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기도에서 시작됩니다
마더 데레사 지음, 앤서니 스턴 엮음, 이해인 옮김 / 황금가지

사랑을 채우는 비움의 기도

들어가면서; 나를 비춰주는 깨침
다양한 종류의 책이 있지만 크게 보면 책과 독자 사이의 거리가 유지되는 책과 그렇지 않은 책으로 나뉠 수 있다. 거리가 유지되는 책은 주로 합리적 이성에 근거하여 논리적인 검토를 하고 장단점을 균형있게 살펴보는 것이 중심이 되는 학문적 성향의 책들이다. 이런 책들은 가능한 한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관건이 되고 주로 설득과 논쟁의 세계에 뿌리를 둔다. 그리고 삶의 구체적인 문제와의 간격을 줄이기 위해서는 각별한 노력이 요구된다.
하지만 이런 거리를 유지할 수 없게 하고 그 책의 주장이나 생각에 대해 논리적으로 분석해 나갈 수 있는 틈을 주지 않는 종류의 책들이 있다. 이런 책들은 내면 깊숙한 곳을 향해 피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지고 독자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한다. 이런 책들은 자신을 향한 질문의 대답을 찾아가는 '자기 성찰'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궁행(躬行)'의 세계에 뿌리를 둔다.
기도에 대한 마더 테레사의 글들을 모아놓은 "모든 것은 기도에서 시작됩니다"가 바로 책과 나 사이의 틈을 허락하지 않고 나 자신을 비춰주는 거울과 같은 책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에 대한 '다시-보기{review)'에는 줄 간과 여백에 비춰진 자화상과 나를 붙잡은 질문들과 깨달음들이 뒤엉켜 있을 수밖에 없다. 이제 이 책의 내용과 함께 어우러진 '자기 성찰'과 '자문자답'을 재음미(review)해보자 한다.


몸 글

기도의 두 가지 무늬: "기도만 하기"와 "기도로 하기"
이 책의 내용은 엮은이 스스로 이야기하듯이 "기도를 더 많이 하십시오"라는 마더 테레사의 "기본적인 권고와 요청을 좀더 자세하게 발전시킨" 내용이다.(p. 18)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 가장 필요한 것이 희생, 봉사, 성실, 겸손, 절제, 이웃 사랑 등이 아니라 기도라는 것이다. 모든 일을 기도로 시작해야할 필요성과 그 필요성의 의미, 기도로 모든 삶을 살아가는 방법, 기도의 열매 곧 기도의 목적은 무엇인지 등에 대한 고백적 잠언과 시들을 통해서 "기도를 더 많이 하십시오"라는 권고와 "모든 것은 기도에서 시작됩니다"라는 고백의 의미를 풀어주고 있다.
어떤 일을 이뤄가는 방법으로써 기도를 제안하는 것은 기독교 전통 내에서 무척 흔한 일이다. 우리 인간은 연약하고 악하기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모든 일은 하나님께 의지해서 이뤄가야 한다는 신앙, 모든 일은 기도를 통해서 해나가야 하고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끝내야 한다는 가르침은 교회 내에서 너무나 흔하게 들을 수 있다. 그리고 이런 가르침을 따라서 한국 개신교 교회에서는 새벽기도, 금식기도, 철야기도, 릴레이 기도 등의 다양한 기도에 열중하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하지만 기도에 대한 이런 열심과 마더 테레사가 권하는 기도는 너무나 큰 차이를 지니고 있다. 한국 개신교의 기도는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축복을 기도라는 만능키를 통해서 소유하고자 하는 집착의 성향이 너무나 강한 것 같다. 좋은 대학, 좋은 직장, 좋은 배우자, 건강, 장수 등을 구하고 어떤 어려움이나 고통도 피해가려는 욕망을 토해내는 기도가 가득해 있는 것 같다. 또한 어떤 일을 결정함에 있어서도 자기 책임과 문제를 회피하려는 욕망으로 기도에 의지하고 내가 직접 돕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도와주시기만 바라는 경향이 강한 것 같다. 아니 나 자신의 기도가 주로 고통에 대한 두려움과 물질적 풍요에 대한 이기적 집착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하지만 마더 테레사가 권하는 기도는 더 많이 사랑하기 위한 '자기 비움'의 기도이다. 그녀는 "우리가 기도하면 사랑할 수 있고, 사랑하면 비로소 봉사할 수 있"(p. 21)고 "하느님과 함께 우리가 행복하다는 뜻은 그분처럼 사랑하는 것, 그분처럼 봉사하는 것, 그분처럼 내어주는 것, 그분처럼 섬기는 것"(p. 138)이라고 고백한다. 그녀가 권하는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처럼 철저하게 자신을 비우고 다 내어줄 수 있는 삶의 실천을 위해서 필요한 기도이자 그런 삶에 대한 순수한 열망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는 무엇인가를 달라고 미친 듯이 졸라대는 부르짖음이 아니라 자신의 두려움과 불안, 욕심과 집착을 비워내는 침묵이고 그 자리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을 그득히 채우실 것을 믿는 기다림이며 고통 받는 사람 곁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눈물에 공명하는 실천이다.

부르짖음에서 침묵으로
마더 테레사는 이렇게 더 많이 사랑하려는 기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침묵이라고 강조한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의 사랑스런 현존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마음의 침묵이 필요하고 그 침묵을 통해서만 기도가 샘솟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 마음속에 다른 것들이 가득하면 절대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걱정과 두려움, 분주함과 서두름은 침묵 속에 깃드는 하나님의 현존을 앗아가기 때문이다.
침묵을 통해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그분의 음성을 듣는 것은 우리의 기도에 전제된 무명(無明)의 어리석음을 드러내준다. 중세의 신비가 마에스트 에크하르트는 이 망상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우리가 우리 자신 밖에서 무엇을 얻거나 받으면 이는 옳지 않다. 우리는 하느님을 자기 자신 밖에 있는 것으로 파악하거나 간주해서는 안되고, 자기 자신의 것으로 그리고 자신 안에 있는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하느님을 위해서든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든 혹은 자기 밖의 그 어떤 것을 위해서든, 어떤 목적을 위해 봉사하거나 일해서도 안된다. 오직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자신의 존재와 자신의 생명을 위해서 일해야 한다. 어떤 순진한 사람들은 하느님은 저기 계시고 자기들은 여기 있는 것처럼 생각해야 한다고 망상을 한다. 그렇지 않다. 하느님과 나, 우리는 하나다."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이곳에 임해주시라고, 능력을 허락해달라고 애타게 부르짖는 외침은 늘 하나님과 나 사이의 간격을 전제한다. 아직 임하지 않은 하나님의 부재, 아직 능력을 부어주지 않은 하나님의 능력의 부재. 하지만 하나님 밖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없다.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은 것을 요구하실 리도 없다. 단지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이 그것을 깨닫지 못하게 할뿐이다.
침묵은 이미 임재해 계신 하나님과 이미 가득 채워주신 하나님의 능력이 그대로 드러날 수 있도록 두려움과 불안, 분주함과 성급함 곧 나에 대한 집착을 비우는 정화이다. 침묵은 결국 일상의 모든 순간들, 모든 터, 모든 사건들 속에 이미 그득하게 임재해 있는 하나님을 발견하게 하는 무위(無爲)의 '깨인 시선'이 움트는 터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욕망과 집착에 뿌리를 둔 부르짖음을 잠잠케 하고 침묵 속에서 진득하게 기다려야만 한다. 그렇게 할 때 잔잔한 수면 위에 온 세상이 어떤 왜곡도 없이 맑게 비춰지듯 하나님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날 것이다.

기도를 잃은 시대: "사랑없이 일하는 것은 노예 행위와 같다"(p. 24)
기도를 가장 필요한 것으로 권하는 마더 테레사의 마음은 기도를 잃어버린 우리 시대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준다. 르네상스 시대와 계몽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우리 인류의 문명은 기도를 미신이나 주술쯤으로 치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인류는 합리적 이성과 과학적 사고에 힘입어 놀라운 기술문명을 발전시켰다. 하지만 파괴된 생태계로 인한 지구의 위기, 과식으로 병들어 죽어가는 사람들과 기아로 죽어가는 사람들이 함께 공존하는 불의 등으로 그 발전과는 반비례로 오히려 지구상의 고통과 문제는 더욱 커지고 심각해져 가고 있다.
이 모든 위기와 문제들의 중요한 원인 중에 하나는 '기도의 상실'로 볼 수 있다. 바로 기도를 잃은 것은 침묵의 기도를 통해서만 우리 안에 샘솟았던 사랑을 상실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 사랑은 이웃과 온 우주의 모든 존재를 향한 사랑이었다. 그 하나됨과 사랑을 상실하였기 때문에 놀랍게 발전한 문명의 힘이 더욱 파괴적으로 사용될 수밖에 없었다는 통찰력을 부정할 수 있을까?
그녀의 말처럼 "사랑없이 일하는 것을 노예 행위와 같"고 "물질이 우리의 주인이 되었을 때 우리는 참으로 빈곤한 사람들(p. 31)"이 되는 것이다. 물질적 풍요와 이기심에 붙들린 노예가 되고 넘치는 풍요 속에서 오히려 절망하게 되는 것이다. 기도를 잃은 시대 속에서 우리는 가족에게 필요한 물질에만 고착되기 쉽다. 가족과 친구, 이웃 그리고 자연의 모든 존재들에게 충분한 사랑을 주지 못하는 결핍에 대해 깊이 고민하는 마음을 만나기가 너무나 어려워졌다. 그녀는 우리 시대가 바로 사랑에 굶주려 있고 그 무엇보다 사랑받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큰 고통이고 가장 비참한 가난이라고 가슴 아파한다. 그리고 이런 시대 속에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물질적 풍요가 아니라 사랑이라고 강조한다. 우리 모두는 사랑하고 사랑받는 고귀한 일을 위해서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사랑의 회복으로서의 구원과 관용
한국 개신교의 주류를 이루는 보수적 정통주의의 구원은 예수그리스도를 하나님이면서 인간인 절대유일의 구원자로 믿어 천국에 들어가 영생을 소유하는 것이 핵심을 이루고 있다. 물론 성화의 과정이나 예수의 본을 따르는 것을 강조하지만 그럼에도 일반 신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에 대한 믿음과 영생임을 부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마더 테레사는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무엇보다 기도해야 한다고 말한다.(p. 37) 하나님을 사랑하고 기도하는 것을 통해 이뤄지는 구원은 한국 개신교에 주류를 이루고 있는 구원관과 너무나 다른 차원을 드러낸다. 그녀가 말하는 구원에는 절대 유일의 구세주 예수에 대한 믿음이나 영생에 대한 언급은 찾아볼 수가 없다. 아니 이 책 전체에서 예수나 영생에 대한 내용을 읽은 기억이 없다. 그녀가 강조하는 구원은 하나님처럼 사랑하게 되는 것일 뿐이다.
그녀는 "기도가 주님과의 일치를 가능하게 하고 이웃에게까지 넘쳐 흘러가게 하는 힘"이고 "우리가 하는 애덕의 일은 하느님 안에서 흘러나오는 그 사랑을 이웃에게 전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고 한다.(p. 160)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얼마나 많이 사랑했는가를 물으시고, 그분의 사랑을 위해서 우리가 최선을 다하는 그것만이 중요하다(p. 162)고 한다. 그녀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되는 행복과 해방을 강조하고 있을 뿐이다. 
이런 구원에서는 타종교인이나 신앙이 다른 사람들이 구원받을 수 없어도 자신의 신앙과 구원관만 고집하는 이기적 집착이 부정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에게 종교의 다름은 크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어느 종교이든, 하나님을 어떻게 부르든 그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 자신의 삶을 내어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또한 이런 구원에서는 영생을 소유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의 사랑에 얼마나 가까워지는 매 순간의 과정이 중요하고 그 사랑 때문에 내 영생을 포기할 수 있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에 일치되는 해방의 구원은 일체의 차별과 비교로부터 자유함을 선사한다. 그녀는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하느냐가 중요하고,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 앞에서 아무것도 사소한 것이란 없다고 강조한다. 특히 마음에 남는 것은 "거창한 일들을 할 수 있는 이들은 많지만 사소한 일들을 즐겨하는 이들은 별로 많지 않다(p. 163)"는 그녀의 통찰력이다. 자기 과시욕과 비교 우위에 대한 어리석은 집착은 무의식 깊이 뿌리내려 우리를 지배하곤 한다. 그 결과 왜 하느냐 보다는 남보다 얼마나 잘하느냐에 집착하게 되고 목적을 망각하게 된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사랑의 이유이다. 사랑으로 행할 때에만 나를 비워 남을 채워주는 십자가가 행복이 될 수 있고, 사소한 것일지라도 모든 것을 주기 때문에 실패하지 않을 수 있다. 

아직도 남아 있는 간격
마더 테레사의 고백과 권고가 내 영혼 깊은 곳을 울려오고 너무나 깊은 통찰력으로 내 삶을 되돌아보게 하며 나로 하여금 기도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녀의 영성 가운데는 내가 완전히 동화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그녀의 기도와 영성이 하나님의 사랑과 일치되는 것을 추구하면서도 여전히 하나님과의 간격을 유지하고 있는 부분이다. "그분을 기쁘시게 할 일만 생각(p. 116)"한다고 하거나 "주님은....여러분의 믿음을 요구하십니다(p. 128)"라고 하는 등의 표현들에는 하나님과 나의 차이, 하나님에 대한 대상화가 늘 남아있다. 물론 이것은 단순히 표현상의 문제일 수 있지만 그 간격에 대해서 보다 명확하게 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 즉, 앞서 언급하였듯이 내 안에 이미 하나님이 계신다면 그분을 기쁘게 하는 것은 곧 나와 내 이웃를 기쁘게 하는 것이고 믿음은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일어나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자가 본질과 본성에서 성부와 하나이듯이 그대도 본질과 본성에서 그와 하나이며, 성부가 자기 자신 안에 모든 것을 가지고 있듯이 그대도 그대 안에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무슨 일이든 그대가 그대 자신의 것으로부터 하지 않으면 그 일들은 하느님 앞에서 모두 죽은 것이다"라는 에크하르트의 말처럼 내 밖의 무엇인가에 의한 것은 참된 생명이 아니다. 물론 하나님과 내가 완전히 일치되는 차원이 이뤄지기 전까지는 그 간격이 남아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간격이 하나의 완성으로 고착되어서는 안되고 끊임없이 그 간격을 좁혀가야 한다. 즉, 그 간격은 늘 궁극적인 일치를 향한 긴장 속에 유지되야 한다는 것이다.


나가는 글: 비움의 기도를 향하여

하나님의 사랑에 일치되기 위한 비움의 기도는 결국에는 내 기도의 자리를 되돌아 보게 한다. 인간의 기도가 고통을 피하려는 바람, 좋은 일이 생기기를 바라는 열망에서 벗어나는 것은 쉽지 않고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다보면 그 욕망이 정화되곤 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위한 기도에 그렇게도 인색했던 예수님을 따라 살려는 기독인, 곧 "예수 따름이"의 기도가 지향해야할 방향을 명확히 하는 것은 중요하다. 자연스럽지만 미숙한 기도에서 피와 땀을 흘리지만 참된 자유를 누리는 겟세마네의 기도로, 곧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자라나야 한다는 것이다.
고통과 주검, 실패를 피하려 하기보다는 당당히 마주하여 생명의 씨앗으로, 감사의 제목으로 거듭나게 하는 기도, 하나님께 이웃을 위로해달라고 기도하기보다는 내 부끄러운 손길로 따듯하게 붙들어주는 행위의 기도, 시끄럽게 욕망을 토해내는 기도보다는 침묵으로 내 두려움의 허상을 밝히 보고 씻어내는 기도, 그런 기도가 필요하지 않을까? 적어도 내겐 간절하게 요구된다. 무엇보다 나 자신과 우주의 모든 존재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사랑이 간절히 요구된다.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내 안에 가득 채울 수 있도록 침묵하는 기도가 필요하다.

참고도서 : 길희성 저, "마이스터 엑카르트의 영성 사상" (분도출판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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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최근 내가 하느님으로부터 무언가 받거나 구할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나는 이에 대해 정말 잘 숙고해 볼 것이다. 왜냐 하면 만약 내가 하느님으로부터 무엇이든 받게 된다면, 나는 하느님 밑에서 종처럼 될 것이며 주는 그는 주인처럼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생에 있어서는 이래서는 안된다.

우리가 우리 자신 밖에서 무엇을 얻거나 받으면 이는 옳지 않다. 우리는 하느님을 자기 자신 밖에 있는 것으로 파악하거나 간주해서는 안 되고, 자기 자신의 것으로 그리고 자신 안에 있는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하느님을 위해서든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든 혹은 자기 밖의 그 어떤 것을 위해서든, 어떤 목적을 위해 봉사하거나 일해서도 안된다. 오직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자신의 존재와 자신의 생명을 위해서 일해야 한다. 어떤 순진한 사람들은 하느님은 저기 계시고 자기들은 여기 있는 것처럼 생각해야 한다고 망상을 한다. 그렇지 않다. 하느님과 나, 우리는 하나다."

"....그는(예수) "아버지여, 나와 당신이 하나이듯이, 그들이 하나이기를 나는 원합니다"(요한 17,20)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성자가 본질과 본성에서 성부와 하나이듯이 그대도 본질과 본성에서 그와 하나이며, 성부가 자기 자신 안에 모든 것을 가지고 있듯이 그대도 그대 안에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그대는 그것을 하느님으로부터 빌릴 필요가 없다. 왜냐 하면 하느님은 그대 자신의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대가 취하는 모든 것을 그대는 그대 자신의 것으로부터 취하며, 무슨 일이든 그대가 그대 자신의 것으로부터 하지 않으면 그 일들은 하느님 앞에서는 모두 죽은 것이다. 그런 것들은 그대 밖에 외적 원인들에 의해 움직여지는 일들로서, 생명에서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죽은 것이다. 왜냐 하면 자기 자신의 것으로부터 움직여지는 것만이 살아 있는 것이 때문이다. 그런적, 사람이 하는 일들이 산 것이 되고자 할진대, 외적으로 혹은 자기 밖으로부터가 아니라 자기 안에서 자기 자신의 것으로부터 해야 한다."

길희성 저, 마이스터 엑카르트의 영성 사상 (분도출판사, 2003), pp. 271-273에서 인용.

중세 신비가 에크하르트가 그려주는
신앙인의 삶, 하느님 아들됨의 삶이
내 영혼 깊은 곳까지 공명해온다.
신앙의 깊이와 방향에 대해 빛을 던져준다.
시원한 성령의 바람....
그 모습에 대해 뭐라 입을 열기도 머뭇거려지는
잔잔하며 깊은 울림.
잠잠히 입을 다물고
그냥 그대로 옮겨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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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5-17 12: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물무늬 2004-05-17 1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문적인 이론과 논쟁들이 공허해지지않고 일상이 표피를 뚫고 들어가는 것은 님처럼 삶의 한 부분으로 품어 안고 고민하며 기도하는 궁행을 통해서라는 생각이 스쳤습니다. 역시 오랜 기도의 힘이 추진력이 되시는게 아닌지....

전 요즘 제 생각의 여백마다 예수의 삶과 죽음에 대해, 저의 신앙과 진심에 대해, 어떻게 그렇게 살고 죽을 수 있는지에 대해 묵상하는 "깨인 시선"을 유지하려 애쓰고 있습니다. 분주한 일상의 속도에 취하지 않으려 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그런 의지자체의 속도에도 취할 수 있다는 경계 또한 늦추지 않아야 하겠죠.

가끔은 외롭다는 생각이 의식의 표면 위로 불쑥 솟아오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제 안에 또 다른 나가 있고 그의 시선과 음성에 귀기울이면서 외로움이 고독으로 변하더군요. 어차피 "나"란 의식의 수면 위에 비친 존재의 잔영일 뿐, 어차피 삶은 그렇게 자신과 모든 존재를 비춰주는 그 "님"을 만나는 사귐이라는 깨침이 봄바람처럼 살포시 스쳐갑니다.

2004-05-18 00: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물무늬 2004-05-18 2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외로움에 너무나 힘겨워 하던 여린 감성이 세월의 흐름에 군살이 배기고 많이도 무감해졌습니다. 이런 것이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인가 하는 생각이 들때면 다행이라 생각하면서도 아쉽고 그리운 느낌이 뒤엉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런데 문득 외로움이 고개를 드니 조금은 당황스러웠어요. 오랜만이기도 하고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기도 하고. 소중히 여기는 친구는 워낙 홀로로도 충분해하는 녀석인데다가 멀리 있고.....
요즘들어 제 마음의 여백마다 묵상과 관상으로 채워가고 있었는데, 문득 그 외로움을 바라보는 제 안의 또 다른 저를 발견했습니다. 그렇게 제 안의 그 님이 함께 있다는 깨달음이 외로움을 고독으로 바꿔주더군요.
그래도 제가 고민하고 묵상하며 느끼는 것들을 함께 나누고 그런 서로의 느낌에 관심을 기울여주는 친구가 가까이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란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이곳에서라도 님의 생각을 만나고 함께 나누는 것에 너무나 감사하는 이유이죠.
 


오랜만에 느껴지는 외로움,

담담하게 맞이하지만

어떻게 해야할지 조금은 당황스럽기도....

 

피곤한 몸에 깃든 마음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멀리 보이는 집,

어릴적 내 모든 추억과 감정이 베어있는

동네의 풍경, 그 배경에서

안개 자욱한 산은

그리운 듯, 안쓰러운듯

아늑하게 나를 부르고 있었다.

 

지붕에서 부서지는 빗소리에 뒤척이던 밤이 지나고

일상의 급류에 뛰어들기 전

숨을 고르며 내 안 깊은 곳을 들여다 본다

사막의 은자, 그와의 눈맞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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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와 살을 모두 주시고

이젠 우리의 숨결이 되셨습니다."

 

작년에 묘비 앞에 심었던 꽃들이 피어났다.

그렇게 내 의식의 시야에서 벗어나 있어도

꽃은 피어나고....

 


 

 

 

 

 

 

2004년 5월 어느날 아버지의 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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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4-05-13 17: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무늬님, 아버지의 머리에 꽃단장을 해드렸군요. 먼 곳에서도 늘 가까이 님이 사는 모습을 지켜보고 계실겁니다. 비석앞에 낮고 화사하게 얼굴을 들고 웃음 짓는 꽃들이 아버지를 기쁘게 해 드릴 겁니다.

물무늬 2004-05-14 1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뭐라 감사의 말씀을 드릴지...
저조차도 자주 들어와보지 못하는 이곳에
변함없는 관심을 기울여 주시는 배혜경님의 마음에
깊은 감사의 울림을 느낍니다.

보통 조화를 꽂아드리곤 했었는데
작년에 들꽃들을 옮겨 심어놨었습니다.
오랜만에 찾아가면서 어떻게 되었을지 궁금하고 설레였는데
너무나 이쁜 모습으로 활짝 피어있어서 얼마나 기뻤는지....
님의 말씀처럼 아버님도 기뻐하실 겁니다.
해가 갈수록 넓게 번져가겠죠.
해마다 아버님에 대한 제 사랑과 감사도
그렇게 번져가면 좋겠습니다.

2004-05-18 00: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물무늬 2004-05-18 2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틀과 권위의 해체되고 각자의 숨결과 개성이 살아숨쉴 수 있게 해준 포스트 모던적 경향이 제게 선사한 자유라는 생각이 드네요.

제3자들에게까지 감동을 줄 수 있는 비문....아버지를 많이 사랑하셨나 봅니다...라는 님의 말씀이 정말 그런가라는 무거운 반문으로 되돌아옵니다.
제3자에게 감동을 주지만 저 스스로에게는 죄스러운 고백으로 빛바래가는 것 같고, 제 일상에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너무나 히미해져 가는 것을 돌이켜 볼 때 많이 사랑했다고 말하기 어려워지고...하지만 다행이도 제 의식이 망각하고 있어도 제 몸 깊은 곳에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여전히 숨쉬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여유란

공터에 멈춰서는 것이 아니라

거친 숨결을 타고 노니는

깨인 시선이 아닐까?

 

숨가쁜 일상에 취하지 않으려

안깐 힘을 쓴다.

 

숨을 고르며 그려보는 풍경,

사막의 은자, 그와의 눈맞춤....

그의 눈에 비친 풍경을

그려본다.

 

2004년 5월 어느날

아버지의 묘에 다녀오는 길

창밖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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