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한시간 가량 쓴 글이 날아가 버린 적이 있었다~ 훨훨~ 이글도 날아가지 않을까 약간 걱정이 되긴 한다~ 훠이야 훠이야~ 오늘은 팬더와의 설전 때문에 잠이 안올 것 같다. 내게 유학을 가라며 아니가면 주종관계를 끊어 버리겠다는 팬더.. 무언가 애정이 작용하여 그런 무익한 압박을 가했다는 건 알겠다만.. 그아인 내가 자아성찰이라는 제목하에 적었던 페이퍼에 나오는 사람과 유사하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항상 농담으로 건방진 팬더라 했었지만 오늘은 그 정도가 지나쳤다. 나를 규정하려는 행동과 더불어 내 지인들에 대한 품평회가 일어난 것은 상당한 불행을 초래 할 잘못이였다. 상당할 것 까지 없다 하여도 팬더에 대한 애정이 눈의 여왕이 살았던 그곳마냥 차가워 지는 것은 서로에게 있어 불행이다.

 지금 오디오에선 칼리히터가 지휘한 뮌흐너 바흐 오케스트라의 요한 수난곡이 울려 퍼진다. 난 이곡을 처음 듣는다. 모차르트의 레퀴엠을 들었을때를 떠올리게 하는 우울한 선율이다. 이것은 종교음악으로 요한이란 사람의 수난을 다룬거 같은데 구약성서를 잘 모르는 나로서는 무엇때문에 일련의 바리톤과 소프라노들이 서양식 창가를 열창하는지 모르겠다. 다만 최근에 읽은 카잘스의 자서전에서 바흐 음악의 위대함에 대한 격찬이 계속 이루어졌던 바 음악의 아버지의 품에서 그가 직접 낳은 자식들을 내 귀로 감상하고 있는 것이 가장 뜻 깊은 독후감이 아닐까 한다. 이 곡이 씨디 두장으로 이뤄져 있는데 다 듣고 자려면 해가 뜨지 않을까 한다. 비가와서 해가 뜨지 않을 수도 있겠다. 그래도 낮은 밤보다 더 조약한 형체를 띄고 있기에 낮밤의 구별은 가능할듯 하다.

 최근에 다시 무리한 독서로 인하여 보고 싶지 않은 현실까지 보는 눈을 지니게 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보고 싶은 현실만 본다는 줄리어스 시저의 말이 떠오른다. 이런 눈을 가진 사람이 자신의 생각을 강요할 수 있는 권력이 없다면 상당히 불행한 인생을 살 것이다. 예전보다 생각이 많아졌지만 더 첨예한 고민으로 귀결되는 건 아마 그 새로운 각성에 의한 결과일 것이다. 팬더가 나에게 유학을 가라고 강요한 것은 나름 나의 재능을 아껴서 였을 것이다. 하지만 해외에서 나름 선진 문물을 받아오거나 여러 학문을 접한다 한들 소통되지 않은 혼자만의 밀실로 귀결될 바에는 차라리 이 나라의 소시민으로 남으련다. 근자에 내가 가진 영화 디워에 관한 생각을 학교 홈피에 올린적이 있었는데 좀 말도 안되는 댓글이 몇개 있었다. 나는 그 글을 꽤나 공들여 쓰고 미적으로 아름다운 언어를 골라 쓰려고 노력했으며 여러가지 사상을 압축적으로 표현한 글귀도 많았기에-물론 혼자 생각- 추천수가 높을 줄 알았다. 근데 별 거지같은 것들이 글의 논지는 보지 않고 길어서 못읽게다는 둥 아니면.. 애국심이 아니고 좋아서 보는 사람이 훨씬 많다는 둥.. 하는 말로 소통의 부재로 인한 과도한 아드레날린 분비를 일으켰다. 그래도 거지가 그 사람들 보다 낫다. 왠지 모를 파시즘의 기운과 독선과 아집이 느껴졌던 그들의 댓글 때문에 가녀린 내 가슴은 상처를 받았다. 아무래도 이런 약한 마음으로는 글써서 먹고 살긴 힘들고 전공인 경제학이나 열심히 해서 그런 가치관과 초월한 자본주의의 주류 이데올로기에 영합하는 인생을 사는게 좋지 않을까..글 쓰고 보니 참 있어보일려고 여러가지 난잡한 수사학을 동원한 것 같다. 일기도 남들 보는데서 쓰면 이런 폐단이 있다. 하지만 글 쓰기에는 도움이 된다. 정제되지 않은 거친 날언어의 전횡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일기는 누군가 볼지도 모른다는 가정하게 쓰는 것이 좋다. 가끔 사람들에게서 보이는 위선적인 모습에 대항하기 위한 나의 소심한 무기는.. 파블로 카잘스가 첼로를 들었다면 나는 키보드를 들어야 겠다. 나는 투사다. 나약함에서 벗어나 데미안이 보여줬던 그 이상향으로 다가가기 위해 하루에도 몇번씩 나의 껍질을 깨트리는 투사다. 그랬으면 좋겠다는 바램이 피그말리온 효과의 결과로 인해 현실이 되는 날이 있을 것이다. 그래 나는 투사다. 싸우자!! 고고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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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otsam 2007-08-23 18: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교 홈피에 올렸다는 그 글
url좀 올려봐라

바밤바 2007-08-25 02:09   좋아요 0 | URL
안된다~ 밝힐수 없다~ 움하하하.. 내가 수원놀러가면 갈챠주께^^ㅋ

flotsam 2007-09-02 17:50   좋아요 0 | URL
기대 할꾸마ㅡㅎ
 

 디워에 대한 수많은 논쟁이 사회를 뒤덮고 있다. 덕분에 탈레반에 잡혀간 아해들의 소식이 덜 들려와 내 귀를 편안히 해주고 있지만 디워에 관한 논쟁에 다시금 귀가 동하여 마음이 그리 편치많은 않다. 디워를 지지하는 몇몇 사람들이 쓴 추천글들을 보면 참 못썼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그나마 변씨 아저씨가 쓴 디워 지지 글은 좋았다. 하지만 난 기본적으로 진중권씨의 입장을 지지하는 편이기 때문에 지금의 상황이 탐탁지 않다. 진중권에 대한 많은 비판 중 눈에 띄는 것은 그가 언급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미학에 관한 논쟁이다. 진중권은 학술적 용어라 할 수 있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끄집어 와 서사구조의 부재를 비판하였는데 참으로 옳다고 볼 수 있다. 디워를 보면 그러려니 넘어가기엔 지나친 시나리오 상의 헛점이 많이 보인다. 등장 인물 하나하나가 긴밀한 이야기 구조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때에 따라 소환되고 또 소멸한다.예를 들어 조선시대에 있었던 부라퀴 군단의 침공은 세계 지배가 가능할 정도의 힘을 보여줬기에 굳이 이무기의 힘이 없어도 그들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고 본다.  혹자들은 여기서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선악의 대결에서도 그런 악의 무리가 반지 하나 때문에 대군단을 일으키는 것은 말이 안된다면 디워를 옹호하고 있는데 디워에서 선의 입장에 서 있는 사람은 누군지 불분명하다. 그리고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선한 종족들은 악의 세력과 비등하게 겨룰 수 있는 힘이 있었지만 디워의 선한쪽은 아무런 힘이 없이 그저 난도질 당할 뿐이다.
 그리고 혹자는 비평가들의 자질을 논하며 인상파의 효시인 마네의 올랭피아 사건을 들먹이며 심형래를 옹호하고 있다. 두 사건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 올랭피아의 미학적 가치가 폄훼된 이유는 신이 아닌 인간을 그렸기 때문이다. 즉 아름다운 여신이 아닌 일개 창녀를 그림의 주제로 그렸기 때문에 미적 아름다움을 우선시 하던 그당시 보수 논객들에게 비판을 당했던 것이다. 즉 신으로 대표되던 아름다움이 인간이라는 평범한 대상에게 아름다움을 뺏긴것에 대한 당혹과 혼란이 주된 정서였다. 마네의 올랭피아는 당시의 미술과 예술 전반에 걸쳐 있던 예술이 지향해야 하는 미(美)에 대한 반기를 든 것이고 후의 포스트 모더니즘의 씨앗이라고도 볼 수 있다. 비평가들의 자질을 논하며 올랭피아 사건을 예로 들기엔 심형래의 영화에선 그런 문화의 진보적 논쟁을 일으킬 요소가 전무하다고 볼 수 있다. 오히려 비유를 하려면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연주 불가능 한 형편없는 곡이라 비난했던 안톤 루빈스타인과 같은 피아니스트의 예를 드는 것이 더 적당할 것이다. 왜냐하면 루빈스타인은 차이코프스키에 대한 약간의 질시와 보드카 냄새 나는 그의 음악에 대한 거부감으로 혹평을 날렸기 때문에 현재 사람들이 비난하는 평론가들과 비슷한 양상을 띄고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디워는 서사를 드러내기 위해 씨지를 사용한 것이 아니라 씨지를 사용하기 위해 서사를 끌어다 붙이 조악한 형태를 띄고 있다. 사람들이 여기서 많이 이야기 하는 트랜스 포머나 300과 같이 비교적 서사구조가 빈약하다고 볼 수 있는 영화와의 비교 또한 문제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트랜스 포머와 같은 경우는 조금은 억지스럽지만 최대한 인과성을 부여하기 위해 끊임없는 서사의 이음새에 대한 담금질이 일어난다. 또한 외계 생물체의 지구 조난이라는 설정부터 다소 이해심을 유발하는 서사 구조기에 그들이 보이는 눈부신 그래픽의 향연 만으로도 억지스럽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300또한 많은 디테일에 신경을 쓴 영화로서 디워의 다소 쌩뚱맞은 진행과는 비교하기가 어렵다.

 예전에 딴지일보에서 읽은 기사에서 몬스터 주식회사에 대하여 극찬한 영화평이 있었다. 그 기자가 놀란것은 그 털하나하나 움직이는 것을 표현한 세밀한 그래픽이 아니라 저런 엉뚱한 소재로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헐리우드의 소프트 파워에 관한 것이였다. 심형래 감독 본인도 인터뷰에서 영화는 상품이고 이것이 통하기 위해서 줄거리를 최대한 단순하게 한다고 했는데 이것은 영화의 미적 가치를 숭상하는 사람들에게 충분히 반발을 살 수 있다. 문화가 고급문화와 저급문화로 나뉘지는 않지만 일반인들의 인식에는 클래식과 대중음악 내지는 순수문학과 무협지 등을 대칭 구조로 보는 시각이 있기에 사람들은 문화의 계층성을 부지부식간에 인정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디워라는 영화는 영화라는 예술이 추구하였던 심미안적 가치를 기술의 진보가 선사하는 시각적 이미지로서 대체하려는 경향을 보였고 이것이 어느정도 반감을 산 것이라 본다.

  하지만 이 사태의 본질은 애국마케팅과 결부된 일종의 네티즌의 파시즘적인 경향이다. 파시즘이라는 것이 굳이 우상에 대하여 나타나는 것 뿐만이 아니라 약자를 옹호하는 면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 심형래 감독은 지금 네티즌에게 약자라는 위치에 놓인 비주류로 인식되고 있으며 이것은 주류세력이 다 헤쳐먹고 있는 이 신자유주의에 대한 민중의 반감과 약자에 대한 동정심이 교묘하게 결합되어 크나큰 논쟁을 일으키고 있다. 무솔리니나 히틀러 또한 사회적으로 소외받는 자들의 분노를 촉발시켜 파시즘을 일으켰듯이 지금 네티즌이 보이는 진중권에 대한 무차별적 공격은 우상의 붕괴에 분노하는 파시즘과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물론 파시즘에 대한 역사적인 교훈을 다들 지니고 있지만 20대 80사회로 진행되고 있는 현재의 사회 구조는 조금더 세련된 형태의 파시즘의 등장의 변수또한 지니고 있다고 본다. 디워에 대한 다양한 비평이 네티즌의 과도한 심형래 옹호로 인해 제기되지 못한다면 민주주의의 전가의 보도라는 다수결의 원칙이란 미명하에 다양한 문화의 싹을 죽이는 것이다. 물론 네티즌들의 분노의 원천은 충무로라는 기득권이 보이는 심형래 감독에 대한 배타적 행위와 일반 관객의 시각을 무시하는 듯한 비평가들에 대한 비난에 근저가 있다. 하지만 비평가들의 평가를 많이 수용하는 사람들도 많고 충무로의 문화권력에 대한 대항마로 심형래에 대한 무조건적인 옹호는 장기적으로 우리 문화의 토양을 많이 척박하게 할 것이다. 서사가 조약하여도 그래픽과 정성만 있다면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비정상적 영화관을 투자자나 신인 감독에게 심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조금은 냉정해 지자. 진중권또한 네티즌이 보이는 마녀사냥의 행태에서 파시즘을 경향을 읽고 저런 공격적인 말투를 보이는 것일 게다. 언중의 힘은 그렇게 강하기에 그렇게 위험한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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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 2007-08-14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렇군요. '약자에 대한 동정심'도 결합되어 있군요. 가끔 이렇게 놀러온답니다. 그러하여도 괜찮겠죠.ㅎㅎ 잘 읽었어요. 유사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구요. 좀더 진지한 분석이 필요한 시점인 것 같습니다. 비판을 넘어서 보듬고 같은 곳을 볼 수 있는 방법은 없나요??

바밤바 2007-08-15 04:27   좋아요 0 | URL
자주 놀러오시옵소서 ㅋ. 비판을 넘어 보듬고 같은 곳을 보기엔 세상을 제로섬 관점으로 보는 사람이 많아서 힘들죠. 이상으로 접근하기 위해선 현실적인 수단이 동반되어야 하니 아무래도 순순한 이상적 접근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제 홈피니까 제 맘대로 쓰는거 이해해주시구요.. ㅎ 그래도 나름 비슷한 시각을 견지하는 것 같아서 좋네요^^ㅋㅋ
 

간만에 마이 리뷰를 썼다. 거의 폭주했다. 11개나 쓰다니.. 도라이다..

이건 귓발로 쓴게 아니고 글발로 쓴거 같다는 느낌이 든다.

상당히 뭔가 아는척 하는듯한 말투는 부족한 나의 실력을 숨기기 위함이다.

근데도 적었던 것은 왠지 오늘의 글은 너무 예쁘게 잘 나올거 같아서 였다.

물론 다 몇번씩 청취하였던 음반이기도 하기에.. 윤동주님의 쉽게 쓰여진 편지마냥

그렇게 쉽게 적었다. 거의 2시간 정도 걸린 이 리뷰 작업은 내 블로그에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을 끌어 모으고 있다. 내가 글쓴걸 어떻게 알았는지 몰겠다. 새벽에 22명이라니..

누가 알면 좀 갈쳐 줬으면 좋겠다. 댓글을 남겨 주세요~ 제가 사랑해 드릴꼐요~ 호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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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7-08-03 0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요 ^^

바밤바 2007-08-13 00:56   좋아요 0 | URL
화이팅!! 아자아자!!

푸하 2007-08-10 0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쇼팽의 리뷰보고 왔어요. 가뜩이나 클래식이 듣고 싶던 차인데 욕망을 돋우는 리뷰네요... ^^:

바밤바 2007-08-13 00:57   좋아요 0 | URL
뭐 듣고 싶으면 들으셔야죠~ 하하.. 요즘 즐길게 너무 많아서 정신적으로 피폐해지기 쉽상인데 고전음악 들으면 그나마 세파에 덜 휩쓸리는듯해요~ 껄껄

레이저휙휙 2007-08-19 2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앙, 클래식 분야에 리뷰를 폭탄 투하해주셔서 얼렁 건너왔지요. 그저 감사합니다!

바밤바 2007-08-22 01:45   좋아요 0 | URL
그냥 저 좋자고 쓴건데요 뭐~ 글을 몰아쓰는건 안좋은 습관같아요~
꾸준히 자주가 젤 좋지 않을까요~ 그럼 존하루~^^

무버스 2008-05-11 1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공부 많이 하고잇습니다^
너무 고맙습니다 바밤바님.
 

 며칠전 아람 누나와 만났을 때의 이야기다. 우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탈레반 사태에서 부터 심형래 감독의 영화 이야기. 그리고 사랑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성찰. 가끔은 현실적 이야기. 지도자의 덕목.. 등. 많은 이야기. 나는 누나에게 삼국지에 나오는 서서와 유비의 일화를 이야기 하여 주었다. 유비의 적로를 처음 본 서서는 아직 일면식도 하지 않은 유비에게 대뜸 이야기 한다. "이 말을 주인을 해칠 것이오, 그러니 타인에게 양도하여 이 말이 새 주인을 해하고 난뒤 다시 유황숙께서 타시면 평생 유황숙을 보필하는 명마로 남을 것이오", 그러자 우리의 유비는 아니나 다를까 그 제안을 거절한다. "나를 살리자고 타인을 해칠순 없소!" 라는 말과 함께.. 그러자 서서는 생각한다. '이자가 내가 그의 사람됨을 떠보기 위해 질문을 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이런 대답을 하였다면 무서운 사람이다. 하지만 이것이 그의 마음에서 나온 진정한 답변이라면 더욱 무서운 사람이다.' 결국 유비의 그냥 무서운 사람인지 정말 무서운 사람인지는 논의가 분분 하기에 나 또한 어느 한쪽에 힘을 실어주긴 힘들다. 하지만 서서의 이 말에서 나는 이성보다는 감성의 힘을 느낄 수 있었고 진정한 도는 아는 것이 아니라 깨우친 것이고 생각하지 않고 마음이 이끄는데로 하여도 사람을 절로 감명케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였다. 이 말을 듣고난후 아람 누나는 내게 유비와 같은 자질이 있다며 덕으로서 사람을 이끌 수 있는 사람이 되라 하였다. 하지만 지금은 한나라 말기와 같이 유학사상이 민중의 기저에 전반적으로 갖추어져 있거나 의협심과 같은 도덕적 가치가 숭상받지 못하는 시기. 법에 의한 지배와 사회적인 계약에 의한 인간관계가 난립하는 시가. 고로 나는 그러한 덕 만으로는 현실의 세계에서는 지도자의 위치에 서기 어렵다 하였다. 하지만 누나는 그 덕의 힘을 계속 믿고 싶어 하였고 나는 그 덕이라는 힘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역설하기에 바빳다.

 나또한 서서가 이야기한 더 무서운 사람이 되고파 한다.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사람을 움직인다는 것이 얼마나 매력적이며 또 경이로운가. 하지만 그런 천성을 가진 사람들은 집단 행동 규율을 강요하는 정규학교 과정을 마치고 난 후 적자생존의 원리에 따라 조금씩 계산적으로 변하게 된다. 이런 세태속에 나는 그런 계산 보다는 내 마음이 이끄는 대로 행하려 애쓴다. 더욱 큰것을 노리기 위한 작은것에 대한 무관심이 아닌 진정 마음이 그리 행하기에 더욱 큰것을 얻게 되는 그런 것 말이다. 하지만 내 주윗사람들 중 일부는 나의 이상하게끔 뛰어난 기억력과 빠른 암산 능력 내지는 약간 궤변적인 말투 때문에 엄밀한 계산에서 나온 행동의 결과로 나의 행동방식을 규정하곤 한다. 가끔 그럴때도 있지만 항상 그것을 망각하려 하고 또 그 망각하려는 생각 또한 그냥 넘겨버리려 애쓰기 때문에 그런 비판을 들을때 마다 나의 수양이 부족함을 느낀다. 나의 수양이 어느정도 완성이 되고 나서야 나는 현실에 뛰어 들고 싶지만 예상외로 수양의 진척은 느리고 시간의 흐름을 가파라 진다. 짧은 수양으로는 그러한 도를 완성할 수 없기에.. 내가 경멸하였던 세속적 무리의 일원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수양보다 더 중요한 것은 행복이라는 가치이기에.. 조금 마음을 바꾸어 더 편한길을 택할지도 모르겠다. No risk, No return이 적용되기에 아마 내가 꿈꿔왔던 삶과는 멀어질 것이다.

 지금의 나는 고민이 많을 시기. 타인들의 고민을 주로 상담해 주고 또 세상 돌아가는 것에 대한 나의 시각을 물어보는 지인들이 많아 지면서 나의 의견이 지인들에게 가지는 힘은 점점 강해지고 있다. 그런 강함을 유지하기 위한 지적 분석작업과 다각적 시각에 대한 고찰은 나를 조금씩 힘들게 하고 정신적으로 고갈되게 하고 있다. 브람스의 교향곡 3번을 아르농쿠르가 지휘하는 베를린 필의 연주로 듣고 있는데 글쓴다고 귀에 하나도 안들어 온다. 음악을 들으면 혹자들이 이야기 하는 우주의 진리와 극한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을까.. 솔직히 회의적이다. 그들이 느꼈던 아름다움은 다른 가치에서 느낄 수 있는 쾌락을 포기하면서 선택한 가치이기에.. 일반적으로 수용되기 어려운 주장이다. 내일은 덕규랑 디워를 보러 가기로 했다. 영화를 상품으로만 보고 영화의 미덕은 기술적 진보가 보여주는 스펙터클이라고 믿는 심형래 감독의 영화는 탐탁지 않다. 영화의 성공이 창출할 부가가치를 역설하고 한국 기술의 진보를 역설하지만 그것은 영화가 지니는 부수적 가치일 뿐 영화의 절대적 가치라 할 수 없다. 트랜스 포머라는 영화 또한 그 재기발랄한 시나리오에 맞추기 위해 첨단 기술을 동원한 것이지 첨단 기술을 보여주기 위해 시나리오를 쓴 것이 아니다. 본말이 전도된 시각을 갖고있는 그의 영화에 대한 사상은 이틀에 한번꼴로 영화를 보는 나의 입장에서 보기에 무지몽매하여 보인다. 예전처럼 노골적이지는 않지만 여전히 횡횡하는 애국주의적 마케팅과 영화라는 장르가 예술이라는 장르의 일부라는 것을 망각한 듯한 영화의 줄거리. 탐탁지 않다. 디워가 잘 되어야지만 국가적 신인도도 높아지고 이 후에 추진될 영화 산업 또한 탄력을 받아서 잘 될것이라는 말들.. 참 이런 당위적인 말을 하는 이들을 볼때마다 위험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당위성 앞에서 매국노가 될 수 밖에 없는 일부 비평가들은 보이지 않는 위험을 지적하는 선지자가 되지 못한다. 기껏해야 지적 우월성과 고상함을 내새워 딴지나 거는 저급한 지식인의 하나로 매도될 것이다. 난 개인적으로 심형래 감독의 영화가 망했으면 한다. 영화의 양념격인 컴퓨터 그래픽을 주재료로 써버린 이 빈곤한 식단이 많은 이의 호응을 얻게 된다면 앞으로도 계속 우리는 양념으로 가득한 밥상을 받게 될 것이다. 물론 그 양념은 맛있다. 하지만 양념만으로는 배를 채우기도 알싸하게 씹어먹는 느낌도 그리고 식사의 즐거움도 가질 수 없다. 특히 미각이 발달된 사람일 수록 이 밥상을 먹고 더욱 허기를 느낄지도 모르겠다. 조금은 냉정해지자. 조금 더 나은 밥상을 위해서 지금의 이 비싼 밥상을 아깝다 하지말고 걷어 차버리자. 이 밥상이 많은 호응을 얻을 수록 우리는 계속 이러한 밥상을 받아야 할지도 모른다. 미각의 다양성을 인정해주기는 커녕 양념맛에 찌들어 기존의 미각마저 상실해 버릴 우리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이 밥상을 엎어버리자. 그리고 단식투쟁을 하자. 비록 그 배고픔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할 테지만 그 후의 빛나는 밥상을 위해선 지금의 배고픔은 더 나은 사회를 위한 진통이다. 참 매몰비용이 크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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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은 학교. 많은 사람들이 무언갈 꾸준히 열심히 한다. 열람실을 가보면 전부다 전공서적 내지는 어학관련 공부..혹은 자격증 공부. 교양서적을 읽는 나 같은 사람은 스스로를 어색하게 여기는게 당연할 정도로 열람실은 상아탑보다는 사회와 맞닿은 공간이다. 전체적으로 부분 군집을 이루는 군상들이 많은 우리 학교의 특성상 군중속의 고독 현상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삼성이라는 기업의 모토와 걸맞게 대부분이 효율성과 특성화에 걸맞게 움직이는 학교의 체제를 보면 몇몇 아해들이 부르짖는 '민족성대 대동단결'이란 구호가 어색해 보인다. 아니 들린다. 그리고 학교 올라오는 길에 보이는 이랜드 노조 탄압에 대한 문과대 학생들의 투쟁적인 글귀가 왠지 맘에 들지 않는다. 조금은 대중친화적인 투쟁을 할 수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투쟁의 진정한 목표가 승리라면 방법론에 있어선 조금 더 유연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전략적으로 옳다고 본다. 물론 그 방법론적 유연함에서 파생되는 내부적 균열이나 운동권 특유의 저항정신이 쇠퇴할 수도 있지만 조금은 예술적 형태의 노동운동이 필요하다고 본다. 요즘 대중들의 시각적 이미지지에 민감히기 때문이다. 내가보는 운동권의 특징 중 하나는 '나는 옳고 그대는 그르다..' 뭐 이런 이분법적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야 말로 열렬한 투사로 인정해 주는 것이 아닐까 한다. 어제 황석영씨 원작의 영화 오래된 정원을 보았는데 운동권 내에 보이는 파시즘에 관한 성찰이 보인다. 386세대라 불리우는 그세대들에 대한 나름 3자적 시각이 돋보이는 이 영화는 혁명의 끝자락에 남아 불같이 타올랐던 순박한 영혼들에게 조그마한 진혹곡을 연주해 준다. 울지말라고.. 울지말라고.. 관객을 다독거리는 듯한 감독의 영상화된 말들은 결국 김지하와 황석영의 주된 테마가 삶이라는 걸 그리고 단순한 개혁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낸다.

 탈레반에 잡혀간 사람들에 대해 악플이 난무하는 시기. 법 아래에 자고 있는 자들을 법은 지켜주지 않는다고 말하였던 법학개론 시간의 교수의 말이 생각난다. 조금 더 많은 것들을 다양한 관점으로 다루어져야할 시기에 20여명의 목숨에 4천만이 모두 노이로제에 걸린 모습은 바람직하지 않다. 직접적으로 목숨이 달린 그들의 삶보다 간접적으로 그리고 점진적으로 다가오는 괴물에 대한 실체는 몇몇 선각자들이 대처해야 할 몫으로 남아있다.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기독교라는 종교에 대하여 도저히 좋은 시각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로마가 남긴 3대 유산(로마 법, 로마 길)중에 하나라는 기독교라는 종교의 독선과 아집에 대해서는 재론할 필요조차 없다고 본다. 시저의 것은 시저에게 유태인의 것은 유태인에게.. 라고 역설하였던 예수의 말처럼 각자의 다양성 존중이야 말로 종교의 참 의미가 아닐까 한다. 로마의 붕괴가 기독교와 관련이 있다는 몇몇 사가들의 주장이나 시오노 나나미의 생각은 기독교가 지배하는 서구사회의 주류패러다임에 저항하는 참신한 시각이라 본다. 김밥천국 예수지옥이란 말이 유행처럼 번져가는 이 시점에 단지 대중의 가학성과 비인도적 자세를 탓하며 피랍자들을 옹호하는건 설득력이 약하다. 기독교 내부에 있었던 독선과 아집을 반성하고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던 그들의 세계를 비판하지 않는다면 이번 사건에 대한 대중 여론은 꾸준히 비난을 강화하는 쪽으로 치달을 것이다. 사람의 생명이 우선이라는 절대적 명제와 국익과 비용을 고려할 수 밖에 없는 현실적 문제의 충돌에서 보이는 주류 언론과 네티즌 언론과의 괴리는 이번 사태 속에 내재된 딱 집어 말할 수 없는 사회적 모순의 표출이라고 볼 수 있겠다. 평소에는 다양한 의견을 나타내지만 생명이란 절대적 명제앞에서는 일관된 의견을 내놓을 수 밖에 없는 주류언론의 경직성과 마녀사냥의 모습이든 개인의 의견피력의 모습이든 자기검열이 없는 네티즌 과의 충돌은 기술의 발달이 낳은 언중의 힘을 보여준다고도 볼 수 있다. 지금 주류언론이 하는 작태는 지록위마의 사례라고도 할 수 있다. 지금도 수백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 땅에서 죽어가고 있을 것이다. 관심조차 받지 못하는 많은 이들에게 쏟아질 관심이 20여명의 피랍자들에게 집중되는 것은 한정된 재화를 분배할 수 밖에 없는 경제학의 논점에서 보면 힘의 낭비이다. 경제학은 이렇게 비인간적이지만 벤담의 공리주의적 사상에 비추어보면 명쾌한 답을 가져다 주기도 한다.

 '연탄재 함부로 차지마라.. 너는 누군가에게 그렇게 뜨거운 사람이였던 적이 있었느냐'는 싯귀가 떠오른다. 나 또한 누군가에게 뜨거웠던 적이 있었는가.. 누군갈 비판할 자격이 있는가.. 하는 자아비판을 하다 보면 취직에 매달리는 주위 사람들이 보인다. 뜨거울 수 있는 마음조차 사치라 여기는 저 노동예비군들 앞에서 홀로 고상한척 하는 나의 모습 또한 연탄재 보다 못한 존재일지도 모른다.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의 괴리는 그렇게 넓고 또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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