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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양장) - 하나님께 가는 가장 쉽고도 가장 어려운 길
필립 얀시 지음, 최종훈 옮김 / 청림출판 / 2007년 6월
평점 :
절판
추천 권유도 9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니라”(마가 11:24)
“삶은 하나님 나라의 목표를 자신의 몸으로 살아내는 경기장이다”
기독교적 신앙에 관한한 초심자나 경력자이던 간에 ‘기도’에 대해 어렵게 생각하는 이들을 위해 길잡이 역할을 할 수 있는 이런 작품을 읽고, 느낀 바를 단순하게 정리한다는 것은 사막에서
모래 한 바가지를 퍼내고는 전부를 다 담아 왔다고 이야기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되지만
작품으로부터 받은 느낌을 이렇게라도 정리하지 않으면 작품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아
개인적 소회를 요약하고자 노력하였다.
나의 결론은 주저하지 않고 위 두 문구를 선정함으로써 그 의미를 부여하려고 한다.
‘기도’를 해 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기도’가 얼마나 어렵고, 힘든 사역인지를 말이다.
그것도 종교적 신념이 아직 자리 잡지 못한 초심자에게 ‘기도’란 난제 중 난제일 것이다.
내가 종교나 기도에 대한 확실한 개념 없이 선데이 교인으로 교회에 다닌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를 담당하고 있던 교역자님으롭주터 ‘어느 정도 시간도 흘렀으니 이제 대표기도를 해 보라’는 권유에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 했었다. 지금은 예전 같이 ‘기도’요청에 크게 어려움을 겪고
있지는 않지만 당시는 그런 부탁 아닌 부탁겸 권유가 왜 그리 힘이 들고 등에서 식은땀 정도가 아니라 모골이 송연한 그런 느낌이 나던지 참으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난감함에 당황스러웠다.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내가 ‘기도’를 잘못해 창피를 당하면 어쩌지, ‘기도’에 어떤 내용을
담아야 할지와 ‘기도’의 응답은 진정 있기나 한 것인지 등 별별 생각 속에 어찌어찌하여 용기를
내어 ‘기도’라는 것을 하기는 했으나 내가 했던 ‘기도 내용’은 전혀 생각도 안 나며 ‘기도’ 당시
나의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던 기억만 났고 ‘기도’를 끝내면서 속으로 다짐하길 ‘더 이상 교회에
다니지 않겠다’는 생각 뿐이었던 것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런 ‘기도’에 대한 부정적인 추억의 시작은 아마도 중학교 시절이 먼저였을 것이다.
이웃집 누나의 손에 이끌려 교회라는 곳을 처음 나가봤는데 솔직히 하나님, 성경, 목사님의
은혜로운 말씀 등등 모든 게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반 강제적으로 끌려나간 교회에서의
나의 관심은 오로지 성가대 단상에서 단아한 용모로 꾀꼬리 목소리를 내던 우연히 알게 된
이성에만 가 있었다.
호감가는 이성에 빠진 채 교회에 나간지 6개월쯤 지난 어느 날 주일학교 선생님이 나를 지목해
‘기도’로 같은 반 학생을 인도해 보라는 미션을 주셨다. 그것도 즉시.
미치는 줄 알았으며, 호흡이 곤란해 어떻게 ‘기도’를 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를 않았고, 내가
대표로 올리는 ‘기도’를 그 소녀는 어찌 생각할까 하는데 더 마음에 쓰여 ‘기도’가 무슨 고역
그 자체였던 추억이 나와 ‘기도’가 마주한 괴롭고도 아련한 추억의 서막이었다.
작품을 통해 확인한 ‘기도’란
‘하늘 아버지께 받고 싶은 것을 솔직하게 구하라(마르틴 루터)’로 압축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기도’는 생활과 분리된 행위가 아닌 우리 삶의 일부이며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동행하는
일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작품을 읽던 중 아주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였는데 - 불세출의 명강사로 자화자찬에 능통하신
대전의 모 교회 장경동 목사님 스타일로 ‘기도’에 관한 나의 깨달음을 이야기해 보면 -
그것은 우리 국민들 누구나 ‘기도’를 아주 쉽게 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기도’에 능통하신 분들 다시말해 억울하고, 분한 마음이 일반인에 비해 한이 크게 맺힌 분들은
자신의 한 맺힌 내용을 누가 듣던 말던 간에 하소연하듯 너무도 쉽게 이야기하시는 것이었는데, 그분들의 넋두리는 거칠 것이 없었으며 어느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그냥 줄줄이 친한
친구에게 하듯, 부모에게 자신의 억울함을 하소연하듯 한다는 특징을 갖고 있음을 파악하였는데, 그 하소연과 넋두리 내용을 찬찬히 뜯어보고, 역으로 해석해 보니 그 자체가 바로 ‘기도’였던
것이었다는 게 나의 판단이다.
‘기도’는 바로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작품은 이야기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적 형식을 갖춘 ‘기도’는 왜 어려울까?
작품은 나름의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누구와도 비할 수 없을 만큼 탁월한 의사 앞에서, 인간이 취해야 할 가장 적절한 행동은 상처를
보여드리는 것뿐이다. 그것이 기도다.‘
이 문구다.
의사에게 치료 받고자 병원에 갔으면 자신의 병 증상을 그대로 이야기해야 하는데 자신의
병이 창피해서, 누가 들으면 어쩌나 하는 이상한 마음에 제대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면 어떤
의사가 제대로 치료를 해 줄 수 있겠는가?
마찬가지 이치인 것이다. 하나님이 치료를 해 주신다고 하는데 아픈 환자인 우리가 아픈 곳을 정확히 이야기도 하지 않는데 어떻게 치료를 해 주실 수 있겠는가?
그러면 일반인들은 반론으로 이렇게 이야기할 것이다.
‘모든 것을 다 아신다’면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치료를 해 주시는 게 맞지 않냐고?
얼핏 들어보면 맞는 것 같지만 한겹 벗기고 보면 전혀 맞지 않는 주장이라 생각한다.
분명 주님은 다 아시지만 ‘자유의지’의 소유자인 환자(인간)가 어디가 아프고, 어떤 문제가
진짜 시급하다고 문제의 시급성에 대한 우선 순위를 정확히 이야기하지 않는데 무엇을
어찌하겠는가. 그냥 기도자가 안고 있는 문제를 순리대로 풀어나가실 수 밖에 다른 대안이
없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알고 계신 주님이 나서서 먼저 다 해 주셔야 옳다는 주장을
한다면 그건 작품도 주장하고 있지만 그렇게 될 경우 그건 ‘마술’의 영역이지 ‘종교’가
아닌 것이라 생각한다.
작품은 이야기한다.
주님은 무엇을 청하든 다 들어주는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가 아니며 인간은 지구에서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인 이상, ‘기도’를 통해 우리의 사정과 구하는 것을 주님께 정확히
진심을 다해 이야기할 때 들어주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이를 증명하는 문구가 있다.
‘주님은 분명히 들으신다. 귀를 만드신 분이 듣지 않으실 리가 있겠는가?(조지 허버트)’
이것보다 더 의미 있고 딱 들어맞는 문구가 또 있을까?
그렇다면 ‘기도’한다고 다 들어주실까?
나의 짧은 소견으로는 우리가 주님이 우리 편이 되기를 소원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주님 편에
서도록 또 기도를 통한 그 분의 기적을 맛보게 해 달라고 소원하기 전에 우리 스스로가 먼저
기적을 이루어 그 분에게 기적의 표상으로 자리매김하려는 자세를 견지하려는 모습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해 본다.
작품을 읽고 나의 생각을 정리하는 이 순간 우리 역사의 부끄러운 한 축을 담당했고 논란의
중심에 섰던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각종 비난으로 고인을 비난함과 동시에 ‘조문을 해야 한다’, ‘말아야 한다’는 여러 목소리가
사회 일각에서 나오고 있다.
언젠가 북조선의 원흉과 그의 아들이 죽어 우리 측에서 조전을 보내자, 말자 어쩌구 저쩌구
떠들다 그 아들이 죽었을 때 큰 틀에서 정부가 나서기 뭐해 다른 사람(현대그룹 일가, 이희호
여사)을 조문 사절로 보낸 것으로 알고 있다.
우리 민족에게 크나큰 상처를 준 인간에게는 어떤 형태로든 극존칭의 경어를 써가며 애도를
보내면서 밉던 곱던 한때는 우리의 통수권자에게 북한의 그들만큼의 온정도 보내지 못하겠다는 지금의 위정자와 그 아류들은 물론 한 때는 그가 펼쳐줬던 따스한 온정에 눈물짓던 이들 조차도 숨죽여 애도도 못하는 현실이 애처로울 뿐이다.
하도 답답해 이곳 저곳을 뒤지다 나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지만 그가 이런 말을
했다기에 모처럼 나와 같은 의견이라 여기에 기사를 접해 여기에 올려본다.
전 여옥 전 새누리당(국민의힘 전신) 의원은 여권 인사들과 일부 언론이 별세한 전두환
전 대통령을 전두환씨라고 호칭하는 것에 대해 “예의가 아니다”라고 했다.
전 전 의원은 24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저의 20대, 전두환 (전) 대통령을 저주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유고로 찾은 민주화의 기회를 짓밟았으니까”라며 “KBS기자 시절, 우리는
당시 ‘전두환 대통령’을 비난하고 욕하고 저주도 했다. 그게 ‘권위주의 정권’아래 기자들의
스트레스 풀기였다”라고 했다.
이어 “권력이란 참으로 엄중하고 허망하고 그리고 비참한 것이다. 쿠데타-체육관 선거-대통령 취임-백담사 유배, 그리고 법정에서 사형언도까지 전두환 전 대통령의 삶은 파란만장했다”
라며 “전두환 전 대통령 죽음은 제게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라고 했다.
전 전 의원은 “‘학살자 전두환 사망’ ‘전두환씨 사망’부터 ‘전두환 전 대통령 별세’까지. 언론은
그들의 ‘진영논리’로 전두환 전 대통령의 죽음을 표현한다”라며 “전 백낙청 교수의 말 그대로
선인도 악인도 죽음 앞에서는 말을 삼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저는 권력을 놓친, 마감한 전직 대통령들을 개인적으로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들은 우리
보통사람들보다 더 나약하고 불안하고 황망해 보였다”라고 했다.
전 전 의원은 “정말 권력이 무엇인지를 찾아오는 사람만 보면 같이 잡담이라도 나누고 싶어 하는 동네 할아버지 같은 전직 대통령을 통해 뼛속 깊이 알게 됐다”라며 “저는 살아있는 사람
으로서 전두환 전 대통령의 명복을 빌기로 했다. ‘김일성 주석’이니 ‘김정은 위원장’에 ‘이설주
여사’라고 부르는 이들이 ‘전두환씨’ ‘이순자’라고 부르는 것은 예의가 아니고 상식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고통의 현대사 속에 저도 젊은 날을 보내며 ‘한개의 점’으로서 있었다. 역사의 평가에 맡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살아있는 인간으로서 죽음의 강을 넘은 한 인간, 전두환 전 대통령 명복을 빈다”라고 했다.
나는 전 대통령과 아무 연관이 없고 있을 이유도 없기에 여기서 조용히 그 분의 명복을 빌어보며 기도해 본다.
작품이 던져주고 있는 여러 의미 있는 문구를 정리해 보았다.
1. 우리 안의 깊은 갈망
- ‘기도’란 모든 이들이 체험하는 지극한 행복과 끔찍한 고통, 초자연적인 권능과 서정적인
친밀감들에 인간이 보이는 특별한 반응이다.(페트리샤 햄플)
- ‘기도’는 인간이란 존재를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행위다.
- 이론적으로 ‘기도’는 인간에게 결코 없어서는 안 될 핵심 활동이며 우주를 다스리는 하나님과
만나는 소중한 접점.
- 인간은 응답받은 ‘기도’에 기뻐하기보다 응답받지 못한 ‘기도’에 더 집착한다.
- 하나님은 그분의 형상대로 인간을 지으셨으므로 당연히 그 깊고 깊은 갈망을 채울 방법도
마련해 두셨는데 그것이 바로 ‘기도’다.
- 하나님은 어째서 인간이 기대하는 대로 역사하지 않으시는가? 나는 어째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행동하지 않는가? ‘기도’는 이 두 가지 문제가 한데 겹쳐지는 중요한 지점이다.
2. 하나님의 눈으로 보라
- ‘기도’는 마음의 근시를 바로잡게 해 준다. 잊어버리기 쉬운 하나님의 관점을 상기시킨다.
- ‘기도’가 흔히 예기하는 대로 특별한 확신을 주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입술의 말들이 가시적인 공간과 보이지 않는 세계를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서 아무도 본 적이 없는 분께 도달하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기도’할 뿐이다.
- ‘기도’, 오직 ‘기도’만이 하나님과 같은 관점을 갖도록 시력을 회복시켜 준다.
- 근본적으로 ‘기도’는 자세, 즉 자신을 어디에 놓느냐의 문제다. 초점을 맞추는 ‘기도’란 시야를
제한한다는 뜻이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실체에 주의를 집중하는 습관이 ‘기도’다.
- ‘기도’는 인간의 연약함을 한없는 사랑으로 채워주시는 주님 앞에 온갖 실수와 약점, 한계
따위를 인정할 힘을 주는 것이다.
- ‘기도’의 첫 단계는 하나님을 인정하거나 최소한 ‘기억하는’ 행위가 되어야 한다.
- ‘기도’는 하나님께 보여드릴 지원 물품 요청서가 아니며 하나님의 시각으로 모든 존재를 바라
보는 행위다.
3. 내 모습 그대로 주님 앞에
- 고백이란 피조물이 창조주를 바라보면서 자기 자리를 제대로 잡아가는 가장 기본적인 행위
-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재는 척도다. 연약함을 절감하고 자포자기에 가까운 심정이 되는
순간이야말로 하나님의 은혜와 치유를 향해 돌이키기에 가장 적합한 상황이다.
- 주님이 말씀하시는 ‘골방’이란, 하나님 앞에서 100%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가상의
공간, 즉 마음의 지성소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 ‘무기력’을 하나님이 인정하는 대표적인 ‘기도’의 마음가짐이다. 오직 무기력한 인간만이
진정으로 ‘기도’할 수 있다.
- 도움을 청하는 자세야말로 ‘기도’의 뿌리다.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만 봐도 온갖 요청이 줄줄이
이어진다. 하나님께 의지한다는 선언, 그것이 ‘기도’다.
- 연약함은 ‘기도’를 부른다. 긍휼과 권능으로 응답해주시도록 하나님을 초청하는 것이다.
- 겸손이 먼저다. 내려놓으면 하나님이 높이신다는 것이다. 강해지려고 발버둥치면 하나님의
능력을 가로막는 셈이다.
- 겸손은 하나님의 임재를 기준으로 자신이 우주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을 말한다.
- ‘기도’는 회의와 불만을 꺼내놓고 그것들을 눈앞이 캄캄해질 만큼 환하게 쏟아지는 진실의
빛에 비춰볼 무대를 제공한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이의 진심을 원하신다.
- ‘기도’하면서 생각하고 느끼는 모든 것이 말보다 더 절실한 기도일지도 모른다.
- ‘기도’는 하나님의 임재 앞에 삶 전체를 들고 나와서 정결하게 씻어내고 제 모습을
되찾으라고 초청하는 안내장이다.
- 진정한 자아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하는 것이야말로 ‘기도’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다.
4. 하나님은 누구신가
- ‘기도’란 하나님을 가까이 불러오는 도구가 아니라 거룩한 임재에 반응하는 방식이다.
- ‘기도’는 주님의 임재 앞에 나가서 부르심에 반응할 수 있는 통로를 제공한다.
- 마음이 평온할수록 ‘기도’는 더 강렬해지고, 더 소중해지고, 더 깊어지고, 더 풍성해지고
더 완전해진다.
- 거래가 아니라 관계에 토대를 둔 ‘기도’야말로 하나님께 다가서는 가장 자율적인 방식이다.
5. 하나님과 함께
- ‘기도’의 주목적은 하나님을 아는 데 있다. 하나님은 웬만해선 무반응으로 일관하시며 최소한
쉽게 식별할 수 있는 방식으로는 응답하지 않으신다.
- 내면의 대화 상대는 자기 자신이 아니다. 하나님의 영이 내 안에서 ‘기도’하시며 아버지의 뜻을
전달하시는 것이다.
- 이상하게도 인간 따위를 두려워할 리가 없는 하나님이 우리더러 허심탄회하게 속을 열어놓는
대화를 하자고 부르시는 것이다.
6. 왜 기도하는가?
- ‘기도’는 사랑하는 이의 주의를 끌기 위해 하늘의 창문에 던지는 작은 도약돌이다.
- ‘기도’는 삶에서 정체를 알 수 없으며 예측 불가능한 요소들을 제거하는 수단이 아니라 그런
성분들을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은혜의 사역에 포함시키는 도구다.
- ‘기도’는 예측 불가능한 요소들을 한데 엮어서 아무도 생각해보지 못한 신비로운 방식으로
하나님의 은혜로운 역살르 이루어낸다.
- ‘기도’는 진부한 일상을 흥미진진한 모험으로 변화시키고 잘못된 기대감을 청산해 준다.
- 하나님은 세상사에 직접 개입하셔서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보다 모든 일이 ‘자연스럽게’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신다.
7. 하나님과의 끝없는 씨름
- 하나님은 오직 들으실 뿐이다. 나는 그분의 문전에 무거운 짐을 던져버린다.
그리고 ‘기도’를 들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말씀들을 총동원해 주님의 귀를 괴롭힌다.
‘기도’한다면 들으신다는 성경 구절을 기억나는 대로 모두 인용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신뢰받기를 원하신다면 당연히 기도를 들어주셔야 한다고 밀어
붙였다.(마르틴 루터)
-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꺽는 작업이 아니다. 기꺼이 자발적으로 베풀어주시려는 그분의
마음을 붙잡는 행위일 뿐이다.(트렌치 대주교)
8. 하나님과의 동역
- 인간들이 속을 썩여 체념하실 법도 하련만, 주님은 끝내 인간과의 동역을 포기하지 않았다.
- ‘기도’는 하나님께 드리는 마음이다. 하나님은 사랑이 가득한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시며 함께
선한 일을 하자고 부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행하시고자 하는 일들을 위해
‘기도’하도록 몰아가신다.
- ‘기도’는 하나님과 협력하는 도구다. 은혜가 작동할 수 있도록 문을 여는 열쇠인 셈이다.
- 우연의 일치란 하나님이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사용하는 방식이다.
- ‘기도하면’ 우연한 일이 일어난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으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난 일 말고는 ‘기도의 손길’이 닿지 않는 영역이란 없다. 누구도 하나님의
뜻을 완전하게 알 수는 없다. ‘기도해야 할 이유’가 거기 있다.
- ‘기도’를 통해 나누는 참다운 교제가 이루어지는 순간은 하나님이 우리 기도를 들으실 때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청취자가 되어 주님이 뜻하시는 바에 귀를 기울일 수 있게 되기까지
지속적으로 ‘기도’할 때 진정한 교제가 시작된다.
- 묵상이란 ‘기도’하는 인간이 아니라 ‘기도’의 궁극적인 대상이신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는 것
- 주님은 뭔가를 요청하는 자녀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신다. 반드시.
- 인간은 ‘기도’하고 실천하며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감당하고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면 된다.
- 하나님은 아주 가까이 계신다. 고래고래 목청을 높이지 않아도 다 들으신다. 그저 입만
달싹여도 무슨 소리를 하는지 전부 아신다.
- ‘기도’가 파트너십, 즉 하나님과 인간이 미묘하게 상호작용하면서 거룩한 뜻을 이뤄가는 과정
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부터 주님의 요구 사항은 하나뿐이다. ‘기도’하면서 그분을 더
드러내라는 것이다.
9. 무엇이 달라지는가?
- 그리스도인일수록 ‘기도’를 통해서 더 위대한 권세에 다가설 수 있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신뢰한다.
- ‘기도’하기 위해 두 손을 모으는 행위야말로 무질서한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 일어서는 출발점
-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존재하는 그리스도의 지체다. 예수님이 가진 손은 우리뿐이다.
- ‘기도’의 본질은 세상에서 사역하시는 하나님과의 파트너십이다.
‘기도’로 준비를 갖추지 않으면 파트너로서 제몫을 다할 수가 없다.
- ‘기도’만 해 놓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떠맡기는 행동은 올바른 행동이 아니다.
- 악과 싸우려면 ‘행동하는 기도’와 ‘기도하는 행동’ 모두가 필요하다.
- 마음의 소원을 있는 그대로 꺼내놓고 곤고한 날에는 인내하며 형통한 날에는 감사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10. ‘기도’가 하나님의 뜻을 바꾸는가
- ‘기도’란 다름 방법으로는 불가능한 역사를 일으키는 권능이다.(앤드류 머레이)
- 하나님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르시는 게 없음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이 ‘기도’를 들어주신다.
- 하나님은 뉘우치며 ‘기도’하는 죄인을 용서하실 수 밖에 없다. 주님이 정해진 방침을 바꾸신
것은 죄에서 돌이킨 데 대한 반응이기도 하지만, 변치 않는 성품에서 비롯된 일이기도 하다.
- 하나님은 권능을 행사하는 도구로 기도를 지목하셨다.
- ‘기도’는 창조주와 피조물, 영원과 시간을 한 점으로 수렴해서 깊이를 알 수 없는 신비 속으로
끌어들인다.
- 하나님은 피조물들에게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히 위임하셨다. 피조물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절대 스스로 행하지 않으신다.
11.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는 데 노력이 필요하다.
- 예수님은 지옥의 문들이 ‘기도’의 힘을 견뎌내지 못할 것이라고 단단히 약속하셨다.
- 지속적이고 끈질기게 ‘기도’하는 과정에서 인간적인 욕망과 계획은 차츰 하나님의 뜻이나
섭리와 조화를 이루게 된다.
- 끈질긴 ‘기도’야말로 하나님이 역사하시기에 합당한 새로운 영적 차원으로 우리를 이끈다.
- 끈질긴 ‘기도’의 진정한 가치는 무엇을 얻느냐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 되느냐에 있다.
- 자신을 올바르게 세워주시길 ‘기도’할 뿐, 하나님을 가르치려 들지 말라.
- ‘기도’는 하나님께 우리를 재건축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12. 막힘없이 ‘기도’할 수 있다면
- 누구나 ‘기도’를 선물로 거저 받을 수 있지만 진지한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
이것이 바로 ‘기도의 역설’이다. 철저한 훈련이 없다면 하나님을 맞아들일 수 없다.
- ‘기도’ 안에는 보물이 숨겨져 있다 캐내기만 하면 된다.
- ‘기도’는 믿음을 요구한다. 눈에 보이는 증거는 없을지라도 하나님이 귀 기울여 들으신다는
사실과 의인의 간구에는 역사하는 힘이 있다는 점을 신뢰해야 한다.
- ‘기도’는 일상에 파묻힌 마음에 영원한 광선이 가늘게나마 들이비칠 수 있도록 작은 구멍을
내는 작업이다.
- ‘기도’를 무슨 훈련으로 생각하면 싫은 마음이 커지는 반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시간으로
여기면 망설임이 한결 줄어든다.
- 신체적인 운동처럼 ‘기도’ 역시 꾸준히 계속해야 충성한 결실을 기대할 수 있다.
꾸준한 훈련 없이 거장이 되는 길은 없다. 주님과 형식에 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의사소통
하는 특별한 시간을 갖기 위해서는 우선 꼬박꼬박 ‘기도’하는 훈련이 필수적이다.
- 시간을 정해서 규칙적으로 ‘기도’하면 내면세계를 방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 ‘기도’란 삶의 현장에서 물러나는 행위가 아니다. 오히려 현실 세계의 사건들을 하나님 앞에
꺼내놓고 다시 세상에 나가는 데 필요한 새로운 시각과 에너지를 요청하는 일이다.
13. ‘기도’의 문법
- 시편은 ‘기도’하는 방법을 삶의 현장에 적용해보는 실습서다.
- 시편은 인간을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만들어준다. 상황에 꼭 맞는 말들을 제공해서 편안히
‘기도’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 인생의 불공평한 측면이나 온갖 문젯거리에만 초점을 맞추지 말고 미래에 변화된 모습을
그려보라. 이 훈련을 ‘처럼 행하기(Act as if)'라고 부른다.
- 평생 동안 꾸준히, 규칙적으로 신실하게 ‘기도’하라. 이것이 기독교 시대를 살았던 대다수
그리스도인들이 ‘기도’의 깊이를 더해갔던 비결이다.
- 유용한 묵상의 형식
▶ 1단계 : 상상의 날개를 펼쳐서 거룩한 임재 한복판에 있는 자신의 모습을 그려라.
지금 당신 곁에 하나님이 계심을 믿고 곁에서 모든 일을 함께하신다 생각하라
죄를 고백하고 나머지 묵상 시간동안 인도해 주시길 요청하라
▶ 2단계 : 방금 읽은 성경 본문으로부터 주제를 정하라
▶ 3단계 : 감정과 의지를 동원해 변하는데 필요한 일들을 행하기로 결심하라.
하나님의 도움을 받으라
▶4단계 :주님이 알려주시는 것에 대해 감사하는 ‘기도’를 드려라
변화되기로 결심한 일들에 대해 헌신하는 ‘기도’를 드려라
은혜와 능력을 간구하는 ‘기도’를 드려라
14. ‘기도’의 문이 막힐 때
- ‘기도’의 핵심 요소는 ‘정직’이다. 있는 그대로 하나님께 다가가는 것이 중요 정직하라,
단순하게 고하라, 꾸준히 계속하라
- ‘기도’의 목표는 완벽한 대화기술을 과시하는 게 아니라 속마음을 보여드리는 것이다.
-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가야 한다는 조건 말고는 반드시 지켜야 할 기도 원칙이라
할 만한 것은 없다.
- 가장 형편없어 보이는 ‘기도’가 실제로 하나님의 눈에는 제일 훌륭한 간구처럼 보일지 모른다.
15. 침묵의 소리
- 행복을 좇지 말고 하나님을 찾으라 그것이 모든 묵상의 기본 원리다. 주님만 구하고 또 구하면
결국 행복을 얻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성경의 약속이다.
-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일은 결코 없으며 다만 인간이 의식하지 못할 뿐이다.
- 주님과의 대화를 가로막는 점검표를 만들어 운영하면서 혹시라도 기도하는 목적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보다 원하는 바를 성취하는 데 있는 게 아닌지 자신에게 항상 묻는다.
- 어느 신학자의 연구 조사에 의하면 사람들이 질문거리를 들고 예수님을 찾아 온 경우는 대략
183차례이나 답을 주셨던 사례는 단 3차례 뿐이라고 한다.
말씀과 행동으로 가르쳐주신 원리들을 활용해서 우리가 직접 정답을 찾아내도록 기대하셨음에
틀림없다.
- 나는 지금 내 몫으로 주어진 역할을 충실하게 책임진 뒤, 나머지 부분을 하나님께 맡기는 법을
익히는 중이다.
-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두려워하는 일들이 전혀 일어나지 않도록 보장해주심을 뜻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정반대다. 피하고 싶은 일들이 일어나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에 힘입어
전혀 두려워 할 일이 아니었음이 드러나는 것이다.
16. 응답 없는 ‘기도’, 누구의 탓인가
- 신들은 인간을 벌주고 싶을 때만 ‘기도’에 응답한다.(오스카 와일드)
- ‘기도’의 무게 중심을 ‘간청’에서 ‘동행’쪽으로 옮겼더니 더 이상 거절당한 간구를 두고
옛날처럼 고민하지 않게 되었다.
- 하나님의 성품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만족을 구하는 태도가 문제. 인간은 ‘하나님의 일’이 아닌
‘인간의 일’에 초점을 맞추어 간구를 하는 게 문제다.
- 올바른 ‘기도’를 드리고 있는 여부를 확인하는 자가 점검
1. 진심으로 원하는 게 무엇인가? 구체적인가?
2. 하나님이 들어주실 수 있는 요청인가? 하나님의 성품에 어긋나지는 않았는가?
3. 스스로 해야 할 일은 다 했는가?
4. 하나님과의 관계가 편안한 상태인가?
5. 요청을 들어주신다면 하나님과 나, 어느 쪽이 더 영광을 받는가?
6. 정말 기도가 응답되기를 원하는가?
- 남북전쟁 당시 남군과 북군은 서로 하나님의 자기편이라 했다. 링컨은 자신이 주님 편에
서 있는지 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 선이 악을 이기며 결국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성취될 것이라는 약속이 이미 성취되었음을
믿어야 할 뿐이다. 그 믿음에 매달리는 것만이 최고의 합리적 행위인 것이다.
아니면 최고의 믿음의 행위이거나.
17. 응답 없는 ‘기도’, 미스터리와의 동거
- 주님은 인간에게 부르짖을 수 있는 혀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혀의 외침을 듣지 않으십니다.(조지 허버트)
- ‘기도’의 핵심은 응답될 수도 있고 거절당할 수도 있다는 점에 있다. 언제나 응답을 받아내는 데
‘성공’한다는 건 기독교의 교리가 아니다. 오히려 마술에 가까운 현상일 뿐이다.
- 베드로의 믿음이 굳세지길 간구하셨지만, 시험을 피할 수 있게 해달라고 구하지는 않았다
- 응답받지 못하는 ‘기도’에 어떤 비밀이 숨어 있는지 깊이 생각하며 참고 기다리는 법을 배우라.
구한 바를 얻었을 때보다 얻지 못할 때 더 큰 믿음이 필요하다
- 하나님의 미소를 보고 싶으면 주님께 계획을 알려드려라.
- 두세 번 간구하다 말 게 아니라 똑같은 ‘기도’를 백 번이고 천 번이고 필요한 만큼 자주 반복해
야 한다. 절대로 지치지 말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다려야 한다.
- 기도의 존재는 은혜의 선물이며 조화로운 미래로 우리를 부르는 너그러운 초대다.
18. ‘기도’와 질병의 치유
- 인체의 치유 시스템은 마음의 통제를 받게 되어 있으므로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느냐에 따라
몸의 상태는 크게 달라진다.
- 예수님은 모든 가난과 모든 고통, 인간의 모든 필요를 해결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적이 없다.
다만 예쁘고, 능력 있으며, 제 힘을 믿는 이들보다 가난한 사람들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나라를 선포하셨다.
- 신앙에서 위로와 힘을 끌어낼 줄 아는 부모의 능력이야말로 회복력을 좌우하는 결정적 요소
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19. 무엇을 위해 ‘기도’하란 말인가
- 믿음은 변화를 불러온다
- 치료를 구하는 ‘기도’에서도 하나님께 문제를 정직하게 드러내고 마음의 소원을 말씀드려라
- ‘기도’하면서 좌절감 토로를 죄스럽게 생각할 이유가 없다. 하나님은 탄식을 환영한다.
- 고백은 근심과 죄책감, 두려움 등 건강을 망치는 장애물들을 쓸어내는 동시에 하나님과
의사소통할 수 있는 통로를 회복시킨다.
- 주님은 ‘고백하는 기도’에 백발백중 응답하시며 용서를 보장하신다.
- 건강을 유지하거나 질병을 고치는 데 가장 도움이 되는 감정은 바로 ‘감사’
- 기도란 하나님이 세상에서 우리를 통해 행하시려는 역사를 언제든 시작할 수 있도록 준비
시켜 주는 과정.
- 사도는 전혀 새로운 차원의 믿음을 제시한다. 역경을 피하거나 없애는 게 아니라 그 안에서
꿋꿋이 견뎌내는 신앙, 연약한 가운데 강하게 되며 ‘치유의 갈망’을 ‘수용의 기도’속에 녹여
낼 줄 아는 믿음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 은혜를 구하는 ‘기도’는 뿌리 깊은 상처를 치유할 기회를 제공한다.
- 아무리 노력해도 믿고 소망하던 걸 얻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서 ‘기도’가 필요하다.
20. ‘기도’ 그리고 나
- ‘기도’는 병에 걸린 영성을 다루는 야전병원이다.
누구보다 탁월한 귄위자가 직접 진단을 내리고 치료까지 담당한다.(월터 윙크)
- ‘기도’가 하나님 임재에 대한 나의 반응이라면 먼저 그 임재에 주파수를 맞춰라.
- 하나님은 조용히 말씀하실 때가 많다. 듣는 것도 기술이다. 하나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기술을 습득하라
- 하나님의 시간을 ‘낭비’하는 과정은 내면으로부터 인간을 변화시킨다. 아이는 작심하고
몸가짐이나 독특한 버릇, 목소리 따위를 연습해서 아빠와 비슷해지는 게 아니다.
가족들 사이에 섞여서 계속 접촉하노라면 저절로 가족의 특성이 몸에 배게 되는 것이다.
- ‘기도’란 조각을 만들고, 그림을 그리고, 작곡을 하는 예술가이신 하나님께 인간을 재창조하고,
더불어 활동하며, 다시 매만지실 기회를 드리는 행위
- ‘기도’는 눈앞의 상황에 대한 두려움을 딛고 일어서서 주님의 따뜻한 보살핌을 철저히
신뢰하도록 이끌어주는 통로였다,
- 걱정하는 일들을 가능한 구체적으로 하나님께 알려 드리고 그 짐을 벗어버릴 수 있도록
도와주시길 간구해야 한다
- 건전한 ‘기도’에는 겸손, 경건, 사랑이 넘치고, 확인이 있고, 오래 참는 특성이 있다.
- 성경에 기록된 ‘기도’들은 대부분 기다림의 열매들이다.
21. ‘기도’ 그리고 이웃
- ‘기도’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누군가를 그리고 자신을 보게 한다.
- ‘중보기도’는 때로는 ‘기도’ 받는 쪽을, 또 더러는 간구하는 이를 변화시킨다.
- ‘기도’는 하나님을 조정해서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주님의 사랑이
가득한 연못에 한 방울의 사랑을 보태어 그 동심원의 폭을 더욱 넓힐 따름이다.
22. ‘기도’ 그리고 하나님
- ‘기도’는 늘 함께하시는 하나님과 더불어 지속적으로 동행하는 일을 가리킨다
- ‘기도’는 관심으로 구성된다. 힘닿는 데까지 하나님을 향해 주의를 기울이는 일이다.
- 의식의 흐름 속에 드리는 간구는 대화의 초점을 내게서 하나님께 돌려 놓는다
- 오직 ‘기도’하는 가운데만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 사랑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 ‘기도’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영혼보다 더 중요한 요소는 없다.
- 고통을 치유하는 것보다 고난 속에서 믿음을 지키는 게 더 중요하다. 십자가에 못 박히는
형벌을 피하기보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쪽은 선택하게 된다. ‘육체의 가시’에서 벗어나는
것보다 겸손을 배우는 걸 더 소중히 여기라.
-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은 누구나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무지개처럼 세상에 두루 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믿는다
- ‘기도’라는 행위는 무한하신 창조주와 유한한 인간 사이에 난 커다란 틈을 메우기 위해 주님이
직접 정하신 방법임을 신뢰한다.
실망을 재료로 인내를 빚게 하소서
성공을 재료로 감사를 알게 하소서
곤경을 재료로 끈기를 기르게 하소서
위험을 재료로 용기를 갖게 하소서
비난을 재료로 참을성을 키우게 하소서
칭찬을 재료로 겸손을 알게 하소서
쾌락을 재료로 절제를 이루게 하소서
고통을 재료로 지구력을 가꾸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