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국내에서 출판된 과학기술학 서적은 대개 과학기술 만능주의를 비판하거나 성찰 없는 과학기술의 활용이 가져올 파국을 경고한다. 이것이 한국만의 예외적인 현상은 물론 아니다.

"지구에 닥친 이 총체적 위기와 사회적 병폐를 첨단 과학 기술이 해결해줄 거예요"라고 해맑은 얼굴로 이야기하는 것은, 전 세계적으로도 유행에 뒤처지는 모습임에 틀림없다. 소설이나 영화들이 그려내는 모습도 온통 음울한 디스토피아뿐이다. 현실 세계에서도 과학기술의 사회적 의미와 영향을 둘러싼 논쟁이 적잖이, 그것도 가끔씩은 아주 과열된 양상으로 벌어지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과학의 외피를 두르고는 있지만 열정과 믿음에 근거한 신념 싸움인 경우도 적지 않다.

그것이 과도한 유토피아적 환상이든 비관의 디스토피아든, 과학적 논쟁의 '지나친' 정치화는 과학 발전이나 사회의 발전, 어느 쪽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평생을 분자 생물학 연구에 투신해왔던 윌리엄 루미스는 이러한 현실이 답답했던 것 같다. 그는 생물학 그 자체에 대한 이해를 기반에 두고 좀 더 차분하고 합리적인 논의를 해보자며 '공론의 장을 위한 생물학'을 들고 나왔다.

원래 제목은 "Life as it is : Biology for Public Sphere"이지만 한국 번역서 표지에는 "Wars for Lives : 생명 전쟁"이 커다랗게 적혀 있다. 이상 열기로부터 벗어나 차분하게 과학적 사실을 바라보자는 저자의 의도와는 한참이나 동떨어진 제목이 아닐 수 없다.


▲ <생명 전쟁>(윌리엄 루미스 지음, 조은경 옮김, 글항아리 펴냄). ⓒ글항아리
<생명 전쟁>(조은경 옮김, 글항아리 펴냄)은 (분명한 답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서 출발하여, 줄기세포와 복제, 유전자 조작, 낙태의 문제를 '과학자의 관점'에서 설명하고, (의외로 한국에서는 별 저항 없이 유행하는) 사회생물학의 현재 지점을 살펴본 후 의식, 안락사, 이기심과 협력이라는 인간 사회의 특성을 (사회생물학이 아닌) 생물학으로부터 추론하고 있다. 또 생명의 기원으로부터 인간의 진화에 이르는 방대한 역사를 비교적 짧게 요약한 다음, 인류의 생존을 위한 생물학의 이용에 대해 이야기한다.

저자는 생물학을 잘 모르는 일반인 독자를 염두에 두고 이 책을 썼다고 밝혔다. 이토록 방대하고도 전문적인 내용을 지하철 안에서도 술술 읽어 넘길 수 있게 썼다는 것은 실로 상당한 내공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의학 전공자인 필자를 '일반인' 독자라고 부르기야 어렵겠지만,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은 모두 고등학교 생물학 교과서를 벗어나지 않기에 이른바 '문과' 출신이라도 그리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극적인 전개나 재미난 에피소드들이 없기 때문에 지루하다고 느낄 수도 있지만, 그런 이유로 이 책을 읽지는 않을 것이기에 굳이 흠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루미스의 목소리는 매우 차분하다. 생명에 대한 경외심과 창조주에 대한 열정이 남다른 이라면 분노에 파르르 떨 만큼이나 '냉정'하기도 하다. 그는 낙태나 진화론/창조과학 같은 뜨거운 이슈에 대해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쿨하게' 이야기한다.

"세포생물학자의 견지에서 보면 생명은 그다지 값어치가 없다." "한 개체의 생명을 절대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하지만 세포 몇 개 혹은 성숙한 난자는 생명이 아니다. 세포는 계속해서 만들어지며 많은 세포가 자연적으로 죽는다." "생물 발생 이전의 과학은 갈 길이 매우 멀지만 어떤 단계에서든지 반드시 기적이 일어나야 할 필요는 없다."

마찬가지로 대중적으로 인기 있는 사회생물학자나 그 추종자들도 기분이 좋지 않을 것이다.

"파리의 성적 취향에 영향을 미치는 유전자가 인간의 행동과 연관이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연구를 통해 오로지 본능으로 움직이는 아주 단순한 생명체에도 복잡한 행동을 하게 하는 유전적 기초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쿨'함이 인간 사회의 복잡성과 정치성에 대한 지나친 단순화에서 비롯된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몇 가지 사례들을 살펴보겠다.

줄기세포와 복제 문제를 다룬 장에서는 저자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한국인 연구팀이 이를 시도했다가 실패하기는 했지만 생명이 희생되지는 않았다. 난자 제공자들은 자신이 제공하는 난자가 치료 목적 복제 연구에 사용될 것이며 생식 복제에는 사용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충분히 고지 받았다. (…) 이 경우 난자를 제공한 여성들이 어느 정도 불편함은 느꼈을 수 있지만 해를 입지는 않았다. 그들의 난자가 유용한 결과를 낳지는 못했지만 자연적으로 수태되는 상황이었다 해도 수정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사건에서 난자 제공 여성들의 '불편함'과 수정되지도 않을 난자들에 대한 과민반응이 윤리적 문제의 본질이었을까?

또 유전자 조작 작물에 대해서는 이러한 주장을 펼친다.

"(…) 그 밖에도 유전자 변형 작물과 관련된 환경 문제도 있지만 문제점을 상쇄시킬 만큼 장점이 더 많다. (…)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터미네이터 씨앗은 퍼져나갈 수 없다. 이렇게 하면 유전자 변형 작물이 퍼져나가 허가를 받지 않은 사람들까지 누구나 그 작물을 재배해 생명공학 회사가 개량된 씨앗을 생산해내는데 든 비용을 회수할 기회가 사라지는 것을 막는 효과도 있다. (…) 정치 문제로 비화되고 있는 유전자 변형 작물에 대한 논란은 한동안 계속될 것이다. 하지만 생명공학 회사들은 어떻게든 굶주리는 사람들을 먹이고 작물에 살충제가 축적되는 것을 줄이는 유전자 변형 작물을 계속 만들고 판매할 것이다."

식량 문제를 둘러싼 전 지구적 정치경제학의 복잡성을 이렇게 순진한 목소리로 '정리'해버려도 되는 것일까?

한편, 에너지 위기와 화석연료에 의한 지구 온난화 문제를 다루면서 사탕수수로부터 추출한 에탄올이나 바이오디젤의 잠재력을 이야기한다. 물론 이들은 기존의 화석연료보다 바람직하고 권장할 만하다. 사람들이 에탄올과 바이오디젤에 대해 우려하는 것은 그 자체의 효과성이 모자라서가 아니다. 곡물 시장의 왜곡과 생태계 파괴는 환경 보호를 위한 순수한 열정으로 연구 개발에 임했던 과학자들이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문제일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뜻하지 아니한 방향으로 문제가 흘러가는 것이 처음은 아니지 않은가? 오펜하이머가 인류를 대량살상하기 위해 핵물리학을 연구한 것이 아니었던 것처럼!

이토록 민감하고 복잡한 문제들을 무심하게 '정리'해버릴 수 있는 것은, '정치적 논쟁으로부터 배제된 생물학적 진실'을 직시해서라기보다, 그것의 사회적 영향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또 과학이 사회적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운, '순수한' 실체라는 그릇된 믿음도 중요한 역할을 했으리라고 본다.

초국적 종자 생산 기업은 인류를 굶주림에서 해방시키겠다는 거룩한 사명감에서 그토록 열심히 유전자 조작 작물을 개발할까? '부가 가치'와 '경제 성장'을 이야기하지 않고 한국의 줄기세포 스캔들을 이해할 수 있을까? 곡물 메이저와 에너지 기업의 역동 관계를 고려하지 않고 세계 식량 문제와 에너지 문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다소 극단적으로 평하자면, 루미스의 관점은 온건하게 포장된 과학기술 지상주의에 속한다고 할 수 있으며, 그렇기에 누가 봐도 코웃음을 칠 수 있는 유토피아적 과학기술 만능주의에 비해 더욱 위험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은 다수의 '합리적인' 과학기술자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내용을 잘 모르면서 너무 흥분하네. 기술적인 보완책만 갖추면 그렇게 필요 이상으로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과학을 너무 정치적으로 해석하지 말아 주세요!'

하지만 (역시) 생물학자인 존 벡위드는 <과학과 사회운동 사이에서>(이영희·김동광·김명진 옮김, 그린비 펴냄)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나는 우리 과학자들이 하는 일을 사랑하며 이 점에서 과학이 뭔가 줄 것이 있다고 믿지만, 과학의 힘에 대해 덜 오만한 태도를 선호한다. 우리는 과학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에 대해 좀 더 겸손해야 하며, 과학의 객관성을 지나치게 강조하거나 과학을 사회 문제들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으로 선언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생태학자, 생물학자인 리처드 레빈스와 리처드 르원틴은 <변증법적 생물학자(Dialectical Biologist)>(Harvard University Press, 1987) '과학의 상품화'라는 절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사회주의자로서, 우리는 과학의 상품화 이전 시대로 되돌아가자고 호소하기 위해 과학의 상품화를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트러스트를 야기했던 과거의 바로 그 상황들을 재현하고자 했던 반(反)트러스트 법만큼이나 쓸데없는 짓이다. 우리의 의도는 이와 다르다. 과학의 상품화, 자본주의 생산 과정에의 전면적인 결합은 학술 활동을 위한 삶에서 지배적인 사실이며 과학자의 사고에 심원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러한 연관성을 부정하는 것은 그것의 힘에 종속된 채로 남아 있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자유를 향한 첫 걸음은 우리 부자유의 중요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과학기술이 삶의 일부가 되어 버린 사회에서 그것의 사회적 영향이 결코 가볍게 다루어져서는 안 될 것이다. 또 사회가 과학기술에 미치는 영향, 특히 이윤 동기와 연관된 정치경제적 영향 또한 과소평가되어서는 안 된다. 안 본다고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벡위드의 주장처럼 과학자들은 좀 더 겸손해야 하며 객관성을 과신하지 말아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 레빈스와 르원틴의 지적처럼 스스로가 처한 부자유를 인정할 필요가 있다.

물론 루미스 자신도 이런 중요한 문제들이 과학자들에 의해서만 판단되는 것은 문제라고 지적한다.

"과연 누가 이런 것에 대해 옳고 그르다는 판단을 내릴 수 있을까? 이런 문제를 오로지 유전공학이 어디까지 발전할 수 있을지에만 관심을 두는 다수의 과학자들에게만 맡겨둬서는 안 된다. 그리고 다수의 시민들이 기초적인 집단유전학, 분자생물학, 의학적 사실 등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그런 문제를 국민투표에 부쳐 결정해서도 안 된다."

그렇다면 어쩌란 말인가? 저명한 대중 과학자 칼 세이건은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이상헌 옮김, 김영사 펴냄)에서 과학을 축복이자 재앙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이를 재앙에서 축복으로 바꾸는 길은 오로지 회의(懷疑)하는 대중의 집단 지성, 그리고 대중이 과학 문맹(scientific illiteracy)에서 벗어나는 것뿐이라고 역설했다.

그렇다. 과학기술을 감시하고 방향을 정하는 건 시민들이 되어야 하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공부'가 필요하다. 독자들은 루미스의 책을 통해 뜨거운 논쟁 이면에 자리한 과학적 사실 자체에 대한 이해를 높이되, 여기서 멈추지 말고 한발 더 나아가야 한다. 이 복잡한 과학기술 사회에서 책임 있는 민주 시민으로 살아가려면 부담해야 할 숙제다.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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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도 책을 읽었다-생태주의 작가 최성각의 독서 잡설>(동녘 펴냄)은 서평 모음이다.

이 책 뒤표지의 추천사에 나오듯 재미없는 서평은 엄연한 현실이다. "재미만 없는 게 아니라 숫제 읽을 수"조차 없을 정도다. 하물며 개별 서평이 그럴진대 그런 글을 모아놓은 서평집은 오죽하랴! 그러나 생태주의 작가 최성각의 독서 잡설은 서평이 지닌 통념을 거스른다. 참 재미있다. 작가의 본업인 소설보다 더 재밌다. 그 비결은 뭘까?

나는 작가와 이름이 비슷하다. 앞의 두 글자가 같다. 가수 안치환이, 작곡가 안치행이나 연극평론가 안치운과 혈연관계가 아닌 것처럼 나하고 작가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다. 이제 보니 그와 나는 띠 동갑이다. 그는 "50대 중반의 양띠다." 내가 그를 처음 본 건 내 첫 일터에서다.


▲ <나는 오늘도 책을 읽었다>(최성각 지음, 동녘 펴냄). ⓒ동녘
14년 전, 나는 서평 전문지의 신출내기 기자였다. 당시 그는 '책갈피 산책'이라는 꼭지의 첫 번째 필자 셋 중 한 명이었다. '책갈피 산책'은 읽히는 서평을 지향한 기획으로 그에게 환경 분야 책이 맡겨졌다. 그쪽 사정에 밝았던 선배 기자가 필자로 그를 택했다. 그는 뭔가를 전달하려고 우리 사무실에 들렀다. 그게 뭔지는 아직도 모른다. 나는 그저 그의 방문을 지켜볼 따름이었다.

그로부터 4년 후, 나는 첫 직장에 복귀한다. 이번엔 내가 취재를 갔다가 그를 '다시' 만났다. 그는 취재원의 지인이었지만, 나는 그와도 인사를 나눴다. 하지만 그는 곧 나를 잊는다. 얼마 안 있어 경기도 과천에서 열린 수돗물 불소화 반대 집회에서 그를 또 다시 봤다. 그는 나를 못 알아봤다. 내 자존심은 여지없이 구겨졌지만 이를 계기로 내 존재감이 그에게 각인된 모양이다. 나는 이따금 그의 호출을 받곤 한다. 덕분에 그가 산파 역할을 한 '환경책 큰잔치' 실행위원이라는 중책을 맡기도 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연전의 어느 연말 모임에서 '김수영 시인은 (단군 이래)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인'이라고 했다가 '그 말 책임질 수 있느냐?'는 참석자 한 분의 면박에 바로 꼬리를 내렸다. 그렇다고 내 주장을 완전히 접지는 않았다. 반쯤 물러나 '김수영은 가장 위대한 현대 시인'으로 바로잡았다." (<고전의 향연>, 한겨레출판 펴냄, 316쪽) 내게 책임 추궁을 하신 분이 바로 그다.

독서가로서 최성각은 까다롭다. "범람하는 잡서에 시간을 낭비하는 것보다 바보짓은 없을 것이다. 아예 책을 읽지 말거나, 읽으려면 좋은 책, 진실이 담긴 '뜨거운 책'을 읽어야 할 것이다." 그의 독서지론으로 봐도 무방하다.

독서의 영향력에 대해선 꽤 회의적이다. "필자는 솔직히 말해 한 권의 책이 사회를 얼마나 변화시킬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적잖이 의문이다." 물론 "혁명가와 실천가의 삶이 널리 읽히는 세상은 그래도 희망이 있다."

소설가 최성각은 문학에도 엄밀한 잣대를 들이댄다. "이런 작품이 바로 '문학'이다. 솔직히 말해서 이런 작품을 접하고 나면, 지금 발표되고 있는 우리 소설들을 읽기가 힘이 들어진다. 문학인이라 자처하는 이들은 문학에 대해 심각하게 오해하고 있고, 한 줌도 안 되는 문학 권력 주변의 패거리주의에 빠져 세월 몰라라 음풍농월하고 있다. 가히 역겹다." 진짜 문학인 이런 작품은 이보 안드리치의 <드리나 강의 다리>다. 이어지는 문구가 짠하다. "1986년 겨울에 나는 <동아일보> 신춘문예 중편소설 부문에 응모했는데, 다행히 당선이 되어 쌀을 살 수 있게 되었다."

쓰지 신이치의 <행복의 경제학>을 놓고, 최성각은 저자와 추천사를 쓴 이가 함께 부탄에 갈 기회를 가졌고, 부탄에서 20일을 머물렀다는 추천사의 한 대목에서 "이 책을 손에 잡고 계속 읽을 것인가, 말 것인가, 고민에 빠졌다." 이유인 즉슨 "입국을 하자면 부탄이 지정한 인도의 특정 여행사를 통해 누구나 예외 없이 하루 200달러의 돈을 선금으로 내야 한다"는 것이다. 20일이면 한 사람이 4000달러를 부탄에 지불했다는 얘기다.

<삼성을 생각한다> 책의 저자를 보는 눈길 또한 곱지만은 않다. 그의 머릿속에 오랫동안 똬리를 튼 대목이다.

"삼성그룹이 사실상 부도를 맞아서 임직원들이 대대적으로 쫓겨났던 1999년 나는 제주 호텔신라 퍼시픽스위트룸에서 가족과 함께 여름휴가를 보냈다. 며칠 지내고 체크아웃할 때 보니 계산서에 1500만 원가량이 나왔다. 당시 휴가는 회사 임원들이 연루된 연예인 윤락 사건을 잘 해결해주었다고 해서 받은 것이었다." (129~130쪽에서 재인용)

어떤 책에 대해선 극찬을 아끼지 않는다. "이런 책을 한번 접하고 나면, 책은 아무나 쓰는 게 아니라는 것과 혹 어쩌다 책을 펴냈더라도 책을 펴내기 전보다 더 겸손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독자는 그러나 특별히 무장할 필요가 없다. 열린 마음으로 겸손하게 위대한 저작을 읽어나가면 될 것이다. 반드시 그 정신이 격랑을 만난 뗏목처럼 요동칠 것이다." 이런 책이란 엘리아스 카네티의 <군중과 권력>이다.

최성각에겐 애독서가 몇 권 있다. 그는 "특별한 책" 피터 드러커의 <방관자의 시대>를 "젊은 날 광산촌에서 구했던 빛바랜 '갑인 판'으로 거듭 읽곤 한다. 내 꿈을 되살피고, 내 보잘것없는 좌절의 내용을 때로 깊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을 때마다."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은 기회만 허락되면 다시 뒤적이는 책이다. 낡아빠진 콜린 윌슨의 <아웃사이더>를 가끔 뒤적이는 까닭은 "이 한 권으로 인해, 그 후 내 보잘것없는 기나긴 독서 편력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김재용이 엮은 <백석 전집>은 "전집이라 시집 같지 않게 두껍지만 자주 만져 가장자리가 좀 해어"졌다.

소설가 김성동의 말처럼 "최성각은 사상가"다. "이 기절초풍하고 혼비백산하는 정신의 대공황 시대에 한 점 등불 든 생명 사상가"다. 서평집에서 그의 통찰과 혜안은 빛난다.

"훌륭한 사람의 기준은 무엇일까? 나는 사람을 가리지 않는 사람을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역사는 대개 긴 무기력의 시간과 짧은 저항의 순간으로 채워져 있기 일쑤다. 아주 가끔씩 아름답고 눈부신 저항이 일어나긴 하지만, 대부분의 인간들은 권력자들의 입맛에 맞게 순치되어 불쌍하고 애처롭게 자신의 삶이 노예의 삶인지도 모르고 살다가 사라지는 게 사실이다."

"사람이란 토론에 의해 자기 생각이 수정되지 않는다. 상대방에 대한 이해가 증진되는 것도 아니다. 모두 자기 주장만 되풀이할 뿐이다. TV 토론이 아니라도 사람 사이에 정말 멋진 토론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이 문제는 인간의 한계에 속하는 일일 것이다."

"그곳의 산천은 내 여전히 사랑하지만, 고향 사람들은 경멸하게 되었다."

"손의 상처야 보려고 들면 보이지만, 사람들 가슴속에 꼭꼭 숨겨져 있는 상처들은 기실 제각각 오죽 깊을까."

"생태적 시각이란 뭘까? 우리 삶의 바탕에 대한 깊은 생각이고 염려이고, 사랑이다. 혹은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이 앞으로도 이 지상에서 오래 오래 건강하게 살아가기 위해 노력해야 할 일을 찾는 자세라 할 수 있다."

최성각의 오랜 독서 이력을 보여주는 이 책에 언급된 도서의 서지 정보가 충실하다. 다만 한두 개 부정확한 정보를 바로잡는다. 이동진 옮김 <장미의 이름으로>는 우신사에서 나왔다(116쪽). 1980년대 초반 박태순이 펴낸 '국토 기행'은 <국토와 민중>이다(154쪽).

"황 아무개"는 "이 고약한 시대에 좌에서 우로 왔다리 갔다리" 했다. 부록으로 덧붙인 '다음 100년을 살리는 141권의 환경책' 목록에 있는 생태에서 반생태로 왔다리 갔다리 한 차 아무개의 책 세 권은 빼는 게 순리가 아닐는지. 표지 사진의 견공에게 말풍선을 붙이면 이러지 않을까. "우리 주인장, 제법인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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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농장>, <1984>로 널리 알려진 조지 오웰은 <카탈로니아 찬가>, <위건 부두로 가는 길> 등의 주옥같은 르포르타주를 남겼다. 또 그는 평생 칼럼, 서평을 포함한 엄청난 양의 에세이도 썼다. 특히 그는 1930년(27세) <아델피>에 서평을 쓰기 시작한 이래로 서평 쓰기에 남다른 애정을 보였다.

다음에 글은 오웰이 1946년 5월 <트리뷴>에 게재한 '어느 서평자의 고백(Confessions of a Book Reviewer)'을 완역한 것이다. 오웰은 1945년 <동물농장>이 상업적으로 성공하면서 더 이상 생계를 위해 서평을 쓰지 않아도 됨에도 서평 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이상적인 서평을 갈구하면서, 서평을 비롯한 평론 일반에 대한 혐오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이 글은 (오웰의 글쓰기 스타일과 함께) 이런 맥락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할 것이다.

이 글은 한겨레출판에서 9월 중순에 펴낼 <나는 왜 쓰는가 : 조지 오웰 에세이>에 실릴 에세이 중 하나다. 이 책은 번역가 이한중 씨가 오웰의 수많은 에세이 가운데 29편을 직접 골라서 번역한 것이다. 이 책에 실릴 오웰의 에세이는 아래 글을 포함해 20편이 초역이다. 한겨레출판의 허락을 구해 오웰의 이 글을 먼저 공개한다. '프레시안 books'는 앞으로도 국내외 작가들의 서평에 대한 생각을 엿볼 수 있는 글을 실을 예정이다. <편집자>

어느 서평자의 고백


▲ <나는 왜 쓰는가 : 조지 오웰 에세이>(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한겨레출판 근간). ⓒ한겨레출판
추우면서도 공기는 탁한 침실 겸 거실. 담배꽁초와 반쯤 비운 찻잔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좀먹은 가운을 입은 남자가 쓰러질 듯한 탁자 앞에 앉아 먼지 쌓인 종이 더미 속에서 타자기 놓을 자리를 찾아내려고 한다. 그렇다고 종이들을 버릴 수는 없다. 쓰레기통이 벌써 넘쳐날뿐더러, 답장 못한 편지들과 아직 못낸 공과금 고지서들 사이에 현금으로 바꾸지 못한 게 거의 확실한 2기니짜리 수표가 끼어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주소록에다 주소를 옮겨 적어야 하는 편지들도 있다. 하지만 그는 주소록을 잃어버렸고, 그걸 찾을 생각을 하면(그뿐 아니라 무엇이든 찾을 생각을 하면) 극심한 자살 충동에 시달리게 된다.

그는 35세이지만 50세로 보인다. 대머리고 하지정맥류를 앓고 있으며 안경을 쓴다(하나뿐인 안경을 습관처럼 잃어버리지 않았다면 쓰고 있을 것이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영양실조 상태일 것이고, 최근에 반짝 운이 좋았다면 숙취로 힘들어 하고 있을 것이다. 때는 오전 11시 반, 계획대로라면 두 시간 전부터 일을 시작했어야 한다. 하지만 그래보려고 발버둥을 쳤다 한들 좌절하고 말았을 것이다. 거의 쉴 새 없이 전화벨이 울리고, 아기는 울어대고, 바깥의 길에선 전기드릴로 무언가를 뚫어대고, 계단에선 돈 받으러 오는 사람들이 발소리를 쿵쾅거리며 오르내렸던 것이다. 방금 전엔 두 번째로 우편배달이 왔는데, 광고 전단 둘과 빨간 글씨가 박힌 소득세 독촉장이었다.

이 사람은 말할 것도 없이 작가다. 그는 시인일 수도, 소설가일 수도, 시나리오 작가일 수도, 라디오 방송작가일 수도 있다. 글 써서 먹고사는 사람들이 대개 다 비슷하니 말이다. 하지만 여기선 서평자라고 하자. 종이 더미 속에는 묵직한 소포 꾸러미가 반쯤 감춰져 있고, 그 안에는 편집자의 쪽지 왈, '일맥상통'할 거라는 다섯 권의 책이 들어 있다.

그게 도착한 것은 나흘 전이었지만, 서평자는 48시간 동안 도덕성이 마비되었던 탓에 소포를 열어볼 수 없었다. 그리고 어제서야 굳게 마음먹은 일순간, 소포 끈을 확 풀어버리고 다섯 권의 책을 확인한 것이었다. <교차로의 팔레스타인>, <과학적인 낙농업>, <유럽 민주주의의 짧은 역사>(이 책은 680페이지에 무게가 4파운드였다), <포르투갈령 동아프리카의 부족 관습> 그리고 아마 실수로 포함됐을 <드러눕는 게 더 좋아>라는 소설이었다. 그의 서평은(800단어 분량이었다) 다음 날 정오까지 '입고(入稿)'되어야만 했다.

그중에 세 권은 그로서는 전혀 무지한 분야라서 적어도 50페이지는 읽어봐야 한다. 그래야 저자뿐만 아니라(물론 저자는 서평자의 습성을 훤히 알고 있다) 일반 독자에게까지 자신을 다 드러내 보이는 황당한 실수를 피할 수 있다. 오후 4시면 그는 책을 소포 꾸러미 밖으로 내놓긴 하겠지만 여전히 펼쳐볼 용기는 나지 않아 애를 먹고 있을 것이다. 그것들을 읽어야 한다는 생각만 해도, 심지어 종이 냄새만 맡아도, 아주까리기름 친 차가운 쌀 푸딩을 먹어야 하는 기분이다.

그런데도 그의 원고는 자못 신기하게도 제때 편집자의 책상에 도착할 것이다. 어떻게든 항상 정시까지 도착하는 것이다. 저녁 9시쯤 되면 정신이 비교적 맑아지기 시작할 것이고, 오밤중이 되도록 방에 앉아 (점점 추워지고 담배 연기는 점점 자욱해진다) 능숙한 솜씨로 책을 한 권씩 훑은 다음 하나를 내려놓을 때마다 '이걸 책이라고!' 소리를 덧붙일 것이다. 아침이면 퀭한 눈에 면도 안 한 얼굴로 고약한 표정을 짓고서 빈 종이를 한두 시간 바라보고만 있다가, 시곗바늘의 위협에 겁을 집어먹고 행동을 개시할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는 갑자기 타자기를 마구 두드리기 시작한다. 온갖 진부하고 상투적인 표현들이('놓칠 수 없는 책'이니 '페이지마다 되새길 만한 것이 있다'느니 '무엇무엇을 다룬 무슨 장이 특히 중요하다'느니) 자석을 따라 움직이는 쇳가루처럼 척척 제자리로 뛰어든다. 그리고 서평자는 원고를 들고 나서야 할 때를 3분쯤 남겨두고 정확한 분량으로 마친다. 그리고 그사이 어울리지 않는 조합의 시시한 책들이 우편으로 또 도착해 있을 것이다. 그렇게 같은 일은 또 반복된다. 하지만 이렇게 심신을 고문당하고 짓밟히는 이도 불과 몇 년 전에는 고상한 포부를 품고서 이 일을 시작했다.

내가 과장하는 것 같은가? 정기적으로 서평을 하는 사람이라면(이를테면 1년에 최소한 백 권 이상의 책을 논평하는 이라면) 누구에게든 묻고 싶다. 방금 내가 묘사한 스타일과 다르다고 정직하게 말할 수 있느냐고. 어쨌든 모든 작가가 대체로 그런 종류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책을 무차별적으로 평하는 일을 오랫동안 한다는 건 유난히 달갑지 않고 짜증스럽고 피곤한 노릇이다. 그것은 쓰레기를 칭찬하는 일일 뿐 아니라(조금 뒤에 다시 얘기하겠지만 정말 그렇다) 그냥 두면 아무 감흥도 불러일으키지 않을 책에 대한 반응을 계속해서 '날조'해내는 작업이기도 하다.

아무리 지겨워한다 해도 서평자는 책에 대한 관심이 각별한 사람이며, 매년 수천 권씩 쏟아지는 책 중에 쉰 권이나 백 권쯤에 대해서는 기꺼이 서평을 쓰고 싶어 한다. 업계 최고 수준인 사람이라면 열 권에서 스무 권 정도를 택할 것이며, 두세 권만 꼽을 수도 있다. 그 나머지 일은 아무리 양심적으로 칭찬을 하든 욕을 하든, 본질적으로 사기다. 그는 자신의 불멸의 영혼을 하수구로, 그것도 한 번에 반 파인트씩 흘려보내는 셈이다.

서평자들 대다수는 자신이 소개하는 책에 대해 부적절하거나 오도하는 논평을 하게 된다. 전쟁(제2차 세계 대전 : 주) 이후로 출판사들은 전보다 신문이나 잡지의 문학 담당자들의 비위를 거스르는 것도, 내는 책마다 한바탕 찬가를 불러일으키는 것도 어렵게 되었다. 그런가 하면 부족해진 지면과 다른 불편한 문제로 인해 서평의 수준이 떨어지게 되었다. 그런 현상을 지켜보며 사람들은 서평을 꾼들한테 안 맡기면 해결이 되지 않겠느냐고 말하곤 한다. 전문서야 전문가가 서평을 해야겠지만 그 나머지 상당수의 서평, 특히 소설의 경우엔 아마추어가 나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거의 모든 책은 이런저런 독자에게 열띤 감흥을 불러일으킬 수 있으며(격렬한 반감일 수도 있지만), 그들의 생각은 시큰둥한 전문 필자보다 확실히 값질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편집자들 모두가 알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하기는 대단히 어렵다. 그래서 현실적으로 편집자는 언제나 자신이 관리하는 일군의 꾼들, 즉 업계 용어로 '선수들'을 다시 찾게 되는 것이다.

모든 책이 서평을 받을 가치가 있다고 당연시하는 한, 어떤 문제도 해결되기 어렵다. 아무 책이나 닥치는 대로 서평을 하다보면 대부분의 책에 대해 과찬하지 않는다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 책과 일종의 직업적인 관계를 맺고 보면 대부분의 책이 얼마나 형편없는 것인지를 알게 된다. 객관적이고 참된 비평은 열에 아홉은 '이 책은 쓸모없다'일 것이며, 서평자의 본심은 '나는 이 책에 아무 흥미도 못 느끼기에 돈 때문이 아니면 이 책에 대한 글을 쓰지 않을 것이다' 일 것이다.

하지만 대중은 그런 책을 돈 주고 사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럴 이유가 있겠는가? 그들은 어떤 책을 읽어보라는 권유와 안내를 원하며, 어떤 식의 평가를 원한다. 그러나 가치의 문제가 언급되자마자 평가의 기준은 무너져버리고 만다. <리어 왕>은 좋은 희곡이고 <4인의 의인>(<The Four Just Men>(1905). 영국 작가 에드가 월러스(Edgar Wallace)의 탐정소설 : 주)은 좋은 스릴러라고 말한다면 '좋다'는 말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지만 서평자라면 누구나 이런 유의 말을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씩은 한다.

내가 보기에 최선의 방법은 대부분의 책은 그냥 무시해버리고 중요해 보이는 소수의 책에 아주 긴(최소한 1천 단어는 되게) 서평을 쓰도록 하는 것이다. 곧 나올 신간 서적에 대해 한두 줄 정도의 짧은 소개를 해주는 건 유익할 수 있되, 흔히 하듯 600단어 정도의 중간 길이로 쓰는 서평은 서평자가 정말 원하는 작업이라 해도 무익한 것이 되기 마련이다.

서평자는 대개 그런 글은 쓰고 싶어 하지 않으며, 매주 자잘한 서평만 쓰다보면 이 글 앞머리에 나오는, 가운 차림으로 고문당하는 사람 신세가 되고 만다. 그러나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는 낮잡아 볼 수 있는 누군가가 있게 마련이니, 두 가지 업을 다 해본 입장에서 말하건대 서평자는 영화평론가보다는 낫다. 영화평론가는 집에서 일할 수도 없고,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오전 11시면 시사회에 참석해야 하며, 한 잔의 싸구려 셰리주 값에 자신의 명예를 팔아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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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도킨스가 1976년 펴낸 <이기적 유전자>는 과학책 중에서 몇 안 되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다. 국내에서는 1993년 을유문화사에서 출간되었다. 많은 독자들이 17년간 이 책을 찾았으나 반응은 냉담했다. 이 책의 곳곳에서 많은 번역 오류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최근 이 책을 펴낸 을유문화사가 전면 개정판을 내놓았다. <이기적 유전자 : 2010년 전면 개정판>(홍영남·이상임 옮김, 을유문화사 펴냄). 개정판에서는 그간 지적된 많은 오류가 시정되었으나, "전면 개정"을 내세운 책 치고는 여전히 아쉬움이 많다는 게 과학계와 출판계 안팎의 평이다.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도킨스의 책을 비롯한 많은 과학책을 번역한 이한음 씨가 과학책 번역에 대한 단상을 정리했다. <편집자>

번역의 어려움

번역 일을 한다는 생각조차 아예 없던 대학생 때의 일이 떠오른다. 수강생이 기껏해야 열 명이 채 안 되는 전공 과목이었다. 교재는 교수님이 직접 번역한 책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번역서로 전공 과목을 공부하는 것은 이공계 쪽에서는 특이한 일이었다. 늘 영어 원서만 보던 터라 번역서를 보니 한편으로는 신선하기도 했다.

책을 펼치면 그저 토씨와 형용사, 부사 같은 것만 한글로 바꾼 문장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래도 한글을 본다는 것이 어딘가. 생물학 전공 서적이 그렇듯이 문장마다 온갖 생화학 물질의 이름이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데, 그것까지 우리말로 바꾸면 오히려 불편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내용과 별 관계없는 토씨 같은 것만 옮기는 수밖에.

하지만 막상 책을 읽기 시작하니, 읽히지가 않았다. 토씨조차 제대로 번역이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교수님도 그렇다는 것을 아신 모양이다. 멋쩍은 어투로 말씀하셨다. "이게 좀 팔리는 책이라면 개정판을 내고 싶지만, 1년에 겨우 몇 명 사 보는 책이라서…." 표지는 양장본이어서 책 꼴은 갖추긴 했지만, 당시 주로 원서를 복사하여 찍어내던 출판사에서 나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니 아마 교정이고 뭐고 없었을 것이다.

별 것 아닌 이 일화가 왜 기억에 남아 있는지는 몰라도, 훗날 나는 번역을 하면서 똑같은 상황을 접하곤 했다. 어려운 전공 용어를 우리말로 옮길 때의 문제, 번역 오류와 개정판, 교정의 문제 등등.

게놈, 지놈, 유전체


▲ <이기적 유전자 : 전면 개정판>(리처드 도킨스 지음, 홍영남·이상임 옮김, 을유문화사 펴냄). ⓒ을유문화사
전공 용어를 우리말로 옮기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문제만 해결되면 과학책 번역이 절반은 쉬워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이공계 전공 용어의 번역어는 사실 우리말이 아니라 일본말이었다. 일본 번역서에 적힌 단어를 그대로 옮긴 것이었고, 아예 영어 원서가 아니라 일본어 번역본을 보고 번역한 사례도 많았다.

필자는 그런 시대가 끝날 무렵에 번역 일을 시작했기에, 같은 시기의 번역자들과 마찬가지로 적절한 한글 용어를 찾느라 고심했다. 하지만 전문 용어란 본래 그 분야 전문가들의 많은 논의를 거쳐 정착되는 것이 순리이지, 번역자가 앞장선다고 될 일은 아니다. 다만 의견 제시 수준이라고 할 수는 있겠다. 아무튼 번역자들의 그런 우리말 용어 만들기 노력이 시대 흐름과 연결되어 한글 용어 확산에 기여를 한 것은 분명하다. 책을 소개하거나 관련 내용을 알리는 언론 기사에 그 용어가 그대로 쓰이곤 한 점도 한몫 했을 것이다.

얄궂게도 그토록 바라던 우리말 찾기 노력이 확산되자, 번역자에게는 또 다른 골치 아픈 문제가 생겼다. 분야별로 저마다 한글화 노력에 힘을 쏟다보니, 한 용어에 여러 한글 번역어가 제시되는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게다가 한편에서는 세계 추세에 맞게 기존의 용어를 영어 발음에 가깝게 고치자는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요즘 들어 널리 쓰이는 용어인 유전체(genome)는 원래 독일에서 나온 말이라 게놈이라고 적어 왔다. 그런데 지금 해외에서는 영어식으로 지놈이라고 발음하고 있으니 지놈이라고 표기하자는 식이다. 필자는 논란에 휘말리기 싫어서 아예 유전체라고 옮긴다.

일하면서 느낀 바에 따르면, 의학계와 물리학계가 한글화 노력에 가장 힘쓰고 있으며, 화학계는 영어 원음 표기에 충실하자는 쪽이고, 농업계는 아직 일본 용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생물학계는 이 문제에 별 관심이 없다. 물론 이것은 개인적으로 받은 인상을 기준으로 평한 것이다.

실제 과학계는 실험과 연구를 하는 곳이며, 용어의 한글화는 과학자의 본업이 아니다. 전문 용어의 한글화 작업은 각 분야의 과학자들 중 극히 일부가 맡아서 하고 있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또 병원을 찾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경험하듯이, 의학 용어를 한글화했다고 해서 그 용어가 반드시 의사들 사이에 널리 쓰이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용어의 한글화 작업도 분야마다 현실과 이상 사이의 거리가 제각기 다르다.

게다가 출판사마다 자신들이 원래 써 오던 용어 표기 방식이 있다. 따라서 한 번역자가 옮겼어도 책마다 서로 다른 용어로 번역되기도 한다. 독자가 한 번역자의 책을 놓고 비교한다면, 번역자가 변덕을 부렸군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박물학자, 자연주의자, 자연학자

일을 하다 보면 독자와 번역자 사이의 시대적 거리를 보여주는 사례도 종종 접한다. 언제인가 독자가 인터넷에서 어느 책에 댓글을 단 것을 보았는데, 내츄럴리스트(naturalist)를 자연학자라고 잘못 옮겼다고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박물학자가 올바른 번역어라는 것이다.

말 그대로 박물학, 즉 식물이든 동물이든 화석이든 지질을 보여주는 돌이든, 자연의 만물에 많은 관심을 쏟던 시대가 있었다. 서양인이 아직 세계를 다 살펴보기 전, 외부 세계에 혹해 탐험에 나서던 시대였다. 그 시대에 오지를 쏘다니면서 활약한 인물들을 박물학자라고 부르는 것은 무리가 없다. 찰스 다윈도 본래 박물학자였다. 그리고 그들을 일컫는 용어가 바로 내츄럴리스트였다.

하지만 시대는 변하기 마련이며, 이제 과학계에 연구자로서의 박물학자는 없다. 어느 한 분야의 전공자만 있을 뿐이다. 하지만 내츄럴리스트라는 용어는 아직도 쓰인다. 자연을 연구하는 사람이라는 일반적인 의미로서 말이다. 그런 사람을 박물학자로 옮기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그래서 에드워드 윌슨의 자서전인 <Naturalist>는 "자연주의자"라는 우리말 제목을 달았다.

필자는 보통 그 원어를 자연학자라고 옮긴다. 하지만 일반 독자는 으레 박물학자라고 옮긴다. 아마 주된 이유는 대다수 영한사전에 그 용어가 박물학자라고 적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사전부터 시대에 맞게 고쳐야 하겠지만, 온라인 시대에 사전 편찬은 더 이상 수익이 남는 일이 아니다. 저 유명한 옥스퍼드 사전도 더 이상 인쇄본을 발간하지 않겠다는 기사가 나오지 않았던가. 종이 사전을 그대로 전자 기기에 옮긴 사전도 시대착오적인 내용이 많긴 마찬가지이다. 그러니 어쩌면 독자와 번역자 사이의 소통이라는 측면에서는 위키피디아 같은 만인이 만인을 위해 편집하는 사전이 유일한 해결책일 수도 있겠다. 한글 항목이 금방 눈에 띄게 늘어날 것 같지는 않다는 점이 문제겠지만.

아무튼 번역어도 시대에 따라 변한다. 최근에 한글 개정판이 나온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보면, 세월의 흐름에 따라 용어가 변한 사례를 여럿 찾아볼 수 있다. '다위니즘'이 '다윈주의'로, '그룹 선택설'이 '집단 선택설'로, '지배 유전자'가 '마스터 유전자'로 바뀌었다.

한편, 거꾸로 설익은 한글화 시도가 혼란을 일으키는 사례도 있다. 영어의 '크라운(crown)'은 나무 꼭대기를 가리키는 용어이다. 나무 꼭대기가 마치 왕관을 쓴 모양을 연상시키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일 수 있다. 이 용어는 수관(樹冠)이라는 한자어로 번역된다. 하지만 수관은 쉽게 와 닿지 않는 용어라서, 대개 한 번은 풀어써야 한다.

이런 일이 마뜩치 않기에, 늘 적절한 대체 용어를 고심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국립국어원의 온라인 표준국어대사전 사이트에 수관의 순화 용어가 '나무갓'이라는 설명이 등장했다. 나무가 갓을 쓴 모양이라! 딱 맞는 용어인 듯했다. 그래서 몇 년째 그 용어를 책에 썼는데, 올해부터인가 표준국어대사전에서 그 용어 설명이 사라졌다. 대신 나무갓은 '나뭇갓'의 북한어이고, 나뭇갓은 '나무를 가꾸는 말림갓'이라는 설명이 실렸다. 사전 이용자로서는 영문 모를 항목 삭제이며, 결과적으로 사전에도 없는, 아니 엉뚱한 용어를 번역어로 썼으니 번역에 오류가 생긴 셈이다.

번역 오류 문제

오역은 번역자로서는 피해갈 수 없는 숙명과도 같다. 오역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필자는 '차라리 소설이나 쓰고 있을 걸 왜 하필 번역을 해서(소설가를 얕잡아보는 말이 절대 아니라, 그냥 사적인 푸념이라고 여기시기를)…'라고 한숨을 내쉬곤 한다.

사실 오역이 없는 책은 없다. 그저 오역된 부분이 많고 적을 뿐이다. 때로는 오역이 적은 책이 많은 독자를 만나 오역 문제가 크게 불거지기도 하고, 반면에 오역이 많은 책이 독자를 거의 못 만나서 오역 문제가 아예 제기되지 않기도 한다. 또 오역보다는 어색한 문장처럼 가독성을 심하게 떨어뜨리는 문제들을 오역이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리기도 한다.

아무튼 번역자의 입장에서는 오역을 줄이기 위해 최대한 노력하는 수밖에. 어떤 책이든 저자의 서문에 으레 실리는 문장이 있다. "그래도 혹시나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전적으로 저자의 책임이다"라는 내용이다. 아무리 노력한들, 번역서에도 같은 말을 할 수밖에 없다. 번역자가 아무리 책 내용을 다 꿰고 문장을 하나하나 다 알고 있다고 해도 오역은 생긴다.

사실 번역자와 편집자야말로 오역을 찾아내는 데 선수이다. 아마 오역 찾기 대회가 있다면, 우승자부터 죽 그들이 상위를 차지할 것이다. 하지만 책에 몰두하다 보면 잘못된 부분이 있어도 알아차리지 못한다. 어떤 별을 보고자 할 때 뚫어지게 그곳을 쳐다보면 보이지 않듯이. 아무리 정성껏 번역한 책이라고 해도, 훗날 다시 읽으면 그때 몰랐던 오역이 보인다.

물론 책을 내는 과정에는 오역을 바로잡는 단계가 있다. 바로 교정이다. 출판사에서 편집자가 교정을 보고 번역자가 다시 교정을 본다. 그 과정에서 잘못된 부분이 많이 바로잡히기도 한다. 하지만 이 과정도 완벽하지는 않다. 번역자와 편집자 둘 다 잘못된 부분을 못 찾아낼 수도 있고, 편집자가 잘못 고친 부분이 역자의 눈에 안 띌 수도 있다.

따라서 사실 번역은 번역자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 번역자와 편집자의 공동 작업의 산물이라고나 할까. 그 과정을 충실히 거칠수록 오역은 줄어든다. 내친 김에 말하자면, 필자의 번역서 중 가장 오역으로 욕을 많이 먹은 두 권은 사실 필자의 교정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 출판사가 출간 일정에 맞추느라 역자의 교정 과정을 생략하고 제멋대로 고쳐 냈기 때문이다. 그래도 필자 이름이 떡 하니 표지에 나와 있으니, 번역자의 업보라고 생각할 수밖에.

오역의 더 큰 원인은 아마 번역자의 역량 부족일 것이다. 번역자가 아무리 뛰어난들, 저자보다 더 뛰어날 수는 없다. 설령 저자와 번역자의 전공이 같다고 해도 저자가 쓴 내용을 번역자가 다 알 수는 없다. 책은 저자 나름의 생각의 산물이므로.

필자도 100권이 넘는 과학책을 번역했고, 이제 웬만한 책에 실린 내용은 겉핥기라도 한번쯤 접했다고 나름대로 생각하지만, 그래도 번역하기는 쉽지 않다. 어떤 책이든 저자 나름의 관점에서 해석한 부분이 있으며, 그것이 책의 핵심 내용인데 때로 옮기기가 까다롭기 때문이다. 그 부분에서 오역이 생기기 쉽다. 게다가 새 책에는 최신 연구 자료가 실리게 마련이다. 공부하지 않으면 번역도 힘들다.

그래도 온라인 시대로 오면서 나아진 점이 있다. 지금은 저자에게 전자우편을 보낼 수도 있고, 인터넷을 통해 얼마든지 관련 자료를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의 한 책에는 앞뒤를 끊어먹고 쓴 듯한 뜬금없이 튀어나온 문장이 있었다. 도저히 알 수가 없어 인터넷에서 자료를 검색하다 보니, 저자가 어느 사이트에 기고한 글이 있었다. 저자 자신도 알아차렸는지, 그 문장을 부연 설명해 놓은 내용이었다. 그래서 필자는 인터넷 이전 시대에 번역한 책들은 전부 재번역이 필요하다고 농담하곤 한다. 그때와 지금은 참조할 수 있는 자료의 양이 하늘과 땅 차이이니까. 노력한 만큼 오역이 줄어들 환경이 마련되어 있는 셈이다.

이 부분에서 독자의 호통이 나오게 마련이다. 노력한 만큼 오역이 줄어든다면 왜 그만큼 노력을 하지 않아서 오역이 눈에 띄게 많은 책을 내놓는가? 이 호통에는 번역자라면 으레 하는 답을 할 수밖에. 번역도 직업인지라, 보수를 받은 만큼 성과가 나온다고 말이다. 출판계에서는 흔히 말한다. 종이 값, 인쇄 값 등 각종 물가는 수십 년 사이에 몇 배, 심하면 수십 배까지 올랐지만, 번역료는 그대로라고. 게다가 책이 안 팔리는 시대이니, 인세로 책 팔아서 몇 푼 더 벌기도 쉽지 않다. 그 부족한 부분을 과학자와 독자를 잇는 다리 역할을 한다는 사명감이 채운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기에.

또 하나 나아진 점은 이제 독자가 오역을 바로잡는 일에 큰 역할을 할 환경이 마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예전 대학생일 때는 머리를 아무리 쥐어뜯어도 이해되지 않는 책이 많았다. 그저 머리가 나빠 이해하지 못한 탓으로 돌렸던 그 책들이 오역의 산물임을, 그 시대를 산 사람들은 뒤늦게 알아차렸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인터넷과 통신 기술 덕분에 이제는 오역 여부를 언제든지 묻고 답하고 바로잡을 수 있다. 최근에 나온 <이기적 유전자>의 한글 전면 개정판도 그런 소통의 산물이다. 하지만 번역자의 바람은 같을 것이다. 다 좋긴 한데…우선 책이 많이 팔리고, 새로 고치고 노력한 만큼 나도 좀 더 벌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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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를 위한 반론

3년 전부터 기획하고 준비한 진화론 관련 대담집을 이번에 겨우 출간하게 되었다. <찰스 다윈, 한국의 학자를 만나다>(휴머니스트 펴냄)라는 제목으로, 역사학자 임지현, 생물학자 전방욱, 인문의학자 강신익, 동양철학자 김시천, 4명의 학자와 대담한 내용을 실은 책이다. 신간이 나오면 서평이 따라 나오듯 이번에 장대익 선생의 서평을 접하게 되었다.

원래 서평이란 비평을 기반에 둔 것이어서 내용을 객관적으로 판단하여 비판적으로 쓰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프레시안>에 실린 이번 장대익 선생의 서평은 비판을 넘어서 편협한 시각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이 책의 내용을 책임질 필자가 나서서 서평자의 편협한 시각을 지적하고 싶었다. 서평자가 말했듯이 독자를 위해서 말이다.

필자는 생물학에 관련한 공부를 하고 있지만 생물학자가 아닌 철학자의 분류에 속한다. 그 말은 일선의 과학자가 아니라 과학을 해석하고 비평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런 류의 지식인 그룹을 인문학자이면서 동시에 메타과학자라고 할 수 있다. 이른바 과학철학자나 과학사회학자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서평을 쓴 장대익 선생도 마찬가지다.

메타과학자들은 과학을 해석할 수 있지만 일선의 현장 과학을 이끌어 갈 수 없다.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 현장 과학은 항상 사실의 세계를 추구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장 과학자가 획득한 사실이 반드시 사실이어야 한다는 것은 억지이다. 과학자 스스로 자신의 과학적 성과가 깨지지 않을 진리라고 주장하는 순간, 그 주장은 과학이 아니라 사이비 지식에 해당한다. 우리들은 황우석 사태를 통해 그런 사이비 과학의 오류를 접했던 쓰라린 경험이 있다.

또한 다른 방식으로 현장 과학을 해석하는 메타과학은 진실 여부를 난도질해 한마디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 인문학은 과학과 달리 해석의 가능성을 풍부하게 담고 있다. 과학은 사실의 세계를 일차적으로 다룬다. 반면 과학에 대한 인문학적 해석은 사실을 직접 대면하지 않지만 사실을 다루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다양성과 창조성을 발효시키는 지식의 효소이다.

장대익 선생의 서평에는 자신의 시각만이 사실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배어 있어, 이 책 속에서 다룬 해석의 발효가 담겨져 있지 않았다. 일부러 무시하려 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의 서평 전반부는 실증 자료의 검색 수준이었다. 나는 그가 지적한 사실 관계의 오류들을 전적으로 인정하며 수용한다. 외삼촌이 아니라 외할아버지라든가, 이빨이 아니라 이빨과 발톱이라든가, 부인의 도움이 아니라 외가의 도움이라든가, 140억 년이 아니라 45억 년이라든가 등의 지적은 전체 원고를 완전하게 감수하지 못한 필자의 전적인 책임이다.

필자가 반론을 제기하는 점은 진화론을 바라보는 서평자의 시각에 있다. 교양 과학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그 누구라도 생물학이 다른 여타의 개별 과학과 달리 사회적 상관성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인정하게 된다. 거창한 세계 혹은 우주를 다루는 물리학과 달리 생물학은 일상의 주변 생물이나 인간을 다루기 때문이다.

생물학은 과학이기는 하지만 인간을 다루기 때문에 사회적인 섭동 현상이 두드러진다는 뜻이다. 배아 복제와 같은 어려운 과학 용어가 일상적인 지식이 되기도 하며 나치의 참혹한 대학살이 생물학적 우생학과 관련된다는 말을 매스컴에서 간혹 듣기도 한다. 이러한 사회적 논란들이 바로 사회생물학이라는 표제어로 엮어지고 있다.

상대 수혜 과장의 오류


▲ <찰스 다윈, 한국의 학자를 만나다>(최종덕 지음, 휴머니스트 펴냄). ⓒ휴머니스트
서평자는 이 책에서 대화한 사회생물학의 비판적 논의를 가장 문제 삼아 역비판하고 나선다. 서평자는 그런 비난을 하기 위하여 몇몇 논리적 설정을 하였다. 먼저 사회생물학을 비판적으로 보는 사회과학 성향의 그룹이 생물학 관련한 지식 지도의 대세라고 무작정 가정하였다. 그래서 사회생물학을 비판하는 다수의 세력이 사회생물학을 옹호하는 소수의 세력을 편향적으로 곤혹스럽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 서평자의 입장이다.

이런 식의 논리는 상대를 비난하기 위한 전형적인 말투에 해당한다. "요즘 여권이니 평등이니 뭐니 해서, 우리 같은 남자들이 정말 힘들어서 못 살겠어", "지방 분권이니 하도 떠들어대니 요즘은 정말 중앙 역차별이 심해 서울서 살기 힘들어" 이런 투의 말들이 우리 주변에 횡행한다. 최근 들어 그것도 아주 조금씩이나마 늘어나기 시작한 성 평등 의식이나 지역 균형 행정을 싹부터 싹둑 잘라내자는 생각들이다. 상대가 수혜 받고 있는 최소한의 혜택을 확대 과장 표현하여 상대를 부당한 위치로 몰고 가는 방법이다.

다른 예를 들어 보자. 연봉이 8000만 원을 넘어선 일부 노동자 그룹이 있을 때, 기득권자는 노동자 전체가 관리직보다 연봉이 더 높아서 한국 경제가 무너지게 되었다고 엄살을 극대화한다. 온갖 엄살과 왜곡을 노동자 전체에게 투영함으로써 생산 부문 한국 산업 시장의 구조가 급격히 위축되고 있다는 둥 위협적인 논리를 동원하기도 한다.

좀 엉뚱한 비유로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가 실제로 메타과학의 해석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위험이 있다. 현장의 일선 과학계에는 생물학적 결정론, 좀 더 선정적 표현으로는 DNA 결정론이 단연 지배적이며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이런 당연한 현실을 모른 체하고, 과학 결정론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몇몇 지식인 그룹이 이 세상의 지식을 독점한다고 거꾸로 비난한다면, 과학기술의 실질적인 발전에도 도움이 안 된다.

과학을 보는 선형적이며 단면적 시선은 정말 현대 과학 지식의 대세인 기계론적 사유 방식이나 결정론적 의식 구조에서 드러난다. 서평에서 적시된 굴드나 르원틴 같은 학자들의 목소리는 세계적으로나 한국에서 아주 제한된 수준으로 논의되는 소수인데도 불구하고, 서평자는 이런 사실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왜곡하고 있다. 학계에서 굴드나 르윈틴이 진화생물학의 다수 그룹이라고 평가한다면, 그런 말은 정말 해도 너무 한 왜곡이다.

나는 서평자 장대익 선생이 그렇게까지 사실을 모를 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결국 손해 보는 것은 그런 서평을 무심코 읽는 일반 독자들이다. 사회생물학을 보는 테두리를 국내로 좁혀보자. 구체적인 이름을 들먹이자. 사회생물학을 비판적으로 보는 학자라고 많이 알려진 사람들은 기껏해야 김환석, 김동광 그리고 소수의 사회과학자들, 그리고 이 책의 대담자인 강신익이나 전방욱 그 외 몇몇 자연과학 관련 학자들이 있다.

세계적으로 볼 경우, 2002년 스티븐 굴드가 죽은 이후 이런 비판 지식인 그룹조차 급속하게 희미해져 가는 상황이다. 그런 지식 구도의 상황에서 소수의 비판들을 다수의 횡포라고 거꾸로 말하는 것은 상대의 기본 입장을 호도하여 상대 논리를 허구 수준으로 끌어내리려는 전형적인 방법이다.

서평자는 편의상 A팀과 B팀으로 나누어 한 편을 나쁜 놈, 다른 편을 '좋은 녀석들' 등으로 분류하는 것이 이 책의 큰 흐름이라고 하는데, 그런 서평자의 시각은 상대의 이익 구조를 확대하여 상대가 지나치게, 그것도 과분한 혜택을 받고 있으므로 그런 과대한 혜택을 받는 상대의 입장이 부당하다는 과대 논리에 기반을 뒀다. 나는 이런 논리를 '상대 수혜 과장의 오류'라고 보통 부른다.

현장 과학자가 갖는 과학 결정론의 생각들은 어쩌면 당연할 수 있다. 그런 생각은 플라톤에서 뉴턴을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과학 기초론 및 과학적 인식론의 토대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연과학 탐구 방법론에서 과학적 결정론을 무조건 무시하고 과학을 우연의 인식론으로 간주하면 안 된다. 이런 오판은 1970년대 신과학 운동에서 이미 발생했었음을 잘 알고 있다. 자연과학을 해석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과학의 결정론적 사유 구조를 순수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단지 과학의 결정론적 사유가 현실 사회에 적용되어 사회결정론으로 탈바꿈되는 역사의 오류를 직시하고 비판해야 한다는 점이다. 후자에 대하여 사회과학자들이 나섰다는 점은 오히려 다행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사회생물학자 및 관련 실증주의 해석학자들은 이러한 사회과학적 비판에 대하여 심한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다.

과학의 결정론적 사유 구조는 오히려 자연과학의 가장 큰 긍정적 측면임을 받아들여야 한다. 동시에 자연과학이 사람들의 손에 의해 작동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쉽게 말해서 자연과학적 성과들이 가치중립적이라는 명제를 빨리 버려야 한다는 점이다. 가치중립성 논제는 이미 오래되고 수없이 반복된 이야기지만 여전히 많은 논란을 일으킨다. 가치중립성 논제 그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과학 결정론이 사회결정론으로 탈바꿈되는데 있어서 가치중립성 주장이 그 이론적 뒷받침을 한다는 데 있다.

이점에서 과학은 비판의 여과지를 통과해야 한다. 특히 생물학 분야는 더욱 그렇다. 그래서 메타과학자들은 과학 지식의 태생을 긍정적 시선과 함께 비판적 시선으로 보는 눈을 키워야 한다. 이 책 <찰스다윈, 한국의 학자를 만나다>에서 바로 그런 양면의 시선을 보여주고자 했다. 그러나 서평자는 거의 일방적으로 이 책을 한 쪽의 시선으로만 읽고 있었다.

철학적 사유의 필요성

서평자의 글 가운데 철학적으로 검토하지 않고 겉으로 드러난 말꼬리를 잡는데 주력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 중 하나는 다윈과 라마르크의 관계이다. 분명히 다윈의 진화론과 라마르크의 진화론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그 둘 사이에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다윈은 기존의 비과학적 진화론과 질적으로 다른 라마르크 진화론의 사유 구조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라마르크의 용불용설 때문이었다.

서평자의 매서운 지적처럼 다윈은 라마르크의 용불용설 이론을 무시할 수 없었다. 다윈의 후기 저작에 그런 라마르크 친화적 발언들이 간혹 나오는 것을 보면 이해할 수 있다. 대부분의 문자적 차원의 관련 지식인들은 다윈과 라마르크의 관계를 여기까지만 들여다보고 있다. 외연의 과학적 명제 이면에 배선된 철학적 존재론의 지평에 놓인 다윈과 라마르크의 결정적 차이를 보질 못하기 때문이다.

실은 <종의 기원> '자연선택' 4장만 들춰봐도 그 확연한 차이를 읽을 수 있다. 단지 철학적 사유가 연습되어야만 그 차이를 읽을 수 있다는 점이 문제다. 다윈은 라마르크 진화론의 한계가 용불용설이 아니었음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라마르크 진화론의 한계는 라마르크가 철저한 목적론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이다. 바로 이 점에서 다윈은 라마르크를 수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진화론에서 목적론이란 진화의 끝이 사전에 설정되었거나 설정될 수 있다는 믿음 체계를 뜻한다. 다윈 진화론의 요체는 변화의 존재론이다. 변화의 존재론은 기존 목적론이라는 형이상학적 지평선을 폐기하는 데서 비로소 가능하다. 라마르크 저서를 굳이 읽지 않더라도 <종의 기원> 4장을 읽었다면 다윈의 철학적 존재론에 접근할 수 있다. 진화의 목적점을 완전태 (towards perfection in all organic beings)에 설정한 라마르크의 입장을 다윈은 4장에서 비판하고 있다.

여러 생물학자들이 다윈과 라마르크의 유사성에만 초점을 두고 있다. 그 유사성의 기준이었던 용불용설 이론이 다윈의 마음을 흔들리게 만든 것도 사실이었다. 반면 목적론의 기준에서는 다윈과 라마르크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차이가 있었다. 생물학자라면 이런 존재론의 차이를 놓칠 수도 있다. 그러나 과학철학자가 이런 차이를 놓친다면, 그는 철학적 훈련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다. 철학적 사유는 추상적 형이상학의 유희가 아니다. 특히 과학에서 철학적 사유의 깊이는 과학의 성과를 더 상승시키는 실용적 가치가 있다. 철학은 과학 안에서 할 일이 더 많아지는 것이다.

서평자가 이 책을 처음부터 편견을 갖고 읽었다는 것은 그의 짧은 서평 원고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기독교와 진화론 사이에서 드러난 다윈의 심리적 갈등에 대한 부분이다. 서평자의 말 그대로 다윈은 죽기까지 교회와 자신의 진화론 사이에서 심한 세계관의 충돌과 심리적인 갈등 때문에 마음 아파했다. 심리적으로 해결하지 못한 채 말이다.

<종의 기원> 출간 이후 그런 심리적 갈등에도 불구하고 그가 지속적으로 동식물 연구에 몰입할 수 있었던 심리적 배경을 종교와 과학의 분리론이라고 필자는 표현했다. 다윈의 처 엠마와의 사랑을 존중하는 마음에서라도 다윈은 잠정적으로 자신의 과학적 세계관과 당대의 종교적 분위기를 심리적으로 떨어뜨려 놔야 했었다. 이런 역사적 현실과 달리 서평자는 이 책에서 거론된 심리적 분리 구조를 마치 이론적 분리설로 과장하여 해석한 듯하다. 그렇다면 서평자의 오해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된다.

이 책의 부제에서 보듯 진화론이 한국 사회에서 어떻게 재론되는지를 따져보자는 것이 이 책의 방향이기도 했다. 이 책 전체에서 다윈의 진화론이라는 과학이 한국의 문화적 상황에서 어떻게 반영되고 어떻게 선호되며 어떻게 반성되는지를 따지면서 대담을 끌어갔다. 그런데 서평자는 진화론을 공부하는 현존 학자군의 지식 분포도를 다루지 않았다고 생뚱맞게 뭐라한다. 전형적인 범주 오류를 일으킨 지적이다.

일반 독자를 위해 여기서 말하는 범주 오류(category mistake)가 무엇인지 간단히 설명하고 싶다. 범주 오류를 소개한 현대 철학자 길버트 라일의 예시를 통해서 말이다. 부산대학교를 방문한 방문자에게 인문관, 자연관, 도서관, 산학지원관 등, 교내 건물을 일일이 돌아다니면서 다 안내했는데도, 부산대학교가 어디에 있느냐는 질문을 방문자가 다시 하고 있다는 것이다. 라일은 범주 오류를 원래 캠퍼스 개념이 없는 영국 옥스포드 대학을 예시하여 설명했지만 결국 대학교라는 상위 범주와 대학교를 구성하는 하위 범주를 직접 비교할 수 없다는 간단한 논리적 제안을 한 셈이다.

서평자는 진화론이 한국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필자에게 해답을 요구하는 것인지 그 의중을 잘 모르겠다. 이 책은 과학 교과서가 아니라 인문학의 책이어서 그런 해답을 요구할 수 없음을 서평자도 잘 알 것으로 생각한다. 서평자의 글이 인간에 대한 질문, 역사에 대한 질문에 대하여 5명의 대담자들이 숙고한 대화 내용을 무시하고 지식 권력의 구조에만 관심을 둔 글쓰기였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이러한 생각이 잘못된 것이라면, 이에 대한 재반론을 서평자가 보여줘야 한다.


이 글은 지난 8월 27일 발행된 '프레시안 books' 5호에 실린 장대익 서울대학교 교수(자유전공학부)의 <찰스 다윈, 한국의 학자를 만나다> 서평에 대한 반론이다. (☞관련 기사 : 진화론 '제자백가'…다윈의 선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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