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자신 속에 숨어 있는 여러 종류의 편견들을 깨닫고 놀라게 되는 책


시간이 지나간다. 저만치 흘러가는 시간의 아득한 심연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현기증부터 난다. 시작도 끝도 없는 이 '시간'을 두고 하필 이 즈음에 굳이 '전에' '있었던 것' 혹은 '앞으로' '있을 것'이라고 기필코 '둘로 갈라놓고 싶은 욕망'을 억누르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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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가 간과한 '엄청난 시간적 규모에 대한 이해'


인류의 소박한 자존심은 역사 속에서 과학적 진보를 통해 두 차례나 큰 상처를 입었다. 첫째로 갈릴레이의 지동설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광대무변한 우주에서 보잘것없는 작은 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밝혀내어 지구 중심의 우주관을 버리게 했다. ······ 둘째로 생물학적 연구(진화론)는 인간이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진화의 산물에 불과함을 밝혀냄으로써 성서의 특별 창조설에 따라 지상에서 우리가 당연시하던 인간의 특권을 박탈했다.

(이에 덧붙여 역사상 가장 도발적인 선언에서 프로이트는 자신이 무의식에 대한 연구를 통해 이성적 존재라는 인간의 마지막 자부심과 위안마저 무너뜨려버렸다고 주장했다. 곧 우리 인간이 비록 저급한 유인원에서 진화했을지라도 사고할 줄 아는 이성적 존재인 줄 알았는데 무의식에 지배되는 하찮은 존재에 불과한 것으로 밝혀져 인간의 지위가 또다시 추락하게 되었다.)


프로이트는 인류의 지배 영역인 지구가 우주에서 지극히 제한적인 공간에 불과하다는 깨달음(갈릴레이 혁명)과 인간이 모든 '하등' 피조물과 물리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깨달음(다윈의 진화론)을 과학사적 양대 사건으로 언급했다. 그러나 그는 갈릴레이 혁명과 다윈의 진화론을 연결해주는 중요한 사건을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인간이 시간적으로도 아주 미미한 존재에 불과하다는 지질학적 발견을 간과했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사고를 전환한 과학사적 주요 사건에서 지구 나이의 엄청난 시간적 규모에 대한 이해, 곧 "심원한 시간"[deep time, 존 맥피(John Mcphee)의 멋진 표현]의 발견의 중요성을 간과했다. 지구가 생성된 지 며칠 이내에 인간의 의지에 맡겨진다는 성서 기록에 따른 젊은(생성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지구관은 지상에서 인간의 우월적 지위를 뒷받침해주는 편리한 시간 개겸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장구한 지구의 나이에 대한 관념, 그리고 장구한 세월의 마지막 아주 짧은 순간에 인간이 출현했다는 생각은 지상에서 인간의 지위에 얼마나 커다란 위협이 되었는가! 소설가 마크 트웨인은 장구한 지구 나이에 비추어 찰나적인 존재인 인간에 대한 위안을 찾기 어려워하면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인류가 지구상에 출현한 지는 겨우 3만 2000년밖에 되지 않는다. 인류의 출현 이전에 수억 년 동안 지구가 존재했다는 사실은 지구가 인간이 아닌 그 자체를 위해 존재한다는 증거가 되리라고 가정해보는데, 나 역시 잘 알지는 못한다. 만약 현재 에펠탑의 높이가 지구가 생성된 이후의 시간의 길이를 가리킨다면, 인간이 출현한 때부터 지금까지의 시간은 에펠탑 꼭대기의 뾰족탑 표면에 칠한 페인트 두께에 불과하다. 에펠탑 꼭대기에 페인트를 칠하기 위해 탑을 세웠다고 말할 사람이 있을까 의심해보지만, 나 역시 잘 아는 바는 아니다.

 

(19∼21쪽)



 


손톱을 한 번만 밀어버리면


심원한 시간을 가리키는 숫자의 산술적인 이해는 그다지 어려워 보이지 않는다. 수십억이라는 수는 1뒤에 0이 아홉 개 붙는 큰 수라는 것쯤이야 간단히 알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수십억 년의 시간을 실질적으로 파악하는 일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심원한 시간은 실감하기 어려운 장구한 세월이기 때문에 우리는 단지 은유를 통해서만 그것을 가늠해볼 수 있다. 지질학자들은 사람들이 심원한 시간의 길이를 헤아려볼 수 있도록 다양한 비유를 들어 왔다. 예를 들어 지질학적 시간의 전체 기간을 1마일로 나타내보면 인간의 역사는 끄트머리의 몇 인치에 불과하며, 1년으로 압축하여 환산해보면 현생 인류의 조상인 슬기사람(Homo sapiens)은 제야의 종소리가 울려 퍼지기 몇 초 전에야 출현했다. ······ 지질학자 존 맥피는 『분지와 산지(Basin and Range)』라는 지질학 대중 서적에서 지질학적 시간을 다음과 같이 아주 흥미롭게 비유하였다. 지구의 나이를 1야드(yard)의 길이로 간주했을 때 손톱 다듬는 줄로 가운뎃손가락의 손톱을 한 번만 밀어버리면 인간의 역사는 모두 지워진다.
(22∼23쪽)

 

 

 


편협한 관점


편협한 관점은 지식인에게 저주나 다름없다. 학자들이 합의를 통해 심원한 시간을 수용하게 된 시기는 17세기 중반부터 19세기 초 사이다. 로시(Rossi)는 이 시기에 일어난 변화를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후크(Hooke)가 활동하던 시대의 사람들은 지구 역사를 6,000년으로 생각했고, 칸트가 활동하던 시대의 사람들은 지구 역사가 수백만 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인식했다." (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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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놀라운 사실


모든 동물과 모든 식물이 모든 시간과 공간을 통해 무리 속의 무리로 서로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189쪽)
 

 

 

 


 


막대한 시간의 경과에 대하여


지구의 많은 지층에는 이름이 붙여져 있고(일부는 웨일스와 그 고대 부족들의 이름을 따서 캄브리아기와 오르도비스기, 실루리아기라고 명명되었다) 연대도 추정되어 있었다. 역사의 80퍼센트가 한때 메말랐던 것으로 여겨지는 선캄브리아기 속에 있다. 대부분의 화석이 빽빽이 들어차 있는 과거의 60퍼센트 정도는 인간의 관점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시간의 경과를 나타낸다.(345쪽)

 

 

 


느린 시계

밤이 지나고 낮이 올 때 금속 막대의 팽창과 수축으로 움직이는, 비틀리는 진자에 의해 가동되는 이른바 '느린 시계 The Clock of Long Now'를 만드는 계획이 외딴 사막에서 진행되고 있다. 이 시계는 한번 똑딱거리는 데 1년, 괘종을 한 번 치는 데 100년, 뻐꾸기가 튀어나오는 데 1000년이 걸릴 것이다. 지질학에서 그 시계는 그저 스톱워치에 지나지 않으며, 긴 현재는 우리 행성의 이야기에서 순간에 불과하다.(346쪽)

 

 

 


무대 장면의 변화

진화의 연극은 너무나 오랫동안 장기 공연을 해왔기 때문에 그 무대 장면의 변화가 불가피하다. 5억 년 전에는 공기중에 지금보다 20배나 많은 이산화탄소가 있었다. 2억 년 뒤 이산화탄소의 양이 줄어들었을 때 역전된 '온실효과'가 일어났다. ...... 심지어 지구의 하루에 해당하는 시간도 변해왔다. 달은 그 이웃의 자전에너지를 약화시키기 때문에, 지구의 자전 속도가 느려진다. 산호는 매일 변동하는 활동과 연간 변동하는 활동을 하는데, 4억 년 전부터 만들어진 성장 고리는 당시에는 1년이 400일이었음을 말해준다.
(40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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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더 살거나 덜 살거나 하는 문제 따위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하되, 히파니스 강에는 하루밖에 살지 않는 작은 짐승이 있다고 하였다. 아침 8시에 죽는 것은 청춘에 죽는 것이고, 저녁 5시에 죽는 것은 노쇠해서 죽는 것이다. 이 순간적인 지속을 가지고 행이나 불행이라 하며 고찰하는 것을 누가 비웃지 않을 것인가? 우리 인생을 영겁에 비교해 보면, 그보다도 산·강물·별·나무, 또는 어떤 동물에 비교해 보면, 좀더 살거나 덜 살거나 하는 문제 따위는 똑같이 가소로운 일이다.
(10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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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12-30 1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구가 태어난 나이를 헤아리면
시간도 숫자도 참 부질없어요.

우리는 우리 삶을 아름답게 누리면 넉넉하리라 느껴요.

oren 2013-12-30 18:30   좋아요 0 | URL
기나긴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끊김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지금 이 순간 이 지구별에서 우리의 삶을 누리고 있다고 생각하면 매순간이 기적적이다 싶고, 또 그만큼 매순간을 아름답게 살아야겠다 싶어요.

마녀고양이 2013-12-30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 해를 하루 남긴 이 시간에서,
저는 우주의 손톱만큼도 안 되는 시간을 가지고 전전긍긍 살고 있네요.
그래도, 제게는 이 시간만이 주어져 있으니, 겸손하고 감사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오렌님 페이퍼를 읽으며 합니다.

건강하고 평온한 새해되셔요.

oren 2013-12-31 15:07   좋아요 0 | URL
마고님께서도 매순간 즐거운 시간 되시길 바랄께요..
그리고 새해 바라시는 일들도 모두 다 이뤼지길 바랄께요~

꼼쥐 2013-12-31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부질없는 짓이지만 정해놓은 1년이 다 지나가는 이맘때면 시간을 초단위로 재게 되네요.

새해에도 늘 행복하시고 책과 함께 즐거운 시간 되시길...^^

oren 2013-12-31 15:17   좋아요 0 | URL
꼼쥐 님 반갑습니다. 하루 하루가 새날인데 되돌아보면 언제나 늘 그날 그날에 빠져 살아온 듯해요. 늘'처음처럼' 살지 못했음을 안타까워하는만큼 하루 하루를 새날처럼 맞이할 수 있기를 함께 소망해 봅니다. 꼼쥐 님도 새해엔 더욱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