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만장자의 누더기

농담 같은 하나의 에피소드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자.

1800년대 초 영국의 글로스터에는 누더기를 걸친 백만장자인 은행가 제임스 우드가 살고 있었다. 그는 시티 올드 은행(City Old Bank)의 소유주였지만, 자신의 부에 어울리지 않게 생활을 했다. 직접 은행에서 창구 업무를 보았던 우드는, 근무 시간 동안에는 항상 변색된 외투를 입었다. 그것은 아주 낡아서 글로스터 주민조차 '그 코트가 원래는 노란색이었다'고 말할 정도였다.

어느 날 제임스의 우드의 충직한 하인이 말했다. "나리, 만약 런던에 가신다면, 새로운 옷을 사셔야 할 겁니다." 이에 우드는 그 하인에게 대답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여기 글로스터에선 모든 이들이 나를 알지만 런던에선 아무도 나를 모르지. 때문에 이 낡은 옷으로도 충분하네." 결코 옷을 살 생각이 없을 분명히 밝힌 이 백만장자는 '너무 많은 돈을 가진 가난한 자'였다. 그는 돈 자체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 농담은 수전노에 대한 야유라는 분명한 의도를 갖고 있지만,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반의 유럽 상황을 촌철살인처럼 보여준다. 이 시기는 자본주의적 가치가 적극적으로 계몽되던 때였다. 세속화된 칼뱅주의자로 일컬어지는 벤저민 프랭클린은 젊은 사람들에게 전하는 성공 규칙으로 '시간은 돈이다'라는 격언을 널리 퍼뜨리고 있었다. 중세 시대에 인색함이라고 간주되던 악덕이, 이즈음부터 절약이라는 미덕이 덧칠되어 재조명되기 시작한 것이다.

인색함이라는 악덕과 절약이라는 미덕

▲ <탐욕의 지배>(폴커 라인하르트 지음, 김희선·최정미 옮김, 말글빛냄 펴냄). ⓒ말글빛냄

금욕과 절제에 기반을 둔 합리적 세계관이 근대 자본주의의 정신적 토대가 되었다는 주장은 귀담아 들을 만한 것일까? 이러한 주장은 사회학자 막스 베버가 펼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절제와 금욕이 축적으로 이어지는 빛나는 순간에 자본주의라는 화려한 꽃이 개화했다. 이 과정에 대한 흥미로운 풍경을 스케치하듯 제시해 주는 책이 폴커 라인하르트의 <탐욕의 지배>(김희선·최정미 옮김, 말글빛냄 펴냄)이다.

폴커 라인하르트는 유럽의 역사를 전공한 스위스 프리브르 대학의 교수이다. 그는 미시사의 기록과 풍속에 대한 감각을 통해 인물의 행적을 재구성하는데 탁월하다. 라인하르트는 유럽 곳곳에서 획득한 편지, 가계부, 메모, 유언장 등을 통해 그 당시의 시대감각을 흡입력 있게 그려낸다.

미시사적 역사 연구 방법이 정신사의 도출로 이어지는 흥미로운 사례를 이 책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렇다 보니, 기존의 공식적인 역사 서술에서 이뤄진 판단들이 <탐욕의 지배>에서는 전도된 평가로 이어지기도 한다. 프랑스의 왕 루이 12세에 대한 상반된 평가가 그 한 예일 수 있다.

루이 12세는 일반적으로 재정 개혁과 세금 감면 등을 통해 민중적 섭정을 펼친 통치자로 기록되고 있다. 그는 살아있을 때, 삼부회로부터 '국민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얻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라인하르트가 이 책에서 해석해낸 루이 12세는 "최소한의 투자로 최대한의 수익을 얻으려 했던 인색한 왕"이었다. 그는 자신에게 충성한 스위스 용병들에게 급료를 지불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전쟁에서 참패하는 엄청난 실수를 되풀이하곤 했다. 라인하르트가 보기에 그는 자신의 내면에 자리하고 있는 '인색함'에 유혹되어 파멸의 길에 이른 군주였다.

도대체 '인색함'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라인하르트는 인색함이 축적의 근본 원리였기에 원시 시대부터 존재했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는 인색함을 대하는 태도는 역사적 상황에 따라 변화해 왔음을 이 책을 통해 증명하려 애쓴다. 중세 시대 신학에서는 일곱 가지 죄악(분노, 오만, 방탕, 태만, 폭식, 탐욕, 그리고 질투)을 경계하며, 구원에 대해 갈파했다. 그 중에서도 탐욕(인색함)은 모든 죄악의 발생지로 간주되었다.

라인하르트가 보기에 이렇듯 탐욕은 문제적이며, 자기 파괴적인 불온성을 안고 있다. 처음에는 절약과 인색함의 경계가 불명료했다가 어느 순간 탐욕에 사로잡힌 인간은 돈을 모으는 것 자체를 목적으로 삼고 만다. 축적에 대한 집요한 욕망이 영혼을 잠식하고, 드디어는 축적되는 자본의 양과는 상관없이 수전노들은 불안한 삶 속에서 스스로를 파괴한다.

탐욕스러운 자는 오로지 돈을 통해서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강박 속에서 돈을 모으는 것에 삶의 의미를 집중한다. 더 나아가 탐욕스러운 자들의 인색함은 타인의 삶에 치명적으로 개입하게 되고, 더불어 공동체를 파멸하는 파국적 종말에 이르고 만다. 때로는 그 파국에 가닿기 전에 공동체가 인색한 자들을 파멸시키기도 한다. 라인하르트는 중세 시대에 '마녀사냥'도 이러한 공동체의 자기 방어 기제 속에서 발생한 사례가 있다고 해석했다.

라인하르트는 이 책에서 모두 열 개의 에피소드를 제시했다. 16세기부터 20세기에 걸쳐 있는 이 에피소드들은 대부분은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인물들의 삶을 재구성한 것이다. 특정 인물에 대한 약전(略傳)이면서, '인색함'에 대한 태도 변화를 역사적으로 다룬 사건사(事件史)에 대한 기술이기도 하다. 이 책은 각 장이 독립되어 있으며, 주제적 측면에서는 '인색함과 탐욕에 대한 탐구'이기에 통합적이다.

<탐욕의 지배>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실증적인 엄밀함보다는 해석적 풍부함을 지향하고 있다. 이 책은 역사 연구서이기보다는 역사에 대한 문화 비평서에 가깝다. 그러면서도 역사학자로서 저자가 취하고 있는 단호한 해석은 독자를 압도한다. 라인하르트는 각각 다양한 삶을 살았던 다티니(상인), 루이12세(왕), 플라데(마녀 재판관), 제임스 우드(은행가) 등의 이야기를 통해 그들의 삶이 어떻게 시대 상황과 접맥되면서도, 자기 몰입적인 탐욕에 빠져들었는가를 살핀다.

에세이적 기술로 인해 쉽게 읽히는 이 책은 치밀한 학술서는 아니다. 하지만, 세계를 해석해내는 비평적 안목은 매력적이다. 때로는 저자의 교훈적이면서도 신학적인 태도가 독자들을 불편하게 할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저자가 주장하는 '무엇인가를 더 소유함으로써 오히려 더 욕심이 많아지'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대한 성찰은 귀담아들을 만하다. 인색함은 탐욕의 발로이고, 이 과정에서 인색한 사람은 스스로 고립되어 파멸에 이르고 만다는 사실은 교훈적이지만, 실제로 역사속에 존재했던 사실이기도 하다.

현대의 소비적 권리와 탐욕

라인하르트가 재구성한 역사적 논의들을 현재로 소환한다면 어떤 해석적 자극을 이끌어낼 수 있을까?

절약이라는 미덕과 인색함이라는 악덕 사이에서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스스로를 성찰할 수 있을까? 혹시, 현대인이 갖고 있는 '빈곤'에 대한 불안이 오히려 사치적 소비와 타인에 대한 인색함으로 발현되고 있지는 않는가?

라인하르트의 <탐욕의 지배>에 기대어 성찰해 보면, 현대인의 일상은 '인색한 소비'로 점철되어 있다. 현대의 일상인들은 대형 할인 매장에서 '싸구려로 나온 물건'을 발견하고는 먼저 사려고 강박적으로 다가간다. 혹은 가격 비교를 통해 더 나은 가격으로 구입한 물건을 놓고 쾌감을 느끼기도 한다. 이것은 일상이 되어버린 현대의 소비 패턴이다. 우리는 이러한 행위를 '합리적 소비'로 명명하지만, 사실은 '인색함'이 현대적 변형일 수 있다.

현대의 소비 메커니즘에 갇힌 우리들은 '더 싸게 구입한 상품'이 자신에게 유리하다는 생각만 할뿐, 그 싼 상품의 이면에 자리하고 있는 착취 관계는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다. 보다 낮은 단가를 위해 임금 노동자에게 노예 노동이 강요되었을 것이고, 유통 과정에서도 합리적이지만은 않을 거래 관계가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또 부추겨지는 소비 속에서 생태적 위기는 가속화되고, 후세대를 위한 윤리적 책임은 방기된다. 그렇지만, 거대 자본에 의해 이러한 '소비자의 인색한 착취'는 은폐되고 있다.

현대의 일상인에게 사업적 거래가 '소비'로 국한되고 있는 상황에서 소비자는 일방적 약자일 수밖에 없다. 오로지 소비할 권리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고객은 왕이다'라는 상투적인 어구로 약자의 위치는 희석된다. 그래서 이 약자들은 '인색함'을 '절약'이라는 언어로 대치함으로써 자신을 변호하고 있다. 그 변호가 일상화되어 있는 것이 우리시대의 시대정신이다.

라인하르트가 중세 이후 유럽의 역사 속에서 인상적인 열 개의 에피소드를 재구성하면서 애써 강조하려 했던 것은 탐욕의 파국적 종말이었다. 탐욕은 운명을 돌보지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의 일상인들은 '소비의 권리'로 미화된 탐욕의 덫에서 '파멸'의 운명을 스스로 자청해 걷고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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