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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없이 바쁜 일상에 쫓기는 우리는 휴식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물가는 오르고 살 것이 많은 요즘에는 돈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권력과 명예와 쾌락과 웰빙은 필요하다고 하지만 철학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물론 ○○그룹의 "경영 철학" 같은 것 말고.

과연 우리에게 철학이 필요할까? 이 문제에 답을 주려고 하는 책이 강신주의 <철학이 필요한 시간>(사계절 펴냄)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생각한 것은 왜 제목이 '철학이 필요한 시간'인가 하는 점이었다. 원론적인 이야기이지만 우리는 살아있는 매 순간마다 철학이 필요하기에 굳이 철학이 필요한 시간을 따로 설정할 필요는 없다. 책을 다 읽고 덮을 즈음에 나름대로의 결론이 났다. 독자들에게 철학적 편지를 보내고 그들에게 자신을 버리고 철학적 여행을 다녀오라고 권하는 저자의 입장으로 볼 때 '철학이 필요한 시간'을 제기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사는 우리들이기에 새삼스럽게 철학이 더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강조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 <철학이 필요한 시간>(강신주 지음, 사계절 펴냄). ⓒ사계절
이 책의 부제는 "강신주의 인문학 카운슬링"이다. 따라서 철학 상담을 하는 나로서는 더욱 끌릴 수밖에 없었다. 철학하는 장소로 상아탑보다는 시장을 선택한 저자가 인문학으로 어떻게 상담해줄까? <상처받지 않을 권리>(프로네시스 펴냄)에서는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얼마나 타인의 욕망에 의해 조작된 삶을 살아가며 상처받고 있는가를 고발했다면, 이 책에서는 상처받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는 것 같다. 혹은 이미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스스로를 치료하는 방법에 대해 귀띔해주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저자는 마흔 여덟 개의 병에 각각 다른 편지를 담아 우리에게 보내고 있다. 각각의 편지들에는 저자가 철학의 고전을 읽고 받은 느낌과 생각이 적혀 있다. 제1부 '잃어버린 나를 찾아서'에서는 나에 대한 성찰을 하도록 도와주는 열여섯 편의 편지가 담겨져 있다. 우선 저자는 여러 철학자들의 목소리를 통해 진정한 자신을 숨기고 사는 현대인들에게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라고 외친다.

니체와 임제의 생각에 기대 허황하고 조작된 미래에 저당 잡히고 사는 우리에게 현재의 소중함을 알려주고 있다. 타인에 의해 금지된 욕망을 욕망하게 된다는 라캉의 말과 페르소나만큼 맨얼굴도 중요하다는 에픽테토스의 가르침도 전해준다. 또한 아무 생각 없이 눈치 보며 사는 우리를 개에 비유하는 이지와 쇄락의 경지를 가르치는 이통, 나라는 껍데기를 버리고 공(空)의 이치를 역설하는 나가르주나, 틀이라는 강박 관념을 버리라는 혜능, 초월적인 진리를 추구하기 전에 먼저 나 자신에 충실 하라는 최시형, 습관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라베송, 배려함과 눈에 띔의 차이를 발견한 하이데거, 이론과 실천 모두를 강조하는 지눌, 보는 관점에 따라 전혀 다르게 보인다는 미투라나, 언어의 의미는 구체적 사용과 그 규칙에 의해 결정된다는 비트겐슈타인, 최선을 다 한 후에 운명의 뜻을 기다리라는 맹자, 죽음을 두려워해서도 삶을 경시해서도 안 된다는 에피쿠로스의 편지를 전해준다.

제2부 '나와 너의 사이'에서는 타인과의 관계에 대한 철학자들의 가르침을 전해준다. 다른 사람들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그들과 윈-윈(win-win)의 관계를 맺기 위해서 가져야할 지혜들을 소개하고 있다. 책임을 위해서는 자유가 있어야 한다는 칸트, 조화가 전체주의의 이데올로기에 봉사한다고 고발하는 레비나스, 자유와 사랑의 이율배반적인 관계를 간파한 샤르트르, 진정한 배려인 서(恕)가 예(禮)의 핵심이라고 말한 공자, 수양보다 실천이 더 중요하다는 정약용, 순진함도 용서될 수 없다는 아렌트, 기쁨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라는 스피노자, 대가를 바라지 말고 주라는 데리다, 고통을 공감하는 것이 인(仁)이라는 정호, 민감한 감수성은 관심과 훈련에 의해 닦여진다는 라이프니츠, 차이를 견디고 타자를 포용하는 진정한 페미니즘을 주창한 이리가라이, 진정으로 타자를 이해할 수 있어야 사랑할 자격이 있다는 장자, 다시 사랑하기 위해 지금의 사랑을 비워야 한다는 원효, 진정으로 남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논리보다는 마음을 얻어야 한다는 한비자, 논리를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위험할 수 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편지를 전해준다.

제3부 '나, 너, 우리를 위한 철학'에서는 사회와 그 속에서의 인간에 대한 여러 가지 고민들을 털어놓는다. 웃음의 생명성을 강조한 베르그송, 대량 생산에 의한 복제가 아우라를 파괴한다는 벤야민, 유행과 같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려는 시도의 허망함을 지적한 리오타르, 베버와는 달리 자본주의의 기제를 소비와 사치로 고찰한 좀바르트, 비만과 과잉으로 치닫는 자본주의에 증여를 통한 다이어트를 권하는 바타유, 스펙터클 사회에서 진정한 여가를 즐기지 못하는 우리의 현실을 폭로하는 드보르, 운명을 받아들이는 지혜에 대해 말하는 왕충, 진정한 소통과 공감에 대해 이야기 하는 왕간, 현덕(玄德)의 의미에 대해 말하는 노자, 진정한 사랑을 역설하는 묵자, 진정한 사랑이란 실천에 있다는 베유, 주체로서 자유롭게 사는 방법을 말하는 바디우, 사랑은 객관적이라는 헤겔, 동등한 결연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들뢰즈, 노동보다는 놀이를 통해 행복을 추구하라는 하위징아, 정치적 합의와 대의민주주의의 허구성을 폭로하는 랑시에르, 진정한 진보는 휴머니즘에 있다는 마르크스의 편지를 전한다.

이 책이 가지는 가장 큰 매력은 고전의 세계에 빠지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끼게 만든다는 점이다. 저자의 편지들은 이 책에서 소개하는 여러 철학자들의 책을 보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만드는 매력을 발산하고 있다. 철학자들과 그들의 책에 대한 자세한 해제는 고전 내용 뿐 아니라 번역에 대한 평가, 관련 연구서까지 친절하게 안내한다. 그러나 '더 읽어볼 책들'이 책의 말미에 "겸손하게" 붙어있는 점이 아쉽다. 각각 해당되는 장에 있었다면 그 장의 화두에 관한 편지를 읽고 그 지방으로 여행하려고 하는 독자들에게 주체적인 여행을 떠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든다. 마흔 아홉 개의 편지들이 각각 완결성을 가지려면 책에 대한 소개가 병 속에 들어가야 한다.

사실 아쉬운 점들은 더 있다. 우선 논쟁적인 면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아쉽다. 성철과 지눌을 대비시키는 장면 등 몇몇 곳을 제외하면 철학적 논쟁을 자극하는 점이 별로 없다. 서양의 전통에서 아르구멘툼(argumentum)은 논쟁을 의미하는 동시에 논증도 의미한다. 한 권의 책에서 너무 많은 철학자들을 소개하다보니 논증과 논쟁의 과정이 생략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점에서 독자들로 하여금 비판적으로 생각하게 해주는 구조는 아닌 것 같다. 대립되는 철학적 입장을 소개하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사실 너무 많은 편지는 초점과 깊이를 상실할 수 있다. 주체와 관계, 사회에 관한 온갖 이야기를 전하려하다 보니 책 소개에 그치고 만다는 비판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고독과 외로움이 경감되고 인간적으로도 성장할 수 있는 유리병편지는 가끔 우연히 발견해야 약효가 있지 않을까? 마흔 여덟 개가 패키지로 묶여 있는데도 자못 설렘을 억누르며 열어볼 수 있을까?

쇼펜하우어는 책을 많이 읽는 사람에게 경고했다. 사색 없이 다독(多讀)하는 사람은 글씨본에 따라 글씨 연습을 하는 사람과 같다고. 이 책을 읽을 때는 반드시 편지를 쓰기 바란다. 강신주가 철학자들의 편지를 읽고 자신도 우리에게 편지를 썼듯이, 이 책의 독자들도 편지를 써야 한다. 누구에게든. 그래야 이 책에 나오는 철학자들의 생각이나 강신주의 생각이 곱씹는 과정 없이 우리 머릿속에 각인되는 일이 없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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