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시절 선배가 귀뜸해준 비법이다. 일단 친구들을 왕창 데리고 가서 왕창 술과 안주를 시켜 먹는다. 여기서 왕창이 중요하다. 주인장이 눈여겨 볼만큼 왕창 먹어야 한다. 그리고 며칠 뒤 그 집에서 조촐하게 술 한잔을 하고 외상(정확하게는 '가리'라고 했다)을 한 다음 약속한 날 칼 같이 외상값을 갑는다. 외상값을 갑는 날 술 한잔을 더 하면 금상첨화. 


출근길에 정태춘의 '92년 장마, 종로에서'를 듣다가 문득 이게 20년 전 노래구나, 그러다가 단골집들이 떠올랐다. 그야말로 자유연상...


첫 단골집은 신사역 근처에 '축제'라는 호프집. 당시 고삐리였던 우리들에게 신분증 검사를 하지 않았던 곳이라는 이유로 버스 몇 정거장을 가서 마셔댔다. 기억이 확실치는 않지만 그때 1000cc에 천원, 500cc에 5백5십원 했던 것 같다. 500원짜리 동전도 없던 시절, 우리는 백원짜리, 오십원짜리, 십원짜리를 테이블에 올려놓고 수놓으며 마셨다. 남자는 1000이라며. 지금이야 보기도 힘들지만 그때는 1000이 대세였다. 


고3 무렵에는 한강을 건너 대학로로 진출했다. '취바리'라는 막걸리집. 대부분의 손님들은 대학생들이었다. 그때만 해도 대학로는 대학로였으니까. 흔한 민속주점들 중 하나였지만 세 번에 한 번 꼴로 동틀 무렵까지 부어라 마셔라 했다. 밤 12시인가 공식적으로는 문을 닫아야 했기에 2차 3차도 없이 주구장창 쭉...

 

대학에 두 번 낙방을 하고 남산 위에 하얀 집이라 불리던 학원을 다닐 때는 숙대입구역 뒷편 '안성집'이 단골이다. 2500원 하던 김치찌게나 부대찌가가 주 안주. 절묘한 것은 다음 해 대학에 들어가서는 학교가 안성이었는데 단골집 이름은 '서울집'이었다. 안주는 '안성집'과 크게 다를 바 없었고.

 

그 뒤로는 이렇다할 단골집이 생기지 않는 것 같다. 돌이켜보면 대학을 졸업하고 계속 부유하는 삶이지 않았나. 서울 도심에서는 당췌 단골집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나마 작년에 이사간 동네, 집 앞 실내 포장마차가 있는데 얼마 전에 외상을 했다. 닭똥집을 포장했는데 카드 결제가 안 된다는 거였다. 현찰이 없었기에 다음에 들리겠다고. 당연히 외상값을 갑은 날 똥집 하나를 또 포장했다. 이제 뿌리가 좀 내려지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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