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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권의 책으로 노무현을 말하다
김병준 외 지음 / 오마이북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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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
죽은 자에 관해 논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더군다나 노무현처럼 대규모의, 또한 열정적인 팬덤을 지닌, 일정 정도 시대 정신을 구현했던, 그리고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이를 두고 논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진보의 미래>라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유고집을 선물로 받아 읽은 적이 있다. 삼분의 일 정도를 읽다가 책을 덮었다. "당신, 왜 그랬어?" 하는 질문이 책을 읽는 동안 샘솟았다. 그럼에도 그 질문에 답해줄 사람이 없음이 허전했고 부질없어 보였다.  

이 책에서 노무현은, 아니 그를 보좌했던 이들은 한미FTA를 추진하며 '한국인의 가능성'을 주목했다고 한다. 어차피 쇄국을 하지 않을 바에야, 주관적인, 근거없는 희망이 아니라 의지적 낙관에서 비롯된, 인민의 역량에 근거한 정책이라고 말하는 듯 하다.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런데 한미FTA 반대가 반드시 쇄국인가? 또 부질없는 질문들이 샘솟는다.)

한편 아버지 같은 정부가 아니라 어머니 같은 정부를 바람직하게 생각했다고 하는 부분에서 고개가 갸웃뚱해진다. 그렇다면 인민의 역량에 무게를 두고, 과정에서 약자의 아픔과 어려움이 있겠지만 궁극적으로 성공하리라는 믿음, 그런 추진력 대신 힘 없는 사람들,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이 우려하는 목소리에 더 귀기울이고 더 신중하게 일처리를 해야 하지 않았을까.   

 

#2.
노무현이 읽었다는, 그래서 그를 기리는 마음에서 함께 읽었다는 10권의 책. 그리고 그 책들을 함께 읽은 강독회는 그 자체로 흥미롭다. 전 지구적 시스템의 문제부터 한 사람의 머릿속의 생각의 흐름까지 다룬 책들을 읽고 이야기한 강독회를 따라가며 다시금 노무현의 부재가 안타깝다.  

책 속의 누구는 노무현을 정조와 비교하며 '공부하는 군주'라 했다고 하지만 어림없는 이야기다. 정조는 재위 기간이 24년, 박정희의 집권기와 비견될 시기다. 그의 할아버지인 영조는 무려 60년.  

노무현에게 딱 15년만 주어졌더라면 그가 꿈꾸던 '진보의 미래'는 현실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그는 제2의 박정희가 되지는 않았을까.  쉽게 장담할 수 없은 일이다.

 

#3.
노무현에 대해 참 할 말이 많다. 나는 노무현이 가장 잘 한 일은 대통령이 된 것, 한나라당을 꺽고 당선된 그 자체라고 생각했다. 그가 제일 잘 못 한 일은 검찰, 국정원 등 권력기관에게 너무 쉽게, 그리고 너무 일찍 자율을 선사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나놓고 보니 정반대로 그가 가장 잘 못 한 일은 너무 일찍 대통령이 된 것이고, 그가 가장 잘 한 일은 권력기관을 자기 수하에 두지 않은 일이지 않나 싶다.  

이 책의 필자들은 다들 노무현이 준비되지 않은 대통령이라는 사실을 부인한다. 그러나 참여정부, 노무현과 함께한 집권세력이 준비되지 못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고 본다. 그건 물론 한국사회 진보의 안타까운 실력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는 재임기간 권력기관에게 자율을 줌으로써 어느 시기에도 누릴 수 없는 공권력으로부터의 자유를 만끽하게 했다. 현 정부는 그 반대급부, 그 저항에 곤욕을 치루고 있는 것이다. 한번 획득된 자유의 시계바늘은 쉽게 뒤로 가지 않는다.  

 

#4.
참여정부가 진보였는지, 진보란 과연 무엇인지를 불문하고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 사회적 약자가, 힘없는 사람들이 품위 있게 사는 세상을 꿈꾸는 이에게 노무현, 김대중, 참여정부와 국민의 정부는 파고들어야 할 숙제임이 분명하다. 그러기에 이 책은 보다 많은 이들에게 보다 오랫동안 읽혔으면 좋겠다.  

제목을 위와 같이 달아놓으니 소크라테스가 떠오른다. 언뜻 비슷한 삶을 살지 않았나 싶다. 결국 살아남은 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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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녀귀신>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처녀귀신 - 조선시대 여인의 한과 복수 키워드 한국문화 6
최기숙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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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한 외고생이 제 엄마에게 유서를 남기고 베란다에서 투신했다. 유서는 단 네 글자였다. “이제 됐어?” 엄마가 요구하던 성적에 도달한 직후였다. 그 아이는 투신하는 순간까지 다른 부모들이 부러워하는 아이였고 투신하지 않았다면 여전히 그런 아이였을 것이다. 스스로 세상을 떠나는 아이들이 매우 빠르게 늘고 있다. 아이들은 끝없이 죽어 가는데 부모들은 단지 아이를 좀더 잘살게 하려 애를 쓸 뿐이라 한다. 대체 아이들이 얼마나 더 죽어야 우리는 정신을 차릴까?
 
                                                         - <한겨레> 2010.7.7 '야, 한국사회' 김규향의 칼럼 중에서 

 

"이제 됐어?"

이렇게 짧고 그러면서도 강렬한 인상을 남긴 유서를 읽어본 기억이 없다. 모든 자살은 충격적이다. 그렇지만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줄리엣처럼 애틋한 죽음도 있고 스스로 곡기를 끊고 자연으로 돌아가고자 했던 스콧 니어링의 경우처럼 품위 있는 죽음도 있다. 하지만 많은 경우 자살이란 "사회적 약자가 비자발적인 타의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하는 마지막 대안일 때가 많다."(p26) 그렇게 죽은 이들은 원한을 가진 귀신으로 이야기 속에 등장하며 그 대표적인 예가 처녀귀신이라고 할 수 있다.

<처녀귀신>은 조선시대 야담과 고소설에 등장하는 억울하게 죽을 수밖에 없었던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한국인에게 귀신 이미지가 유독 처녀귀신으로 고착된"(p173) 이유를 묻는다. 사대부를 위한 여담이라 할 수 있는 조선후기 야담집 속의 귀신 이야기가 사대부에게 어떤 식으로 봉사를 했는지를 살피고, 죽어서도 존경받는 남자 귀신(조상신)과 구천을 떠돌다 구원자(남성 관리)에 의해 원을 풀고 자취없이 사라지는 여자 귀신(원귀)을 대비한다.   

또한 <처녀귀신>은 "부모의 명을 따라 혼인해야 했던 딸, 전쟁의 폭력 속에서 성적으로 희생당한 여성, 사랑의 자율성을 원천적으로 차단당한 처녀, 재혼 가정에서 소외되었던 전실의 딸, 일부일처제로 구성된 가족관계망의 바깥에 있었기에 출산과 양육의 권리를 행사할 수 없었던 첩, 남자의 사교 파트너로만 인정되었던 기생 등"(p173) 조선시대 여성들이 귀신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자살과 원한, 저주와 복수라는 굴레 속에서 귀신이 되어서야 비로소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던 전근대를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전근대에서 압축적 근대화를 이루고 이제 당당히(?) 세계화로 달려가는 한국사회는 어떨까? 영화 <여고괴담> 시리즈나 <장화, 홍련>, <분홍신>, 드라마 <M>의 경우에서도 보듯 이제 더 이상 소복 입고 긴 머리를 늘어뜨린 처녀귀신은 아니라 하더라도 여전히 공포물에는 여고생, 소녀, 미혼 여성이 주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 저자의 지적이다.

어쩌면 처녀귀신은 여름이면 <전설의 고향>으로 소비되고 향유되는 소품이 되었다면 이제 등골 서늘한 원귀, 사회의 구조적 문제로 인해 죽음을 강요받고 이야기 속에서 복수를 해야만 하는 존재는 1960~70년대  김기영 감독의 영화 <하녀>에서 등장하는 여공, 그리고  미혼모와 여고생으로 전이되었다고 할 수 있다. 나아가 인신매매에 가까운 형태로 돈에 팔려 들어오는 이주여성, 꼭 그렇지는 않더라도 인종주의와 편견, 차별에 의해 고통받는 이주민 가정의 여성들, 장애를 이유로 20~30년을 시설에 갇혀 살아가야만 하는 이들, 외모로 대표되는 몸 자본을 갖지 못한 이들, 가정의 파탄으로 몸 자본 하나로 시장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청소녀들...

비자발적으로 타의에 의해 마지막 선택을 강요받는 이들의 목록은 별로 줄어들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처녀귀신>은 조선시대 마이너리티의 목소리와 거기에 담긴 불편한 진실을 들추고자 하는 작업인 동시에 지금 이 시대를 비춰볼 수 있는 거울일 수도 있다. 
 

아쉬움...
 
너무나 도발적인 제목은 실망을 불러오기 쉽다. 누가 '처녀귀신'이라는 제목의 책을 보고 집어들어 펴보지 않을 수 있겠나? 하지만 '조선시대 여인의 한과 복수'라는 부제가 오히려 정직한 제목이 아닌가 싶다. 

물론 이 실망감은 저자의 잘못은 아니다. 문학동네의 '키워드 한국문화' 시리즈 여섯 번째 편인 <처녀귀신>은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재발견하는작업"이라는 시리즈 기획의도에 충실하다. 또한 국문학을 전공한 저자는 야담과 고소설을 적절히 인용하며 지루하지 않게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 그러므로 저자에게 역사적, 문화적, 사회학적 분석이 부족하거나 결여되어 있다고 지적하는 것도 옳지 않다.

다만 그런 작업이 더해져 처녀귀신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미시사적인 접근으로 조선시대를 새롭게 재해석하고, 지금 이 시대의 '처녀귀신'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소비되는지를 문화적으로, 사회학적으로 분석하면서 이 시대를 비판하는 텍스트가 되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제목이 너무 섹시한 까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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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0-07-15 2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외고생의 죽음이 무척 안타깝네요.어머니가 공부하라고 닥달만 할것이 아니라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 좀 마음을 열고 서로 대화를 했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죠.
 
팔레스타인의 눈물 - 문학으로 읽는 아시아 문제 팔레스타인
수아드 아마리 외 지음, 자카리아 모하메드 엮음, 오수연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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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주변 60km는 고압전류가 흐르는 8m높이의 장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참치 통조림과 생수는 그 안에 들어갈 수 있지만 과일 통조림과 주스, 초콜릿은 들어갈 수 없다. 자동차, 냉장고, 컴퓨터, 시멘트, 그리고 아이들의 장난감도 마찬가지로 반입되지 않는다. 하늘에는 수시로 무인정찰비행기가 날아다니고 지상에는 길목마다 검문소가 들어서 무장군인들이 수시로 검문을 한다. 영화에서나 볼 법한 정치범 수용소 이야기가 아니다. 자신의 아버지가 태어나고 아버지의 아버지가 자라났던 땅에서 그대로 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150만 명이 일상적으로 생존의 위협에 시달리는 곳. 바로 팔레스타인 가자지구다.

2008년 12월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집권당 하마스의 로켓 공격을 빌미삼아 대대적인 침공을 벌였다. 2005년부터 2009년까지 하마스의 로켓 공격으로 사망한 이스라엘 사람은 11명이었던데 반해 22일간의 이 침공으로 1300여명이 사망하고 5천명이 넘는 사람이 부상당했으며 학교와 병원, 이슬람 사원이 무차별 폭격을 받아야 했다. 이 사건을 과연 전쟁이라 부를 수 있을까? 얼마 전에는 150만 인구 중에 100만이 굶주린다는 이곳을 향해 구호물자를 실고 가던 구호선이 헬기를 타고 내려온 특공대에게 공격을 받았고 14명의 국제평화단체 활동가들이 죽임을 당했다. 이 나라를 계속 국가라 불러야 하나?

이 책은 2003년 이라크전쟁 현장에 있었던 오수연 작가가 팔레스타인 시인 자카리아 무함마드와 만나게 되면서 그 인연으로 만들어진 팔레스타인 작가들의 산문집이다. 또한 이 책은 탱크를 앞세운 이스라엘 군에 돌멩이로 맞섰던 사람들과 그 이웃들의 이야기다. 하지만 무용담 혹은 투쟁의 기록이라고 짐작해서는 곤란하다. 검문소를 통과할 수 있는 유일한 허가증이 이스라엘 지역 동물병원에서 받은 애완견 예방접종 등록증이 되어버린 탓에 “나는 이 개의 운전수”라고 농담 아닌 농담을 건네야 하는 소설가의 이야기, 언제 학교에, 직장에, 병원에 갈 수 있을지, 오늘은 상점 문을 열 수 있을지, 내일은 이 농작물을 내다팔 수 있을지가 오로지 점령군의 마음에 달린 곳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 아버지와 삼촌, 사촌과 친구들의 죽음을 지켜보며 자연스럽게 ‘테러리스트’로 자라나는 아이들을 지켜보아야만 하는 어머니들의 이야기다.

오수연 작가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가물거리는 희망’을 위해” 이 책이 기획되었다고 한다. 이 책을 읽었을 당시 나는 지금은 사라져버린, 그리고 이제 사람들의 기억에서마저 희미해졌을 평택의 자그마한 마을을 들락거렸다. 대추리라 불리던 그곳은 중무장한 군인과 경찰에게 돌과 나무작대기로 맞섰던 70대 노인들의 마을이었다. 그때 정부와 일부 언론은 이 전근대적인 ‘테러리스트’를 서슴없이 폭도라 불렀고 결국 그들을 마을에서 쫓아냈고 거기에 전쟁기지를 만드는데 성공했다. 그래서 이 책은 대추리의 눈물, 혹은 새만금, 또는 80년 광주의 눈물로도 읽힌다. 그리고 여전히 팔레스타인에서의 희망은 눈물에 가려져 가물거린다. 
 

- <주간한국>(2010. 6. 22 )에 보낸 글.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의 문제와 얼마전 가자지구로 향하던 구호선에 대한 이스라엘의 공격에 대해 자세히 알려면 <인권오름>의 "이스라엘은 왜 민간인 구호선을 공격했을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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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29 09: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소크라테스의 변명 - 크리톤 파이돈 향연, 문예교양선서 30
플라톤 지음, 황문수 옮김 / 문예출판사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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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의 닭 

- 크립톤, 우리는 에스클레오피오스에게 닭 한 마리 빚진 게 있었지. 자네들이 내 대신 빚을 갚아주게. 잊지 말고* 

1. 
놀라워라. 장날 아버지 사오신 닭 한 마리. 알뜰한 닭 한 마리가 달걀을 낳고 어서 자라 병아리가 되고 병아리 떼 종종종 거위가 되고 푸짐한 도야지가 되고 소 한 마리 너끈히 되었다가 형의 대학 등록금이 되고 누이를 시집보내고 마침내 닭 한 마리의 가족을 너끈히 꾸린다 하네. 날지 못해 슬픈 현실을 살림하는 닭 한 마리. 거룩한 절망이여.  

2.
잊 을 수 없 다. 

소 크 라 테 스 에 게 빌 린 
닭 한 마 리 를 
갚 아 야 한 다 

-------- 
*소크라테스의 유언 중 마지막 당부의 말 

벌써 10여 년 전에 쓴 시다. 에스클레오피오스는 의신(醫神)이다. 소크라테스가 이 의신에게 닭 한 마리를 빚졌다고 한 말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있는 모양이다. 그 중에 유력(?)한 것이 소크라테서가 마신 독배가 인류를 위한 것이며, 인류의 마음 속에 깃든 병을 고치기 위함이었다는 것이다. 이 시는 그런 해석에 기대어 썼는데, 지금 읽어보니 자뭇 심각한 채 무게를 잡으려 했던 것 같다.

시까지 썼지만 소크라테서의 변명, 이 책에 담긴 <크리톤>, <파이돈>, <향연>을 찬찬히 읽지는 못했다. 어쩌면 읽었다고 한들 그 당시 온전히 이해했을 것 같지도 않다. 지금 또한 이 책의 내용을, 그리고 소크라테스의 삶과 죽음을 이해했다고 말할 수 없다. 다만 윤리학 교과서에서 배웠던 10대와 고전이기에 의무감에서 펼쳤던 20대와는 다른 울림을 전해준다.  

드라마 작가 노희경이 어느 라디오 프로그램에 나와 <향연>을 언급하는 걸 들었다.
"왜 우리는 사랑을 할까요? 여러 사람들이 그 해답을 내놓았는데 소크라테스의 대답은 '행복해지기 위해서'였어요."

사랑을 하면 행복해질까? 사랑은 행복해지기 위해서 한다지만 사랑한다고 행복해지는 건 아닌 것 같다. 사랑도 행복에 대한 욕구도, 철학이 지혜에 대한 사랑, 탐구인 이상 철학하는 것 또한도 어떤 결핍과 맞닿아 있다. 결핍, 결여는 인간 존재의 본질 중 하나인 듯하다. 얼마 전 강의를 들었던 과학철학을 하는 최종덕 선생님의 말씀처럼 (매우 비과학적으로 들리지만) 인간은 외롭기 때문에 철학을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종교는 외로움을 떨칠 수 있게 해주고 결핍을 충만으로 바꿔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철학의 역할은 결국 그 결핍이 무엇이고 어떤 것이며 그 근원은 어디에 있는지를 들여다보게 하는 것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소크라테스는 무엇보다 겸손했고 진지했으며 자신과 세상에 정직한 삶을 살았다.  위대한 인간, 위대한 철학자의 죽음에 대한 기록. 그에게 빌린 닭 한 마리를 갚을 수는 없으나 잊지는 말아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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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노 다케시의 생각노트
기타노 다케시 지음, 권남희 옮김 / 북스코프(아카넷)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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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 팬(누구는 편애한다고 했는데 그 표현이 더 적절한 거 같다)이라고 하면 주위에서는 약간 놀라고 조금 싫어라 한다. 그 이유도 다양하다. 누구는 그의 보수적인 정치 성향이, 누구는 마초적 기질이 싫다고 하고, 또 누구는 몇 천만원 짜리 자전거에 고가의 만년필 등등 취향까지 들며 말하기도 한다. 다들 부정할 수 없는, 반박하기 힘든 사실들이다. 

그래서 가만히 듣고 있다가 "그럼에도 좋다"고 할 수밖에 없다. 어찌보면 무수한, 저주에 가까운 악담에도 불구하고 내가 아직까지 담배와 술을 즐기는 것과 마찬가지다(이렇게 쓰고 보니 김훈에게 약간 미안하다. 그래도 할 수 없다).    

솔직히 나는 김훈의 소설보다는 그가 쓴 칼럼과 기사를 좋아하고 대부분의 김훈 팬처럼 그의 문장을 사랑한다.(역시 나의 문장수업에서 그도 한 강좌를 담당했으니) 하지만 내가 김훈에게 끌리는 그 근원에는 그의 허무주의, 인간 본질과 맞닿아있는 듯한 냉소, 맬랑콜리한 삶의 태도 때문이 아닌가 싶다. 

<소나티네>, <키쿠지로의 여름>,<베틀로얄> 등의 영화를 보면서 기타노 다케시에게서도 비슷한 '뉘앙스'를 느꼈던 것 아닌가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기타노 다케시의 생각노트>를 읽으며 군데군데서 김훈이 떠올랐다.

김훈은 신문기자에서 소설가가 되었고 다케시는 만담가에서 영화감독이 되었다.
김훈의 논리가 문학이라면 다케시의 논리는 공학이다.
(다케시는 이공계 출신이다. 그는 영화 시놉시스에서 인수분해를 적용하기도 한다)
그래서 그의 허무주의는 김훈보다 현실적인 감각이 있는 것 같다.  
반면에 소설가인 김훈이 혼자 자전거 여형을 떠나듯 고독한 낭만을 즐긴다면 협동의 결과물일 수밖에 없는 영화를 만드는 다케시는 여럿이 모인 술자리에서 객기를 부리고 거들먹 거리며 군중 속에서 고독을 즐기는 스타일인 것 같다.

둘 다 마초적 기질에 완고한 보수적 성향을 보여준다. 그리고 둘 다 그 사실을 굳이 감추려고 하지 않는다. 다케시는 겉멋을 외투로 걸친듯 당당하고 김훈은 음흉스러움을 행간에 묻어두고는 하지만 너무나 강렬해 쉽게 드러난다. 그래서 두 사람 다 지극히 권위적이지만 그 권위적 태도에 독선이 없고 진솔함이 있어 좋다.  이 때문에 가만히 보면 둘 다 조금 안쓰러운 데가 있고 무척 귀여운 구석도 있다. 

결국 취향은 정치적 견해나 신념을 배반하기도 하고 그렇기에 더욱 매력적인 것 아닌가 싶은 생각을 이 두 사람을 보면서 하게 된다.   

 

p.s <공무도하가>와 <다케시즈>를 아직 보지 못했다. 뒹굴뒹굴 정말 할 일 없을 때 둘 다 봐야지 하며 미뤄두고 있다. 이것도 즐거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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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intree 2010-06-01 16: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기타노 타케시를 좋아합니다. 그의 글을 읽으면 '남자'에 '아저씨'에 '어른'이라는 느낌이 확실이 들죠.(왠지 요즘 남자들에게는 없어져가는 특성같아요.) 그리고 너무 솔직해서 그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부분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묘하게 납득이 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