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에 이런 시간을 갖는 건 좋다. 의미 있는 시간이라 해도 무방하다. 내가 읽은 소설을 정리하는 시간. 1년이라는 한정된 시간에 만난 책들. 올해 출판된 책은 아니고 내가 읽은 책 가운데 좋았던 책을 골랐다. 몇 권을 읽었을까, 그 숫자에 매몰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렇다고 너무 적은 양의 책을 읽는 일도 곤란하다. 일정한 패턴, 일정한 독서의 시간은 중요하니까.


기다린 만큼 만족도도 높았다고 하면 너무 지나칠까. 아니다, 개인적으로 너무 좋았던 단편집. 김연수의 『이토록 평범한 미래』는 그런 소설이었다. 단편 하나하나를 읽는 시간이 참 좋았다. 예전의 소설과 다르게 뭔가 특별한 변화가 있거나 하지는 않았다. 제목처럼 이토록 평범한 소설이지만 그게 가장 김연수 다운 소설이다. 가만가만하면서도 툭하고 가슴을 치는 순간과 마주할 때면 잠시 숨을 고르게 된다.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과거가 아니라 오히려 미래입니다. (『이토록 평범한 미래』 중에서)


장편소설로는 최근에 읽은 김혜진의 『경청』과 이주혜의 『자두』다. 김혜진은 이번 소설에서 말에 대한 이야기를 건넨다. 너무도 쉽게 내뱉는 말들과 글들에 무게를 생각한다. 우리에게 침묵이 아닌 듣기의 시간이 왜 중요한지. 상대가 원하는 바를 깊이 생각하고 그것을 공감하는 것. 설령 공감하지 못하더라고 인정하는 일이 필요하다. 이주혜의 『자두』는 돌봄에 대한 소설이다. 노동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일 가운데 하나가 돌봄이다. 가족의 부양과 돌봄, 이제는 사회가 적극적으로 제도를 만들고 개입해야 하지 않을까. 


아줌마, 근데요. 그럼 그냥 듣기만 할 수 있어요? 아무 말도 안 하고요.

아이가 묻고 그녀가 답한다.

그럼, 그냥 듣기만 할 수 있지.

대화는 조금씩 더 깊어지고 넓어진다. 불신과 두려움 같은 것을 밀어내며 스스로 반경을 넓힌다. 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그녀는 아이의 마음속에 불이 켜진 것 같다고 느낀다. (『경청』 중에서)













새로운 작가의 소설도 좋았다. 처음 읽은 안윤의 단편집 『방어가 제철』에서 느껴지는 쓸쓸함과 상실은 충분한 애도란 무엇인가 생각하게 만든다. 모든 감정은 고유한 것이니 우리는 함부로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없다. 그건 감정을 떠나 삶에 대해서도 다르지 않다. 김지연의 『마음에 없는 소리』를 읽다 보면 우리는 자신의 삶보다는 타인의 삶에 충실하려 애쓰고 있구나 느낀다. 취업, 결혼, 그 무엇을 선택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건 바로 자신이라는 걸 알면서도...













일상의 어려움을 탈피하거나 고통을 달래기 위한 방법으로 환상은 때때로 적절한 처방이 된다. 이유리의 『브로콜리 펀치』에서 죽은 아버지가 화분이 되거나 마음이 힘들고 아플 때 신체이 일부가 무언가로 변하는 일, 그로 인해 고통은 말이 아닌 몸으로 표현된다. 확고한 SF가 아니더라도 독자를 상상의 그곳으로 초대한다. 그런가 하면 김초엽의 『방금 떠나온 세계』에서는 SF 소설로 미래를 보여준다. 나와 다른 존재와 공존하고 연대하며 살아가야 하는 세상을 말한다. 활발하게 작품활동을 한 김초엽의 장편보다 이 소설집에 오래 마음에 남았다. 


소설을 좋아하지만 한국소설에 비해 외국소설은 애정의 크기가 조금 작다. 그래도 이런저런 통로로 알게 된 외국 작가와 그의 소설을 읽는 기쁨은 크다. 내 맘대로 골라본 외국소설. 올해의 최고 소설이라면 내게는 단연 크리스티앙 보뱅의 『가벼운 마음』을 꼽겠다. 최근에 작가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그가 더 많은 글을 써주기를 바라는 마음에 안타까웠지만 고통에서 벗어나 평온하기를 바란다. 한 소녀의 성장소설이라 할 수도 있지만 그것에 국한시킬 수 없는 소설이다. 우선, 너무 아름다운 소설이고 빠져나올 수 없는 문장. 미혹의 시간이었다. 행복한 미혹이라고 할까. 황홀한 늪이라고 해도 좋겠다. 처음 크리스티앙 보뱅의 글을 접했을 때에는 여성작가라고 확신했다. 부드럽고 감성적인 따뜻함이 있다고 할까. 아무튼 요즘 나는 누가 책을 추천하라고 하면 『가벼운 마음』을 가장 먼저 말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성장할 수 없다. 우리는 그들이 우리에게 품은 사랑, 우리를 충분히 안다고 믿는 사랑에서 벗어나야만 성장할 수 있다. 우리는 그들에게 말하지 않을 것들을 할 때야 비로소 성장할 수 있다. 설사 그들에게 말한다 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 것들은 보이지 않고, 붙잡을 수 없고, 그들이 던져준 사랑의 망토로 덮을 수 없으며, 우리 속에 머물러 우리의 일부를 이루기 때문이다. (『가벼운 마음』 중에서)














발레리 페랭의 『비올레트, 묘지지기』도 아름답고 좋은 소설이었다. 죽음을 통해 돌아보는 생애, 인간의 삶이란 무엇으로 채워지고 가장 찬란한 순간의 무엇인가 생각하게 만든다. 상실과 상처와 애도의 조각들이 모여 우리의 생을 만드는 게 아닐까. 빅토리아 토카레바의 『티끌 같은 나』는 막장 드라마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만드는 소설이 맞다. 그럼에도 그들의 삶이 결코 타인의 그것이 아니면 우리의 것이라는 묘한 울림을 안겨준다. 여성으로의 시간과 존재, 삶에 대해서 말이다.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은 늦게 만난 편이다. 그러나 늦게 만나서 내게는 더 좋았던 단편집이다. 인생이라는 것에 대해 우리가 겪는 슬픔과 좌절에 대해 그것을 위로하고 견디며 나가는 방식에 대해 생각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같거나 다른 풍경들의 삶. 카렐 차페크의 『평범한 인생』도 그런 의미에서 상통한다. 특별한 것 없는 평범한 인생, 저마다의 생에서 욕망하고 갈등하며 살아온 시간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오, 윌리엄! 』에서도 그렇다. 가장 소중했던 시간, 지우고 싶은 순간, 그 모든 게 나를 구성하는 삶이었다. 산다는 건 그런 거구나 싶다.













벵하민 라바투트의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는 어렵지만 매력적인 단편집이다. 역사적 실존 과학자들의 연구가 세계를 어떤 방향으로 이끌었는지 들려준다. 그 과정에서 인간의 존재와 가치에 대한 질문을 자연스럽게 던진다. 지금의 세상이 오기까지 우리가 알지 못했던 일들은 얼마나 많을까. 충돌과 이해가 어떤 쪽으로 편승해서 현재를 만들었을까. 히가시야마 아키라의 『류』는 전쟁에 대한 기억을 소환한다. 여전히 전쟁이 멈추지 않는 세상, 전쟁의 승패를 떠나 그것이 남긴 지울 수 없는 상처는 어디서도 치유될 수 없다.













내가 알지 못하는 좋은 소설은 많고 그것을 다 읽기란 어렵다. 그저 닿는 대로 마음이 가는 대로 읽게 된다면 좋은 인연이 될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작가와의 만남, 책과의 인연은 오래도록 유지되고 삶의 한순간을 지탱한다.


올해 소설을 읽으면서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그것은 별점에 관한 것이다. 조금 인색해졌다고 할까. 많은 이들이 별점 5개를 주는 소설에는 나는 별 하나를 빼고 주변에 더 알리고 싶은 소설의 경우에는 별점 4개에서 하나를 더 추가한다. 특별한 울림이 없는 소설에는 재미를 떠나 별점 3개를 준다. 근데 확고한 기준이 있는 건 아니다. 그때 그때 기분에 따라 다르다. 소설의 좋고 나쁨은 어디까지나 취향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별점에서 자유로워지면 홀가분하면서 훨씬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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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2-12-27 12: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올해의 책들을 벌써 고르셨군요. 선택하신 작품들이 모두 차분해 보입니다 ㅋ 강추하신 <가벼운 마음>은 꼭 읽어보고 싶네요~!!

자목련 2022-12-28 07:50   좋아요 2 | URL
새파랑 님이 만나실 <가벼운 마음>이 벌써 기대가 됩니다. 연말 따뜻하게 보내세요^^

공쟝쟝 2022-12-27 12: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랫동안 한국소설을 애정가지고 읽어온 자목련님만의 향이 담긴 올해의 페이퍼 잘 읽었습니다. 제게는 자목련님이 추천하신 <내가 되는 꿈>이 올해의 한국소설였답니다 ^_^ 경청과 자두를 도서관에서 발견하면 꺼내와야겠습니다. 보뱅의 소식은 이 페이퍼를 통해서 알게외었네요. 고통에서 벗어나 영면하시기를.
제게 ‘좋은 독자‘라는 훌륭한 위치성을 알려주신 자목련님, 올 한해 촘촘히 잘 읽어오시는 모습을 지켜보았답니다. 비록 제가 소설은 좀 못 읽는 사람이지만 ^^;;;; 내년에도 페이퍼 참고해서 잘 읽어보도록 할게요. 2023년에도 잘 읽고 쓰실 수 있도록 눈 건강 안녕하시기를!

자목련 2022-12-28 07:53   좋아요 2 | URL
저만이 향이 어떤 향일까, 잠깐 상상합니다. 최진영과의 만남을 축하해요. ㅎㅎ
이주혜와 김혜진의 소설도 쟝쟝님이 좋아하면 좋겠습니다. 쟝쟝 님의 건강하고 아름다운 글을 내년에도 기대합니다. 좋은 이웃이 되어주셔서 감사하고요!

미미 2022-12-27 13: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이 꼽아주신 책들 중 제게 올해 감동을 준 목록들이 있어 반가워요.
특히 <가벼운 마음>은 저에게도 특별한 책이었답니다. 바흐의 칸타타 피아노연주를 들으며 읽어서 더 좋았어요^^

자목련 2022-12-28 07:54   좋아요 2 | URL
같은 책을 읽었다는 것만으로도 조금 가까워진 느낌입니다. 보뱅의 글은 묘한 슬픔과 더불어 아름다운 기운이 있는 듯해요. 미미 님, 따뜻한 하루 이어가세요^^

거리의화가 2022-12-27 13: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원래 별점을 좀 짜게 주는 편인데 5점을 주는 경우 말씀하신대로 추천하고 싶은 책인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물론 개인적으로 공부가 되었다 생각하는 책에도 5점을 주긴 합니다.
올해 읽으신 소설 중 읽은 책은 거의 없으나 저도 읽었고 좋았던 소설이 있어서 반갑습니다. 항상 올려주시는 이야기들 보며 감사해하고 있어요. 내년에도 이곳에서 좋은 책 만날 수 있기를 바라며^^

자목련 2022-12-28 07:55   좋아요 1 | URL
별점에 후했는데 어느 순간 별점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더라고요. ㅎ
그래서 내 맘대로 느낌대로 주기로 했어요. 화가 님이 만나고 들려주시는 역사 이야기, 저도 잘 보고 있습니다. 좋은 책과 좋은 이웃과의 만남, 좋아요!!

blanca 2022-12-27 13: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김연수 소설 저도 생각보다 더 좋아서 오히려 의아했어요. 작가를 원래도 좋아하지만 한동안 ˝내가 쓰는 게 읽힐까?˝ 회의에 빠지셨던 모양이더라고요. 이렇게 진화하는 작가라니...울컥 했어요. 보뱅 소설만 안 읽었는데 당장 읽어야겠네요. 저도 <류> 참 좋았어요. <대성당>은 아, 김연수 작가 번역까지 완벽하죠!!

자목련 2022-12-28 08:02   좋아요 1 | URL
네, 저도 이 소설집을 통해 더욱 좋아졌어요. 미래을 이렇게 표현할 수 있구나 놀랍고 아름다웠어요. 보뱅 소설은 강추해요. 블랑카 님도 반하실 거라 믿어요. 김연수로 시작해 김연수로 끝나는 댓글이야말로 완벽합니다!
포근한 하루 이어가세요^^

페넬로페 2022-12-27 15: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께서 올려주신 책, 다 좋을 것 같아요.티끌 같은 나와 대성당만 읽었어요.
아직 읽지 않아도, 아직 하지 않아도 오직 여기서만은 기쁩니다.
앞으로 읽을것이 넘치니까 행복해서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자목련 2022-12-28 08:03   좋아요 2 | URL
맞아요, 우리에게는 앞으로 읽어야 할 책들이 있으니까요.
여기서, 함께 이야기하고 나눌 책들이 있으니까요.
건강하고 향기로운 연말 보내세요^^

라로 2022-12-27 16: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랑 자주 안 겹치시는데 이번 페이퍼에 올려주신 책은 겹치는 책이 꽤 되네요. 내년에도 좋은 책 소개기대할게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자목련 2022-12-28 08:04   좋아요 1 | URL
라로 님의 일상과 멋진 사진, 감사하다고 말씀드려요. 꾸준하게 공부하는 모습도 멋지고요.
건강하고 즐거운 연말 보내시고 책과도 좋은 시간 이어가세요^^

레삭매냐 2023-01-02 10: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 애정의 크기가 조금 작다.

저도 그런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제법 읽었는데 갈수록
애정의 절대량이 줄어든다는.

별점 주기의 압박 그리고 매김
이 저와 상당히 유사하셔서 기부
니가 좋았습니다.

전 <방어가 제철>이 궁금해지네요.
이렇게 해서 또 연쇄독서의 올가미
에 걸리게 되는 건가요.

자목련 2022-12-30 11:09   좋아요 1 | URL
이 모든 게 나이가 드는 탓일까 싶어서 살짝 슬퍼요. ㅎ
그래도 책은 여전히 좋고 읽고 있으니 괜찮겠죠?

매냐 님이 읽은 <방어가 체절> 기다리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요!

구단씨 2022-12-29 21: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목록이 대부분 문학인데, 그 문학이 또 정말 다양하네요. ^^
<자두> 정말 인상적이었요. 많이 공감했고요. <평범한 인생>은 저도 이제 펼쳐봅니다.
옆에 두고도 안 읽은 책 목록이 이 페이퍼에 많이 담겨 있어서 부끄럽네요. 게으름의 최고치가 연일 갱신이라서요. ㅎㅎ

연말 따숩게 보내세요~

자목련 2022-12-30 11:13   좋아요 0 | URL
<자두>로 만난 이주혜의 소설들을 계속 기대하고 있어요. 딘편집도 나쁘지 않았고요.
<평범한 인생> 즐겁게 읽으시길 바라요.
책 목록 가운데 안 읽은 목록이 제일 길지 않을까 싶어요. 그럼에도 또 사들이고 사고 싶은 책은 늘어나고요. ㅎ
포근한 연말 보내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서니데이 2022-12-31 18: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읽은 책들도 조금 보여서 반갑네요.
저도 올해의 책 중에서 김연수 작가의 <이토록 평범한 미래>와 <류>가 참 좋았어요.^^

자목련님, 오늘은 올해의 마지막 날이예요.
따뜻한 연말 보내시고, 새해에도 건강하고 행복한 시간 되세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자목련 2023-01-02 09:05   좋아요 1 | URL
김연수의 단편집, 오랜만에 만나도 참 좋구나 생각했어요.
서니데이 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올해도 건강하고 평온한 일상 이어가세요^^

2023-01-02 11: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1-03 09: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독서괭 2023-01-03 1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갑습니다, 가벼운 마음! 추천해주신 책들 다 읽어보고 싶은데, 올해는 책을 안 살 예정이라ㅠㅠ 집에 이미 있는 <평범한 인생>은 꼭 읽어야겠어요. 자목련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자목련 2023-01-03 17:18   좋아요 1 | URL
가벼운 마음은 정말 좋았어요! 평범한 인생도 좋았던 소설인데 독서괭 님도 즐겁게 만나실 거라 생각해요.
책을 안 살 예정, 저도 그러 목표를 세우고 싶습니다. 읽을 만큼만 책을 들이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따뜻한 오후 이어가세요^^

서니데이 2023-01-06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따뜻한 주말 보내세요.^^

자목련 2023-01-09 09:06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 님, 감사합니다. 따뜻한 한 주 이어가세요^^
 
경청
김혜진 지음 / 민음사 / 2022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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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닷없이 발생하는 사고에 대처하는 일은 어렵다. 예상했더라도 마찬가지다. 사고의 방향은 의도했던 대로 흘러가지 않고 해결책은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다. 논란의 중심에 선 인물이라면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그 선택은 과연 옳다고 말할 수 있을까. 세상의 모든 일은 사람을 가라지 않고 일어나지만 그것이 내일이 되었을 때 차분하고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는 이는 거의 없다. 그 일로 삶의 기반이 무너지고 관계가 깨지고 고립된 지경에 이른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니, 할 수 있는 일이란 게 있을까. 김혜진의 장편 소설 『경청』 속 임해수가 그런 인물이다.


상담사로 방송에 출연해 대본을 보고 한 배우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말했을 뿐이다. 자신의 일을 한 것이다. 얼마 후 그 배우가 자살을 했고 언론과 방송에서 그 이유를 그녀의 말 때문이라 쏟아냈다.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한 사람의 삶에 그녀는 개입되고 말았다. 아니 그의 죽음이 그녀의 삶에 개입된 것이다. 이후의 삶은 나락 그 자체였다. 상담사로 일했던 자신의 자존감과 가치는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고 센터는 휴직과 퇴사를 통보했다. 결혼생활도 끝났다. 한 마디로 그녀의 모든 게 망가졌다. 일상을 유지할 수 없는 상황에 놓였다. 


소설은 그녀가 쓴 기자에게 쓴 편지로 시작한다. 해명이라 여길 수 없는 너무도 절박한 반박이다. 편지는 기자뿐 아니라 센터에서 함께 일했던 동료, 상사, 변호사, 죽은 배우의 아내, 친구에게로 이어진다. 그러니까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려고 애쓴다. 그러나 무례하지 않은 말들을 골라 최선을 다해 쓴 편지는 전달되지 않는다. 하루 종일 매달린 편지를 그녀는 태우고 만다. 그녀가 하는 일이라곤 편지 쓰기와 동네 산책 정도가 전부다. 산책은 그마저도 쉽지 않다. 동네에서 그녀를 아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 일 이후로 그녀는 어떤 일에도 의견을 내거나 관여하지 않으려 애쓴다. 그러다 길고양이 순무를 만났고 고양이를 돌보는 아이 세이를 만났다.


순무는 경계심이 강했지만 그녀를 외면하지 않았고 세이는 경계심은 없었지만 그녀에게 모든 걸 말하지는 않았다. 순무 밥을 주고 간식을 주면서 세이를 자주 보게 되었고 조금씩 친해졌다. 순무가 아프다는 것과 길고양이로 인해 동네의 작은 다툼과 사소한 분쟁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그녀는 그저 세이의 말을 들었다. 말을 거드는 일은 할 수 없었다. 그건 세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한 번씩 마주치는 세이의 모습은 자연스럽게 왕따를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아빠와 단둘이 사는 또래보다 덩치가 큰 아이, 피구 연습을 하면서 아이들이 세이를 위협하고 따돌리고 있었다. 그러나 세이는 단 한 번도 그 이야기를 그녀에게 하지 않았다.


학교생활이나 집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그녀는 물을 수 없었고 세이는 말하지 않았다. 세이는 순무를 구조하는 일에 대해서는 눈을 반짝였고 생각을 말했다. 순무를 구조하는 과정에 다친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동네 병원에서 진료를 받았다. 자신을 아는 이들, 혹시라도 자신을 기억하고 말을 거는 이가 있을까 두려운 공간에 가야 했다. 치료를 위해 찾은 병원에서 그녀를 알아보는 이의 조언을 들어야 했다. 사고에 대해 일부만 아는 사람들, 전체를 모르고 그녀를 위한다고 조언을 하거나 비난을 하는 사람들. 


그러니 이 순간은 이 순간일 뿐이다. 그녀가 과거에 겪은 어떤 일의 결과도, 원인도, 이유도 아니다. 시간은 곧게 나아가지 않는다. 삶의 모든 순간들이 인과의 직선을 따라가지 않는 것처럼. 그녀 자신이 단 하나의 얼굴로만 살아갈 수 없는 것처럼. (185쪽)


그런 말들을 그녀는 묵묵히 들었다.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다고, 자신의 자리에서 일을 할 수 있다고 버티고 견뎠다. 하고 싶은 말은 여전히 쌓였고 차올랐다. 그래서 편지를 쓰는 일은 멈출 수 없었고 자살한 배우의 아내를 만나고 그녀와 비슷한 상황에 놓인 이들을 만나 고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하지만 뭔가 달라지고 해결되는 일은 없었다. 그녀는 멈춤 상태였고 도저히 움직일 수 없었다. 그런 그녀를 움직이게 만든 건 순무와 세이였다. 


구조를 시도할 때마다 상처를 주던 순무를 쉽게 구조한 건 세이였다. 치료를 할 병원을 찾아 입원시키고 그 과정을 지켜보면서 그녀는 세이가 말해주기를 기다렸다. 그러니까 학교에서 친구들과 어떤 일이 있었는지 왜 그렇게 당하고 있는지 말이다. 세이와 함께 보낸 시간을 통해 과거 그 방송에서 했던 말들의 의미를 돌아본다. 일부를 보고 전체를 판단하는 일, 정확한 전후 사정을 살피려 노력하지 않았던 부분에 대해서. 


피구 대회에서 결국 터져버린 세이의 감정들, 친구와 싸우고 전학을 가야 할 위기에 놓였다. 세이와 친하게 지내고 상담사라는 걸 알고 찾아온 세이의 아빠에게 사과하면 정리될 문제라고 말하는 그녀. 세이가 힘든 시간을 보내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녀는 세이에게 자신을 대입시켰는지도 모른다. 순무가 사람들에게 다가오기를 기다렸던 것처럼, 어떤 일에는 그에 합당한 시간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그 시간을 기다려는 주는 일도 말을 경청의 일부일 것이다. 그러니 누군가의 말을 경청할 태도엔 그런 기다림도 필요하다. 회복된 순무를 세이가 키우고 해수의 집에 찾아와 자신의 이야기를 꺼낼 수 있을 때까지의 기다림.


그러나 이 순간에도 시간은 흐르고 있다. 막바지에 이른 더위가 물러가면 서늘한 바람이 불고 눈이 내리는 겨울이 올 것이다. 시간은 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그건 막을 수 없다. 그녀 역시 마찬가지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그렇듯 지금의 시간을 지나 다음의 시간으로, 그다음의 시간으로 나가갈 의무가 그녀에게도 있다. (301쪽)


해수와 세이 모두 지금의 시간을 지나 다음의 시간으로 나가갈 때가 온 것이다. 편지를 쓰는 일 대신 누군가의 말을 들어주고 정성을 다해 상담을 하는 일. 이제까지 말하지 못했던 마음의 말을 하나씩 건네는 시간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 속 인물 ‘세이(say)’란 이름은 무척 상징적이다. 함부로 말하고 대충 듣는 일, 말의 무게를 생각하고 진심을 다하는 말을 고르는 일, 소설 속 인물을 떠나 우리 모두가 취해야 할 태도다. 


차분하고 단단한 문장으로 들려주는 김혜진의 글을 읽는 일, 귀를 기울여 듣는 경청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쉽게 말과 글로 상처를 주고 잊어버리는 너무도 편리하고 익숙한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킨다. 고였던 말들이 천천히 움직여 흐르는 느낌이라고 할까. 그 말들이 누군가를 움직이는 아름다운 동력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전해지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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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3-01-06 23: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따뜻한 주말 보내세요.^^

자목련 2023-01-09 09:06   좋아요 1 | URL
^^*

thkang1001 2023-01-08 10: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이달의 당선작 선정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항상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감사합니다!

자목련 2023-01-09 09:07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즐겁고 행복한 날들 이어가세요^^

thkang1001 2023-01-09 0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행복한 한 주 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모든 것들의 세계 트리플 15
이유리 지음 / 자음과모음 / 2022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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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 좋은 이유 중 하나는 내가 상상하지 못한 세계로 나를 이끌기 때문이다. 명확하게 장르를 구분할 수 있는 SF나 판타지가 아니더라도 말이다. 누구나 한 번쯤은 상상했으나 확장되지 못하고 사그라든 이야기를 만날 수 있어 좋다. 이유리의 소설엔 그런 게 있다. 그러니까 뭐냐, 이 황당한 상상이 아니라 나도 그 상상을 경험하고 싶다는 막연한 바람을 품게 된다고 할까.


『브로콜리 펀치』에서 그랬듯 『모든 것들의 세계』에 수록된 세 편의 단편도 다르지 않다. 그런 기운 때문이었을까. 이유리의 소설에는 모든 것들이 가능한 세계가 숨겨진 것만 같다. 트리플 시리즈인 이 소설집을 ‘모든 것들의 가능한 세계’로 부르게 만든다. 


표제작 「모든 것들의 세계」의 화자 ‘고양미’는 죽은 사람이다. 귀신이라고 해야 맞겠다. 그러나 무섭거나 두려운 존재가 아니다. 그녀는 저승차사를 부모가 ‘천주안’이란 남자와 영혼결혼식을 올렸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리고 곧 천주안을 만나 서로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고양미는 취직과 결혼을 하라는 부모님의 소망과는 다르게 게임을 하다 옆집에 난 불로 죽었다. 게임에 빠져 불이 난 줄도 모르고 죽은 거다. 천주안은 부모님과 결혼 문제로 다투다 20층에서 떨어져 죽었다. 자신이 게이라는 사실을 알리지도 못하고 죽기를 작정한 건 아닌데 그렇게 되고 말았다.


이승에 먼저 온 고양미는 천주안에게 사후 세계에 대해 설명한다. 부모나 가족이 아닌 누군가가 자신을 그리워하면 소멸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그래서 PC방에서 게임 동호회에 접속해 자신의 닉네임을 검색한다고. 천주안의 애인이 사는 곳까지 동행한다. 고양미는 이승의 게임에서 힐러였던 것처럼 저승에서도 천주안을 달래고 위로해 준다. 


다만 잊히고 싶지 않았다. 왠지 모르겠지만 그건 싫고 무서웠다. 꼭 즐겁고 행복한 기억으로가 아니어도 좋으니, 내 세계는 끝나 없어지더라도 다른 누군가의 세계 어느 한구석에는 끝내 남아 있고 싶었다. (「모든 것들의 세계」, 30쪽)


소설을 읽으면서 존재하지도 않을 양미가 잊히지 않기를 바랐다. 발랄한 귀신으로 여전히 좋아하는 카페에서 빵 냄새를 흠씬 맡으며 지내기를. 이런 마음을 갖게 만드는 게 이유리 소설의 힘이다. 허구의 존재에 대한 동경과 응원을 하게 되니까 말이다. 자신의 마음을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기발한 설정의 「마음소라」에서도 마찬가지다. 


일차성징처럼 때가 되면 누구나 ‘마음소라’를 갖게 되는데 만약 누군가에게 주게 된다면 그 한 사람만이 유일하게 자신의 진심을 고스란히 들을 수 있다. 그러니 고미는 도일의 마음소라를 선뜻 받을 수 없다. 결국 그것을 받으면서 둘은 7년의 연애를 시작한다. 고미와 도일의 사랑이 결혼으로 이어졌으면 문제가 없게지만 둘은 헤어졌다. 각자 다른 이과 결혼을 했다. 시간이 지나 도일의 아내 양희는 고미에게 마음소라를 돌려달라고 한다. 가출한 상태의 양희는 자신은 들을 수 없는 도일의 마음을 알려달라고 부탁한다. 고미는 도일의 마음에 양희에 대한 생각과 걱정이 없음에도 그녀를 걱정하고 있다며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한다. 누군가의 진심을 안다는 건 마냥 기쁠 수만은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간절하게 사랑하는 이의 마음이 궁금하고 알고 싶다. 


마지막 「페어리 코인」에는 요정이 등장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름이 요정인 반려동물인 줄 알았다. 전세사기를 당한 ‘나’와 ‘우진’과 함께 산다. 말 그대로 요정이라 늙지도 죽지도 않는 존재로 키우는 데 어려움은 없다. 요정은 고조모가 발견하고 그 뒤로 증조모, 할머니, 엄마, ‘나’가 물려받은 가족으로 언제나 곁에 있었다. 법적으로는 문제가 없어 전세금을 돌려받을 수 없는 상황에 우진의 친구 ‘현철’은 요정으로 ‘페어리 코인’ 사기극을 벌이자고 제안한다. 현철의 계획대로라면 모든 게 완벽했다. 사기를 친 집주인과 부동산, 아무것도 찾을 수 없다는 변호사와 세상 모두에게 복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과거 현철이 우진을 배신한 일이 떠오르며 흔들린다. 요정의 존재를 제외하면 너무도 현실적인 설정이다. 어떤 방법으로 가상화폐가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는지, 작정하고 전세 사기를 치는 이들의 모습까지. 


현실에서 요정처럼 우리를 지켜주는 존재는 누구일까. 어쩌면 이유리는 힘들고 지친 우리네 삶에 소설로나마 그런 존재를 보여주고 싶었던 건 아닐까. 위로하는 귀신 양미, 때로 상대를 위해 가짜 마음소리를 전달하는 고미, 존재만으로 든든한 요정처럼. 이유리는 비현실적인 판타지를 통해 현실의 우리가 서로를 기억하고, 사랑하고, 지지하며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전한다. 그리하여 모든 것들의 가능한 세계를 꿈꿀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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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환대
장희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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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였던 이들은 영원히 우리일까. 아무런 이유 없이 우리가 될 수 있었던 것처럼 아무런 이유 없이 혼자가 되기도 한다. 우리 중 하나가 사라지거나 완전히 떠났을 때에도 그는 우리 곁에 머문다. 조금씩 잊히겠지만 말이다. 상실과 부재를 채우는 건 우리였던 시절의 기억이다. 함께였던 시간의 기억, 머물렀던 공간. 좋았던 것은 좋았던 대로, 나빴던 것은 나빴던 대로 우리로 남는다. 


장희원의 첫 소설집 『우리의 환대』는 우리였던 이들의 기억인 동시에 남겨진 자의 상실과 애도에 대한 이야기다. 부재를 바라보는 시선이라고 할까. 누군가를 애도하고 그리워하는 일에 대해 담담하고 차분하게 들려준다. 떠난 이에 대해 말할 때 그를 아는 이가 있다면 감정은 뜨겁고 솔직해진다. 사고로 죽은 친구 여정의 아버지의 초대를 받은 「폭설이 내리기 시작할 때」 속 ‘나’와 ‘재희’는 여정의 아버지에게 그런 존재인지도 모른다. 혼자 떠난 여행에서 사고로 죽은 여정, 여정 없이도 남겨진 우리는 살아간다. 언제나 있던 그 자리에 여정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부재는 그런 기이한 순간을 불러온다. 떠났다는 것을 알지만 여전히 존재하는 것처럼 살아가다 불쑥 그의 부재를 확인한다. 삶이란 원래 그런 거였다는 듯이. 상실은 온전한 부재를 통해서만 다가오는 건 아니다. 표제작 「우리〔畜舍〕의 환대」에서 자식이 부모의 품을 떠나는 일, 그것을 인정하는 일을 부모에게 거대한 상실감을 안겨준다. 부모가 알고 기대를 품었던 모습이 아닌 전혀 다른 모습이라면 상실감은 이루할 수 없이 크다. 어쩌면 건널 수 없는 하나의 경계선을 두고 바라만 보는 일은 다른 이름의 상실이자 부재인지도 모른다. 


그런가 하면 번대로 조금씩 소멸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지켜보는 혜주와 ‘나’보냈던 여름을 들려주는 「혜주」는 익숙함에 대한 부재를 생각하게 만든다. 아픈 아버지를 휠체어에 태우고 산책을 하던 혜주, 간병을 하는 딸에게 짜증을 내고 고집을 부리던 아버지에 대한 속상함을 토로하던 혜주와의 익숙했던 통화가 점점 줄어들고 ‘나’의 이직으로 혜주와 조금씩 줄어들고 끝난다. 이처럼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사라지고 멀어지는 것들은 모두 결국 부재이며 상실이구나 싶다.


상실의 쓸쓸함이 유독 진하게 느껴진 단편은 「남겨진 사람들」과 「기원과 기도」였다. 「남겨진 사람들」 속 유진은 과거 연인이었던 상주와 같던 강원도로 떠난다. 연인 재우의 배웅을 받으며 혼자만 왔다. 유진이 마주하고 싶었던 풍경은 무엇일까. 죽은 상주와의 기억을 더듬으며 유진은 상주가 아주아주 눈이 많이 내리는 곳을 가고 싶어 했다는 걸 생각한다. 그리고 그 풍경을 상주가 유진과 함께 보고 싶어 했다는걸. 유진은 상주가 올라와서 보았던 곳까지 힘들게 올라간다.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다. 조금 전 그녀가 있던 바로 그 자리에서 서서 자신 쪽으로 돌아봐주기를, 안타깝게 그녀를 보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잠깐이라도 자기를 봐주기를 바라는 마음. 왜 자꾸 그런 간절한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무언가를 남겨두고 온 것 같았다. 그리고 다시 생각했을 때는 혼자 남겨진 것 같기도 했다. (「남겨진 사람들」, 164~165쪽)


현재의 유진에게 우리는 상주가 아닌 재우일 것이다. 하지만 죽은 상주를 향한 애도는 다른 일이다. 어쩌면 혼자 강원도를 여행하는 일이 남겨진 유진이 상주를 애도하는 방법이었는지도 모른다. 유진이 남기고 온 것은 무엇일까. 그 마음을 헤아리고 싶은 건 나 역시 남겨진 사람들 중 하나이기 때문일 것이다.


「기원과 기도」는 남겨진 사람들을 바라보는 떠난 자의 시선이다. 소설 속 화자인 ‘현주’는 떠난 사람이다. 그러니까 엄마보다 먼저 죽은 딸이다. 자신이 나고 자란 지방의 도시를 떠나기 위해 공부했고 대학 진학과 동시에 서울에서 살게 된 현주는 병에 걸려 죽었다. 죽은 현주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남동생 현수와 엄마는 산속의 어떤 집으로 향한다. 거기에 있는 이들이 축문을 읽고 같이 기도를 드리고 장만한 음식을 먹고 돌아온다. 이 모든 과정에 죽은 현주가 동행한다. 그토록 완전히 떠나고 싶었던 그곳을 떠나지 못하는 마음을 나는 짐직할 수 없지만 불현듯 큰언니나 엄마의 마음도 다르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 순간 목이 메어왔다.


왜 나는 아직 이곳일까. 왜 이곳에 마음을 두고 있을까. 그리고 왜 그 마음을 항상 저버릴 수 없었을까. 차마. 왜. 이 마음은 대체 무엇일까 하고 생각하고 있을 때쯤, 현수는 이제야 맞는 길을 찾은 것 같았다. 다행이야. 현수는 엄마가 깨지 않도록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잠시 후 저 멀리서 조금씩 익숙한 풍경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없이 그 풍경을 마주할 뿐이었다. (「기원과 기도」, 193~194쪽)


이 소설집에서 죽음은 상세하고 구체적인 묘사가 아닌 사고나 병사로 간단한 상황으로 설명한다. 죽음이라는 건 아무리 노력해도 어찌할 수 없는 거라고 말해주는 것 같다. 사랑하는 이가 떠나고 남겨진 이들이 그들의 죽음에 닿을 수 없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고. 그러나 그들을 향한 마음은 쉬이 멈추거나 사라질 수 없다. 불쑥불쑥 올라오는 설명할 수 없는 묵직한 것들과 멍한 시간들, 그것들이 부재와 상실의 자리를 머문다. ‘우리’의 부재를 채운다. 


아무런 이유를 찾을 수 없지만 끝내 연락이 닿지 않는 이들을 잃었다는 상실감이 몰려올 때가 있다. 그들과 나는 한 번도 우리였던 적이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절망감. 살아가는 데 불편을 주지 않는 감정이 조금은 슬프다. 춥고 쓸쓸한 겨울이라서 그럴지도 모른다고, 이 단편집을 읽어서 그런 거라고 괜찮다고 혼잣말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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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모르는 이야기 교유서가 산문 시리즈
황시운 지음 / 교유서가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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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삶에 대해 말하는 건 항상 조심스러워야 한다. 어떤 비슷한 경험을 했을지라도 나의 그것과 결코 똑같이 포개질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일이 그러하겠지만 짐작과 판단은 무서운 것이다. 작가의 산문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다. 황시운의 산문집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에 대해 사고 이후의 일상에 대한 글이 아닐까 단순하게 생각했다. 그러니까 아무렇지 않은 일상에서 발견하는 작가로의 글쓰기에 대한 고민과 사유를 말이다. 


그러나 첫 문장을 읽는 순간 책을 덮고 말았다. 한참 동안 숨을 고르고 난 후에야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작가에게 일어난 사고가 어떤 사고인지 이제야 정확하게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상을 이어가고 있는지 말이다. 내가 이렇게 일상이라고 써도 괜찮은 걸까 싶은 일상들. 나는 여러 차례 수술을 한 이력이 있다. 매 수술마다 전신마취를 했고 그것 때문에 기억력이 나빠진다고 친구들에게 농담을 건네기도 했다. 첫 문장을 읽고 병실에 누워있던 내가 떠올랐다. 그와 나는 전혀 같은 상황이 아님에도 정신을 차리는데 시간이 필요했다.


그랬다. 황시운의 산문은 나는 모르는 이야기, 알 수 없는 이야기였다. 어쩌면 이 책이 아니면 살아가는 동안 영영 알지 못했을 이야기다. 가장 빛나고 행복했던 순간에 사고를 당한 작가, 그로 인해 척수손상을 입고 하반신 마비가 되고 반복된 수술과 재활을 통해 현재는 휠체어를 타는 삶, 자신의 의지로는 할 수 없는 일들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며 살아가면서도 한 번씩 모든 삶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 11년이 지난 현재 고통과 동반한 삶을 이어가는 이야기. 하루하루 매 순간의 생생함을 낱낱이 들려주는 글 속에서 참을 수 없는 통증에 몸부림치며 그 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작가의 간절함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나아진 것은, 정말이지, 아무것도 없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주어진 대로 나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을 뿐이다. (33쪽)


좋은 이들과 밤 산책을 나간 게 잘못은 아닐 터. 난간이 있어야 하는 다리에 난간은 없었고 작가는 추락했다. 빠른 판단과 이동은 없었고 수술은 미뤄졌다. 그동안에 고통은 온전히 작가 혼자의 몫이었다. 삶이란 그런 것이라고 예고하듯이 말이다.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자신만의 고통이 시작된 것이다. 살아 있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작가를 괴롭히는 당연한 질문이었을 것이다. 작가를 돌보는 엄마가 곁에 없었더라면 불가능했을 일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게 삶이라는 듯 작가는 다시 시작한다. 수천 번의 움직임으로 균형을 잡고 휠체어에 오르고 소설을 쓰고 세상으로 당당하게 나간다. 왜 이런 기록을 남겨야 하는지 자신이 소설을 쓰는 일이 어떤 의미인지, 이 일이 우리(휠체어 장애인)를 세상에 알리는 향한 ‘입’이라는 걸 말한다. 비장할 게 없는 일이 비장하게 전해지는 것 사회가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도 일조했을 것이다. 다른 삶이라는 이유로, 잘 모른다는 이유로 말이다.





작가의 일상은 통증에서 시작해 끝나지 않을 통증으로 끝난다. 통증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는 건 뭔가에 몰입하는 순간인데, 그 순간은 통증이 조금이나마 줄어들어야 가능하니 악순환인 것이다. 참아내고 견디며 맞이한 그 짧은 순간에 그는 글을 쓰고 소설을 쓴다. 소설만이 자신을 증명하고 하고 싶은 일, 그러니까 존재의 이유였다. 장애인 재택근무를 하고 소설을 쓰고 휠체어를 타고 친구들을 만난다. 이렇게 쓰고 일처럼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반드시 누군가 도움을 받아야만 해결할 수 있는 대소변 처리의 어려움, 휠체어 바퀴가 굴러가기 어려운 도로 상황과 출입이 어려운 가게들까지 차마 다 말할 수 없는 절망이 가득했다. 휠체어가 넘지 못할 턱들처럼 눈에 보이는 어려움뿐 아니라 그를 향한 사람들과 사회의 시선은 냉대 그 자체였다. 빈번하게 마주하는 출입이 불가능한 가게들로 인해 함께 재활 치료를 했던 이들과의 만남이나 친구와의 약속이 미뤄지거나 집에서만 만나야 할 때마다 화 나고 속상했을 마음을 어떻게 달랬을까. 공연 예매 당시 장애인이라는 사실을 알리고 공연장에 도착했지만 주차부터 모든 게 엉망으로 이어졌던 작가의 불편하고 불쾌했던 기억은 현재 우리 사회의 장애인 편의시설과 운영이 어떤지 알려준다. 그럼에도 그는 포기하지 않기로 한다. 작가를 밀어낸 무리 중에 나는 없었을까. 턱을 높이고 틈을 벌여 놓은 사람들 가운데 우리 모두가 있다는 사실이 부끄럽다. 


무수한 턱들을 앞세워 사회가 아무리 나를 밀어낸다 해도 나는 여전히 세상 속, 사람들 틈에 있고 싶었다. (95쪽)


절망에서 그를 이끈 건 소설이지만 그걸 가능하게 만든 건 엄마였고 가족이었다. 간병과 돌봄, 일상을 유지할 수 있도록 희생한 엄마. 모든 엄마가 그렇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살을 에는 통증에 울부짖는 작가에게 오늘이 가장 덜 아픈 날이라고 담담하게 위로하면서도 꿈에서는 걷고 뛰고 수영을 한다며 기적을 바라고 재활 치료를 받을 때 두 다리를 절단해 의족을 하면 걸을 수 있을 환자를 부러워하는 걸 이해하고 받아주는 엄마. 암으로 투병하고 돌아가실 때까지 소설집이 나오기를 바랐던 아빠, 휠체어 타는 고모를 사랑하고 그로 인해 불편한 친구와 이웃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아이로 성장하는 조카들. 같은 병원에서 만나 재활을 하며 인연을 이어간 친구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있는 그대로의 작가를 사랑하고 아끼는 선후배와 동료 작가들. 


사람들은 종종 감사해야 할 일을 잊고 살아간다. 정작 자신이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는 잊은 채 남이 가진 것에만 눈을 반짝이는 것이다. (179쪽)


어쩌면 이 책은 그들에게 잘 지내고 있다는 안부이자 고마움과 감사함을 전하는 따뜻하고 다정한 편지일지도 모른다. 하반신 마비로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통증을 뇌가 기억해 온몸으로 견디며 그가 어떻게 고통을 참아내며 글을 썼을지 생각하면 더 소중하게 다가온다. 유난히 힘들고 어려운 일이 많았던 한 해의 끝자락에서 만난 산문집은 내게도 그러했다. 나의 어려움과 작가의 어려움을 감히 비교할 수 없겠지만 나의 어려움과 작가의 어려움을 감히 비교할 수 없겠지만 돌아보면 모든 게 감사하고 그 덕에 내가 여기 있다는 걸 다시 한번 확인하게 만든다.


길을 잃었다면 다시 길이 보일 때까지 질기게 버티는 수밖에. 세상이 동강나기 전부터, 그것 말고는 내가 아는 다른 방법 같은 건 없었다. (240쪽)


우리는 모두 작가처럼 질기게 자신의 삶을 버티며 살아간다. 그러나 혼자만의 버팀으로는 부족할 때가 많다. 함부로 타인의 삶에 할 수 없지만 타인의 아픔에는 적극적으로 관여할 수 있어야 한다. 아픔과 슬픔에 공감하고 그들과 같이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이 책을 읽기 전에 나는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의 당신이었지만 이제는 아니다. 아는 이야기가 되었고 더 많은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었다. 귀를 기울여 듣고 당신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전달하고 싶다. 어쩌면 당신도 영영 몰랐을 이야기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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