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과학자 사회>(김환석 외 4인 지음, 궁리 펴냄)는 한국 과학기술사회학의 집단 연구 성과의 반영이자 앞으로의 연구에 하나의 좌표를 제시했다. 과학기술사회학 (또는 과학기술학) 분야의 리더인 김환석과 젊은 연구자들의 지난 수년간의 공동의 노력이 결실을 맺게 된 것에 큰 축하를 보낸다.

이 연구는 다음과 같은 의의를 지닌다. 첫째, 경험적 연구가 일천한 한국 과학기술학계에 심도 있는 경험 연구를 선보였다. 이 분야의 기존 연구자들은 주로 외국 이론과 연구를 소개하고 정리하는 경향이 많았다. 경험적 연구들이 최근에 여러 가지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지만 <한국의 과학자 사회>는 단일한 주제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 결과를 선보였다.

둘째, 한국의 과학자 사회라는 방대하고 어려운 연구 주제를 여러 연구 방법을 동원하여-역사적 방법, 서베이 방법, 질적 면접 방법-더 다차원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셋째, 한국 근대 연구에서 소외되어 왔던 과학기술의 영역을 분석의 전면에 내세워 한국 근대 연구에 대한 틈을 메워주었다.

넷째, 한국 과학기술자 사회에 대한 다양하고 상세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어 한국 과학기술자 사회를 이해하려는 사람들에게는 필독서가 되었다. 다섯째, 과학기술학이 한국에서 아주 최근에 태동하였다는 점에서 <한국의 과학자 사회>는 대내외적으로 이 분야의 존재와 집단 연구 그룹의 형성을 알리는 계기가 될 것이다.


▲ <한국의 과학자 사회 : 역사, 구조, 사회화>(김환석·김동광·조혜선·박진희·박희재 지음, 궁리 펴냄). ⓒ궁리
이런 큰 성과와 더불어 나는 앞으로 이 분야가 발전하기 위해서 <한국의 과학자 사회>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자 한다. 첫째, 이 책의 가장 큰 문제는 이론적 부분과 경험적 연구 사이의 거대한 괴리라고 볼 수 있다. 이 책이 채택하는 기능주의적 접근은 과학자 사회의 규범, 제도화, 보상 체계, 일탈과 같은 문제들에 대해 잘 설명하고 있지만 한국 과학자 사회의 역사적, 구조적 형성에 대해서는 답을 주지 못하고 있다.

이 책의 이론적 부분에 가장 적합한 부분은 제2부 '구조적 접근 : 한국 과학자 사회의 구조' 부분이라고 볼 수 있다. 1부에서는 한국 과학자 사회의 역사적 형성을 식민지 시대부터 현재까지 다루는데 이는 기능주의로는 도저히 설명이 불가능한 부분이다. 3부 또한 대학원생들의 사회화만을 다루어 한국 과학자들의 생애 궤도에 대한 종합적인 사회화 과정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특히 1부에서는 한국 과학자 사회의 역사적 형성을 구한말의 유학 정책, 일본의 식민지 정책, 한국전쟁, 박정희의 독재와 근대화 정책 등의 일련의 과정을 통해 설명하는데 이러한 역사적 접근과 이 책이 채택하는 기능주의적 설명 방식이 전혀 맥을 같이 하지 못하고 있다. 다시 말해 서론에서 제시된 '안락하고 정적인' 기능주의적 시각과 1부에서 펼쳐지는 식민, 전쟁, 독재, 근대라는 '피 튀기는' 현실 속에서의 한국 과학자 사회의 역사적 구성 사이의 엄청난 괴리는 독자들을 당혹스럽게 만들 것이다.

둘째, 첫 번째 문제점과 연관하여 한국 과학자 사회의 형성을 더 풍부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능주의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식민성, 탈식민성, 근대화, 지구화와 같은 역동적, 갈등적, 권력 배태적인 시각이 필요한 데 이러한 노력들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머튼식의 기능주의적 시각의 문제점은 8장과 11장에서 보여주는 연구 결과에서도 드러난다.

즉, 이 책은 공동 연구에서 나타난 기능주의의 문제점들조차도 비판적으로 통합하지 못하고 있다. 나는 왜 한국의 과학자 사회의 형성을 분석함에 있어서 기능주의에 의존해야 되는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과학자 사회에 대한 분석의 주요 자원이 분명 머튼에서 출발한 기능주의와 제도주의에 빚지고 있지만 한국적 상황을 설명하는데 명백한 한계가 있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많은 고민과 노동이 수반되었어야 했는데 그런 점을 발견하지 못해 아쉽다.

셋째, 한국의 과학자 사회의 구성을 이해하기 위해서 국가의 역할이 지대한 것이 각 사례 연구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이를 좀 더 심도 있는 분석으로 연결시키지 못한 점이 아쉽다. 국립서울대안,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과총), 전 국민 과학화 운동, 정부출연연구소(기관), 연구비 구조 등의 일련의 사례들은 한국의 과학자 사회의 형성이 국가와 정책 결정 집단에 큰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이 책은 국가와 과학자 사회 간의 권력 관계에 대한 치밀한 분석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한국 과학자 사회가 가지는 과도한 민족주의, 경제 발전을 위한 도구주의, 국가주의라는 흥미로운 현상으로 이어지는데 이것은 기능주의와 제도주의가 보여주지 못했던 새로운 측면이다. 즉, 원석과 같은 경험적 자료를 보석과 같은 탁월한 분석으로 전환시키지 못한 나태함을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넷째, 각 부의 연결과 각 부 안에서의 연결이 매끄럽지 못하고 분석의 수준이 상이하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각 부를 전체적으로 설명하는 별개의 장이 앞부분에 나와야 하는데 각 부에서 상이한 연구 결과를 통합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공동 연구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결점 중의 하나인데 이를 극복하기 위해 연구자들 사이의 지속적인 의견 교환과 상호 비판이 있었어야 했다.

예를 들자면, 1부에서 다양한 역사적 시각에서 한국 과학자 사회의 형성을 검토하는데 각 장들이 상이한 분석 단위, 분석 대상, 분석 틀을 가지고 있어 독자들은 이 책을 읽고 나서 과연 한국의 과학자 사회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구성되었는지에 대한 전체적인 조망을 얻기가 힘들 것이다. 또 1부의 몇몇 장들은 1차 자료의 발굴 없이 2차 자료에만 의존하고 있어 연구자들의 나태함을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의 2부가 책의 전체적인 기획과 가장 잘 들어맞고 이 중에서 8장, 9장, 10장, 11장은 한국 과학자 사회에 대한 뛰어난 통찰과 분석을 제공하고 있다. 3부는 질적 면접과 서베이를 통해 한국 대학원생의 사회화 과정을 미시적으로 분석했다는 점에서 평가할 만하나 사회화 과정 중 초기 훈련 단계만을 다루었다는 점에서 아쉽다. 과학자의 이력 궤도에서 대학원 과정은 한 부분에 지나지 않으며 박사 후 과정, 연구원, 연구책임자(대학에서는 주니어 교수, 시니어 교수 등)의 단계에서의 사회화 과정이 빠져있다. 또 3부에서 질적 연구라는 '아래로부터의 접근'이 가지는 풍부함, 세밀함, 깊이를 찾아보기 힘들고 기존의 이론과 개념을 몇몇 인용구와 그대로 연결시키는 조악함을 보이고 있다.

종합하자면 <한국의 과학자 사회>는 한국 과학기술학에서 경험 연구라는 차원에서 중요한 일보를 이루었지만 앞으로의 연구에서 이 책의 시각은 철저하게 수정되어야만 할 것이다. 이 책이 드러낸 이론적 빈곤함, 이론과 경험적 자료 사이의 불일치, 경험적 자료들 사이의 부조화와 비통일성, 각 경험적 연구들 간의 상이한 수준의 차이 등은 앞으로의 연구와 비판에서 이 책이 계속해서 좋은 먹잇감이 될 것으로 보인다.

과학기술학에서 머튼 학파의 기능주의와 제도주의가 뒤에 등장한 과학기술사회학과 구성주의의 끊임없는 비판의 대상이 된 것과 같은 숙명에 이 책은 처할 것이다. 가치 있는 한 권의 책을 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신빙성 있는 논변을 구성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 노동과 고민이 필요한 것인지, 그리고 하나의 이론을 한 사회의 역사성과 구조를 철저하게 고려하지 않고 그대로 적용시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이 책은 잘 보여주고 있다.

나의 이러한 비판에도 <한국의 과학자 사회>는 한국 과학기술사회학(넓게는 과학기술학)에 중요한 획을 긋는 연구이다. 이 책은 한국의 과학기술을 이해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필수적으로 알아야만 할 정보를 제공하고 있고 한국 과학자 사회에 대한 빼어난 통찰력을 제공하고 있다. 또 한국 과학자 사회의 역동성과 한국 근대의 또 다른 측면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기여를 할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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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가 100여 년 전 시작한 정신분석학은 그가 살아있을 때부터 가지를 치기 시작해서 많은 분파가 만들어졌다. 모두 인간 무의식을 탐구하여 치유하려고 노력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한때 프로이트의 가장 가까운 제자였던 융이 그와 결별하고 발전시킨 분석 심리학(analytic psychology)은 몇 부분에서 프로이트의 고전적 정신 분석과 차이가 있다. 그 하나가 집단 무의식의 존재를 인정하고 이것이 시공간을 뛰어넘는 인간의 본태적 심성을 반영하고 있다고 보는 점이다.

그래서 정신 분석을 할 때, 프로이트의 정신 분석이 분석을 받는 사람 개인의 경험과 기억에 최대한 의존하여 그 사람에게 갖는 개인적 의미를 중요시 여기는 데에 비해, 분석 심리학적 정신 분석에서는 그가 속한 사회·문화적 상징과 사회와 개인 간의 상호작용을 고려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그래서 개인이 속한 사회의 역사적 맥락과 문화에 대한 연구, 그와 관련한 상징의 개별적 의미에 대해서도 분석 심리학은 상당히 깊은 관심을 갖고 이를 치료에 적용한다.

분석 심리학에서는 설화나 민담을 집단 무의식의 특성과 원형이 반영된 상징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텍스트로 간주한다. 설화나 민담과 같은 옛이야기는 개인의 창작이 아닌, 구전으로 전해지면서 수많은 사람들의 입과 귀를 통해 걸러진, '어떤 의미심장한 울림을 주는 내용만 끝까지 살아남은' 공동체가 모두 공감하는 엑기스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전래 동화는 민담 중에서 특히 아이들의 심리 발달에 필요한 내용만 골라서 정제된 것이라 하겠다.


▲ <융, 호랑이 탄 한국인과 놀다>(이나미 지음, 민음인 펴냄). ⓒ민음인
이와 같은 배경을 이해하고 이나미의 <융, 호랑이 탄 한국인과 놀다>(민음인 펴냄)를 살펴보자. 이나미는 베스트셀러를 여러 편 낸 정신과 전문의다. 그는 뉴욕 융 연구원에서 분석 심리학 수련을 받고 돌아왔다. 그가 책에서 밝혔듯이 다른 정신 분석 연구소와 달리 융 연구원은 민담 분석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저자에게 우리 민담을 분석 심리학적 관점으로 해석하는 것이 낯설지 않은 이유다. 그런 점이 이 책의 장점이며 동시에 단점이 되었다.

이 책을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우리 민담을 텍스트로 한 분석 심리학 이론의 초심자용 개론서이자, 현대 한국 사회 비평이다. 책은 7장으로 구성돼 있다. 구성은 분석 심리학의 중요한 이론적 테마들을 얼개로 하고 있다.

첫 장 '남성 속의 여성, 여성 속의 남성'은 남성 속의 여성성 '아니마', 여성 속의 남성성 '아니무스'를 가지고 '여우누이', '우렁각시', '접동새누이', '가시내'를 풀어냈다. 두 번째 장은 '선녀와 나무꾼', '베 잘 짜는 처녀', '소박맞은 세 자매', '구렁덩덩 새 선비'를 소재로 했는데 인간관계의 주요한 한 축인 남녀 관계와 결혼이라는 발달 과정을 통해 성숙을 이야기한다.

'베 잘 짜는 처녀'에서 주인공 처녀는 자기보다 나은 신랑감을 원한다. 매번 처녀는 한 가지씩 신기한 재주가 있는 신랑감의 흠집을 발견해서 퇴짜를 놓는다. 결국 누구와도 결혼하기 어려워진 처녀는 실망하여 절벽에서 뛰어내린다. 지나가던 총각이 소쿠리를 짜서 구하는데 처녀는 '사람 살리는 것이 가장 큰 재주'라면서 그와 결혼하여 살게 된다.

저자는 이 이야기를 결혼을 망설이는 현대의 젊은이들에게 유용한 이야기로 본다. 재주는 있지만 까다로운 처녀를 찾아오는 구애의 대상을 여성 안의 아니무스로 해석한다. 처녀에게 처음 나타난 힘센 남성은 일종의 원초적 아니무스인 것이다. 이런 분석을 하며 이를 현대 사회에서 쓸쓸하게 나이를 먹으면서 불안을 느끼는 여성들의 심리 상태로 이어나간다.

결국 결혼을 해서 배우자에게 끊임없이 불만을 갖건, 결혼을 하지 않고 있건 간에 결국 상대방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불만의 표출이라고 한다. 이나미는 자기도 잘 난 사람이나 더 괜찮은 사람을 원하는 자아의 팽창(ego-inflation) 상태를 벗어나는 길은 처녀가 그랬듯이 어린애와 같은 '나'를 과감히 버리고 죽을 각오가 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래야 더 큰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인생의 역설이 숨겨진 이야기로 보는 셈이다.

지은이는 이와 같은 방식으로 총 26편의 우리 민담을 분석하였다. 본문 중에 상자를 넣어서 아니마, 개성화, 집단 원형, 철학자의 돌, 걸인 원형, 대상 관계 이론과 같은 용어를 설명해 이해를 돕는다. 위에 소개한 한 편의 예에서 봤듯이 이 책은 풍부한 담론을 담고 있다. 민담 자체도 흔히 보던 것이 아닌 것이 반 정도 되어 읽고 이해하는 데 노력이 필요하다.

민담의 줄거리, 등장인물, 주요한 소품을 갖고 저자는 인간의 기본적 심리와 무의식, 성숙을 위한 과제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현대인의 심리 특징이나 사회 병리적인 측면으로 넘어가 분석을 한다. 그 과정의 자유도가 높아서 마치 정신분석 과정의 자유 연상을 하는 것과 같이 느껴질 정도다.

예를 들어보면 이렇다. '선녀와 나무꾼'을 분석하면서 사랑에 빠진 연인의 심리로 시작해서, 소멸과 재탄생을 설명하고, 나무꾼과 사냥꾼의 상징적 의미로 넘어간다. 그러더니 선녀를 훔쳐보는 나무꾼의 관음증을 '훔쳐보는 톰'의 유래로 설명하더니, 성경 이야기에서 요즘 어린이들의 음란 사이트 접속과 청소년의 성에 대한 호기심까지 발전해 나간다.

급기야 동물원과 원시 부족의 성교육으로 넘어가 결국 미혼모와 10대 임신에 관대해지는 것은 종족 보존 본능의 거대한 집단 무의식이라는 결론까지 간다. 그 후에야 다시 이야기의 본류로 돌아와 선녀와 나무꾼의 성적 교합과 옷을 빼앗긴 선녀의 심정으로 돌아가 귀한 딸에서 졸지에 무보수 도우미가 된 고학력 현대 여성의 결혼의 불합리성으로 넘어간다. 그러고는 저자의 할머니에 대한 기억까지 나온다.

여기까지가 그 장의 절반 정도에 이르는 주요 부분을 발췌한 것이다. 현기증이 느껴진다. 저자의 현란하고 방대한 지식과 오랜 분석 경험과 실제 치료 경험을 통해 얻은 깊은 성찰의 결과물에 독자는 롤러코스터를 탄다. 꽤 오랜만에 책을 펴낸 저자가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던 것인지, 편집자의 욕심이 과했던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평자와 같이 동종업계에 있는 사람이 읽을 때에도 뻑뻑하다고 느껴지는 면이 있는데, 일반 독자들에게는 어떻게 다가가게 될지 사뭇 염려가 되었다. 또 타깃이 명확하지 않다. 물론 좋은 책은 모든 층의 관심을 가진 독자가 시대를 초월해 사랑하는 책이다. 최근의 트렌드는 그보다는 다소 집중된 포커스를 독자와 시장이 요구하는 것 같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민담을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학술서적 측면이 약하다. 또 일반 독자들을 대상으로 한, 민담을 통한 자기 치유서라는 측면에서는 대중적이지 못한 면이 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만일 필자가 이 책을 권한다면 처음 분석 심리학이나 정신 분석에 대해 공부하려는 사람에게 "우리 옛이야기를 소재로 하고 있어서 응용이 금방 되고, 이론 설명도 친절하고, 무엇보다 국내 저자이면서 필력은 공인된 이가 써서 읽혀지는 책이니 한 번 읽어봐"라고 권할 것 같다.

이 책을 보고 나서 이나미의 국내 출판계 복귀가 반가웠고, 동시에 앞으로 새로 낼 책이 기대가 되었다. 지금 이 책에서도 하고 싶은 이야기를 참느라 애를 쓰며 수위와 속도 조절을 하는 것이 눈에 보였기 때문이다. 다음 책에서 풀어낼 이야기보따리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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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를 읽으면 바보가 된다

"성서는 나쁜 책이다. 사람들의 머리를 화석화시키고 그 의식을 노예로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성서를 읽으면 읽을수록 그 머리는 비어가고 사고는 폐쇄적이 되어간다. 성서를 땅 속에 파묻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의 정신은 빈사 상태로 빠질 수 있다."

이렇게 말하면 아마도 난리가 날 것이다. 그런데 현실에서 성서는 그런 책의 구실을 하고 있다. 성서 내면에 담긴 혁명적 영성은 이로써 주살(誅殺)되고 말았다. 성서 자체에 책임이 있다기보다는 그 성서를 읽는 눈과 그걸 전하는 입이 성서를 그렇게 만들어버리고 있다. 그야말로 성서 모독이다.

오늘날 정신이 제대로 박혀 있는 사람은 교회를 갈 수 없다. 예외가 있긴 하나 교회 강단을 쥐고 있는 인물들에게서 나오는 이야기들은 너무도 너절하거나 어이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잘도 속아 넘어간다. 교회에 돈을 잘 내는 사람이 축복받고 착한 사람이라는 이야기는 워낙 유치해서 새삼 거론하고 싶지도 않지만, 성서의 메시지를 마구잡이로 왜곡하는 지점까지 가면 이것은 보통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목사들은 자기 하고 싶은 이야기를 실컷 하고 난 다음 성서의 구절을 그에 맞게 대충 끼워 인용하거나 자신의 말에 대한 권위를 세우기 위해 덧붙일 뿐이다. 성서는 이런 목사들의 종노릇을 하고 있다.

김진호의 <인물로 보는 성서 뒤집어 읽기>(삼인 펴냄)는 이런 성서 모독에 정면으로 맞선다. 성서에 담겨 있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읽으면서 그 뜻을 각자가 깊숙이 성찰하도록 촉구한다. 그래야 교회가 주도하고 있는 성서 해석의 기만적인 굴레에서 해방될 수 있다고 믿는다.

성서가 티끌하나 건드릴 수 없는 경전 또는 정전으로 떠받들어지는 바람에 폐쇄당한 해석의 힘을 복원시킨다. 이는 성서 해석의 독점권을 누리고 있는 교권주의자들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도전이다. 그래서 그것은 단순히 "성서 뒤집어 읽기"가 아니라 "세상 뒤집기"의 일격이 된다. 본래 예수는 "세상 닮아가기"가 아닌 "세상 뒤집기의 복음"을 전하셨다는 점에서 김진호는 예수의 뒤를 따르고 있다.

욕망의 선전에 앞장서는 한국 교회

▲ <인물로 보는 성서 뒤집어 읽기>(김진호 지음, 삼인 펴냄). ⓒ삼인

전부는 아니라는 전제를 달고, 한국 교회의 강단은 성서가 일깨우는 말씀이 아니라 욕망의 선전 문구로 도배되고 있다. 성서는 이 욕망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추진력의 날개를 달아주는 도구로 전락하고 있는 중이다. 탐욕을 끌어안고 사회적 성취를 이룬 자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이들이 지배하는 질서를 축복한다.

이 질서에 저항하는 것은 복음적이 아니라고 설득 내지는 위협 당한다. 한국 교회, 특히 대형 교회에 한 발자국이라도 들여놓아보면 이 말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그 자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오늘날 한국 사회의 권력 지도가 어떻게 그려져 있는가는 한국 교회의 실상을 보면 드러난다. 이러한 현실에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이 다름 아닌 성서다.

성서는 그 질서가 만든 사다리를 얌전하게 올라가도록 사람들을 세뇌시키는 역할을 하는, 질문을 던질 수 없는 권위로 변질되었다. 이에 맞서 성서의 내면을 탐구하는 정신은,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의 관점으로 성서를 본다는 이른바 자유주의 신학으로 비난받거나 이단으로 몰린다. 그러면서 한국 교회는 교회와 정치의 거리를 유지해야한다고 부르짖지만 기득권을 위한 정치에 아낌없는 환호와 지지를 보낸다.

성서는 이로써 짓밟힌다. 가난하고 무력한 이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고 강하고 부한 자들에게 그런 식으로 살다가는 진흙탕에 빠져 빈손으로 유랑하고 말 것이라는 경고가 담긴 성서는 이들 교회의 성서 속에서는 삭제되거나 편집된다. 그런 구절은 성서에 없는 것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성서의 비밀에 대해 사람들은 침묵을 익히거나 강요당한다. 그 비밀은 무엇인가? 지금 한국 교회에서 "선포되는 말씀"의 대부분이 가짜이거나 거짓이라는 걸 폭로하는 힘이 성서 안에 있다는 사실이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이 누구에게 다가갔으며 누구를 질타하고 무엇을 희망으로 내세웠는지 말해주지 않는다.

그래서 이 성서라고 불리는 책은 물리적으로는 펼쳐질 수는 있지만 내면적으로는 열릴 수는 없도록 되어 있다. 성서는 열린 책처럼 알려지고 있지만 "닫힌 책"으로 남겨져 있다. 그걸 진실로 열고자 하는 사람은 교회의 권력에 의해 추방되거나 파문되는지 아니면 주변인으로 머물도록 보이지 않는 족쇄가 채워진다.

김진호는 그런 "처벌"을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이 닫힌 책을 열고 있다. "성서 구출 작전"을 펴고 있는 격이다.

"막나가는 시장", 그 이름은 교회

이런 작전이 필요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한번 보라. 강남의 한 대형 교회 목사는 자신이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지금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강남에서 설교한다"고 "할렐루야"를 외친다. 강북에서 설교하면 저주받은 모양이다. 또 시골에서 가난한 목회를 하는 이들은 할렐루야를 할 이유가 사라지는 셈이다.

이미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이 교회는 또다시 엄청난 돈을 들여 더 큰 규모로 교회를 짓는다고 법석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가 고뇌하고 아파하는 문제에 대한 성찰과 헌신은 일체 없다. 교회가 커지기만 하면 그로써 임무를 다한 것으로 여긴다. 자기들끼리의 성채를 짓고 그것으로 신나하는 것으로 기뻐한다. 예수는 그런 교회에서는 어느 한 귀퉁이에 서 있을 자리조차 없다.

교회는 그렇게 해서 "막나가는 시장"이 되고 있다. 이른바 잘 팔리는 설교를 통해 신도라는 이름의 소비자를 모아, 이들의 욕망을 만족시키면서 현실의 모순에 철저하게 눈감도록 만든다. 아편이 따로 없다. 종교는 정치에 무관해야 한다면서 세상에 뭐가 어떻게 돌아가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갈망만 있으면 산다는 식이다.

그 하나님 나라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옵시고" 하는 예수의 기도는 이 하나님 나라 정체를 밝히는데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다. "하나님 나라"는 사후의 세계로 한정되어 있을 뿐, 현실에서 씨 뿌리고 일궈나갈 혁명적 대안의 세계가 아닌 것이다.

예수도 만일 그런 식으로 하나님 나라를 사고했다면 십자가는 하늘이 내린 그의 운명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의 제자와 그 후예를 자처하는 자들은 신도들을 자기들 말을 그대로 받아먹는 꼭두각시로 만들고 있다.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힘을 소멸시키고 있다. 신앙인은 어느새 그런 과정을 통해 노예가 되고 있는 중이다.

노예는 자기 생각이 없는 존재다. 자기 생각이 없는 존재는 지배하기 쉽다. 그런 까닭에 적지 않은 곳이 물음을 던지지 않고 굴종적으로 순응하는 노예들이 사는 마을이 되고 있다. 이런 마을에서는 책을 읽어도 그건 글자와 내용을 읽을 뿐이지 그로 인해 새로운 생각을 다듬어나가는 체험은 생각하기 어렵다.

성서는 그냥 책이어야 한다

김진호는 이런 현실을 "독서 행위는 있으나 독서는 없다"라는 말로 압축한다. 성서 텍스트깊이 읽기는 이런 독서 행위에서 탄생하지 못한다. 새롭게 해석되는 것을 경계하는 자들로 말미암아 성서는 고정관념을 만들어내는 책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그는 "정전 해체"를 주장한다.

모든 인위적 권위를 무장 해제시킴으로써 성서는 "그냥 책이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이 발언에는 이 책이 인간의 숨결과 어울려 그 삶의 진실을 드러내는 자유를 얻게 된다는 희망이 담겨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는 "독선적인 자기 형성에 이르지 않도록, 타자에 대한 배려와 자기 형성이 어우러지는 성서읽기"가 될 수 있는 방법에 고뇌한다.

이런 김진호의 주장과 발상은 예수의 발상과 그대로 일치한다. 예수는 우리가 구약이라고 부르는 히브리 경전을 인용하면서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이야기 하지 않았다. 신약이라고 부르는 예수 운동의 증언 속에 우리는 예수가 성서 인용보다는 일상의 삶과 체험에 녹아있는 이야기들을 보다 많이 풀어내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씨 뿌리고 고기 잡고 나무가 자라며 누룩이 번지는 그런 일상의 세계, 귀중한 것을 잃어버리고 멀리 갔다가 돌아오고 죽을 지경에 처했다가 살아나는 그런 삶 속에 숨 쉬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원형을 볼 수 있도록 각자의 성찰이 요구되는 이야기들을 했던 것이다.

그건 그저 이야기였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속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의외의 진실과 맞닿아 있는 것이다. 이걸 깨우치는 힘은 경전에 대한 권위에 머리 숙이고 그걸 떠받드는 종교 행위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건 잘 듣고 잘 읽고 잘 생각해보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능력이다. 이야기를 읽거나 접한 이들의 주체적 성찰의 차원이 주시되는 것이다.

김진호 역시 이런 방식으로 성서를 읽는다. 그래서 교회가 공식화한 해석의 틀에서 의도적으로 배제되거나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놓쳐버린 목소리를 추적해나간다. 그리고 그 목소리를 잘 듣고 그 목소리가 이 세상에서 다시 들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을 성서 읽기의 귀중한 목표로 설정한다.

교회의 전통이 격하시켜온 인물들

가령 그는 아브라함이 후손이 없어 사라의 여종 하갈을 아내로 취하는 이야기에서 "타인의 꿈으로 그 인생이 소모된 여인"을 본다. 교회는 오늘날까지도 사라는 정통이요, 하갈은 방계라고 구별 짓고 하갈의 삶은 무시해도 좋은 것쯤으로 격하시켜왔다. 그러나 김진호는 그렇게 자신의 인생이 누군가의 씨받이로 소모되는 그 아픔을 파고들어 하갈의 침묵당한 육성을 듣는 일의 의미를 부각시키는 것이다.

이 작업의 중요성은 분명하다. 하갈이 정통적 권위를 갖지 못했다고 설정하는 순간, 하갈의 인생에 대한 주시와 평가는 주변부적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 시선은 오늘날 우리의 현실에서 이렇게 소모되고 버려지는 이들에 대한 시선으로 이어져 그들을 멸시하는 태도를 기르게 된다. 한국 교회는 이런 시선 위에 서 있다.

쌍둥이 형제 야곱과 에서의 쟁투에서도 김진호는 야곱에게만 주목하는 성서 읽기에서 조연처럼 취급받는 에서의 침묵 안에 있는 목소리를 듣는다. 야곱과 에서의 재회에서 김진호는 에서가 야곱을 형제애로 받아들인 그 모습에 담겨 있는 화해와 평화의 정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렇게 김진호의 성서 읽기는 주류라고 자처하는 이들이 이미 공식화한 틀을 깨고 그것이 놓치고 있는 성서의 육성에 귀를 기울인다. 그것은 예수가 갈릴리에서 유랑하고 있던 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들의 가슴에 하나님 나라의 뜨거운 희망을 전했던 방식을 닮아 있다. 그렇게 해야만 우리는 억눌린 이들의 가슴에 맺힌 아픔을 풀고 해방의 복음을 완성시켜나갈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해방의 고고학"과 제3지대

김진호는 그것을 "해방의 고고학"이라는 개념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성서 안에 은폐되거나 억눌린 이들의 목소리를 탐색해나가는 작업이다. 당연히도 이런 작업에 눈을 뜬 이들은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로 언론이나 방송, 또는 여론이나 권력의 현실 규정 속에서 은폐된 진실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그런 까닭에 그의 성서 읽기는 성서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 읽기로 이어지게 되어 있다. 김진호의 책이 영화와 소설에 대한 해석과 병행되어 있는 이유도 그런 해석의 유기적 논리가 서 있기 때문이다.

김진호가 다루고 있는 인물들에 대해 여기서 일일이 다 소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것은 독자 자신이 책을 읽고 직접 대화에 참여하는 수밖에 없는 일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신의 성서 해석을 통해 모든 것이 해명되었다는 식으로 접근하지 않는다. 그것이 이 책의 훌륭한 점이다. 그는 자신이 도달할 수 있는 지점까지 최선을 다해 도달하고 거기서 새로운 질문을 찾아낸다.

그 질문은 놀라운 것이다. 성서조차 내버리고 은폐해버린 이들의 삶은 어찌할 것인가 하는 물음말이다.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면서 "주여, 주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했던 그 절규에 담긴 의미는 이로써 우리에게 새롭게 다가온다.

성서를 읽는다는 것은 그래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질문의 예리한 칼 앞에 뒤로 물러설 수 없는 상태로 서 보는 일이 된다. 그 칼 앞에 오늘날 한국 교회도 한번쯤 서 본다면 지금의 민망한 모습은 다소 면할 수 있지 않을까? 또는 성서의 가치를 아예 외면하고 있는 이들 역시도 그 칼과 마주하면서 아득히 잊고 있던 혁명을 꿈꾸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제3의 지대에 진지를 구축하고 하나님 나라 운동의 일익을 담당하는 젊은 신학자 김진호의 이러한 시도가 끊임없이 충격을 주어 한국 교회의 고정관념이 세운 벽에 조금씩 틈이 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처음에는 아주 작은 균열일지라도 계속 하다보면, 돌 하나도 남지 않는 날이 반드시 온다.

그 위에 예수의 몸으로 세운 교회가 새로 세워지고 그 몸이 피와 살로 쓴 역사가 시작되는 "그 날"이 오리라. 우리 손에 쥐어진 성서는 그러는 동안에 어느새 우리의 영혼에 기록된 혁명의 지침이 될 수 있다. 그 혁명을 통해 이 땅에 오는 하나님 나라를 반대하는 자들에게만 성서는 불온하고 나쁜 책이 될 것이다. 불온하지 않으면 성서는 성서가 되지 못한다.

세상을 뒤집는 방법에는 이런 것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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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만장자의 누더기

농담 같은 하나의 에피소드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자.

1800년대 초 영국의 글로스터에는 누더기를 걸친 백만장자인 은행가 제임스 우드가 살고 있었다. 그는 시티 올드 은행(City Old Bank)의 소유주였지만, 자신의 부에 어울리지 않게 생활을 했다. 직접 은행에서 창구 업무를 보았던 우드는, 근무 시간 동안에는 항상 변색된 외투를 입었다. 그것은 아주 낡아서 글로스터 주민조차 '그 코트가 원래는 노란색이었다'고 말할 정도였다.

어느 날 제임스의 우드의 충직한 하인이 말했다. "나리, 만약 런던에 가신다면, 새로운 옷을 사셔야 할 겁니다." 이에 우드는 그 하인에게 대답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여기 글로스터에선 모든 이들이 나를 알지만 런던에선 아무도 나를 모르지. 때문에 이 낡은 옷으로도 충분하네." 결코 옷을 살 생각이 없을 분명히 밝힌 이 백만장자는 '너무 많은 돈을 가진 가난한 자'였다. 그는 돈 자체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 농담은 수전노에 대한 야유라는 분명한 의도를 갖고 있지만,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반의 유럽 상황을 촌철살인처럼 보여준다. 이 시기는 자본주의적 가치가 적극적으로 계몽되던 때였다. 세속화된 칼뱅주의자로 일컬어지는 벤저민 프랭클린은 젊은 사람들에게 전하는 성공 규칙으로 '시간은 돈이다'라는 격언을 널리 퍼뜨리고 있었다. 중세 시대에 인색함이라고 간주되던 악덕이, 이즈음부터 절약이라는 미덕이 덧칠되어 재조명되기 시작한 것이다.

인색함이라는 악덕과 절약이라는 미덕

▲ <탐욕의 지배>(폴커 라인하르트 지음, 김희선·최정미 옮김, 말글빛냄 펴냄). ⓒ말글빛냄

금욕과 절제에 기반을 둔 합리적 세계관이 근대 자본주의의 정신적 토대가 되었다는 주장은 귀담아 들을 만한 것일까? 이러한 주장은 사회학자 막스 베버가 펼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절제와 금욕이 축적으로 이어지는 빛나는 순간에 자본주의라는 화려한 꽃이 개화했다. 이 과정에 대한 흥미로운 풍경을 스케치하듯 제시해 주는 책이 폴커 라인하르트의 <탐욕의 지배>(김희선·최정미 옮김, 말글빛냄 펴냄)이다.

폴커 라인하르트는 유럽의 역사를 전공한 스위스 프리브르 대학의 교수이다. 그는 미시사의 기록과 풍속에 대한 감각을 통해 인물의 행적을 재구성하는데 탁월하다. 라인하르트는 유럽 곳곳에서 획득한 편지, 가계부, 메모, 유언장 등을 통해 그 당시의 시대감각을 흡입력 있게 그려낸다.

미시사적 역사 연구 방법이 정신사의 도출로 이어지는 흥미로운 사례를 이 책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렇다 보니, 기존의 공식적인 역사 서술에서 이뤄진 판단들이 <탐욕의 지배>에서는 전도된 평가로 이어지기도 한다. 프랑스의 왕 루이 12세에 대한 상반된 평가가 그 한 예일 수 있다.

루이 12세는 일반적으로 재정 개혁과 세금 감면 등을 통해 민중적 섭정을 펼친 통치자로 기록되고 있다. 그는 살아있을 때, 삼부회로부터 '국민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얻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라인하르트가 이 책에서 해석해낸 루이 12세는 "최소한의 투자로 최대한의 수익을 얻으려 했던 인색한 왕"이었다. 그는 자신에게 충성한 스위스 용병들에게 급료를 지불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전쟁에서 참패하는 엄청난 실수를 되풀이하곤 했다. 라인하르트가 보기에 그는 자신의 내면에 자리하고 있는 '인색함'에 유혹되어 파멸의 길에 이른 군주였다.

도대체 '인색함'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라인하르트는 인색함이 축적의 근본 원리였기에 원시 시대부터 존재했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는 인색함을 대하는 태도는 역사적 상황에 따라 변화해 왔음을 이 책을 통해 증명하려 애쓴다. 중세 시대 신학에서는 일곱 가지 죄악(분노, 오만, 방탕, 태만, 폭식, 탐욕, 그리고 질투)을 경계하며, 구원에 대해 갈파했다. 그 중에서도 탐욕(인색함)은 모든 죄악의 발생지로 간주되었다.

라인하르트가 보기에 이렇듯 탐욕은 문제적이며, 자기 파괴적인 불온성을 안고 있다. 처음에는 절약과 인색함의 경계가 불명료했다가 어느 순간 탐욕에 사로잡힌 인간은 돈을 모으는 것 자체를 목적으로 삼고 만다. 축적에 대한 집요한 욕망이 영혼을 잠식하고, 드디어는 축적되는 자본의 양과는 상관없이 수전노들은 불안한 삶 속에서 스스로를 파괴한다.

탐욕스러운 자는 오로지 돈을 통해서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강박 속에서 돈을 모으는 것에 삶의 의미를 집중한다. 더 나아가 탐욕스러운 자들의 인색함은 타인의 삶에 치명적으로 개입하게 되고, 더불어 공동체를 파멸하는 파국적 종말에 이르고 만다. 때로는 그 파국에 가닿기 전에 공동체가 인색한 자들을 파멸시키기도 한다. 라인하르트는 중세 시대에 '마녀사냥'도 이러한 공동체의 자기 방어 기제 속에서 발생한 사례가 있다고 해석했다.

라인하르트는 이 책에서 모두 열 개의 에피소드를 제시했다. 16세기부터 20세기에 걸쳐 있는 이 에피소드들은 대부분은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인물들의 삶을 재구성한 것이다. 특정 인물에 대한 약전(略傳)이면서, '인색함'에 대한 태도 변화를 역사적으로 다룬 사건사(事件史)에 대한 기술이기도 하다. 이 책은 각 장이 독립되어 있으며, 주제적 측면에서는 '인색함과 탐욕에 대한 탐구'이기에 통합적이다.

<탐욕의 지배>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실증적인 엄밀함보다는 해석적 풍부함을 지향하고 있다. 이 책은 역사 연구서이기보다는 역사에 대한 문화 비평서에 가깝다. 그러면서도 역사학자로서 저자가 취하고 있는 단호한 해석은 독자를 압도한다. 라인하르트는 각각 다양한 삶을 살았던 다티니(상인), 루이12세(왕), 플라데(마녀 재판관), 제임스 우드(은행가) 등의 이야기를 통해 그들의 삶이 어떻게 시대 상황과 접맥되면서도, 자기 몰입적인 탐욕에 빠져들었는가를 살핀다.

에세이적 기술로 인해 쉽게 읽히는 이 책은 치밀한 학술서는 아니다. 하지만, 세계를 해석해내는 비평적 안목은 매력적이다. 때로는 저자의 교훈적이면서도 신학적인 태도가 독자들을 불편하게 할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저자가 주장하는 '무엇인가를 더 소유함으로써 오히려 더 욕심이 많아지'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대한 성찰은 귀담아들을 만하다. 인색함은 탐욕의 발로이고, 이 과정에서 인색한 사람은 스스로 고립되어 파멸에 이르고 만다는 사실은 교훈적이지만, 실제로 역사속에 존재했던 사실이기도 하다.

현대의 소비적 권리와 탐욕

라인하르트가 재구성한 역사적 논의들을 현재로 소환한다면 어떤 해석적 자극을 이끌어낼 수 있을까?

절약이라는 미덕과 인색함이라는 악덕 사이에서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스스로를 성찰할 수 있을까? 혹시, 현대인이 갖고 있는 '빈곤'에 대한 불안이 오히려 사치적 소비와 타인에 대한 인색함으로 발현되고 있지는 않는가?

라인하르트의 <탐욕의 지배>에 기대어 성찰해 보면, 현대인의 일상은 '인색한 소비'로 점철되어 있다. 현대의 일상인들은 대형 할인 매장에서 '싸구려로 나온 물건'을 발견하고는 먼저 사려고 강박적으로 다가간다. 혹은 가격 비교를 통해 더 나은 가격으로 구입한 물건을 놓고 쾌감을 느끼기도 한다. 이것은 일상이 되어버린 현대의 소비 패턴이다. 우리는 이러한 행위를 '합리적 소비'로 명명하지만, 사실은 '인색함'이 현대적 변형일 수 있다.

현대의 소비 메커니즘에 갇힌 우리들은 '더 싸게 구입한 상품'이 자신에게 유리하다는 생각만 할뿐, 그 싼 상품의 이면에 자리하고 있는 착취 관계는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다. 보다 낮은 단가를 위해 임금 노동자에게 노예 노동이 강요되었을 것이고, 유통 과정에서도 합리적이지만은 않을 거래 관계가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또 부추겨지는 소비 속에서 생태적 위기는 가속화되고, 후세대를 위한 윤리적 책임은 방기된다. 그렇지만, 거대 자본에 의해 이러한 '소비자의 인색한 착취'는 은폐되고 있다.

현대의 일상인에게 사업적 거래가 '소비'로 국한되고 있는 상황에서 소비자는 일방적 약자일 수밖에 없다. 오로지 소비할 권리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고객은 왕이다'라는 상투적인 어구로 약자의 위치는 희석된다. 그래서 이 약자들은 '인색함'을 '절약'이라는 언어로 대치함으로써 자신을 변호하고 있다. 그 변호가 일상화되어 있는 것이 우리시대의 시대정신이다.

라인하르트가 중세 이후 유럽의 역사 속에서 인상적인 열 개의 에피소드를 재구성하면서 애써 강조하려 했던 것은 탐욕의 파국적 종말이었다. 탐욕은 운명을 돌보지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의 일상인들은 '소비의 권리'로 미화된 탐욕의 덫에서 '파멸'의 운명을 스스로 자청해 걷고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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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의 역사를 통사적으로 정리하기는 쉽지 않다. 특정의 먹을거리를 언제 어디서 누가 어떻게 처음으로 먹었다는 실증 기록이란 거의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경우, 가장 오래된 역사서 기록이나 개인의 저술, 문집 등에 어떤 형식이든 특정 먹을거리가 거론되어 있으면 이를 근거로 그 먹을거리의 상용 시기와 전래 시기의 최소치를 어림잡는다. 이를테면 '젓갈의 역사'가 이렇게 정리되는 식이다.

"<삼국사기> '신문왕조'에 신문왕이 왕비 김 씨를 맞이할 때의 폐백 품목에 쌀, 술, 기름, 꿀, 장, 메주, 포와 함께 젓갈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젓갈은 최소한 삼국 시대 이전부터 먹은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음식의 역사는 '실증'의 부족으로 '~이(가) 아닌가 한다' 식의 두루뭉술한 역사 기술이 될 수밖에 없어서 역사로서의 '실증적 명징성'이 또렷해 보이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음식의 역사는 문화인류학, 사회학, 민속학의 분석 기술 방법을 채용하고, 또 여기에 역사적 상상력을 적절하게 발휘하여 민중의 생활사적 내용을 채워 넣는다. 이 단계에서 음식의 '역사'는 음식의 '이야기'가 되고, 음식은 자연과학의 대상인 동시에 인문학의 영역에도 포함되게 되는 것이다.


▲ <식전 : 팬더곰의 밥상견문록>(장인용 지음, 뿌리와이파리 펴냄). ⓒ뿌리와이파리
장인용의 <식전(食傳)>(뿌리와이파리 펴냄)은 오랜만에 나온 대중적 음식 인문학 책이다. 외국에서는 마빈 해리스 등 문화인류학자와 미시사 연구자들의 음식 관련 인문학 저작들이 여러 권 나왔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이성우(전 한양대학교 교수)의 저술들 이외에는 전공자들의 '음식 인문학' 연구가 별로 이어지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그 틈을 언론인 홍승면의 <백미백상(百味百想)>(삼우반 펴냄), 음식 칼럼니스트 김학민의 <맛에 끌리고 사람에 취하다>(은행나무 펴냄) 등 대중서가 잠시 메워 주고 있었다. <식전>은 음식이 왜 인문학인지를 이렇게 에둘러 이야기한다.

"우리에게 밥은 과연 무엇이고, 먹는다는 행위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다시 돌아보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을 이해하는 일이다. 밥이 생명이고 인생이며 즐거움인 것은 틀림없겠지만, 밥에 담긴 내력과 함의도 결코 만만치 않다. 이제 밥상머리에서 밥과 반찬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보자. 밥은 결국 하늘이고 우리 자신을 키운 것이라는 사연을."

이제는 산에서 삼겹살을 굽지 않는다. 10여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휴일에 북한산이나 관악산에 오르면 사방에서 삼겹살 굽는 냄새와 연기가 진동했다. 그러나 산에서의 취사가 금지되어서이기도 하지만, 들에서도 도시에서도 이제 삼겹살은 더 이상 걸신의 대상이 아니게 되었다. 왜 그럴까? 그것은 우리 사회의 경제 발전에 따라 삼겹살보다 더 양질의 먹을거리가 개발되고, 특별한 외국의 먹을거리가 수입되고, 또 이들에 쉽게 접근하고 향유할 수 있는 여건이 제공되었기 때문이다.

사회 발전에 따라 음식도 변한다. 생각과 삶의 방식 모두가 변하는 마당에 입맛도, 좋아 하는 먹을거리도 바뀌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 고전파 경제학자 아담 스미스는 인류 사회의 경제적 변화에 따른 식생활 문화의 변화 발전에 주목한 최초의 학자였으며, 경제 발전 5단계설을 주창한 미국의 경제학자 로스토는 먹을거리 소비 3단계론을 주장했다. 그에 의하면, 인류가 자유로이 토지를 이용할 수 있었던 제1단계에서는 가축 사육으로 주로 육식을 하였고, 토지의 집약적 이용으로 목축이 줄어드는 제2단계에서는 곡물이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으며, 농업 생산물이 가축의 사료로 제공되는 제3단계에서는 다시 육류가 식물성 먹을거리를 압도하게 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식전>은 경제학자들의 경제 발전 단계라는 변수에 음식의 변화를 종속시키는 외재적 접근을 거부하고, 입맛이라는 보수성에 새로운 먹을거리 재료의 개발과 등장이라는 혁신성의 통섭에서 음식 문화의 발전, 변화 현상을 논하였으니, 곧 내재적 접근이다. 그렇기 때문에 <식전>은 '신토불이(身土不而)'니 '우리 것은 좋은 것이여'를 절대적으로 보지 않는다. <식전>은 '우리 것'은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영원하지도 않으며, 새로운 음식의 개발은 물론 퓨전 음식도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본다. <식전>은 이를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정신으로 요약한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배추김치의 역사를 보면, 지금은 보편적인 음식이 불과 100년 전만해도 오늘날과는 많이 다름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이 음식들의 전통 깊음만 자랑할 게 아니라 평범한 음식을 화려하게 꽃피운 창의력과 변용을 더 높이 평가해야 하지 않을까. 음식은 변하는 것이고 그 변화에는 재료도 재료지만 조합과 창의성이 더 중요한 법이다. 김치를 중히 하려면 겉만 보지 말고 그 안에 든 창의성을 보아야 한다."

사랑과 굶주림의 본능은 모든 생명체의 원동력이다. 모든 생명체는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먹을 것을 찾고 종족 번식을 하기 위해 끊임없이 움직인다. 여기에서 존재론적 의문이 생긴다. 인간은 살기 위해 먹을까, 아니면 먹기 위해 살까? 음식의 획득, 운반, 저장, 조리에 일상을 모두 소비하는 고대 인류라면 먹기 위해 사는 삶이라 해석할 만하다. 그러나 음식의 양적 관심보다는 음식의 질이나 맛 자체를 즐기고, 아름다운 몸매를 유지하며 건강하게 사는데 필요조건으로 음식을 바라보는 현대 부르주아지에 와서는 살기 위해 먹는지, 먹기 위해 사는지 애매해진다.

<식전>은 인간의 삶 중 가장 큰 몫을 차지하면서도 이처럼 먹는다는 행위를 통해 인간 실존의 문제를 시공을 뛰어넘어 다르게 던져주는 먹을거리들, 그중에서도 우리 밥상 위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밥, 김치, 된장, 고추장, 멸치, 국수, 보신탕, 냉면 등의 구수한 먹을거리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런데 그 이야기는 옛이야기만이 아니다. <식전>은 이 먹을거리들의 과거는 물론 오늘의 모습까지 확인하고, 먹을거리와 관련해 우리 사회가 미래에 직면하게 될 문제까지 예측해 준다.

"새로운 음식 문화는 우리식으로 받아들여 다시 만들면 된다. 역사는 곤욕의 시간이었지만 밥상은 전과 다른 모습으로 흘러간다. 문화의 흐름이란 고여서 좋을 게 없다. 새로운 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전보다 훨씬 다채로운 문화를 탄생시킬 수도, 그나마 있던 것마저 빼앗길 수도 있다."

<식전>은 동서를 오가고 고금을 오르내리는 음식 관련 지식, 실증의 공백을 이어주는 역사적 상상력, 강건체의 감칠맛 나는 글 솜씨 등 상당 기간 음식 문화를 열공해 온 저자의 내공이 가볍게 보이지 않는 책이다. 간혹 속설이 눈에 띄지만 음식의 역사가 민중들의 삶과 먹을거리 이야기의 복합체인 것을 간과하지 않는다면 그리 큰 흠은 되지 않는다.

색다른 인문학적 주제에 접근하고 싶은 사람들, 식탁 위의 교양을 갈구하는 사람들, '아는 만큼 맛있음'을 신뢰하는 식도락가, 모두 관심을 가져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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