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여성의 섹스 이야기

20대 여자가 직접 쓴, 20대가 섹스하는 이야기. 2010년 제34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인 <제리>(김혜나 지음, 민음사 펴냄)를 한 문장으로 규정짓자면 이와 같다고 볼 수 있다.

나 자신도 20대이고, 남성이며, 문학의 창작이나 비평을 전문적으로 배우고 익히지 않은 사람으로서 어디까지나 조심스럽게 말할 수밖에 없는 처지이긴 하나, 최근 화제작인 <제리>를 논하기 위해서는 저 문장을 발화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이 책은 20대 여성이 쓴 20대가 섹스하는 이야기이며 바로 그런 이유로 문단에 의해 주목받았다.

'오늘의 작가상' 심사 위원의 심사평을 살펴보도록 하자. 문학평론가 김미현은 <제리>를 "21세기적 소비자본주의 사회에서 '루저'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청춘들에 대한 킨제이 보고서"라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이 소설에 등장하는 섹스는 "메타포가 아니라 리얼리티"이다. 다른 심사 위원의 평가도 비슷하다. 소설가 박성원은 "충격적이고, 반도덕적인 소설"이라고 <제리>를 평가한다. 문학평론가 강유정은 "노래방에서 남자 도우미들을 불러 선택하는 첫 장면부터 당혹"스러움을 느낀다.

실제로 이 소설에는 수많은 섹스 장면이 등장한다. 특히 주인공인 '나'의 남자 친구 혹은 섹스 파트너인 '강'과의 관계 장면에서 항문 성교가 등장하는 것은, 누군가에게는 충격적일 수 있을 것이다. 군인들이 음란물 대신 즐겨 읽는 하루키의 소설 <상실의 시대>가 국내 서점가 및 문학계를 휩쓸고 지나간 지 10년이 더 지난 현실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그렇다.

문학에 등장하는 섹스, 그 섹스의 묘사와 자극 등에 있어서 <제리>가 이루어낸 것은, 그 자체만 놓고 보면 그리 특별하거나 놀랄 만한 것은 아니다. 설령 소설의 주인공인 '나'의 "앞니가 귀두에 닿지 않도록 입술을 오므리고 혀끝으로 조심스레 성기를 감싸며 불알을 향해 내려갔다"(208쪽) 하더라도 말이다. 이미 한국의 독자들은 미도리가 와타나베의 성기를 애무하는 장면들을 거의 외우다시피 하고 있지 않은가.

따라서 이 소설에 대한, 이 작품에 등장하는 성적 묘사에 대한 논의 역시 한 단계 메타화될 수밖에 없다. 왜 하필 지금 이 시점에 '20대가 섹스하는 소설'이 등장하는가? 그리고 왜 한국의 문단과 언론은 바로 그런 소설에 주목하는가?

20대의 자기 식민지화


▲ <제리>(김혜나 지음, 민음사 펴냄). ⓒ민음사
<88만 원 세대>(레디앙 펴냄)의 공저자인 박권일과 결별한 후, 몇 권의 책을 더 쓴 우석훈은 <88만 원 세대>의 속편이라 할 수 있는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레디앙 펴냄)를 내놓았다. 전작에서 젊은이들에게 '바리케이드를 쌓고 짱돌을 던지라'고 요구했던 그는, 그 짱돌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해 '코코 샤넬과 같은 문화적 혁명'이라는 답을 돌려주었다.

비록 전작의 성공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우석훈 본인의 지속적인 활동과 맞물려 그러한 메시지 역시 현재의 '20대 담론'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제리> 역시 그렇다(고 나는 생각한다). 촛불 집회가 불거지던 국면에서 <88만 원 세대>의 메시지가 결국 '젊은 너희들이 시위에 앞장서지 않고 무엇하느냐'는 꾸중으로 이어졌듯이,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에서 역설한 20대 문화 생산자와 문화 혁명의 요구는 바로 이와 같은 형태의 결과물을 낳고 있는 것이다.

아르투르 랭보, 프랑수아 사강, 장뤼크 고다르 등등. 젊은 나이에 충격적인 작품을 만들어내 문화계의 지형을 뒤흔들고 인류의 정신세계에 큰 영향을 준 사람들의 이름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꼽아볼 수 있다. 그런데 그들이 살던 시대에, 그리고 지금까지도 우리가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은 단지 그들이 젊은 나이에 작품을 써냈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른바 '걸작'에 속할 만한 어떤 기준선이 있고, 그 기준선을 매우 이른 연령에 넘어섰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천재라고 부른다.

반면 현재의 '20대 문화 생산자'론은 그와 다르다. 20대 소설가도 '있어야' 하고, 20대 영화감독도 '있어야' 하며, 20대 철학자도 '필요하다'는 식으로 논의가 곡해되어 유통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20대 창작자의 존재는 기존의 흐름에서 도출 혹은 돌출되는 것이 아니다. 장려되고 육성되어야 할 무언가로 격하되어 있다. 즉 현재의 20대 담론에서 '20대 창작자'는 차라리 박정희 시대의 수출 기업과도 유사한 개념인 것이다.

그 지점에서 20대는 창작의 주체이면서 동시에 그 창작물의 객체가 되어야만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20대 담론'이라는 큰 흐름을 거스르지 않는다면 그렇다. 20대의 목소리를 들어야 하고 발굴해야 한다는 당위에 사로잡힌 기성세대를 전제로 놓고 본다면, 어쨌건 본인의 성과물로 공정한 평가를 받고 싶은 20대 창작자가 택할 수 있는 소재는 결국 '우리 20대의 이야기'로 수렴될 수밖에 없다. 이미 출판계에는 비슷한 콘셉트의 단행본이 몇 종 출간되어 있다. 20대 필자를 발굴하는 게 요즘 트랜드라는군, 게다가 요즘 20대 이야기 많이들 하잖아? 그럼 20대에게 20대 이야기를 시키면 되겠네. 기획회의 끝.

그러한 맥락을 놓고 볼 때 <제리>의 '오늘의 작가상' 수상 및 출간은 전혀 놀랍거나 생경한 일이 아니다. 심사평의 말처럼 "독자가 경험하지 못한 이상하고도 낯선 세계의 존재를 예감케" 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이 소설의 출현은 현재의 20대 담론이 생산되고 소비되는 방식을, 그 친숙한 세계의 존재를 절감케 한다. 다소 과격하게 표현하자면, 20대의 자기 식민지화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엄마'의 입을 틀어막은 까닭은…

백인들이 범선을 타고 아프리카로 내려올 때, 그들은 어떻게 흑인들을 잡아서 노예선에 태울 수 있었을까? 무작정 보이는 사람들을 총으로 쏘고 죽이고 쇠사슬에 묶었으리라고 우리는 곧잘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 주로 해안에 사는, 부유하고 군사적으로 강한 흑인 부족들이 내륙에 사는 다른 흑인들과 전쟁을 벌여 그들을 포로로 잡았다. 바로 그 포로들을 위스키, 금, 화약 등과 거래하면서 노예 무역이 성립한 것이다. 아프리카 식민 지배의 역사는 원주민들 사이의 내전의 역사이기도 하다.

지나친 비유일 수 있지만, 뚜렷한 담론적 해법이 도출되고 있지 않은 가운데, 20대 담론의 진행 과정도 이와 유사해지고 있다. 20대에게 20대의 이야기를 묻는 것. 그 자체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일이지만, 그 과정에서 20대가 스스로를 바라보고 이해하고 묻는 내부적인 사유의 메커니즘이 온전하게 성립할 것을 기대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20대가 쓰는 20대 이야기'의 실제 소비자는 결국, 그 담론의 구조를 만들고 세부적인 이야기를 주문하는 사람들일 것이며, 압박 면접과 심층 토론으로 단련된 20대는 그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헤겔식으로 말하자면, 자아를 확인하고 정립하기 위해서는 타자를 탐색하고 그에 몰두해야 한다. 20대가 스스로를 확인하고 정립하기 위해서는 20대 스스로에 대한 동어반복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들이 속해 있고 살아가고 맞닥뜨려야 하는 세상 그 자체에 대해 탐구하고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앞서 말한 젊은 천재들의 작품들은 전부, 설령 그들이 젊은이를 주인공으로 삼고 있다 하더라도, 그와 같은 보편적인 지평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것들이다. 그들은 세상에 20대를 '보여주기' 위해 작품을 쓰지 않았다. 20대가 '바라보는' 세상을, 스스로가 납득할 수 있는 수준의 작품에 담아내기 위해 노력했을 뿐이다.

그러한 차원에서 볼 때 <제리>는 실패하고 있다. 작품에 등장하는 20대는 모두 술집에서 술을 마시며 서로의 꿈이 뭐냐고 물어보고 모텔에서 섹스를 한다. 서로의 존재로 이루어진 비누 거품 속에 살고 있는 그들의 모습을 그려내는 것이 작가의 의도 중 하나이므로 그 자체를 비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진정으로 자아가 드러나는 순간은 그 거품 속으로 이질적인 무언가가 틈입되는 순간이다. 바로 그 지점에서 <제리>는 세계와의 대면이 아닌 도피를 택한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해보자.

소설의 주인공인 '나'는 인천의 전문대에 다니는, 그것도 재수해서 들어간 학생이다. 그는 특별한 수입원을 가지고 있지 않고, 그래서 제리를 다시 불러내기 위해 필요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 '강'의 지갑에 손을 대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매일 술을 마시며 용돈을 탕진한다. 용돈? 그렇다. '나'는 부모님의 집에 살며 용돈을 받는 대학생이다. 바로 그것이 소설의 화자가 놓인 유물론적 조건이라는 것은 소설의 초반에 드러난다.

우석훈·박권일의 책 <88만 원 세대>의 첫 장이 '첫 섹스의 경제학'이었다는 것, 즉 연인과 성관계를 하기 위해서는 모텔에 들어가야만 하는 젊은이들의 경제적 조건에 주목했다는 점을 이 지점에서 새삼스럽게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독립된 주거 환경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은 섹스를 할 때마다 모텔비를 내야 한다는 것과 함께, 섹스를 하고 외박을 할 때마다 '부모', 좀 더 구체적으로는 집에서 기다리고 계신 '엄마'의 존재를 상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20대 소설'이 그런 지점을 다뤄야 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사회적·경제적 독립을 이루지 못하고 방황하는 청춘의 이야기를 다룸에 있어서, <제리>가 부모의 문제를 처리하는 방식은 이 작품의 지향성에 대한 의구심을 자아내게 하기에 충분하다. 저자는 소설적 기법 혹은 등장인물의 설정을 통해 부모를 소거하지도 못했고, 부모, 즉 '세상의 대변인'과 '나'의 대화를 주선하지도 못했다. <제리>에서 '세상'은 화자의 입을 통해 설명될 뿐이다. 현실 속에서 그 '세상'의 메시지를 젊은이에게 전달하는 바로 그 사람, '엄마'의 입을 작가는 힘겹게 틀어막는다. 가령,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나는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 내가 살고 있는 층의 버튼을 눌렀다. 내 뒤에 서 있던 엄마가 뒤따라 안으로 들어왔다. 엘리베이터는 더디게 움직였고, 나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바닥만 바라보았다. (…) 문고리를 잡아당겨 문을 조금 연 뒤 안으로 들어갔다. 신발을 벗어 놓고는 도망치듯 내 방으로 향했다. 등 뒤에서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다시 들려왔지만, 돌아보지는 않았다. (135~136쪽)

라는 대목을 보자. '나'는 엄마와의 대면을 회피한다. 자신의 집에서 자고 가는 친구에게도 "나갈 때 방문 좀 꼭 닫아 주고, 엄마한테는 괜히 인사하지 말고 그냥 가"(71쪽)라고 말할 정도로 그는 마음의 벽을 굳건하게 세우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캐릭터 설정은 말 그대로 기능적인 설정으로도 작동하지 않는다. '나'의 내면을 보여주고 드러내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를 포기한 채, 저자는 오직 제리와의 섹스 묘사 및 그 섹스에서 오가는 대화의 기술에만 치중하고 있는 것이다.

<제리>의 주인공인 '나'의 엄마는 딸에게 간섭하지도 않거나 못하고, 지방대에 다니는 딸이 술에 진탕 절어서 외박을 하고 돌아와도 그의 삶에 개입하지 못한다. 아직 '나'는 대학생이라는 허울 좋은 신분에 의해 '세상'의 풍파로부터 한 단계 떨어져 있다. <제리>는 엄마의 입을 막고 대신 '나'로 하여금 그가 바라보는 세상을 설명하게만 할 뿐이다. 술집에 앉아 잔뜩 취한 채 친구들과, 혹은 모텔에서 섹스를 하며. 저자는 자신의 작품 속에서 유일하게 등장할 수 있는 '세상의 대변인'을 봉인한 채 '세상 속의 20대'를 보여주려 한다.

서로 꿈이 뭐냐고 묻지만, "수도권의 별 볼일 없는 2년제 야간대학조차 겨우 다니고 있는 나에게 어떠한 꿈이라는 게 있을 리 만무"(74쪽)하며, 남자들은 대형 마트의 물류팀 직원이나 컴퓨터 수리 기사 따위가 되고 여자들은 조그마한 사무실 사무 보조원으로 취직하는 게 고작인데, "그중에서 내가 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75쪽)는 등의 '20대 심경 고백'이 힘을 얻지 못하는 것은 그래서이다. 꿈이 아니라 생계를 걱정하라고, 혼자만의 미래가 아닌 시집 장가가는 일을 신경 쓰라고 다그치며 '현실'을 주입해주는 존재, 즉 부모가 <제리>에서는 그저 유령처럼 떠돌고 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제리>에서 묘사하는 '20대의 희망과 절망'은, 우리가 문학에서 기대하는 깊은 내면성의 표현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되고 만다. 이 대목에 등장하는 이른바 '20대의 고민'은 철저히 대외용이다. 젊은이들은 서로 마음을 터놓을 수 있을 만큼 친해지면 그때부터는 서로 각자의 부모가 자신들에게 부과하는 사회적 압박을 '구체적'으로 말하기 시작한다. <제리>에 결여된 바로 그런 이야기들. 그 지점에서 우리는 비로소 20대가 '보고 있는 세상'의 단면을 엿볼 수 있겠지만, <제리>는 그저 기존의 매체에서 발굴된 '20대의 고민'을 또 다시 단편적으로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다.

20대가 '보고 있는 세상'을 보여주는 것과, 20대를 '보여주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나는 <제리>가 설령 후자를 성취하고 있다 하더라도, 전자를 제시하는 데에는 실패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소설은 20대가 바라보는 세상에 대한 소설이 아니라, 세상에 20대를 보여주기 위한 소설이기 때문이다.

20대 담론에 갇힌 20대

20대를 보여주는 소설.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는 왜 심사 위원들이 "읽는 내내 불편했고, 읽은 다음에도 며칠 동안 불쾌감에서 벗어나지 못"했는지를, 이 작품의 섹스신을 "메타포가 아닌 리얼리티"로 받아들였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충격 보고, 요즘 젊은이들은?> 같은 방송 프로그램과 다를 바 없이 작품이 이해되고 수용된 것이다. 하지만 심사 위원의 우려와는 달리 이 작품의 섹스신은 결코 리얼리티가 아니다. 그 '리얼리티'를 탐구해보도록 하자.

'나'는 남자 친구이자 섹스 파트너인 강에게 버림받은 후, 친구들을 불러 모아 또 노래바 도우미를 부른다. 제리가 나올 때까지 초이스를 미루고, 결국 찾아낸 제리를 끌고 나가 섹스를 시작한다. 그 섹스의 과정에서 제리는 드디어 자신의 속을 내보인다. 바로 이와 같이. 원문의 충격을 그대로 전달하기 위해 길게 인용해본다.

질 안쪽으로 그의 성기가 밀려들었다. 나는 끊임없이 몸을 움직였다. 제리는 숨이 차는지 잠시 신음 소리를 내뱉다가 이내 말을 이었다.

"그런데 뭐, 어떻게라도 한번 해 보겠다고 회사에서 큰 돈 빌려다 성형 수술을 하는 형들도 있어. 눈만 고치면, 코만 세우면, 턱만 깎으면 자기도 에이스가 될 수 있다고 믿는 거지. 하지만 아무리 성형을 해 봤자 본래 생겨 먹은 판때기가 어디 가겠어. 수술해서 잘생겨지는 것도 가만 보면 다 처음부터 잘생긴 애들이나 더 잘생겨지는 거야. 원래 잘생겼는데 쌍꺼풀이 얇은 게 조금 흠이라든가, 이목구비가 다 뚜렷한데 광대가 살짝 도드라진 게 아쉽다거나 하는 얼굴들 말이야. 그런 얼굴은 단점만 조금 보완하면 정말 완벽해지거든. 하지만 그냥저냥 평범하게 생긴 얼굴들은 한두 군데 고쳐 봤자 티도 안 나고, 그렇게 계속 성형을 하다 보면 나중에는 성형 중독으로 번져서 오히려 부담스러운 얼굴로 남는 경우가 더 많아. 그렇게 여기저기서 빚만 지고, 그 빚 갚으려고 자꾸만 돈 끌어 쓰다 보면 결국에는 재정이 마이너스가 돼서 평생을 노예처럼 살아야 돼.

나이가 들면 선수로 뛰는 것도 불가능해져서 은퇴를 하고, 그러고도 빚을 다 못 갚아서 결국엔 여기 남아 숙소 청소하고 애들 밥해 주면서 먹고사는 형들도 있어. 그래서 나도 어떨 때는 이런 생각이 들어. 영원히 여기서 이 일만 하면서 살게 되리라는…… 나도 그렇게 평생 빠져나가지 못하고 이 바닥에서만 빙빙 돌고 있을 것 같은…….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는 것도 결국에는 다 에이스들뿐이야. 걔들이야 워낙 여기저기 불려 다니기 바쁘다 보니 나처럼 술 마시며 돈 쓸 일도 없고, 실질적으로 받는 수당이나 팁이 더 많으니까 1~2년만 일하면 금세 돈이 모여서 대학을 가든지 자기 장사를 하든지 뭐든 하게 되지. 정말 운이 좋은 애들은 연예 기획사 사람들에게 스카우트되는 경우도 있고, 아니면 돈 많은 여자들이 펫으로 키우려고 집 사 주고, 차 사 주고 해서 팔자 고치는 경우도 있고……. 나 같은 애들은 그냥…… 아무리 노력해도 이 바닥인 거야. 이 바닥에서도 가장 밑바닥인 존재로 늘 이렇게 빚만 지면서 살아야 한다고. 아무리 여자들에게 선택을 받으려고 해도, 아무리 돈을 벌어 보려고 해도, 아무리 이 바닥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해 봐도 결국에는 아무에게도 선택받지 못한 채 늘 찌그러져 있는 거야. 더는 못해 먹겠다, 내일부터 진짜 안 나온다, 하면서도 매일매일…… 여기를 벗어나 봤자 어차피 다 마찬가지일 거라는 생각이 들어. 내가 아무리 노력해 봤자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을 것 같아." (210~212쪽)

물경 세 쪽에 이르는 이 기나긴 논설은, 앞서 말했듯 '섹스 도중'에 제리의 입에서 나오고 있는 것이다. 농담이 아니라 진심으로, 제리의 심폐 지구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특정한 반복 운동을 하면서 이렇게 긴 이야기를 조리 있게 늘어놓는 일이 과연 일반적인 사람에게 가능하기나 한가? 제리는 섹스를 하면서 말하고 있는 게 아니다. 말하기 위해 섹스하고 있다. 제리가 두 문단 가량의 이야기를 더 늘어놓고 나서, 한참 후에야 이 섹스는 끝난다.

물론 이러한 식의 작법이 국내 소설에 드물지 않게 등장한다는 점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이런 것을 '리얼리티'라고 부를 수는 없다. 작가가 섹스를 '통해' 젊은이들의 공허와 희망 없음을 전달하고 있다는 평가는 수정될 필요가 있다. 섹스 장면을 '배경으로 삼고', 직설적으로 그 내용을 전달하고 있을 따름이다. 전자와 후자의 차이는 매우 크다. 에로스 그 자체를 자신의 주제 의식과 하나로 사출해내느냐, 아니면 에로스를 소재로 삼아 자신의 주제를 전달하느냐가 나뉘기 때문이다. 후자의 경우가 전자에 비해 반드시 열등하다고 말할 수는 없겠으나, 작품의 심도가 다소 얕게 느껴지는 일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여기서, 그리고 앞서 등장하는 다양한 섹스신에서, 우리는 주인공의 독백을 통해 '20대 담론'의 여러 형태를 엿들을 수 있다. 정신분석학에서 걸핏하면 인용되곤 하는, 섹스를 하며 전화를 하는 남자처럼, 이 소설의 등장인물은 섹스를 하며 20대 담론을 떠올리고 논의하고 그 담론 속에서 절규한다. 그 지점에서 <제리>의 장르는 차라리 로망포르노에 더욱 가까워진다.

1970년대 일본의 영화사들은 값싼 에로 영화를 양산하기 시작했고, 10분에 한 번씩 나체가 등장한다면 어떤 식으로 영화를 찍어도 간섭하거나 제재하지 않았다. 그 결과 등장인물이 섹스를 하면서 마르크스주의를 토론하고 혁명과 자유연애를 논하는 <에로스+학살> 같은 괴작이 등장하기도 했다. 저 섹스신을 읽으며 나는 그 영화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20대의 섹스신을 보여주며 20대 담론을 이야기하는 20대 주인공. 그렇다. 이것은 로망포르노인 것이다.

여기서 문제는 다시, 창작자의 의지로 돌아간다. 일본의 로망포르노는 거대해져가는 영화 산업에서 틈새를 찾아내 솟구치고자 하는 젊은 영화인들의 탈출구이자 훈련장이었다. 한국의 소설 <제리>는, 혹은 이와 같이 '20대 보여주기'의 일환으로 등장한 창작물들은, 그와 비교할 만한 어떤 창작 의지를 담지하고 있는가?

바로 그 지점에서 나는 제리의 말을 다시 읽어보고, 실망하게 된다. 에로 영화의 가운데에 등장하는 마르크스주의는 이질적인 요소이며 분열이고 탈출이지만, 20대 소설 속에서 20대 담론을 말하는 것은 그런 차원의 의미를 갖기 힘들 것이기 때문이다. <제리>는 섹스를 하는 그 순간까지 '보여주고' 있다. 20대 담론에 갇힌 20대의 모습만이 드러나고 있을 뿐이다. 이 책을 읽고 젊은이들의 생각을 이해했다고, 어떤 '리얼리티'에 접근했다고 믿고 싶어할 그 사람들의 시선을, 제리와 '나'는 절정에 이르는 그 순간에도 의식하고 있다.

더 많은 하지만 '다른' 로망포르노가 필요하다

앞서 말했듯 이 책의 서평을 쓰는 나 자신이 20대이기 때문에, 읽고 느낀 그대로 평을 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어떤 동질감 때문이 아니다. 정반대로, 내가 느낀 바 그대로 비판할 경우 '요즘 20대는 서로 띄워주지는 못할망정 깎아내리는 일에나 열심이다'라는 비아냥거림이 돌아올 것이라는 생각을 뇌리에서 떨쳐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앞서 나는 <제리>의 저자가 20대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타자들을 직면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것은 그가 자신에게 강요되고 있는 타자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있는 것과 동시에 발생하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같은 비판을 나 스스로에게도 적용할 수 있지 않은가? 고작 서평 하나를 쓸 때조차 '이 사람은 20대니까'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면, 나는 어떤 정신적 함정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닐까?

20대 담론의 해법은 바로 그런 차원에서 모색되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20대가 이야기하는 것, 20대가 20대의 삶에 대해 말하는 것, 그 모든 행위는 결국 20대가 아닌 누군가의 시선을 전제로 해야만 성립할 수 있다. 결국 당사자들은 인정 투쟁에 뛰어들거나, 인정 투쟁에 뛰어들지 않기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20대 저자, 20대 필자로 인정받기 위해 당사자가 아닌 이들의 시선을 염두에 두고 '젊은이'들의 모습을 그려내는, 그러한 작업은 새로운 주체성의 확립이나 이 시대 젊은이들의 리얼리티 포착과는 무관한, 소모적인 양태를 띌 수밖에 없다. 바로 그 지점에서 탈출하는 것이 지금의 20대에게 주어진 과제일 것이다.

<제리>에서 적극적으로 젊은이의 섹스, 혹은 피어싱 등으로 대변되는 감각적이고 육체적인 세계를 탐구하고 개척한 것은, 어쩌면 그러한 새로운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 하나의 디딤돌이 될지도 모른다. 아무튼 인류는 선사시대 이전부터 섹스를 해왔고, 섹스 이야기는 언제나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니 말이다. 문제는 그 이면에 무엇을 담아내고자 하는가이다.

<제리>에서는 20대가 섹스를 하며 20대 담론을 이야기했다.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20대'를'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20대'로서' 누군가를 설득하고 반박하고 갈등하고 사랑하기 위한, 그런 언어가 쏟아질 수 있는 장이 아직 우리의 담론의 장에는 마련되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지금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더 이질적인 균열로 이루어진 로망포르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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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미국 금융 위기를 포함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주요 선·후진국 금융 위기의 기록들.

"주택 가격은 정점 대비 평균 35.5% 하락. 최저점에 도달하는 데 필요한 총 평균 소요 기간 6년."
"주가는 평균 55.9% 하락. 최저점 도달 기간 3.4년."
"실업률 평균 7%, 최저점 도달 기간 4.8년."
"GDP 하락폭 9.3%, 1.9년"
"금융 위기 이후 정부 부채, 위기 이후 3년 동안 평균 86% 증가. (대공황기에는 84% 증가하는데 6년 소요됨!)"

이번에는 다를까?


▲<이번엔 다르다>(케네스 로고프·카르멘 라인하트 지음, 최재형·박영란 옮김, 다른세상 펴냄). ⓒ다른세상
과연 과거의 경험과 이번 위기는 다르게 전개될까? 그래서 과거 자료는 무시해도 좋은 것일까? 사실 2008년 8월 위기 발생 이후 2009년 하반기에 이르자, "이번엔 다르다"라는 분위기가 슬슬 퍼지기 시작했다. 각국 정부가 사상 유래 없는 금융 완화, 재정 확대 정책을 펴자 처음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큰 희생을 치르지 않고 넘어가겠거니 하는 분위기 말이다.

올해 들어 그리스 등에서 국가 채무 부도의 위험이 대두하자 이런 '근거 없는 낙관주의'가 다시금 비관주의로 반전되는 양상이다. 케네스 로고프와 카르멘 라인하트의 <이번엔 다르다>(최재형·박영란 옮김, 다른세상 펴냄)는 거부하기 힘든 방식, 즉 위에 인용한 몇 가지 예처럼 역사적 자료를 들이대는 식으로 이런 반전된 분위기를 정당화시켜주고 있다.

번역본에서는 슬쩍 빼 버렸지만 이 책의 부제는 "지난 800년간 저질러진 금융/재정의 우매한 짓들(Eight Centuries of Financial Folly)"이다. 1800년 이후부터 보더라도 국가가 외국 채권자에게 부도를 낸 사례가 250건, 국내 채권자의 돈을 떼어먹은 사례가 70건이 넘는다.

그러나 돈 빌려준 측이 볼 때 돈을 떼일 것이 분명했다면 애당초 대출을 해 주었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왜 그런 일(대출과 부도)이 계속 반복해서 일어났을까? 그건 거의 예외 없이 '이번에 다르다(This time is different)'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게 저자들의 주장이다. 저자들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이번에도 다르기는커녕 결국은 과거의 패턴의 반복이라는 것.

저자들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잘못된 믿음의 예를 보여주면서 우리에게 정신을 차리라고 말하고 있지만 책을 읽는 내내 떠나지 않는 질문은 '그런데도 왜 사람들은 반복해서 실수를 저지르는 것일까'이다. 평자는 이 책의 저자들이 다루는 멀고 먼 시대 이야기에 빠져 있다가 불현듯 250년 전 소설이 생각난다.

18세기 프랑스 계몽사상가 볼테르의 소설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1759년)에서 주인공 캉디드는 현실의 벽에 부딪쳐 엄청 고생하고 깨지면서도 근거 없는 낙관주의를 가진 사부 팡글로스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는다. 팡글로스는 이렇게 능청스럽게 자신의 낙관주의를 말한다.

'가능한 세계 중의 최선의 세계'에서는 모든 사건이 연계되어 있다네. 자네가 이런저런 고생을 하지 않았으면 어찌 그 화려한 인생 경험을 했겠나?

정말이지 근대인은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은 어제와 다른 뭔가 멋진 일이 나에게 생기지는 않을까'라는 기대로 하루를 시작한다. 10년에 한 번도 아니고 매일 아침마다! 그러니 과도한 일을 과도한 줄도 모르고 하게 마련 아닌가? 팡글로스식 논법을 적용하면 이런 말도 할 수 있을 법하다.

'그렇게 대형 사고가 많은 200년의 역사였지만 뭐 잘못된 거라도 있나? 크게 보면 인류 역사상 가장 눈부신 성장의 역사 아닌가? 1800년 이후의 인간 역사는 그 이전 현생인류가 출현한 이후 10만 년과 비교해서 완전히 달라. 그 이전에는 인구법칙에 매여 빈곤의 악순환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지.

인류는 최근 200년 동안에 이 법칙에서 벗어났으며 가끔 일어나는 대형 사고는 엄청난 속도로 (그러니까 언제나 약간 무모하게) 전진한 탓에 어쩔 수 없이 발생한 부산물이라고나 할까. 과속을 하면 사고는 가끔 나는 법이지. 시시때때로 좀 고통을 겪는 것(지불하는 비용)은 그 성과에 비하면 사소하다고 봐야지.

그래, 빠르게 상승하는 자산 가격, 실질 성장률의 현저한 하락, 대규모 경상수지 적자, 민간과 정부의 부채의 지속적 증가 등은 저자들 말대로 다가오는 금융 위기의 전조라는 것을 인정하자고. 그래도 파티는 즐겨야지, 갑자기 중간에 중단할 수야 없지. 필요하면 이른바 전문가를 동원하여 지금은 과거와 다르다고 한마디 하게 하고….'

저저들의 암묵적 믿음은 이런 팡글로스식 사고와는 사뭇 다르다. '우리가 만약 과거로부터 배워 국가 채무 부도, 은행 위기의 전조에 대해 잘 알고, 위험 신호가 왔을 때 행동을 바꿀 수 있다면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일단 저질러진 실수에 대해서는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 벗어나는 길은 없다.'

팡글로스식 철학적 정당화를 비웃는 이런 저자들의 주장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① 위기는 어쩔 수 없는 사건이 아니라 피할 수 있다. ② 적어도 실수에 대한 대가는 반드시 지불해야 한다. 이런 저자의 두 가지 주장에 대해서 좀 더 분명하게 평자의 입장을 밝혀보고 싶다.

어리석음을 경고하는 '어리석은' 신념

첫째, 과거의 실수는 반복하지 않을 수 있다는데 평자도 동의한다. 그러나 그 이유는 저자들과 완전히 다르다.

2008년 위기가 월가와 미국 정부, 금융 전문가의 '어리석은' 믿음 때문일 리 없다. 또 단지 눈앞의 이익이 주는 유혹에 넘어가 실수를 했기 때문도 아니라고 본다. 그런 생각 자체가 로고프처럼 미국 공화당 노선을 따르는 중도 보수 자유주의 학자들의 '어리석고 근거 없는' 신념에서 나온 발상이라고 감히 주장하고 싶다.

현실의 흐름을 추종하고 또 거기서 이익을 취하려는 사람은 당연히 주관적으로 장밋빛 전망을 갖게 마련이다. 달리 말해 그런 믿음은 결과이며, 현실의 반영이자, 사태를 강화하는 2차적인 원인을 수는 있으나, 사태 발생의 최초의 원인은 결코 아니다. 거칠게 평자가 생각하는 진정한 원인은 당시의 국내/국제적 객관적 힘의 역학이다.

예를 들자면, 중국의 과잉 저축이 미국 금융 시장으로 밀물처럼 몰려 온 사실, 그것이 부동산 가격을 끌어올린 사실 등의 배후에 놓인 중국의 국내 정치 역학(왜 1인당 소득 3000달러도 안 되는 중국인들이 그렇게 과도한 저축을 했을까, 중국의 기업과 정부는 어떻게 그렇게 많은 잉여를 인민들로부터 '약탈'할 수 있었을까), 미국 금융 자본주의의 배경(미국 노동자/서민을 금융과 시장에 완전 포획한 현실, 이른바 금융화) 등이 바로 최초의 원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다른 시대, 다른 나라의 금융, 국가 채무 위기는 자신만의 독특한 역학 관계를 가지고 있다. 저자들처럼 무슨 실수나 잘못된 믿음이 진정한 원인은 아닐 것이다. 평자는 수백 년 동안의 주요 사건이 유혹에 넘어가거나 잘못된 믿음에서 저질러진 무슨 실수 때문이라는 발상 자체의 어리석음(folly)을 지적하고 싶다.

지금은 부자가 대가를 치러야 할 때

둘째, 일단 발생한 사고에 대해서는 충분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이 점에 대해서는 동의한다. 그러나 그 대가를 어떻게 지불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생각이 다르다.

이 책이 나온 이후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스>에서 7월 하순에 재정 건전화를 둘러싼 논쟁이 있었다. 이 책의 저자 중 한 사람인 로고프는 내용과 그 수준을 따지지 않고 무조건 재정 팽창을 주문하는 이른바 케인스주의자를 강하게 비판했다. 지금 시장에서 정부 공채의 낮은 조달 금리는 문제가 없다는 증거가 아니며, 신뢰란 비선형적(non-linear)이어서 어느 날 갑자기 무너질 수 있기 때문에 좀 더 보수적으로 정부에 대한 신뢰를 유지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또 그는 어차피 상당 기간 불확실성, 정치적 격변 등이 예상되므로 재정적 보수주의를 견지하는 것이 사려 깊은 태도라고 덧붙였다.

액면 그대로 보면 참으로 건전한 사고이다. 그런데 로고프는 그 어디에서도 현재의 위기 극복책으로 재정 건전성을 크게 해치지 않으면서 재정 확장 기조를 유지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는 한 번도 언급하고 있지 않다. 전 세계적으로, 특히 미국에서 극도로 악화된 소득 분배를 개선하기 위해 부자에게 세금을 올리고 빈곤층과 사회적 약자를 위해 대대적으로 사회복지 지출을 늘리는 방안이 있을 수 있는데도 말이다. 다시 말해 지금은 부자가 비용을 지불해야 할 국면이다. 그동안 누린 이득, 그리고 위기의 원인을 제공한 원죄 등을 생각해서라도 그렇다. 이대로 재정이 긴축 기조로 돌아서고 경제가 다시 활기를 잃는다면 다시금 가난한 사람에게 비용이 전가될 것이다.

미래를 열어가는 경제학의 모습은?

세계 소득의 90%에 해당하는 66개 국가의 200년에 걸친 시계열 자료를 분석한 책은 그 자체로 하나의 학문적 업적이다. 국가 채무 위기의 다양한 사례들, 채무 부도의 은폐된 방식들(예를 들어 금본위제 하에서 금속 성분 감소, 불환지폐제도 하에서 빈번하게 이용된 통화 증발과 인플레이션), 은행 위기의 기록들과 그 파급 효과, 2007년 미국 경제 위기와 대공황과의 비교 등 온갖 문제가 궁금한 독자라면 이 책을 직접 읽어봄으로써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업적은 계량경제사(cliometrics) 분야의 업적일 수 있으나 출판사가 주장하듯이 경제 정책가나 투자 전문가들이 역사적 교훈이라는 넓은 의미의 배움을 넘어서 직접적으로 어떤 지식, 지침을 얻을 수 있는지는 솔직히 의문이다. 저자들도 밝히듯 이번 위기는 1930년대 대공황과 비견될 세계적 위기이며 당시와 지금은 정치적, 기술적, 경제적 조건이 너무도 당시와 다르기 때문이다.

물론 이 사실이 결코 저자들이 비판하듯 근거 없는 낙관주의의 이유가 될 수는 없겠지만 그 전개 양상을 사뭇 다른 방향으로 이끌 것이라는 생각의 충분한 근거는 된다. 그들 자신이 예측하듯 경제학도 이번 위기 이후 크게 변할 것이다. 미래는 열려 있는 것이며, 역사란 단지 미지를 향한 출발로서만 의미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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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국제 정세는 변화의 시점에 직면해 있다. 양극 체제의 붕괴로 확고히 형성된 미국 중심의 단일극 체제가 점차 흔들리는 조짐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미국의 지위에 도전할 세력은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9·11 사태와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전쟁을 거치며, 특히 2008년의 금융 위기는 상대적으로 미국의 국제 정치, 경제적 지위를 하락시켰다. 반면 중국은 1978년 이래의 개혁 개방 정책의 성공과 고속 성장을 바탕으로 국제 사회에서 미국 다음으로 중요한 대국으로 부상하였다. 미국의 상대적인 지위 하락과 중국의 급부상은 이제 국제 사회에서 G2라 불리는 새로운 구도를 형성하게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2008년 국제 금융 위기 발생 이후 중국 경제의 지속적 성장이 세계 경제의 회복에 큰 기여를 하였다는 것이 미국을 포함한 주요국들의 대체적인 평가임에도 불구하고 중국을 바라보는 미국의 속내는 편치 않다. 실제로 21세기에 들어서면서 나타난 '중국 위협론'에서 중국 제품의 세계 확산과 중국 경제 발전이 다른 나라를 위축되게 하는 부정적인 영향 및 중국의 발전으로 인한 세계적 에너지, 원자재 확보 경쟁 격화는 '미·중 간 갈등이 끊이지 않는 관계'를 나타내는 새로운 근거로 대두되고 있다. 상이한 경제 성장 모델과 에너지 수요 및 자원 경쟁으로 인해 지정학적인 측면에서의 정치 안보와 전략적 고려를 피할 수 없게 하고 있는 상황이며, 세계 안보 국면에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국의 부상을 우려하는 미국이 '중국 위협론'을 제기하는 이유는 역사적으로 대국의 경제 발전은 전례 없는 정치적 영향력의 확대를 가져 왔으며, 더 나아가 이러한 대국은 강력한 군사력으로 더 높은 국제 지위를 추구한다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미국인들은 '중국의 부상'이 미국에 대적할 만한 '능력'을 중국에 가져다주었다고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중국의 부상'을 '능력의 부상'과 같은 것으로 간주한다.

미국의 대 중국 인식에서 나타나는 가장 기본적인 인식 패턴은 정치심리학에서 인지 대상의 '거울 이미지(mirror image)'라는 기본 모형에 부합한다. 즉 미국은 언제나 자신의 눈높이로 자신의 공동체의 시각에서 중국을 관찰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미국인은 자신이 인지하고 있는 '상식적인 이치(conventional wisdom)'를 중심으로 중국 문제를 인식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는 것이다.

미국은 중국에 대해 '우월주의'적인 모습을 유지하면서 미국 예외주의(American exceptionalism)적 시각으로 중국과의 차별화를 시도한다. 미국의 이상에 맞도록 중국을 개조하고 심지어 미국의 이상과 가치로 중국을 바꾸려고 하는 것이다. 중국이 진정한 민주화의 노선을 택하지 않는다면 강력한 중국은 미국의 위협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 위협론적 시각에 가려 크게 부상되지는 못했지만 미국 자신만의 잣대로 중국을 평가하지 않는 '실용주의적 대 중국 인식'도 있다. 이 관점은 현실에 맞지 않는 미국의 가치로 중국을 평가하는 것에도 반대하며, 미국의 경험으로 중국의 옳고 그름과 미래를 판단하지 않는다.

오히려 중국 문제의 특수성을 강조하면서 직접적으로 중국을 미국의 입맛에 맞추어 바꾸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데이비드 램튼(David Lampton)교수는 21세기 들어 미국이 갖고 있는 전통적인 대 중국 인식은 '잃어버린 패러다임(paradigm lost)'으로 중국이 이미 세계적 권력 재분배 과정에서 전략적 경쟁 상대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런 배경 아래 중국에 대해 '중국은 위협적이다'라고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만 보다 진지한 입장을 보이는 학자들의 경우에는 향후 중국 발전의 불확실성에 초점을 맞추고 중국을 분석하면서 오히려 중국식 발전 모델도 충분히 의미 있는 발전 모델이 될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중국이 순조롭게 경제 발전을 계속할 것인지의 여부, 경제 성장을 계속하면서 한편으로 중국에 내재된 사회 관계의 긴장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 G2의 일원으로서 국제 사회가 기대하는 긍정적 역할을 할 것인지 여부, 그리고 중국이 미래에 어떠한 정책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문제들이 망라되어 있다.


▲ <중국과 미국의 헤게모니 전쟁>(에이미 핑클턴 지음, 이양호 옮김, 에코리브르 펴냄). ⓒ에코리브르
에이먼 핑글턴이 쓴 <중국과 미국의 헤게모니 전쟁>(이양호 옮김, 에코리브르 펴냄)은 미국과 중국의 주도권 싸움, 특히 경제적 측면에서 힘의 경쟁을 심층적으로 다루고 있다. 저자는 중국이 지속 성장을 할 수 있는 길이란 서구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받아들이는 것이고, 중국이 부유해지는 과정이 베이징 정부의 권위주의 잠식에 기여할 것이라고 여기는 기존의 관점에 도전한다.

그리고 생활 수준 향상이 필연적으로 정치 자유화로 이어질 것이라는 생각은 신화라고 못 박는다. 결론적으로 중국이 미국 사회를 스텔스처럼 몰래 침투함으로써 오히려 미국의 가치와 제도를 잠식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중국이 미국처럼 되는 것이 아니라 미국이 중국처럼 될 것이라는 의미다.

사실 여부를 떠나 이 책은 그동안 일반적인 대 중국 인식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인 재단에 의해 이루어져왔는지를 통박하고 있다. 필자가 지적한 여러 가지 중국적 정치 권력 운용 시스템이나 동아시아 발전을 지탱하는 저축률 등의 문제에서 논리적 비약이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오늘날 중국의 발전을 전방위적인 발전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이는 중국 자신의 전통과 현실의 발전에 따른 '베이징 컨센서스'가 기존의 '워싱턴 컨센서스'에 도전하고 있다는 현실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결국 필자도 중국을 도전으로 간주하는 서방주의적 인식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두 강대국 사이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가이다. 이 책은 그동안 우리가 혹시 미국적 시각에서 중국을 바라보지 않았는지 미국의 중국학을 한건 아닌지, 또는 상대적으로 천박한 우리의 중국적 이해를 반성할 수 있는 중요한 일단의 단서를 제공했다는데 일독의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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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탈학교 운동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한 조사 결과를 보면, 초·중·고 학부모의 2명 중 1명은 자녀가 원하면 공립 대안학교를 선택할 것이라고 답했다. 정부의 교육 정책과 거기서 비롯된 제도권 학교에 대한 거부감이 이런 선택의 큰 이유일 테고, 여기에 새로운 교육 철학, 삶의 가치를 찾는 부모가 늘어나는 것도 한몫했으리라.

이렇듯 교육을 둘러싸고 변화의 조짐은 보이나, 과연 그런 변화가 어떤 결과를 낳을지 현재는 가늠하기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학벌 없는 사회'가 도발적인 제목의 책 <'학교'를 버리고 시장을 떠나라>(메이데이 펴내)를 펴냈다. 이 단체는 이 책에서 지난 10여 년간 해온 주장-한국 교육을 바꾸려면 학벌을 타파해야 한다-을 한 번 더 반복한다.


▲ <학교를 버리고 시장을 떠나라>(학벌없는사회 지음, 메이데이 펴냄). ⓒ메이데이
사실 이 책을 받아드는 심정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나 역시 한때 '학벌 없는 사회'의 성원이었고, 같은 공간을 사용했던 교육 운동의 동료였다. 또 '학교'를 버리고 '배움'을 찾겠다며 몸부림을 치던 자식을 키웠던 학부모였다. 그간의 학벌 타파 운동의 성과와 한계를 중간 점검하는 이 책의 내용이 궁금할 수박에 없었다.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김상봉, 채효정이 쓴 두 개의 글로 구성된 1부('학교'를 버려야 한다)이다. 김상봉은 '내부로의 망명만이 길'이라는 글에서 총 61개 항에 걸쳐서 한국 교육의 문제와 대안을 정리했다. 내용을 요약하기보다는 그의 문제의식이 잘 드러나는 부분을 살펴보자.

32. 내부로의 망명만이 길이라는 것

내부로의 망명만이 길이라면 가장 확실한 망명은 스스로 낙오자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낙오자가 아니라 '스스로'라는 자발성이다. 낙오한다는 것은 무능력의 표현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선택을 가리킨다. 게다가 모두가 현존하는 질서에 순응하고 있을 때 먼저 낙오하는 사람은 그 행위를 통해 낙오하면서 선구자가 되는 것이다. 생각하면 올바른 사회에서 낙오한다는 것은 불행하고 가슴 아픈 일이다. 하지만 물구나무 선 사회에서는 거꾸로 성공한다는 것이 부끄러운 일인 것이다.

그러나 낙오자가 되면서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자본주의는 두려움에 기생한다. 학벌 사회도 마찬가지다. 경쟁에서 낙오하면 끝장이라고 우리를 위협한다. 그러나 모두가 낙오자라면 두려울 것이 없다. 그 때는 낙오자들이 세상의 주인이 되면 된다. 이미 지금도 이 사회에서는 대다수가 낙오자다. 하지만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낙오자들이 낙오하지 않겠다고 서로 반목하고 경쟁한다. 그러나 진실은 드러나게 마련이고 사람은 끝에 가면 지혜를 얻게 된다. 그 때가 되면 자발적으로 먼저 낙오한 사람이 선구자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말고 과감히 이 브레이크 없는 기관차에서 뛰어 내려야 한다. (48~49쪽)

44. 가능하면 학교에 다니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것 / 45. 학교에 남아 있는 학생들은 적극적으로 저항해야 한다는 것 (55쪽)

부모를 설득할 수 없다면 어쩔 수 없이 학교에 남아야 할 수도 있다. 이런 경우 할 수 있다면 문제아가 되는 것이 좋다. 문제아가 된다는 것은 폭력 학생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학교의 야만적 억압에 순응하지 않고 물음을 던지는 것을 의미한다. 최악의 경우라 해야 감옥에서 해방되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학교에서 하라는 일을 아무 생각 없이 하나에서 열까지 고분고분 따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무엇이 자기에게 이익이 되고 무엇이 손해가 되는지를 헤아려서 선택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남에게 크게 피해를 입히는 일이 아닌 한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 또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한다. 예를 들면 야간 자율학습시간에 교실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그 시간에 책을 읽는 것이다. 그것이 모든 일의 시작이다. (55~56쪽)

가능하면 학교를 떠나라는 이런 주장은 무책임하게 들릴 수 있다. 학교 밖은 학교 안보다 더욱더 야만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학교를 거부하는 자식을 키워본 내 경험을 염두에 두면, 학교를 떠난 학생과 부모를 기다리는 현실은 부모가 가진 경제적, 문화적 계급에 따라서 천지 차이다.

이 책의 3부에 실린 김재홍의 글은 이런 현실의 한계를 염두에 둔 듯하다. 그는 교육이 공공적이어야 하는 이유를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 철학을 통해 주장했다. 이런 주장의 연장선상에서 국가의 무관심 아래 시민의 전적인 부담으로 이어지는 홈스쿨링 및 대안 교육이 공공의 영역으로 들어와야 마땅하다.

대안 학교에 대한 정부의 지원이 턱없이 모자란 상황에서, 학생과 부모가 대안 학교를 선택하려면 큰 부담을 안을 수밖에 없다. 돈 없는 학생도 다양한 대안 교육의 기회를 접할 수 있도록, 정부가 대안 학교에 다니는 학생에게도 제도권 학교의 학생에게 지급하는 교육 경비만큼 지원하도록 해야 한다.

이 책을 덮으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에 한국은 핀란드에 이어서 세계가 부러워하는 교육 체계를 가진 것으로 발표되었다. 남의 평가도 무시할 수 없다. 한국 교육의 밝은 면도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다. 한편, 이 밝은 면만 부각하면서 학교 민주화, 학생 인권, 교육 공공성, 교육 재정 확보 등의 어두운 면이 무시돼온 것도 사실이다.

이런 어두운 면을 부각하고 해결하려면 어떤 교육운동이 효과가 있을까? 내 아이를 좋은 대학에 보내다는 부모의 현실적 요구와 교육적 가치를 주장하는 교육 운동의 해법은 계속 겉돌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생각이 있고 여력이 되는 부모는 아예 학교를 떠나서 대안 학교를 선택한다.

그러나 대다수 부모는 학교가 내 아이에게 도움을 주지 못하는 배움의 장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학교를 떠나지 못한다. 어떤 면에서는 학교가 안전하기 때문이며, 최소한 학교에서 버티면 졸업장이라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10대 자녀를 둔 부모는 지금 이순간도 아이를 달래거나 협박하면서 16년을 견딘다.

이런 상황에서 이 책의 주장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학교를 바꾼다는 것은 결국 사회를 바꾼다는 말이고 그 일의 어려움은 그간의 민주화라는 역사를 만들고 그 과정을 공유해온 부모세대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지난 10여 년 동안 '학벌 없는 사회'는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학벌과 학력 차별의 철폐를 목표로 활동하였다.

학벌 없는 사회가 그동안 이룬 성과가 크든 작든 학벌은 한국 사회의 핫이슈다. 이제 이 단체는 자발적인 낙오라는 탈학교 주장을 통해서 학벌 타파 운동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이 책에 실린 주장이 좀 더 많은 토론을 통해서 한국 교육 더 나아가 한국 사회를 바꾸는 계기가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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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알다시피, 역사는 집단적 자의식의 산물이며, 자기 자신에게서 배우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나라 번역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책이 한 손에 다 꼽힌다는 것, 그나마 책을 낸 저자로 보자면 1970~80년대 선구적 업적을 남긴 김병철(<한국 근대 번역 문학사 연구>, <한국 근대 서양 문학 이입사 연구>, <한국 근대 서양 문학 번역 논저 연표>)과 지금 이야기하는 김욱동(<번역과 한국의 근대>, <근대의 세 번역가>) 단 두 사람 외에 더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는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우리나라에서 번역과 관련된 집단은 자의식도 없고, 자신의 경험에서 배울 생각도 없다는 뜻일까? 두 연구자의 노력이 돋보이는 만큼, 그들의 저변의 황량함 또한 절실하게 느껴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현상을 개탄하는 소리야 지금 말고도 많이 들어보았을 것이고, 이제 듣고 싶은 이야기는 왜 이런 개탄할 만한 현상이 나오게 되었는가에 대한 치밀한 분석과 이런 현상을 바꿀 방법의 제시일 것이다.


▲ <번역과 한국의 근대>(김욱동 지음, 소명출판 펴냄). ⓒ소명출판
바로 그런 이야기를 듣고 싶을 때 가장 먼저 펼쳐보아야 할 책이 김욱동의 <번역과 한국의 근대>(소명출판 펴냄)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책은 방금 제기한 문제에 직접적인 답을 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번역에 대한 우리의 의식이 형성되던 시기에 번역 작업이 이루어지던 방식을 보여줌으로써, 또 100년 전에 벌어진 일들이 지금도 여전히 약간의 변주를 거쳐 재연되고 있음을 깨닫게 해줌으로써, 간접 조명으로 지금 우리의 자리를 비추어준다.

자의식이 형성되려면 자신이 주체라는 자각이 있어야 하고, 여기에는 주체적 행동이나 사고가 전제된다. 따라서 번역 관련자들의 자의식이 형성되려면 먼저 번역이 주체적 행동이라는 자각이 선행되어야 한다. 뒤집어 말하면, 우리 번역의 역사에 관한 연구가 이렇게 빈곤하다는 것은 번역이 주체의 행위라는 자각이 빈약하다는 뜻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혹시 번역 자체가 근본적으로 주체적 행위일 수가 없기 때문은 아닐까? 사실 번역은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번역자 독단으로 하기 힘든 행위라는 것이 너무 빤하게 드러나 있기 때문에, 주체적인 번역이라는 말 자체가 모순처럼 들리기도 한다. 또 번역의 외적인 측면, 예를 들어 번역할 텍스트의 선정에서는 주체적인 면을 드러낸다 해도, 과연 번역 작업 내부에서 주체적이라는 말이 성립할 수 있는가는 또 다른 문제일 수도 있다.

자못 복잡해 보이는 이 문제는 설사 머릿속에서 어떤 답을 만들어낸다 해도, 실제 현장에서 이루어진 경험과 결과로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바로 이 점에서 실증적 연구에 바탕을 둔 <번역과 한국의 근대>는 단지 근대 초기의 번역 작업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했다는 성취를 넘어서서, 우리의 현재의 문제의식과 연결되는 면들을 보여준다.

실제로 <번역과 한국의 근대>의 접근 방법 자체, 즉 "왜" "누가" "무엇"을 "어떻게" 번역했느냐고 묻는 방식 자체가 주체의 문제를 탐사하는 한 방식이라고 보아도 좋을 듯하다. 이런 방법론은 저자의 말대로 김병철의 기존의 업적을 체계적인 방식으로 재정리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여러 가지 방법 가운데도 굳이 주체의 행위를 캐묻는 "육하원칙"의 방법을 택한 것은 저자가 밝힌 대로 리디어 류의 "번역한 근대"라는 개념의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다.

류의 <통언어적 실천>에 나오는 이 개념은 중국의 근대화 작업이 "유럽의 문헌이나 그것을 일본어로 번역한 문헌을 통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이룩할 수 없었다"는 맥락에서 제시된 것이다. 김욱동은 중국 근대화의 일부 주체들이 근대화의 한 방법으로 적극적으로 번역을 끌어안은 사정을 염두에 둔 이 개념을 이용하여 우리의 근대의 번역을 조명해 보려 했다.

이렇게 번역과 근대화가 직결되면, 우리의 주체적 번역의 문제도 곧바로 주체적 근대화의 문제와 연결될 수밖에 없다. 즉 번역과 주체와 근대의 문제가 동일 평면에 놓이게 된 것이며, 이것은 현재에도 번역과 관련하여 우리의 핵심에 자리 잡고 있는 절실한 문제이기에, 저자의 방법론은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에게 각성의 계기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방법론에 입각하여 실증적으로 전개되는―김병철의 어깨 위에 올라서서 또 때때로 그를 교정하면서―핵심 논지는 분명하다. 19세기 말 중국에 중체서용(中體西用), 일본의 화혼양재(和魂洋才)가 있었듯이 이 땅에도 동도서기(東道西器)를 주장하는 개화파가 있었으며, 이들은 서양 문명을 받아들이는 방법으로 번역의 필요성을 주창했다.

이들의 직간접적 영향 하에서 수많은 사람들이―심지어 홍난파, 박헌영처럼 지금은 번역과 연결시켜 생각하기 힘든 사람들까지도―그들 나름으로 근대화라는 뚜렷한 목표를 염두에 두고 계몽을 위한 번역을 했다. 그러나 번역자들의 시야와 능력의 한계 때문에 우리의 번역은 서양의 직접 번역이 아니라, 대부분 중국과 일본을 통한 중역이 되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번역할 대상을 중국이나 일본에서 선정해주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점에서 "번역의 사대주의"와 다름이 없다. 특히 일본 근대화를 모범으로 삼았던 사람들은 일본에서 번역되었다는 것이 서양 문헌의 가치를 평가하는 기준인 것처럼 생각했다. 그 결과 한국의 근대는 "번역한 근대"보다 못한 "중역한 근대"가 된 것이다.

"우리가 주체가 되어 서양을 직접 만나지 못한 사실, 다시 말해서 일본을 통하여 서양을 간접적으로 만난 사실이 한국 근대사가 안고 있는 비극이다."

비유적인 의미에서든 실질적인 의미에서든 "중역"이 우리의 근대를 지배했고, 주체적 번역과 주체적 근대화가 동시에 좌절했다는 저자의 결론은 우리나라에서 번역과 관련된 집단이 유아기에 입은 정신적 외상의 한 면을 정확하게 드러내고 있다. 나아가서 이 외상 때문에 자의식과 주체성의 형성에 장애가 생기고, 유아기 자체를 돌아볼 엄두를 내지 못한다는 점에서 보자면, 저자의 결론을 곧 현재에 대한 진단이기도 하다.

<번역과 한국의 근대>가 이렇게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조망하는 위치에 올라설 수 있었던 것은 근대와 번역과 주체를 한 상 위에 올려놓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는 앞서도 했거니와, 이제 상 위에 올라온 것들을 더 적극적으로 깊이 있게 다루는 것은 저자의 어깨 위에 올라서는―저자가 김병철의 어깨 위에 올라섰듯이―연구자들의 과제가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저자가 열어준 시야 덕분에 우리 눈에 들어오게 된 문제들(중역이 아니라 직접 번역을 했다면, 다시 말해서 서양과 직접 만났다면 과연 우리의 근대가 많이 달라졌을까? 그러면 주체적인 번역의 문제가 자동적으로 해결이 되었을까? 그렇게 서구화되는 것이 곧 진정한 근대로 가는 길일까? 근대화의 주체는 개화파 외에는 찾을 수 없으며, 번역은 그들의 문명 수입과 계몽의 도구 외에 다른 자리를 찾을 수는 없는 것이었을까?)을 앞에 놓고 근대나 근대화와 관련하여 다른 분야에서 쌓인 성과를 바탕으로 번역의 정치학을 고민하는 작업이 먼저 눈앞에 떠오른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연구 방향은 번역 작품 내에서 주체의 문제를 더 치밀하게 규명해 나가는 것이 될 듯하다. 저자는 번역에 대한 자의식을 조금씩 갖기 시작하던 외국 문학 연구자들의 논쟁과 이 책의 마지막 장인 "어떻게 번역하였는가"에서 이 문제를 풀어나갈 단초들을 제시했다. 이를 바탕으로 번역 작업 내에서의 주체적 번역 방법론을 검토해 보고 또 그에 입각한 번역 비평의 기준을 세워, 번역의 역사와 더불어 번역 자체의 공과를 더 적극적으로 따져보는 것도 중요한 일일 듯하다. 즉 적극적인 번역 비평이 결합된 번역사 기술이 기대되는 것이다.

이런 작업들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우리 번역의 자기 학습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것이며, 번역의 안과 밖에서 주체적 번역의 가능성을 찾아가는 길도 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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