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가 잘못 산 게 아니었어>
저자 엄기호의 강연도 들어본 적이 있고 글도 여럿 읽었고 회의도 가끔 하는 사이지만 단행본은 처음이다. 강연을 들으며 참 술술 잘 풀면서도 조리가 있다고 느꼈는데 그대로 강연을 옮겨 놓은 듯 쉽게 읽힌다. 쉽게 읽힌다고 그의 문제의식이, 이 책의 주제가 가볍다거나 얇은 것은 결코 아니다. "지금 필요한 건 위로나 분노가 아니라 용기"라는 말은 새로운 세대들의 새로운 연대를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책을 덮으며 너무 후딱 읽어버렀나 싶도록 재밌고, 뜻 맞는 사람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밤새도록 나누고 싶픈 이야기로 가득찬 책. 어떻게 이리도 핵심을 잘 짚었나 감탄사가 튀어나오기도 하고, 때로는 더 나갔으면 하는 아쉬움과 나랑 비슷한 생각이네, 무릎을 치게 만든 책이다.
<삶이 보이는 창>
격월간 삶창이 이뻐졌다. 약간 얇아졌는데 활자도 키우고 행간도 늘이고, 그간 답답했던 편집에서 아주 읽기 좋은 편집으로 바뀌었다. 디자인만이 아니라 내용에서도 아기자기한 변화가 엿보인다. 매번 받아보지만 이번처럼 꼼꼼이 읽지 못했다. 역시 이 또한 디자인의 힘이리라.

발리바르가 쓴 책 중에서 그나마 쉽다는 책인데... 사실 얼마나 이해했는지 모르겠다. 아래는 밑줄긋기...
나는 결코 국가 권위에 대한 불복종 및 그 내용이나 입안 조건들에서 논란의 소지가 있는 법률들을 집행하는 것에 대한 거부가 시민성의 본질을 구성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국가의 사멸"을 요구하는 무정부주의가 공동체를 정초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권력에 맞선 시민들"이 함축하는 개인주의는 정치를 형성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는 불복종에 대한 이런 필수적인 준거가 없이는, 그리고 심지어 이처럼 불복종에 의지함으로써 생겨나는 위험을 주기적으로 감수하지 않고서는 시민성과 공동체가 존재할 수 없다고 믿는다. - 16
지금 세기말에 우리가 직면한 문제는 바로 상상의 힘을 해방시키면서도 유토피아와 결별하는 일이다. (...) 집단주의적인 것이든 개인주의적인 것이든 간에 유토피아는 현실주의와 비현실성이라는 양자택일 속에 상상력을 가두는 반면, 현실주의는 근원적으로 비현실적인 것이며, 통용되는 의미와는 다른 의미에서 비현실적인 것, 더 나아가 "불가능한 것"은, 그것이 없이는 인간 역사 속의 어떤 현실도 유지될 수 없는 것이다. 더욱이 오늘날 "지구화" 내지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지칭되는 과정과 함께 고전적인 유토피아의 토대들 자체가 근원적으로 파괴되었다는 점을 확인해 두지 않을 수 없다. 역으로 제도들의 변화라는 질문 및 제도가 불가피하게 포함하는 허구의 몫(집합적 이해관계를 표현하고 대표하기 위한 단어들과 권리들, 새로운 기법들의 발명,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을 접합하는 가치들의 변화)이라는 질문은 피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여기에는 진정한 철학적 딜레마가 존재한다. - 19
미등록 체류자들, "배제된 이들" 중에서도 "배제된 이들"은 단순히 희생자들로 나타나는 것을 그치고 이제 민주주의 정치의 실행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저항과 상상을 통해 우리가 민주주의에 다시 활력을 불어넣는 것에 큰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깨닫게 해준 데 대해, 그리고 이를 말하게 해준 데 대해 그들에게 빚지고 있으며, 법/권리와 정의가 그들에게 회복될 때까지 계속해서 우리 쪽의 좀 더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편에 참여하게 해준 데 대해 그들에게 빚지고 있습니다. - 35
반대로 나는 정치 및 민주주의를 살해하고 또한 동시에 사람들까지 살해하는 극단적 폭력의 확산은 또한 그 본질적인 일부에서는 국경의 강제 및 불가능한 봉쇄를 수단으로 한 국가에 의한 인구 정착과 격리의 결과이기도 하다고 주장하면서 반폭력의 정치(내가 시민다움의 정치라고 부르는)를 옹호하고자 한다. 국경에 대한 치안적 관점, 곧 국경을 "방역선"으로 간주하는 관점 대신 국경에 대한 정치적 관점 및 실천이 필요하다. 국경을 정치의 장으로 전위시켜서, 더 이상 국경이 모든 반항과 통제, 상호성의 권역 바깥에, 가장자리에 놓이지 않고 중심에 놓이도록 해야 하며, 마찬가지로 개인들과 집단들이 오늘날 때로는 국경 이쪽에서, 때로는 저쪽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그리고 말하자면 그들이 경계선 양쪽에 걸쳐 앉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 109
"국민 우선"은 곧바로 다른 일련의 "우선들"과 쌍을 이루게 되는데 이 후자의 "우선들"은 국민 우선과 함체되며, 이 국민 또는 국민성을 일종의 이상화된 몸체로 존재하게 만들게 될 수밖에 없다. 나는 무엇보다 "가족 우선"을 염두에 두고 있다. 이는 가족과 결혼, 성에 대한 국민주의적 통제를 뜻하며 그와 동시에 그것과 분리 불가능한, 가족적 정상성 및 따라서 성적 정상성에 대한 선호를 뜻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곧바로 다른 측면, 곧 일탈로 낙인찍힐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하여 공격적인 입장으로 이행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우선/선호가 증오의 조직, 유지 및 이상화 현상을 수반하기 때문에, 이런 우선/선호가 또한 일탈적인 것으로 나타나는 모든 것에 대한 폭력적인 반응으로 표현된다고 해서 놀랄 것은 전혀 없다. - 129
여기에서 우리는 다시 파시즘에 근접해 가고 있다. 자신들이 무기력하다고 느끼면서도 동시에 국가의 무기력을 두려워하는 시민들은 국가에 대해 그들이 항상 "좋은 쪽"에 있고, 희생자, 전형적인 불쌍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아니라 다른 이들이라는 점이 확실히 보장될 수 있도록 가시적인 안전 중심적 조치들을 취하고 아파르트헤이트와 같은 것을 제도화할 것을 요구한다. 그들은 암묵적으로 다음과 같은 종류의 질문을 제기한다. 국가는 누구를 우선시하는가? 곧 국가는 누구 편인가? 그리고 국가의 결정들은 누가 내리고, 누가 국가로부터 정확히 우선이라는 답변을 얻을 수 있는가? 누가 선택된 이들이고 누가 버려진 이들인가? - 147
정체성은 자기 자신을 소통에 참여하고 있는, 어떤 공동체의 성원으로서 인지하기 위한 수단으로서만 존재할 수 있다. 모든 정체성은 하나의 연결로서, 서로 교환되는 것이며 (...) 모든 정체성은 하나의 시선이다. 곧 정체성은 타인들을 보는 한 가지 방식, 특히 어떤이의 눈을 통해 자기 자신을 보는 한 가지 방식이다. - 149
정치에서 "대표"되어야 하는 것은 어떤 조건이나 집단이 아니라 문제다. 이런 의미에서 배제된 이들은 정확히 그들이 "표상/대표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탁월하게 대표적이다. 이런 의미에서의 대표는 미리 존재하는 대표의 틀 속에서 자리를 얻는 것이 아니라 그런 대표의 틀을 창출해내는 것이며, 이를 위해서는 기존의 틀을 변형하거나 전복해야 한다. - 1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