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도킨스가 1976년 펴낸 <이기적 유전자>는 과학책 중에서 몇 안 되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다. 국내에서는 1993년 을유문화사에서 출간되었다. 많은 독자들이 17년간 이 책을 찾았으나 반응은 냉담했다. 이 책의 곳곳에서 많은 번역 오류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최근 이 책을 펴낸 을유문화사가 전면 개정판을 내놓았다. <이기적 유전자 : 2010년 전면 개정판>(홍영남·이상임 옮김, 을유문화사 펴냄). 개정판에서는 그간 지적된 많은 오류가 시정되었으나, "전면 개정"을 내세운 책 치고는 여전히 아쉬움이 많다는 게 과학계와 출판계 안팎의 평이다.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도킨스의 책을 비롯한 많은 과학책을 번역한 이한음 씨가 과학책 번역에 대한 단상을 정리했다. <편집자>

번역의 어려움

번역 일을 한다는 생각조차 아예 없던 대학생 때의 일이 떠오른다. 수강생이 기껏해야 열 명이 채 안 되는 전공 과목이었다. 교재는 교수님이 직접 번역한 책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번역서로 전공 과목을 공부하는 것은 이공계 쪽에서는 특이한 일이었다. 늘 영어 원서만 보던 터라 번역서를 보니 한편으로는 신선하기도 했다.

책을 펼치면 그저 토씨와 형용사, 부사 같은 것만 한글로 바꾼 문장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래도 한글을 본다는 것이 어딘가. 생물학 전공 서적이 그렇듯이 문장마다 온갖 생화학 물질의 이름이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데, 그것까지 우리말로 바꾸면 오히려 불편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내용과 별 관계없는 토씨 같은 것만 옮기는 수밖에.

하지만 막상 책을 읽기 시작하니, 읽히지가 않았다. 토씨조차 제대로 번역이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교수님도 그렇다는 것을 아신 모양이다. 멋쩍은 어투로 말씀하셨다. "이게 좀 팔리는 책이라면 개정판을 내고 싶지만, 1년에 겨우 몇 명 사 보는 책이라서…." 표지는 양장본이어서 책 꼴은 갖추긴 했지만, 당시 주로 원서를 복사하여 찍어내던 출판사에서 나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니 아마 교정이고 뭐고 없었을 것이다.

별 것 아닌 이 일화가 왜 기억에 남아 있는지는 몰라도, 훗날 나는 번역을 하면서 똑같은 상황을 접하곤 했다. 어려운 전공 용어를 우리말로 옮길 때의 문제, 번역 오류와 개정판, 교정의 문제 등등.

게놈, 지놈, 유전체


▲ <이기적 유전자 : 전면 개정판>(리처드 도킨스 지음, 홍영남·이상임 옮김, 을유문화사 펴냄). ⓒ을유문화사
전공 용어를 우리말로 옮기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문제만 해결되면 과학책 번역이 절반은 쉬워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이공계 전공 용어의 번역어는 사실 우리말이 아니라 일본말이었다. 일본 번역서에 적힌 단어를 그대로 옮긴 것이었고, 아예 영어 원서가 아니라 일본어 번역본을 보고 번역한 사례도 많았다.

필자는 그런 시대가 끝날 무렵에 번역 일을 시작했기에, 같은 시기의 번역자들과 마찬가지로 적절한 한글 용어를 찾느라 고심했다. 하지만 전문 용어란 본래 그 분야 전문가들의 많은 논의를 거쳐 정착되는 것이 순리이지, 번역자가 앞장선다고 될 일은 아니다. 다만 의견 제시 수준이라고 할 수는 있겠다. 아무튼 번역자들의 그런 우리말 용어 만들기 노력이 시대 흐름과 연결되어 한글 용어 확산에 기여를 한 것은 분명하다. 책을 소개하거나 관련 내용을 알리는 언론 기사에 그 용어가 그대로 쓰이곤 한 점도 한몫 했을 것이다.

얄궂게도 그토록 바라던 우리말 찾기 노력이 확산되자, 번역자에게는 또 다른 골치 아픈 문제가 생겼다. 분야별로 저마다 한글화 노력에 힘을 쏟다보니, 한 용어에 여러 한글 번역어가 제시되는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게다가 한편에서는 세계 추세에 맞게 기존의 용어를 영어 발음에 가깝게 고치자는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요즘 들어 널리 쓰이는 용어인 유전체(genome)는 원래 독일에서 나온 말이라 게놈이라고 적어 왔다. 그런데 지금 해외에서는 영어식으로 지놈이라고 발음하고 있으니 지놈이라고 표기하자는 식이다. 필자는 논란에 휘말리기 싫어서 아예 유전체라고 옮긴다.

일하면서 느낀 바에 따르면, 의학계와 물리학계가 한글화 노력에 가장 힘쓰고 있으며, 화학계는 영어 원음 표기에 충실하자는 쪽이고, 농업계는 아직 일본 용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생물학계는 이 문제에 별 관심이 없다. 물론 이것은 개인적으로 받은 인상을 기준으로 평한 것이다.

실제 과학계는 실험과 연구를 하는 곳이며, 용어의 한글화는 과학자의 본업이 아니다. 전문 용어의 한글화 작업은 각 분야의 과학자들 중 극히 일부가 맡아서 하고 있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또 병원을 찾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경험하듯이, 의학 용어를 한글화했다고 해서 그 용어가 반드시 의사들 사이에 널리 쓰이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용어의 한글화 작업도 분야마다 현실과 이상 사이의 거리가 제각기 다르다.

게다가 출판사마다 자신들이 원래 써 오던 용어 표기 방식이 있다. 따라서 한 번역자가 옮겼어도 책마다 서로 다른 용어로 번역되기도 한다. 독자가 한 번역자의 책을 놓고 비교한다면, 번역자가 변덕을 부렸군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박물학자, 자연주의자, 자연학자

일을 하다 보면 독자와 번역자 사이의 시대적 거리를 보여주는 사례도 종종 접한다. 언제인가 독자가 인터넷에서 어느 책에 댓글을 단 것을 보았는데, 내츄럴리스트(naturalist)를 자연학자라고 잘못 옮겼다고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박물학자가 올바른 번역어라는 것이다.

말 그대로 박물학, 즉 식물이든 동물이든 화석이든 지질을 보여주는 돌이든, 자연의 만물에 많은 관심을 쏟던 시대가 있었다. 서양인이 아직 세계를 다 살펴보기 전, 외부 세계에 혹해 탐험에 나서던 시대였다. 그 시대에 오지를 쏘다니면서 활약한 인물들을 박물학자라고 부르는 것은 무리가 없다. 찰스 다윈도 본래 박물학자였다. 그리고 그들을 일컫는 용어가 바로 내츄럴리스트였다.

하지만 시대는 변하기 마련이며, 이제 과학계에 연구자로서의 박물학자는 없다. 어느 한 분야의 전공자만 있을 뿐이다. 하지만 내츄럴리스트라는 용어는 아직도 쓰인다. 자연을 연구하는 사람이라는 일반적인 의미로서 말이다. 그런 사람을 박물학자로 옮기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그래서 에드워드 윌슨의 자서전인 <Naturalist>는 "자연주의자"라는 우리말 제목을 달았다.

필자는 보통 그 원어를 자연학자라고 옮긴다. 하지만 일반 독자는 으레 박물학자라고 옮긴다. 아마 주된 이유는 대다수 영한사전에 그 용어가 박물학자라고 적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사전부터 시대에 맞게 고쳐야 하겠지만, 온라인 시대에 사전 편찬은 더 이상 수익이 남는 일이 아니다. 저 유명한 옥스퍼드 사전도 더 이상 인쇄본을 발간하지 않겠다는 기사가 나오지 않았던가. 종이 사전을 그대로 전자 기기에 옮긴 사전도 시대착오적인 내용이 많긴 마찬가지이다. 그러니 어쩌면 독자와 번역자 사이의 소통이라는 측면에서는 위키피디아 같은 만인이 만인을 위해 편집하는 사전이 유일한 해결책일 수도 있겠다. 한글 항목이 금방 눈에 띄게 늘어날 것 같지는 않다는 점이 문제겠지만.

아무튼 번역어도 시대에 따라 변한다. 최근에 한글 개정판이 나온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보면, 세월의 흐름에 따라 용어가 변한 사례를 여럿 찾아볼 수 있다. '다위니즘'이 '다윈주의'로, '그룹 선택설'이 '집단 선택설'로, '지배 유전자'가 '마스터 유전자'로 바뀌었다.

한편, 거꾸로 설익은 한글화 시도가 혼란을 일으키는 사례도 있다. 영어의 '크라운(crown)'은 나무 꼭대기를 가리키는 용어이다. 나무 꼭대기가 마치 왕관을 쓴 모양을 연상시키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일 수 있다. 이 용어는 수관(樹冠)이라는 한자어로 번역된다. 하지만 수관은 쉽게 와 닿지 않는 용어라서, 대개 한 번은 풀어써야 한다.

이런 일이 마뜩치 않기에, 늘 적절한 대체 용어를 고심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국립국어원의 온라인 표준국어대사전 사이트에 수관의 순화 용어가 '나무갓'이라는 설명이 등장했다. 나무가 갓을 쓴 모양이라! 딱 맞는 용어인 듯했다. 그래서 몇 년째 그 용어를 책에 썼는데, 올해부터인가 표준국어대사전에서 그 용어 설명이 사라졌다. 대신 나무갓은 '나뭇갓'의 북한어이고, 나뭇갓은 '나무를 가꾸는 말림갓'이라는 설명이 실렸다. 사전 이용자로서는 영문 모를 항목 삭제이며, 결과적으로 사전에도 없는, 아니 엉뚱한 용어를 번역어로 썼으니 번역에 오류가 생긴 셈이다.

번역 오류 문제

오역은 번역자로서는 피해갈 수 없는 숙명과도 같다. 오역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필자는 '차라리 소설이나 쓰고 있을 걸 왜 하필 번역을 해서(소설가를 얕잡아보는 말이 절대 아니라, 그냥 사적인 푸념이라고 여기시기를)…'라고 한숨을 내쉬곤 한다.

사실 오역이 없는 책은 없다. 그저 오역된 부분이 많고 적을 뿐이다. 때로는 오역이 적은 책이 많은 독자를 만나 오역 문제가 크게 불거지기도 하고, 반면에 오역이 많은 책이 독자를 거의 못 만나서 오역 문제가 아예 제기되지 않기도 한다. 또 오역보다는 어색한 문장처럼 가독성을 심하게 떨어뜨리는 문제들을 오역이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리기도 한다.

아무튼 번역자의 입장에서는 오역을 줄이기 위해 최대한 노력하는 수밖에. 어떤 책이든 저자의 서문에 으레 실리는 문장이 있다. "그래도 혹시나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전적으로 저자의 책임이다"라는 내용이다. 아무리 노력한들, 번역서에도 같은 말을 할 수밖에 없다. 번역자가 아무리 책 내용을 다 꿰고 문장을 하나하나 다 알고 있다고 해도 오역은 생긴다.

사실 번역자와 편집자야말로 오역을 찾아내는 데 선수이다. 아마 오역 찾기 대회가 있다면, 우승자부터 죽 그들이 상위를 차지할 것이다. 하지만 책에 몰두하다 보면 잘못된 부분이 있어도 알아차리지 못한다. 어떤 별을 보고자 할 때 뚫어지게 그곳을 쳐다보면 보이지 않듯이. 아무리 정성껏 번역한 책이라고 해도, 훗날 다시 읽으면 그때 몰랐던 오역이 보인다.

물론 책을 내는 과정에는 오역을 바로잡는 단계가 있다. 바로 교정이다. 출판사에서 편집자가 교정을 보고 번역자가 다시 교정을 본다. 그 과정에서 잘못된 부분이 많이 바로잡히기도 한다. 하지만 이 과정도 완벽하지는 않다. 번역자와 편집자 둘 다 잘못된 부분을 못 찾아낼 수도 있고, 편집자가 잘못 고친 부분이 역자의 눈에 안 띌 수도 있다.

따라서 사실 번역은 번역자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 번역자와 편집자의 공동 작업의 산물이라고나 할까. 그 과정을 충실히 거칠수록 오역은 줄어든다. 내친 김에 말하자면, 필자의 번역서 중 가장 오역으로 욕을 많이 먹은 두 권은 사실 필자의 교정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 출판사가 출간 일정에 맞추느라 역자의 교정 과정을 생략하고 제멋대로 고쳐 냈기 때문이다. 그래도 필자 이름이 떡 하니 표지에 나와 있으니, 번역자의 업보라고 생각할 수밖에.

오역의 더 큰 원인은 아마 번역자의 역량 부족일 것이다. 번역자가 아무리 뛰어난들, 저자보다 더 뛰어날 수는 없다. 설령 저자와 번역자의 전공이 같다고 해도 저자가 쓴 내용을 번역자가 다 알 수는 없다. 책은 저자 나름의 생각의 산물이므로.

필자도 100권이 넘는 과학책을 번역했고, 이제 웬만한 책에 실린 내용은 겉핥기라도 한번쯤 접했다고 나름대로 생각하지만, 그래도 번역하기는 쉽지 않다. 어떤 책이든 저자 나름의 관점에서 해석한 부분이 있으며, 그것이 책의 핵심 내용인데 때로 옮기기가 까다롭기 때문이다. 그 부분에서 오역이 생기기 쉽다. 게다가 새 책에는 최신 연구 자료가 실리게 마련이다. 공부하지 않으면 번역도 힘들다.

그래도 온라인 시대로 오면서 나아진 점이 있다. 지금은 저자에게 전자우편을 보낼 수도 있고, 인터넷을 통해 얼마든지 관련 자료를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의 한 책에는 앞뒤를 끊어먹고 쓴 듯한 뜬금없이 튀어나온 문장이 있었다. 도저히 알 수가 없어 인터넷에서 자료를 검색하다 보니, 저자가 어느 사이트에 기고한 글이 있었다. 저자 자신도 알아차렸는지, 그 문장을 부연 설명해 놓은 내용이었다. 그래서 필자는 인터넷 이전 시대에 번역한 책들은 전부 재번역이 필요하다고 농담하곤 한다. 그때와 지금은 참조할 수 있는 자료의 양이 하늘과 땅 차이이니까. 노력한 만큼 오역이 줄어들 환경이 마련되어 있는 셈이다.

이 부분에서 독자의 호통이 나오게 마련이다. 노력한 만큼 오역이 줄어든다면 왜 그만큼 노력을 하지 않아서 오역이 눈에 띄게 많은 책을 내놓는가? 이 호통에는 번역자라면 으레 하는 답을 할 수밖에. 번역도 직업인지라, 보수를 받은 만큼 성과가 나온다고 말이다. 출판계에서는 흔히 말한다. 종이 값, 인쇄 값 등 각종 물가는 수십 년 사이에 몇 배, 심하면 수십 배까지 올랐지만, 번역료는 그대로라고. 게다가 책이 안 팔리는 시대이니, 인세로 책 팔아서 몇 푼 더 벌기도 쉽지 않다. 그 부족한 부분을 과학자와 독자를 잇는 다리 역할을 한다는 사명감이 채운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기에.

또 하나 나아진 점은 이제 독자가 오역을 바로잡는 일에 큰 역할을 할 환경이 마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예전 대학생일 때는 머리를 아무리 쥐어뜯어도 이해되지 않는 책이 많았다. 그저 머리가 나빠 이해하지 못한 탓으로 돌렸던 그 책들이 오역의 산물임을, 그 시대를 산 사람들은 뒤늦게 알아차렸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인터넷과 통신 기술 덕분에 이제는 오역 여부를 언제든지 묻고 답하고 바로잡을 수 있다. 최근에 나온 <이기적 유전자>의 한글 전면 개정판도 그런 소통의 산물이다. 하지만 번역자의 바람은 같을 것이다. 다 좋긴 한데…우선 책이 많이 팔리고, 새로 고치고 노력한 만큼 나도 좀 더 벌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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