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히 드러낼만한 취미가 없으니 그나마 책이라도 가까이 한다는데 위안을 삼을 때가 있다. 정기구독하는 잡지를 빼고서라도 한 달에 몇 권씩 책을 사다보니 책은 쌓여만 간다. 찾던 책이 어디에 꽂혀 있는지를 몰라 허둥댈 때의 그 낭패감이란!   책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스스로를 책망하는데 그치지 않고 죄없는 책에게 화풀이까지 한다.

  굳은 맘먹고 '책 정리 잘 하는 법'이란 인터넷 검색을 시도한다. 가나다순 정렬법, 작가별 정리법, 장르별 분류법.... 별의별 방법이 다 있지만 내 눈에 띄는 것은 신간 위주 분류법이다. 그 경험자의 충고에 의하면 가장 최근에 산 책이 꽂히는 위치만 지정해주면 된다나. 그렇게 하면 미리 산 책은 자연스레 한 칸씩 밀려나니까 그 책을 산 계기나 시점을 생각해보면 쉽게 책을 찾을 수 있을 거란다. 한데 그 방법도 썩 만족할만한 것은 못 된다. 바지런하지 못하니 금세 책장은 흐트러진다.

  책을 정리하는 가장 나은 방법은 무엇일까? 책을 놓아주는 것이다. 불필요한 책 순서대로 과감하게 날개를 달아주는 것이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책이 쌓이는 이유는 너무 쉽게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알라딘에 접속만 하면 클릭 하나만으로도 책에 대한 기본 정보를 얻을 수 있고, 할인까지 해주니 별 고민없이 책을 고른다. 발품을 팔던 시절에 비해 손쉬운 방법이다 보니 도서관에서 빌려 봐도 될 책까지 굳이 사게 된다.

  책은 왜 주인에게 머물러있는가?  읽히기 위해서다. 세로로 박힌 겉표지 제목만 사랑받기 위해서 책꽂이에 매달려있는 게 아니다. 주인이 어루만져주고, 달래주거나, 반대로 자신 때문에 주인이 웃거나 울기를 원한다. 따뜻한 손길 한 번 안 주면서 흐뭇한 눈길만으로도 만족하라고?   책은 장식품 인형이 되기를 결코 원하지 않는다. 책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무조건 쟁여놓는 것은 책에 대한 무례라고 생각한다.

  거창할 것도 없다. 사랑할 자신이 없는 책은 놓아주면 그 뿐이다. 제 발로 움직일 수 없는 그들은 진정 사랑받기를 원한다. 그럴 자신이 없으면 기꺼이 그들에게 자유를 줘야한다.  그것이야말로 책에 대한 예의이다.

  책꽂이를 둘러보면 평생 손길 한 번 가지 않을 책들도 제법이다. 삶의 양식이 가득한 책꽂이를 보면 잠시 뿌듯할 수도 있겠지만 실제 다시 꺼내 보게 될 책은 가진 책의 절반도 되지 않을 것이라는 걸 경험으로 알 수 있다. 이런 이유로 나는 이사를 할 때마다 과감하게 책을 떠나보낸다. 내 품에서 홀대받던 책들은 더러는 파지로 실려나가 재생종이로 환생하거나  또 가끔은  나보다 훨씬 나은 이웃을 만나는 행운도 누릴 것이다. 껴안는 불편함보다는 내보내는 합리가 되려 책도 살리고 나도 사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더러 아끼던 책을 떠나보낸 뒤, 후회한 적도 있다. 누군가가 빌려간 형식으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은  김현의 '행복한 책읽기'와 정약용의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가 그랬고, 조카가 빼앗가간 김승희의 에세이 '33세의 팡세'도 그러했다. (김승희의 에세이는 절판되는 바람에 안타까웠는데 최근에 다시 나온 것을 보고 재깍 사들였다.) 그러나 이런 경운 극히 드물다.  (독서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구하기 어려운 책을 함부로 처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니 이것은 논외로 하자.)   장정일의 말처럼 베스트셀러나 스테디셀러 순서대로 책을 놓아주는 것이 가장 덜 위험한 방법이라는데 동의한다. 이런 책은 꼭 필요하면 언제든지 다시 구할 수 있으니까. 

  내게 온 책이 딱딱한 손님처럼 앉아있거나, 홀대받는 천덕꾸러기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책에 대해 집착하지 않고 헐거운 마음이다보니 나는 책을 좀 더럽게 보는 편이다. 속지에는 나도 알 수 없는 메모들이 지렁이처럼 기어다니고, 밑줄과 동그라미가 갈피갈피마다 질펀한 것도 있으며, (그러고 보니 내게 사랑받는 책일수록 이런 현상이 심하다. 책에게 미안하다!) 심지어 싸구려 커피자국으로 낙관을 찍은 것들도 있다. 책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읽는 것이다. 소유하려고 하면 집착하게 되고 집착하게 되면 관리하려들고 관리하려들면 피곤해지는 게 인지상정이다.   

  가끔씩 십원짜리 동전이 든 돼지저금통을 보면 주인에게 사랑받지 못해 방랑하는 책이 연상될 때가 있다. 동전을 열심히 모으는 사람은 많다. 하지만 과감하게 이를 은행으로 가져가는 이는 드물다. 가자니 귀찮고,  남주자니 그래도 돈이라 아까워 그대로 방치한다. 꼭꼭 숨은 집안의 동전을 보면서도 새 동전 발행 비용이 수월찮게 든다는 것에 대해서는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은 제 것에 대한 애착 유무와는 상관없이 발상의 전환 문제이다. 꼭 필요치 않은 것이라면 파지상에도 내놓고, 헌 책방에도 팔고, 이웃에게도 선물하며, 친구들과 교환도 하자.  이 모든 이야기는 책수집가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그런 분들은 그 분야의 전문가이기 때문에 나같은 사람을 위해서도  더 열심히 책을 모아야 한다.  물론 손때 묻고, 사연 서러있고, 힘들게 모은 책들은 끝까지 사수하라.

  단순히 내 것이라는 연민 때문에, 책을 함부로 버릴 수  없다는 사명감 때문이라면 책의 소유에서 자유로워져도 되지 않을까. 진정한 요리사는 주방기구를 나열하지 않고, 속 깊은 화가는 붓에 집착하지 않을 것이기에.  내게 왔다고 다 내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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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6-10-17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버리는 일, 책을 소유하는 일. 둘 다 난젭니다.
활자에 집착하는 병에 기인한거지요^^

다크아이즈 2006-10-17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란여우님, 맞아요. 활자에 집착하는 병... 분명 이것도 질환으로 의심해도 되지요?
 

  내 기억에 영화다운 영화를 본 것은 중학교 1학년 때였다. 그럼, 영화답지 않은 영화도 있었던가? 여기서 말하는 '영화다운 영화'는 극장용 영화를 말한다. 아주 어릴 때, 시골 강변에 설치된 가설극장에서 본 '어머니 왜 나를 낳으셨나요?'라는 영화가 실은 내가 본 최초의 영화이다. 가수 이용복에 관한 영화 같았는데, 언덕에서 굴러떨어져 실명하는 장면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하도 어릴 적 얘기라  그것이 진짜 이용복에 관한 것인지조차 자신이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가설극장에 들어갈 용돈조차 없어(보리쌀 한줌만 퍼갔어도 됐는데, 그나마 융통성이 없었다. 마을 최고의 부잣집 딸이!) 친구 몇몇과 몰래 천막을 들추고 잠입했다는 사실이다. 

  극장도 아니고, 제 돈 주고 본 것도 아니니 가설극장 영화를 제외하고 나면, 내가 본 최초의 영화는 단연 중학교 1학년 때 본 '데미트리아스'이다. 그 당시 기말고사가 끝나면 '문화교실'이라고 해서 학교에서 단체로 영화관에 갔었는데 그 때 본 영화가 내 생애 첫 극장용 영화가 되었다. 그 때나 지금이나 나는 앞선 문물을 받아들이는 능력은 좀 처지는 편이다. 제목도 아삼삼한 그 영화는 예수의 피묻은 '성의'에 관한 진실찾기(?) 비슷한 내용인 것 같았는데 내용과는 무관하게 어린 나는 심히 충격을 받았다. 저토록 드넓은 극장에서 이토록  큰 스크린에 담긴 영화를 볼 수 있다는 게 마냥 신기하고도 경이로웠던 것이다. 

   한데, 그 신기와 경이가 식상해질 즈음 새로운 오감이 내 전신을 후둘거리게 했으니 그 영화가 중 3때 본 '야시'(밤시장)였다. 범생이다 못해 쑥맥인 우리 일당이 '문화교실'로 지정된 것도 아닌 성인영화 보기에 도전해서 성공한 것이었다. 미도극장, 그 극장은 시내를 향해 우리학교에서 일이십분 걸어가면 있었다. 재개봉관인데다,  두 개의 영화를 연이어 보여주는 동시상영관이었다. ('동시상영관' 세대인 나는 이 말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데 딸내미 왈 '어떻게 동시에 영화 두 편을 볼 수 있느냐' 의문을 제기해 한참 웃은 적이 있다.) 삼류극장에서 학생신분으로 성인 영화보기는 식은죽먹기만큼 쉬웠다. 그들도 먹고 살아야 했으니까. 삼류극장의 지지부진한 매출과 지리멸렬한 시간을 보상해주는 유일한 고객은 호기심 어린 학생들이었다. 

   갓 스물이 된 장미희와 중년으로 보이는 윤일봉이 파트너로 나왔는데, 그 어리고, 어어쁜 처자가 담배는 얼마나 잘 피우며 술은 또 어찌나 대담하게 퍼마시는지. 어린 마음에 스무살만 되면 여자는 대학교를 중퇴해도 되고, 원하기만 하면 담배나 술을 맘대로 피우고 마셔도 되는줄 알았다. 그 무엇보다 내 오감을 들썩이게 한 것이 '나를 가지세요'라는 장미희의 도발적 대사였다. (혹 고은정이 장미희를 대신해주었더라도,  여전히 내겐 장미희의 울림으로 남아있다는 게 중요하다.) 흰 잠자리 잠옷을 입은 장미희는 자주 흐트러진 자세로 윤일봉에게 말하는 것이었다. '나를 가지세요.' 

  하지만 절대지존 점잖은 신사였던 윤일봉은 결코 장미희를 가지지  않았다.  흐트러진 잠옷 매무새를 돌려놓으며 이러면 안 돼, 넌 아직 어려. 만 앵무새처럼 되풀이했다. 그 상황을 지켜보면서 나는 윤일봉이 멋있다, 라거나, 장미희가 앙큼하다던가, 하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로지 '나를 가지세요'라고 애원하는, 장미희의 입에서 나오는 그 여섯음절의 선서가 경이롭고도  충격적으로 다가올 뿐이었다. 세상에, 나를 가지라고, 애원하는 여자도 있구나... 요즘 잣대로 보면 신파도 그런 신파가 없겠지만  당시 영화 시나리오치고는  제법 고심한 대사였을 수도 있을 것이다. 요즘에야 '나를 가지'라고 애원하는 대사가 필요한 영화는 절대 만들지 않을 것이다.  그 대사가 그토록 내게 강인하게 아로새겨진 것은 포르노그래피, 혹은 섹슈얼리티에 관한 내 생애 최초의 선명하고도 감각적인 체험이 바로 그 여섯음절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 영화를 본 뒤로 나는 두려웠다.  내가 스물이 되었을 때 장미희처럼 '나를 가지세요'라고 말하는 상황들을 만들게 되는 것은 아닌가 싶어서.  불행하게도(?) 인생 전반에 걸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여전히 잘 지내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런 결론에 이르자 괜히 장미희에게 속은 기분이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생각한 것인데,  그런 찜찜한 기분은 즉각 보상받아야 한다.  곤히 자고 있는 우리집 아저씨를 깨워 말 건네봐야겠다. - 아저씨, 나를 가지세요.   

 

 * *    나를 가지세요, 가 환청처럼 따라다녔으므로 

         동시상영했던 다음 영화는 제목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그래, 너를 가지마>였던가,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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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 2007-06-18 0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글 참 재미있게 보았읍니다^^*
장미희였던가요? 윤정희가 아니구요?!
어쨌든 잠시 귀하의 글에 이 새벽에 잠시 즐거웠읍니다.
 

  행사가 있어서 조금 늦게 들어왔다.  픽업하러 온 우리집 아저씨, 운동하고 와서 피곤한 나머지 한숨 자느라 밥도 못 먹고 있었단다. 국밥을 퍼주고 있는데 손전화기가 울린다. 얼마전 알게 된 J선생이다. 영어책을 선물하겠단다. 방금 산 따끈따끈한 책을 들고 오는 중이란다. 그녀와 나는 한 동네에 산다. 어느 소박한 강의에서 나와 J선생은 강사와 수강생으로 만났다.  한 동네에 사는 것을 진작에 알고 있었다며, 그녀가 전화를 걸어와 친분을 쌓게 되었다.  몇 번의 통화와 또 몇 번의 만남이 있었는데 그 때마다 참 열심히 사는 분이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  알고 보니 내 딸아이가 졸업한 학교의 선생님이었는데, 딸아이는 아, 그 선생님, 무척 성실한 분이셨어, 라고 기억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대단히 열정적인 사람이다. 우선 공부 욕심이 많다. 욕심이 많다 못해 공부가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단다. 해서 근무하랴, 아이 키우랴, 집안 일 하랴, 무척 바빴을텐데도 끝내 원하던 공부를 마치고야 말았단다.  아니, '공부를 마쳤다'고  표현하는 것은 그녀에 대한 모욕이다.  박사 학위까지 받았지만 그녀는 아직도 더할 공부가 남았다고, 이것저것 재도약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으니 말이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공부에 대해서는 재미있다거나, 지긋지긋하다거나 따위의 별 정서적 반응이 없다.  그저 학생이니 공부하고, 졸업하니 고것 참 시원하구나, 정도의 싱거운 감응이 있을 뿐이다.  다만,  대학 이학년이 되었을 때 공부가 하기 싫은 적은 있었다.  불어불문학이 전공이었는데, 그 멋진 학문이 나로서는 도무지 적성에 맞지 않았던 것이다. 어려웠다는 게 솔직한 고백이다. 교양과목 위주였던 일학년 때는 성적이 매우 우수했다. 왜냐면 교양과목 대부분은 시험지를 우리말로 채우는 것이었다.  이데올로기 비판이니, 고대사나, 철학개론이니, 불문학개론이니 등은 재미가 있었기 때문에 강의 열심히 듣고, 교재 몇 번만 더 읽으면 시험지를 메워나갈 자신이 있었다.

  한데, 이학년부터 본격적인 전공 공부가 시작되자 자신이 없어졌다. 회화는 어려웠고, 문법은 인내를 요했으며,  단어와 어휘는 게으름 때문에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우리말로 시험지를 메우는 것이 아니라, 외래어도 아닌, 내게는 외계어로 보이는 불어가 들어간 답안지를 작성한다는 것은 실로 엄청난 스트레스를 안겨 주었다. 고종석은 그가 쓴 에세이에서  대학교 때, 불어로 된 작품을 읽고 토론하는 써클 활동을 했는데  유익했었노라고 회상했다. 나로서는 무척 신기하고 부러웠다. 영어도 아니고 불어를 그렇게 재미있게 공부할 수있다니. 전공 공부를 싫어했던 내가  나쁘지 않은 성적으로 그나마 졸업까지 한 것은 그 외에 달리 방책이 없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공부가 미치도록 하고 싶지도 또 반대로 환장하도록 하기 싫지도 않았기 때문에 그냥 시간만 보낸 것이다.

  한데, 이제와서 슬슬 공부란 게 하고 싶어진다. 특히 영어 공부, 이 글로벌한 시대에 영어를 제대로 씨부리지(?) 못하니 심히 쪽 팔린다. 이런 얘기를 J선생과 나눴는데, 그녀는 글쎄,  진작부터 열심히 영어 공부를 하고 있단다. 개인 과외도 해봤고, EBS도 열심히 듣는단다. 그러더니만 덜컥, 책을 사주겠다고 했다. 아휴, 그냥 추천만 해줘요, 했더니 남이 사주면 책임감 때문에 열심히 하게 된다나. J선생이 사들고 온 책은 회화책 한 권과 문형 외우기 교재 한 권이다. 마음씀씀이가 고마워 나도 그녀의 아들에게 줄 책을 세 권 준비했다. 그녀의 선물은 유익해보인다. (아직 시도를 하지 않았으니 이렇게 밖에 표현 못하겠다.) 우리집 아저씨가 수강권을 끊어준 인터넷 토익이랑, 이 두 권의 책으로 올 가을부턴 영어 공부를 한 번 해볼까나 싶다. 작심삼일이라도 상관없다. 자신의 불타는 향학열을 J선생은 몸소 내게 이전시켜주고 싶어하는데 그에 대한 보답으로 열심히 해야할텐데 글쎄, 잘 할 수 있으려나?  그리하여 이제는 패키지 여행이 아니라, 배낭 메고 당당하게 저 먼 땅을 꼭꼭 밟고 싶다.

  J선생 고마워. 하지만 나 영어 공부 제대로 안 한다고 실망하지는 마. 그렇게 안 봤다고 말하지만, 실은 내가 좀 게으른 데가 있거든.

  각설하고, 진짜로 영어공부 제대로 하는 법, 누가 좀 가르쳐주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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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6-10-15 0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 공부든 잘 하는 비법은 두 가지인 거 같습니다. 연애하는 마음이든가 복수심이든가. 영어(공부)와 한동안 연애를 하시거나(내 사랑, 영어!) 영어에 복수를 해주시면 되지 않을까요(영어, 네가 그렇게 잘 났냐?)...

다크아이즈 2006-10-15 0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로쟈님 이렇게 확실한 비법을? 사실 영어는 쉬운데 공부하는 방법이 어렵잖아요.(말 된다.) 그 방법 잘 모르면 여쭤볼테니 살짝살짝 가르쳐주세요.

로쟈 2006-10-15 2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쎄요, 제대로 된 '연애'나 '복수'를 해본 적은 없어서(^^;)...
 

미친듯이 일기를 쓴 적이 있다.  아주 젊었을 적 이야기다. 늦게 일어나 밥 먹고, 음악 듣고, 책을 읽어도 남아 도는 시간을 주체할 수 없어 주야장천으로 일기만 쓴 적이 있었다. 아니다, 시간만 남아 돌았다면 그렇게 써대진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 돈도 없고, 남자도 없었기 때문에 괴로워서 일기만 썼다. 돈 있고, 남자가 있었다면 쇼핑을 하거나 산책을 했겠지. 더할나위 없이 화창한 젊은 날, 죽은 듯이 골방에 엎어져 쓰는 일기는 염세와 비관과 절망과 그리고 가난의 노래였다.

어느날부터 일기를 쓰지 않아도 되는 날들이 시작되었다. 남자를 만났고, 결혼을 했고, 아이를 낳는 동안 일기를 쓸 일이 없어졌다. 친정 다락방에 남아 있던 열 댓권의 일기장을 뒷마당에서 불태우면서 나는 웃었다. 생각하고 싶지 않은 청춘들아, 아듀. 홀가분했다. 결혼 생활. 가끔씩 삐그덕 거렸지만 행복했고, 조금 빈궁했으나 견딜만한 것이었으며, 아주 많이 게을러졌지만 심각할 정도는 아니었다.  청춘의 지난한 비망록을 쓸 때에 비하면 모든 것이 자연스러워졌고, 여유로웠다.  일기장은 이제 쉰 내 나는 행주 같은 것이 되어버렸다. 평생 일기 같은 건 쓰지 않고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다시 일기를 쓰려고 한다. 불특정 다수에게 오픈된 일기니까 완벽하게 솔직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청춘의 광기와 살기 서린 일기문을 기억하는 나로서는 차라리 잘 됐다고 위안한다. 자기기만까지를 포함하는 수준이되, 품위를 잃지 않을 것. 착한 척 하지 않되 연민도 버리지 않을 것. 위선보다는 차라리 위악적 허세가 스민 유머일 것. 이 신새벽 일기장을 열면서 스스로 다짐해본다.

몇 십 년 만에 쓰는 일기.  될 수 있는 한 솔직해질 것이다. 왜냐면 청춘의 일기처럼 이곳엔 염세도 비관도 절망도 가난도 없이 온전하게 자유롭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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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는 보는 것이 아니라 읽는 것이다 - 적어도 이 말은 내겐 현재 진행형이고 유효하다.  쓰는 데 관심이 많은 부류이다 보니 영화를 영화로만 이해하지 않고 자꾸 텍스트로 들여다보려는 무례를 범하곤 한다.   갑자기 이왕주의 책(철학 영화를 캐스팅하다)을 읽다가 이 글이 쓰고 싶어졌다. 시작했으니 말이지 이왕주 이야기부터 해야겠다. 오랜 옛날부터 그의 팬이다, 라고 말하기엔 왠지 자신이 없다. 왜냐면 철학교수이자 집필가인 그가 제법 많은 책을 냈을 텐데, 위에 언급한 책 말고는 '쾌락의 옹호'가 가진 전부이니 왕팬이라 하기엔 무리가 있으나 어쨌건 나홀로 팬이다, 라고 자부한다.  

  그가 한 지방지에 간단한 에세이를 연재한 적이 있는데, 그의 문체는 신선하고, 구체적이었다. 무엇보다 누구나 다 겪는 일상에서 아무나 할 수 없는 이야기거리를 이끌어내는 발군의 솜씨가 부러웠다. 그래서 프로필만 보고 냅다 전화를 걸었다. 그의 모든 저서가 갖고 싶었던 것이다. 인터넷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였으니, 알라딘에서 검색같은 건 생각지도 못했다.  아마는 그의 연구실에서 전화를 받았을 것이다.  내 얼토당토 않은 왕팬 고백에 그가 남아있는 모든 자신의 책을 보내줄 수도 있다고 말했지만, 나는 정중히(실은 부끄럽고, 민망해서) 거절했다.  몇 권의 책을 소개받은 것 같은데, 아마는 자신의 철학 전공과 관계 있었던 것일 게다.  내 호기심을 자극하는 책이었다면 지금도 기억할텐데, 전혀 기억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 당시 절실하게 필요한 책은 아니었던가 보다. 

  어쨌든 영화를 철학으로 풀어 쓴 이 책을 읽으면서 유난히 파인딩 포레스터가 기억에 남는다.  프로이트의 이디퍼스 컴플렉스를 엮어 독자를 설득한 그 살뜰함 때문인가?  아니다, 아니다... 그의 글빨로만 설명하기엔 뭔가 부족하고, 맞다. 지금 생각해보니 은둔 작가에 대한 소회 때문이다. 요즘 다시 읽고 있는 '앵무새 죽이기'(화장실 갈 때마다 그 무거운 책만 들고 가게 된다.  그것은  두 가지 의미이다. 심오한 읽을 거리가 아니라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얻을 게 있다는  그 거부할 수 없는 느낌) 와 매치가 됐던 것이다. 

  파인딩 포레스터에서는 의심할 여지없이 j.d 샐린저가 떠오른다.  앵무새죽이기의 하퍼 리나 호밀밭의 파수꾼의 샐린저는 단 한 권의 장편만 히트시키고 은둔형 작가가 되어버렸다.  그들의 속내와 상관없이 나는 그들이 이해된다.  그들이 천재인가, 아닌가는 별 관심이 없다. 설사 천재라 해도 인간적 고뇌에서 완전하게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에 다음 작품이 생산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운동 선수로 치자면 이년 차의 부진 징크스도 경험할 새 없이 조용히, 스스로 사라져버린 것이다.  굳이 말해야 한다면, 내 생각에 그들은 결코 천재가 아니다.(영화에서는 나레이션 상황으로 볼 때 그럴 수밖에 없겠지만) 다만 지극히 인간적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호밀밭의 파수꾼이 왜 문제작, 혹은 스테디 셀러가 되고 있는지 아직도 이해 못하긴 한다.  읽을 때마다 저 멋진 제목 말고는 누군가의 필독서가 되어야 할 자격은 없는데, 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인딩 포레스터는 영화로서는 매력적인 작품에 틀림없다. 긴가 민가 할 정도로 기억이 흐리긴 하지만 이왕주의 또 다른 영화 해석인 '일 포스티노'를 풀이한 것처럼 변증법적 흉내를 내보자면, 자말(정)은 포레스터(반)를 만나 또 다른 자말(합)이 되나니... 끊임없는 정반합의 계단을 오르다 보면, 그 꼭지점에 한 생애가 우뚝 걸려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모든 영화가, 아니 우리의 삶이 이런 공식의 수순을 밟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물론, 삐그덕 거리는 나무 계단을 만날 때가 더 많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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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fdf 2009-05-15 11: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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