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학교. 많은 사람들이 무언갈 꾸준히 열심히 한다. 열람실을 가보면 전부다 전공서적 내지는 어학관련 공부..혹은 자격증 공부. 교양서적을 읽는 나 같은 사람은 스스로를 어색하게 여기는게 당연할 정도로 열람실은 상아탑보다는 사회와 맞닿은 공간이다. 전체적으로 부분 군집을 이루는 군상들이 많은 우리 학교의 특성상 군중속의 고독 현상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삼성이라는 기업의 모토와 걸맞게 대부분이 효율성과 특성화에 걸맞게 움직이는 학교의 체제를 보면 몇몇 아해들이 부르짖는 '민족성대 대동단결'이란 구호가 어색해 보인다. 아니 들린다. 그리고 학교 올라오는 길에 보이는 이랜드 노조 탄압에 대한 문과대 학생들의 투쟁적인 글귀가 왠지 맘에 들지 않는다. 조금은 대중친화적인 투쟁을 할 수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투쟁의 진정한 목표가 승리라면 방법론에 있어선 조금 더 유연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전략적으로 옳다고 본다. 물론 그 방법론적 유연함에서 파생되는 내부적 균열이나 운동권 특유의 저항정신이 쇠퇴할 수도 있지만 조금은 예술적 형태의 노동운동이 필요하다고 본다. 요즘 대중들의 시각적 이미지지에 민감히기 때문이다. 내가보는 운동권의 특징 중 하나는 '나는 옳고 그대는 그르다..' 뭐 이런 이분법적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야 말로 열렬한 투사로 인정해 주는 것이 아닐까 한다. 어제 황석영씨 원작의 영화 오래된 정원을 보았는데 운동권 내에 보이는 파시즘에 관한 성찰이 보인다. 386세대라 불리우는 그세대들에 대한 나름 3자적 시각이 돋보이는 이 영화는 혁명의 끝자락에 남아 불같이 타올랐던 순박한 영혼들에게 조그마한 진혹곡을 연주해 준다. 울지말라고.. 울지말라고.. 관객을 다독거리는 듯한 감독의 영상화된 말들은 결국 김지하와 황석영의 주된 테마가 삶이라는 걸 그리고 단순한 개혁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낸다.

 탈레반에 잡혀간 사람들에 대해 악플이 난무하는 시기. 법 아래에 자고 있는 자들을 법은 지켜주지 않는다고 말하였던 법학개론 시간의 교수의 말이 생각난다. 조금 더 많은 것들을 다양한 관점으로 다루어져야할 시기에 20여명의 목숨에 4천만이 모두 노이로제에 걸린 모습은 바람직하지 않다. 직접적으로 목숨이 달린 그들의 삶보다 간접적으로 그리고 점진적으로 다가오는 괴물에 대한 실체는 몇몇 선각자들이 대처해야 할 몫으로 남아있다.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기독교라는 종교에 대하여 도저히 좋은 시각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로마가 남긴 3대 유산(로마 법, 로마 길)중에 하나라는 기독교라는 종교의 독선과 아집에 대해서는 재론할 필요조차 없다고 본다. 시저의 것은 시저에게 유태인의 것은 유태인에게.. 라고 역설하였던 예수의 말처럼 각자의 다양성 존중이야 말로 종교의 참 의미가 아닐까 한다. 로마의 붕괴가 기독교와 관련이 있다는 몇몇 사가들의 주장이나 시오노 나나미의 생각은 기독교가 지배하는 서구사회의 주류패러다임에 저항하는 참신한 시각이라 본다. 김밥천국 예수지옥이란 말이 유행처럼 번져가는 이 시점에 단지 대중의 가학성과 비인도적 자세를 탓하며 피랍자들을 옹호하는건 설득력이 약하다. 기독교 내부에 있었던 독선과 아집을 반성하고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던 그들의 세계를 비판하지 않는다면 이번 사건에 대한 대중 여론은 꾸준히 비난을 강화하는 쪽으로 치달을 것이다. 사람의 생명이 우선이라는 절대적 명제와 국익과 비용을 고려할 수 밖에 없는 현실적 문제의 충돌에서 보이는 주류 언론과 네티즌 언론과의 괴리는 이번 사태 속에 내재된 딱 집어 말할 수 없는 사회적 모순의 표출이라고 볼 수 있겠다. 평소에는 다양한 의견을 나타내지만 생명이란 절대적 명제앞에서는 일관된 의견을 내놓을 수 밖에 없는 주류언론의 경직성과 마녀사냥의 모습이든 개인의 의견피력의 모습이든 자기검열이 없는 네티즌 과의 충돌은 기술의 발달이 낳은 언중의 힘을 보여준다고도 볼 수 있다. 지금 주류언론이 하는 작태는 지록위마의 사례라고도 할 수 있다. 지금도 수백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 땅에서 죽어가고 있을 것이다. 관심조차 받지 못하는 많은 이들에게 쏟아질 관심이 20여명의 피랍자들에게 집중되는 것은 한정된 재화를 분배할 수 밖에 없는 경제학의 논점에서 보면 힘의 낭비이다. 경제학은 이렇게 비인간적이지만 벤담의 공리주의적 사상에 비추어보면 명쾌한 답을 가져다 주기도 한다.

 '연탄재 함부로 차지마라.. 너는 누군가에게 그렇게 뜨거운 사람이였던 적이 있었느냐'는 싯귀가 떠오른다. 나 또한 누군가에게 뜨거웠던 적이 있었는가.. 누군갈 비판할 자격이 있는가.. 하는 자아비판을 하다 보면 취직에 매달리는 주위 사람들이 보인다. 뜨거울 수 있는 마음조차 사치라 여기는 저 노동예비군들 앞에서 홀로 고상한척 하는 나의 모습 또한 연탄재 보다 못한 존재일지도 모른다.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의 괴리는 그렇게 넓고 또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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