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의 역사를 통사적으로 정리하기는 쉽지 않다. 특정의 먹을거리를 언제 어디서 누가 어떻게 처음으로 먹었다는 실증 기록이란 거의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경우, 가장 오래된 역사서 기록이나 개인의 저술, 문집 등에 어떤 형식이든 특정 먹을거리가 거론되어 있으면 이를 근거로 그 먹을거리의 상용 시기와 전래 시기의 최소치를 어림잡는다. 이를테면 '젓갈의 역사'가 이렇게 정리되는 식이다.

"<삼국사기> '신문왕조'에 신문왕이 왕비 김 씨를 맞이할 때의 폐백 품목에 쌀, 술, 기름, 꿀, 장, 메주, 포와 함께 젓갈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젓갈은 최소한 삼국 시대 이전부터 먹은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음식의 역사는 '실증'의 부족으로 '~이(가) 아닌가 한다' 식의 두루뭉술한 역사 기술이 될 수밖에 없어서 역사로서의 '실증적 명징성'이 또렷해 보이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음식의 역사는 문화인류학, 사회학, 민속학의 분석 기술 방법을 채용하고, 또 여기에 역사적 상상력을 적절하게 발휘하여 민중의 생활사적 내용을 채워 넣는다. 이 단계에서 음식의 '역사'는 음식의 '이야기'가 되고, 음식은 자연과학의 대상인 동시에 인문학의 영역에도 포함되게 되는 것이다.


▲ <식전 : 팬더곰의 밥상견문록>(장인용 지음, 뿌리와이파리 펴냄). ⓒ뿌리와이파리
장인용의 <식전(食傳)>(뿌리와이파리 펴냄)은 오랜만에 나온 대중적 음식 인문학 책이다. 외국에서는 마빈 해리스 등 문화인류학자와 미시사 연구자들의 음식 관련 인문학 저작들이 여러 권 나왔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이성우(전 한양대학교 교수)의 저술들 이외에는 전공자들의 '음식 인문학' 연구가 별로 이어지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그 틈을 언론인 홍승면의 <백미백상(百味百想)>(삼우반 펴냄), 음식 칼럼니스트 김학민의 <맛에 끌리고 사람에 취하다>(은행나무 펴냄) 등 대중서가 잠시 메워 주고 있었다. <식전>은 음식이 왜 인문학인지를 이렇게 에둘러 이야기한다.

"우리에게 밥은 과연 무엇이고, 먹는다는 행위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다시 돌아보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을 이해하는 일이다. 밥이 생명이고 인생이며 즐거움인 것은 틀림없겠지만, 밥에 담긴 내력과 함의도 결코 만만치 않다. 이제 밥상머리에서 밥과 반찬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보자. 밥은 결국 하늘이고 우리 자신을 키운 것이라는 사연을."

이제는 산에서 삼겹살을 굽지 않는다. 10여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휴일에 북한산이나 관악산에 오르면 사방에서 삼겹살 굽는 냄새와 연기가 진동했다. 그러나 산에서의 취사가 금지되어서이기도 하지만, 들에서도 도시에서도 이제 삼겹살은 더 이상 걸신의 대상이 아니게 되었다. 왜 그럴까? 그것은 우리 사회의 경제 발전에 따라 삼겹살보다 더 양질의 먹을거리가 개발되고, 특별한 외국의 먹을거리가 수입되고, 또 이들에 쉽게 접근하고 향유할 수 있는 여건이 제공되었기 때문이다.

사회 발전에 따라 음식도 변한다. 생각과 삶의 방식 모두가 변하는 마당에 입맛도, 좋아 하는 먹을거리도 바뀌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 고전파 경제학자 아담 스미스는 인류 사회의 경제적 변화에 따른 식생활 문화의 변화 발전에 주목한 최초의 학자였으며, 경제 발전 5단계설을 주창한 미국의 경제학자 로스토는 먹을거리 소비 3단계론을 주장했다. 그에 의하면, 인류가 자유로이 토지를 이용할 수 있었던 제1단계에서는 가축 사육으로 주로 육식을 하였고, 토지의 집약적 이용으로 목축이 줄어드는 제2단계에서는 곡물이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으며, 농업 생산물이 가축의 사료로 제공되는 제3단계에서는 다시 육류가 식물성 먹을거리를 압도하게 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식전>은 경제학자들의 경제 발전 단계라는 변수에 음식의 변화를 종속시키는 외재적 접근을 거부하고, 입맛이라는 보수성에 새로운 먹을거리 재료의 개발과 등장이라는 혁신성의 통섭에서 음식 문화의 발전, 변화 현상을 논하였으니, 곧 내재적 접근이다. 그렇기 때문에 <식전>은 '신토불이(身土不而)'니 '우리 것은 좋은 것이여'를 절대적으로 보지 않는다. <식전>은 '우리 것'은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영원하지도 않으며, 새로운 음식의 개발은 물론 퓨전 음식도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본다. <식전>은 이를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정신으로 요약한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배추김치의 역사를 보면, 지금은 보편적인 음식이 불과 100년 전만해도 오늘날과는 많이 다름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이 음식들의 전통 깊음만 자랑할 게 아니라 평범한 음식을 화려하게 꽃피운 창의력과 변용을 더 높이 평가해야 하지 않을까. 음식은 변하는 것이고 그 변화에는 재료도 재료지만 조합과 창의성이 더 중요한 법이다. 김치를 중히 하려면 겉만 보지 말고 그 안에 든 창의성을 보아야 한다."

사랑과 굶주림의 본능은 모든 생명체의 원동력이다. 모든 생명체는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먹을 것을 찾고 종족 번식을 하기 위해 끊임없이 움직인다. 여기에서 존재론적 의문이 생긴다. 인간은 살기 위해 먹을까, 아니면 먹기 위해 살까? 음식의 획득, 운반, 저장, 조리에 일상을 모두 소비하는 고대 인류라면 먹기 위해 사는 삶이라 해석할 만하다. 그러나 음식의 양적 관심보다는 음식의 질이나 맛 자체를 즐기고, 아름다운 몸매를 유지하며 건강하게 사는데 필요조건으로 음식을 바라보는 현대 부르주아지에 와서는 살기 위해 먹는지, 먹기 위해 사는지 애매해진다.

<식전>은 인간의 삶 중 가장 큰 몫을 차지하면서도 이처럼 먹는다는 행위를 통해 인간 실존의 문제를 시공을 뛰어넘어 다르게 던져주는 먹을거리들, 그중에서도 우리 밥상 위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밥, 김치, 된장, 고추장, 멸치, 국수, 보신탕, 냉면 등의 구수한 먹을거리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런데 그 이야기는 옛이야기만이 아니다. <식전>은 이 먹을거리들의 과거는 물론 오늘의 모습까지 확인하고, 먹을거리와 관련해 우리 사회가 미래에 직면하게 될 문제까지 예측해 준다.

"새로운 음식 문화는 우리식으로 받아들여 다시 만들면 된다. 역사는 곤욕의 시간이었지만 밥상은 전과 다른 모습으로 흘러간다. 문화의 흐름이란 고여서 좋을 게 없다. 새로운 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전보다 훨씬 다채로운 문화를 탄생시킬 수도, 그나마 있던 것마저 빼앗길 수도 있다."

<식전>은 동서를 오가고 고금을 오르내리는 음식 관련 지식, 실증의 공백을 이어주는 역사적 상상력, 강건체의 감칠맛 나는 글 솜씨 등 상당 기간 음식 문화를 열공해 온 저자의 내공이 가볍게 보이지 않는 책이다. 간혹 속설이 눈에 띄지만 음식의 역사가 민중들의 삶과 먹을거리 이야기의 복합체인 것을 간과하지 않는다면 그리 큰 흠은 되지 않는다.

색다른 인문학적 주제에 접근하고 싶은 사람들, 식탁 위의 교양을 갈구하는 사람들, '아는 만큼 맛있음'을 신뢰하는 식도락가, 모두 관심을 가져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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