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와 책, 내가 좋아하는 것이다. 딸기가 금값이라고 하니 금을 먹는 기분이다. 붉고 단 맛이라고 할까. 무엇보다 진한 딸기향이 좋았다. 마트에서 구매를 할 때부터 향이 좋았는데 냉장고에서 보관하고 냉장고 문을 열 때마다 달달한 향이 퍼져 나오는 게 기분이 좋다. 딸기처럼 달콤한 소설을 기대하지만 소설을 읽기 전이니 아직 모른다.


장편소설 한 권과 단편집 한 권이다. 책을 고르는 일, 신중하게 하려고 그 마음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중이라 나름 만족스럽다. 집중해서 읽으면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 같다. 아무튼 딸기만큼 아니 이 봄의 나를 설레게 하는 책들, 소설이다.






지넷 윈터슨 장편소설 『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다』는 얀마텔의 에세이를 읽고 궁금했던 책이었다. 이번에 민음사에서 민음사 모던 클래식 개정판으로 나왔다. 이 기회에 읽어야 할 것 같았다. 사실 이 책 때문에 오렌지와 책 사진을 찍고 싶은 욕심도 있었으나 냉장고 오렌지는 없었다.


문지혁 소설집 『고잉 홈』은 장편으로만 만난 문지혁의 단편을 만나보고 싶어서 구매했다. 단편도 장편에서 느낀 분위기와 감성이 전해질 것 같은 게 고잉 홈이라는 제목이 한몫 거들었다. 김윤아의 노래 Going Home을 좋아하기도 해서 같은 제목이라 더 끌린 이유도 있다.


강원도에 내린 폭설을 스케치한 뉴스를 보면서 그곳은 겨울이구나 생각했다. 낮과 밤의 길이가 같다는 춘분은 봄의 절기인데 봄이 아닌 겨울의 시간을 보내는 이들이 있겠구나 생각한다. 봄에 맞게 해야 할 일들을 계획하고 삶의 시간표를 작성했을 이들의 걱정스럽고 안타까운 한숨이 들리는 것만 같다.


예측할 수 없는 하루, 단순하게 살려고 해도 복잡할 수밖에 없는 삶이 돼버렸을 것 같다. 그러니 가장 단순한 것들, 할 수 있는 것들, 지금 당장 필요한 것들이 무엇인가 돌아보게 될 것이다. 따지고 보면 그건 눈의 늪에 빠진 것 같은 누군가의 바람이 아니라 나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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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4-03-20 1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딸기 아주 맛나 보입니다^^ 오렌지책 저도 궁금하던데, 자목련님 즐거운 독서 하세요!

자목련 2024-03-22 08:32   좋아요 1 | URL
딸기 맛있었어요~ 아껴서먹느라 더 달콤했다는...
오렌지는 기대하고 있고요!

거리의화가 2024-03-21 08: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지난 주말 코스트* 갔다가 딸기를 사 와서 먹었답니다. 비싸서 그런지 먹을 때 아껴먹게 되더라고요. 그래도 순삭했지만 딸기를 먹는 순간은 역시 행복하다 싶었습니다. 두 책 모두 즐독하셔요^^

자목련 2024-03-22 08:33   좋아요 1 | URL
가격 생각하지않고 많이 사서 많이 먹고 싶은 딸기입니다 ㅎ
화가 님, 금빛 같은 금요일 보내세요^^

은하수 2024-03-22 15:42   좋아요 1 | URL
저두요~~~
코스트코 딸기 향이 정말 장난 아녔어요. 순식간에 다 먹어버렸지 뭐예요^^

자목련 2024-03-25 13:29   좋아요 0 | URL
진한 딸기 향, 먹고 있어도 딸기가 그립습니다 ㅎㅎ

레삭매냐 2024-03-25 15: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민음사의 모클 시리즈가 다 죽을 줄
알았는데 열심히 표지 갈이해서 다
시 내고 있어서 신기하더라구요.

새 책은 내지 않고 역시 구관이
명관이라는 걸까요.

저도 책이 궁금하긴 한데, 마침
집에 오렌지가 있으니 ㅋㅋ
근데 책이 없네요.

자목련 2024-03-27 08:48   좋아요 0 | URL
저는 과거 표지가 더 좋은 것 같습니다. ㅎㅎ
책은 도서관에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ㅋㅋ
매냐 님 베란다의 튤립은 피었을까요?
 

매화축제가 시작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꽃대궐이 시작될 모양이다. 봄은 매년 오는데 왜 이리 설레는 걸까. 그런데도 어떤 감정은 해가 바뀌어도 살아나지 않고 메마르다. 연애 세포를 깨워야 한다는 우스갯소리처럼 연애 감각을 깨워야 한다. 직접적으로 누굴 사랑하거나 연애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 말이다. 딱딱하게 굳어 끝내 바스러질지도 모를 감정에 노크하는 시를 만났다. 국내 최초의 시(詩) 큐레이션 앱 ‘시요일’에서 기획한 다섯 번째 시선집 『이 연애에 이름을 붙인다면』에 수록된 시들이다.



목차를 살피며 내가 좋아하는 시인의 이름을 발견하고 반가웠다. 아, 그래 그 시집에 그런 시가 있었지. 기억을 떠올리며 나는 이 시를 처음으로 읽었다. 사랑에 전부를 걸어도 후회하지 않을 당당한 자신감, 끝이 어떨지라도 누가 뭐래도 나는 지금 사랑을 선택하겠다는 당찬 기백이 느껴진다고 할까. 그러다 이 사랑이 혼자만의 사랑이라면 얼마나 처절한가 생각하니 가시를 삼킨 것만 같다.






내 사랑에는 파국이 없으니

당신은 나의 높이를 가지세요


과육을 파먹다

그 속에서 죽은 애벌레처럼

순진한 포만으로


돌이킬 수 없으니

계속 사랑일 수밖에요 (신미나 「복숭아가 있는 정물」)


그리고 이런 시를 읽고 울컥한다. 연애가 시작되고 이어지는 날들, 모든 날 모든 것이 행복하다가도 어느 순간 연인의 표정에 시시각각 연애가 흔들린다. 아, 나도 연인의 얼굴과 말투 하나에 온 신경을 쓰고 살피던 시절이 있었다는 게 떠오른다. 돌이켜보면 아무것도 아닌데,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며 서로에게 스며들기를 바랐던 날들이다. 그게 진정 연애의 모습일 것이다.


너는 내 표정을 읽고

나는 네 얼굴을 본다


너는 쾌활하고 행복하게 마시고 떠든다

그래서

나도 쾌활하고 행복하게 마시고 떠든다


그러다 너는 취해 운다

그래서 나는 취하지 않고 운다


눈물을 닦으며 너는 나를 사랑한다

눈물을 닦으며,

나는 네 사랑을 사랑한다


너는 나를 두고 집으로 갈 것이다

나는 너를 두고, 오래 밤길을 잃을 것이다


내 얼굴엔 무수한 표정들이 돛처럼 피어나고

내 얼굴은 무수한 표정들에 닻처럼 잠겨 있다 (이영광 「얼굴」)







어떤 시는 내 마음 같고 내 연애의 기억 같다. 어떤 시는 시인의 사랑 같고 어떤 시는 시인의 고백 같다. 그게 무엇이든 무슨 상관이랴. 시를 읽고 시에 취하고 시를 품고 시를 흠모하고 시를 만지면 그만인 것을. 그래도 『이 연애에 이름을 붙인다면』 란 시집의 제목처럼 모든 사랑은 저마다 다른 이름이 있을 것이다. 사랑이 끝난 후에도 그 사랑의 이름은 지워지지 않고 환한 봄날에도 시리게 추울지도 모른다. 사랑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삶을 송두리째 무너지게 하거나 삶을 환희로 가득 차게 만드는지.


내 팔을 가져다가 머리를 베고 잠들었던 아이는

자다가 내 팔을 내동댕이친다

아이가 휘두른 내 팔이 얼굴을 때린다

사랑은 곧잘 내 얼굴에 던져지는 모욕 받은 내 팔이다

줄을 타고 작두를 타고 공중그네를 타는

힘겨운 재주 부리다가, 내가 하는 사랑은

네가 나를 가져다 놓았다 하기에 (이선영 「사랑, 그것」 )


- 열차가 끽, 서는 소리

- 소녀의 목소리가 들린다


가장 아름다운 꿈은,

그 애와 함께 있는 꿈이에요. (한정원 「25」 )


모호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세계로 이끄는 시들이다. 67편의 시에는 차마 말하지 못한, 표현하지 못한 사랑의 형태가 가득하다. 모든 사랑의 이름을 겹겹이 쌓아 올린 무너지지 않을 탑이라 해도 좋을 시선집. 당신을 붙잡는 시가 있다면 그것이 당신 사랑의 이름이 될 것이다.


오랜만에 시집을 꺼내는 시간이 될지도 모른다. 모아두기만 해서 미안했던 시집, 그 안에서 마음을 두드리는 시를 만나는 일. 봄을 핑계로 시로 안부를 전해도 좋을 것 같다. 쑥스럽고 이상할지라도 봄이니까. 봄이라서 그랬다고 말을 덧붙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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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4-03-11 09: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헐........매화축제를 한다고요??? 벌써 꽃이??
헐...... 자목련 님 연애하신다고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 연애에 이름을 붙인다면> 진짜 연애 시만 가득한 거 같네요?! ㅎㅎㅎ

자목련 2024-03-11 10:16   좋아요 0 | URL
남쪽은 매화가 한창이라고~~
남은 생애 연애는 없을 듯 합니다. ㅋㅋㅋ
전략적으로 기획한 시집인 것 같아요.

blanca 2024-03-11 13:06   좋아요 1 | URL
저도 자목련님의 연애 대목에 눈이 커졌어요. ^^ 남쪽 벌써 매화가 폈다고요? 봄이 가는 게 왜 이리 아깝나요.

레삭매냐 2024-03-11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야 드디어 꽃대궐이 시작되려나 봅니다.
저희 집에 네그리다 튤립이도 꽃대를
올리고 있더라구요. 드디어 !

저도 어제 <패터슨> 시집을 도서관에
서 보려고 가져 왔으나 아직 펴보진
못했네요.

시집을 잘 읽지 않지만 그래도 봄이니깐요.

자목련 2024-03-12 16:43   좋아요 0 | URL
아, 기대돼요!
네그리다 튤립 얼마나 예쁠까요!

네, 봄이니까요~~

blanca 2024-03-11 1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요새 시집 읽기 시작했어요. 한정원 시집 참 좋죠. 옮겨 주신 시도 참 좋네요. 봄 꽃망울 보면 마음이 싱숭생숭합니다. 시인들은 천재 같아요. 시인들 대표작 모은 문학동네 시인선 050도 살짝 추천하고 갑니다.

자목련 2024-03-12 16:45   좋아요 0 | URL
한 시인의 시집도 좋지만 이렇게 엮은 시들도 좋더라고요.
풀판사가 50, 100 특집으로 시선집을 내주지 고맙죠^^

새파랑 2024-03-11 15: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집 책탑이 너무 멋집니다. 봄이 오긴 왔나 봅니다~!!

인용된 시들이 다 좋네요~!!

자목련 2024-03-12 16:46   좋아요 1 | URL
아직 춥지만 봄이에요. 날도 길어지고 한낮에는 겉옷이 무겁게 느껴지는...

망고 2024-03-11 1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화가 벌써요? 저희집 매화는 이제 조금 움 틀까말까 하는데요 사실 이것도 올해는 빨라요 유독 봄이 빨리 온거 같아요^^

자목련 2024-03-12 16:47   좋아요 0 | URL
제가 사는 이곳도 아직은 꽃이 귀하지만 남쪽은 이미 환한 꽃들이 가득한 것 같더라고요.
망고 님의 마당에서 피어날 꽃들도 곧 만나겠지요?

구단씨 2024-03-11 2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요즘 읽고 있는데, 좋네요.
소개해 주신 시 중에서 <얼굴> 인상적이구요.
올해에는 다른 지자체에서도 봄꽃 행사를 조금 일찍 시작하더라고요.
시골 동네의 매화 나무에 벌써 꽃이 피었어요.
봄이네요...

자목련 2024-03-12 16:47   좋아요 0 | URL
봄이 점점 빨라지는 걸 실감하는 날들이에요.
작년하고 또 다른 것 같아요.
시와 꽃이 있는 봄!!

그레이스 2024-03-13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육을 파먹다
그 속에서 죽은 애벌레처럼
순진한 포만으로˝
너무 좋아요
이래서 시를 읽지 싶네요.^^♡
 

초미세먼지로 뿌연 날이다. 아파트에는 공사가 한창이다. 기회가 되면 이 공사에 대해서도 글을 쓸 수 있기를 바란다. 급하면 급한 공사라서 그런지 휴일에도 소음이 가득하다. 아무튼 공사는 진행 중이고 날씨는 조금 부드러운 표정으로 변했다. 표정 관리를 하려는 듯 내일은 비가 온단다. 비가 오면 미세먼지, 초미세먼지도 조금은 나아지겠지.


뿌연 기분을 걷어낼 책, 책 이야기는 언제나 즐겁다. 2월의 책에 이어 3월에는 이 책으로 충분하길 바란다. 그러니까 내가 구매한 책 말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모두 2월에 구매한 책이다. 이제 3월의 시작이니 3월에 사고 4월로 넘어갈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어떤 책인지 책 이야기를 하자.







출판사 <시간의흐름>에서 나온 책을 종종 산다. 어떤 작가의 산문이 나오나 살피고는 있지만 구매로 곧장 이어지지는 않는다. 이제니의 산문집이라서, 그의 산문을 읽은 기억이 없어서. 나만 안 읽었을 수도 있지만. 그래서 『새벽과 음악』이란 멋진 제목의 책을 샀다. 문진영의 장편은 최근 단편집을 읽고 다른 소설도 더 읽고 싶어서 검색하다 『딩』을 구매했다. 이미 읽었다. 좋았다. 많이 좋았다.


어쩌다 보니 자꾸 세계문학을 산다. 아, 어쩌자고 사는 것인가. 이러다 책장에 세계문학, 고전문학만 남을 것 같다.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산문 『이게 다예요』를 읽었지만(무척 얇은 책이라 읽었다고 하기엔) 그의 소설은 읽은 적이 없다. 영화 <연인>의 원작과 고민하다가 믿고 보는 분의 리뷰와 댓글로 이 소설이 더 좋다는 걸 보고 『태평양을 막는 제방』을 선택했다. 그리고 마지막은 솔 벨로의 『오늘을 잡아라』는 얇기도 하고 제목에 끌리고 평도 좋아서 샀다. 사실, 중고를 사고 싶었지만 중고는 찾지 못했다.


3월에 읽게 되기를 바란다. 2월보다는 이틀이나 많고 휴일도 이제 없으니까. 꽉 찬 날들에 알뜰살뜰 챙겨서 읽을 수 있다면 좋겠다. 그러려면 속도를 내야 하는데, 느릿느릿 거북이의 날들이다. 주변에 경주를 할 토끼가 있다면 좀 나을까 싶다가 토끼가 어마어마하게 많구나 싶다. 온라인의 책 모임, 책 리뷰만 생각해도 그렇다. 그럼 나는 그냥 내 속도대로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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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고 2024-03-04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을 잡아라˝ 제가 좋아하는 책^^ ˝새벽과 음악˝은 정말 제목이 멋지네요.
자기 속도대로 읽는게 제일 좋죠 저도 느림보;; 봄이 성큼 다가온 3월! 자목련님 속도대로 여유롭게 독서하는 3월 되시길요😄

자목련 2024-03-05 15:58   좋아요 0 | URL
와, 정말요? 빨리 읽어봐야겠습니다^^
봄에는 꽃도 봐야 하는데...
망고 님, 마당의 싹들은 많이 자랐나요?

은오 2024-03-04 1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어쩌자고죠?! 사놔도 한국문학 위주로 먼저 읽으셔서 남는 건가요...?! ㅋㅋㅋㅋ
자목련님은 3월에도 알찬 독서생활 하실 게 이미 보입니다~!!

자목련 2024-03-05 15:59   좋아요 0 | URL
맞아요, 한국소설과 에세이 먼저 읽어서...
은오 님은 학교에 계실까요?
 

영화 <가재가 노래하는 곳>을 보고 리뷰를 남기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나중에 한 번 더 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책에 대한 글을 마주할 때마다 소설로 꼭 읽어보고 싶었다. 결과적으로 소설을 읽은 건 정말 잘한 일이다. 아름다운 산문시 같은 소설,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게 되는 문장들, 가만히 눈을 감고 내가 알지 못하는 그곳을, 내가 닿을 수 없는 그곳의 공기와 냄새를 상상한다. 이렇게 아름다운 문장으로 시작하는 소설에 누가 반하지 않겠는가.


습지는 늪이 아니다. 습지는 빛의 공간이다. 물속에서 풀이 자라고 물이 하늘로 흐른다. 꾸불꾸불한 실개천이 느릿느릿하게 배회하며 둥근 태양을 바다로 나르고, 수천 마리 흰기러기들이 우짖으면 다리가 긴 새들이 ㅡ 애초에 비행이 존재의 목적이 아니라는 듯 ㅡ 뜻밖의 기품을 자랑하며 일제히 날아오른다. (13쪽)




그러나 그곳의 어린 소녀 여섯 살의 카야를 생각하면 마음이 시려온다. 떠난 엄마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소녀, 조디 오빠까지 떠나고 아빠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조심 행동하는 소녀, 모든 걸 혼자 감당해야 하는 소녀 카야가 어떻게 살아게 될지 걱정이 돼서다. 그러니 이 소설은 카야의 성장을 담은 소설이자 홀로서기로 볼 수 있다. 그렇게 보자면 1960년대 미국의 노스캐롤라이나의 습지를 배경으로 그 시대를 살아가는 인물들 속에서, 그러니까 백인 우월주의와 습지에 사는 카야에겐 그게 가능할까 싶기도 하다. 아무리 소설이라 할지라도 소설을 읽다 보면 저절로 그 시대의 문화와 관습에 가까이 다가갈 수밖에 없다.


카야는 습지에 산다는 이유로, 여자라는 이유로, 아예 관계를 단절하고 자신을 혐오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세상으로 나가기를 거부한다. 어린 소녀에게는 모든 게 무섭고 두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카야는 자포자기하지 않는다. 혼자만의 방식으로 자신을 지키고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한다. 엄마가 돌아올지 모르는 집을 지키며 외부인이 찾아올라치면 용케 숨어버린다.


가끔 알 수 없는 밤의 소리가 들려오고 코앞에 내리꽂힌 번개에 소스라쳐 놀랄 때도 있었지만, 카야가 비틀거리면 언제나 습지의 땅이 붙잡아주었다. 콕 짚어 말할 수 없는 때가 오자 심장의 아픔이 모래에 스며드는 바닷물처럼 스스르 스며들었다. 아예 사라진 건 아니지만 더 깊은 데도 파고들었다. 카야는 숨을 쉬는 촉촉한 흙에 가만히 손을 대었다. (49쪽)


홍합을 따서 필요한 물건을 사고 요트의 기름을 채우고 자신을 품어주는 습지에서 깃털과 조개껍질을 모으며 살아간다. 카야를 아끼고 돕는 이도 있었다. 홍합을 사주고 교회에서 옷과 신발을 가져가 카야에게 주는 흑인 점핑 아저씨와 메이블 아줌마, 그리고 테이트. 자연에 대해, 요트를 운전하는 법에 대해 카야에게 알려준 조디 오빠의 친구 테이트.


그는 카야에게 깃털로 마음을 전하고 천천히 다가왔다. 단 하루 학교에 갔던 카야에게 글을 가르쳐 주고 책을 가져다준다. 둘은 금세 서로를 향한 마음을 확인하고 사랑에 빠진다. 테이트는 카야의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고 미래를 약속하지만 현실적인 문제를 외면할 수 없다. 대학에 가야 하고 그동안은 카야와 떨어져지내야 한다. 돌아올 것을 굳게 다짐하지만 테이트는 끝내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테이트도 자신을 떠났다는 사실에 카야는 절망하고 자신만의 세계로 깊게 들어간다.






그런 카야에게 바람둥이 체이스가 다가오고 결국 그와 사귄다. 달콤한 말로 결혼을 약속하고 멋진 집을 지어주겠다는 체이스는 카야를 농락하고 버린다. 카야는 예전처럼 혼자가 된다. 카야 곁에는 갈매기와 바람과 버섯과 자연뿐이다. 여전히 카야를 사랑하는 테이트는 학업을 마치고 고향 근체 연구소에 취직하고 카야를 찾는다. 자신을 거부하는 카야에게 용서를 구하고 카야가 습지에서 수집하고 기록한 것들을 출판할 수 있도록 돕는다. 자신의 책을 낸 카야는 집을 고치고 여유로운 생활을 이어간다. 책 덕분에 자신을 떠났던 조디 오빠가 집을 찾아와 재회한다. 카야가 습지를 떠나지 않았기에 둘은 만날 수 있었다.


이 소설은 카야의 성장에 관한 아름다운 소설만은 아니다. 체이스의 시체가 등장하는 것으로 시작하기에 범인을 밝히는 추리소설로 볼 수도 있다. 소설은 현재 범인을 추적하는 과정과 카야의 어린 시절을 교차하며 이어지는데 예상했듯 카야는 범인으로 지목된다. 세상의 시선에 체이스를 죽인 범인은 카야였고 카야여야만 했다. 영화는 소설과 다르게 카야가 재판을 받는 과정을 집중해서 보여준다. 20미터 망루의 난간에서 떨어져 죽은 체이스, 카야와 체이스가 다투는 모습을 본 증인들, 체이스의 옷에서 발견한 붉은 털실이 카야의 모자의 것과 같다는 증거로 검사는 카야를 용의자로 지목한다. 그러나 그 시간 카야는 출판사의 편집자를 만나기 위해 마을을 떠나 있었다. 카야는 적극적인 방어를 하지 않는다. 변호사만이 강력하게 증거에 맞선다. 재판이 끝나고 카야의 울부짖음에 가까운 말은 모두를 아프게 한다.


“난 한 번도 사람들을 미워하지 않았어. 사람들이 날 미워했어. 사람들이 날 놀려댔어. 사람들이 나를 떠났어. 사람들이 나를 괴롭혔어. 사람들이 나를 습격했단 말이야. 그래, 그 말은 맞아. 난 사람들 없이 사는 법을 배웠어. 오빠 없이, 엄마 없이! 아무도 없이 사는 법을 배웠다고!” (434쪽)


카야는 그저 혼자 모든 것을 배우고 익혔다. 누구에게 피해를 주지도 않았고 도움을 요청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사람들은 카야를 폭력과 따돌림으로 무시하고 괴롭혔다. 1960년대가 아니라 지금이라면 어떨까? 습지의 소녀를 우리는 어떻게 대할까. 그 당시 사회와 얼마나 다르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카야의 슬픔과 고통을 헤아리는 이는 그와 같은 외로움을 아는 흑인 점핑 부부밖에 없었다. 카야가 기댈 곳은 카야 곁으로 날아오는 갈매기, 은은하고 찬란한 빛을 품은 습지, 그 자연이었다.





아름답지만 슬픈 소설이다. 서정적이지만 아픈 소설이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은 어디일까? 문득 궁금해진다. 카야가 카야답게 살 수 있는 곳. 카야가 자유롭고 편안하게 숨 쉴 수 있던 그곳, 별이 된 카야는 지금 그곳의 풍경을 내려다보고 있을 것 같다.


카야는 조수간만처럼 확실한 이런 자연적 과정의 일환으로 살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녀만큼 이 지구라는 별과 그 속의 생명체들을 끈끈하게 유착되어 살아가는 사람은 찾기 힘들었다. 흙 속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대지의 어머니에게서 태어나서. (4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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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4-02-16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헐... 저 이 책 독서괭 님이 선물해줬는데........

독서괭 2024-02-16 11:59   좋아요 0 | URL
읽겠다고 했었는데…

잠자냥 2024-02-16 12:17   좋아요 1 | URL
읽기는 할 거라던데....

자목련 2024-02-16 14:26   좋아요 0 | URL
혹 주말에 읽을지도...

잉크냄새 2024-02-16 1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p13의 내용이 영화의 첫 내레이션 부분 같네요.
영화도 영상미가 좋았는데 소설 또한 아름다울것 같아 읽고 싶게 만드네요

자목련 2024-02-16 14:26   좋아요 0 | URL
네, 맞아요. 프롤로그의 처음이기도 하고요.
영화도 나쁘지 않았지만 소설이 더 좋은 것 같습니다^^

레삭매냐 2024-02-16 14: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5년 전에 읽었을 때, 리즈 위더스푼이
영화 만들기 시작했다고 들었는데
어느새 영화로도 나왔나 보네요.
구해서 한 번 보려구요.

슬펐던 소설로 기억합니다.

자목련 2024-02-16 14:28   좋아요 1 | URL
영상미가 뛰어난 영화였어요. 영화도 좋았고 소설도 좋았어요,
소설 쪽으로 살짝 기울어요.
넷플릭스에서 봤는데 아직 있지 않을까 싶어요. 저도 한 번 더 보고 싶은 영화입니다.

독서괭 2024-02-16 1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리뷰가 참 좋아요^^
영화에서는 카야가 저렇게 소리를 치는군요? 소설에서는 그런 장면 없지요? 어떤 자기변호도 안 했던 것 같아요. 그게 더 카야에게 어울리지 않나 싶네요.
저는 소설 먼저 읽고, 이미지가 깨질까봐 영화는 안 봤는데, 영화보다 소설이 더 좋았다고 하시니 다행(?)입니다 ㅎㅎ

자목련 2024-02-19 17:06   좋아요 1 | URL
소설이 더 좋았는데, 영화도 괜찮았어요. 저는 다시 돌려서 보는 장면이 있었어요.
독서괭 님의 리뷰도 이 소설을 읽게 만든 이유였어요. 감사해요^^

steal0321 2024-02-29 14: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항상 플레이리스트에 넣어 두기만 했는데, 자목련님의 후기를 읽으니 당장 읽고, 보고 싶네요. 글 잘 읽었습니다.

자목련 2024-03-04 15:39   좋아요 0 | URL
즐겁게 읽으시면 좋겠습니다^^
 

2월이라서 그런가, 1월보다는 한결 포근한 느낌이다. 아무래도 날씨가 풀려서 그런 것 같다. 곧 입춘이고 설날이다. 2월은 왠지 빨리 흐를 것 같다. 똑같은 시간이 갑자기 빠르게 느껴지는 건 나이가 들어서다. 지겨울 정도로 시간이 가지 않았던 날들이 있었던 날도 있었으니까. 빠르게 달리는 시간과 반대로 나의 1월은 게으름이 차오르는 날들이다. 차오르는 게으름을 잠재우는 2월이면 좋겠다.


유디트 헤르만의 단편집 『레티파크』를 읽었다. 그러니까 결국 이 책을 샀다. 나에게는 그녀의 단편집이 두 권 더 있다. 아직 읽지 않았다. 그 사실이 참 기쁘다. 내게 읽어야 할 그녀의 책이 있다는 게, 그녀의 소설을 읽을 수 있어서 말이다. 물론 내가 읽은 이 소설집에서 느낀 것과는 다른 것을 읽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도 괜찮다. 나는 유디트 헤르만의 글에 매력을 느꼈고 그가 던지는 그 말투, 그가 바라보는 시선, 그러니까 특정한 인물이 아닌 어떤 풍경이나 먼 곳을 바라보는 게 좋다. 그뿐이다.


『알리스』, 『여름 별장, 그 후』는 어떤 계기로 구매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누군가 먼저 읽은 이의 글을 읽고 구매했거나 추천하는 글을 보고 구매했을 가능성이 크다. 놀라운 건 내가 정리하지 않고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최근에 나는 책을 소장하는 마음이 아닌 버리려 노력 중이기 때문이다.







마음이란 게 그때그때 달라서 어떤 날은 다 버리고 싶고 어떤 날은 버린 날을 후회한다. 그러니 어떤 책의 운명은 갈팡질팡한 나의 마음 때문에 그 존재 가치를 알리기도 전에 사라지기도 하고 어떤 책은 알 수 없는 끌림이 계속 내 곁에 남는다.





순간의 감정, 나를 붙잡는 한 문장, 기어이 상상하게 만드는 풍경과 인물, 그런 것들이 내게 중요하다는 걸 알았다. 그러나 또 누가 알겠는가. 어느 날엔 그 문장이 그저 그렇고 시시하다고 느낄지. 아무튼 나는 지금 유디트 헤르만의 소설을 계속 생각하고 있다.

공교롭게 앤드루 포터의 소설과 유디트 헤르만의 최근 소설은 읽었지만 이전의 단편은 읽지 않았다. 또한 두 작가의 이번 소설은 모두 40대 이후의 삶을 그렸다. 그러니까 젊음의 감각이나 소비, 열정 같은 것을 지나온 이야기, 사라진 것들과 잊힌 것들, 상실과 죽음 같은 것들에 대한 글이다.

나 역시 그만큼의 시간을 지나왔기에 두 작가의 소설에 깊이 빠져든다. 소설의 인물의 상황과 감정을 헤아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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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02-01 16: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옛날엔 2월도 겨울이었는데 지금은 초봄입니다. 모르긴해도 다음 주면 또 달라지지 않을까 싶네요. 그래도 올 2월은 하루가 더 있어서 조금 길다고 느껴질 것 같습니다. 별 것 아닐 수도 있지만 무려 24 시간입니다. ㅋㅋ

자목련 2024-02-02 12:53   좋아요 0 | URL
맞아요, 2월은 완전 겨울이었는데.
오늘은 정말 따뜻해서 봄 같아요. 2024년의 2월은 조금 더 특별하겠어요. 29일이 있어서^^

꼬마요정 2024-02-01 16: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단지 유령일 뿐>을 가지고 있어요. 아직 읽지는 않았는데 자목련 님 글보니 확 땡깁니다. ㅎㅎ 저도 점점 책을 쌓아두는 게 버거워져서 비우려고 하는데 쉽지 않아요ㅠㅠ 일단 읽어야 정리가 될텐데...ㅠㅠ 많이도 사 모았더라구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행복한 2월 함께 보내요^^ 제발 극한 한파는 안 오면 좋겠어요. 추운 거 너무 힘들어요ㅠㅠ (부산 사는 주제에... 라고 생각합니다만 ㅋㅋ)

자목련 2024-02-02 12:54   좋아요 1 | URL
<단지 유령일 뿐>, 저는 없어요. 나머지 두 권을 어서 읽어야~~
부산 사시니 한파가 더 강하게 느껴질 것 같아요. 따뜻한 오후 보내세요!

은오 2024-02-01 2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저 앤드루포터 읽고있는데 왤케좋아요?ㅠ미쳤어요ㅠ

자목련 2024-02-02 12:54   좋아요 1 | URL
진짜 진짜 진짜 좋죠?

독서괭 2024-02-03 12:57   좋아요 1 | URL
저도요. “라인벡” 읽고 크아~~ 했어요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