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전 일이다. 아이가 생긴 것 같다는 아내의 말에 함께 산부인과에 들렸다 돌아오는 길. 내 손에는 콩알만 한(의사가 ‘요 게’ 태아라고 알려준) 물체가 찍혀있는 초음파 사진 한 장이 들려있었다. 불과 십 수 일 된 생명. 이 아이가 살아갈 세상은 과연 어떠할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자 나는 약간 당혹스러웠다. 열 달 뒤에는 분만대기실에서 비디오카메라를 들고 촬영대기중인 예비 아빠들도 볼 수 있었다. 나는 그 흔한 똑딱이(소형 디지털카메라) 하나 챙기지 않았지만 분만실 어딘가에 있던 카메라를 통해 출산 직후 아이의 모습은 동영상 CD로 구워져 지금 우리 집 책꽂이에 꽂혀있다.

사진을 찍고 찍히는 일은 하나의 의식(儀式)이다. ‘인증샷’이라는 신조어가 생겨나지도 않았을 무렵부터 우리는 가족사진을 통해 누군가로부터 한 가족, 그것도 화목하고 단란한 가족임을 인증 받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러고 보니 나는 늘 졸업앨범 비를 아까워했지만 어머니는 졸업장보다 졸업사진을 더 중요하게 여겼던 듯하다. 그런데 아이를 낳은 뒤 손주와 가족사진을 찍자고 하자 너희 식구 끼리나 찍으란다. 몇 해 전 돌아가신 아버지의 빈자리가 찍힐까봐 두려우셨던 걸까?

인천 동암역 ‘역전 사진관’


언제부터인가 동네 사진관들이 하나 둘 자취를 감추고 있다. 그나마 오래된 사진관이 몇 군데 남아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인천으로 향했다. 인천은 좀 묘한 도시다. 닫혀 있던 조선이 외세에 의해 처음으로 문을 열어야 했고, 그 문으로 선진 문물이 밀물처럼 밀려들어왔던 항구. 한국전쟁의 또한 한국 현대사의 판도를 뒤바꾸어 놓았던 맥아더의 상륙작전의 도시. 낡아서 인기가 높다는 ‘바이킹’의 월미도와 처음으로 짜장면을 만들었다는 ‘공화춘’이 있는 차이나타운. 확인할 수는 없지만 사진에 최초로 등장했던 조선 사람은 고기잡이를 하는 어부였다고 하니 그 무대가 인천은 아닐까 하며, 인천 부평구 십전동 동암역 광장에 있는 참 오래된 동네 사진관 ‘역전사진관’ 문을 열고 들어섰다.

“아버님은 반공포로였어요. 이승만 대통령 적에 거제도(포로수용소)에 있다가 갈 사람은 가고 남을 사람 남아라, 그랬는데 아버님은 이북 사상이 싫어서 여기(남한)에 남게 되었죠. 그런 사람들을 정부에서 당시 인천에 있던 동일방직에 많이 들여보냈어요. 거기 다니면서 어머니를 만나 결혼하시고…… 어머니 막내 삼촌이 평화사진관이란 곳에 근무하셨는데 동일방직을 나와 거기 다니면서 사진 기술을 배워서 사진관을 연 거죠.”

1964년 그렇게 만석동에 문을 연 부흥사진관은 1974년 지금 동암역 근처로 옮겨와 동암사진관이 되었고 1980년 지금의 동암역 남부광장에 자리 잡으면서 역전사진관이 되었다. 당시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최광남 씨가 증기기관차를 타고 학교를 오가던 시절, 학교를 마치면 아버지 도시락 심부름을 하며 그는 자연스럽게 사진관 일을 돕게 되었다.

“그때는 사진관마다 외무원(외판원)들이 있었어요. 그 사람들이 티켓(할인권)을 팔면서 사진관 홍보를 해주었는데 이 사진관 가면 설탕 준다, 저기 사진관을 가면 수건 준다, 자기들 멋대로 그러고 다니기도 했어요. 그러니까 사진 찍으러 와서 왜 설탕 안 주느냐? 항의하는 사람도 있었죠. 아버님은 그게 못마땅하셔서 우리 사진관은 조금 하다가 외무원을 아예 안 두게 됐죠.”

다들 어렵던 시절, 설탕을 주거나 말거나 양장점이나 제화점과 같이 사진관은 큰맘 먹고 찾아야 하는 곳이었으리라. 그 무렵 최광남 씨가 기억하는 최고의 호황은 1968년이었다. 1968년 정부는 모든 성인남녀에게 주민등록증이란 것을 만들게 했고 거기에는 하나같이 증명사진을 붙여야 했으니 국가적 차원의 기념촬영이 이뤄졌던 것이다. 또한 1964년부터 1973년까지의 베트남 파병도 사진관 매출을 올리는 데 한몫했다. 처음에는 파병군인 손을 통해, 이후에는 밀수업자들을 통해 손목시계와 사진기가 대량으로 국내에 들어왔고 그만큼 사진을 인화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사건이 시대적인 특수였다면 연례적인 호황도 있었다.

“3월 입학 시즌이 제일 바빴지. 중고등학교 학생증 때문에 2~300명이 증명사진을 찍으러 한꺼번에 몰려오고 그랬으니까. 그때는 온 식구들이 잠도 못자고 사진관 일에 달라붙어야 했어요. 한 사람당 여섯 장씩 뽑아줬거든. 그때는 일일이 손으로 노광(필름에 적당한 빛을 줘서 밝기를 조정하는 일, 노출이라고도 한다)을 줘서 밝기를 동일하게 해야 하는데 어떤 사진에 조금만 오래 주면 그것만 색이 달라져버려. 그럼 그거 한 장만 오려내고 다시 필름을 현상해야 돼요. (옆에서 함께 사진관을 운영했던 부인 임경희 씨는 ‘다시’라는 말이 제일 징그럽다며 추임새를 놓는다.) 나중에 많이 하면 달인이 되어서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기계적으로 됐지. 그런데 또 학생들이 대부분 까까머리에 옷도 똑같은 검은 색 교복을 입었잖아. 다 인화하고 나오면 요만한(손바닥 절반 크기의) 봉투에 풀칠을 해서 사진 한 장을 붙여가지고 커다란 베니어판에 봉투들을 쫙 붙여놔요. 어떻게 일일이 다 꺼내보고 확인하고 찾아줄 수가 없으니까. 그럼 자기 얼굴 찾아서 떼어 가는 거지. 그런데 자기 것만 떼어 가면 문제가 없는데 꼭 친구 것도 같이 가져가서 안 전해주는 경우가 생겨요. 그럼 그 친구는 왜 자기 사진은 없느냐 그러고. 그럼 그것도 다 필름을 다시 확인해서, 어떨 때는 필름의 명찰까지 확대해서 그걸 보고 찾아서 다시 뽑아주고 그랬죠.”

그리 오래지 않은, 불과 2~30년 전 일이지만 지금은 찾을 라야 찾아볼 수 없는 풍경이 되었다. 암실…… 고등학교 시절 내가 다니던 학교 사진반 서클룸의 암실은 몰래 담배피기 딱 맞춤인 공간이었다. 한쪽은 검고 한쪽은 붉은 커튼을 걷고 들어서면 풍겨 나오던 알싸한 화학약품 냄새.

“그 당시에는 다 손으로 했어요. 암실에 들어가서 야광이라고, 붉은 다마(전구)에 필름을 비춰서…… 온도계도 없었지만 오래 하다 보면 새끼손가락 끝이 온도계야. 인화지에 노출을 준 다음 욕조에 약품을 타고 인화지를 담가서 희석을 시켜요. 처음에는 현상액, 그 다음에는 정지액, 정착액…… 약품들이 희석이 잘 안 되면 (사진에) 줄이 생기거든. 그럼 또 다시 해야지. 그리고는 흐르는 물에 12시간 정도 담가둬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사진이 좀 오래되면 노랗게 돼. 사진 잘 보는 사람은 인화한 걸 보고 딱 그러지. 금방 변하겠네요. 그때는 그걸 다 손으로 하니까 손톱이 맨날 노래졌지. 또 건조를 해야 하는데 작은 탁자 크기의 건조기가 있어요. 스텐리스 판에 열장씩 얹어놓고 롤러 같은 걸로 물을 쫙 뺀 다음 약간 있으면 김이 모락모락 내는데 조금만 오래 두면 또 사진이 거기에 눌러 붙어. 그럼 또 다시 뽑아야 되고. 그게 다 기술이지. 암실에 있는 시간이 하도 많아서 해를 거의 못 보고 살았어요.”

따라가기 벅찬 디지털 세상

한참 이야기를 하는데 어느 할머니가 사진관 문을 열자마자 대뜸 여긴 처음 올 적에는 총각 사장이더니 지금은 백발이 다 되었다며 농을 던지고는 딸네 사진 한 장 찍어주고 싶다며 가격을 묻고 가신다. 아버지 일을 도와 사진관을 하던 최광남 씨가 군대를 제대하고 결혼을 한 뒤 신혼집을 겸한 사진관을 차려 독립한 것은 1980년. 그때만 해도 동암역 남부광장은 그야말로 허허벌판에 양계단지만 들어서 있어 장사가 잘 되지 않았다. 생활고에 직면한 최광남 씨는 낮에는 사진관을 부인에게 맡기고 인천항에 있는 선원조합에 취직을 했고 80년대 후반 경기가 좋아지고 형편이 좀 나아지자 직장을 그만두고 다시 사진관에 전념했다.

“88년 올림픽 앞두고 큰맘 먹고 그동안 모아둔 돈에 대출까지 해서 칼라사진 인화기를 샀어요. 5000만원이 넘었는데 당시 빌라 한 채 값이었죠. 그때 사람들이 참 사진을 많이 찍은 거 같아요. 사진기를 빌려주기도 했죠. 입학식이나 졸업식, 소풍이나 바캉스 같을 때. 제일 잘 나가던 게 올림푸스 팬이라고 24장짜리 필름 넣으면 48장 나오는 사진기인데 사람들은 같은 필름을 사도 여러 장 찍을 수 있으니까 좋고, 우리는 인화 많이 하니까 좋고. 그 기계(칼라사진 인화기)를 10년도 넘게 썼어요. 애지중지하며 썼죠. 그런데 어느 날부터 디카(디지털카메라)로 바뀌면서 쓸 일이 없어지니까, 기계가 돌아가야 고장도 안 나는 법이잖아요. 그 안에 약이 들어가는데 헌 약이 빠지고 새 약이 다시 들어가고 그래야 되는데 약도 그대로 두니까 상하고. 그러면 쓰지도 않은 약 몇 개월에 한 번 갈아줘야 하고. 이래저래 적자만 계속 쌓여가니까 몇 해 전에 처분을 했죠. 여기 사진관 문으로 나갈 수도 없는 큰 기계여서 내가 다 분해해서 고철상 불러서 가져가라고 했어요. 13만원 고철 값 내주고 가져가는데 마음이 짠하더라고.”

디지털인화서비스란 것이 처음 등장한 게 2000년, 그 시기 대부분의 언론사 사진기자들도 일명 DSLR이라고 하는 디지털카메라로 바꾸던 시기였다. 한 언론에 따르면 디지털인화 시장은 2002년 12억 원 대였던 것이 2년 뒤 600억 원 대로 가파르게 성장했다고 한다. 너나없이 사진기를 갖고 다니고 핸드폰에도 사진기가 장착되던 무렵, 사진기가 많아지니 더 많이 사진을 뽑을 것이란 예상과는 달리 동네 사진관들은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시대가 너무 빨리 바뀌어. 디카가 들어오니까 나도 2000년인가 카메라 바디만 천 몇 백만 원짜리를 샀지. 그때는 1기가 메모리만도 60만원에 베터리 가격도 만만치 않아. 그때는 베터리가 TV리모컨만 했어요. 그런데 지금 1기가에 얼마나 해? 4기가에 만원도 안 하잖아. 디카는 너무 빨리 바뀌고 다 수입에 의존하니까 부품도 금방 단종이 되어서 고장 나면 수리할 때도 없어. 그러니까 장비 구입하고 따라가기 바쁘지. 증명사진 전용 프린터기도 코닥 제품으로 600만 원짜리 샀는데 좀 있으니까 코닥이 생산을 안 한다는 거야. 사진관들 문 닫는 게 다 그런 이유야. 디카 나오기 몇 해 전에는 폴라로이드 사진기, 증명사진 찍는 전용 폴라로이드가 있었어요. 25분, 17분, 5분, 3분…… 빨리 뽑아주는 게 경쟁이 될 때였으니까 그걸로 증명사진을 찍었는데 그럴 98만원 주고 샀었는데 그것도 몇 해 지나서 무용지물이 됐지. 또 폴라로이드는 필름 값이 비싸잖아. 딱 찍고 1분 있으면 나오는데 보면 눈을 감았어. 그럼 다시 찍어줘. 또 눈을 감았어. 눈감은 사진 필름은 반품도 안 되는데, 속이 타지. 손님은 왜 자꾸 눈 감을 때 찍느냐고 그러고. 네 번까지 찍은 적도 있어. 그럼 뽑을 때 얼마나 조마조마 한지……. 그 필름이 여기 어디 있는데…… 마지막 쓴 게 2004년 9월이네. 디카가 들어오니까 그거야 좋지. 눈을 감든 말든.”

무언가를 오래 들여다본다는 것

낼 모레 환갑을 바라보는 백발이 성성한 이가 이메일이니 포토샵이니 하는 낯선 용어들과 마주치며 컴퓨터 모니터와 씨름했을 모습이 눈에 선하다. 부인 임경희 씨는 몇 해 전부터는 “머리 흰 소년(남편을 칭하는 애칭인 듯하다)이 젊은이들 결혼식에 사진 찍고 그러는 게 보기 좋지 않다”며 출장사진도 나가지 말라고 말렸다고 한다. 사실 디지털화와는 별도로 행사사진촬영이 전문화, 기업화되면서 출장사진 주문도 거의 없어졌다.

“예전에는 집에서 돌잔치를 많이 했잖아. 그럼 나는 한 짐 싣고 다녔지. 오토바이에 병풍, 돌상에 올라갈 것들, 삼각대에 조명에, 나중에는 비디오카메라까지 메고. 그런데 가보면 집들이 다 좁아. 지금처럼 좋은 렌즈도 없으니까 방안에서는 돌상이 다 안 나오거든. 그러면 창문 열어놓고 창틀에 매달려서도 찍고 그랬어. 그런데 뷔페 문화가 들어오면서 싹없어졌지. 지금이야 다 그런데서 돌 사진, 결혼사진 그런 거 찍잖아. 또 아이사진 전문 스튜디오가 생겨나고. 애들도 잘 안 낳지만 낳아도 이런 데서는 잘 찍으려고 안 하지. 또 영정사진 작업도 많이 했지. 사진이 서비스업이라고 나는 돌아가신 분들한테도 서비스 잘 했어. (웃음) 구겨지고 접히고 그런 사진 들고 와도 정성들여 복원해주고. 아마 저승에서도 다들 고마워하실 거야. 잘 모르겠는 거는 사진을 뽑아놨는데 안 찾아가는 사람이 그렇게 많은 거야. 그것만 다 찾아가도 내 형편이 많이 나아질 거야. (웃음) 신혼여행 사진도 어떻게 됐는지 안 찾아가. 신혼여행가서 갈라섰나? 전화해도 번호가 바뀌었어. 저기 밖에 걸어놓은 사진도 혹시 지나가는 사람 중에 아는 사람이 보고 연락을 해줄까 싶어서 걸어놓은 결혼식 사진이야. 심지어 어머니 팔순잔치 사진을 찍었는데, 그런 사진은 찾으려면 목돈이 들어가니까 형제들 중에서 몇 십만 원 가지고 찾는 사람이 없는 거야. 그래서 재고가 이렇게 많아.”

창고에서 그가 들고 나온 사진을 보니 테이블 한 가득이다. 어려운 살림살이가 많은 동네일수록 버려지는 앨범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사진을 찍는 일보다 사진을 정리하고 보관하는 일에 더 많은 여유가 필요하고 더 많은 정성이 들어가기 마련이다. 버려진 사진은 버려진 사연이기도 할 텐데 실시간으로 찍고 버리기가 반복되는 지금 우리는 더 가난해진 걸까, 풍요로워진 걸까?

“필름은 정말 고심해서 찍잖아. 그래서 한 장을 찍더라도 그 사람을 자세히 들여다보게 돼. 마지막 필름 한 장, 마지막 한 방을 찍을 때 얼마나 생각이 많겠어요. 렌즈를 통해서 보고 또 다시 한 번 쳐다보고.”

사람들은 그렇게 오래 들여다보고 싶어서, 오래 쳐다보고 싶은 것들을 찍어온 모양이다. 그런데 점점 무언가를 오래 들여다보는 일이 쉽지 않다. 사진관을 나서기 전 그는 기억에 남는 한 장의 사진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가족 중에 누가 아프면 가족사진을 찍으려는 와요. 아버님이 편찮으신데 가족사진을 찍고 싶다고 그래서 모시고 오시라고 했더니 거동을 못하신데. 집에 가서 세팅을 하고 찍으려는데, 가족사진은 화목하게 나와야 하는데 다들 우울해. 얼굴 표정에 다 나타난다고. ‘미소 지으세요.’ ‘좀 웃으세요.’ 그래도 분위기가 침침해. 어떻게 하겠어. 그냥 찍어줬어. 그리고 배경도 다 합성해서 지저분한 거 없애주고 사진관에서 찍은 것처럼 만들어줬는데 그 다음날인가 그분이 그만 돌아가셨어. 그래서 그걸 집에 걸어놓기가 그렇다고 그냥 뽑지 말고 두라고 그러는데 세월이 지나서 마음 바뀌면 찾아가시라고 하고 뽑아서 보관해놓고 있었지. 그랬는데 2년인가 지나서 어머니가 찾아가시더라고. 안 버리기를 잘 했어요, 하시면서.”


- <삶이보이는 창> 5-6월호에 보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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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0-04-29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날로그 시대의 추억이 묻어나는 좋은 글이네요^^

나무처럼 2010-04-29 11:19   좋아요 0 | URL
감사.. 그런데 갈수록 아날로그가 그리워지니... 나이 먹는게... 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