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진 민주주의에 대한 내용을 기대했는데 정작 자유주의, 공동체주의 등에 대한 이해에 도움이 된 것 같다. 10년 전에 쓴 글을 묶은 것인데 물론 지금에도 시사점이 많다. 센델의 공동체주의와 그 한계를 이해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되었고. <정치제에 대한 권리>를 읽다가 끌려서 이 책으로 왔는데 발리바르의 <반폭력의 정치>나 절판되었다는 랑시에르의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까지 가보고 싶어진다.

 

아래는 밑줄 긋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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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물음에서 '우리'는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문제를 구성한다. 정치적 담론에는 항상 행위 과정에 대한 불일치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특정 형식의 집단적 행위를 통해 창출되어야 할 '우리'라는 정체성을 사실상 핵심 문제로 간주할 수 있다. (85)

 

현대 정치의 특징을 이루는 투쟁 가운데 일부는 일정한 질서를 구축하려 하는 결절점들 주위에 사회적 관계들을 고정하려 하지만, 적대적 힘들의 영속성으로 말미암아 고정에 성공하더라도 그것은 필연적으로 부분적이며 불확실하다. 정의와 관련된 담론들이 그런 투쟁에 속한다. 그것들이 자유와 평등의 원칙에 대한 경쟁적인 해석들을 제안함으로써 상이한 유형의 요구들을 위한 정당성의 근거를 제공하며, 특수한 동일화 형식을 창조하고, 정치적 힘들을 구현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그것들은 어떤 주어진 순간에서 특정 헤게모니의 설립과 '시민권'의 구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성공한 헤게모니는 상대적인 안정화의 시기와 폭넓게 공유된 '상식'의 창조를 의미하지만 (...) 공정으로서의 정의는 정의의 문제에 대한 궁극적이고 합리적인 해결책을 제공하기는커녕, 평등과 자유라는 정치적 원칙들을 둘러싼 가능한 해석 가운데 한 해석에 불과하다. (90)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치철학은 토대들을 탐색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사회적 관계들에 대한 은유적인 재기술을 제공하는 언어의 정교화여야 한다. 그것은 자유와 평등이라는 민주주의 이상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을 우리에게 제공함으로써,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형이상항적인 토대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 모체 내에 새로운 주체 위치들을 창출하여 민주주의적 관행의 범위를 심화, 확장하는 식으로 민주주의를 옹호할 수 있게끔 우리를 도와줄 수 있을 것이다. (97)

 

시민권을 법적 지위로 보는 것이 아니라, 정체성 형성의 한 형식으로, 정치적 정체성의 한 유형으로 간주한다는 것을 함축한다. 즉 시민권을 경험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구축되어야 할 무언가로 본다는 뜻이다. (108)

 

정치학이 어떤 정치적 공동체의 구축, 어떤 통일성의 창출을 겨냥하더라도, 그 존재를 가능하게 해 주는 어떤 '구성적 외부', 즉 공동체의 바깥은 영원히 존재할 것이기에 완전히 포괄적인 정치 공동체, 다시 말해 어떤 최종적인 통일성은 결코 현실화 될 수 없다. (114)

 

나는 근대적 개인의 범주가 모든 특수성과 차이를 '사적인' 것으로 추방하는 어떤 보편적이고 동질적인 '공중'을 가정하는 방식으로 구축되어 왔으며, 이것이 여성들에게 매우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온다는 페이트먼의 의견에 동의한다. (132)

 

자유주의는 모든 개인이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로 태어났다는 주장에 기반을 두고 보편적 시민권 통념을 형성하는 데 이바지했지만, 개인이 국가에 반해 보유하는 권리들을 가리키는 단순한 법적 지위로 시민권을 축소했다. 권리의 보유자들이 법을 위반하거나 타인의 권리와 충돌하지 않는 한 그 권리들이 행사되는 방식은 문제가 안 된다. (...) 게다가 근대 시민권의 공적 분야는 분리와 적대를 인정하지 않고 모든 특수성과 차이를 사적인 것으로 추방하는 보편주의적이고 합리주의적인 방식으로 구축되었다. 따라서 개인적 자유의 주장에 핵심인 공과 사의 구별은 강력한 배제 원칙으로 작용했다. 실제로 공과 사의 구별은 사적인 것과 가사를 동일시함으로써 여성의 종속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35)

 

급진 민주주의적 해석은 다른 '신사회운동'은 물론 여성, 노동자, 흑인, 동성애자, 생태주의자 등 각종 참여 세력에서 발견되는 민주주의적 요구를 접합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 그 목표는 급진적 민주주의의 시민들로서 하나의 '우리'를 구성하고, 민주적 등가성의 원칙을 통해 접합된 하나의 집합적인 정치적 정체성을 구성하는 것이다. 이때 그 등가 관계가 차이를 제거하지 않는다는 점이 강조되어야 한다. 차이가 제거되면 단순한 정체성이 될 것이다. 민주적 차이들이 모든 차이를 부정하는 세력이나 담론들과 대립하는 한에서만, 그 차이들은 서로 대체될 수 있다. (137)

 

완전히 포괄적인 정치 공동체는 결코 실현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구성적 외부' 즉 공동체의 실존 조건 자체인 그 공동체의 바깥은 항상 존재한다. '그들'이 없이는 '우리'가 존재할 수 없으며, 합의의 모든 형식은 필연적으로 배제 행위에 근거하고 있음이 받아들여지고 나면, 적대와 분할과 갈등이 사라지게 될 완전히 포괄적인 공동체으 창출은 더는 쟁점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민주주의의 완전한 실현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우리는 감수해야 한다. (138)

 

나에게 여성주의는 여성의 평등을 위한 투쟁이다. 하지만 이는 공동의, 다시 말해 여성적 본질과 정체성을 지녔다고 규정될 수 있는 경험적 집단의 평등을 실현하려는 투쟁으로서가 아니라, '여성'의 범주를 종속적인 것으로 구축하는 다양한 형식에 대항하는 투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142)

 

현대 민주주의에서 우리가 목표로 삼아야 할 것은 그것의 정치적 원칙들에 대한 특정한 해석, 곧 시민권을 이해하는 특정한 방식에 대한 공통의 동일시를 통해 하나의 통일성을 정치적으로 창출하는 것이다. 여기서 정치철학의 중요한 역할은 정치나 평등이나 자유와 같은 통념들에 대한 참된 의미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 통념들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들을 제안하는 것이다. (184)

 

급진적이고 다원직인 민주주의 기획이라면 정치적인 것 내에 있는 갈등과 적대의 차원을 받아들여야 하며 가치들의 환원 불가능한 다원성이라는 결론을 수용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급진화하며 사회적 관계들로 민주주의 혁명을 확장하려는 우리 시도의 출발점이어야 한다. 그 과제는 사회적 관계들에 내재한 폭력과 적의의 요소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공격적인 힘들의 분산과 전환이 가능하고 다원주의적 민주주의 질서가 가능할 조건들을 어떻게 창출할 것인지를 생각하는 것이다. (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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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잘못 산 게 아니었어>
저자 엄기호의 강연도 들어본 적이 있고 글도 여럿 읽었고 회의도 가끔 하는 사이지만 단행본은 처음이다. 강연을 들으며 참 술술 잘 풀면서도 조리가 있다고 느꼈는데 그대로 강연을 옮겨 놓은 듯 쉽게 읽힌다. 쉽게 읽힌다고 그의 문제의식이, 이 책의 주제가 가볍다거나 얇은 것은 결코 아니다. "지금 필요한 건 위로나 분노가 아니라 용기"라는 말은 새로운 세대들의 새로운 연대를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책을 덮으며 너무 후딱 읽어버렀나 싶도록 재밌고, 뜻 맞는 사람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밤새도록 나누고 싶픈 이야기로 가득찬 책. 어떻게 이리도 핵심을 잘 짚었나 감탄사가 튀어나오기도 하고, 때로는 더 나갔으면 하는 아쉬움과 나랑 비슷한 생각이네, 무릎을 치게 만든 책이다. 

<삶이 보이는 창> 
격월간 삶창이 이뻐졌다. 약간 얇아졌는데 활자도 키우고 행간도 늘이고, 그간 답답했던 편집에서 아주 읽기 좋은 편집으로 바뀌었다. 디자인만이 아니라 내용에서도 아기자기한 변화가 엿보인다. 매번 받아보지만 이번처럼 꼼꼼이 읽지 못했다. 역시 이 또한 디자인의 힘이리라.

 


 

 

 

 

 

 

 

 

 

 

 

 

 

발리바르가 쓴 책 중에서 그나마 쉽다는 책인데... 사실 얼마나 이해했는지 모르겠다. 아래는 밑줄긋기...

 

나는 결코 국가 권위에 대한 불복종 및 그 내용이나 입안 조건들에서 논란의 소지가 있는 법률들을 집행하는 것에 대한 거부가 시민성의 본질을 구성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국가의 사멸"을 요구하는 무정부주의가 공동체를 정초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권력에 맞선 시민들"이 함축하는 개인주의는 정치를 형성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는 불복종에 대한 이런 필수적인 준거가 없이는, 그리고 심지어 이처럼 불복종에 의지함으로써 생겨나는 위험을 주기적으로 감수하지 않고서는 시민성과 공동체가 존재할 수 없다고 믿는다. - 16

 

지금 세기말에 우리가 직면한 문제는 바로 상상의 힘을 해방시키면서도 유토피아와 결별하는 일이다. (...) 집단주의적인 것이든 개인주의적인 것이든 간에 유토피아는 현실주의와 비현실성이라는 양자택일 속에 상상력을 가두는 반면, 현실주의는 근원적으로 비현실적인 것이며, 통용되는 의미와는 다른 의미에서 비현실적인 것, 더 나아가 "불가능한 것"은, 그것이 없이는 인간 역사 속의 어떤 현실도 유지될 수 없는 것이다. 더욱이 오늘날 "지구화" 내지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지칭되는 과정과 함께 고전적인 유토피아의 토대들 자체가 근원적으로 파괴되었다는 점을 확인해 두지 않을 수 없다. 역으로 제도들의 변화라는 질문 및 제도가 불가피하게 포함하는 허구의 몫(집합적 이해관계를 표현하고 대표하기 위한 단어들과 권리들, 새로운 기법들의 발명,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을 접합하는 가치들의 변화)이라는 질문은 피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여기에는 진정한 철학적 딜레마가 존재한다. - 19

 

미등록 체류자들, "배제된 이들" 중에서도 "배제된 이들"은 단순히 희생자들로 나타나는 것을 그치고 이제 민주주의 정치의 실행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저항과 상상을 통해 우리가 민주주의에 다시 활력을 불어넣는 것에 큰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깨닫게 해준 데 대해, 그리고 이를 말하게 해준 데 대해 그들에게 빚지고 있으며, 법/권리와 정의가 그들에게 회복될 때까지 계속해서 우리 쪽의 좀 더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편에 참여하게 해준 데 대해 그들에게 빚지고 있습니다. - 35

 

반대로 나는 정치 및 민주주의를 살해하고 또한 동시에 사람들까지 살해하는 극단적 폭력의 확산은 또한 그 본질적인 일부에서는 국경의 강제 및 불가능한 봉쇄를 수단으로 한 국가에 의한 인구 정착과 격리의 결과이기도 하다고 주장하면서 반폭력의 정치(내가 시민다움의 정치라고 부르는)를 옹호하고자 한다. 국경에 대한 치안적 관점, 곧 국경을 "방역선"으로 간주하는 관점 대신 국경에 대한 정치적 관점 및 실천이 필요하다. 국경을 정치의 장으로 전위시켜서, 더 이상 국경이 모든 반항과 통제, 상호성의 권역 바깥에, 가장자리에 놓이지 않고 중심에 놓이도록 해야 하며, 마찬가지로 개인들과 집단들이 오늘날 때로는 국경 이쪽에서, 때로는 저쪽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그리고 말하자면 그들이 경계선 양쪽에 걸쳐 앉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 109

 

"국민 우선"은 곧바로 다른 일련의 "우선들"과 쌍을 이루게 되는데 이 후자의 "우선들"은 국민 우선과 함체되며, 이 국민 또는 국민성을 일종의 이상화된 몸체로 존재하게 만들게 될 수밖에 없다. 나는 무엇보다 "가족 우선"을 염두에 두고 있다. 이는 가족과 결혼, 성에 대한 국민주의적 통제를 뜻하며 그와 동시에 그것과 분리 불가능한, 가족적 정상성 및 따라서 성적 정상성에 대한 선호를 뜻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곧바로 다른 측면, 곧 일탈로 낙인찍힐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하여 공격적인 입장으로 이행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우선/선호가 증오의 조직, 유지 및 이상화 현상을 수반하기 때문에, 이런 우선/선호가 또한 일탈적인 것으로 나타나는 모든 것에 대한 폭력적인 반응으로 표현된다고 해서 놀랄 것은 전혀 없다. - 129

 

여기에서 우리는 다시 파시즘에 근접해 가고 있다. 자신들이 무기력하다고 느끼면서도 동시에 국가의 무기력을 두려워하는 시민들은 국가에 대해 그들이 항상 "좋은 쪽"에 있고, 희생자, 전형적인 불쌍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아니라 다른 이들이라는 점이 확실히 보장될 수 있도록 가시적인 안전 중심적 조치들을 취하고 아파르트헤이트와 같은 것을 제도화할 것을 요구한다. 그들은 암묵적으로 다음과 같은 종류의 질문을 제기한다. 국가는 누구를 우선시하는가? 곧 국가는 누구 편인가? 그리고 국가의 결정들은 누가 내리고, 누가 국가로부터 정확히 우선이라는 답변을 얻을 수 있는가? 누가 선택된 이들이고 누가 버려진 이들인가? - 147

 

정체성은 자기 자신을 소통에 참여하고 있는, 어떤 공동체의 성원으로서 인지하기 위한 수단으로서만 존재할 수 있다. 모든 정체성은 하나의 연결로서, 서로 교환되는 것이며 (...) 모든 정체성은 하나의 시선이다. 곧 정체성은 타인들을 보는 한 가지 방식, 특히 어떤이의 눈을 통해 자기 자신을 보는 한 가지 방식이다. - 149

 

정치에서 "대표"되어야 하는 것은 어떤 조건이나 집단이 아니라 문제다. 이런 의미에서 배제된 이들은 정확히 그들이 "표상/대표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탁월하게 대표적이다. 이런 의미에서의 대표는 미리 존재하는 대표의 틀 속에서 자리를 얻는 것이 아니라 그런 대표의 틀을 창출해내는 것이며, 이를 위해서는 기존의 틀을 변형하거나 전복해야 한다. - 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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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을 덮으면 뭔 이야기를 읽었는지 당췌 모르겠고

 

중고 서점에 가면 이게 집에 있는 책인지 아닌지 모르겠고

 

서평을 읽으면 전에 읽은 책인지 헷갈린다... 하여

 

읽은 책 리스트라도...

 

 

 

 


 

 

 

 

 

 

 

 

 

 

 

 

 

 

 

 

 

 

 

 

 

 

 

 

 

 

김훈의 <흑산>은 읽는 내내 불편했다. 책장이 넘어가지 않았다. 그의 사유가 자꾸 현실에서 떠오르는 듯한... 앞으로 다시 김훈의 작품을 집어들게 될지 모르겠다.

 

<한낮의 어둠>은 설 연휴를 틈타 읽었는데, 초반에는 무척 지루했으나 후반에는 몰입된다. 조지오웰의 전체주의 비판과는 또 다른... 왜 모든(지금까지의 역사 상 있어 왔던 모든) 혁명은 실패하였는가, 실패할 수밖에 없었는가. 그 까닭을 인간 내면을 직시하고 있다. 좌파, 혁명운동에 대한 깊은 이해가 바탕이 되었다는 생각...

 

언제나 많은 깨달음과 각성을 주는 <녹색평론>... 역시 '왜 지금 녹색당인가'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반면 <왜 분노하지 않는가- 2048, 공존을 위한 21세기 인권운동>은 많이 아쉽다. 세계인권선언이 만들어진 지 100년이 되는 해, 새로운 인권선언을 만들자, 새로운 인권운동을 구성하자는 이야기 같은데 서구 자유주의 관점이 지나치고, 그냥 인권 입문서 정도로 논점을 나열하는 수준에서 그친 것이 아닌지... 전 세계적으로 자행되는 학살과 파괴, 기아와 빈곤, 차별과 그에 대한 저항, 인간존업성에 대한 도전에 직면하여 약간 한가한 소리 같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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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시절 선배가 귀뜸해준 비법이다. 일단 친구들을 왕창 데리고 가서 왕창 술과 안주를 시켜 먹는다. 여기서 왕창이 중요하다. 주인장이 눈여겨 볼만큼 왕창 먹어야 한다. 그리고 며칠 뒤 그 집에서 조촐하게 술 한잔을 하고 외상(정확하게는 '가리'라고 했다)을 한 다음 약속한 날 칼 같이 외상값을 갑는다. 외상값을 갑는 날 술 한잔을 더 하면 금상첨화. 


출근길에 정태춘의 '92년 장마, 종로에서'를 듣다가 문득 이게 20년 전 노래구나, 그러다가 단골집들이 떠올랐다. 그야말로 자유연상...


첫 단골집은 신사역 근처에 '축제'라는 호프집. 당시 고삐리였던 우리들에게 신분증 검사를 하지 않았던 곳이라는 이유로 버스 몇 정거장을 가서 마셔댔다. 기억이 확실치는 않지만 그때 1000cc에 천원, 500cc에 5백5십원 했던 것 같다. 500원짜리 동전도 없던 시절, 우리는 백원짜리, 오십원짜리, 십원짜리를 테이블에 올려놓고 수놓으며 마셨다. 남자는 1000이라며. 지금이야 보기도 힘들지만 그때는 1000이 대세였다. 


고3 무렵에는 한강을 건너 대학로로 진출했다. '취바리'라는 막걸리집. 대부분의 손님들은 대학생들이었다. 그때만 해도 대학로는 대학로였으니까. 흔한 민속주점들 중 하나였지만 세 번에 한 번 꼴로 동틀 무렵까지 부어라 마셔라 했다. 밤 12시인가 공식적으로는 문을 닫아야 했기에 2차 3차도 없이 주구장창 쭉...

 

대학에 두 번 낙방을 하고 남산 위에 하얀 집이라 불리던 학원을 다닐 때는 숙대입구역 뒷편 '안성집'이 단골이다. 2500원 하던 김치찌게나 부대찌가가 주 안주. 절묘한 것은 다음 해 대학에 들어가서는 학교가 안성이었는데 단골집 이름은 '서울집'이었다. 안주는 '안성집'과 크게 다를 바 없었고.

 

그 뒤로는 이렇다할 단골집이 생기지 않는 것 같다. 돌이켜보면 대학을 졸업하고 계속 부유하는 삶이지 않았나. 서울 도심에서는 당췌 단골집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나마 작년에 이사간 동네, 집 앞 실내 포장마차가 있는데 얼마 전에 외상을 했다. 닭똥집을 포장했는데 카드 결제가 안 된다는 거였다. 현찰이 없었기에 다음에 들리겠다고. 당연히 외상값을 갑은 날 똥집 하나를 또 포장했다. 이제 뿌리가 좀 내려지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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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간지옥이란 게 있다고 한다. 내가 사는 지금 여기가 바로 무간지옥이 아닐까.

<먼저 엄마의 목을 졸랐다. 잠에서 깬 엄마는 “XX야, 이러면 너 정상적으로 못 살아”라고 했다. 울음이 터져 나왔다. 엄마는 이런 상황에서도 ‘정상적’인 삶을 얘기하고 있었다. “엄마는 몰라, 엄마는 내일이면 나를 죽일 거야.” 흉기로 엄마를 두 번 찔렀다. 엄마는 곧 숨이 끊어졌다.>

 - 미디어스에서 http://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1369

 




‘고3학생 모친 살해사건’에 담긴 나와 당신의 합리적 폭력[이재훈의 관조와 몰입 사이]
이재훈/한겨레 기자  |  http://nomad-crime.tistory.com

 

소년은 알고 있었다. “엄마에게 나는 모든 것”이었다. 아빠는 언제나 집에 없었다. 아빠는 소년이 태어날 때부터 자주 집 밖을 겉돌았고, 5년 전부터는 아예 따로 살았다. 그럴수록 엄마는 소년에게 집착했다. 소년이 7살 때 엄마는 이미 소년을 ‘교육’하기 위해 매를 들었다. 오랜만에 집을 찾은 아빠가 여름에도 긴 바지를 입고 있는 소년의 모습을 의아해하면서 씻겨주려 옷을 벗겼을 때, 소년의 종아리와 엉덩이에는 피멍이 맺혀 있었다. 소년은 “괜찮아, 아빠”라고, 담담하고도 짧게 말했다. 엄마는 “아이를 왜 때리느냐”고 묻는 아빠에게 “애는 매로 다스려야 한다”고 말했다. 엄마가 사용한 폭력의 도구는 다양했다. 홍두깨로도 때리고, 야구 방망이로도 때리고, 골프채로도 때렸다. 그래도 소년은 자신이 엄마에게 “모든 것”임을 알았기에, 차분하게 엄마의 지시를 따랐다. 아니, 소년에게 엄마를 빼면 관심을 두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믿고 의지할 유일한 사람은 엄마였다. 엄마의 방법이 틀렸다고 생각하게 해줄 다른 의지와 관계의 대상이 없었다. 엄마의 폭력은 19년 동안 소년에게 ‘애정’이고, ‘교육’이었다. 소년은 엄마의 기대를 충족하려 애썼다. 초등학교 3학년 때는 한자리에서 16시간 동안 공부를 하기도 했다. 밥도 책상에서 먹으며 한 공부였다. 경시대회에서 상을 탔고, 초등학교 6학년 때는 토익이 900점을 넘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까지 소년은 줄곧 ‘우등생’이었다.

하지만 성적이 잘 나올수록 엄마의 강박도 함께 커졌다. 반에서 2~3등을 해도 엄마는 만족하지 못했다. 엄마는 “전국 1등을 해야 한다. 서울대 법대를 가야 한다”고 말했다. “너는 의욕이 약하다”며 밥을 굶기고, 밤새 때리기도 했다. 엄마에게 소년은 결핍된 욕망을 대리해서 소구해줄 도구였다. 엄마의 어머니는 중학교 3학년 때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엄마의 아버지는 아들만 편애했다. 엄마의 아버지에게 엄마는 존재하지 않는 존재였다. 엄마는 늘 삶의 객체로 존재했다. 하지만 삶은 남에게 인정받기 위한 욕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런 인정욕구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기도 한다. 사랑은 나의 욕망을 욕망이 아닌 것으로 인정해주는 유일한 행위다. 하지만 엄마는 자신의 욕망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연스럽게 위무해줄, 그런 존재가 없었다. 엄마의 남편인 아빠마저 엄마를 인정욕구의 대상으로 도구화했다. 아빠는 ‘인 서울’ 대학 일어과를 나온 엄마와 결혼하며 ‘이 정도 여자면 어디 내어놔도 괜찮겠지’라고 생각했다. 엄마는 신혼 초부터 그런 아빠의 반응에 극렬하게 대응했다. 면도칼을 들고 “당신이 나를 안 믿으니까 동맥을 끊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엄마는 스스로를 늘 ‘소중한 존재’라고 일컬었다. 가부장제에 의해, 단 한 번도 ‘소중한 존재’이지 못했던 엄마는, 스스로 그렇게 믿는 방법 외엔 자신을 인정받을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나는 소중한 존재이니까 찬물에 손을 담그면 안 된다. 당신이 밥을 차리고, 빨래를 해라”라고 말했다. 그리고 고급 차를 원했다. 고급 차가 가진 브랜드는, 자신의 가치를 표상해주는 도구였다. 보통 차를 사면 “남들이 무시한다”고 버텼다. 아빠는 그런 엄마가 부담스러워 자꾸 집 밖을 겉돌았다.


   
▲ 한겨레신문 11월25일자


채워지지 않은 욕망, 그로 인한 결핍이 짙어질수록 엄마는 자식 교육에 집착했다. 채워지지 않은 욕망은, 그 자체로 사라지지 않고 형질을 변환한다. 여기서 내 자식은 곧 나의 위상과 지위를 인정해주는 타인이자 곧 나이고, 내 욕망을 현시해줄 수 있는 도구적 존재가 된다. 가부장제 아래 욕망을 억압당해왔던 엄마는, 내 자식만큼은 억압당하는 개인이 되지 않길 욕망했다. 엄마에게 소년은 ‘패자부활전’을 위한 도구였다. 내 자식이 교육을 통해 신분상승을 하면, 제도에 의해 기만당하지 않는, 되레 다른 사람들을 기만할 수 있는 권력을 지닌 억압자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억압자는 타인에게 욕망을 인정해달라고 갈구할 필요가 없는 절대자다. ‘법대’는 그런 권력을 지니기에 가장 적합한 도구다. 엄마가 자신은 욕망할 수 없었던 성공에의 욕망을 자식에게 모조리 투사한 까닭이다. 그리고 엄마는 ‘다 내가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라며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했다.

지난 3월18일과 19일, 소년은 이틀째 잠을 자지 못했다. 잠만 자지 못한 게 아니었다. 밤새 엄마에게 폭행을 당했다. 엄마는 엎드려 뻗쳐를 하고 있는 소년을 야구 방망이와 골프채로 마구 때렸다. 전국 모의고사 성적표를 62등, 67등으로 위조해서 줘도 엄마는 만족하지 못하고 ‘전국 1등’과 ‘서울 법대’를 강요했다. “너는 의지가 약하다”고 말하며 또 밥을 굶겼다. 토요일인 20일 아침, 소년은 내내 공포에 떨어야 했다. 22일은 학부모들이 학교를 방문하는 날이다. ‘엄마만 없었으면...’이란 생각이 들었다. 오전 11시께, 소년은 흉기를 들고 엄마가 자고 있는 안방으로 들어갔다. 먼저 엄마의 목을 졸랐다. 잠에서 깬 엄마는 “XX야, 이러면 너 정상적으로 못 살아”라고 했다. 울음이 터져 나왔다. 엄마는 이런 상황에서도 ‘정상적’인 삶을 얘기하고 있었다. “엄마는 몰라, 엄마는 내일이면 나를 죽일 거야.” 흉기로 엄마를 두 번 찔렀다. 엄마는 곧 숨이 끊어졌다. 소년은 결국 ‘엄마가 나를 죽일 것 같은’ 상황에 이르러서야, 엄마를 끊어냈다. 삐뚤어진 집착이라도, 엄마는 소년을 유일하게 인정해주는 타인이었기에 이제까지는 지시에 따라야하는 존재였다. 하지만 엄마의 과도한 폭력은, 소년을 유일하게 인정해줄 대상 따위가 아니라, 삶의 근간인 목숨 자체를 위협하는 대상으로 엄마의 존재감을 변질시켰다. 그래서 관계를 끊어냈다.

어릴 때부터 이어진 엄마의 폭력은, 소년에게 폭력을 일상화했다. 소년은 칼을 수십 자루 가졌고, 서바이벌 총으로 비비탄을 쏘길 좋아했다. 소년의 방문은 칼자국과 비비탄 총 자국으로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칼과 총은, 관계 맺기에 미숙한 소년에게 타인을 제압할 수 있다는 상상을 가능하게 해주는 도구다. 관계 맺기에 미숙한 개인일수록, 관계는 맺기의 대상이 아니라 지배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지배를 위해선, 타인을 한순간에 제압할 수 있는 폭력의 도구가 필요하다. 하지만 소년은 폭력의 도구를 실제로 사용한 적이 없었다. 첫 대상이 엄마였다. 그래서 여전히 어떻게 해야 할 줄을 몰랐다. 엄마의 시신을 버리지 못했다. 시신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 지도 몰랐고, 버릴 수도 없었다. 소년의 삶에서 관계를 맺었던 유일한 타인이었던 엄마는 관계를 끊었을지언정 끝내 버리지는 못하는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엄마와 함께 다정하게 찍은 사진도 집안에 그대로 뒀다. 시신이 부패해 안방에서 냄새가 흘러나오자, 공업용 본드로 안방을 봉쇄해뒀을 뿐이었다. 그리고 8개월 동안 매일 꿈에선 3월20일 오전의 그 순간이 반복 재생됐다.

유일한 관계를 잃은 소년은 또 다른 대상을 찾아야 했다. 그즈음 여자친구가 생겼고, 소년은 여자친구에게 엄마와 같은 방식으로 과도하게 집착했다. 여자친구에게 ‘네가 나를 안 만나면, 난 너 앞에서 죽어버릴 것’이라는 문자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그러다 엄마와 이혼 소송을 진행하고 있던, 이제까지 소년에게 부재한 것이나 다름없었던 아빠가 찾아왔다. 소년은 아빠에게 그동안 “엄마가 국외여행을 떠났다”고 거짓말을 해왔다. 하지만 아빠는 11월 초 출입국관리소에서 엄마의 출입국 기록을 조회했다. 엄마의 마지막 출국은 2004년이었다. 집에 찾아온 아빠는 “엄마가 (안방) 안에 있니?”라고 물었다.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경찰이 왔고, 그들이 안방 문을 여는 순간 소년은 갑자기 아빠를 껴안으며 말했다. “아빠, 무슨 일이 있어도 나 안 버릴 거지?” 아빠는 다시 찾아온, 소년이 의지할 유일한 대상이었다.


   
▲ 11월26일자 한겨레신문


인간이 극단적인 행위를 선택하는 데 이르기까지는 수없이 많은 관계와 구조가 그 행위의 기제로 작동한다. 그 개별적인 행위를, ‘일반적이라면 이렇게 선택했을 것’이라는 식의 다수의 합리성으로 재단하기는 쉽지 않다. 개인은 태어날 때부터 선한 존재이거나 악한 존재로 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사회적 관계나 사회적 과정, 그리고 그 관계를 둘러싼 제도와 구조의 결과물로 만들어진다. 소년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기까지에 이르는 과정은, 가부장제라는 문화적 제도로 인해 생긴 엄마의 결핍, 그리고 그 결핍을 채우기 위해 억압자로서의 권력을 가지기 위한 도구로 한국 교육의 1등 지상주의와 성적 중심주의를 동원했던 엄마의 강박이 관계와 구조의 하나로 기능했다. 1등은 남을 억압하기 위해 존재하고, 성적은 남을 배제하기 위해 존재한다. 소년이 다닌 학교의 한 교사의 말처럼, “공부를 못하는 애는 못하는 대로, 잘하면 잘하는 대로 남들보다 더 나은 성적을 받기 위해 온 힘을 쏟아야” 하는 현실이 현재 한국 사회의 교육이다. 이런 현실을 만드는 데 그 누가 자유로웠던가.

결국 소년의 행위는, 한국 사회가 오랫동안 ‘합리적’이고 ‘일상적’인 것이라고 받아들여 온 제도의 모순이 한 가정을 통해 폭발적으로 드러난 비극의 귀결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자신은 여전히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개인들의 선택 지점은 보통 두 가지 정도를 찾아간다. 소년의 행위를 ‘패륜’으로 규정하면서 여전히 가부장제 혹은 가족 제도의 합리성을 인정하는 것, 그리고 소년을 ‘비인간’으로 타자화하면서 한국 사회의 교육 제도 안에 순응하는 나와 내 자녀의 교육적 선택을 구조 안에 속해 있는 인간으로서 어쩔 수 없이 해야하는 행위로 합리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합리성이 유지되는 한, 소년의 행위와 같은 극단은 반복된다. 2000년 5월 부모의 스파르타식 교육과 폭력이 낳은 ‘명문대생 부모 토막 살인사건’이 그랬고, 2009년 10월 한 대학생이 집으로 배달된 학교 성적표를 보고 꾸짖는 아버지를 흉기로 살해하고 4개월 동안 집에 시신을 유기한 사건이 그랬으며, 2010년 10월 13살 중학교 2학년생이 “판검사가 돼라”는 아버지의 잔소리와 꾸중, 폭력을 견디지 못하고 집에 불을 질러 일가족 4명을 모두 숨지게 한 사건이 그랬다. 이 극단은 그런 합리성 위에서 계속 비명을 질러왔고, 앞으로도 지를 것이다. 나와 당신은 여기서 무엇을 할 것인가.

*이 글은, 한겨레 24시팀 취재팀이 ‘고3학생 모친 살해사건’이 공개된 11월 24일과 25일 이틀 동안 힘겹게 취재한 방대한 양의 취재 메모를 토대로 재구성한 결과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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