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국내에서 출판된 과학기술학 서적은 대개 과학기술 만능주의를 비판하거나 성찰 없는 과학기술의 활용이 가져올 파국을 경고한다. 이것이 한국만의 예외적인 현상은 물론 아니다.

"지구에 닥친 이 총체적 위기와 사회적 병폐를 첨단 과학 기술이 해결해줄 거예요"라고 해맑은 얼굴로 이야기하는 것은, 전 세계적으로도 유행에 뒤처지는 모습임에 틀림없다. 소설이나 영화들이 그려내는 모습도 온통 음울한 디스토피아뿐이다. 현실 세계에서도 과학기술의 사회적 의미와 영향을 둘러싼 논쟁이 적잖이, 그것도 가끔씩은 아주 과열된 양상으로 벌어지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과학의 외피를 두르고는 있지만 열정과 믿음에 근거한 신념 싸움인 경우도 적지 않다.

그것이 과도한 유토피아적 환상이든 비관의 디스토피아든, 과학적 논쟁의 '지나친' 정치화는 과학 발전이나 사회의 발전, 어느 쪽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평생을 분자 생물학 연구에 투신해왔던 윌리엄 루미스는 이러한 현실이 답답했던 것 같다. 그는 생물학 그 자체에 대한 이해를 기반에 두고 좀 더 차분하고 합리적인 논의를 해보자며 '공론의 장을 위한 생물학'을 들고 나왔다.

원래 제목은 "Life as it is : Biology for Public Sphere"이지만 한국 번역서 표지에는 "Wars for Lives : 생명 전쟁"이 커다랗게 적혀 있다. 이상 열기로부터 벗어나 차분하게 과학적 사실을 바라보자는 저자의 의도와는 한참이나 동떨어진 제목이 아닐 수 없다.


▲ <생명 전쟁>(윌리엄 루미스 지음, 조은경 옮김, 글항아리 펴냄). ⓒ글항아리
<생명 전쟁>(조은경 옮김, 글항아리 펴냄)은 (분명한 답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서 출발하여, 줄기세포와 복제, 유전자 조작, 낙태의 문제를 '과학자의 관점'에서 설명하고, (의외로 한국에서는 별 저항 없이 유행하는) 사회생물학의 현재 지점을 살펴본 후 의식, 안락사, 이기심과 협력이라는 인간 사회의 특성을 (사회생물학이 아닌) 생물학으로부터 추론하고 있다. 또 생명의 기원으로부터 인간의 진화에 이르는 방대한 역사를 비교적 짧게 요약한 다음, 인류의 생존을 위한 생물학의 이용에 대해 이야기한다.

저자는 생물학을 잘 모르는 일반인 독자를 염두에 두고 이 책을 썼다고 밝혔다. 이토록 방대하고도 전문적인 내용을 지하철 안에서도 술술 읽어 넘길 수 있게 썼다는 것은 실로 상당한 내공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의학 전공자인 필자를 '일반인' 독자라고 부르기야 어렵겠지만,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은 모두 고등학교 생물학 교과서를 벗어나지 않기에 이른바 '문과' 출신이라도 그리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극적인 전개나 재미난 에피소드들이 없기 때문에 지루하다고 느낄 수도 있지만, 그런 이유로 이 책을 읽지는 않을 것이기에 굳이 흠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루미스의 목소리는 매우 차분하다. 생명에 대한 경외심과 창조주에 대한 열정이 남다른 이라면 분노에 파르르 떨 만큼이나 '냉정'하기도 하다. 그는 낙태나 진화론/창조과학 같은 뜨거운 이슈에 대해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쿨하게' 이야기한다.

"세포생물학자의 견지에서 보면 생명은 그다지 값어치가 없다." "한 개체의 생명을 절대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하지만 세포 몇 개 혹은 성숙한 난자는 생명이 아니다. 세포는 계속해서 만들어지며 많은 세포가 자연적으로 죽는다." "생물 발생 이전의 과학은 갈 길이 매우 멀지만 어떤 단계에서든지 반드시 기적이 일어나야 할 필요는 없다."

마찬가지로 대중적으로 인기 있는 사회생물학자나 그 추종자들도 기분이 좋지 않을 것이다.

"파리의 성적 취향에 영향을 미치는 유전자가 인간의 행동과 연관이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연구를 통해 오로지 본능으로 움직이는 아주 단순한 생명체에도 복잡한 행동을 하게 하는 유전적 기초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쿨'함이 인간 사회의 복잡성과 정치성에 대한 지나친 단순화에서 비롯된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몇 가지 사례들을 살펴보겠다.

줄기세포와 복제 문제를 다룬 장에서는 저자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한국인 연구팀이 이를 시도했다가 실패하기는 했지만 생명이 희생되지는 않았다. 난자 제공자들은 자신이 제공하는 난자가 치료 목적 복제 연구에 사용될 것이며 생식 복제에는 사용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충분히 고지 받았다. (…) 이 경우 난자를 제공한 여성들이 어느 정도 불편함은 느꼈을 수 있지만 해를 입지는 않았다. 그들의 난자가 유용한 결과를 낳지는 못했지만 자연적으로 수태되는 상황이었다 해도 수정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사건에서 난자 제공 여성들의 '불편함'과 수정되지도 않을 난자들에 대한 과민반응이 윤리적 문제의 본질이었을까?

또 유전자 조작 작물에 대해서는 이러한 주장을 펼친다.

"(…) 그 밖에도 유전자 변형 작물과 관련된 환경 문제도 있지만 문제점을 상쇄시킬 만큼 장점이 더 많다. (…)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터미네이터 씨앗은 퍼져나갈 수 없다. 이렇게 하면 유전자 변형 작물이 퍼져나가 허가를 받지 않은 사람들까지 누구나 그 작물을 재배해 생명공학 회사가 개량된 씨앗을 생산해내는데 든 비용을 회수할 기회가 사라지는 것을 막는 효과도 있다. (…) 정치 문제로 비화되고 있는 유전자 변형 작물에 대한 논란은 한동안 계속될 것이다. 하지만 생명공학 회사들은 어떻게든 굶주리는 사람들을 먹이고 작물에 살충제가 축적되는 것을 줄이는 유전자 변형 작물을 계속 만들고 판매할 것이다."

식량 문제를 둘러싼 전 지구적 정치경제학의 복잡성을 이렇게 순진한 목소리로 '정리'해버려도 되는 것일까?

한편, 에너지 위기와 화석연료에 의한 지구 온난화 문제를 다루면서 사탕수수로부터 추출한 에탄올이나 바이오디젤의 잠재력을 이야기한다. 물론 이들은 기존의 화석연료보다 바람직하고 권장할 만하다. 사람들이 에탄올과 바이오디젤에 대해 우려하는 것은 그 자체의 효과성이 모자라서가 아니다. 곡물 시장의 왜곡과 생태계 파괴는 환경 보호를 위한 순수한 열정으로 연구 개발에 임했던 과학자들이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문제일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뜻하지 아니한 방향으로 문제가 흘러가는 것이 처음은 아니지 않은가? 오펜하이머가 인류를 대량살상하기 위해 핵물리학을 연구한 것이 아니었던 것처럼!

이토록 민감하고 복잡한 문제들을 무심하게 '정리'해버릴 수 있는 것은, '정치적 논쟁으로부터 배제된 생물학적 진실'을 직시해서라기보다, 그것의 사회적 영향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또 과학이 사회적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운, '순수한' 실체라는 그릇된 믿음도 중요한 역할을 했으리라고 본다.

초국적 종자 생산 기업은 인류를 굶주림에서 해방시키겠다는 거룩한 사명감에서 그토록 열심히 유전자 조작 작물을 개발할까? '부가 가치'와 '경제 성장'을 이야기하지 않고 한국의 줄기세포 스캔들을 이해할 수 있을까? 곡물 메이저와 에너지 기업의 역동 관계를 고려하지 않고 세계 식량 문제와 에너지 문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다소 극단적으로 평하자면, 루미스의 관점은 온건하게 포장된 과학기술 지상주의에 속한다고 할 수 있으며, 그렇기에 누가 봐도 코웃음을 칠 수 있는 유토피아적 과학기술 만능주의에 비해 더욱 위험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은 다수의 '합리적인' 과학기술자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내용을 잘 모르면서 너무 흥분하네. 기술적인 보완책만 갖추면 그렇게 필요 이상으로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과학을 너무 정치적으로 해석하지 말아 주세요!'

하지만 (역시) 생물학자인 존 벡위드는 <과학과 사회운동 사이에서>(이영희·김동광·김명진 옮김, 그린비 펴냄)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나는 우리 과학자들이 하는 일을 사랑하며 이 점에서 과학이 뭔가 줄 것이 있다고 믿지만, 과학의 힘에 대해 덜 오만한 태도를 선호한다. 우리는 과학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에 대해 좀 더 겸손해야 하며, 과학의 객관성을 지나치게 강조하거나 과학을 사회 문제들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으로 선언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생태학자, 생물학자인 리처드 레빈스와 리처드 르원틴은 <변증법적 생물학자(Dialectical Biologist)>(Harvard University Press, 1987) '과학의 상품화'라는 절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사회주의자로서, 우리는 과학의 상품화 이전 시대로 되돌아가자고 호소하기 위해 과학의 상품화를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트러스트를 야기했던 과거의 바로 그 상황들을 재현하고자 했던 반(反)트러스트 법만큼이나 쓸데없는 짓이다. 우리의 의도는 이와 다르다. 과학의 상품화, 자본주의 생산 과정에의 전면적인 결합은 학술 활동을 위한 삶에서 지배적인 사실이며 과학자의 사고에 심원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러한 연관성을 부정하는 것은 그것의 힘에 종속된 채로 남아 있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자유를 향한 첫 걸음은 우리 부자유의 중요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과학기술이 삶의 일부가 되어 버린 사회에서 그것의 사회적 영향이 결코 가볍게 다루어져서는 안 될 것이다. 또 사회가 과학기술에 미치는 영향, 특히 이윤 동기와 연관된 정치경제적 영향 또한 과소평가되어서는 안 된다. 안 본다고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벡위드의 주장처럼 과학자들은 좀 더 겸손해야 하며 객관성을 과신하지 말아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 레빈스와 르원틴의 지적처럼 스스로가 처한 부자유를 인정할 필요가 있다.

물론 루미스 자신도 이런 중요한 문제들이 과학자들에 의해서만 판단되는 것은 문제라고 지적한다.

"과연 누가 이런 것에 대해 옳고 그르다는 판단을 내릴 수 있을까? 이런 문제를 오로지 유전공학이 어디까지 발전할 수 있을지에만 관심을 두는 다수의 과학자들에게만 맡겨둬서는 안 된다. 그리고 다수의 시민들이 기초적인 집단유전학, 분자생물학, 의학적 사실 등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그런 문제를 국민투표에 부쳐 결정해서도 안 된다."

그렇다면 어쩌란 말인가? 저명한 대중 과학자 칼 세이건은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이상헌 옮김, 김영사 펴냄)에서 과학을 축복이자 재앙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이를 재앙에서 축복으로 바꾸는 길은 오로지 회의(懷疑)하는 대중의 집단 지성, 그리고 대중이 과학 문맹(scientific illiteracy)에서 벗어나는 것뿐이라고 역설했다.

그렇다. 과학기술을 감시하고 방향을 정하는 건 시민들이 되어야 하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공부'가 필요하다. 독자들은 루미스의 책을 통해 뜨거운 논쟁 이면에 자리한 과학적 사실 자체에 대한 이해를 높이되, 여기서 멈추지 말고 한발 더 나아가야 한다. 이 복잡한 과학기술 사회에서 책임 있는 민주 시민으로 살아가려면 부담해야 할 숙제다.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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