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철학자열전 동서문화사 월드북 79
전양범 지음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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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밑줄긋기)

 

그의 책 권수는 약 300을 웃돌고 있었기 때문

 

또한 철학자인 에피쿠로스는 매우 다작이고 책의 수로는 모든 사람을 능가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의 책 권수는 약 300을 웃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가운데에는 남의 책으로부터의 인용은 하나도 없고 그 전부가 에피쿠로스 자신의 말인 것이다. 그런데 (스토아파인) 크리시포스는 에피쿠로스와 다작을 겨루려 하고 있었던 것인데 (새 아카데미파인) 카르네아데스는 이 크리시포스를 에피쿠로스의 책을 좀먹는 기생충으로 불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즉 에피쿠로스가 어느 것을 쓰면 크리시포스는 이에 지지 않으려고 같은 분량만큼 쓰려고 했다.(669쪽)

 

 - 디오케네스 라에르티오스, 『그리스철학자열전』,  「제10권」<1. 에피쿠로스>

 

 

자신이 이해하고 있는 것을 재빠르게 활용할 수가 있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또 우리는 그 기본적인 원리로 끊임없이 되돌아가 그것만의 것은 기억해두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물에 대한 가장 중요한 이해는 얻을 수 있을 것이고 게다가 매우 개략적인 것이라도 나의 학설의 개요가 올바르게 파악되고 기억되고 있는 것이라면 개개의 특수한 사항에 대한 정확한 지식도 모두 발견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충분히 철학의 수업을 쌓은 사람에게 있어서도 자신이 이해하고 있는 것을 재빠르게 활용할 수가 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모든 정확한 지식이 갖추고 있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이고, (그리고 그것은 모든 사항이) 단순한 기본원리로 환원되어 말로 표현됨으로써 가능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개개의 특수한 사항에 관한 것이 모두 정확하게 알려졌다고 해도 그것을 간결한 말로 자기자신 속에 받아들이지 (기억해두지) 못한다면 그것은 학설 전체를 끊임없이 열심히 연구해온 것의 성과로는 될 수 없기 때문이다.(675쪽)

 

 - 디오케네스 라에르티오스, 『그리스철학자열전』,  「제10권」<1. 에피쿠로스>

 

 

아톰은 끊임없이 그리고 영원히 운동을 하고 있는 것

 

그러나 또 (우주) 만유는 한이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한정되어 있는 것은 끝을 지니고 있는 것이고 그리고 그 끝은 (그 앞에 있는) 다른 무언가에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이다(그런데 만유는 다른 무언가에 있는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유는 끝이 없기 때문에 한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한이 없다면 만유는 한이 없는 것이고 한정된 것이 아닐 것이다.

 

뿐만 아니라 만유는 물체(아톰)의 수에 있어서나 공허의 크기에 있어서나 한이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공허가 한없이 큰데 물체는 한정된 수의 것이라고 한다면 물체는 이를 지탱하거나 저항해서 되돌리거나 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어디에도 머무는 곳은 없어 무한한 공허 속에 흩어져 운반되어 갈 것이고, 만일 공허의 크기가 한정되어 있다고 한다면 무한히 수많은 물체는 존재해야 할 곳을 갖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여러 가지 물체 가운데서도 불가분으로 충실한 것, 즉 합성물이 그것에서 낳고 또 그것으로 분해되는 요소(아톰)에는 우리에게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형태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보고 있는 합성물의) 이 정도로까지 수많은 차이가 우리가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 (한정된 수의) 같은 형(의 아톰)에서 생기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각 형태마다 비슷한 것(아톰)은 수에 있어서 완전히 무한하게 있지만 형태가 다른 것은 결코 무한으로 수없이 있는 것은 아니고 우리에게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이 있을 뿐인 것이다.

 

[왜냐하면 분할은 무한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그는 그것에 이어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물의 성질은 변화하는 것이므로 (아톰형의 무한한 다양성을 상정하려고 하는데)] 만일 사람이 크기의 점에서도 아톰 속에 있는 것을 완전히 한없이 큰 것으로 (해서 눈에 보일 정도의 것으로) 하려는 것이 아니라면 (앞서와 같이 상정할 필요는 없다)고 그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 아톰은 끊임없이 그리고 영원히 운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677∼678쪽) 

 

 - 디오케네스 라에르티오스, 『그리스철학자열전』,  「제10권」<1. 에피쿠로스>

 

 

세계가 무한히 수많은 것을 방해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또 세계는 수없이 무한히 있고 그 어느 것은 우리의 이 세계와 비슷한데 다른 것은 비슷하지 않은 것이다. 왜냐하면 아톰은 앞서 명확해진 것처럼 수없이 무한히 있고 그런 것들은 매우 멀리까지 운반되어가기 때문이다. 그것은 세계가 그런 것에서 생길 수 있는, 또는 그런 것에 의해서 형성될 수 있는, 그와 같은 여러 가지 아톰은 하나의 세계를 위해, 또는 한정된 수의 세계를 위해 ㅡ 그런 것들의 세계가 우리들의 세계와 비슷한 것이든, 다른 것이든 ㅡ 모두 사용되고 만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계가 무한히 수많은 것을 방해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679쪽)

 

 - 디오케네스 라에르티오스, 『그리스철학자열전』,  「제10권」<1. 에피쿠로스>

 

 

사물의 형태를 보는 것

 

그런데 외계의 사물에서 어떤 것(에이드론)이 우리 안에 들어옴으로써 우리는 그런 사물의 형태를 보거나 그런 사물에 대해서 사고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왜냐하면 외계의 사물이 그것들 자체가 지닌 색깔이나 형체의 있는 그대로를 우리에게 인상을 남기는 것은 우리와 그런 사물과의 중간에 개재하는 공기에 의해서도, 또는 (눈에서 나오는) 광선에 의해서도, 또는 우리에게서 그 사물에 이르고 있는 무언가의 흐름에 의해서도 다음에 말하는 것과 같은 방법에 따를 정도로는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사물 그 자체에서 색깔도 형체도 사물과 비슷한 일종의 모방된 것 (티포스=에이드론)이 우리에게로 와 제각기 상응한 크기에 따라서 우리의 시각이나 정신에 잠입하는 데 따른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런 모방된 것(영상)은 매우 신속하게 운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와 같은 이유 때문에 그와 같이 모방된 것(영상)은 하나의 연속된 것이란 표상을 우리에게 주는 것이고, 또 대상으로부터의 적당한 출격에 의해서ㅡ이 충격은 (대상인) 고체의 내부 깊숙한 곳에서 아톰이 진동하고 있는 데 따른 것인데ㅡ이런 모방된 것(영상)은 그 대상에서 유래하는 곳의, 그것과 대응하는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정신에 따라서이든, 다양한 감각기관에 따라서이든, 직접적으로 파악하는 방법으로 어떤 표상을 갖는다고 해도ㅡ형태에 대한 표상이든, 속성에 대한 표상이든ㅡ이 표상되고 있는 것이 (그것의) 고체형태 (내지는 속성)이고 그것은 에이드론(영상)이 잇따라 응집함으로써, 또는 우리의 정신 속에 잔존하고 있음으로써 낳게 된 것이다.(681쪽)

 

 - 디오케네스 라에르티오스, 『그리스철학자열전』,  「제10권」<1. 에피쿠로스>

 

 

어느 세계는 구상(球狀)이고 다른 세계는 계란형

 

또 이들 여러 세계는 필연에 의해서 하나의 똑같은 형을 지니고 '생성한'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또 온갖 형태를 지니고 생성한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또 이런 모든 세계에는 동물이나 식물, 그밖에 우리가 이 세계에서 볼 수 있는 모든 것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이들 여러 세계는 다양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고도 그(에피쿠로스) 자신이 <자연에 대해서> 제12권 가운데서 쓰고 있다. 즉 어느 세계는 구상(球狀)이고 다른 세계는 계란형이며 또 다른 세계는 그것과는 다른 형상을 이루고 있는데, 그러나 온갖 형태를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그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생명이 있는 것은 무한한 것에서 (직접) 분리되어 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그는 말하고 있다.' 그것은 동물이나 식물이나 그 밖에 (우리의 세계에서) 관찰되는 모든 것이 그런 것에서 낳게 되는 씨앗이 여기저기의 세계 속에는 포함되어 있었겠지만ㅡ또 사정에 따라서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을 때도 있었겠지만ㅡ그러나 이런저런 세계 속에 포함되어 있는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일을 아무도 논증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동물 그 밖의 것이 (태어난 후에) 세계 속에서 키워진다는 점도 똑같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 세계에 있어서나 대지 위에 똑같은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692∼693쪽)

 

 - 디오케네스 라에르티오스, 『그리스철학자열전』,  「제10권」<1. 에피쿠로스>

 

 

매우 단기간 안에 개관하게 되는 것

 

따라서 만일 나의 이 설명이 정확하게 파악될 수 있는 것이 된다면 설사 사람이 개개의 사항에 대한 정확한 것 모두를 알기까지에 이르지 않는다고 해도 그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학력을 갖추게 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그것은 실제로 그 사람은 나의 학설체계 전체에 의거해 개개의 사항에 관한 수많은 정확한 것을 자기 자신이 명확히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원칙적인 사항이 기억 속에 담겨져 있다면 그것은 끊임없이 그 사람의 연구에 도움이 되어줄 것이다. 그것은 이런 원칙적인 사항은 그와 같은 효과를 갖는 것이기 때문에 따라서 개개 사항에 대해서 이미 충분할 정도로, 또는 완벽한 정도로까지 정확한 지식을 지니고 있는 사람일지라도 그 지식을 이와 같은 원칙적인 사항의 파악으로 환원함으로써 자연전체에 관한 연구의 대부분의 것을 수행할 수가 있는 것이다. 다른 한편 또 아직 완전하게 나의 학설을 습득하고 있지 않은 사람들에 속하는 자들 쪽은 구술에 따르지 않은 학습방법이라도 이곳에 언급되고 있는 원칙에 의거해 혼의 평안에 도움이 되는 가장 중요한 사항을 매우 단기간 안에 개관하게 되는 것이다.(697쪽)

 

 - 디오케네스 라에르티오스, 『그리스철학자열전』,  「제10권」<1. 에피쿠로스>

 

 

다중우주

 

또 이와 같은 여러 세계가 수없이 있다는 것도 이해할 수 있고 또 그와 같은 세계는 이미 생기고 있는 세계 가운데서도 또 중간계ㅡ세계와 세계와의 사이의 공간을 우리는 그렇게 부르고 있는 것인데ㅡ그 중간계에서도 생기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그것은 일부의 사람들이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드넓고 전혀 섞임이 없는 순수하게 공허한 곳 가운데서,라는 것은 아니고 공허가 많은 곳 가운데서,라는 것이다. 즉 세계를 만드는 데 적합한 일종의 씨앗(아톰)이 하나의 세계 또는 중간계에서, 또는 몇 개의 세계 또는 중간계에서 (이 공허가 많은 곳으로 흘러들어와 조금씩 결합하거나 분절화하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다른 곳으로 위치를 바꾸거나 함으로써) 세계는 생기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씨앗은 세계가 완성해 안정이 될 때까지 적당한 곳으로부터 계속 유입하는 것인데 이와 같은 과정은 세계의 바탕이 되는 밑에 놓인 씨앗이 새로운 씨앗을 받아들이는 것이 될 수 있는 한 계속되는 것이다.(700쪽)

 

 - 디오케네스 라에르티오스, 『그리스철학자열전』,  「제10권」<1. 에피쿠로스>

 

 

현자가 하지 않는 일

 

또 현자는 소송을 제기할 때도 있을 거싱고 저작을 남기는 일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공공 집회에서 연설을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또 현자는 자기재산에 배려해 장래에 대비할 것이다. 또 전원을 사랑할 것이다. 그리고 운명에는 감연히 맞서고 어느 벗도 버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또 경멸당하지 않을 정도로 세상의 평판에는 두루 신경을 쓸 것이다. 또 국가의 제례 때에는 다른 사람들 이상으로 즐길 것이다.(712쪽)

 

 - 디오케네스 라에르티오스, 『그리스철학자열전』,  「제10권」<1. 에피쿠로스>

 

 

많은 사람들이 안고 있는 사고를 신에게 밀어붙이고 있는 자들이 오히려

 

한편, 내가 이제까지도 끊임없이 들려준 것, 그것이야말로 훌륭하게 살기 위한 기본원리로 생각해 그것을 생각함과 동시에 이를 실행하도록 하기 바란다. 즉 우선 첫째로 신에 대한 공통의 관념이 사람들 마음에 새겨 있는 대로 신은 불멸이고 지복한 삶으로 믿고 신의 불멸성과는 무관한 일도, 또 그 지복성에 걸맞지 않은 일도, 아무것도 신에게 밀어붙여서는 안 된다. 신의 불멸성과 지복성을 유지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신에 대해서는 생각하도록 해야 한다. 그것은 신들은 확실히 존재하고 있고 신들의 인식은 명료한 (直覺的인)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신들은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과 같은 것으로서 계속 지키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는 신들을 부인하는 자가 불경신(不敬神)인 사람은 아니고 많은 사람들이 안고 있는 사고를 신에게 밀어붙이고 있는 자들이 오히려 불경신의 사람인 것이다.(715쪽)

 

 - 디오케네스 라에르티오스, 『그리스철학자열전』,  「제10권」<1. 에피쿠로스>

 

 

훌륭하게 판단한 것이 우연한 탓으로 잘 안 된다고 해도 그 쪽이 더 낫기 때문

 

또 우연(운)에 대해서 사려있는 사람은 세상의 많은 사람들처럼 이를 신으로 여기지는 않고(그것은 신에 의해서는 아무것도 무질서하게 이루어지는 일은 없기 때문에) 또 우연을 온갖 사항의 불확실한 원인으로도 여기지는 않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선한 일이나 나쁜 일이 지복한 삶을 보내기 위해 우연에 의해서 인간들에게 주어진다고는 사려있는 사람은 생각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커다란 선이건, 악이건 그런 것의 계기가 되는 것은 우연에 의해서도 가져오게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사려있는 사람은 잘 생각함도 없이 행동하면서 행운이기보다는 잘 생각해서 행동하면서 불운인 쪽이 낫다고 믿고 있다. 왜냐하면 여러 가지 행위에 있어서는 훌륭하게 판단한 것이 우연한 탓으로 잘 안 된다고 해도 그 쪽이 더 낫기 때문이다.(720∼721쪽)

 

 - 디오케네스 라에르티오스, 『그리스철학자열전』,  「제10권」<1. 에피쿠로스>

 

 

 

헛된 망상에 따른 것

 

자연적인 욕망이기는 한데 충족되지 않아도 괴로움으로 이끄는 일이 없는 욕망 가운데 대상에 대한 격한 욕망이 깃들고 있는 경우에는 그와 같은 욕망은 헛된 망상에 의해서 낳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욕망이 없어지지 않는 것은 욕망 자체의 본성 탓은 아니고 그 사람의 헛된 망상에 따른 것이다.(727쪽)

 

 - 디오케네스 라에르티오스, 『그리스철학자열전』,  「제10권」<1. 에피쿠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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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대우고전총서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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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하지만 만일 윱피테르와 다른 신들이 공포스러운 뇌성으로

천상의 빛나는 영역을 뒤흔들고,

불을 각자가 원하는 대로 어디로든 던진다면,

그들은 왜, 어떤 혐오스러운 죄악을 아무 생각 없이 행한 자들에게

타격의 불길을 일으키지 않는가, 가슴이 꿰뚫려

벼락 내를 뿜으며 필멸의 인간들에게 날카로운 가르침이 되도록?

왜 그러지 않고 오히려, 그 어떤 사악한 일도 알지 못하는 이가

죄 없이 불길 속에 돌며 갑작스레 천상적인

소용돌이와 불속에 잡혀 엉키게 되는가?

또, 왜 그들은 외딴 장소를 지향하고 헛되이 애를 쓰는가?

그때는 팔을 훈련시키고 지체를 튼튼하게 만들려는 것인가?

또 그들은 왜 아버지의 무기가 땅에서 무뎌지는 것을

용인하고 있는가? 그 자신은 왜 이것을 허용하며, 적들을 겨냥해 아껴두지 않는가?

또한, 윱피테르는 왜 맑은 하늘로부터는 어디서도 결코

땅으로 벼락을 던지거나 뇌성을 쏟아붓지 않는가?

혹시 구름이 올라가자마자, 자신이 그때 그 안으로

내려가는 것일까, 거기 가까이서 무기의 타격을 겨냥하려고?

나아가, 무슨 이유에서 바다로 그것을 보내는가? 무엇을 그는 탓하는가,

물결들과 그 유동하는 부피와 헤엄치는 들판에게?

더욱이, 만일 그가, 우리가 벼락의 타격에 주의하기를 원한다면,

왜 그는 우리로 하여금 그 던져진 것을 분간할 수 있게 만들기를 주저하는가?

혹시 그가, 우리가 예상치 못할 때 불로 기습하기를 원한다면,

왜 그는 우리가 피할 수 있도록 저 부분에서 천둥 치는가,

왜 어둠과 포효와 우르릉거림을 앞질러 일으키는가?

또한 그대는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그가 동시에 여러 방향으로

그것을 던진다는 것을? 아니면 그대는 이것이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고 감히 주장할 것인가,

수많은 타격이 하나의 같은 순간에 이뤄지는 일이?

하지만 아주 자주 그 일은 일어났으며, 또 일어나야만 한다,

여러 지역에서 비가 오고 소나기가 내리는 만큼,

그만큼 하나의 같은 순간에 많은 낙뢰가 생겨야 하는 것이다.

끝으로, 왜 그는 신들의 신성한 성역과 자신의

영광스런 거처를 적대적인 벼락으로 쳐 흔들며,

신들의 잘 조성된 상들을 깨어버리고, 험한 상처로써

자신의 조상(彫像)들로부터 아름다움을 빼앗는가?

그리고 왜 그는 대개 높은 장소를 지향하며, 우리는 왜

산꼭대기에서 그의 불의 자취들을 가장 많이 보게 되는가?

(465∼4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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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이 일으키는 환각

 

그런데 이러한 질병들은 성공적이고 지극히 순탄한 사랑 속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반면에 불운하고 가망 없는 사랑 속에는,

그대가 눈의 빛을 가리고서도 파악할 수 있을,

헤아릴 수 없는 질병들이 있다. 그러니 미리 깨어 주의하고,

내가 가르친 방법에 따라, 걸려들지 않게 조심하는 편이 더 나으리라.

우리가 사랑의 그물 속에 던져지지 않도록 피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저 사냥망에 잡혔다가

빠져나오는 것, 베누스의 단단한 매듭을 끊고 나가는 것에 비하면.

하지만 그대가 얽히고 발이 묶였다 해도 그 적을

피할 수는 있다, 그대 스스로 자신을 막아서지 않는다면,

그리고 처음에 그대가 추구하고 원하는 그 여인의

몸이나 마음의 모든 흠들을 간과하지 않는다면.

왜냐하면 사람들은 대개 욕망에 눈멀어 이 일을 행하고,

여인들에게, 사실은 그들에게 속하지 않은 장점들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러 방식으로 변형되고 추한 여자들이

총애를 받고, 최고의 영예 속에 잘 사는 것을 우리는 본다.

하지만 사람마다 다른 이를 비웃고, 베누스의 마음에 들어보라고

촉구한다, 끔찍한 사랑에 괴루움을 당하고 있다 하여.

하지만 이 비참한 사람들은 자주 자신의 크나큰 질병은 돌아보지 않는다.

검은 여자는 '꿀 빛'이라고, 지저분하고 냄새나는 여자는 '꾸밈없다'고,

청회색 눈은 '팔라스의 눈빛'이라고, 뻣뻣하고 나뭇결 같은 머리칼은 '사슴 같다'고,

키 작고 왜소한 이는 '카리스 중 하나'라고, '알짜배기 순수 소금'이라고,

덩치 크고 우람한 이는 '감탄을 자아낸다, 위엄 있다' 한다.

말을 더듬고 잘 못하는 이는 '발음이 부정확한 편'이라고, 벙어리는 '얌전하다'고 한다.

밉살스럽고 성질 급한 수다쟁이는 '불같은' 것이 된다.

너무 말라서 살지도 못할 정도면 '호리호리한 내 사랑'이

된다. 기침으로 거의 죽은 여자는 '여리다' 한다.

통통하고 가슴 큰 여자는 '이악코스를 품에 안은 케레스 자신'이다.

들창코는 '여자 실레누스, 여자 사튀로스'고, 입술이 두꺼우면 '뽀뽀'라고 한다.

이런 종류의 다른 것을 다 말하려면 길고 긴 작업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녀에게 그대가 원하는 대로 용모의 영예를 갖추게 하라,

그녀의 온 지체에서 베누스의 힘이 솟아나도록.

그래도 진실로 다른 것들이 있다. 진실로 그녀 없이도 우리는 이전에 살아왔다.

진실로 그녀는 같은 것을 행한다, (우리도 그것을 안다), 못생긴 여자들이 하는 모든 것을.

또 그녀는 스스로 비참하게도 끔찍한 냄새를 피워낸다,

그래서 하녀들은 그녀를 피해 멀리 달아나고, 몰래 킥킥댄다.

하지만 내쳐진 구애자는 눈물을 흘리며 자주 문지방을

꽃들과 화환들로 덮고, 오만한 기둥들을

마요라나 향료로 문지르고, 불쌍하게 문들에 입을 맞춘다.

하지만 이제 허락을 얻어서 들어서는 그를 한 줄기

바람이 마주친다면, 그는 물러갈 예의 바른 핑계를 찾을 것이고,

오랫동안 궁리해온 가슴 깊은 데서 끌어낸 탄식은 추락해버릴 것이며,

거기서 자신의 우매함을 저주할 것이다, 자신이 그녀에게, 필멸의 존재에게

허용해 마땅한 것 이상의 많은 것을 부여했음을 그제야 볼 터이니.

이 사실을 우리의 베누스들도 모르지 않는다. 그런 만큼 더 그녀들은

최고의 노력을 경주하여 삶의 무대 뒤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숨긴다,

그들의 사랑 속에 붙잡아 묶어두기를 원하는 이들로부터.

공연스러운 일이다. 왜냐하면 그대는 정신으로써 모든 것을 빛으로

이끌어내고, 모든 웃음들을 탐색해낼 수 있으며,

만일 그녀가 예쁜 마음씨를 지녔고 혐오스럽지 않다면, 입장을 바꿔서

인간적인 흠들을 지나쳐 보내고 그것에 양보할 수 있을 터이니 말이다.

(340∼343쪽)

 

 - 루크레티우스,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제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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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의 해악

 

거기에 더하라, 그들이 힘을 소진하고 노역으로 쇠하여 간다는 사실을.

더하라, 다른 이의 고갯짓 아래 그들의 세월이 지나가버린다는 사실을.

그 사이 재산은 흘러가버리고, 바뷜로니아의 침구로 변한다.

그들의 의무는 소홀해지고, 평판은 동요하며 병들어버린다.

부드러운 발 아래 아름다운 시퀴온 구두가 웃음 짓는다.

이것은 당연하고, 또 거대한 초록빛 에메랄드가

금으로 둘러 박히며, 바다에서 난 자줏빛의 의상이 계속

쓸리고, 흐트러져 베누스의 땀을 마신다.

좋은 가문 조상들의 재산은 머리띠와 두건이 되고,

때로는 희랍식 외투로, 그리고 엘리스와 케오스 산(産) 옷감으로 바뀐다.

특별한 의상과 음식, 잔치가 있고, 놀이,

잦은 술잔들, 향수, 화관, 화한들이 마련된다,

헛되이. 왜냐하면 이 쾌락의 샘 한가운데서

어떤 쓴맛이 솟아서, 바로 꽃들 가운데서 목을 조르기 때문이다,

어쩌다 가책받은 정신 자체가, 스스로 나태하게 세월을 보내고 있다고,

삶이 방탕 속에 스러지고 있다고 후회하는 경우에나,

아니면 그녀가 말을 던져 모호함 속에 남겨놓았고,

그것이 갈망하는 가슴 깊이 박혀 불처럼 살아 오름으로 해서,

아니면 그녀가 눈길을 너무 자주 던지고 다른 이를 바라보는 듯

생각될 때, 그리고 그 얼굴에서 웃음의 흔적을 보았을 때에.

(338∼340쪽)

 

 - 루크레티우스,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제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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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에는 만족이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사랑을 피하는 사람에게 베누스의 결실이 결핍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는 피해 없는 즐거움을 누린다.

왜냐하면 확실히 여기서 나오는 쾌락은 사랑으로 비참해진 이들에게보다는

건전한 사람들에게 더 순수하기 때문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의 열정은

소유의 바로 그 순간에도 불확실한 방향으로 출렁이고,

확신하지 못하니 말이다, 무엇을 먼저 눈과 손으로 즐길지에 대하여.

그들은 자신들이 추구했던 바를 졸라 누르고, 그 육체에 고통을

가하며, 자주 이로 입술을 깨물고

입끼리 부딪게 한다. 이는 쾌감이 순수하지 않아서고,

무엇이든 그 대상 자체를 다치게 하도록 부추기는

자극이 숨어있어서다. 거기서 저 광기의 싹이 돋아난다.

하지만 베누스는 사랑 가운데서 이 고통을 가볍게 부수고,

달래주는 쾌락을 섞어 그 입을 재갈 물린다.

왜냐하면 거기에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열정을 발생시킨

같은 몸 안에서 불길이 다시 꺼질 수도 있으리라는 희망이.

하지만 자연이 모든 게 반대로 되도록 맞서 싸운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그걸 더 많이 가질수록

가슴이 더욱더 무서운 욕망으로 불타게 되는 유일한 대상이다.

왜냐하면, 먹을 것, 마실 것은 지체들 내부에서 흡수되고,

이것들은 정해진 부위에 자리 잡을 수 있어서,

물과 빵에 대한 이 욕구는 쉽사리 채워지기 때문이다.

반면에 사람의 얼굴과 아름다운 색으로부터는

아무것도 즐기도록 육체 안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섬세한

영상 외에는. 비참한 희망은 자주 그것을 바람에게서 취한다.

마치 목마른 사람이 꿈속에서 물 마시길 꾀하나, 그의 사지에서

열기를 꺼줄 수 있는 물은 주어지지 않고,

그는 음료의 영상을 좇으며 헛되이 애쓰고

타는 불길 가운데서 마시면서도 목마른 것처럼,

꼭 그렇게 베누스는 사랑 속에서 영상으로써 사랑에 빠진 자들을 희롱하고,

그들은 눈앞에 보면서도 자신들의 몸을 만족시키지 못하고,

손으로써 부드러운 사지에서 무엇 하나 벗겨내지

못한다, 확신 없이 온몸을 방황하면서.

마침내 사지로써 결합하여 청춘의 꽃을

즐기게 되고, 이제 육체가 즐거움을 예고하며,

여성의 밭에 베누스가 씨를 뿌릴 바로 그 순간에

그들은 탐욕스레 육체를 부딪고, 입의 타액을

서로 섞으며, 이로써 입을 누르고 숨을 헐떡인다,

헛되이. 왜냐하면 이들은 거기서 아무것도 벗겨낼 수 없으며,

몸 전체에서 아무것도 몸속으로 뚫고 들어가거나 떠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때때로 그들이 이것을 이루고자 원하는 듯, 또는 그러려 애쓰는 돗 보이기에 하는 말이다.

그 정도까지 그들은 열망으로써 베누스의 연합 속에 엉겨붙는다,

사지가 쾌감의 힘에 풀려 늘어진 동안에도.

 

결국 모여 있던 욕구가 힘줄에서 무너지게 되면,

잠깐 동안 열정의 광란에 작은 휴식이 생겨난다.

그런 후에 같은 광기가 되돌아오고, 저 광포함이 다시 찾아온다,

자신들이 스스로 닿기를 갈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 하는데,

그리고 자신들의 이 병을 이길 방도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 정도까지 불확실한 채로 그들은 보이지 않는 상처에 스러져 간다.

(336∼338쪽)

 

 - 루크레티우스,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제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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