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전 일이다. 아이가 생긴 것 같다는 아내의 말에 함께 산부인과에 들렸다 돌아오는 길. 내 손에는 콩알만 한(의사가 ‘요 게’ 태아라고 알려준) 물체가 찍혀있는 초음파 사진 한 장이 들려있었다. 불과 십 수 일 된 생명. 이 아이가 살아갈 세상은 과연 어떠할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자 나는 약간 당혹스러웠다. 열 달 뒤에는 분만대기실에서 비디오카메라를 들고 촬영대기중인 예비 아빠들도 볼 수 있었다. 나는 그 흔한 똑딱이(소형 디지털카메라) 하나 챙기지 않았지만 분만실 어딘가에 있던 카메라를 통해 출산 직후 아이의 모습은 동영상 CD로 구워져 지금 우리 집 책꽂이에 꽂혀있다.

사진을 찍고 찍히는 일은 하나의 의식(儀式)이다. ‘인증샷’이라는 신조어가 생겨나지도 않았을 무렵부터 우리는 가족사진을 통해 누군가로부터 한 가족, 그것도 화목하고 단란한 가족임을 인증 받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러고 보니 나는 늘 졸업앨범 비를 아까워했지만 어머니는 졸업장보다 졸업사진을 더 중요하게 여겼던 듯하다. 그런데 아이를 낳은 뒤 손주와 가족사진을 찍자고 하자 너희 식구 끼리나 찍으란다. 몇 해 전 돌아가신 아버지의 빈자리가 찍힐까봐 두려우셨던 걸까?

인천 동암역 ‘역전 사진관’


언제부터인가 동네 사진관들이 하나 둘 자취를 감추고 있다. 그나마 오래된 사진관이 몇 군데 남아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인천으로 향했다. 인천은 좀 묘한 도시다. 닫혀 있던 조선이 외세에 의해 처음으로 문을 열어야 했고, 그 문으로 선진 문물이 밀물처럼 밀려들어왔던 항구. 한국전쟁의 또한 한국 현대사의 판도를 뒤바꾸어 놓았던 맥아더의 상륙작전의 도시. 낡아서 인기가 높다는 ‘바이킹’의 월미도와 처음으로 짜장면을 만들었다는 ‘공화춘’이 있는 차이나타운. 확인할 수는 없지만 사진에 최초로 등장했던 조선 사람은 고기잡이를 하는 어부였다고 하니 그 무대가 인천은 아닐까 하며, 인천 부평구 십전동 동암역 광장에 있는 참 오래된 동네 사진관 ‘역전사진관’ 문을 열고 들어섰다.

“아버님은 반공포로였어요. 이승만 대통령 적에 거제도(포로수용소)에 있다가 갈 사람은 가고 남을 사람 남아라, 그랬는데 아버님은 이북 사상이 싫어서 여기(남한)에 남게 되었죠. 그런 사람들을 정부에서 당시 인천에 있던 동일방직에 많이 들여보냈어요. 거기 다니면서 어머니를 만나 결혼하시고…… 어머니 막내 삼촌이 평화사진관이란 곳에 근무하셨는데 동일방직을 나와 거기 다니면서 사진 기술을 배워서 사진관을 연 거죠.”

1964년 그렇게 만석동에 문을 연 부흥사진관은 1974년 지금 동암역 근처로 옮겨와 동암사진관이 되었고 1980년 지금의 동암역 남부광장에 자리 잡으면서 역전사진관이 되었다. 당시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최광남 씨가 증기기관차를 타고 학교를 오가던 시절, 학교를 마치면 아버지 도시락 심부름을 하며 그는 자연스럽게 사진관 일을 돕게 되었다.

“그때는 사진관마다 외무원(외판원)들이 있었어요. 그 사람들이 티켓(할인권)을 팔면서 사진관 홍보를 해주었는데 이 사진관 가면 설탕 준다, 저기 사진관을 가면 수건 준다, 자기들 멋대로 그러고 다니기도 했어요. 그러니까 사진 찍으러 와서 왜 설탕 안 주느냐? 항의하는 사람도 있었죠. 아버님은 그게 못마땅하셔서 우리 사진관은 조금 하다가 외무원을 아예 안 두게 됐죠.”

다들 어렵던 시절, 설탕을 주거나 말거나 양장점이나 제화점과 같이 사진관은 큰맘 먹고 찾아야 하는 곳이었으리라. 그 무렵 최광남 씨가 기억하는 최고의 호황은 1968년이었다. 1968년 정부는 모든 성인남녀에게 주민등록증이란 것을 만들게 했고 거기에는 하나같이 증명사진을 붙여야 했으니 국가적 차원의 기념촬영이 이뤄졌던 것이다. 또한 1964년부터 1973년까지의 베트남 파병도 사진관 매출을 올리는 데 한몫했다. 처음에는 파병군인 손을 통해, 이후에는 밀수업자들을 통해 손목시계와 사진기가 대량으로 국내에 들어왔고 그만큼 사진을 인화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사건이 시대적인 특수였다면 연례적인 호황도 있었다.

“3월 입학 시즌이 제일 바빴지. 중고등학교 학생증 때문에 2~300명이 증명사진을 찍으러 한꺼번에 몰려오고 그랬으니까. 그때는 온 식구들이 잠도 못자고 사진관 일에 달라붙어야 했어요. 한 사람당 여섯 장씩 뽑아줬거든. 그때는 일일이 손으로 노광(필름에 적당한 빛을 줘서 밝기를 조정하는 일, 노출이라고도 한다)을 줘서 밝기를 동일하게 해야 하는데 어떤 사진에 조금만 오래 주면 그것만 색이 달라져버려. 그럼 그거 한 장만 오려내고 다시 필름을 현상해야 돼요. (옆에서 함께 사진관을 운영했던 부인 임경희 씨는 ‘다시’라는 말이 제일 징그럽다며 추임새를 놓는다.) 나중에 많이 하면 달인이 되어서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기계적으로 됐지. 그런데 또 학생들이 대부분 까까머리에 옷도 똑같은 검은 색 교복을 입었잖아. 다 인화하고 나오면 요만한(손바닥 절반 크기의) 봉투에 풀칠을 해서 사진 한 장을 붙여가지고 커다란 베니어판에 봉투들을 쫙 붙여놔요. 어떻게 일일이 다 꺼내보고 확인하고 찾아줄 수가 없으니까. 그럼 자기 얼굴 찾아서 떼어 가는 거지. 그런데 자기 것만 떼어 가면 문제가 없는데 꼭 친구 것도 같이 가져가서 안 전해주는 경우가 생겨요. 그럼 그 친구는 왜 자기 사진은 없느냐 그러고. 그럼 그것도 다 필름을 다시 확인해서, 어떨 때는 필름의 명찰까지 확대해서 그걸 보고 찾아서 다시 뽑아주고 그랬죠.”

그리 오래지 않은, 불과 2~30년 전 일이지만 지금은 찾을 라야 찾아볼 수 없는 풍경이 되었다. 암실…… 고등학교 시절 내가 다니던 학교 사진반 서클룸의 암실은 몰래 담배피기 딱 맞춤인 공간이었다. 한쪽은 검고 한쪽은 붉은 커튼을 걷고 들어서면 풍겨 나오던 알싸한 화학약품 냄새.

“그 당시에는 다 손으로 했어요. 암실에 들어가서 야광이라고, 붉은 다마(전구)에 필름을 비춰서…… 온도계도 없었지만 오래 하다 보면 새끼손가락 끝이 온도계야. 인화지에 노출을 준 다음 욕조에 약품을 타고 인화지를 담가서 희석을 시켜요. 처음에는 현상액, 그 다음에는 정지액, 정착액…… 약품들이 희석이 잘 안 되면 (사진에) 줄이 생기거든. 그럼 또 다시 해야지. 그리고는 흐르는 물에 12시간 정도 담가둬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사진이 좀 오래되면 노랗게 돼. 사진 잘 보는 사람은 인화한 걸 보고 딱 그러지. 금방 변하겠네요. 그때는 그걸 다 손으로 하니까 손톱이 맨날 노래졌지. 또 건조를 해야 하는데 작은 탁자 크기의 건조기가 있어요. 스텐리스 판에 열장씩 얹어놓고 롤러 같은 걸로 물을 쫙 뺀 다음 약간 있으면 김이 모락모락 내는데 조금만 오래 두면 또 사진이 거기에 눌러 붙어. 그럼 또 다시 뽑아야 되고. 그게 다 기술이지. 암실에 있는 시간이 하도 많아서 해를 거의 못 보고 살았어요.”

따라가기 벅찬 디지털 세상

한참 이야기를 하는데 어느 할머니가 사진관 문을 열자마자 대뜸 여긴 처음 올 적에는 총각 사장이더니 지금은 백발이 다 되었다며 농을 던지고는 딸네 사진 한 장 찍어주고 싶다며 가격을 묻고 가신다. 아버지 일을 도와 사진관을 하던 최광남 씨가 군대를 제대하고 결혼을 한 뒤 신혼집을 겸한 사진관을 차려 독립한 것은 1980년. 그때만 해도 동암역 남부광장은 그야말로 허허벌판에 양계단지만 들어서 있어 장사가 잘 되지 않았다. 생활고에 직면한 최광남 씨는 낮에는 사진관을 부인에게 맡기고 인천항에 있는 선원조합에 취직을 했고 80년대 후반 경기가 좋아지고 형편이 좀 나아지자 직장을 그만두고 다시 사진관에 전념했다.

“88년 올림픽 앞두고 큰맘 먹고 그동안 모아둔 돈에 대출까지 해서 칼라사진 인화기를 샀어요. 5000만원이 넘었는데 당시 빌라 한 채 값이었죠. 그때 사람들이 참 사진을 많이 찍은 거 같아요. 사진기를 빌려주기도 했죠. 입학식이나 졸업식, 소풍이나 바캉스 같을 때. 제일 잘 나가던 게 올림푸스 팬이라고 24장짜리 필름 넣으면 48장 나오는 사진기인데 사람들은 같은 필름을 사도 여러 장 찍을 수 있으니까 좋고, 우리는 인화 많이 하니까 좋고. 그 기계(칼라사진 인화기)를 10년도 넘게 썼어요. 애지중지하며 썼죠. 그런데 어느 날부터 디카(디지털카메라)로 바뀌면서 쓸 일이 없어지니까, 기계가 돌아가야 고장도 안 나는 법이잖아요. 그 안에 약이 들어가는데 헌 약이 빠지고 새 약이 다시 들어가고 그래야 되는데 약도 그대로 두니까 상하고. 그러면 쓰지도 않은 약 몇 개월에 한 번 갈아줘야 하고. 이래저래 적자만 계속 쌓여가니까 몇 해 전에 처분을 했죠. 여기 사진관 문으로 나갈 수도 없는 큰 기계여서 내가 다 분해해서 고철상 불러서 가져가라고 했어요. 13만원 고철 값 내주고 가져가는데 마음이 짠하더라고.”

디지털인화서비스란 것이 처음 등장한 게 2000년, 그 시기 대부분의 언론사 사진기자들도 일명 DSLR이라고 하는 디지털카메라로 바꾸던 시기였다. 한 언론에 따르면 디지털인화 시장은 2002년 12억 원 대였던 것이 2년 뒤 600억 원 대로 가파르게 성장했다고 한다. 너나없이 사진기를 갖고 다니고 핸드폰에도 사진기가 장착되던 무렵, 사진기가 많아지니 더 많이 사진을 뽑을 것이란 예상과는 달리 동네 사진관들은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시대가 너무 빨리 바뀌어. 디카가 들어오니까 나도 2000년인가 카메라 바디만 천 몇 백만 원짜리를 샀지. 그때는 1기가 메모리만도 60만원에 베터리 가격도 만만치 않아. 그때는 베터리가 TV리모컨만 했어요. 그런데 지금 1기가에 얼마나 해? 4기가에 만원도 안 하잖아. 디카는 너무 빨리 바뀌고 다 수입에 의존하니까 부품도 금방 단종이 되어서 고장 나면 수리할 때도 없어. 그러니까 장비 구입하고 따라가기 바쁘지. 증명사진 전용 프린터기도 코닥 제품으로 600만 원짜리 샀는데 좀 있으니까 코닥이 생산을 안 한다는 거야. 사진관들 문 닫는 게 다 그런 이유야. 디카 나오기 몇 해 전에는 폴라로이드 사진기, 증명사진 찍는 전용 폴라로이드가 있었어요. 25분, 17분, 5분, 3분…… 빨리 뽑아주는 게 경쟁이 될 때였으니까 그걸로 증명사진을 찍었는데 그럴 98만원 주고 샀었는데 그것도 몇 해 지나서 무용지물이 됐지. 또 폴라로이드는 필름 값이 비싸잖아. 딱 찍고 1분 있으면 나오는데 보면 눈을 감았어. 그럼 다시 찍어줘. 또 눈을 감았어. 눈감은 사진 필름은 반품도 안 되는데, 속이 타지. 손님은 왜 자꾸 눈 감을 때 찍느냐고 그러고. 네 번까지 찍은 적도 있어. 그럼 뽑을 때 얼마나 조마조마 한지……. 그 필름이 여기 어디 있는데…… 마지막 쓴 게 2004년 9월이네. 디카가 들어오니까 그거야 좋지. 눈을 감든 말든.”

무언가를 오래 들여다본다는 것

낼 모레 환갑을 바라보는 백발이 성성한 이가 이메일이니 포토샵이니 하는 낯선 용어들과 마주치며 컴퓨터 모니터와 씨름했을 모습이 눈에 선하다. 부인 임경희 씨는 몇 해 전부터는 “머리 흰 소년(남편을 칭하는 애칭인 듯하다)이 젊은이들 결혼식에 사진 찍고 그러는 게 보기 좋지 않다”며 출장사진도 나가지 말라고 말렸다고 한다. 사실 디지털화와는 별도로 행사사진촬영이 전문화, 기업화되면서 출장사진 주문도 거의 없어졌다.

“예전에는 집에서 돌잔치를 많이 했잖아. 그럼 나는 한 짐 싣고 다녔지. 오토바이에 병풍, 돌상에 올라갈 것들, 삼각대에 조명에, 나중에는 비디오카메라까지 메고. 그런데 가보면 집들이 다 좁아. 지금처럼 좋은 렌즈도 없으니까 방안에서는 돌상이 다 안 나오거든. 그러면 창문 열어놓고 창틀에 매달려서도 찍고 그랬어. 그런데 뷔페 문화가 들어오면서 싹없어졌지. 지금이야 다 그런데서 돌 사진, 결혼사진 그런 거 찍잖아. 또 아이사진 전문 스튜디오가 생겨나고. 애들도 잘 안 낳지만 낳아도 이런 데서는 잘 찍으려고 안 하지. 또 영정사진 작업도 많이 했지. 사진이 서비스업이라고 나는 돌아가신 분들한테도 서비스 잘 했어. (웃음) 구겨지고 접히고 그런 사진 들고 와도 정성들여 복원해주고. 아마 저승에서도 다들 고마워하실 거야. 잘 모르겠는 거는 사진을 뽑아놨는데 안 찾아가는 사람이 그렇게 많은 거야. 그것만 다 찾아가도 내 형편이 많이 나아질 거야. (웃음) 신혼여행 사진도 어떻게 됐는지 안 찾아가. 신혼여행가서 갈라섰나? 전화해도 번호가 바뀌었어. 저기 밖에 걸어놓은 사진도 혹시 지나가는 사람 중에 아는 사람이 보고 연락을 해줄까 싶어서 걸어놓은 결혼식 사진이야. 심지어 어머니 팔순잔치 사진을 찍었는데, 그런 사진은 찾으려면 목돈이 들어가니까 형제들 중에서 몇 십만 원 가지고 찾는 사람이 없는 거야. 그래서 재고가 이렇게 많아.”

창고에서 그가 들고 나온 사진을 보니 테이블 한 가득이다. 어려운 살림살이가 많은 동네일수록 버려지는 앨범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사진을 찍는 일보다 사진을 정리하고 보관하는 일에 더 많은 여유가 필요하고 더 많은 정성이 들어가기 마련이다. 버려진 사진은 버려진 사연이기도 할 텐데 실시간으로 찍고 버리기가 반복되는 지금 우리는 더 가난해진 걸까, 풍요로워진 걸까?

“필름은 정말 고심해서 찍잖아. 그래서 한 장을 찍더라도 그 사람을 자세히 들여다보게 돼. 마지막 필름 한 장, 마지막 한 방을 찍을 때 얼마나 생각이 많겠어요. 렌즈를 통해서 보고 또 다시 한 번 쳐다보고.”

사람들은 그렇게 오래 들여다보고 싶어서, 오래 쳐다보고 싶은 것들을 찍어온 모양이다. 그런데 점점 무언가를 오래 들여다보는 일이 쉽지 않다. 사진관을 나서기 전 그는 기억에 남는 한 장의 사진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가족 중에 누가 아프면 가족사진을 찍으려는 와요. 아버님이 편찮으신데 가족사진을 찍고 싶다고 그래서 모시고 오시라고 했더니 거동을 못하신데. 집에 가서 세팅을 하고 찍으려는데, 가족사진은 화목하게 나와야 하는데 다들 우울해. 얼굴 표정에 다 나타난다고. ‘미소 지으세요.’ ‘좀 웃으세요.’ 그래도 분위기가 침침해. 어떻게 하겠어. 그냥 찍어줬어. 그리고 배경도 다 합성해서 지저분한 거 없애주고 사진관에서 찍은 것처럼 만들어줬는데 그 다음날인가 그분이 그만 돌아가셨어. 그래서 그걸 집에 걸어놓기가 그렇다고 그냥 뽑지 말고 두라고 그러는데 세월이 지나서 마음 바뀌면 찾아가시라고 하고 뽑아서 보관해놓고 있었지. 그랬는데 2년인가 지나서 어머니가 찾아가시더라고. 안 버리기를 잘 했어요, 하시면서.”


- <삶이보이는 창> 5-6월호에 보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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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0-04-29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날로그 시대의 추억이 묻어나는 좋은 글이네요^^

나무처럼 2010-04-29 11:19   좋아요 0 | URL
감사.. 그런데 갈수록 아날로그가 그리워지니... 나이 먹는게... 쩝...
 

“내 전 생애는 실패의 연속이었다. (…) 나는 단 하나에 대해서만-나 자신에 대하여-승리했을 뿐이다.”

지난 3월 26일은 안중근 의사가 죽은 지 딱 100년이 된 날이었다. 그날 난 깜짝 놀랐다. 한국사회가 이토록 독립운동가를 존경하고 사모했었나 싶어서 말이다. 위에 인용문은 내가 안중근보다 훨씬 더 좋아하는 어느 독립운동가의 말이다. 조국의 독립과 혁명을 위해 중국혁명에 뛰어들었던 장지락이란 이름의 조선인. 마침내 ‘트로츠키주의자’로 몰려 비밀리에 처형된 뒤 40여 년이 지나서야 중국에서 공산당원 자격이 회복되었던 그이의 삶은 님 웨일즈의 『아리랑』을 통해 김산이란 이름으로 알려졌다. 만약 김산이 작가였다면 아마도 조지 오웰과 같은 작품을 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문득 해본다. 김산이 죽었던 1938년은 조지 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가 출판된 해이기도 하다.

그 유명한 ‘빅 브라더’를 만들어낸『1984년』의 작가, 스탈린 체제를 신랄하게 비판했다는 이유로 한국에서는 ‘반공소설’의 대명사가 된『동물농장』의 작가인 조지 오웰은 아이러니하게도 꽤나 급진적인 사회주의자였으며 여러 편의 르포르타주를 남긴 르포작가이기도 했다. 몰락한 부르주아 집안의 맏아들이었던 그는 영국의 명문으로 알려진 이튼스쿨을 졸업하자마자 열아홉 살의 나이로 경찰시험을 보고 버마로 가서 5년 동안 경찰 노릇을 했다. 하지만 대영제국의 식민지에서 제국의 말단 관리로서 느껴야 했던 자괴감은 결국 그를 전업 작가의 길로 들어서게 한다. 말이 좋아 전업 작가이지 이십대 후반의 빈털터리였던 그는 2년여 동안 파리의 쪽방촌과 런던의 부랑자 시설을 전전하며 뜨내기 생활을 하게 되고 이때의 경험을 통해 그의 첫 르포작품이자 조지 오웰이란 필명을 최초로 사용했던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이 탄생한다. 언뜻 보면 치기어린 젊은이의 방랑기이자 체험기처럼 보이지만 도시 빈민층의 생활에 대한 치밀하고 사실적인 묘사와 지금의 한국과도 별반 다르지 않는 빈곤정책에 대한 통렬한 비판, 자선이 갖는 위선에 대한 통찰은 그를 주목할 만한 신예작가로 만들었다.

이 작품을 읽고 그를 눈 여겨 보았던 진보적인 독서모임 ‘레프트 북클럽’의 편집자는 그에게 영국 북부 노동자들의 실상을 취재하여 글을 써달라는 제의를 한다. 두 달에 걸쳐 위건, 리버플, 반즐리 등 탄광지대를 돌며 탄광노동자들의 노동환경, 주택문제와 실업의 문제 등을 조사하고 쓴 르포르타주가 바로 올해 한국에서 번역되어 나온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이다. 그런데 이 책에서 오웰은 책의 절반을 할애하여 자신을 비롯한 부르주아 지식인에게 얼마나 뿌리 깊은 속물근성이 있는지(“궁극적으로 속물근성을 떨쳐버려야겠지만, 제대로 준비가 되지도 않았는데 떨쳐버린 척하는 것은 치명적인 실수다.”), 이른바 사회주의자를 자임하는 이들이 왜 대중들에게 그토록 외면당하는지(“기독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사회주의 홍보에 가장 해를 끼치는 것은 바로 그 신봉자들인 것이다”)를 조목조목 꼬집으며 그로 인해 사회주의자들이 되려 파시즘을 도와주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이러한 지적은 오웰에게 집필을 맡겼던 ‘레프트 북클럽’ 편집자를 매우 당혹스럽게 했고, 책은 출간과 동시에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지만 정작 오웰은 이 책이 나오기도 전에 파시즘과 맞서 싸우러 스페인으로 달려갔다.

스페인 내전은 반파시즘 진영인 좌파 인민전선(공화파) 정부와 가톨릭교회와 파시스트의 지원을 받았던 프랑코를 중심으로 한 쿠데타 세력 간의 전쟁이었지만 그 실상은 좀 더 복잡했다. 군부가 반란을 일으키자 민주주의를 위해 나섰던 것은 노동자들, 빈민들로 구성된 민병대였으며 사회주의자들과 아나키스트들은 스탈린주의 공산주의자, 자유주의자들과 한 편이 되어 싸웠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카탈로니아 지방을 중심으로 혁명의 기운이 높아지자 사회주의 혁명을 두려워했던 우파 자유주의 진영과 역시 혁명을 원치 않았던 소련 공산당의 지휘를 받는 스페인 공산당은 민병대를 정규군으로 편입시키려 하고 마침내 양 측 간에 무력충돌까지 빚어진다. 그 가운데 많은 사회주의자와 아나키스트들은 ‘트로츠키주의자’, ‘프랑코의 내부첩자’로 지목되고 경찰이 동원돼 색출작업이 벌어진다.

카탈로니아의 항구도시 바르셀로나에 도착해 “아무도 아첨하거나 팁을 받지 않았고 웨이터와 구두닦이가 손님을 똑바로 보며 ‘동지’라고 부르는” 사회분위기에 감동받고 “공동의 품위를 위해” 민병대에 들어갔던 오웰은 애초부터 공산주의자냐, 사회주의자냐, 내전을 승리 뒤 혁명을 할 것이냐, 내전과 혁명을 동시에 할 것이냐 하는 정치적인 논쟁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총도 없이 전선에 배치되었던 그에게는 더 나은 무기가 언제 보급될 지가 관심사였고 “부대를 지휘하는 장군의 등을 툭툭 치며 담배를 달라고 하고 싶으면 그럴 수도 있”는 평등하면서도 “어느 누구보다 더 믿음직한 군대”가 언제 파시스트와 제대로 싸울 것인지가 중요한 문제였다.

그러나 인민전선 정부와 공산당의 배신이 무력충돌로까지 이어지자 더 이상 방관자로 남을 수 없게 된다. “나는 부르주아적인 공산주의자들이 추구하는 이상화된 ‘노동자’에 대한 특별한 애착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으나, 피와 살을 가진 진짜 노동자들이 그들의 천적인 경찰이 충돌하는 광경을 보니 내가 어느 편에 설 것인가 나 자신에게 물어볼 필요가 없어졌다.” 결국 오웰 또한 프랑코의 첩자인 트로츠키주의자로 몰리면서 목숨이 위태로워지고 가까스로 스페인을 탈출하는 것으로 『카탈로니아 찬가』는 끝을 맺는다.

이 세 편의 르포르타주가 씌어진 1930년대는 어떠한 시대였나? 1929년 미국 증시의 폭락으로 대공황이 시작되었고 미국만이 아니라 영국, 프랑스 등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도 극심한 경제난에 봉착했다. 공장마다 실업자가 속출했고 도시마다 부랑인이 넘쳐났다. 그럼에도 기계화, 산업화, 생산성 증대만이 진보라며 절대시되었고 우생학은 과학으로 포장되어 나치 독일에서만이 아니라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 같은 나라에서도 정신장애인, 알콜 중독자, 장애인을 강제로 불임시키는 법들이 만들어지는 등 국가에 의한 반인도적 범죄가 공공연히 자행되던 때였다. 그 가운데 조지 오웰의 경고는 무시되었고 혁명과 전쟁은 패배했다. 2차 세계대전으로 파시즘에 승리했다고는 하지만 그는 미래를 낙관할 수 없었고 『1984년』을 쓴 다음해인 1950년 오웰은 47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

“나의 출발점은 언제나 당파의식, 곧 불의(不義)에 대한 의식이다. 책을 쓰기 위해 자리에 앉을 때 나는 나 자신에게 ‘자, 지금부터 나는 예술작품을 만들어낸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 책을 쓰는 이유는 내가 폭로하고 싶은 어떤 거짓말이 있기 때문이고 사람들을 주목하게 하고 싶은 어떤 진실이 있기 때문이다.”

조지 오웰의 「나는 왜 쓰는가」라는 산문의 한 대목이다. 스페인 내전이 아니라 내전 속 또 하나의 내전에 대한 르포르타주 『카탈로니아 찬가』에서 그는 냉소와 환멸을 느꼈지만 그보다 더 많은 인간의 고상함을 발견했다고 고백했다. 사실 카탈로니아는 평택 대추리, 서울 용산, 제주 강정마을에도 있었던 것 아닐까? 도처에 있는 카탈로니아를 위해 더 많은 오웰, 더 많은 르포르타주가 필요하다.

 

 

 

 

 

 

 

 

 

- <인권오름>에 보낸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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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30 16:4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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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30 22: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L 선배에게
 

봄볕에 기대어 담배 한 개비를 물었더니 이제야 편지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이른바 ‘용산 수배자 3인’ 중 한 명이었던 선배가 명동성당 앞에서 환하게 웃으며 기자회견을 한 뒤 제 발로 경찰서에 간 게 벌써 50일 전입니다. ‘벌써’라는 말에 섭섭도 하겠지만 갇힌 사람에게는 더디 가는 시간도 형벌의 한 가지인 셈이지요. 게다가 담배 한 대도 못 피울 테니, 제가 대신 또 한 개비를 물었습니다.


지난해부터 제 주변 사람들이 하나둘 금연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래, 얼마나 장수하나 두고 보자’는 못된 심보가 들기도 하지만, 한편 담배를 배운 후 한 번도 작심삼일을 넘기지 못했기에 그네들의 결단이 부럽기도 합니다. 예전에는 담배를 끊으면 독한 놈이라 했다지만 요새는 ‘아직까지도’ 담배를 피우는 게 독한 거라네요. 사실 사람이 독해서가 아니라 담배의 중독성이 심한 탓일 테지요.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중독으로 치자면 어디 담배뿐인가요. 아침에 일어나면 핸드폰 문자부터 확인하고, 사무실에 나가면 컴퓨터 앞에서 이메일부터 열고, 퇴근하면 TV를 켜면서 못 다 본 신문을 펼치고.
 

그렇게 신문을 뒤적이다가 선배가 들어간 지 며칠 되지 않아 서울 왕십리 뉴타운지구에서 겨울철 강제철거가 또 실행되었다는 기사를 봤습니다. 지난해 12월 서울 마포구 용강동에서 60대 철거민이 목숨을 끊은 지 한 달 만에, 용산참사가 일어난 지 딱 1년 만에 다시 시작된 겨울철 철거였습니다. 서울 마포구 아현동, 북아현동과 염리동, 성동구 금호동과 왕십리, 동작구 상도동과 성북구의 장위동, 동대문구 휘경동과 답십리, 은평구 갈현동과 서대문구 가재울……. 서울만 해도 재개발 136곳, 뉴타운 재개발 113곳, 재개발 예정지역 77곳이라 하니 수도서울은 그야말로 지뢰밭입니다. 용산참사 이전에도 이후에도 한국사회에서의 재개발 병, 개발중독은 전혀 회복 기미가 보이질 않습니다. 아니 4대강 사업이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으니 지금까지는 그저 서막에 불과한 것인지 모릅니다.
 

어디 재개발 문제뿐인가요. 비정규직 문제가 큰일이라고 너나없이 말하지만 새해 선물로 정리해고 통지를 받아야 했던 한양대학교 미화원 여성노동자들은 설 연휴 전날도 눈발을 맞으며 집회를 열어야 했고, 설 연휴 방송사들이 앞 다투어 다문화 운운하는 동안 이주노동자들 40명은 영문도 모른 채 단속을 당해 그 중에 비자가 없는 사람은 수갑이 채워져 출입국관리소로 끌려가야 했습니다. 인권을 빙자하여, 북한 인민의 인권을 볼모삼은 북한인권법이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를 통과했고, 명분 없는 전쟁의 늪 가운데 하나인 아프가니스탄에 다시 파병을 하는 법안은 별 문제 없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습니다. 아마도 선배가 밖에 있었다면 일일이 챙기고 관여했을 일들이지만 솔직히 선배가 나와 있다 한들 뭐가 달랐을까 싶습니다. 
 

인권운동의 오랜 숙원인 사형제 폐지도 헌법재판소의 합헌 결정으로 물 건너가고, 헌법재판소의 집시법 야간집회 금지에 대한 헌법불합치 결정은 밤 10시까지만 합법으로 하자는 어처구니없는 여당의 법안으로 뒤통수를 맞았습니다. 이 와중에 법무부는 차별금지법도 제 입맛대로 어떻게 만들어볼까 하는 모양이고, 오늘 인터넷에 들어가니 쌍용차 파업 이후 “사망 6명, 자살 기도 2명, 환자 70명”이란 기사가 떠 있습니다. 또 담배가 땅깁니다. 
 

요즘에는 ‘이명박’과 ‘김연아’를 거론하지 않고 글을 써야겠다 싶습니다. 칭찬이 됐든 비판이 됐든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넘쳐나지만 끝도 없는 블랙홀 같으니 말이죠. 대신 ‘삼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지난해 말 출판계에 있는 후배에게서 삼성 X파일에 대해 양심선언을 했던 김용철 변호사가 삼성과 관련된 원고를 들고 출판사를 전전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출판계에서는 책을 낼 경우 세무조사를 각오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파다했다고 합니다. 책이 나오고 그나마 양심적인 언론들도 책 광고를 거부했다는 이야기가 들리고 그것이 기사화되기도 했습니다. 경향신문에 이 책과 관련한 칼럼이 거부되어 논란이 됐고 그 와중에 김용철 변호사의 책은 인터넷 서점을 중심으로 베스트셀러가 되었지만 여전히 대다수의 언론은 침묵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 과정에서 삼성의 실질적인 압력은 없었을 것이라 저는 확신합니다. 예전 중앙정보부와 안기부와 보안사가 그랬듯이 절대 권력은 입김 없이 그저 눈빛만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존재이니까요. 이미 삼성은 그런 경지의, 신성불가침의, 알아서 자기검열이 작동되는 그런 존재가 아닐까요? 그래서 김용철 변호사의 책 제목처럼 삼성을 생각하는 일, 삼성에 대해 말하는 일은 대단한 용기와 각오와 결단을 요하는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사람』은 창간과 동시에 삼성 문제를 고민했죠. “대한민국과 삼성은 전쟁 중”이라며 특집으로 삼성 문제를 다루기도 했습니다. 2005년의 일이니 지난 5년 사이 삼성은 아마도 그 싸움에서 승리를 거둬 대한민국을 온전히 접수한 모양입니다. 삼성과 관련된 인권문제, 노동권 문제나 삼성반도체 백혈병 문제 등에 대해 『사람』은 물론 인권운동에서도 대응을 게을리 하거나 회피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삼성은 더 이상 하나의 기업, 거대 자본, 재벌이 아닌 그 무엇이 되어버렸습니다. 권력 이상의 권력, 국가보안법처럼 하나의 지배체제로 한국사회를 억압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래서 삼성의 문제, 한국 속에서 삼성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과 삼성, 삼성 속의 한국의 문제를 어찌하면 좋을지, 선배가 나오면 머리를 맞대어봐야겠습니다.
 

안에서 박지원의 『열하일기』 완역본을 재미나게 읽고 있다지요. 잘은 모르지만 저는 박지원의 시대와 지금 시대가 많이 닮았다고 생각합니다. 세계의 중심축이 바뀌는 격변기, 변방의 지식인으로서 비주류와 주변부에 주목하고 주체성을 고민하며, 거기서 실사구시와 이용후생의 가치를 찾아 나섰던 연암의 삶이 선배에게는 어떤 의미일까요? 압록강을 건너 산해관을 지나 북경을 돌아오는 봇짐 속에 선배는 무엇을 담아왔을지도 꼭 이야기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올해는 봄꽃이 일찍 필 거라고 합니다. 나오면 담배는 제가 한 갑 사드리지요.
  

 

-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 2010년 3-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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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불매운동에 대해

불매운동에 대해서가 아니라 불매운동이 불러온 알라딘 서재에서의 일들에 대해서 뭔가 말을 해야겠다고, 글을 써야겠다는 그러지 않고 있으니 마음이 불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차에 아래 두 분의 글을 읽고 이게 내 마음 같아서 굳이, 나까지 보텔 필요가 없겠다 싶어졌다. 좀 비겁한 거 같지만 내 맘을 나보다 잘 드러내준 두 분에게 이 자리를 빌어 감사를...
(여기 글을 올리기 시작한 지 곧 일년이 되어가는데 그때까지도 뭔가 하고 싶은 얘기가 있으면 그때 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여울마당 님의 접습니다 
딸기 님의
알라딘 불매운동에 대해
 


내가 밥벌이 하는 직장에서 신년 특별기획으로 현장 인권활동가들이 권하는 한 권의 책에 대한 추천사를 실었다. 이미 읽어본 책도 있지만 생전 처음 들어본 책도 있다. 교정을 보고 편집을 하며 나 또한 책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래 책은 현장 인권활동가들이 뽑은 책들이고 그 밑의 글은 내가 잡지에 끄적인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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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움직이는 책읽기

새해를 책 이야기로 시작해볼까 합니다. 지난해 말 인권재단 사람의 계열사(?)쯤 되는 도서출판 사람생각에서 『쫄지 마, 형사절차!』란 책을 냈는데 예상보다 잘 나갑니다. 형사소송법이 많이 바뀐다고 하여 쉬운 해설서 하나 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나눈 적은 있지만 실제 기획에 들어가고 이렇게 뚝딱 형사절차 매뉴얼로 나오게 된 데는 2008년 촛불집회 영향이 컸습니다. 그러니 누구 말마따나 이 책이 잘 팔리는 것은 물론 이 책의 탄생에도 이 정부의 기여한 바가 큽니다.  

금서목록이 그렇듯 베스트셀러 목록도 그 시대를 어림하게 해줍니다. 교보문고 집계에 따르면 지난해 베스트셀러 1위는 신경숙의 소설 『엄마를 부탁해』입니다. 한 달에 10만부씩 120만부가 팔렸다고 하니 1만부를 목표로 ‘대박’을 염원하는 저희랑 차원이 다르지요. 불황에는 소설이 장사가 된다는 게 출판계 통설이라지만 베스트셀러 2위인 하루키의 소설 『1Q84』는 계약을 하면서 미리 인세를 10억 원이나 주었다고 하니 이 동네의 양극화 또한 만만치 않습니다. 어떤 이는 현재 팔리는 책의 80%를 10여 개 출판사가 내고 있는데 향후 5년 내에 그 수가 반으로 줄어들 것이라 전망합니다. 이뿐만이 아니라 온갖 사회문제들이 출판계에서 더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는 않을 테죠. 

소설이 지난해 유독 잘 팔렸다면 경제·경영 분야로 분류되는 자기계발도서들은 여전히 잘 팔렸습니다. 그 중 베스트셀러 9위를 차지한 『넛지』란 책이 있습니다. ‘팔꿈치로 쿡쿡 찌르다’라는 뜻의 넛지(nudge)는 자유주의적인 개입, 부드러운 간섭이라고 합니다. 이를 행동경제학의 선택 설계이론이라고 하는데 책에서는 구체적인 예로 암스테르담 화장실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디서나 남자 화장실 소변기는 골칫거리인가 본데 암스테르담의 한 화장실에서 소변기 주변이 지저분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경고(CCTV 설치)나 캠페인(남자가 흘려야 할 것은 …), 또는 어떤 인센티브도 통하지 않았지만 소변기 안에 파리 모양의 스티커를 붙여놓는 것만으로 새어나가는 소변량을 80%나 줄었다는 것이지요. 이것을 가리켜 넛지라 한답니다. 이 책의 흥행요인 중에는 세계금융위기 이후 ‘모든 인간은 합리적으로 경제활동을 한다’는 주류 경제학의 대전제에 대한 반성이 작동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실제로 미국 오바마 대통령도 즐겨 읽었고 이 책의 필자 중 한 명은 오바마 정부에 스카우트되기도 했습니다.

사실 어떻게 다른 사람의 행동을 변화시키고 그이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까 하는 것은 인권운동에서도 오랜 화두가 아닐까 싶습니다. 인권운동은 기업처럼 인센티브를 줄 수도, 정부처럼 경고나 금지를 할 수도 없으니 말이죠. 그런 점에서 『넛지』는 인권활동가들도 한번 고민해봄직한 주제가 아닐까요?

요즘 책이란 무엇이고 글을 읽고 쓴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자문해봅니다. 한 후배가 선물한 노무현의 유고집 『진보의 미래』를 읽으며 든 생각이기도 하고(그는 왜 대통령을 그만두고 나서, 검찰 조사를 받으면서까지도 책을 쓰고자 했을까요?), 한 온라인 서점이 비정규직 노동자를 해고하자 불로거들이 이에 항의하며 벌이는 불매운동을 지켜보며 든 고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계기는 독일의 과거청산 문제를 다룬 『더 리더(The Reader)-책 읽어주는 남자』란 소설입니다.

우리 나이로 열일곱 살에 서른여섯 살 한나라는 여자를 만나 사랑하게 된 주인공 미하엘은 데이트를 할 때면 그녀의 요구로 책을 읽어줍니다. 어느 날 홀연히 사라진 한나를 법대생이 된 미하엘은 나치 전범재판에서 보게 됩니다. 재판 과정을 지켜보며 미하엘은 피의자인 그녀가 문맹임을, 그리하여 나치의 명령문을 읽지 못해 최소한 실정법에서는 무죄임을 알게 되지만 한나는 자신의 문맹이 밝혀지는 것이 꺼려 혼자 죄를 뒤집어쓰고 미하엘 또한 고심 끝에 한나의 침묵에 동조합니다. 감옥에 갇힌 한나와 그녀에게 책을 읽어 그 녹음테이프를 보내주는 미하엘. 한나는 가석방을 앞두고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미하엘은 그녀의 유품을 받기 위해 교도소에 갔다가 그녀가 글을 깨치고 가장 먼저 아우슈비츠 생존자의 증언을 담은 책을 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같은 이름의 영화에서는 목매달기 위해 한나는 다름 아닌 이 책들을 딛고 올라섭니다). 

옛 어르신들은 “모든 걱정근심이 글로부터 나온다”고 한탄하면서도 손주들에게 글을 가르쳤습니다. 어릴 적 “소설을 좋아하면 가난하게 산다”는 말을 자주 듣고 자랐더랬지요. 둘 다 좋은 의미로 해석하자면 글이 가진 성찰의 힘을 이야기하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반면 글이란 태생적으로 권력 지향적이고, 어쩌면 권력 그 자체가 아닌가 싶습니다. 인터넷과 블로그의 등장으로 넓어졌다곤 하지만 여전히 글을 쓰는 사람도, 책을 내는 사람도, 그것을 분배하고 유통하는 사람도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비판적인 책읽기와 글쓰기에 대한 비판적 사유, 글의 민주주의는 저의 오랜 고민이기도 합니다.

이번 호에서는 생활에서 인권을 만나고 인권을 통해 일상을 변화시킨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일상에서의 작은 변화와 실천을 강조하기는 쉽지만 정작 거기에 주목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 같습니다. 올 한 해 『사람』은 여기에 좀 더 힘을 기울이려 합니다. 2009년은 인권과 관련된 책들이 참 많이 나왔던 해였습니다. 인권활동가들이 생각하는 입문서와 고전은 무엇인지, 활동가들이 권하는 한 권의 책을 보고 올해 독서계획을 잡아보시는 것은 어떨지요?

읽고 나눠야 할 책은 서점과 도서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장에도 있음을 1600일을 넘게 싸우고 있는 기륭 해고 노동자들과의 만남에서 새삼 깨닫게 됩니다. 그들의 삶과 투쟁에서 우리가 무엇을 읽어야 할지, 해피엔딩을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함께 머리와 어깨를 맞댔으면 좋겠습니다.

앞서 소개한 『넛지』는 삼성경제연구소가 추천하고 이명박 대통령이 여름휴가 때 탐독한 뒤 참모들에게 선물했다고 하여 유명세를 탔습니다. 기억하시겠지만 그 여름휴가 무렵은 쌍용자동차 공장 위로 최루액 봉지가 투하되고, 헬기에서 줄을 타고 내려온 경찰특공대가 파업 노동자들을 ‘사냥’하던 때였습니다. 새해에는 책이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이고 변화시킬 수 있다는 섣부른 믿음을 더욱 경계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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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2010-01-09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어떤 잡지에 쓰신 글인가요?

나무처럼 2010-01-09 17:05   좋아요 0 | URL
허락도 없이 먼댓글을 달아서 실례가 아니었는지...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이란 격월간지예요. 소규모 인디 잡지라고들 하지요^^

딸기 2010-01-12 0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례라니, 무슨 그런 말씀을!!! 우리 친하게 지내요~~ (멋대로 엉겨붙는다;;)
 

“500억 선생님, 어서 이쪽으로 앉으세요.”

한 뒤풀이에서 어떤 분이 우스갯소리로 제게 건넨 말입니다. 사연인 즉은 이렇습니다. 평화박물관이라는 곳에서 ‘국가폭력과 트라우마’라는 이름의 강좌를 열었습니다. 그 마지막 순서는 지난 8월, 27년 만에 간첩누명을 벗은 이른바 ‘송씨일가 간첩단 사건’ 피해자들의 증언을 듣고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였습니다. 거기서 한 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재심에서 판사가 무죄라고 선고하면서 저보고 이제 국가를 좀 생각해달라고 그래요. 왜 그런 말을 했을까요? 제가 국가를 생각해줘야 하는 게 아니라 국가가 저를 생각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간첩누명을 쓴 것에 대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하지 말라는 걸까요? 저를 간첩으로 만든 건 전두환인데, 손해배상금은 전두환이 아니라 여러분이 낸 세금이잖아요. 제가 그 돈을 받는 게 맞을까요?”

그분은 이제 일흔을 바라보는 할머니였습니다. 저는 그분이 이런 고민을 한다는 게 너무 속상해서 한 500억 쯤 받아내라고 말씀을 드렸더니 어떤 유명한 시민운동가는 1조 원을 청구하라고 했다내요. 그 말에 낯이 뜨거워졌습니다. 왜 50억도, 5000억도 아니고 500억이라고 했는지. 가끔 로또 당첨을 꿈꾸는 저한테 500억 원이 어쩌면 상상 가능한 최대액수였던 모양입니다. 안기부에 끌려가 100여 일이 넘게 여성으로서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고문을 받고, 그 고통으로 인해 남편과의 관계, 자식과의 사이마저도 엉클어져버린 그분과 그분의 친척들에게 사실 무엇으로 보상이 가능할 것이며 과연 어느 누가 합당한 배상액을 계산해낼 수 있겠습니까.

어떤 나라들은 징벌적 손해배상이라는 게 있다고 합니다. 악의를 가지고 한 불법행위에 대해 형벌적인 의미로 배상을 받을 수 있도록 한 제도인데 미국의 어떤 식품업체가 고의로 유통기한을 넘긴 상품을 팔았다가 회사 문을 닫게 되었다는 뉴스를 아마 접한 적이 있을 겁니다. 그렇게라도 해서 비인간적인 범죄를 저지르고도 반성의 기미조차 없는 국가기관, 그 중 한두 부처만이라도 없앨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언간생심 조작이니 은폐니 하는 것은 꿈도 꿀 수 없게 말이죠. 그러나 지금 이 순간에도 국가보안법 피해자들이 만들어지고 용산참사의 진실이 은폐된 채 어이없는 재판이 이뤄지고 있으니 그저 로또 당첨과 같은 한낱 망상에 불과합니다.

저는 요즘 지하철을 탈 때마다 국가란 참 대단한 것이군, 생각합니다. 바로 우측통행 때문이지요. 처음에는 별 걸 다 간섭하네, 우습기도 했는데 막상 사람들 보행방향이 눈에 띄게 바뀌는 걸 보면서 국민들 걷는 방향까지 좌지우지하는 국가가 새삼 두려워졌습니다.

지하철역마다 “편리하고 안전한 우측통행, 세계와 우리의 문화”라는 글귀를 볼 수 있습니다. 원래 우리전통은 우측통행인데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좌측으로 바꿨고 해방 후 미군정은 차량은 우측통행으로 바꾸었지만 좌측보행은 바꾸지 못해 차는 오른쪽, 사람은 왼쪽으로 80년이 넘게 흘러왔다는 이야기입니다. 게다가 이미 미국, 일본, 프랑스 등 선진국들은 다 우측통행이고 그것이 대다수 오른 손잡이에게도 편하고 안전하다는 설명이니 ‘국민학교’ 입학과 동시에 좌측통행을 세뇌당한 저는 뭔가 단단히 속은 느낌입니다. 그래서인지 편리하고 안전하고 선진국도 다 그렇게 한다는 글귀를 보면, 자고 일어나면 간첩이 생겨나던 그때 그 시절이 떠오릅니다.

그 당시 판검사들도 좀 억울한 사람은 있겠지만 이게 편리하고 안전하니까, 쭉 그래왔으니까, 자신들보다 더 똑똑한 이들도 다 그러고 있으니까, 했을 테지요. 혹시 재심 판사는 그런 선배 판사들과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국가의 생리이니 너그럽게 이해해달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어떤 판사들은 과거 사법부를 대신해 사과를 하기도 했다는데 그는 자신이 맡았던 사건도 아니고 자신과는 관계없는 일이니 책임질 것도 없다며 제3자인 양 하는 것일까요?

1985년에 나온 조세희의 사진-산문집 『침묵의 뿌리』를 보면 1980년 ‘광주’와 ‘사북’을 겪은 한국사회에서 알리바이라면 권력자들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 갖고 있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알리바이라는 말은 범죄현장에 자신이 없었다는 것을 증명하여 무죄를 입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알리바이가 있다고 해서 국가범죄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29만 원밖에 없다는 전두환에게 그 29만 원이라도 받아내야 할 것이고 국가폭력 피해자에게 한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최소한의 책임을 나눈다는 의미에서 국민의 세금으로 배상금을 주는 것도 필요한 일이겠지만 그것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용산참사 재판에서 보듯 정부는 자신들의 범죄가 정당한 것이고 합리적인 선택이었다고 강변하고 사법부는 이에 대해 자기들만의 법 논리를 내세워 면죄부를 줍니다. 청산해야 할 과거사의 목록이 해마다 늘어나고 있습니다. 하기에 우리 스스로 우리의 알리바이를 부정하고, 무수한 국가폭력에 저들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깊이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을 증언하는 것, 그래서 동시대를 사는 사람으로서 연대의 책임을 다하고자 하는 노력이 절실합니다.

이번 호에서는 인종주의 문제와 쌍용자동차 파업을 다뤘습니다. 『사람』은 한국사회의 인종주의가 위험수위에 도달한 것은 아닌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때라며 경종을 울리고 싶습니다. 인간이 물건 취급을 당하고, 배제되고 추방되고 존재가 부정되는 사회는 누구에게 편리하고 안전한 사회일지 몰라도 다른 누구에게는 생존을 위협하는 위험사회입니다. 회사가 살아야 노동자가 살고, 정리해고만이 회사와 국가의 경쟁력을 높이는 합리적인 선택이라 강요하는 사회에서 쌍용자동차 파업 노동자들은 이주민과 마찬가지로 희생양일 수밖에 없습니다. 인종차별과 정리해고, 노동탄압에 대한 알리바이도 도처에 널렸습니다. 이 두 가지는 결국 하나의 문제입니다. 희생양을 갈구하는 사회, 그것으로써 존재이유를 찾아야 하는 공동체는 참으로 허약하면서도 그래서 더욱 잔인해질 수밖에 없는 사회니까요.



- 사람 4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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