
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인측에서는 정여립을 어떻게 하든 조정에 나갈 수 있도록 지원해 주려고
노력하지만 모두 무위로 돌아간다. 특히 정여립이 기축옥사가 일어나던 선조 22년 ‘황해도사’를
희망하지만 선조는 정여립이 오만방자한 사람이라고 하여 동인의 청을 들어주지 않았고 이 건은
훗날 황해도는 명종 때 일어난 ‘임꺽정의 난’이 일어난 곳으로 당시 세간에 떠돌던 미륵신앙과
어우러지면서 또 정여립이 조직한 ‘대동계’로 인해 서인들로부터 역모를 준비했다는 의심을 받게
되는 단초를 제공하기도 한다.
참고로 ‘대동계(大同契)’에 대해 알아보면, 대동계는 본래 주나라 시대에 어질고 재능 있는
인재를 등용할 목적으로 시행되었던 향사례(鄕射禮)‘를 지역사회에 구현한 것으로
’대동‘이란 일반적으로 ’대동소이‘, ’대동단결‘, ’태평성세‘라는 의미로 쓰였는데,
이 가운데 ’태평성세‘라는 의미의 뿌리는 ’예기‘에 처음 등장하는 이상사회로서의 대동으로
이때의 동(同)’은 사람들이 장막 안에 모여서 대화를 나누고 음식을 먹는다는 의미로 ‘평(平)’과
‘화(和)’를 뜻하는 의미로 ‘대동사회’는 천하위공(天下爲公) 즉, 천하는 가문의 사물(私物)이
아니고 만민의 공물(公物)이라는 의미이다.
정여립은 대동계를 조직해 운영하며 유교의 이단자인 ‘순자’에 대해 자주 말하면서
‘인간의 본성은 요 임금과 순 임금 그리고 포악한 사람과 큰 도둑이 다르지 않으며 시정잡배도
배우면 우 임금이 될 수 있다’고 공언하며 봉건사회의 강령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천하는 만인의
것이라는 사상을 내세우게 되면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된다.
정여립과 관련된 숨겨진 이야기를 확인해 보면,
- ‘기축옥사’의 최고 사령관이 ‘정철’이었다면, 배후에서 조정한 인물은 ‘송익필’이었다는 게
일반적인 정설이라고 본다. 기축옥사 전개 과정에서 큰 영향을 준 ‘양천회’의 상소나 정여립에
불리한 여론 역시 대부분 송익필에게서 나왔으며, 송익필은 정여립을 함정에 몰아넣을
심산으로 승려 ‘의엄’을 시켜 길삼봉과 정여립을 결부시킨 정감록의 참설을 민간에 유포했고
해서지방의 백성들을 사주해 정여립에게 동조한 것으로 알리바이를 조작했다고 한다.
- ‘연루자를 고발하면 표창하겠다’는 명을 조선 팔도에 내리자 기축옥사는 확대되어 나갔다.
정여립과 편지를 주고받았거나 옷소매라도 스친 인연이 있었던 사람들은 결코 피해 나갈 수
없었는데 가장 우려한 쪽은 정여립이 몸을 담았던 ‘동인’이었다.
- 기축옥사와 관련된 인물, ‘이산해’와 ‘조헌’과 정개청의 가문 ‘고성 정씨’와 정철의 가문 ‘연일
정씨’ 그리고 이발의 가문 ‘광산 이씨’ 사이에는 서로 결혼하지 않는 풍습이 남아 있는 이유는
바로 기축옥사와 관련된 사항이지만 작품에서는 이를 이야기해 줄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가
부실하여 작품에 언급된 이야기만으론 전체를 알 수 없기에 여기서 취급을 제한하였다.
기축옥사 당시 ‘성혼’이 올린 상소문에 이런 글이 있다.(P278)
‘치도는 할 말이 따로 없다. 임금이 공손하고 검소하며 선을 좋아해야 한다. 말이 마음에 거슬리
면 반드시 정도에 의거해 따져보고, 말이 마음에 들면 반드시 정도가 아닌 것에 의거해 따져
보아야 한다. 그것 뿐이다.’
이 땅에 살고 있는 우리의 위정자들은 해당 글을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며 예전에도
이런 작품류를 읽으며 왜 선거철만 되면 우리 역사에서 모반을 꿈꾸었고, 개혁을 주도했다
실패한 인물둘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언급되고 있는지를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라는 주장한 적이
있다. 왜일까?
선거는 개혁의 단초이고 개혁을 통해 혁명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끝으로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의 위정자들을 보면 왜 조선시대의 식자층처럼 자신의 뜻이
관철되지 않거나 혹은 권력자의 뜻과 일치되지 않으면 언제든지 자신의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자리를 박차고 ‘야인’으로 돌아서는 의연한 자세가 없는지가 아쉬울 따름이다.
자신을 임명해 준 리더에 대해 원칙과 명분도 없이 무조건 쓴소리만 하는 것이 진정한 참모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리더를 보좌하는 참모가 리더와 정책적인 의견 충돌로 자신의 자리를 내
던졌다 라는 소식을 접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그런 사람이 아예 없기 때문이 아닐까?
당 태종이 책사인 이사를 두고
‘나는 이사 때문에 몸이 말라가지만 백성들은 편안해 지고 있다’
라고 말했다고 하는데 두고두고 생각해 볼 일이다.
리더와 책사(참모) 모두가 맘 편했던 세상은 임진왜란 당시 끝없이 부하의 허물과 잘못을 감싸고
돌았던 ‘선조’와 ‘원균’뿐이었음을 정확히 알아야 할 것이다. 답답한 작금의 세태다.
작품의 에필로그를 들추다 보니 이런 내용이 나온다.
혁명이 발생하는(라스웰, P332)는 다섯 가지 조건이 있다고 한다.
첫째 지식인을 뒷받침하는 정도가 약할 때
둘째, 분배 정책에 실패했을 때
셋째, 지배 세력이 무능할 때
넷째, 지식인이 폭력을 억제할 능력을 상실했을 때
다섯, 반 지식인의 조직이 강할 때
지금의 정부와 정권은 위에서 언급되고 있는 조건 중 몇 가지가 충족되고 있는지를 처절히
스스로 돌아보기를 바란다.
추신) 정철, 송익필.....그들은 한 때 정권의 실세였고, 넘사벽이었던 주역이었으나 시간이 흘러
자신들이 한 짓만큼 되돌려 받고 역사에서 아주 저급하게 퇴출되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특히, 송익필 선생의 말로는 ‘나는 선비로소이다’(임상혁, 역사비평)라는 작품에 잘 나와
있으니 참조하시기..........
하여간 세상 만사는 자신의 행한 결과가 자신에게가 아니더라도 그 결과는 후손에게라도
반드시 뿌린만큼 거두게 되어 있음. 후손의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 있음.
자신이 하지도 않은 조상의 악행으로 인해 후손인 자신이 손해를 보니...그래도 어쩔 수
없음. 그러니 어느 후손의 조상이 될 수 있는 나나 이글을 읽는 사람들이나 매사에 조심에
조심을 거듭하며 옳지 않은 일을 하며 살면 안 될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