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바, 제인
개브리얼 제빈 지음, 엄일녀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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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와중에도 인터넷 뉴스 기사란은 시끄러웠다. 우연히 타이밍이 맞은 거라 얘기할 수는 없었다. 어제도, 그리고 불과 몇 달 전에도, 많은 사건들이 수면 위로 올라왔기 때문이다. 리벤지 포르노, 불법 유출, 소설 속 내용과 거의 비슷한 정치인 스캔들까지. 이제는 단순히 ‘민감한 사안’이라 이야기할 수는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느샌가 여성 혐오는 일상에 스며들었고, 분노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만큼, 물을 흐리고 꼬투리를 잡고 무조건 ‘까고 보는’ 사람들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이름은 무조건 여자들의 이름이었다. ‘ㅇㅇㅇ 동영상’, ‘ㅇㅇㅇ 유출 사진’이라는 검색어를 입력하며 혈안이 되는사람들, “자기가 원해서 했는데 왜 난리”냐고 묻는, 사건의 본질을 잊은 무식한 댓글들 투성이었다.

 

<비바, 제인>은 구설수에 휘말리면서도 자신의 삶을 지켜나가는 여성을 응원하는 소설이다. 남성 정치인과 여성 인턴의 스캔들을 축으로 사회의 부조리한 시선들을 꼬집는다. 옷차림과 행실을 이유로 여성에게만 폭력적인 말을 던지는 ‘슬럿 셰이밍’, 분명 ‘둘의 스캔들’인데 남자는 승승장구하고 여자는 이름까지 바꾸고 숨어버려야 하는 현실, 모든 진실을 알지 못하면서 떠들어대는 사람들의 ‘2차 가해’, 여자들이 평생 동안 매달려야만 하는 외모 강박과 스트레스……. 페미니즘적 시각에서 무엇이 옳은 것인지, 잘못된 것인지 고민하게 하는 논점들이 가득하다.

 

페미니즘 입문서라고 말해도 충분할 만큼 꼼꼼하게 쓰인 책이면서도 소설적 재미까지 놓치지 않는다. 사건을 둘러싼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의 시선을 활용하여 다섯 개의 챕터로 소설이 진행된다. 화자에 맞추어 글의 성격이 달라지고, 주인공의 딸 ‘루비’의 시점에선 통통 튀는 십 대의 유쾌함도 함께 담긴다 (이 부분에서 특히 번역가님의 탁월한 센스가 느껴진다!). 각기 다른 시점의 글을 모두 읽고 난 후에, 우리는 마침내 마지막 챕터인 ‘아비바’에 닿는다.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쓰인 마지막 챕터의 글에서 칭하는 ‘당신’이라는 말은 아비바와 제인, 레이첼, 루비, 엠베스, 그리고 세상에 맞서 일어서기를 원하는 수많은 여자들을 향한다. 어느새 제목처럼 “비바, 제인!”을 외치게 된다.

 

작가의 글 솜씨와 역량이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이 책을 읽고 난 뒤엔 꺼림칙하거나 슬프거나 좌절감과 허무함 같은 감정들만 남지 않는다는 것이다. 위트 있고 여유롭게 논리적으로 반박하며 설명하는 것은, 감정에 호소하고 분노를 내뿜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칭찬 일색이었던 작가의 전작 <섬에 있는 서점>에 대한 기대감이 더욱 커진다.

 

 

● 111쪽,
아무튼, 나는 애한테 컴플렉스를 심어주게 될까봐 몸무게에 대한 얘기는 일절 꺼내지 않는다. 내가 루비 나이였을 때 비만이었고 우리 어머니는 귀가 닳도록 내 체중 얘기를 하고 또 했다.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그래, 나는 내가 몇 가지 컴플렉스의 당당한 보유자임을 밝히는 바이다. 하지만 누군들 안 그렇겠는가? 생각해보면, 사람이란 기후와 풍토에 대응해 지어진 구조물에 지나지 않는 것 아닌가?

● 156쪽,
"종종 결혼식이 트로이의 목마 같다는 느낌이 들어요. 결혼의 현실에서 눈을 돌리게 하려고 내가 열심히 팔고 다니는 꿈. 그들은 딴 사람들과 차별화 하겠다며 이런 것들을 선택해요. 되도록 평범해지지 않겠다며 이런 것들을 선택하죠. 하지만 결혼하기로 선택한 것보다 더 평범한 게 세상에 어딨어요?"

● 181쪽,
그러자 우리 엄마는 사람들이 공직에 출마하면 이따금 ‘지저분하고 진실이 아닌 일들‘이 들리고, 나는 엄마에 대해 들리는 ‘지저분하고 진실이 아닌 일들‘에 대비가 되어 있어야 한대. 엄마가 말하길 나는 (1) 그것들을 무시해야 하고, (2) 상처받지 말아야 한다더군. 내가 "내가 (1)을 하면 (2)에 대해선 걱정할 필요가 없잖아요!"라니까 엄마는 "루비, 엄마는 심각해"라길래, 내가 "엄마, 난 강인해"라고 했지. 난 강인해. 내가 얘기했는지 모르겠는데, 학교에서 난 ‘별로 인기 없는 아이거든. ‘별로 인기 없다‘는 건 ‘점심때 아무도 내 옆에 앉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뜻이야.



● 358쪽,
당신의 수치를 찾아내는 건 클릭 한 번이면 족하다. 다른 사람의 수치도 마찬가지지만, 그렇다고 해서 뭐 하나 나아지는 건 없다. 고등학교 때 당신은 『주홍글씨』를 읽었고, 인터넷이 바로 그런 거로군 하는 생각이 든다. 소설 초반부에 보면 헤스터 프린이 오후 한나절 마을 광장에 강제로 서 있는 장면이 나온다. 서너 시간쯤 서 있어야 했나. 얼마가 됐든, 그녀에겐 견디기 힘든 시간이다.
당신은 그 광장에 영원히 서 있게 될 것이다.
당신은 죽을 때까지 주홍글씨를 가슴에 새기고 있게 될 것이다.
당신은 선택지를 고민한다. 선택지가 없다.

● 388쪽,
"시장?" 엄마 목소리는 부드럽고 따스하고 안도감이 묻어나며, 경외감과 자랑스러움이 가득하다. 엄마 목소리는 마치 반딧불이가 한여름 밤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들린다. "아비바 그로스먼! 그딴 것쯤이야!" "못 이길지도 몰라요." 당신이 말한다. "사람들이 나에 관해 알아냈거든. 시간문제일 뿐이었지만."
"사람들에게 해명했어? 네 입장에서 할말을 했어?"
"항변할 것도 없어. 내가 선택한 일들이었는걸. 내가 했던 이들이고."
"네가 뭘 했길래? 그건 섹스였어. 그 남자는 케케묵은 아저씨였지. 넌 애였고. 나리시케이트 (‘어리석은 짓’을 뜻하는 이디시어) 한 바가지였다. 플로리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애기들처럼 앵앵거렸지."
"그렇다 해도."
"루비 걱정은 하지 마라. 엄마가 말한다. "넌 거기 있어야지. 싸워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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