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몬 - 권여선 장편소설
권여선 지음 / 창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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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누군가가 죽는다. 그의 죽음을 못 견디게 슬퍼하다가, 언제까지나 절망에 빠져있을 수는 없어서 (사람이 도저히 살 수가 없어서) 그의 죽음을 비로소 인지하며 애도를 시작한다. 시작한다는 말이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르나, 애써 붙잡고 있던 것을 내려놓거나 마음의 일부를 조금씩 떼어놓기 시작하는 시점을 생각한다면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미처 애도조차 시작할 수 없는 죽음이 있다. 어떤 이유도 밝혀지지 못하고, 무의미한 이유들로 진짜 이유가 숨겨지고, 더 이상 대답조차 할 수 없는 누군가의 죽음에 부조리가 더해진 때. 바로 권여선의 소설 <레몬>에서 등장하는 여고생의 죽음 같은.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꼬이고 꼬여버린 해언이라는 소녀의 죽음 앞에서, 작가는 남아있는 사람들의 심리를 자세히 그리는 데 집중한다.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건 단연 소녀의 가족들이다. 언니의 유별나고 위태로운 모습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봤던 ‘다언’은 이제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만 들으면 경기를 일으킨다. 자신의 얼굴에서 언니의 모습을 속속들이 찾는 엄마를 보고 성형을 결심한다. 수년, 더 오랜 시간이 지나도 죽음이 압도한 삶의 무게는 결코 가벼워지지 않는다. 한편 사건이 발생했을 때 마지막 모습을 보았던 동급생 ‘태림’은 그때의 기억을 잊기 위해 신에게 매달린다. 사건과는 관련이 없지만 자매의 고통을 지켜본 ‘정희’는 죽을 만큼 괴로워하는 ‘다언’의 모습에 또 한 번 자신을 돌아보기도 한다. 남아 있는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저마다 잡을 수 있는 것들을 붙잡고 꾸역꾸역 살아간다. 

사건의 진실은 명확하게 밝혀지진 않는다. 의뭉스러운 채로 넘어가는 것이 결코 시원치는 않으나, 세상엔 종종 이런 일이 발생한다. 누군가는 입을 닫고, 누군가는 보지 않았다고 세뇌한다. 그리고 누군가는 또 누군가를 위해 비밀을 만든다. 때로는 이 모든 것을 관망한다는 신에게 책임을 돌리기도 한다. 신은 있는가, 어쩌면 신의 존재는 중요하지 않을지도.

그동안 작가의 장편소설을 생각하면 사실 이 소설은 조금 느슨한 감이 있다. 이전의 소설들이 울먹이며 꽉꽉 채워진 느낌이라면, 이번 <레몬>은 하고 싶은 말들을 조금씩 삼키는 느낌이었고 만약 그것이 아니라면 생략된 부분을 읽어내는데 약간의 수고가 들어가는 책이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마지막 줄을 넘기고, 작가의 말을 읽는 순간 한꺼번에 모든 답답한 가슴이 품어졌다고 이야기한다면 과장일까. 소설 속에서 삼켜진 모든 말들을 다시 은은하게 채워 넣는 ‘작가의 말’ 전문을 나는 책상 한편에 베껴 적어 놓고 종종 읽어보려 한다.

“사람이 평범하게 태어나, 평화롭게 살다, 평온하게 죽을 수 없다는 걸,
그게 당연하다는 걸 아는데,
저는 그게 가장 두렵고,
두렵지만, 두려워도
삶의 실상을 포기할 수는 없어서,
삶의 반대는 평(平)인 것인가,
그래서 나는 평하지 못한 삶의 두려움을 쓰고 있는 것일까, 생각합니다.” (‘작가의 말’ 중에서)


그러나 우리는 천천히 제자리를 찾아갔다. 눈앞에 임박한 대입시험의 생생하고 폭력적인 부담감이 모든 정서적 충격을 녹여버렸다. 그래, 몇명이 사고를 당하고 유학을 가고 전학을 가고 이런저런 이유로 떠난 것뿐이야. 그래도 우리는 여기 그대로 남아 있잖아? 죽을 맛이야. 아무것도 변한 게 없어. 사는 게 이게 뭐냐. 이게 사는 거냐. 그런 식으로 그 사건은 우리에게서 끝이 났다. - P57

다언은 내가 계속 시를 써으면 했다고 말했다. 그런 말을 해주는 사람도 없었다. 다언만이 뭔가를 잃어버린 게 아니었다. 나 또한 뭔가를 잃어버렸다. 오히려 더 치명적인 쪽은 나일 수 있었다. 다언은 자신이 뭘 잃어버렸는지 분명하게 자각하고 있는 데 반해 나는 무엇을 잃어버렸는지조차 알지 못한 채 살고 있었다. 그런 주제에 다언을 관찰하고 다언의 말을 들으며, 이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고 저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라고 관대한 척 고개나 끄덕이고 앉아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다언에게 내 속을 들키자 발끈하여 그녀를 공격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나는 자문했다. 나 또한 그때로 돌아가고 싶은가. - P67

나는 사물들을 누르거나 밟거나 던지곤 했다. 필연적으로 그 사물들은 보드랍고 물렁하고 깨지지 않는 것들이어야 했다. 그 이유는 내가 부딪치거나 깨지는 소리를 도저히 듣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콱, 퍽, 와작하는 소리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끔찍한 공포에 휩싸였다. 나는 그 소리를 귀로 들을 뿐 아니라 눈으로 보았다. 무엇인가 단단한 것이 단단한 것과 부딪쳐 깨지는 소리를 들으면 저절로 눈에 힘이 들어가고 눈가에 경련이 일었다. 눈앞에 파열음과 굉음들이 만들어내는 타는 듯한 지옥도가 펼쳐졌고 그 한영을 보는 내내 피처럼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 P93

결국 죽음은 죽은 자와 산 자들 사이에 명료한 선을 긋는 사건이에요,라고 다언은 진지하게 말했다. 죽은 자는 저쪽, 나머지는 이쪽, 이런 식으로 위대하든 초라하든, 한 인간의 죽음은 죽은 그 사람과 나머지 전인류 사이에 무섭도록 단호한 선을 긋는다는 점에선 마찬가지라고, 탄생이 나 좀 끼워달라는 식의 본의 아닌 비굴한 합류라면 죽음은 너희들이 나가라는 위력적인 배제라고, 그래서 모든 걸 돌이킬 수 없도록 단절시키는 죽음이야말로 모든 지속을 출발시키는 탄생보다 공평무사하고 숭고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다언은 책을 읽듯이 담담하게 말했다. 오래 다져진 땅 같구나, 하고 나는 생각했다. 죽음에 대한 다언의 관념은 곱씹고 또 곱씹어 어떤 날도 들어가지 않는, 그래서 오히려 노인들의 그것보다 더 무섭고 더 죽음에 가까운 듯 보였다. - P179

나는 궁금하다. 우리 삶에는 정말 아무런 의미도 없는 걸까. 아무리 찾으려 해도, 지어내려 해도, 없는 건 없는 걸까. 그저 한만 남기는 세상인가. 혹시라도 살아 있다는 것, 희열과 공포가 교차하고 평온과 위험이 뒤섞이는 생명 속에 있다는 것, 그것 자체가 의미일 수는 없을까. - P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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