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서 경제학을 접한 사람이라면 밀턴 프리드먼이란 이름이 퍽 친숙할 것이다. 밀턴 프리드먼이 안나 슈워츠와 함께 1963년에 저술하여 통화주의라는 경제학 조류를 만들어낸 <미국 화폐사(A Monetary History of the United States, 1867-1960)>에서 대공황을 다룬 제7장이 2008년에 독자적인 단행본 형태로 출간되었고, 이를 우리말로 옮긴 번역본이 <대공황, 1929~1933년>(양동휴·나원준 옮김)이란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미국 화폐사>, 특히 제7장의 탄생은 20세기에 경제학의 사고를 전환시킨 사건들 가운데 하나이다. 47년이 지난 지금, 이 책에서 프리드먼과 슈워츠가 제시하였던 견해의 많은 부분이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있다. 하지만 그 과정은 비판과 반박, 수정과 선별, 재해석과 자기반성을 동반한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만큼 이 책은 많은 논란, 혼동, 고민을 낳은 문제작이다.

이 책이 처음 출판되었던 1963년의 세계는 신고전파 종합적인, 소위 '재정적 케인스주의'가 지배하고 있었다. 경기 순환은 소비나 투자의 변동으로 인해 발생하는 것이며, 이러한 민간 부문의 실물 수요가 잠재적인 국민소득 수준에 못 미치거나 넘어서게 되어 나타나는 것이 불황과 인플레이션이며, 정부가 이러한 과부족을 상쇄시키는 조세나 정부 지출의 변동과 같은 재정 정책을 이용하여 경기를 안정시킬 수 있다는 믿음이 팽배하던 시절이었다.


▲ <대공황, 1929~1933년>(밀턴 프리드먼·안나 슈워츠 지음, 양동휴·나원준 옮김, 미지북스 펴냄). ⓒ미지북스
동시에 미국 대륙의 지리적 개척이 완성되고 인구 증가가 둔화되면서 장기적인 수요 감소에 따른 대공황의 재발을 우려하던 시절이었다. 화폐적 요인, 혹은 통화량의 변화는 이러한 실물적인 변화를 반영하는 것일 뿐 독자적인 중요성을 갖지 않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이러한 때에 프리드먼과 슈워츠는 "대공황이 사실은 통화 요인의 중요성에 대한 비극적 증거"임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소비나 투자가 아니라 화폐적 요인이 경제에 미치는 중요성을 감안한다면 당시 미국 경제가 걱정하여야 하는 것은 대공황의 재발이 아니라 인플레이션이었던 것이고 이러한 프리드먼의 예견은 1970년대에 적중하였다.

물론 신고전파 종합적인 케인스주의를 비판하고 인플레이션에 대한 우려를 지적한 케인스주의자들도 있었다. 케인스에 대한 금융적 해석을 시도했던 하이먼 민스키가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하지만 신고전파 종합적인 케인스주의의 사회 공학적 인식을 중심으로 한 경제학계의 주류적인 사고방식을 뒤바꾸어 놓고, 통화 요인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중앙은행 정책의 초석이 되게끔 한 것은 통화주의의 성과였다.

이 책은 프리드먼이 평생에 걸쳐 제시한 중요한 주장들과 견해가 형성된 터전이라는 점에서 통화주의의 경전이라 할 만하다. 이 책이 이처럼 강력한 영향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풍부한 역사적 디테일을 활용하여 무지와 관료주의, 리더십 부재와 혼선, 책임 회피 등으로 얼룩진 통화 당국이 외생적 충격에 대해 그릇되게 대응함으로써 발생한 통화량의 변화가 대공황을 심화시킨 여러 사건들의 원인이었음을 대공황의 역사 속에서 반복적으로 확인하는 방법, 요즈음 말로 "자연 실험(natural experiment)"의 방법을 성공적으로 구사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1920년대에 연방준비제도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뉴욕 연방준비은행 총재 벤자민 스트롱의 갑작스런 죽음 이후, 1928~29년에 주식 시장의 투기를 억제하고자 시도하였던 연방준비제도의 긴축 정책으로 인해 물가 하락과 경기 하강이 시작되었다는 설명. 1930년 12월에 뉴욕의 대형 은행이었던 '뱅크 오브 유나이티드 스테이츠(Bank of United States)'의 파산을 방치함으로써 발생한 공포감의 전염이 전국적으로 현금 선호도를 높였음에도 불구하고 공개 시장 매입을 통해 본원통화량을 증가시키는 데 실패하였던 것이 은행들의 제2선 준비자산 급매 사태를 초래하여 전반적인 자산 가격의 하락과 은행 건전성 악화를 가져왔으며, 은행위기의 연쇄적 악화가 통화량의 급격한 감소를 초래하여 경기 순환적인 불황이 대공황으로 발전하였다는 설명.

1931년 9월에 영국이 금본위제를 탈퇴한 이후에 전국적인 예금 인출 사태가 전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달러 가치를 지지하고자 두 차례에 걸친 대폭의 금리 인상을 시행함으로써 대공황을 심화시켰다는 설명. 의회의 압력으로 1932년 4월과 6월 사이에 이루어진 공개 시장 매입 정책을 7월에 중단함으로써 경제가 다시 악화되었다는 설명. 1932년 11월에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당선된 때부터 1933년 3월에 업무를 시작할 때까지 금본위제 탈퇴 등과 관련한 불확실성의 증대가 달러의 금 태환 사태를 초래했고, 이는 다시 연방준비제도의 방어적 조치들과 대량 은행 파산사태를 가져와 미국 경제가 파국을 맞았다는 설명 등등.

이처럼 프리드먼과 슈워츠는 1차 사료까지 인용한 수많은 각주들을 동원하면서 대공황의 전개 과정에서 통화 요인이 원인이 되어 경기가 악화되었음을 반복적으로 확인함으로써 당시에 지배적이었던 사고방식의 전환을 시도하였다. 무엇보다 이 책이 대공황에 대한 기존의 설명을 압도할 수 있었던 것은, 대공황은 단순한 불황이 아니라 물가 수준이 반토막이 나고 비농업 부문의 실업률이 40%까지 상승하였으며 전국 은행의 40% 정도가 문을 닫았던 수년에 걸친 경제적 파국이었음에 주목한 것이다.

이 정도의 경제 위기가 소비나 투자의 감소 등으로 설명될 수는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 대공황의 원인을 최초의 경기 하강을 초래한 요인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주기적 불황을 수년에 걸친 역사상 유례없는 대공황으로 발전시킨 요인들에서 찾아야 한다는 인식에서 출발하여 대공황을 다시 설명하고자 한 것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참으로 당연한 이야기인데 당시의 사회 공학적인 케인스주의로서는 참으로 의외의 허를 찔린 셈이다. 요컨대 대공황을 애초의 불황과 구별하여, 불황을 대공황으로 만든 원인이 무엇인가를 찾고자 한 문제 제기 방식의 천재성이 이 책의 진가라 하겠다.

하지만 문제 제기가 타당하다고 해서, 프리드먼과 슈워츠가 제시한 답, 즉 대공황의 원인은 결국 반복된 통화 정책의 실패이고 이는 연방준비제도의 무지와 무능 때문이었으며 불황과 인플레이션이 통화량의 변화 때문에 초래되는 현상이라는 설명까지도 반드시 타당하다는 보장은 없다. 이 책이 시도한 다양한 사건들의 전개 과정에 대한 역사적 설명을 놓고 이후의 수많은 논의와 연구들이 어떠한 수정을 가했는지에 대해 소개하는 것은 짧은 서평이 감당하기에 불가능한 일이다. ('옮긴이의 말'이나 이 책을 번역한 양동휴의 논문 등을 참조하기 바란다.)

다만 대공황의 전개 과정에 대한 이 책의 역사적 설명이 충분하지 않으며 우리의 이해가 아직도 부족함을 지적하기 위해 은행 위기와 금본위제라는 두 가지 문제만 짚어보기로 하자. (대공황 초기에 대한 설명에서 벤자민 스토롱의 죽음이 갖는 의미를 강조한 것에 대해 많은 이들이 황당함을 표한 바 있음을 지적하는 선에서 넘어가기로 하자.)

이 책에서는 대공황의 여러 국면마다 통화량의 급감을 초래한 은행 위기들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이 은행 위기들의 원인이 무엇이고 은행 위기가 과연 통화량의 증가만으로 진정될 수 있는 것이었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아직 우리의 이해가 부족하다. 프리드먼과 슈워츠는 시장은 별 문제가 없었는데 통화 당국의 정책 실패가 사태를 악화시켜 대공황을 초래하였음을 설득력 있게 강조하기 위해, 은행 위기가 어떤 외생적인 계기에 의해 우연하게 발생한 것이라는 식으로 설명한다. 위기 시에 파산한 은행들에게 구조적이거나 경영적인 문제가 있었을 가능성에 대해, 때로는 노골적으로 때로는 암묵적으로 외면한다.

저자들이 불황 국면에서 대공황 국면으로 전환되도록 한 계기로서 그토록 중시하는 1930년 말의 은행 위기를 설명할 때에 이들은 1920년대에 계속해서 높은 은행 파산율을 보였던 "농업 지역"에서 10월부터 파산이 확산되다가 12월에 뉴욕의 대형 은행이 연방준비은행과 주 은행 당국, 뉴욕 시의 은행계의 외면으로 인해 파산하여 전국적인 공포감의 전염을 초래하였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1920년대에 꾸준히, 그리고 많이 파산하였던 것은 "농업 지역" 은행이 아니라 "농촌" 은행이었으며 1930년 11월에 일어난 연쇄 파산 사태는 농업 소득의 비중이 높은 남부 지역에 위치한 콜드웰(Caldwell) 그룹의 계열 은행들이었다. 이 가운데에는 도시 은행들도 많았다.

필자는 여러 연구를 통해, 첫째 11월과 12월의 은행 위기가 1920년대 미국 은행 산업의 집중화 과정에서 발전한 체인-그룹 조직의 은행 계열화나 증권회사 자회사 제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점, 둘째 프리드먼과 슈워츠가 주장하듯이 1931년 3월 이후에 은행 위기가 재발하여 확산되어 간 것이 아니며 2차 은행 위기라 할 수 있는 것은 1931년 6월에 시카고에서 부동산 대출의 비중이 높았거나 위험을 더욱 많이 추구한 체인-그룹 계열 은행들을 중심으로 일어났다는 점, 그리고 셋째 시카고 은행들의 주식 가격을 통해 볼 때 1930년 말의 은행 위기는 체인-그룹에 계열화된 은행들에게 더욱 나쁜 소식이었다는 점 등을 지적한 바 있다. 이는 은행 위기가 우연한 사건을 계기로 무능한 정책 당국에 의해 발생한 것이 아닐 수 있으며 은행 산업의 제도적 문제이거나 자산 가치의 거품과 관련된 경제적 문제이거나 혹은 은행 경영상의 문제일 수 있기 때문에 단순히 통화량의 조절만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을 수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대공황 시기에 은행 위기 과정에서 파산한 은행들이 살아남은 은행들보다 위험을 더욱 많이 추구한 은행들이었음을 보여 주는 연구들은 곧잘 "전염 효과"를 부정하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시장 참여자들은 합리적이며 금융 시장에서 정보가 효율적으로 전달되기 때문에 패닉에 빠진 대중들의 무차별적인 예금 인출로 인해 건전한 은행이 파산하는 일은 드물다는 것이다. 그런데 합리적인 경제 주체들의 최적화 행위와 그에 따른 시장의 효율성에 대한 믿음에 기초하여, 대공황을 초래한 것은 시장이 아니라 정부임을 강조하려는 프리드먼과 슈워츠의 역사적 설명에서 공포감의 전염이 이토록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은 자가당착이라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필자는 프리드먼과 슈워츠의 미덕이 경제 주체들의 합리성에 대한 믿음에 기초한 일관된 자유주의적 주장뿐만 아니라 철저한 현실주의적 설명에 있다고 믿는다. 은행 위기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부실한 은행이 더욱 빈번하게 파산했다고 해서 공포감의 전염이 없었다고 단정 짓는 편이 오히려 논리적 일관성만을 고집하는 이데올로기적인 집착이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염된 공포감의 정체가 제도나 은행들의 재무 상태, 혹은 거품이 붕괴된 경제에 대한 불신이라면 은행 위기는 경제 위기의 외생적인 원인이 아니라 내생적인 요인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대공황 시기 은행 위기에 대한 이해는 아직 우리의 과제로 남아 있다. 1930년 말의 은행 위기에 대한 이 책의 상세한 설명이 성공적이라 판단한 프리드먼은, 1970년대에 <뉴스위크> 등을 통해 '대공황의 원인은 반유대주의'라는 선정적인 주장을 펴기도 했다. '뱅크 오브 유나이티드 스테이츠'가 유대인이 창업하고 그 아들이 빠르게 성장시킨 은행이라서 반유대주의적인 정서를 가졌던 뉴욕의 은행가들이 구제 조치에 미온적이었으며 파산을 방치하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은행은 자회사 제도를 이용한 범죄적 경영으로 인해 구제불능 상태였음을 후속 연구들은 보여주었다. 1931년 이후의 은행 위기에 대해서는 후속 연구가 많지 않고 아직 우리의 이해가 충분하지 않은 상태이다. (위커와 칼로미리스, 필자의 연구 정도를 꼽을 수 있다.)

다음으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는, 수년에 걸쳐 통화 당국이 디플레이션과 실업, 은행 위기에 직면하여서도 긴축 정책을 반복하였던 것이 대공황의 궁극적 원인이라고 하더라도, 이것이 반드시 통화 당국의 무지와 무능 때문만은 아닐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프리드먼과 슈워츠도 통화 당국의 무지를 설명하면서 진성 어음주의나 금본위제와 관련하여 발생한 달러 공격에 대한 그릇된 대응을 중시하였다. 하지만 이들은 이를 통화량의 감소가 경제에 주는 충격에 대한 당국의 무지라는 점을 강조한 나머지 금본위제에 대한 집착이 고전학파적인 세계관과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 이데올로기, 혹은 망딸리떼라는 점을 외면한 듯하다.

이 책의 역사적 설명을 두고 통화주의자들과 1970~80년대에 치열한 논쟁을 벌였던 테민을 필두로 한 많은 케인스주의자들이, 대공황의 궁극적인 원인을 여러 자본주의 국가의 당국과 지도자들 사이에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었던 금본위제에 대한 집착에서 찾는 방향으로 1980년대 말부터 선회하였다. 이를 통화주의의 승리하고 해석하는 경우도 간혹 있다. 하지만 아이켄그린 등이 대공황에서 금본위제의 역할을 강조하는 결론이 이 책의 설명과도 부합한다고 서술하거나 버냉키가 은행 위기의 금융적 효과를 강조한 자신의 연구를 이 책의 윤색이라고 겸손하게 표현한 것은, 통화적 요인과 정부 정책 실패의 중요성을 인식시켜준 프리드먼과 슈워츠에 대한 예의라고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할 것이다.

필자의 판단으로는 이 책을 중심으로 한 대공황에 대한 경제사적 논쟁과 1970~80년대 인플레이션의 경험을 통해, 케인스주의는 신고전파 종합적인 재정적 케인스주의에 대한 자기반성을 단행하였다고 생각된다. 다시 말해 소비나 투자의 감소나 재정 정책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데 집착하는 주장보다 금본위제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된 긴축 정책을 비판하는 주장이 진정한 케인스주의의 정신에 더욱 부합한다는 케인스주의자들의 깨달음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양동휴 등이 번역한 테민 등의 <대공황 전후 세계 경제>(동서문화사 펴냄)는 케인스주의의 이러한 세계관을 잘 보여준다.

자유주의를 복권시키고자 필생의 노력을 기울였고 경제학에서 고전학파적 세계관을 부활시킨 새고전학파를 키워낸 프리드먼의 대공황 설명에서 공포감의 전염 효과나 금본위제에 대한 집착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생각해본다면, 다음과 같은 프리드먼에 대한 재해석도 가능하지 않을까? 정부가 얼마나 무지할 수 있는지, 관료 조직이 얼마나 경직되고 책임 회피적일 수 있는지, 관료들이 얼마나 타성적이고 이기적일 수 있는지, 그리고 이러한 정부나 통화 당국에 대한 안일한 신뢰가 경제를 얼마나 파국으로 몰고 갈 수 있는지를 일깨워주었다는 점에서 프리드먼을, 사회 공학적인 세계관에 젖어 있던 케인스주의가 거듭나도록 도와준 진정한 케인스주의자였다고 한다면 지나친 호들갑일까?

<대공황, 1929~1933년>은 학파를 떠나 모든 경제학도들에게 경제의 움직임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명저이다. 정부의 상황 인식과 관련된 여러 가지 문제나 정책 수립 및 시행에 따른 시차의 문제, 민주적 정치 과정이 치러야 하는 정책의 불확실성에 따른 비용, 선착순으로 빚을 갚는 예금 은행의 부분준비제도로 인해 합리적인 경제 주체들의 행위가 공포감의 전염을 빚어내는 데 따르는 금융 시스템의 불안정성 등등. 복잡한 역사적 사건들에 대해 수많은 각주를 사용하여 쏟아내는 격정적인 이 책의 서술은, 경제가 살아 있는 사람들이 엮어내는 드라마임을 생생하게 가르쳐준다. 동시에 태어난 지 4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수많은 의문과 과제를 제기한다는 점에서 이 책은 여전히 문제작이다.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점을 일깨워주면서도, 동시에 끝없이 다시 해석될 가능성을 열어둠으로써 후세들을 기쁘게도, 당혹스럽게도 만드는 책.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역시 고전이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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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나이가 들어 이런 저런 사회적 책무를 벗은 후엔 강변에서 살고 싶다는 꿈을 오래 전부터 꾸어왔다. 농사를 지을 자신은 없지만 그래도 강변에 살면서 그림도 그리고 벗들도 불러 귀하게 담근 술 한 잔 서로 건네며 정담을 나누는 미래를 갈망하게 된다. 읽고 싶은 책 쫓기듯 읽지 않으면서 맑은 강바람에 씻긴 흙냄새에 취해 세월 가는 줄 모르게 살다 어느 날 아무런 집착 없이 평안한 마음으로 세상을 하직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은 거다.

그러나 사실 그런 인생이 어디 그리 쉽게 얻어질 수 있겠는가? 나이 들면 낯선 시골살이를 제대로 감당할 힘은 이미 없고, 그때쯤이면 웬만한 땅은 비싸져 엄두가 나지 않을 듯하고 무엇보다도 여기저기 강변이 유락 시설로 채워져 남아나는 곳이 과연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혹시 벌써 너무 늦은 것은 아닐까 하는 염려도 슬그머니 생긴다. 또 이런 생각과 꿈을 나만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 테니 그 틈을 뚫고 나가는 경쟁률도 만만치 않을 듯하다.

오늘날의 이런 현실은 과거를 돌아보면 기이하기조차 하다. 너도 나도 어떻게든 도시로 올라와 사는 것이 낙오하지 않는 길이라고 여기는 시대에 낙향은 어리석은 선택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런 선택을 일찌감치 한 이들은 오늘날 도리어 선두에 서 있다. 자연과의 거리가 멀면 멀수록 문명의 성취와 수준은 높아진다고 믿었던 때에 시골은 "후진 곳"이며 단지 개발 대상일 뿐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이런 사고방식이 도리어 "후진 것"이 되었다. 예기치 못했던 역전(逆轉)이다.

정작 후진 것은 무엇인데?


▲ <홍천강변에서 주경야독 20년 : 역사지리학자 최영준의 농사일기>(최영준 지음, 한길사 펴냄). ⓒ한길사
지리학자 최영준의 <홍천강변에서 주경야독 20년>(한길사 펴냄)은 그런 역전을 애초부터 목표로 한 것은 아니지만 결국은 그런 자리에 서게 된 이의 담담하면서 일깨움이 많은 일상의 기록이다.

그런데 그 기록은 하루 이틀이 아니고, 무려 20년이다. 그건 어찌 보면 때가 되면 그리하겠노라가 아니라 마음먹었을 때부터 어떤 식으로든 시작하는 것이 제대로 된 시작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당연하다. 수십 년을 도시의 논리에 맞춰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거기서 탈출하면 해결책이 자연스레 나온다고 여기는 것은 천만의 말씀이다.

최영준의 글을 처음 마주한 것은 지난 해 여름에 나온 한길사 무크지 <담론과 성찰>의 원고를 통해서다. 눈이 번쩍 뜨였다. 그리 꿈꾸는 시골 생활이야 나이 들어 슬슬 시작하지 하던 생각이 뭘 모르고 하는 것임을 새삼 깨우친다. 일기란 그 사람만의 일상세계라는 점에서 자칫 읽는 이와 밀착되지 못할 수도 있는데 그의 글은 군더더기 없이 시야에 훤히 들어왔다. 홍천강변이 보이는 듯 했고 흙냄새가 손에 잡히는 느낌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그의 글은 나만이 아니라 그의 글을 읽은 이 거의 모두에게 유기농 양식이 되었다.

요즈음은 도시에 살다가 궁벽한 산골에 들어가 지내는 이런 농촌 생활기가 뭐 그리 희귀한 글은 아니게 되었다. 낙향이 아니라 귀농이라는 말로 압축되는 생활상의 변화가 지난 세월동안 우리 사회 내면에서 진행되어온 까닭이다. 그런데 최영준의 이 일기가 주목되는 까닭은 그 호흡이 어느 대목에서도 조급하지 않고 자기를 내세우지 않으며 긴 시간을 통해 홍천 시골 사람이 되어가는 변화가 차분히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주경야독이라…

어느 모임에서 초면으로 만난 최영준에게 글 잘 읽었다며 독자로서의 감상을 전했더니 겸손하고 소탈하게 웃는다. 농부가 된 지리학자의 미소는 그가 가꾸는 흙만큼 정겹다. 낮에는 밭 갈고 밤에는 책 읽는 "주경야독(晝耕夜讀)"이라는 생활이 길러온 기운이다. 우리 시대가 잃어버린 소박함과 진지함이 그 안에 숨 쉬고 있었다. 차도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던 홍천강변 협곡 20년의 세월이 만들어낸 저력의 강이 그의 삶 속에서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어디 좀 괜찮은 땅 있으면 알아봐줘, 하는 식의 질문이 던져진다면 그런 물음에 그의 대답은 이렇다.

"농토를 소유하고자 한다면 우선 땅을 사랑해야 하고, 작물을 가꿀 만한 체력이 있어야 하며 누구에게라도 배울 수 있는 겸손함을 가져야 한다. 또 작물이 자라는 과정을 애정으로 지켜보는 인내력이 있어야 한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말을 맺는다.

"산골 생활 20년의 체험을 장황하게 끼적거렸으나 이로써 내 기록이 끝난 것은 아니다. 나는 기력이 다할 때까지 땅과 함께 하는 생활을 계속할 것이며, 하루하루 진정한 촌사람으로 변해갈 것이다."

땅에 대한 사랑, 작물을 길러낼 체력, 겸손함 그리고 애정이 깃든 인내라는 농부의 깨달음 속에서 그는 매일 "진정한 촌사람"이 되어가는 것을 꿈꾼다. 강남 고급 아파트와 명품에 대한 욕망으로 온 몸을 두른 이들이 "촌놈"이라는 말 속에 담는 경멸을 보기 좋게 되받아치는 격이다. 이런 기세가 사라진 시대에 그의 글은 흙과 강, 그리고 산과 나무와 밭을 선택한 이의 자존심과 그걸 미덕으로 만들어온 세월의 힘을 우리에게도 나누어준다.

조롱당했던 적막강산

그렇지 않아도 그는 책머리에 이런 소회를 적고 있다.

"내가 시골에서 단조로운 생활에 빠져 있는 동안 옛 친구들 중에는 고관으로, 경제적, 문화계의 저명인사로 이름을 낸 인물들이 적지 않다. (…) 그들 중 상당수는 폭넓은 사회생활을 즐겨왔다. 그런데 이제 모두들 은퇴하여 활동을 접게 되자 오랫동안 눈에 뜨이지 않았던 서생의 존재가 부러움의 대상이 되니 기이한 일이다."

"협곡의 궁벽한 적막강산"에서 지내면서 그가 일구어낸 20년은 세월이 흐르니 누구나 탐내는 보물이 되었다. 그건 그가 한때 주변에서 "조롱"당했던 선택이었다.

최영준이 표현한 그 궁벽한 적막강산은 어떤 모양인가?

"팔봉산 기암절벽을 휘돌아 남쪽으로 내려온 홍천 강물이 원의 반 바퀴를 돌아 반복교에 도달하면 강폭이 넓어져 망상류(網狀流)를 이룬다. 강물은 병풍산지 앞을 지나고 쉼바위를 만나 흩어졌던 물길과 합치면서 방향을 남으로 돌려 뒷들을 스친 후 황새여울을 통과하고 밭베루산 자락 앞에서 둥글게 유로를 바꾼다. 여기서 홍천강 유로는 북으로 방향을 틀었다가 강변까지 바싹 다가선 절터산 줄기의 벼랑을 만나 다시 큰 포물선을 그리면서 모곡(茅谷)으로 흘러간다."

아, 가보고 싶지 않은가? 강원도 정선 동강 길을 따라 걷다보면 절경이 펼쳐지는 것을 가슴 벅차게 느끼게 되는데, 그와 닮은 최영준의 협곡 묘사나 그가 손수 그린 그림에서 우리는 안개내린 산봉우리와 푸른 잎 비취는 맑은 물가 그리고 겹겹이 이어진 계곡의 미로와 아무에게도 간섭받지 않고 저 가고 싶은 대로 흐르는 물소리를 듣는다. 알고 보면 이런 풍경은 그저 얻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는 1970년대 초에 이미 당시 개발되기 이전의 양재천 시골 땅을 준비해두었다가 도시 계획으로 그곳을 포기한 이후의 사연이 있었던 것이다.


ⓒ한길사

부창부수까지

당시 양재천 시골을 가자면 최영준의 말대로 그의 집이 있는 동대문에서 한나절이 꼬박 소요되었던 것을 떠올리면 그때부터 그는 이런 식의 시골살이의 불편함을 일찍이 감수할 줄 알았던 것이다. 그건 실로 시대를 앞선 부러운 안목이고 진지함이다.

도시 계획으로 접은 그의 낙향의 꿈은 1990년 4월 홍천 산골의 어느 낡고 남루한 시골채를 구입하면서 새롭게 써진다. 도시 생활에서 좀체 벗어나지 못하는 현대 여성들과는 달리 미술가인 그의 아내가 홍천 계곡의 풍치에 반해 기뻐한 것도 단단히 한 몫을 한다. 찰떡 부창부수(夫唱婦隨)다.

그가 산골 늙은 농부에게 땅을 거저 붙여먹도록 하면서 농사를 배우는 이야기라든가 썩는 냄새가 나는 퇴비를 어느새 구수하다며 손으로 집어 뿌리게 되는 익숙함을 몸에 익히게 되는 과정이라든가 흙 속에서 인생 철학을 깊이 다지는 모습 등이 적혀 있는 그의 일기는 "일상이 주는 감격"에 대해 생각하도록 한다.

실패도 적혀 있다. 풋내기 농부의 고구마 농사 실패기도 있고 시골집 관리의 어려움도 고민한다. 그에 더해 사냥이나 투망에 대한 분노, 관행 농업에 대한 일침, 도시인들의 허세와 고생에 대한 젊은이들의 회피도 그의 시선에서 빠져나가지 못한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의 손에 책이 멀리 있는 적이 없다.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읽는 책은 유달리 강한 인상으로 그의 뇌리를 일깨운다.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의 한 대목은 이렇게 짚어진다.

"농촌으로부터 도시로 반입되는 모든 농산물은 생산지에서 깨끗이 다듬으면 농산물 찌꺼기를 토양으로 되돌려 비옥하게 하고 도시에서는 쓰레기를 줄일 수 있게 된다."

서울 가락동 시장 산더미처럼 쌓인 채소 쓰레기의 악취 풍기는 광경을 보면서 그의 시골살이에서 얻은 농사의 지혜가 이어진다. 책은 이렇게 해서 그의 몸이 된다.

이들 부부가 사는 모습도 부러운 대목이다.

"수년 동안 우리 부부는 거의 매주 시골로 주말 나들이를 해왔다. 좁은 차 안에서 우리는 참으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데 대화의 내용은 매우 다양하다. (…) 우리는 주말 대화의 소재를 찾기 위해 꾸준히 글을 읽는다. (…) 오늘 아내와 나는 앞으로는 남과 다투지 말고 지나치게 부를 축적하는 데 집착하지 말자고 했다."

주말 시골살이로 시작했던 홍천길이 이제는 그들의 전적인 삶이 되었다. 그러면서 지난 스무 해를 꼬박 서로 사랑하고 아낀다.

이런 대목도…

그의 일기에는 단지 홍천강변의 세월만 기록된 것은 아니다. 우리의 정치·사회적 격변과 변화에 대한 그의 생각과 소견도 끼어 있다.

나와 그의 생각은 여기서 많은 차이를 보인다. 그러나 그건 그대로 존중하고 싶다. 마음이 맑고 착한 이들이 격류가 흐른 역사로부터 받은 상처가 그리 투영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 자신 이렇게 말한다.

"나는 젊은 학생들이 흔히 말하는, 이른바 보수 꼴통에 속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도 4·19 때는 청와대 입구 통의동에서 시위대에 참여했다가 총격을 받고 숨진 청년의 시신을 옮긴 적이 있다. 교사 시절에는 박 정권의 철권통치를 비판하는 말을 했다하여 경찰의 조사를 받은 적이 있다. 그때는 나도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세상이 그리웠다."

그러나 그는 천상 조용하고 평화로운 삶에 기우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역사의 격동이 가져오는 힘겨움이 그에게 반가울 리 없고 그런 와중에 목격하게 되는 이들의 위선에 고개를 돌리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건 그에게 "세상의 소음"으로 다가온다. 이 점은 언젠가 그와 대화를 나눌 수 있다면 그저 소음이기만은 한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으나 지금은 그에게로부터 배울 것이 더 많다는 생각이다. 그의 삶은 여백이 있고 정직하며 흙 앞에서 겸손하기 때문이다.

최영준이 산골살이에서 깨친 대목 하나에 이런 것이 있다.

"우연한 기회에 나는 밭갈이 하는 농부가 쟁기를 끄는 황소와 대화하고 심지어 논밭의 작물과 야생동물들과도 의사소통을 하는 것을 보았다. 물론 그러한 대화는 일방통행적이어서 어찌 보면 정신 나간 사람의 독백처럼 들리지만 그것은 분명 인간이 자연과 친밀해지는 방법임에 틀림없다.

우리 시골사람들이 내게 마음의 문을 열어주기까지는 5~6년이 걸린 것 같은데 내가 그들의 마음을 읽기까지는 아마도 10여 년이 걸린 듯하다. 다시 말하면 내가 그들만큼 감정이 순수하고 생각이 단순한 사람이 되기까지 상당한 시일이 걸린 것이며 최 선생(그곳의 농부)은 아마도 촌사람화한 내 모습에서 친근감을 느낀 것 갈다."


ⓒ한길사

흙의 마음

진실에 속성은 없다. 소통에 거드름은 악이다. 자연의 마음을 열고, 그 마음이 우리의 마음이 되기까지도 적지 않은 세월과 체험이 녹아들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마저도 우리 사회는 유행과 시장의 논리로 선전되고 있는 중이다. 그런 까닭에 최영준의 20년이 지닌 가치는 소중하다. 도시가 농촌에게 고개를 숙이고 마음을 낮추는 법을 배우지 않는 한, 우리에게 어떤 희망이 진정으로 태어날까 싶다.

아무리 그럴싸한 이야기를 하고 내로라는 지식을 과시한다 해도 흙의 마음을 가진 이들과 대화를 할 수 없다면, 또는 그 마음이 되지 못한다면 오늘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그 숱한 모순과 문제를 풀기는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역시 그러자면 흙을 사랑하고 그 흙과 마주해서 버틸 체력이 있어야 하고 애정과 인내를 배워야 한다는 최영준의 말은 되풀이 곱씹고 싶다. 오늘날 세상은 돈을 사랑하고 욕망을 채울 체력을 기르며 조급함에 너무도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다.

한길사를 통해 홍천강변의 그의 집에 갈 기회가 있었는데 다른 일로 놓치고 말았다. 아쉬웠다. 그러나 그의 책으로 반의반쯤은 그 언저리를 다녀왔으니 언젠가 그곳에 가면 분명 낯설지 않은 풍경을 볼 것으로 기대한다. 그 풍경 속에서 나는 무엇을 생각하게 될는지 또한 기대가 된다.

이런 척박한 시대에 그의 20년 일기가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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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7대 대통령 선거를 1년여 앞둔 지난 2006년 11월, 한 여론조사에서 가장 진보적인 대선 주자로 꼽힌 인물은 이명박 당시 대선 후보였다. 당시에도 그렇고 지금도 틀림없는 우파인 그가 왜 이런 평가를 받았을까. 무슨 오해가 있었던 것일까?

<좌우파 사전>(구갑우 외 14인 지음, 위즈덤하우스 펴냄)을 보면, 이런 결과는 '진보적이라서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지지하기 때문에 진보적이라고 믿는다'는 사고틀의 작동 방식을 보여준다. 한국 사회에서 '진보'는 그 내용에 상관 없이, 인기 있는 정치 상품이다.

반면 정치 이념상 진보와 동의어로 간주되는 '좌파'는 전혀 다른 대접을 받는다. 심하게 말하면 욕설이나 저주에 가깝다. 한 가수 출신 영화배우가 '한국 영화계는 본바탕이 좌파'라며 불만을 표현했다가 논란이 일자 '영화계가 냉소적이었다는 의미'라며 해명한 사건은 이 단어가 처한 현실을 보여준다.

좌파와 우파 혹은 진보와 보수는 인간과 사회를 어떻게 바라보느냐를 가르는 가장 강력한 기준점임에도, 위의 예처럼 한국 사회에서는 그 의미조차 제대로 공유되지 못하는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나온 책이 바로 <좌우파 사전>이다. 한국 사회에서 갈등을 유발하는 22개의 핵심 쟁점을 놓고 명쾌한 좌파, 우파의 시각을 염두에 둔 비교, 분석을 시도한 것.

<프레시안>은 이 책을 염두에 두고 한국을 대표하는 좌·우 지식인의 대담을 마련했다.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과 조국 서울대학교 교수는 각각 보수와 진보 인사로 분류되지만, 상대 진영에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이 두 사람이 <좌우파 사전>의 추천사를 쓴 계기로 처음으로 한 자리에 마주 앉았다.

남재희 장관은 전통적으로 좌파, 우파의 역관계가 우파 쪽에 치우쳐 있었던 데다가 최근에는 기업까지 가세해서 이런 비대칭이 더욱더 강화될 가능성을 우려했다. 조국 교수는 그런 지적에 동의를 표하면서도 한국 사회에서 점점 더 좌파의 발언권이 커지고 있음을 지적했고, 특히 복지국가 논의의 확산이 그 예라고 주장했다.

두 사람은 이명박 정권 이래 남북 관계 악화를 한목소리로 비판하면서도, 촛불 집회에 참여한 적극적 대중에 대해서는 다른 평가를 내놨다. 남 전 장관은 촛불에서 언제든 등 돌릴 수 있는 불안정한 대중을 봤으며, 조 교수는 대의제를 보완하는 적극적 목소리를 들었다.

이 외에도 두 사람은 한국 사회에서 좌파와 우파의 대립을 놓고 폭넓은 이야기를 나눴다. 대담은 박인규 프레시안 대표가 진행했다. <편집자>

허공 보고 얘기하는 좌파·우파

프레시안 : <좌우파 사전>이 출간된 의미를 평가한다면?

조국 : 진보 대 보수든 좌파 대 우파든 서로 논쟁을 하려면 기본적으로 사용하는 개념이 통일돼 있어야 한다. 그런데 어떤 주제든 양쪽이 서로 다른 개념을 전제로 그야말로 허공을 보고 얘기하는 경우가 많아 논쟁의 합의점을 찾기 어려웠다.

<좌우파 사전>은 제목 그대로 사전이다. 우리가 쓰는 개념이 각각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를 확정해줬다는 데에 출간의 의의가 있다고 본다. 상대방이 어떤 의미로 저 말을 쓰는가, 그 사용엔 어떤 논리적 배경이 있는가를 양쪽 모두의 입장에서 충실히 소개했다.


▲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 ⓒ프레시안(최형락)
남재희 : 좌우 개념은 그 자체가 어렵고 애매하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통용되는 좌파라는 범주는 해방 이후부터 한국전쟁까지 쓰인 '좌익'하고는 의미가 또 다르다. '좌익=공산당' 등식에서의 좌익이 배제된 상태의 좌파, '진보파'로 좁힐 수 있는 좌파가 그것이다.

조국 교수의 말처럼 좌우 논쟁은 기본적인 개념을 정리하는 것부터가 상당히 어려운데, 형이상학이고 종교적인 차원까지 끌고 가면 대개 우파를 자처하는 이들이 근본주의(fundamentalism), 좌파를 자처하는 이들이 불가지론(agnosticism)에 가깝다. <좌우파 사전>은 이런 차원의 논의까지는 건드리지 않으면서 일상생활의 문제들 속에서 좌우 개념을 정리하려고 했다.

그런데 영어 공용화론과 영어 몰입 교육(19장)과 같은 문제까지 좌우파의 개념을 적용할 수 있는가에 대해선 좀 의문이다. 그건 좌우파로 나누지 않아도 될 문제라고 본다. 세상 모든 일을 좌우로 가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교육 문제가 크게는 좌우의 문제이긴 하지만 (영어 공용화론과 영어 몰입 교육 부분에선) 좀 작위적이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보면 책의 구분은 설득력이 있고, 필자들이 상당히 노력을 한 것 같다.

조국 : 말씀하신 대로 이 책은 좌파 또는 좌익에 대하여 고전적 정의를 전제로 하고 쓰인 책은 아니다. '좌파'라는 개념에 공산주의, 사회민주주의, 아나키즘 중 어디까지를 포괄하느냐 하는 문제는 빼놨다. 한국 사회에 크게 두 세력이 있고 넓은 의미에서 서로가 서로를 좌우라고 부른다는 정도의 맥락에서 그것을 다루고 있다.

프레시안 : 이 책이 해방 전후사를 비롯한 역사와 역사인식 문제를 다루지 않은 데 대해 아쉽다는 의견도 있었다.

남재희 : 좋은 지적이다. 좌담에 오는 길에 '그러고 보니, 요즘 한참 뉴라이트가 문제 삼고 있는 대한민국 건국사관 문제가 빠졌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국 : 개인적으로 정통성을 정태적으로 보지 않고 동태적으로 본다. 건국 당시의 시점에서 정통성이 누구한테 있느냐 판단했다고 끝나는 게 아니다. 가령 그 때엔 친일파 청산, 토지 개혁 등 정통성 문제에 있어서 북한이 남한보다 우위였을 수도 있다. 그러던 것이 남한에 민주화가 이루어진 1987년을 기점으로 정치, 경제적으로든 정통성 문제에 있어서는 남한 우위로 역전된다.

오늘 좌담의 주제는 아니지만, 이렇듯 정통성 문제는 동태적으로 접근하는 게 옳다고 생각한다. 이승만이 나라를 세웠으니 그걸로 끝이라고 하는 뉴라이트의 관점과는 차이가 있다. 뉴라이트 눈으로 보면 대한민국 건국에 있어서 남한만의 정부 수립에 반대했던 김구나 김규식도 모두 배제된다. 그럼 이들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우리에게 필요한 정통성은 이승만과 김일성을 넘어서는 정통성이어야 한다.


▲ 조국 서울대학교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언어에 의한 과잉 살상

프레시안 : 다시 책 얘기로 돌아가서 이 책은 진보-보수가 아니라 좌파-우파라는 개념을 쓰고 있는데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서 좌파란 '주류에 반대하는 나쁜 놈들', 척결 혹은 배제해야 할 대상이라는 의미가 강하다. 이런 현상을 어떻게 보는가?

남재희 : 농담 하나 할까? 추천사에 길게 인용했던 일본의 정치학자 이노키 마사미치가 예전에 한국에 왔을 때 "우파는 독수리처럼 깨끗하고 좌파는 비둘기처럼 지저분하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딱 맞는다. 이른바 인습적인 도덕률로 보자면 좌파 사람들은 참 지저분하다. (웃음)

1960년대에 읽었던 미국 글에서 "언어에 의한 과잉 살상의 시대(Age of verbal over-kill)"라는 표현을 본 기억이 있다. 적당히 하면 되는 말을 극단적으로 해서 상대방을 말로 살인한다는 뜻이다. 당시 베트남 전쟁 때문인지는 몰라도 언론에서 그런 표현이 많이 나왔다. 그런데 우리는 그때 뿐 아니라 해방 이후 지금까지 계속 언어에 의한 과잉 살상의 시대다.

한 쪽이 '좌빨'이라 불러대면 반대쪽은 '수꼴'이라 하기 시작한다. 특히 지난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땐 그야말로 말에 의한 살상이 벌어졌다. 사실상 그렇게 진보적이지도 않은 두 대통령을, 반대 세력이 완전히 빨갛게 칠해버리지 않았나.

이와 관련해 얼마 전 흥미롭게 읽은 문장이 있다. 미국의 한 잡지가 8월 말에 천안함 관련 특집 기사를 실었는데 거기 나온 문장이다. "한국의 좌파들은 소수를 제외하고는, 여당인 한나라당이 심각하게 걱정하는 것만큼 그렇게 친북적이지 않다."

한국에서 취재할 때 많이 들었을 '친북·좌빨' 표현을 의식하면서 쓴 얘기일 것이다. 왜 이걸 굳이 썼겠나. 김대중, 노무현 정권 당시에도 <타임>이나 <이코노미스트>를 보면 이들이 두 정권을 한국에서 어떻게 부르는지 의식하는 게 느껴졌다. 한국에선 두 대통령을 위험한 친북 좌파라고 몰아세울 때 이들은 온건 좌파, 중도 좌파 정도로 조심스럽게 규정했었다. 한국의 언론이나 여론이 언어로 과잉살상하고 있다는 걸 알고서 그런 것이다.

조국 : 우파가 공격적이라는 점에서 독수리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깨끗하다고 말하기는 쉽지 않다. (웃음) 좌파가 지저분한 비둘기 같다고 하시니 서글프다. 송골매 정도로 해주시면 안 되나? (웃음)

외국에서 한국 사회가 과잉 정치화된 사례라고 많이들 얘기한다. 어떤 이슈든 정치화시켜서 상대방을 적으로 규정하고 권력을 획득하려 하니 말이다. '좌빨'이든 '수꼴'이든 정치 전략적 차원에서 상대방에게 딱지를 붙이면서 자기 표를 얻겠다는 전략이다. 외국 기준으로는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이 '좌빨'일 리 없지만 국내 보수진영이 그들을 좌파라고 부르는 것은 '빨갱이 콤플렉스'를 불러일으키려는 정치적 의도가 깔려 있다.

해방 이후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결국 뿌리에는 '친(親) 김일성이냐, 친 이승만이냐'라는 질문이 있고, 뭘 선택하느냐에 따라 '친북' 아니면 '반북'이라는 식으로 논변이 재생산되고 있다. 그래서 반(反) 이승만이면서 반 김일성인, 즉 북한 노선도 아니고 이승만이나 이명박 같은 우파의 노선도 아닌 진보 세력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인정되지 않고 있다.

좌파란 단어가 정치적으로 욕설 내지는 저주가 되어버린 상황이다. 이는 보통 사람들이 좌파라는 실체를 알기 전에 그 저주와 욕설을 받기 싫어서라도 사전에 왼쪽으로 가지 못하도록 하는 전략적 측면이 있다고 본다. 그래서 바깥(외국)에서 봐선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이 '좌빨'일 리 없지만 국내 정치 구조 내에서 그들을 좌파라고 부른다면 아주 강력한 부정적 영향을 끼치게 된다.


▲ <좌우파 사전>(구갑우 외 14인 지음. 위즈덤하우스 펴냄). ⓒ위즈덤하우스
프레시안 : <좌우파 사전>은 좌우파의 주장과 논리를 동등한 비율로 실었지만, 실제 현실에서는 우파의 힘이 더 센 것 같다. 실제 정치 과정에서 일어나는 좌우파 간의 경쟁이 공정하다고 보는가.

남재희 : 좌우파라고 하니까 비슷한 것끼리의 경쟁 같아 보이지만 한국에서 우파란 커다란 바윗덩어리다. 좌파는 그 바윗덩어리에 일으키는 풍화작용이고. 한국전쟁을 결정적인 계기로 이후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의 집권으로 이어진 현대사, 미군이 주둔하는 상황이 압도적인 우파 사회를 만들었다. 그 가운데 4·19 혁명, 광주민주화운동, 19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조금씩 풍화작용이 일어난 것이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도 절대 좌파 정권일 수 없었다. 본인들이 좌파 정권이 되려고 했을지는 모르겠지만 우파의 힘이 압도적인 한국 정치 지형에서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두 대통령도 신자유주의를 거의 그대로 흡수하고, 재벌 문제도 그대로 방치하거나 오히려 의존하곤 했다. 이른바 '진보적인' 정책을 약간밖에 못했다.

조국 : 일부 동의한다. 전쟁과 분단을 계기로 한반도 전체는 물론이고 남한 내 정치 지형이 과잉 우경화란 형태로 결정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전쟁이란 경험의 집단무의식 속에서 사람들이 오른쪽을 택하도록 강요하는 제도, 의식, 문화가 남아있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이렇게 압도적으로 우편향된 정치 지형 속에서도 4·19혁명부터 최근의 촛불 집회까지 파열구를 계속 만들었다.

그런데 권위주의 시대 때는 파열구를 낼 때도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민주화 운동은 하지만 결코 빨갱이는 아니야'라는 식으로. 여차하면 빨갱이로 몰려 진짜로 죽을 수도 있었으니까. 그러나 1987년 새 헌법이 만들어지고, 절차적 민주화가 이뤄진 뒤로는 사람들이 그렇게 겁을 내지 않고 한 발 더 나간 게 아닌가 생각된다.

비록 수는 적지만 시민들이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과 같은 진보 정당을 지지하고, 촛불 집회에 나가면서도 자신이 '좌빨'로 몰릴 것을 우려하지는 않는다. 적어도 적극적 시민 속에서는 '빨갱이로 몰린다고? 마음대로 해'라는 식의 정서상의 변화가 생긴 것이다. 무상 급식 논제를 예로 들어보자.

<중앙일보> 문창극 대기자는 칼럼을 통해 "무상 급식은 북한의 배급제를 떠올리게 한다. 공짜 점심이 실현된다면 도시락 싸가기 운동이라도 벌여야 한다"며 진보 세력이 주장하는 정책을 북한에 등치시키는 아주 전형적인 방법을 썼다. 그런데 많은 시민들이 이 주장에 대해 웃긴다고 생각했다.

과거에는 복지의 영역조차도 '무상'이란 단어 나오기만 하면 사람들이 빨갱이로 몰릴까봐 조심스러워했다. 그런데 지금은 무상 급식이 대중적으로 공유되고, 여기서 더 나아가 의사들과 사회복지학자들이 '국민건강보험 하나로' 운동을 벌이면서 '좌빨'이 한다는 무상 의료 운동을 벌이는 상황이다.

이런 걸 보면 활동가뿐만 아니라 대중도 좌빨이라는 이데올로기적 비난에 대한 두려움을 많이 벗어난 게 아닌가, 파열구를 내는 작업이 더 세진 게 아닌가, 적어도 사회(민주)주의까지는 용인하는 정도는 된 게 아닌가 싶다. 그러니 좌파를 단지 바위에 대한 풍화작용 정도로만 규정할 수는 없다. 그 바위에 정과 망치를 대고 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남재희 : 진보 세력은 전쟁이란 상황에 약하다. 전쟁에 당면하면 사회주의 정당은 전부 딜레마에 빠지거나 분열한다. 전쟁의 위협이 있을 때도 마찬가지다. 한반도는 전쟁을 겪었고 지금도 상시 전쟁의 위험이 있는 곳이니 좌파의 힘이 약할 수밖에 없다.

조국 : 우파가 바위처럼 굳건한 건 사실이지만 좌파의 풍화작용도 점점 강해지고 있다고 본다. 작용의 강도나 속도도 과거에 비해 높아지고 있다. 국민들 의식도 과거보다는 훨씬 '좌 클릭'을 한 것 같다. 활동가나 이데올로그들 말고 일반 대중들도 1970~80년대라면 다가설 수 없었던 사회(민주)주의적 정책에 공감하고 있다.


ⓒ프레시안(최형락)

복지는 좌파의 것?

남재희 : 동의하지만 한 가지만 지적하고 싶다. 복지 차원의 개념과 사회민주주의 차원의 개념은 겹치기도 하지만, 복지에 공감한다고 해서 사회민주주의를 용인한다고 하긴 어렵다. 최근 집권한 영국 보수당도 다른 예산은 다 삭감하면서 의료 예산은 안 깎았다. 우파를 자처하는 보수당조차 복지를 중시한다는 얘기다. 그래서 사실 복지라고 하면 레드 콤플렉스를 건드리지 않고 국민을 설득할 수 있지만 사회민주주의라고 하면 'No!'부터 나올 것이다.

말 나온 김에 덧붙이자면 요즘 '복지사회' 논의가 상당히 힘을 받고 있다. 그런데 보수 진영도 복지 얘기를 하고, 진보 진영 내에서도 시민정치포럼(역동적 복지국가를 위한 시민정치포럼)과 시민회의(복지국가와 진보 대통합을 위한 시민회의)로 갈려진 것처럼 이것이 꼭 좌파의 전유물이라고 할 수 없다.

복지는 일상적이고 상식적인 문제다. 물론 현재 복지 의제가 확산되는 건 좌파에게 좋은 상황이고 좌파적인 생각이 힘을 얻는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렇지만 복지사회 논의가 풍선처럼 부풀다가 펑 터질 수가 있단 생각이 든다. 말로는 쉽지만 세금 문제가 있지 않은가. 세제를 철저하게 공부해서 분석을 하는 대비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조국 : 말씀하신 대로 복지 자체가 사회주의는 아니다. 영국 사회보험의 토대가 된 <베버리지 보고서>도 좌파 작품이 아니며, 독일 복지 체제도 우파인 비스마르크가 만들었다. 한국도 국민건강보험, 국민연금 제도는 박정희 정권 하에서 시작됐다. 복지 자체는 좌우 모두 쓸 수 있는 도구인 게 맞다.

그렇지만 적어도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 무상 급식, 무상 의료 문제는 넓은 의미에서 좌파의 것이다. 과거 우파 중의 우파인 박정희 대통령이 정통성 보완과 지지층 확보 차원에서 시작했던 복지 정책을 현 시점에서 진보 세력이 계승·강화하려고 하는 것이 아이러니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박정희의 딸인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도 복지 얘기를 시작했다. 양극화 문제가 공공의 적으로 대두하면서 일종의 정치적 판단을 내린 것 같다. 결국 우파도 우파의 관점에서 복지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시기가 온 거다. 이렇게 좌우를 떠나 복지 담론 자체는 성장하고 있다.

그래서 앞으로는 박근혜표 복지와 민주당표 복지, 민주노동당표 복지는 각각 어떻게 다르고 무엇이 좋은가, 어떤 세제로 뒷받침할 것인가 등에 대해 좌우파 간 경쟁이 중요해질 것 같다.

남재희 : 맞는 얘기다. 박근혜마저 앞으로 대선 캠페인에서 복지를 이슈화할 것처럼 하고 있는 걸 보면 대세는 이미 복지로 기울었다. 그런데 어떤 학자가 아주 재밌는 지적을 했다. 박근혜가 과거에 국가 재정 지출은 줄이고 규제는 풀고 세금은 적게 받는다는 '줄푸세'를 캐치프레이즈로 내세웠었는데 복지랑 전혀 안 맞는다는 지적이었다. 줄푸세에서 복지 사회로, 과연 궤변 없이 전환할 수 있겠는가. 일관성이 있겠는가. 그 문제에 부딪칠 것 같다.

덧붙여서 한 마디만 더하자. 강조했다시피 복지가 구호에 그치지 않으려면 세제 문제를 확실히 해야 한다. 민주당 내에서도 복지의 방편으로 부유세를 두고 찬반 논쟁이 뜨거운데, 부유세가 다가 아니다. 그 외의 세제에 대해서도 철저한 뒷받침을 해줘야 한다. 나아가 우선순위를 어떻게 매길 것인지에 대해서도 논의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복지 논의가 하루아침에 가라앉을 수 있다.

조국 : 정확한 지적이다. 세금 문제를 외면한 상태로 복지만 얘기할 수 없다. 진보 진영에서 보편적 복지를 주장하면서 재정 충원 방안으로 부자 증세를 얘기한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 그룹의 주장을 실행하려면 부자 증세만으론 부족하다. 중산층 증세도 반드시 감수해야 하는데, 중산층을 어떻게 설득할 것인가.

세금은 적게 내되 복지는 많이 받고 싶은 것이 모든 시민의 속성이다. 그러므로 증세가 어떤 식으로 도움이 될지 유권자들에게 알리고 설득하느냐가 복지 정책의 관건이다. 무상 급식까지는 액수 문제가 그리 크지 않아 감당 가능하겠지만 보편적 복지를 실현하려면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닐 것이다.

조직화되지 않은 시민의 문제

남재희 : 해외의 선례 중 유럽 모델과 미국 모델이 있는데 우리 좌파는 주로 유럽 모델, 더 좁게는 스칸디나비아 모델이나 노르딕 모델을 (좋다고) 얘기한다. 그런데 이 책 <좌우파 사전>의 추천사에서도 소개했지만 근래 읽은 조선대학교 김미경 교수의 논문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김 교수에 따르면, 한국은 유럽형 복지국가가 될 수 없고, 미국형이 될 수밖에 없다.

유럽에서는 "국가와 조직된 노동과 자본 사이의 협상된 동의"라고 정리할 수 있는 전통이 존재하는 반면 미국에서는 "원자화된 개인과 국가와의 직접적 관계를 전제하고, 경제 정책 결정에 조직된 노동의 제도화된 참여를 배제하는 다수결 투표에 의한 정책 결정 패턴"이 있다. 유럽의 경우 봉건시대와 길드 조직의 전통이 겹쳐서 그러한 코포라티즘(Corporatism, 사회적 합의주의)의 전통이 남아있을 수 있었다. '미국형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김 교수의 결론은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인데….

복지 관련 학자들이 이처럼 어떤 모델이 더 좋다, 나쁘다 할 게 아니라 그 모델이 성립된 시대적, 사회적 배경과 한국 사회의 배경을 검토해서 연구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게 부재하면 복지국가론을 전개하는데 있어서 엄청난 장애물을 만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프레시안(최형락)
조국 : 한국이 국가와 원자화된 개인 사이에 중간 집단이나 시민사회가 없는, 미국식 전통에 가까운 것은 사실이다. 말씀하신 대로 유럽 모델의 기본 전제는 강력한 노동조합과 강력한 사회민주주의 정당이다. 노조가 90% 이상 잘 조직화되어 있고 그에 기초한 사회민주주의 정당이 장기 집권하다보니 자본이 막강한 노동자와 집권당(사민주의 정당)과 타협할 수밖에 없는 구도다. 그런데 한국은 노조 조직률이 10% 겨우 넘는 수준이고, 사회민주주의 경향이 있는 정당 세력을 다 합쳐봤자 소수세력에 불과하다.

그 부분을 인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변화의 여지도 보인다. 요즘 학생들이나 20대 젊은 세대를 보면, 전반적으로 생각이 좌 클릭 되어있다. 전(前) 세대가 봤을 때 우리 세대가 더 왼쪽에 있을 것이고, 우리 세대가 봤을 때 다음 세대가 더 왼쪽에 있다. 이념적으로 그렇다기보다 어릴 때부터 개방적으로 여러 가지 보고 들은 게 많아서다.

내가 중·고등학교 때만 해도 오로지 미국 모델만이 가능하다고 여겨졌다. 사회 선생님이 수업 시간에 "유럽식 복지국가는 너희들 죽고 난 뒤에도 안 올 거야"라고 말했던 것이 기억난다. 그래서 우리 세대는 그것을 아예 오지 않을 '유토피아'로 여기며 살았다. 그런데 지금 복지국가 논쟁이 한창 벌어지고 있지 않은가.

변화가 있었다는 얘기다. 우리에게 유럽형 전통이 없다는 말씀에 동의하고 그 모델을 당장 실현할 수 없음을 인정하지만, (유럽형) 복지국가가 대중에게 고려 가능한 대안으로 던져진 것도 사실이다. 변화는 시작되지 않았나 싶다.

남재희 : 젊은 세대의 시민들이 계몽됐다는 얘기엔 동의하나 그들이 의지할 대상은 아니라고 본다. 왜냐하면 대중은 굉장히 가변성이 크다. 좀 진보적인 것 같다가도 어느 순간 보수로 돌아서곤 한다. 매스미디어가 어떤 캠페인이나 트릭을 쓰느냐에 따라 여론의 정치 좌표는 변한다. 만일 시민이 노동조합이나 정당과 같은 조직된 세력이라면 그 트릭을 견뎌내겠지만 조직되지 않은 '촛불 시민' 같은 세력이라면 굉장히 쉽게 변할 수 있다.

나아가 좌우파 담론을 담당하는 이들의 문제를 보면, 최근 우파 담당자들이 착실하게 힘을 키워나가고 있다. 대기업의 힘이 엄청나게 커지지 않았나. 세금 문제를 잘못 다뤘다가는 외국 수출에 주력는 대기업과 정부가 문제를 빚을 것이고, 정책의 우경화를 추진할 수도 있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 때도 (정권이) 대기업 손바닥 위에서 놀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정확한 진상은 모르지만 노무현 정권의 경우 삼성 손바닥 안에 있었다는 증언이 많이 나오고 있다.

거기다 대기업이 광고로 매스미디어를 좌지우지하고 대학의 교육 방침까지 바꾸고 있지 않은가. 그만큼 힘이 막강하다. 학계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비교적 진보적 학자들이 많지만 앞으로 그런 사람들은 연구비가 끊기거나 하는 식으로 상당한 제약을 받을 것이다. 적극적 시민이라든가 젊은 세대가 막연히 부유하는 층이라면 힘이 없다. 그들이 조직이 되어야 한다.

조국 : 지적하신 대로 한국 사회는 '기업 사회'가 되었다. 과거 국가 권력이 컸던 권위주의 정부 때는 시민들이 국가에 맞서 싸웠지만 지금처럼 자본이 권력을 먹은 시대엔 심지어 시민조차 기업에 자발적으로 복속하고 있다. 또 조직화되지 않은 대중의 역할에는 한계가 있고, 정당, 노동조합, 시민단체 등으로 조직화된 시민이 필요하다는 말씀에 100% 동의한다.

촛불 대중의 의미

프레시안 : <좌우파 사전>에서도 집단지성과 전문가 권위를 비교하면서 엘리트-대중 관계에 대한 좌우파의 접근법을 소개했는데, 촛불 집회 때 드러난 광장 정치에 대해서 좌우파는 정 반대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남재희 : 앞서도 강조했지만 대중에 의존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냥 대중'은 히틀러가 등장하면 히틀러로 조정 가능한 존재다. 그게 의미 있는 대중이기 위해서는 기둥과 주춧돌이 있어야 한다. 역시 조직이고, 특히 중요한 건 정당이다. 길거리 정치에 대한 지나친 기대는 좀 접고 좌파가 과소 대표되는 상황을 해결해야 한다고 본다.

우파의 특권을 좀 줄여서 좌파의 숨구멍을 터 주려면 비례대표 의석을 늘려야 한다. 만약 개헌을 한다면 첫째로 대통령 결선투표제를 도입해야 한다. 그래야 지지율 30%짜리 대통령이 안 나온다. 연합의 정치를 통해 이전에 분산됐던 50% 이상의 지지를 낼 수 있도록 훈련을 해야 한다. 그러한 훈련을 통해 정당의 뿌리도 튼튼해질 수 있다. 내각제로 갈 것인지 아닌지는 그 다음 논의 대상이다.

조국 : 일단 비례대표제를 대폭 강화해야 한다고 보고, 개헌을 하게 되면 대통령 중임제에 결선투표제가 결합된 형식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하면 연합정치가 될 수밖에 없다. 60~70% 이상의 지지를 받는 대통령, 다수 대중이 '우리 대통령'이라고 부를 수 있는 대통령, 반대파가 함부로 흔들지 못하는 대통령이 나올 수 있다.

광장 정치에 대한 생각은 다르다. 대표적으로 촛불 집회는 이 책이 짚은 것처럼 한쪽은 대중지성이라고 찬양하고 한쪽은 폭도의 난동으로 규정하는 사이에서 논쟁이 되고 있다. 그러나 어느 한쪽이라고 하기보다 그것이 변화한 과정을 돌아봐야 할 것 같다.

돌이켜보면 한국에서 촛불이 처음 나온 게 2002년 효순이·미선이 추모 집회 때였다. 그 전엔 없다가 갑자기 출현한 시위 방식이었다. 굉장히 새로웠는데 8년이 지나면서 하나의 시위 형태로 안착이 되고 그 자체로 문화가 됐다. 2008년에는 이명박 정부에 촛불 알레르기를 안겨줬을 정도로 실질적인 힘을 발휘했다. 이 정부가 1년 동안 아무 것도 못하게 만들지 않았나.

이런 모습을 볼 때 조직화되지 않은 대중은 미약하고 위험할 수 있다는 말씀에는 동의하지만 무조직 대중인 촛불도 나름의 기능을 하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2008년 당시 사람들이 확 들고 일어나니까 대의제 속에 있던 권력자들이 깜짝 놀랐다. 촛불이 매일 발생하는 현상은 아니지만, 어느 정권이 나오든 대의민주주의제의 외곽에서 정권을 견제, 비판, 통제하는 역할을 하게 될 것 같다.

촛불이 왜 일어났을까를 생각해 보면 대의제 내에서 진보의 목소리가 과소 대표되는 상황과 연관이 있다. 자기 의사가 충분히 반영되지 않아 스트레스가 쌓인다. 선거에서 투표권을 행사해도 사표가 되거나 원치 않는 정권이 등장하니, 자기가 스스로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모든 대중은 아니고, 비교적 적극적인 대중의 의사 표현 방식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비례대표제가 안착되면 촛불은 오히려 줄어들지 않을까 생각한다.

남재희 : 촛불 집회 당시 최장집 교수가 촛불을 위주로 한 시민운동론의 부상을 우려한 바 있다. 한쪽에선 사회주의 정당운동, 노동운동을 땀 흘려가며 하는데 촛불 한 번 들고 세상을 바꾸겠다는 식으로 사고가 기울어지면 너무 위험하다는 것이다. 또 독재자가 출현했을 때 촛불 대중이 오히려 반동적인 탄압 정책에 동원될 우려도 있다.


ⓒ프레시안(최형락)

좌파만의 경제 정책

프레시안 : 경제 정책 얘기를 해보자. 앞서 복지 문제를 언급하면서 이슈 자체는 좌파가 선점했지만 우파와의 경쟁이 심해질 거라고 했다. 그런데 실제로 시프트(장기 전세 주택) 정책만 해도 우파 정권에서 나온 거고, 좌파 정권에선 차별화된 주택 정책조차 없었다. 과연 이명박과 노무현의 경제 정책에 무슨 차이가 있느냐, 좌파만의 경제 정책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나온다.

조국 : 현 시점에서 복지 이슈는 '좌파의 것'에 가깝지만 이건 언제든 변할 수 있다. 좌파들이 복지 안을 만들어 놓으면 나중에 우파가 집권해 선별적으로 뺏어 쓰며 자기들 기반을 강화할 수도 있다. 내가 생각하는 좌파의 경제 정책은 노동과 복지의 결합이다. 평소에도 '노동 없는 복지'는 위험하다고 자주 강조해 왔다. 아무리 정책상 보편적 복지라 하더라도, 노동이 뒷받침돼 주지 않으면 자본이 베풀어주는 식이 될 수밖에 없다.

거슬러 올라가면 1987년에는 6월 민주화 투쟁과 7~8월의 노동자 대투쟁이 있었지만 6월의 문제만 해결됐고 노동 문제는 잊혀졌다. 이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두고 모두가 헤맸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도 이 문제를 그냥 잊고 싶어 했다. 그러나 실업과 비정규직, 노동 시간 단축 문제, 분배의 문제는 복지가 해결해줄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좌파는 복지에만 '올 인' 하고 노동 문제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 결국 좌파의 경제 정책은 노동3권에 그치지 않고 각종 노동 관련 문제에 대한 대응을 강화하면서 복지를 병행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남재희 : 최근 한 언론에서 임기 절반을 지낸 이명박 정권에 대해 평가해 달라고 해서 첫 번째로는 남북 관계가 틀어진 것을 지적했고 두 번째론 조국 교수가 방금 지적한 얘기를 그대로 했다.

지금 정부에서 '균등 사회' 운운하는데 뭐 얘기는 좋다. 기본적으로 중요한 건 소득의 분배 문제다. 정부가 나서서 재분배 얘기를 하는데, 그거에 앞서 분배가 중요하다. 그러나 균등 사회는 근본적으로 복지를 통한 재분배가 아닌 소득의 분배를 통해서 이뤄지는 것이다. 분배는 노동자와 사용자 간의 문제다. 그런데 지금 노동자들을 완전히 조이고 있지 않나. 분배는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고 있고.

조국 : 진보 진영에서 조심해야 될 게 있다. 삼성 무노조 정책의 뿌리가 된 미국 월마트의 사례다. 월마트는 사용자가 노동자에게 높은 임금과 각종 복지를 베풀면서 노동자 복지를 강조하지만 노조는 금지한다. 그런 식으로 한국 자본주의가 발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성공 여부를 떠나 과거 김대중 정부에서 노사정 위원회가 만들어진 건 아주 높이 평가한다. 그런 위원회를 통한 합의가 일종의 코포라티즘이다. 그게 나중에 민주노총의 반발로 반쪽짜리로 전락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아이디어와 발상은 중요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노동자로 사는데, 이걸 해결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지금의 진보 진영은 내버려둔 상태다.

노·사뿐만 아니라 정부가 개입해서 새로운 구조를 만들어 내야 한다. 그 구조화가 안 되니까 지금도 '빨간 띠'로 시작해 총파업, 단식과 구속으로 이어지는 1987년 7~8월의 모습들이 반복되고 있다. 노·사 모두가 지치는 악순환을 막기 위해서라도 노동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아주 강하게 한다.

비합리적인 이명박의 대북 정책

프레시안 : 이번 정권과 지난 두 정권은 남북 관계에서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것 같다. 그동안 개선된 남북 관계가 이명박 정부 들어 후퇴했는데, 어떻게 보고 있는가?

남재희 : <좌우파 사전>에도 나와 있지만 소위 친북이라고 불리는 범주엔 크게 '대북 화해 협력', '통일 지상주의', '북한 추종' 세 가닥의 흐름이, 반북이라 불리는 범주엔 '대북 적대', '흡수 통일', '전쟁 불사'의 흐름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대북 화해 협력은 엄밀히 말해 친북이라 할 수 없고 통일 지상주의도 애매하다. 그런데 (현 정부는) 대북 화해 협력 정책을 펼쳤던 전의 두 정부를 '친북좌빨'로 보고 있는 것 같다.

이명박 정권이 2년 반 동안 꽉 막혀서 북한과의 관계를 거의 다 단절했는데 이것도 외교 전략의 일부이기는 하다. (웃음) 한번 크게 화내고 시치미 뚝 떼는 것도 다 전략이다. 게다가 2009년부터는 미국에 오바마 정권이 들어서면서 좀 변하리라고 생각했는데 부시 정권과 다를 게 없다. 이스라엘과 관련된 이란이나 중동 문제 해결이 더 급하니까.

이런 문제를 해결하고 북한 문제는 나중에 하려는 건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미국은 우리랑 생각이 다를 수도 있다. 그러니 남북 관계는 우리가 이니셔티브를 쥐고 스스로 적극적으로 관리하는 게 바람직한데 그러지 않고 있다. 형식상 6자회담에서 나온 기본 틀이란 게 있지 않나. 남북 간 평화협정 맺고 북미 간 외교하고, 구(舊) 유럽의 그것과 비슷한 (동북아) 안보 체제 구성하고…. 현재로선 그 틀 말고는 없는데, 6자회담은 등한시하면서 자꾸 미국 눈치만 보는 것 같다.

일부에선 흡수 통일을 얘기한다. 그게 말이 되나. 난 안된다고 본다. 한국전쟁 때 미군도 많이 죽었지만 중국에서도 희생자가 많았다. 마오쩌둥(毛澤東) 아들까지 싸우다 죽었다. 그런 희생을 치른 중국이 북한을 그냥 내줄까? 안 내 준다. 요즘 자주 나오는 말대로 북한이 '동북4성'이 되면 됐지. 흡수통일론은 망상이다. 그렇게 안 되려면 6자회담에서 비춰진 로드맵대로 나가면 된다. 그러면 우리 민족 문제니까 미국보다 한 발 앞서 나갈 수 있다.

프레시안 : 한국의 우파들은 여전히 북한이 곧 붕괴할 거라는 믿음을 강하게 갖고 있다.

남재희 : 강경파들이 흡수 통일에 대해 착각하는 모양이다. 거꾸로 생각해 보자. 북한이 남한을 공산화한다는 믿음 역시 완전히 '천만에'지 않나. 한국전쟁 때 미국 사람이 한국에서 얼마나 많이 죽었는가. 서로 착각하는 셈이다.

올해 남한 강경파들이 목소리를 키운 천안함 사건만 해도, 나는 진상은 모르겠다만, 그렇게 (대북 대응 조치를) 강하게 밀고 나갈 수 있는 건가? 근래에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 미국대사가 천안함 사건을 가리켜 "베트남전 확전의 계기가 됐던 1964년 통킹만 사건을 연상시킨다"고 말했다는데 이건 굉장한 발언이다. 그레그가 보통 사람도 아니고 미국 중앙정보국(CIA) 출신인데, 정보도 많겠지만 말 함부로 하는 사람도 아니다.


ⓒ프레시안(최형락)
조국 : 전적으로 동의한다. 지금까지 이명박 정부의 대북 대응은 한심하다. 아니라고는 주장하지만 사실상의 흡수 통일을 얘기하고 북한 붕괴를 기대하고 있으면서도, 실제로는 아주 무능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비핵·개방·3000' 구상은 마치 코끼리를 어떻게 냉장고에 넣느냐는 질문에 "냉장고 문을 연다. 코끼리를 넣는다. 문을 닫는다."라고 답하는 것처럼 들린다. (웃음)

왜 무능하냐면, 이전 정권 같은 경우 한미 동맹을 기초로 하되 북한을 우리 쪽으로 당겨오려고 했는데 지금은 북한을 욕하고 구박하면서 중국으로 떠밀다시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 입장에선 얼마나 고맙겠나. 북한 항구 사용권, 광물 자원 계약 다 중국이 가져갔다. 이명박 정권이 친미파를 위장한 친중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웃음)

이 사람들 왜 이럴까 따져보니, 한국의 우파들도 정치 과잉인 것 같다. '과거 정권을 엎어야 한다', '잃어버린 10년이다', 이런 구호들에 매몰돼 있는 거다. 표를 얻기 위한 구호로는 성공했을지 모른다. 그런데 실제로 그걸 실행하고 있는 게 문제다. 정권을 잡기 위해 전 정권을 비판하면서 사용했던 구호와 집권 후 실제 한반도 관리를 혼동하고 있다. 제대로 된 통일 정책이 없고, 통일부 장관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결국 무정책이 정책이고 결과적으로 친중 정책인 셈이다.

남재희 : 옛날 소련이 망하기 전에 외교 정책에서 말이 참 고약했다. 그때 미국의 현명한 학자들은 '프로파간다(말)와 프랙티스(실천)를 분리해서 생각해야 한다'는 얘기를 했다. 소련이 말로는 세계 혁명, 전 세계 공산화라고 하더라도 그걸 실제로 그렇다고 판단하면 안 된다는 거다. 시원찮은 평론가들은 소련이 하는 말을 그대로 옮겨서 반박하곤 했다.

예전에 대만에 두 번 정도 갔는데, 중국에 대해 '대륙 수복' 운운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기가 막혀서 친한 학자한테 그게 말이 되냐고 물었더니 "그게 우리의 공격적 방어(offensive defense)"라고 설명하더라. 공격이 곧 방어, 공격적인 말로 자기 방어를 한다라! 썩 납득됐다.

지금 북한을 대하면서도 그런 걸 염두에 둬야 한다. 1970년대까지는 말과 현실이 같을 수 있었다 하더라도 현재 북한은 어떤가. 국민총생산(GNP)이나 국방 예산, 무기 다 형편없는 수준이다. 거기에 비하면 한국군은 최신 수준인데다가 주한 미군까지 있다. 주한 미군은 북한이 상대인 정도가 아니다. 중국을 상대할 군사력이다.

다른 나라들의 군사 예산을 합친 것만큼 많은 돈을 쓰는 게 미국이다. 군사 기술도 엄청나다. 최근 동해에서 조지워싱턴 호까지 동원돼 한미 연합 훈련을 하지 않았나. 군사 훈련은 전쟁 반보 전까지 가는 거다. 북한이 위협을 안 느낄 수가 없다. 미국 같은 어마어마한 군사력이 북한을 타이르고 해야지….

물론 북한의 핵 보유는 용인될 수 없는 일이고 위협적인 일이다. 그런데 그 해결에 있어서도 주거니 받거니 딜(deal)을 해야 한다. 북한을 권총 강도로 생각해 보자. 권총을 쥐고 돈을 내놓으라는 상대한테 "권총 내놓으면 돈 줄게"하면 순순히 내놓겠나. 주고받기를 동시에 진행하면서 점점 신뢰를 구축하고, 마지막 단계에서 핵 폐기가 되어야 현실적이지. 핵 먼저 폐기하면 돈 주겠다는 논리는 흥정 하지 말잔 얘기다.

조국 : 얼마 전 대통령 직속 미래기획위원회에서 통일 비용을 계산했는데 북한이 급격히 붕괴해 통일에 이를 경우, 북한이 서서히 개방하여 경제 발전 과정을 거치는 경우에 비해 7배 이상의 비용이 소요된다고 한다. 그런 비용을 감당할 수도 없으면서 북한의 붕괴를 기대하거나 기대를 드러내는 건 매우 위험하다.

북한이 붕괴되면 곧바로 미군의 보병들이 두만강에 배치되는 건데, 베이징(北京) 코앞까지 미국 군대가 와 있는 상황을 중국이 용납하겠는가. 미중 전쟁으로 치달을 게 아니라면 붕괴론은 폐기하고, 6자회담이라는 틀을 통해 북한을 연착륙시킬 수밖에 없다. 통일·외교 쪽은 좌우파 상관없이 합리적으로 해나갈 수 있는 문젠데 이명박 정권은 참 이상하게 가고 있다.

프레시안 : 끝으로 한국 좌파와 우파에 충고 한마디씩을 부탁한다.

남재희 : 도덕 교과서 같은 얘기지만 좌우파 모두 존재 의미가 있다. 한쪽이 다른 한쪽을 묵살하지 않고 상호 존중하고 비판하는 속에서 발전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것은 토론과 투표를 통해서만 달성된다. 그 외의 쿠데타나 폭력과 같은 방법으로는 악순환만 야기할 뿐이다.

우리 좌파 중에서는 북한에 대한 인식을 분명히 하지 않고 있는 부류가 있다. 그 인식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특히 강정구 교수 같은 사람은 언행에서 상당히 문제가 있다고 본다. '미국이 한국전쟁에 참여하지 않았으면 한국은 통일됐을 텐데'라는 식의 언행은 정말 신중하지 못한 것 같다.

예전 서슬 퍼런 시절에 신상초 씨가 내게 박정희 정권을 비판하는 요령을 가르쳐준 적이 있다. 글 앞부분에 북한에 대한 욕을 꼭 하고 그 다음에 박정희 욕을 한다는 것이다. 그에 앞서 박정희 비판하다가 중앙정보부 서너 번 끌려갔던 내가 '그 장사 비법을 왜 이제야 가르쳐 주냐'고 했었다. (웃음)

그런 비법이 우리 진보한테도 꼭 필요하다는 얘기다. 북한에 대한 태도를 분명히 하지 않으면서 남쪽 비판을 하면 강정구 교수의 말처럼 설득력이 떨어진다.

우파에게는 "보수란 수구나 반동이 아니라 전통과 질서를 존중하며 점진적 개혁을 모색하는 것"이라는 보수주의의 원류, 에드먼드 버크의 말을 되새기라고 하고 싶다. 기득권에 거머쥐고 못 내놓겠다고 하는 게 보수가 아니다. 그걸 내놓을 줄도 알아야 한다. 온고지신(溫故知新)으로 변화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홍세화 씨가 강조하는 똘레랑스(관용)와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진보 세력이 국회의 3분의 1 이상인 상황에서 좌파와 우파가 잘못 충돌한 가운데 촛불 대중까지 동원되면 파시즘이 나올 수도 있다.

조국 : 반대파란 절멸해야할 적이 아니라, 논쟁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 것이 민주주의의 기본 틀이다. 한마디로 '적과의 동침'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나하고 생각이 다른 이들과의 공존이다. 서로의 진영 간에 큰 차이가 존재하는 한국 사회에서는 특히 합의의 영역이 더 많이 필요하다고 본다. 합의의 영역이 많아질수록 논쟁의 진폭이 좁아진다. <좌우파 사전>도 거기에 일조했다고 본다.

마지막으로 한국 좌파들은 현실적으로 북한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한데, 한민족이기 때문에 옹호하는 논리나 북한 인권 문제를 외면하는 태도는 경계해야 할 것이다. 북한을 교류와 통일의 대상으로 삼으면서도 체제의 억압성과 후진성은 직시해야 한다. 그리고 그 억압성과 후진성을 모두 '미제'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민족주의는 원래 우파의 것인데, 한국의 우파는 반민족주의적인 것 같다. 미국의 이해와 자신의 이해를 동일시하고, 나아가 북한을 중국에 넘겨주는 선택은 그만해야 한다. 그리고 전 세계의 우파가 강조하는 도덕과 전통이라는 가치도 제대로 지켜주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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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나온 <공유의 비극을 넘어>(윤홍근·안도경 옮김, 랜덤하우스 펴냄)의 저자 엘리너 오스트롬은 올리버 윌리엄슨과 함께 2009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하였다.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아마도 대부분의 경제학자는 그가 누구인지도 잘 모를 것이다. 그는 경제학자가 아니라 정치학자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이 많이 다루지 않는 '공유재'의 문제를 연구해온 학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현재 미국 인디애나 대학교 정치학과 교수다.

이 책은 공유재(혹은 공유 자원)를 주제로 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도 그 개념을 매우 개략적으로만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경제학적으로는 엄밀한 정의가 있다. 서해 연안의 물고기를 예로 들어보자. 특정 시점에서 어떤 어부가 너무 많이 잡아가면 다른 어부들이 잡을 수 있는 물고기의 숫자가 감소한다.

따라서 한정된 양의 물고기를 놓고 어부들은 경쟁 관계에 놓이게 된다. 경제학에서는 이런 특성을 경합성이라고 한다. 예를 들자면, 빵도 경합성을 가진 재화다. 빵이 100개 있을 때 어떤 사람이 10개를 먹어치우면 다른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양이 90개로 줄어들기 때문이다.


▲ <공유의 비극을 넘어>(엘리너 오스트롬 지음, 윤홍근·안도경 옮김, 랜덤하우스 펴냄). ⓒ랜덤하우스
경쟁 관계에 있기 때문에 어부들이 경쟁적으로 어장으로 달려가서 물고기를 마구 잡더라도 이를 막기도 힘들다. 각종 교묘한 방법이 동원되기 때문이다. 중국 어선들이 우리 연안에 몰래 들어와서 어로 활동을 한다고 하지만, 이를 잡아내기가 쉽지 않다. 그러니 남획으로 연안의 물고기는 금방 씨가 말라 버린다. 실제로 이런 일이 비일비재로 벌어진다.

이와 같이 특정인을 배제하기 매우 힘들 때 이런 특성을 경제학에서는 비배제성이라고 한다. 어장의 물고기는 비배제성을 가진 재화다. 이런 점에서 어장의 물고기는 빵과 다르다. 예컨대, 빵이 100개 있다고 했을 때, 돈을 내지 않는 사람을 빼고 돈을 낸 사람에게만 선별적으로 이것을 공급할 수 있다. 즉, 빵의 경우에는 특정인을 쉽게 배제하고 나머지 사람들에게만 공급할 수 있다는 것이다.

빵과 같이 경합성과 배제성을 동시에 가진 재화를 경제학에서는 사적재라고 한다. 시장에서 거래되는 대부분의 상품은 사적재다. 반대로 이 두 가지 특성 모두를 갖지 않은 재화, 구체적으로 말하면 비경합성과 비배제성을 가진 재화를 공공재라고 한다. 예를 들어 정부가 일기예보를 방송할 때 특정인, 예컨대 세금을 내지 않을 사람을 빼고 나머지 사람들만 일기예보를 듣게 하기가 매우 어렵다. 이런 점에서 일기예보는 어장의 물고기와 마찬가지로 비배제성을 갖는다. 또 어떤 특정인이 일기예보를 더 많이 듣는다고 해서 다른 사람에게 아무런 지장을 주지 않는다. 그래서 일기예보를 더 많이 들으려고 서로 싸울 필요가 없다. 공유재는 빵과 같이 경합성을 가지지만 일기예보와 같이 비배제성을 가진 재화다. 말하자면 사적재와 공공재의 중간 쯤 되는 재화다.

이와 같이 공유재는 이용자들 사이의 경합성 때문에 늘 고갈 가능성을 안고 있지만, 비배제성 때문에 이용자의 수를 제한할 수 없으므로 그대로 방치하면 고갈되어 버린다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어장뿐만 아니라 우리의 자연 환경 대부분이 공유재로 구성되어 있다. 산림, 지하수, 저수지의 용수, 목초지 등이 오스트롬이 <공유의 비극을 넘어>에서 다루고 있는 공유재이지만, 이 외에도 깨끗한 강물, 깨끗한 공기 등 다분히 공유재의 성격을 가진 것들이 많이 있다. 결국 환경오염 문제란 공유재로서의 환경이 고갈되고 파괴됨으로 인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1968년 하딘(Hardin)이 발표한 <공유재의 비극>이 환경문제에 대한 지구인의 경각심을 크게 높인 결정적 계기가 되었음은 잘 알려져 있다.

각 개인이 자유롭게 이용하게 내버려두면 공유재는 고갈되거나 파괴되어 버리기 때문에 이들이 협력해서 집단적으로 잘 관리해야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연안 어장의 물고기가 고갈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근처의 지역 공동체 구성원들이 협력해서 집단적으로 잘 관리해야 하고, 저수지의 물이 고갈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인근의 지역 공동체 구성원들이 서로 협력해서 저수지를 관리하고 적당량의 물만 빼 써야 한다. 즉, 공유재는 지역 공동체 구성원들의 집단적 협동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개인들의 자발적인 집단행동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기 무척 어렵다는 것이 그간의 정설이었다. 그 이유를 논리적으로 밝힌 가장 대표적인 이론이 이른바 '죄수의 딜레마'이론이다. 요컨대, 집단행동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에서 합리적이고 이기적인 각 개인들은 다른 사람들이 열심히 협동할 것을 기대하고 자신은 슬쩍 빠져서 무임승차하려는 욕심을 가지게 되는데, 저마다 이런 생각으로 얌체 짓을 하면 결과적으로 집단행동은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일부 경제학자들은 죄수의 딜레마 상황에서도 개인들 사이의 자발적 협력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그것은 오직 특수한 상황에서만 가능하다는 점도 수학적으로 밝혀졌다. 예컨대, 자주 만나기 때문에 안면을 몰수할 수 없는 소수의 사람들 사이에서는 자발적 협동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여러 이론에 의해서 개인들 사이의 자발적 협동에 입각한 집단행동이 어렵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많은 학자들이 정부에 의한 직접 관리를 그 대안으로 제시하였다.

하지만, 오스트롬은 정부의 실패 사례를 다수 발굴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원인도 밝혀냈다. 각지에 흩어져 있는 공유재는 저마다 독특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 특성을 잘 알아야만 관리를 잘 할 수 있다는 것은 상식이다. 하지만 각처에 흩어진 그 많은 공유재의 특성에 관하여 세세한 정보를 정부가 획득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따라서 정부에 의한 공유재의 직접 관리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정부의 정책이나 규제는 획일적이라서 현장의 현실과 동떨어질 수밖에 없고 그래서 현지인의 협조도 얻기 어렵다. 더욱 더 큰 문제는 인원과 예산의 제약 때문에 그 많은 공유재를 제대로 관리하지도 못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대대로 지역 공동체들이 자치적으로 잘 관리해오던 공유재가 국유화 이후 집행 능력 부족, 감시 소홀, 부패 등의 요인 탓으로 오히려 접근 자유의 공유재로 변해버림으로써 더욱 황폐화된 사례도 있다.

경제학자들은 공유재의 사유화를 주장한다. 예를 들어서 공유화된 목초지가 결국 황폐화된다면 그 목초지를 갈라서 개인에게 분양하면 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오스트롬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이들은 사유화된 공유재의 관리 및 유지에 소요되는 비용을 과소평가하는 실수를 범하고 있다. 예를 들어서, 마을이 공유하던 목초지를 개인들에게 분양한다면 우선 울타리를 치고 도둑을 감시하는 비용부터 치러야 한다.

사유화가 최선의 관리 방안이 되지 못한다는 점도 오스트롬교수는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사유화하기 힘든 경우도 있다. 물이나 수산자원처럼 움직이는 자원에 관해서는 사유권 제도의 확립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불분명하다. 이럴 경우 공유의 비극을 회피할 수 없거나 이를 회피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비용을 감수해야 한다.

요컨대, 정부가 아니면 시장이라는 이분법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오스트롬은 역설한다. 노벨 경제학상 선정위원회는 오스트롬이 사유화나 정부의 직접 관리를 지지하는 전통적인 견해에 도전하였으며, 각종 다양한 지역 공동체들이 자율적으로 공유재를 잘 관리해온 성공적 사례들을 세계 도처에서 발굴하여 <공유의 비극을 넘어>에 소개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를 이론적으로 분석함으로써 성공 원리를 찾아냈다는 점을 가장 중요한 업적으로 꼽았다.

어장이나 목초지의 예에서 보듯이 공유재 이용자들은 상호의존 관계에 있는데, 공유재 관리의 성패 여부는 이러한 상호의존 관계의 구성원들이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상황'으로부터 '상호 조율된 전략을 채택하도록 하는 상황'으로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느냐의 여부에 따라 달라진다고 오스트롬은 보았다.

그래서 오스트롬은 우선 오랫동안 존속되어온 지역 공동체의 성공적 공유재(공유 자원) 관리 사례들을 전 세계적으로 발굴하고 분석하였는데, <공유의 비극을 넘어>의 상당한 부분이 바로 여기에 할애되고 있다. 오스트롬은 이 사례 분석을 통해서 공통적 요인들을 뽑아내고 이를 지역 공동체에 의한 성공적 공유재 관리 제도의 구성 원리로 제시하였다. 그는 이를 '디자인 원리'라고 표현하면서 8가지를 제시하였다.

그 핵심은 우선 공유재 이용자들이 행동 규칙을 자발적으로 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규칙은 개인이 공유재를 이용하는 방법뿐만 아니라 이를 유지하고 관리하는 책임을 분담하는 방법에 대한 것까지 포함한 포괄적인 것이다. 물론, 이 규칙은 현지의 사정에 적합한 것이어야 하며, 현지인들이 참여해서 완전히 합의한 것이어야 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이렇게 만들어진 규칙을 어떻게 집행하느냐이다. 기존의 이론들이 집단행동에 비관적 견해를 표명하였던 이유는, 설령 규칙을 성공적으로 만든들 이를 집행하는 것 자체가 딜레마를 안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기적이고 합리적인 개인은 다른 사람들만 이 규칙을 지키고 자기는 몰래 위반함으로써 무임승차 이익을 얻으려하기 때문이다.

오스트롬이 특히 강조한 것은, 성공한 공유재 자율 관리 조직들이 이 규칙의 준수를 감시하고 위반을 제재하는 나름대로의 매우 효과적인 방법을 개발하고 실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구성원들 사이의 분쟁을 해결하는 방법도 포함된다. 통상 감시, 제재, 분쟁 해결에는 많은 비용이 소요되지만, 성공한 공유재 자율 관리 조직들은 아주 저렴하게 실시하는 방법을 채택하고 있다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외부 기관의 도움을 얻기도 하지만, 대체로 보면 규칙의 준수 여부를 서로 서로 감시하는 내부적 방법에 크게 의존한다.

하지만, 오스트롬은 정부의 개입이나 사유화논리를 전면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경우에 따라서는 중앙 정부나 지방 정부의 도움이 필요하고 사유화의 논리를 활용할 필요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러면서도 공유재 관리를 주도하는 지역 공동체의 자율성을 손상시켜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물론, 이런 성공적인 지역 공동체의 자율적 공유재 관리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수많은 세월에 걸쳐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현실에 맞도록 점진적으로 개선되어 하나의 체계적 제도로 정착되고 있다는 점에 오스트롬은 특히 주목한다. 이 결과 구성원들 사이에는 신뢰가 높아가면서 성공적 공유재 관리를 뒷받침하는 '사회적 자본'이 조성된다.

이어서 오스트롬은 실패 사례를 수집하고 분석하였다. 실패 사례에서는 위의 8가지 디자인 원리 가운데 극히 일부분만 적용되든가, 아니면 매우 허술하게 적용되어 있다는 결론을 얻었다. 결과적으로 그는 수많은 사례 연구를 통해서 8가지 디자인 원리들이 실패 사례와 성공 사례를 가르는 기준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오스트롬과 그의 동료들이 집단행동에 대한 기존의 많은 이론과 세계 도처에서 수집한 광범위한 사례를 연결하여 경험적으로 분석함으로써 이론과 현실을 결합시켰다는 점을 노벨 경제학상 선정위원회가 특히 높이 평가한 것으로 보인다.

오스트롬의 <공유의 비극을 넘어>는 우리로 하여금 많은 것을 생각게 한다. 특히 현재 정부가 강행하는 이른바 '4대강 살리기' 사업에 대하여 많은 시사점을 던지고 있다. 4대강은 그냥 단순한 강이 아니라 수없이 많은 공유재(공유 자원)를 포함하는 복합적인 자원이다. 4대강에 산재된 그 많은 공유 자원은 나름대로의 독특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오스트롬에 의하면, 이런 공유 자원의 특성은 인접한 지역 공동체의 주민들이 가장 잘 알고 있고 따라서 자율적으로 관리하게 내버려두는 것이 최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추진하는 4대강 사업은 획일적인 내용을 담고 전국에 걸쳐 획일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오스트롬이 경고한 대로 자칫 이런 사업이 각처에 산재한 공유 자원을 도리어 망치지 않을까 심히 걱정된다.

지역 공동체에 의한 공유재의 자율적 관리가 공동체 구성원들 사이에 신뢰를 강화하고 사회적 자본 형성에 기여한다는 오스트롬의 지적도 우리의 관심을 끈다. 정부의 4대강 사업이 4대강을 살리기 위한 것이라고는 하는데, 그렇다면 오히려 지역 공동체들로 하여금 4대강 살리기를 자율적으로 주도하게 함으로써 우리 사회에서 점점 고갈되고 있는 사회적 자본을 조성하는 계기로 삼는 것이 옳은 처사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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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모 레비는 1919년 이탈리아의 토리노에서 태어난 화학자다. 그는 1943년 파시즘에 저항하는 지하 활동을 벌이다 체포돼 아우슈비츠 행 화물 열차를 타게 됐다. 거기서 그는 병에 걸리지도, 가스실로 가지도 않고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살아남았다.

전쟁이 끝난 뒤, 레비는 증언을 하려는 목적에서 <이것이 인간인가>(이현경 옮김, 돌베개 펴냄)를 썼다. 이 책은 여러 나라에 번역됐고, 그는 현대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작가가 됐다. 우리나라에도 이 책은 번역됐다. 그의 <휴전>(이소영 옮김, 돌베개 펴냄)은 1946년에 쓴 <이것이 인간인가>에 이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회상록이다.

프리모 레비가 실제로 겪은 일들을 적었기에 회상록이라고 말했지만, 한편으로 그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사실들을 이야기했지만 그것은 여과된 사실들"이다. 1962년, 이 책을 쓸 당시에 레비는 셋티모 토리네제의 수지 및 페인트 생산 공장의 기술 국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근무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야 집필 시간이 났다. 한 달에 한 장씩 200시간에 걸쳐 이 책을 썼다. 화학자니까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서 글을 쓴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런 규칙적인 집필이 가능했던 건 오래 전부터 이 책에 실린 내용을 반복적으로 친구들에게 들려줬기 때문이었다. "사실들을 이야기했지만, 그것은 여과된 사실들"이라는 말의 본뜻이 여기에 있다.


▲ <휴전>(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돌베개 펴냄). ⓒ돌베개
너무나 바쁜 사람이라면 이 책의 내용을 알기 위해서 손가락 하나 움직일 필요가 없다. 이 책의 내용은 바로 '휴전'이라는 단어에 있다. 분명 책의 내용은 "1945년 1월 초, 이미 가까워진 러시아 붉은 군대의 진격으로 독일군은 황급히 슐레지엔의 광산에서 철수했다"라는 문장으로, 그러니까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의 패색이 짙어가던 무렵의 일들로 시작해서 결국에는 베를린 함락과 종전 이후까지 이어지는데, 제목은 '종전'이 아니라 '휴전'이다.

내게는 이런 게 바로 화학자의 감각처럼 보인다. 프리모 레비는 정치적 수사나 분식에 동요하지 않는다. 정의와 분노를 말하지도 않는다. 다만 정밀한 단어를 동원해서 자신이 본 것들에 대해서 말한다. 그래서 그는 '종전'이 아니라 '휴전'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왜 제목이 '휴전'인가에 대한 근거를 찾을 수 있는 다음 구절을 보면, 그가 얼마나 냉정한지 알 수 있다.

우리는 우리를 맞아들일 시설이 갖춰진 수용소로 가기 위해, 우리의 집들을 대신할 만한 어떤 곳으로 가기 위해 짧고 안전하게 여행하기를 희망했다. 그리고 이 희망은 훨씬 더 큰 어떤 희망의 일부였다. 그것은 격변과 오류와 대학살의 영겁이 흐른 뒤, 우리의 기나긴 인고의 시간이 흐른 뒤, 올바르고 곧은 세계, 자신의 자생적인 토대 위에 기적적으로 재건된 세계에 대한 희망이었다.

(…) 그러나 그렇지가 않았다. 우리 가운데 극소수의 현자들만이 예견했던 일이 일어났던 것이었다. 자유, 있을 수 없는 불가능한 자유, 아우슈비츠로부터 그토록 멀리 떨어져 있어서 꿈속에서만 감히 바라보아야 했던 그 자유가 찾아왔지만, 그러나 그것은 우리를 '약속의 땅'으로 데려다주지 않았다. 그것은 우리 주위에, 무자비하고 황량한 벌판의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 다른 시련, 또 다른 피로, 또 다른 배고픔, 또 다른 추위, 또 다른 두려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56~57쪽)

또 다른 시련의 실상은 이렇다. 러시아 정찰대가 수용소에 도착한 1945년 1월 27일부터 마침내 토리노의 집에 도착하는 10월 19일까지 프리모 레비는 장장 10개월에 걸쳐서 벨로루시, 우크라이나, 루마니아, 헝가리, 오스트리아, 독일 등을 거치는 기나긴 귀환 과정을 밟는다.

포로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자유의 몸도 아니다. 그는 마치 연옥을 떠도는 단테처럼 동유럽 전역을 헤맨다. 거긴 가스실이나 경비원이 없는, 느슨한 형태의 연옥이지만 결정적으로 거길 빠져나갈 수 있는 국경은 완강하게 봉쇄됐다. 기차를 타고 이탈리아가 있는 남쪽이 아니라 북쪽으로 향할 때,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자유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이 책의 기저에 나오는 우울함은 불가피하다. 그건 '휴전' 상태의 우울함이다. 이 우울함을 이해해야만 레비의 다음과 같은 말에 마음 깊이 동의할 수 있다.

우리는 패배한 독일인들과 파괴된 비엔나를 보면서 아무런 기쁨도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가슴 아팠다. 연민이 아니라 좀 더 폭넓은 의미의 아픔이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비참함과 혼동되는, 가혹하고 곧 닥쳐올 듯한 느낌, 회복될 수 없고 결정적이고 도처에 있는 병의 느낌, 유럽의, 세계의 뱃속에 궤양처럼, 미래 재앙의 씨앗처럼 자리 잡은 병마의 느낌과 혼동되는 아픔이었다. (319쪽)

여기까지는 사실들이다. 하지만 말했다시피 프리모 레비는 <휴전>에서 이 사실들을 여과시켜서 썼다. <휴전>이 뛰어난 문학 작품이 되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그는 마지막 부분에 그가 환영처럼, 혹은 열병처럼 직관적으로 보게 되는 이 우울함을 극적으로 묘사하기 위해서 시종일관 라블레적인 시각으로 귀환 과정에서 자신이 만난 인간들의 행태에 대해서 쓴다.

여기에는 어떤 아이러니가 존재한다. 가장 비극적인 것을 우리는 가장 비극적으로 묘사하지 못한다. 글쓰기의 역학에서 그건 불가능하다. 그런데 종종 가장 비극적인 것을 희극적인 것으로 묘사하는데, 그 때 가장 비극적인 묘사가 가능해지는 경우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휴전>은 유쾌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나중에 슬루츠크라는 곳의 숲에서 여러 명의 처녀들과 함께 만나게 되는 그리스인 모르도 나훔, 어디를 가나 장사꾼적인, 혹은 사기꾼적인 수환을 발휘하는 체사레, 부나 수용소에서 레비에게 빵을 주었던, 하지만 종전 뒤에는 구두 수선공의 노예로 살아가다가 우연히 스타리예 도로기라는 곳에서 다시 재회한 플로라 등 이 책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하나하나가 소설의 주인공이 되기에 모자람이 없다.

그들은 속이고 증오하고 절망하고 아파하고, 그럼에도 다시 또 살아간다. 이 살아간다는 말에 어떤 희망 같은 걸 생각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말하자면 레비의 눈에 그들은 곤충이 살아가는 것처럼 살아가는 것이니까. 레비도 한 때 말하지 않았던가? 수용소에서는 단 한 번도 자살을 생각해본 일이 없었다고. 거기에서는 오직 살아갈 뿐이다.

희망에 대해서 말할 때도 아이러니는 발생한다. 인간의 희망이란 희망차게 말할 수가 없다. 그건 회의와 의심에 가득 차서 말해야만 한다. 희망차게 말할 때, 그건 정치적으로 오염된 희망일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프리모 레비의 <휴전>은 희망을 말하는 대신에 인간을 얘기한다. 온갖 아이러니로 둘러싸인 인간이다.

인간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지만, 세계에 대해서는 말하는 게 주저된다. 왜냐하면 그건 아이러니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아이러니의 세계는 계속해서 질문을 던진다. 딱히 답을 원하는 것 같지는 않다. 오직 질문할 뿐이다.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고통 받고 죽어간 사람들이 거기 있었다는 걸 우리도 안다면, 레비가 그랬듯이, 우리도 이 질문에 쉽게 대답해서는 안 된다. 질문은 계속되어야만 할 것이다.

레오나르도와 나는 기억으로 가득한 침묵에 잠겨 있었다. 출발할 때의 인원 650명 중에 단 세 명이 돌아가고 있었다. 그 10개월 동안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들을 잃었을까? 집으로 돌아가면 무엇을 되찾게 될까? 우리 자신의 얼마나 많은 부분이 침식당하고 꺼져버렸을까? 돌아가는 우리는 더 풍요로워졌을까 아니면 더 가난해졌을까, 더 강해졌을까 아니면 더 공허해졌을까? 우리는 알지 못했다. (3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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