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이란 갈수록 가벼워지는 것. 잊고 있다가 문득 가슴 저려지는 것이다.
 - 김수영(金秀映), <오래된 여행 가방> 중에서

 

 * * *

 

어젯밤에는 아주 색다른 꿈을 꾸었다. 너무나 생생해서 꿈에서 깨어난 뒤에도 한참이나 '꿈 속의 나'와 '실제의 나'를 몇 번씩이나 오가며 이런저런 일들을 되짚어 생각해 보았다.

 

꿈 속에서 나는 초등학교 6학년때의 담임 선생님을 만나고 있었다. 꿈에서 벌어지는 일은 늘 형식이 비슷하다. 언제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도 모른체 갑자기 '현실 같은 장면' 속으로 곧장 뛰어든다. 말하자면 글에서 상투적으로 만나는 수다스런 도입부나 영화가 상영되기 직전에 보게 되는 온갖 자질구레한 광고나 예고편이 전혀 없다는 얘기다.

 

선생님은 까마득한 옛날의 그때 그 모습 그대로였는데, 나를 비롯한 우리반 아이들 몇몇은 어른으로 자라나 있었다. 선생님께서는 나와 몇몇 친구들을 '무대' 위에 불러내어 무슨 '연극'을 지도해 주고 계셨다. 물론(?) 내가 그 연극의 주인공이었다. 나는 선생님께서 나한테 '주인공역'을 맡겨 주신 데 대해 속으로 무척이나 감개무량해 하면서 그 '연극 연습'을 내심 즐기고 있었다. 

 

꿈을 꾼 지도 벌써 반나절이나 훌쩍 지났기 때문에 '연극 내용'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도무지 다시 생각해 낼 수 없다. 선생님께서는 나와 함께 무대에 올라와 있던 다른 친구들 몇몇에게도 여러 차례 연기할 역할들에 대해 이것저것 세심하게 가르쳐 주셨다. 그런데도 도대체 그 연극 내용이 무엇인지 도통 모르겠다니 참 이상하다. 우리가 연습했던 구체적인 내용이 몇 번이고 수면 위로 불쑥 떠오를 듯하다가 이내 도로 잠겨버리니 도무지 그 연극의 주제를 다시 떠올리기란 앞으로도 영영 불가능할 듯하다.

 

꿈은 잠시 후에 장면이 바뀌었다. 물론 무대 위에서의 연기 연습이 언제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는 도통 모르는 상태인 채로. 꿈은 대개 그렇게 느닷없이 장면이 바뀌는 법이니 뭐 크게 상관할 일도 아니다. 바뀐 장면에서 선생님은 교무실 같기도 하고 일반 사무실 같기도 한 공간에서 홀로 책상 앞에 앉아 계셨다. 나 역시 마치 무슨 볼일이라도 있는 것처럼 홀로 당당하게 선생님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선생님은 아주 오래 전에도 실제로 그랬던 것처럼 아주 핸섬하면서도 다정다감한 모습으로 나를 반갑게 맞이해 주셨다. 분위기는 마냥 우호적이었고 사제지간의 온화한 정이 그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잠시 후에 다시 한번 장면이 바뀌었다. 이번엔 선생님께서 어떤 방으로 나를 이끌고 가셨다. 말하자면 그 방은 꿈 속의 배경으로는 연극 무대와 교무실에 이어 세 번째 장면이 되는 셈이다. 그런데 선생님과 함께 그 방으로 이동하는 과정은 왠지 '연극 연습'을 하다가 말고 '선생님과 나' 둘만 거기서 쏙 빠져나와 '따로' 만나는 상황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음식점의 넓은 홀에 딸린 방처럼 느껴지는 다소 널찍한 그 방으로 나를 데리고 들어가시다가 주춤하시더니 나만 먼저 방안으로 들어가 있으라고 말씀하셨다. 방 안은 앉은뱅이 밥상이 서너 개쯤 놓여진 것으로 보아 음식점인 듯한 느낌이 더욱 분명하게 들었다. 선생님께서는 이내 다시 돌아서서 홀 쪽으로 걸어나가셨다. 아마도 무슨 '먹을거리들'을 손수 챙겨오시려고 저러시는가 보다 하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잠시 후에 선생님께서는 우리가 흔히 '오봉'이라고 부르는 은색의 넓은 쟁반에다가 음식들을 이것 저것 잔뜩 담아오셨다. 수정과를 담은 그릇도 두어 개 보였던 듯하고, 맛있는 떡과 형체를 명확하게 구분하기 어려운 다른 먹거리들도 얼핏 보였다. 물론 선생님은 두 손으로 그 '오봉'을 단단히 붙들고 계셨기 때문에 그 방에 붙은 미닫이 문을 제대로 열 수가 없었다. 방 안에 앉아 있던 나는 빼꼼히 열린 문틈으로 선생님이 들어오시는 걸 보고 서둘러 문쪽으로 다가가 그 문을 좀 더 밀어서 열어젖혔다. 내 꿈은 딱 거기까지였다. 딱 그 순간에 그만 잠에서 깨고 말았다. 꿈의 마무리도 현실을 닮았다. 일부러 지어낸 일이 아니라면 어드메쯤에서 갑작스럽게 끝나버리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어젯밤에 꾸었던 꿈은 너무나 생생해서 꿈 속에서 느끼기에는 정말 '현실'인 줄 알았다. 그래서 새벽녘에 꿈에서 깬 뒤에도 침대에 누워 한참이나 꿈 속에서 만났던 선생님을 다시 상기하느라 한동안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였다. 선생님은 어쨌든 꿈 속에서 나를 전적으로 믿어주셨다. 그리고 나를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무엇이든지 다 도와줄 수 있다는 느낌을 갖게 만드는 특유의 따스함으로 나를 대해 주셨다. 아주 오랜 옛날에 내가 선생님으로부터 늘상 받았던 실제의 그 느낌 그대로였다.

 

그렇다고 선생님과 나 사이에 실제로 무슨 특별한 에피소드가 있었던 건 전혀 아니었다. 그때 내가 선생님으로부터 특별한 총애를 받아서 학급의 반장을 맡았다던가 하는 일은 더더욱 없었다. 지금 다시 생각해 봐도 그때 우리반에서 '반장'을 누가 맡았었는지는 도무지 모르겠다. 엄석대와 같은 아이가 있었는지도 별로 기억에 없다. 그런데 왜 나는 그 선생님 꿈을 꾸었을까. 그것도 무려 사십여 년 만에. 나는 그게 제일 궁금하다. 아주 오래 전에 선생님으로부터 느꼈던 막연하지만 확고했던 '선생님의 나에 대한 믿음'과 '서로에 대한 친밀감'이 꿈 속에서 장소를 세 번씩이나 옮겨 가는 동안에도 전혀 약화되지 않고 지속적이고도 단단한 상태로 유지된 채 그게 핵심적인 주제가 되어 꿈 속에서 다시 나타난다는 사실이 그저 놀랍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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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등학교 졸업 앨범 중 '꿈 속에서도 반가웠던' 담임선생님의 모습이 담긴 페이지

 

 

 - 초등학교 때 담임 선생님 중 진짜로 잊지 못할 선생님은 4학년 때 우릴 가르치셨던 '이용 선생님'이다. 이 분과의 추억담을 이야기하자면 적잖은 분량의 페이퍼를 한참이나 써야 할 지도 모르겠다. 어젯밤 꿈에 만났던 6학년때 담임 선생님 때문에 다시금 꿈같던 4학년때를 떠올려 보게 된다. 그때의 아름다운 추억들과 40여 년 만에 선생님을 '분교'가 있던 우리 마을로 초대해서 다시 만났던 일들에 대해 언젠가는 꼭 한번 글로 옮겨봤으면 싶다.

('분교' 졸업사진. 산골 마을에 살았던 우리는 4학년까지만 다니고 5학년 부터는 멀리 떨어진 읍내로 진학했다.)

 

 

오래된 여행가방

    김수영(金秀映)

스무살이 될 무렵 나의 꿈은 주머니가 많이 달린 여행가방과 펠리컨 만년필을 갖는 것이었다. 만년필은 주머니 속에 넣어두고 낯선 곳에서 한번씩 꺼내 엽서를 쓰는 것.

만년필은 잃어버렸고, 그것들을 사준 멋쟁이 이모부는 회갑을 넘기자 한 달 만에 돌아가셨다. 아이를 낳고 먼 섬에 있는 친구나, 소풍날 빈방에 홀로 남겨진 내 짝 홍도, 애인도 아니면서 삼년 동안 편지를 주고받은 남자, 머나먼 이국 땅에서 생을 마감한 삼촌···

추억이란 갈수록 가벼워지는 것. 잊고 있다가 문득 가슴 저려지는 것이다.

이따금 다락 구석에서 먼지만 풀썩이는 낡은 가방을 꺼낼 때마다 나를 태운 기차는 자그락거리며 침목을 밟고 간다. 그러나 이제 기억하지 못한다. 주워온 돌들은 어느 강에서 온 것인지, 곱게 말린 꽃들은 어느 들판에서 왔는지.

어느 외딴 간이역에서 빈자리를 남긴 채 내려버린 세월들. 저 길이 나를 잠시 내려놓은 것인지, 외길로 뻗어 있는 레일을 보며 곰곰 생각해 본다. 나는 혼자이고 이제 어디로든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 샤를 구노의 오페라 <로미오와 줄리엣>에 나오는 '꿈속에서 살고 싶어라' 동영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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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1-21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가끔 초등학생, 중학생 교실에 있는 꿈을 꿔요. 지금은 만나지 않지만, 동급생들이 나오기도 합니다. 점점 나이 먹을수록 과거에 대한 디테일한 것들이 조금씩 희미해져가는 것 같습니다.

oren 2016-01-15 18:24   좋아요 0 | URL
아하... cyrus 님께서도 초딩, 중딩 시절을 보냈던 교실에 가끔씩 가시는군요. 꿈속에서 말이지요. 정작 크고 나면 우리는 꿈에도 그리는 그 교실을 다시는 영영 가보지 못하는 듯해요. ㅎㅎ

프레이야 2016-01-15 17: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흑백 추억이 방울방울, 훈훈한 사진입니다. 초등 6학년 사진은 아직 저도 가지고 있어요. 그때의 교실과 운동장, 나무복도가 생각나네요

oren 2016-01-15 18:26   좋아요 0 | URL
어린 시절에 우리가 보낸 풍경들도 분명 총천연색이었을 듯한데, 유독 흑백사진으로 다시 바라볼 때 더더욱 정겹게 다가오는 건 왜일까, 그게 문득 궁금해지네요...

프레이야 2016-01-15 18:43   좋아요 1 | URL
문득. 흑백사진을 추구하는 옆지기말을 빌자면 색을 뺀 것이 사물의 본질이라 생각한대요. 관념적이긴 해도 일면 공감되구요. 직관적으로요. 우리의 기억이란 것도 그런 성질을 띄는 게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oren 2016-01-15 23:37   좋아요 1 | URL
프레이야 님의 예사롭지 않은 댓글을 읽으니 뭔가 조금만 더 궁리해 보면 사물의 본질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느낌마저 생깁니다. `물질과 기억`에 대해 남다른 심오한 철학을 펼쳤던 앙리 베르그송의 글들도 (비록 어렴풋하게나마) 문득 새삼스럽게 떠오르고요. 그게 어떤 내용들이었을까 무척이나 궁금해서 오늘 다시금 찾아본 대목들을 덧붙여 봅니다.
* * *
유년, 청년, 장년, 노년은 단순히 정신의 시각, 즉 한 과정의 연속성을 따라서 밖으로부터 우리에 대해 상상하는 가능적 정지들일 뿐이다. 반대로 유년, 청년, 장년 그리고 노년을 [생명적] 전개의 전체를 이루는 부분들로 생각해 보자. 그것들은 실재적 정지들이 될 것이고 우리는 더 이상 그 전개가 어떻게 가능한지를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정지들이 병렬되어도 결코 운동과 동등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생성된 것을 가지고 어떻게 생성되고 있는 것을 재구성할 수 있겠는가? 예를 들면 일단 사물처럼 놓인 유년에서, 가정상 그것만을 놓았는데, 어떻게 청년으로 넘어갈 수 있겠는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우리의 습관적인 말하기 방식은 습관적인 사유 방식을 따르기 때문에, 우리를 진정한 논리적 곤경에 처하게 한다. 거기서 우리는 별 걱정을 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거기서 빠져나오는 것이 언제나 허용되어 있다고 막연하게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는 우리 지성의 영화적 습관들을 거부하기만 하면 될 것이다. 우리가 <어린아이가 어른이 된다>라고 말할 때 그 표현이 글자 그대로의 의미를 너무 깊이 파고들지 않도록 주의하자. 우리는 <어린아이>라는 주체를 놓을 떄 <성인>이라는 속성이 아직 적합하지 않으며, <성인>이라는 속성을 진술할 때 그것은 이미 <어린아이>라는 주체에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다고 생각할 것이다. 유년에서 장년기로의 이행으로 구성되는 실재는 우리를 빠져나간다. 우리는 <어린아이>와 <성인>이라는 상상적 정지들만을 가진다.

오거서 2016-01-15 2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쩜 … 저와 같은 반이었네요. 사진 속 장면도 똑같다는 생각이 들지만, 담임선생님의 모습이 다르네요 ^^;

oren 2016-01-15 23:51   좋아요 1 | URL
아하... 五車書 님도 6학년때 4반 학생이셨군요. ㅎㅎ
아마도 제 또래들이 간직하고 있는 옛날 초등학교 졸업 앨범들은 전국적으로도 별 차이가 없지 않을까 싶어요. 저 당시만 하더라도 제가 살던 시골엔 전기조차 들어오지 않아서 `호롱불`을 켜고 앉은뱅이 책상에서 공부할 때였고, 그 유명한 `새마을 운동`이 일어난 지도 고작 서너 해 밖에 지나지 않았을 때였어요... 그러고 보니 참으로 까마득한 옛날이다 싶은 생각도 드네요..

오거서 2016-01-16 00:09   좋아요 0 | URL
저한테는 사진 한 장 남았습니다. 앨범이 없어요. 그래서 빛바랜 사진의 느낌으로 그 당시 친구들의 모습을 바라본답니다.

프레이야 2016-01-16 00:29   좋아요 1 | URL
두 분 4반이셨어요? 저는 7반이었습니다. 조금 떨어져 있었네요ㅎㅎ

oren 2016-01-16 01:19   좋아요 0 | URL
7반까지 있었다니... 프레이야 님께서는 굉장히 큰 학교를 다니셨군요, 혹은 나오셨군요. ㅎㅎ

프레이야 2016-01-16 10:34   좋아요 0 | URL
9반까지 있었더랬죠. 한 반에 80명이 넘게요. 오전반 오후반 나눠 수업하기도 했던 기억이‥

oren 2016-01-16 13:01   좋아요 0 | URL
9반까지 있었다구요? 그리고 한 반에 80명이 넘게요? 게다가 오전반 오후반까지도 있었다구요?
정말 `인구폭발`이 따로 없던 시절, 프레이야 님께선 그 한복판에서 학교를 다니신 셈이군요.
저는 초등학교 4학년때까지는 `분교`를 다녔기 때문에 매년 같은 친구들과 늘 `한반`이었어요. 1학년부터 4학년까지 다닌 학교는 전교생 숫자라고 해봐야 고작 90여 명에 불과했으니까요. 그래도 시골 마을에 있는 학교 치고는 제법 큰 학교였던 셈이지요. 우리 마을에서 시오리(10리에 5리를 더한 거리) 가까이 떨어진 읍내로 진학해서 4반까지 있는 걸 보고는 굉장히 놀랬었죠.

yamoo 2016-01-21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수영의 글이 참 마음에 와 닿네요~

오렌 님의 꿈 이야기 재밌게 잘 봤어요^^

추억은 방붕방울이 생각나게 하는 글입니다.ㅎ

oren 2016-01-21 15:51   좋아요 0 | URL
추억은 늘상 내 몸 속 어디엔가 깊숙하게 자리잡고 있는 게 분명한데, 그게 갈수록 가벼워져서 나도 모르게 차츰 바람처럼 빠져 나가면서 어디론가 영영 날아가 버린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안타까운 일이라 여겨져요. 그래서 우리가 내내 잊고 지내다가도, 그걸 다시 발견하는 순간, 그 오랜 시간 동안 아무런 말도 없이 내 몸 한켠에서 잔뜩 웅크린 채, 자신을 불러주기만 애타게 바라던 그 녀석을 다시 알아차리게 되면서, 그 녀석이 너무나 안쓰럽고 또 그 녀석을 너무 늦게 찾아낸 내가 너무나 무심하다 싶어서, 문득 나도 모르게 가슴이 저려올 수밖에 없겠다 싶었어요. 김수영 시인의 저 싯구를 읽으면서 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