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문 테이크아웃 10
최진영 지음, 변영근 그림 / 미메시스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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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십 대였을 때,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어느 정도 생각이란 걸 할 수 있었을 때 했던 말이 또렷하게 기억이 난다. "자살을 왜 하는지 모르겠어. 그거 너무 무섭지 않아?" 누군가에게 툭 던졌던 그 말은, 생각해보면 생이 무척이나 행복해서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그 반대도 아니었으며, 단지 고통의 정도를 가늠할 수 없었던 어리숙함 때문이었다고 짐작할 수밖에 없다. 삶을 꾸역꾸역 이어나가야 하는 것이 죽음으로 향하는 순간의 고통이나 두려움보다 더 힘든 일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그리곤 꽤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자살을 선택한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할 수 있었다. 내 곁엔 없지만 어딘가에 무수히 있는 그들. 그들을 필요로 했던 사람들, 곁에 있던 사람들을 왜 남겨두고 떠났냐고 무책임을 질책하는 말들은 얼마나 날카롭고 무의미한가.

 

'자살'하면 흔히 이유를 찾는다. 실제 상황에서도 그렇고, 픽션에서도 마찬가지다. 사람 사이의 관계, 사회의 폭력, 병 혹은 가난, 온갖 이유를 대어 설명한다. 그래야만 말이 된다. 관계없는 사람에겐 일종의 편의로 작용하고, 관계 깊은 사람에겐 오직 그 방법 밖에는 없기에 이유를 찾는 것에 매달린다. 소설 <비상문>에서 자살한 ‘신우’의 형인 화자도 그러한 이유에 대하여 끊임없이 되묻는다. 특별한 사건도 없었고 짐작이 되는 일도 없는데, 왜 동생은 삶을 끊어내길 선택했을까. 비상구를 지나 옥상으로 올라가 난간에서 잠깐 멈춘 9분 57초의 시간 동안 어떤 생각을 했을까. 떨어지기 전에는, 그 순간에는, 아니 그전의 모든 순간들 속에서는.

 

"빛난다는 건 손실된다는 것(24쪽)" 물리 문제집에 쓰여 있던 법칙에 의미 부여를 하듯이, 화자는 수많은 단서들을 찾는다. 언젠가 '말했을지도 모를' 이유와 겉으로 드러나던 모든 사실들을 되짚어본다. 이를테면 부모님의 불화 같은 것들과 유독 예민하던 신우의 시선들과 그가 했던 모든 말들을 생각한다. 그러나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어쩌면 이유가 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상상하는 것은 아무 소용 없는 일이 아닐까. 삶도, 죽음도, 이유 없고 모르는 것 투성이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이 떠올랐다면 너무 식상한 것일까. 이 짧은 소설에서도 최진영 작가는 그동안의 소설들로 오랫동안 천착해 온 소설의 중심점을 드러낸다. "매우 사랑하면서도 겁내는 것이다. 이 삶을." 소설 끝에 실린 인터뷰에서 언급했듯, 그토록 어지러운 삶이라도 어떻게든 살아보자는 말이다. 설명할 수 없는 것들 투성이 속에서 설명하고 매달릴 수 있는 것들을 발견해보자고. 약국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화자가 우울증 약을 복용하는 '서두진'씨와 '이재영'씨와 그다음의 누군가를 끊임없이 찾는 것처럼. 죽은 동생을 투영하며 끊임없이 '생'을 확인하는 것처럼.

 

표지와 내지를 온통 감싸고 있는 따뜻한 파란색의 이미지가 오랫동안 잔상처럼 남는다. 어두컴컴한 계단에 머무르는 비상구의 푸른빛처럼, 순간적으로 쨍하게 시리고 아프다가도 눈부시게 아름다워지는, 그런 소설이다.

 

 

 

 

● 16쪽,
사람마다 시력이 다르듯 존재의 어둡고 습한 부분을 유독 잘 보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남들은 찾지도 못하는 얼룩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남들은 듣고도 들은 줄 모르는 소리에 귀 기울이는 사람들. 감각이 그쪽으로 유별나게 발달한 사람들. 나는 신우가 그런 사람이었다고 믿는다.

● 17쪽,
신우가 죽어서 내 인생이 달라졌는가 생각해 볼 때가 있다. 모르겠다. 신우가 죽지 않은 삶을 내가 어찌 알겠는가. 우습게도, 그리고 끔찍하게도 나는 동생이 자살하지 않은 삶을 상상할 수 없다. 동생이 죽기 전으로 시간을 되돌려 어떤 식으로 상상해도 동생은 죽는다. 내가 화를 내거나 울거나 사정하면 동생은 죽지 않겠다고 나를 안심시키고 결국 죽는다. <최신우가 살아 있다면>이란 가정이 불가능할 정도로 신우의 죽음은 단단한 뼈처럼 내 삶에 고정되어 버렸다.

● 38쪽,
아니다. 신우는 너무 믿었다. 그 정의와 가치를 신뢰했기에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던 거다. 공평하지 않은 것에 공평함이란 단어를 쓰는 것, 기회도 아니면서 기회라는 팻말을 내거는 뻔뻔함에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던 거다. 나는 원래 그렇다고 체념하는 것들을 신우는 따지고 들었다.
그 누구도 완벽한 원을 그릴 수 없어. 똑같은 원을 그리는 사람도 있을 수 없고. 하나하나 다르다고.
나는 신우의 불만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 68쪽,
빛 같은 것? 빗물 같은 것? 신우는 다른 것이 되고 싶었나? 빛과 빗물은 무수하고 최신우는 하나뿐인데 어째서? 태양과 달은 낮과 밤에 보이지만 한 공간에 있다. 행복도 불행도 한 공간에 있고 그것이 유난히 잘 보이더라도, 우리는 굳이 그것을 보지 않아도 된다. 그것 아니라도 별은 무수히 많다. 세상은 점점 더러워지고 엉망진창이 될 것이다. 네가 어디 있고 내가 어디 있는지 모르도록 복잡해지고 어지러워질 것이다. 그게 우주의 법칙이니까. 그런 세상을 같이 살면 좋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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