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성의 고리
W. G. 제발트 지음, 이재영 옮김 / 창비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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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한 번은 만나보고 싶었던 제발트라는 이름. 나는 사실 이 책을 꽤 매끄럽게 읽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종종 변덕을 부리는 그래서 어떤 특징으로 정리할 수는 없지만, 내 독서 취향에 맞을 거라고 생각했다. ‘분위기를 탄다’ 이런 말이 어울릴까. 나는 자주 이런 식으로 책을 읽는다. 딱딱한 책은 싫어하고 책의 느낌에 압도당해서 빠져들어 읽는 것을 좋아한다. <토성의 고리>의 경우, 상실과 폐허와 문명의 파괴에 관련된 줄거리가 평소 좋아하던 주제일뿐더러 발췌된 문장 또한 마음에 들었다. 나는 그렇게 혹해서 제발트의 우주로 발을 딛게 되었다. 그러나 그 큰 우주는 너무도 깊고 험난했다.

책의 갈래는 소설이지만 마치 산문처럼 읽히다가도 백과사전만큼의 딱딱한 역사적 사실들을 접한다. 이야기는 뒤섞이고 사건들은 수시로 방향을 바꾼다. 너무도 많은 지식이 나를 덮쳐온다. 깊은 수렁에 빠져 계속해서 빠져나오려다가 미끄러지는 듯한 독서, 참 오랜만이다. 그럼에도 끝까지 이 책을 읽어야만 했던 이유는, 머리를 쥐어 싸매다가 우연히 발견되던 문장들을 놓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때때로 우리는 이 지구에서 사는 데 결코 적응할 수 없는 종류의 인간들이고, 삶이란 끝없이 진행되는, 이해할 수 없는 거대한 실수라는 생각이 듭니다.” (259쪽) 

1990년대 화자인지 작가 자신인지 모를 ‘나’의 도보여행으로 시작되는 사색은 그가 바라보는 장소에 따라 과거와 현재, 미래를 끊임없이 넘나들며 이어진다. 장소에는 당연하게도 수많은 시간과 역사가 스며든다. 화자는 도시의 몰락과, 자연의 황폐화, 동물들의 몸짓, 기계와 노동, 건축물에 새겨진 시간의 흔적 등을 화제로, 관련된 방대한 이야기들을 꺼내놓는다.

온전히 책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함에도, 나는 제발트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 종종 감탄을 했다. 모든 것은 영원하지 않다. 우리 인간도, 문명도, 우리가 끝없이 쌓아올린 모든 것들은 이내 사라진다. “우리 자신보다 저급하다고 생각하는, 얼마든지 파괴해도 좋다고 여기는 종에게 거듭하여 떠넘긴다는 뜻이 아닌가?(85쪽)” 인간은 같은 종과 다른 종을 파괴하고, 또 파괴하고 파괴한다. 끊임없는 문명과 파괴의 반복.

종종 세상이 너무나도 아슬아슬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러다, 이러다 모든 것이 없어져 버리고, 병들어버리는 것은 아닐지. 그러나 이런 생각을 하는 나도 어느새 일상으로 되돌아가 또다시 이전의 실수들을 반복한다. 인간이라는 게 그렇다.



위대한 종족보다 더 오래 산 떡갈나무는 세 그루도 못된다 어떤 작품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놓았다고 해도 기억될 권리를 확보했다고 할 수 없는 일이다. 최상의 인물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는지 누가 알겠는가. 양귀비 씨앗은 어디서나 꽃을 피우지만, 어느 여름날 느닷없이 비참함이 눈처럼 우리 위로 내리면 우리는 이제 잊히기를 바라는 것이다. - P35

꿈에서 본 것이 이상하게도 현실보다 더 생생하게 느껴진다면, 이는 아마도 파묻힌 기억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꿈속에서 다른 무언가를, 흐릿하고 뿌연 어떤 것을 통과하면 역설적이게도 모든 것이 훨씬 더 명료하게 나타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작은 물방울이 호수가 되고, 미풍이 폭풍으로, 한줌의 먼지가 황야로, 유황 입자 하나가 분출하는 화산으로 변한다. 우리가 시인과 배우, 기계 기술자, 무대 미술가, 관객 등의 역할을 한꺼번에 떠맡는 이런 연극이란 도대체 어떤 것인가? 꿈의 도열을 거쳐가는 데는 우리가 잠들 때 가지고 있던 것보다 더 많은 사유능력이 필요한가, 아니면 그 반대인가? - P97

제4의 철학학파의 대표자들은 이미 모든 시간이 지나갔으며, 우리의 삶이란 돌이킬 수 없는 과정의 여운이 비치는 것일 따름이라고 주장한다. 실제로 우리는 세계가 이미 가능한 변이들을 얼마나 많이 겪없는지, 그리고 아직 남아 있는 시간들이 있다면 그게 몇개인지 알지 못한다. 확실한 것은 개별 생명이나 생명 전체, 나아가 시간 자체를 상위의 시스템과 비교해보면, 낮보다 밤이 훨씬 더 오래 지속된다는 사실뿐이다. - P183

우리가 고안해낸 기게들은 우리의 신체나 우리의 동경처럼 서서히 작열하는 심장을 갖고 있다. 인간 문명 전체는 애당초부터 매시간 더 강렬해지는 불꽃일 뿐이었으며, 이 불꽃이 어느정도까지 더 강렬해질 수 있을지, 그리고 언제 서서히 사그라들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당장은 우리의 도시들이 빛을 발하고, 아직은 불이 번져간다. - P199

마이클이 말했다. 몇주동안 새 한마리 안 보이네. 마치 만물이 어떤 식으로 파내어진 것처럼 보여. 모든 것이 허물어지기 일보 직전인데, 잡초들만 계속 자라나. 서양메꽃은 덤불의 목을 조르고, 쐐기풀의 노란 뿌리는 땅속에서 앞으로 기어나가고, 다년초 덩굴들은 나보다 머리 하나쯤은 더 크고, 갈색 반점 세균과 진드기가 번져가고, 끙끙대며 단어와 문장을 병렬해놓은 종이조차 진딧물이 짜낸 감로로 칠한 것처럼 느껴지네. 몇날 몇주동안 성과도 없이 머리를 쥐어자지만, 만일 누가 물어보기라도 하면 계속 글을 쓰는 것이 습관 때문인지, 과시욕 때문인지, 아니면 배운 게 그것밖에 없어서인지, 그도 아니면 삶에 대한 경탄이나 진리에 대한 사랑, 절망, 분노 때문인지 말을 할 수 없고, 글을 쓰면 점점 똑똑해지는 건지 아니면 더 미쳐가는 건지도 대답할 수 없다네.

- P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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