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한 복희씨
박완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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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읽어야 할 좋은 책이 지천으로 쌓였고, 베스트셀러 아닌 책 중에서 좋은 책을 찾는 것이 더 값진 일이라 생각했다. 그런 나의 생각은 늘 변함이 없지만, 그럼에도 종종 베스트셀러에 눈이 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알고는 있어야 할 것 같아서.

요즘 나의 시선을 잡아 끈 것은 박완서의 <친절한 복희씨>다. 아마도 이 책은 텔레비전에서 책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에서 먼저 만났다. 여기 수록된 단편 중 '그 남자네 집'과 '친절한 복희씨'는 대강의 내용을 알기에 책을 읽을 때도 두 편 먼저 읽었다.

나는 내 또래 젊은 작가들이 쓴 소설들을 주로 읽어 왔는데, 할머니뻘 되는 저자의 소설이 내게 얼마나 와 닿을지 의구심이 들었다. 책을 읽고 나서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역시 젊은 소설가들이 범접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는 거였다.

모진 폭풍을 견뎌내고 나서 이제는 그만 평온해진 넓은 바다를 보는 기분이 들었다. 나보다 10년쯤 어린 사람들이 이 책을 읽는다면 어떤 기분일지 토론을 해보고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과연 어떤 생각들을 했는지, 책을 읽고 이런 기분이 든 건 처음이었다.

나는 종종 나이듦에 대해 생각한다. 아직 그러기엔 어린 나이일지도 모르지만, 가끔 그런 나를 발견하곤 한다. 벌써 내가 늙은 건가. 이 책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연령을 생각하면 나는 아직 '젊디젊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 책은 내 어머니나 할머니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책이었고, 바로 나의 미래에 일어날 법한 이야기들이었다.

'그리움을 위하여'는 나와 사촌동생에 대한 이야기다. 둘 다 남편을 먼저 여의고 조금은 쓸쓸한 노년을 보내고 있다. 여덟 살 어린 사촌동생은 ‘한 미모’ 하는지라 아직 50대 초반으로밖에 보이질 않는다. 나보다 경제적으로는 어렵지만, 새로운 동반자를 만나 여느 때보다 행복해 보인다. 사촌동생에 대한 우정(?)과 약간의 질투가 사춘기 소녀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그 남자네 집'은 우연히 예전에 살던 동네에 찾아갔다가 옛 남자를 회상하는 이야기다. 어쩌면 그리도 담담하게 읊조릴 수 있는지, 시간이 지나면 지난 세월은 아름답게 미화되기 마련이다. 게다가 첫사랑이라면 더 말해 무엇할까. 시간은 지나도 추억은 남는 법. 환갑 진갑 다 지나서도 사랑의 추억은 잊을 수 없는 그 무엇이라는 걸 어린 독자는 환기하게 된다.

‘낭비하지 못하고 아껴둔다고 그게 영원히 네 소유가 되는 건 아니며, 넘칠 때 낭비하는 건 죄가 아니라 미덕’이라는 저자의 말이 가슴에 와 닿았다. 사랑할 때 아끼지 말고, 지치도록 사랑하라는 말에 다름 아닐 것이다. 가지 않은 길에 대한 후회가 행간마다 스며 있었다.

'거저나 마찬가지'에는 가장 젊은 주인공이 등장한다. 아직 사십대 초반 밖에 되지 않았는데 건망증 증세가 있는 나는 공장에서 만난 선배 언니의 번역 일을 도와주며 선배의 시골집을 집필실로 사용하며 집도 가꾸어 주며 살아간다. 나와 함께 동거하는 기남이는 배운 것 없지만 성실하고 착한 남자다.

‘거저나 마찬가지’인 삶을 정리하기 위한 방법으로 '아이낳기'를 택한다. 기남이는 말한다. 우리 같은 부모를 만나면 아이가 불쌍하잖느냐고. 그 말에 나는 대답한다. 그러니까 아이를 핑계로 우린 달라지는 거야라고.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이 있고, 말하지 않아도 진심은 통하는 게 되어 있는 법.

'친절한 복희씨'에는 식모살이 하다가 얼떨결에 집주인 아들과 결혼하게 되는 복희씨가 등장한다. 시작이 불행했던지라 마지막까지도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아이들을 그렇게 낳아도 길러도 남편이 끔찍한 건 어쩔 수 없는 일, 중풍에 걸린 남편 수발까지 해야 하는 복희씨의 한 많은 인생이 짠하다.

'그래도 해피 엔드'를 읽다가 종종 버스에서 만나는 할머니들을 떠올려 보았다. 소통이 안 되는 젊은 인간들과의 불화가 안쓰러웠고, 마지막 부분 택시기사와의 짧은 대화는 그래도 아직 노인 공경하는 젊은 사람도 많다는 걸 부연설명해주는 듯했다. 어쨌든 행복한 결말이다.

세월이 많이 흐른 후, 할머니가 되었을 때 저자처럼 외로울 때 책과 벗하며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여든에 가까운 나이가 되어도 젊은이들과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은 끊임없는 자기 성찰의 결과다. 저자는 '웃을 일이 없어서 내가 나를 웃기려고 쓴 글이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노년은 쓸쓸하지만, 그래도 그만하면 행복한 노년이라는 생각에 독자들은 이의가 없으리라.

이 책에 수록된 아홉편의 단편은 짠하다. 지나간 세월에 대한 소회가 오래묵은 발효식품처럼 빛을 발하고 있었다. 두고두고 읽어도 물리지 않는 단편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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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지생태보고서 - 2판
최규석 글 그림 / 거북이북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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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라지만 제목만 보고서 환경에 대한 책인줄 알았다.

내 돈 내고 만화책을 산 건 이번이 두번째다. 첫번째는 하재근의 <중국의 역사와 문화>였다.

우선 주인공들이 너무 웃기게 생겼다. 만화란 웃음에 충실해야 한다. 그냥 웃겨서도 안되고, 그 속에는 철학이 있어야 한다.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면,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 나보다 열 살 위의 이모는 순정만화를 즐겨봤다. 아마 열 권짜리는 족히 되는 그런 만화책을 빌려와서도 보고, 만화방에서도 봤다. 물론 나도 함께였다. 그림이 너무 예뻤다. 이모는 순정만화의 주인공도 곧잘 따라 그렸는데, 나도 어깨 너머로 배웠다.

그 후, 만화책과는 인연이 없었다. 나는 정도(바른 길)를 가는 범생이었던지라 선생님의 '만화책 보지 말라'는 말씀에 순종하느라 그랬다. 지금 생각하니 참 웃기는 아이였다. 그러다가 중학생이 되었다. 중1이었지 싶다. '인어공주를 위하여'라는 만화가 장안의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예의 여중생들의 감수성에 필이 확 꽂히는 그런 류의 순정만화였을 터. 나는 너무 보고 싶었는데, 기회가 없었다. 만화책을 빌리러 만화방에 가는 게 싫었다. 오락실과 마찬가지로 왠지 거기는 나쁜 아저씨들을 비롯하여 불량배들이 많을 것 같았다. 내 편견이었지 싶다. 내 간이 하도 콩알만해도 그랬을 지도. 그렇다고 시리즈로 나온 책을 다 사볼 경제적인 여유도 없었고. 지금 생각해도 조금 아깝긴 하다. 시기를 놓쳐버렸으니. 그때의 감수성으로 봤어야 하니.. 아마 지금 보면 하품만 할 지도 모르겠다.

이야기가 곁다리로 많이 흘렀는데, 만화가 최규석은 나보다 한 해 빨리 태어났다. 어느새 이런 나이가 되어버린 건지.. 생각하면 아뜩하다. 그냥 웃기고 즐기면 되는 그런 만화가 아니었다. 남자들이 우글거리는 자취방의 정취를 참 잘 포착해내었다.

실업, 연애, 노동문제, 우리 사회의 어두운 습지의 모습들을 잘 포착했다. 가벼우면서도 가볍지만은 않은 만화라고 할까. 이 책으로 말미암아 만화책에 대한 편견을 버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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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꽃나무 우리시대의 논리 5
김진숙 지음 / 후마니타스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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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게도 나는 아침에 출근해서 저녁에 퇴근하는 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며 살아왔다. 어쩌다 야근이라도 할라치면 입이 댓발은 나왔고 신세한탄을 한 전력도 있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보면 2교대나 3교대 근무 노동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있는데, 그들의 노고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살아왔다. 

김진숙의 <소금꽃나무>를 보고 각 현장에서 얼마나 많은 노동자들이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고 있는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몇 해 전 하종강의 저서 <그래도 희망은 노동운동>을 통해 처음으로 노동운동에 대해 눈뜨게 되었는데, 그때의 울림만큼이나 알싸한 무엇이 가슴을 헤치고 지나갔다. 

 "수간호사의 말이 곧 법이고 원장님이 곧 하늘인 병원, 그곳엔 링거병이나 약봉지를 한 치의 착오도 없이 가장 빨리 나르고, 단 한 번에 혈관을 찾아내는 기계가 필요했을 뿐, 인격이 있고, 자존심도 있는 인간이 필요한 곳은 아니었습니다. ‘빽’있는 높은 환자에게 트집을 잡혀 시말서를 쓰는 동료들 볼 때나, 간호 과장에게 찍혀 외래에서 병동으로 쫓겨 가 남산만한 배를 뒤뚱거리며 나이트 근무를 들어가는 선배를 볼 때나, 엉덩이에 들러붙는 과장님의 번들거리는 눈빛이 온몸을 발가벗기는 모욕감에 몸서리를 치면서도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마음만 가지고는 되는 일도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대단한 걸 꿈꾼 적도 없고 호사스러운 걸 욕심내 본 적도 없는데, 우린 서서히 시들어 갔고 더 이상 꿈꾸지 않는 스스로의 젊음에 절망하기도 했습니다. 틀린 건 틀렸다고 말하고 옳은 건 옳다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우린 그렇게 배웠고 그런 건 그냥 조용조용 말해도 다 통하는 상식인 줄만 알았습니다." - (179쪽)

노동은 고귀하다.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사용하는 많은 제품들이 바로 노동자의 땀방울 위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모든 게 풍족한 지금을 살며 단 한번이라도 그것들이 밤을 새운 노동의 대가라는 걸 인식했던 적이 있던가. 우리가 걸핏하면 바꾸고 싶어 하는 휴대폰만 해도 그렇다.

휴대폰의 외형을 만들기 위해 우리의 많은 누이들이, 오빠가, 엄마들이 밤을 새워가며 일을 한다. 작업장은 노동자들에게 맞춰지지 않고, 잘된 제품을 위해 한겨울에도 한여름처럼 더운 환경에서 일해야 한다고 한다. 그럼 한여름에는 어떻게 되는 걸까? 피로에 피로가 쌓여도 제대로 된 휴일도 없이 교대근무를 하는 열악한 환경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 납득하기 어려웠다.

몸과 정신이 휴식할 수 있도록 유급 휴일을 보장하고,  “임원이 아닌 직원들은 인간답게 살기 어렵다”는 말이 더이상 노동자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지 않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그들의 값진 노력들이 그들의 한숨에 수포로 돌아가지 않는, 그들이 노력한 만큼 그들에게 희열을 가져다주는 노동 환경에서 일하게 된다면 바랄 게 없겠다. 

"우리 사회에는 학번 없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 그리고 그 학번 없는 사람들이 세상을 움직여 간다고 나는 믿는다. 학교를 떠나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도 아마 학번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학번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한 번도 빛나는 자리에 서 보지 못한 사람들. 한 번도 스스로가 자랑스러워 보지 못한 채 평생을 살아가는 사람들. 자신의 대에서 이루지 못한 학번의 꿈을 자식 대에서라도 이루기 위해 불나방처럼 뛰어드는 무모한 돌진. 그 무모함이 만들어 내는 온갖 왜곡되고 기형적인 현상과 구조들. 그건 우리가 바꿔야 할 모순의 가장 밑바탕이기도 하다." -(225쪽)

그동안 얼마나 오만하게 살아왔는지 생각하면 부끄러워진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생각 없이 내뱉은 말 한 마디가 듣는 이에게는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었다. 

자신이 하는 일이 아무리 힘들지라도 보람을 느끼며 신바람 나게 일 할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일한 만큼 그에 합당한 대우를 받고, 작업 환경으로 인해 마음과 몸이 병들지 않는 그런 환경에서 일할 수 있는 사회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진숙의 <소금꽃나무>는 소시민들에게 커다란 공명을 안겨준다. 돌아보면 노동자 아닌 사람이 없는 세상에서 이 같은 사실을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세상은 진보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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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일락 피면 - 10대의 선택에 관한 여덟 편의 이야기 창비청소년문학 4
최인석 외 지음, 원종찬 / 창비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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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서 가장 빛나는 시기가 있다면 언제라고 하면 좋을까? 우문이다. 매 순간이 빛나도록 살아야 하겠지. 되돌아보니 나에게도 청소년기가 있었을 텐데, 아무리 생각해도 고등학교 시절은 캄캄한 암흑기였다. 한 트럭도 넘는 고민을 혼자 짊어지고 늘 힘겨워했다. 그렇게 버거운 사춘기를 보내고 어른이 되었다. 

<라일락 피면>은 바로 청소년기 아이들의 이야기들을 엮어놓았다. 멀리는 80년 광주의 모습을 담아놓았고, 가깝게는 성적 소수자의 딸로 사는 아이의 일상을 이야기하고 있다. 8편의 단편 가운데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오진원의 <굿바이, 메리 개리스마스>와 조은이의 <헤바>였다.  

<굿바이, 메리 개리스마스>는 동성애자 아빠를 둔 딸의 이야기다. 여기서는 안 되지만 아빠가 사랑하는 남자 폴의 나라, 네덜란드에 가면 정식 부부로 인정을 받을 수 있단다. 그렇게 되면 더욱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 같다. 그들에게는 꿈이기도 하다. 보린의 엄마는 보린의 아빠가 종종 들르던 바의 여종업원이다. 칠천 만원을 주고 신체 접촉 없이 오직 기계의 도움으로 생명을 얻었다. 그래서 보린의 탄생에는 '뜨거움이랄까, 감격이랄까 그런 것이 없었다'고 한다.

태어나자마자 엄마를 잃어버린 보린이 가여웠다. 부모가 있다하더라도 어차피 인간은 태어나서 환경에 의해 결핍을 경험한다. 그것이 어머니나 아버지가 없다는 극단적인 결핍인 경우에 좀 더 마음이 아리겠지만 그건 아이의 몫이다. 애초에 그렇게 운명지워진 거라 생각하고 씩씩하게 사는 수밖에. 

아빠는 폴과 함께 네덜란드에 갈 수 없게 되었다. 어느 날 폴이 전화기 너머로 폭탄 선언을 해왔다. 네덜란드에 폴의 아들이 있다고 했다. 일찍 결혼해버리면 평범한 남자로 살 수 있을 것 같아 빨리 결혼했던 것이다. 아이를 낳고도 '혼란'은 계속되어서 도망치듯 한국행을 택했던 거다. 더 충격적인 것은 폴에게 새로운 애인이 생긴 것이었다. 사포로 가슴을 문지르는 것 같다는 표현이 아빠와 보린의 마음을 매우 잘 드러내 준다. 

편견이 심한 나라에서 소수자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일까. 그래도 씩씩한 보린이 아빠 곁에 있으니 다행이다.  

<헤바>는 평범한 중3 성호가 '팜므파탈' 사촌 누나인 윤이를 짝사랑하는 이야기다. 팜므파탈이라고 해서 단순한 날라리는 아니다. 이런 팜므파탈이라면 많으면 많을수록 좋을 것 같다. 탈학교 청소년을 위한 센터에 교사로 근무하는 윤이 누나는 자신이 바로 학교를 탈출한 인물이었다. 가출과 정학, 그리고는 자퇴 했으며 프랑스, 호주, 캄보디아, 아프리카 등지를 다니며 '남자를 만들었다'고 한다. 물론 남자만 만들지는 않았겠지. 그 세계에 속한 문화와 역사와 조우했으며 현지 사람들과 교류했을 것이다. 

센터가 성호의 집 근처라 '자칭 인정이 많은 성호아버지'가 집에서 출퇴근할 수 있게 윤이 누나를 받아준 것이었다. 윤이 누나는 성호에게 조개껍질과 산호초로 만든 지구본 '헤바'를 선물했다. 독일에 갔을 때 벼룩시장에서 산거라고 하는데, 하고 많은 선물 중 지구본을 택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마도 김어준의 말처럼 '되도록 많은 나라에 똥을 눠 보라'는 게 아니었을까. 

보잘 것 없는 영화를 함께 봐도 윤이 누나는 기가 막히게 멋진 영화로 해설을 해주었고 '고1 중퇴학력만으로도 기가 죽을 것 같은데, 누나를 보면 그런 기준이 무색'했다고 한다. 누나와 있으면 뭘하든 즐거운 성호는 시나브로 누나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렇게 사춘기 시절에는 한번쯤 사촌을 좋아할 수도 있는 거다.

윤이 누나는 해외여행에 돈이 많이 들 필요도 없고, 영어를 잘 할 필요도 없다는 진리를 성호에게 알기 쉽게 설명해주었다. 그녀에게 여행은 삶이고 일상이며 학교란다. 우물 안 개구리처럼 아등바등 살 게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 문화 선진국 뿐 아니라 과거에 찬란한 문화를 가졌던 동남아, 태고의 신비가 살아있는 아프리카 등지를 돌아보는 것, 윤이 누나에게는 그것이 인생의 낙이었다. 

누나와 내가 같은 나라에서 사는 게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누나가 사는 방식에 비하면, 뒷머리가 목을 덮는지 안 덮는지 따위나 감시하는 학교와 외고에 목숨 건 학원을 전전하는 내 생활이 한없이 시시하게 느껴졌다. 나는 누나처럼 생각하고 누나처럼 행동하고 싶었다. 누나가 준 지구본을 보며 누나를 만난 첫날을 곱씹었다. 너, 성호지? 누나는 한눈에 날 알아보았다. 생각할수록 의미심장한 일이었다. - 170쪽

결국 윤이 누나에 대한 짝사랑은 결말 없이 끝나야 했지만 성호는 성숙했을 것이다. 멋진 사촌 누나를 둔 덕분에 다른 아이들이 경험하지 못한 멋진 삶에 대한 설계가 일찍부터 가능했을 테니 말이다. 

매일 밤 야자에 시달리는 입시생들에게 청량제 같은 소설이 되지 않을까. 머리도 식힐 겸 분량도 적은 이 책을 주위 청소년들에게 선물해보면 어떨까. 봄바람이 살랑 거리는 계절,  마음 한 구석이 헛헛할 아이들에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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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쇼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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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모 일간지에 연재된 소설이라 해서 사서 읽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내용은 궁금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작품은 <검은꽃>인데 아마도 아리랑을 읽고 이 책을 읽었더라면 감동이 반으로 줄었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이제와 든다.

<키친>의 주인공처럼 어느 날 갑자기 주인공은 고아가 된다. 다 자란 어른이니 고아는 아니겠다. 어쨌거나 대학원생 여친과 헤어지고 다니던 편의점 아르바이트에서도 잘리고 고배의 연속인 주인공에게 '벽속의 요정'이 나타난다. 일순간 구원과도 같은 사랑이 찾아왔으나 이 친구는 자신과 너무나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퀴즈쇼에서 만난 이를 따라 '회사'에 취직하게 되고 기이한 세계를 경험하게 된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서야 다시 벽속의 요정과 조우하게 된다는 걸로 소설은 끝을 맺는다. 

고시원에서 만난 옆방 처녀의 죽음을 목도하는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누군가는 옥상에서 삼겹살을 구워먹는 장면이 이 책에서 가장 아름답게 묘사되는 부분이라 했는데 나도 동의한다. 그 처녀는 낮에는 일하고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는데 어느 날 자살하고 만다. 우리의 주인공이 빌린 이십 만원을 갚기도 전에 말이다.

소설은 단군 이래 가장 많이 배운 세대지만 취직하기는 가장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의 자화상을 담고 있다. 고시원 쪽방의 삶이 남일 같지가 않다. 오늘날처럼 불안정한 시대도 없었을 것이다. 안정된 삶을 좇는 현대인들에게 그것은 한갓 꿈에 불과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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