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기억에 영화다운 영화를 본 것은 중학교 1학년 때였다. 그럼, 영화답지 않은 영화도 있었던가? 여기서 말하는 '영화다운 영화'는 극장용 영화를 말한다. 아주 어릴 때, 시골 강변에 설치된 가설극장에서 본 '어머니 왜 나를 낳으셨나요?'라는 영화가 실은 내가 본 최초의 영화이다. 가수 이용복에 관한 영화 같았는데, 언덕에서 굴러떨어져 실명하는 장면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하도 어릴 적 얘기라 그것이 진짜 이용복에 관한 것인지조차 자신이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가설극장에 들어갈 용돈조차 없어(보리쌀 한줌만 퍼갔어도 됐는데, 그나마 융통성이 없었다. 마을 최고의 부잣집 딸이!) 친구 몇몇과 몰래 천막을 들추고 잠입했다는 사실이다.
극장도 아니고, 제 돈 주고 본 것도 아니니 가설극장 영화를 제외하고 나면, 내가 본 최초의 영화는 단연 중학교 1학년 때 본 '데미트리아스'이다. 그 당시 기말고사가 끝나면 '문화교실'이라고 해서 학교에서 단체로 영화관에 갔었는데 그 때 본 영화가 내 생애 첫 극장용 영화가 되었다. 그 때나 지금이나 나는 앞선 문물을 받아들이는 능력은 좀 처지는 편이다. 제목도 아삼삼한 그 영화는 예수의 피묻은 '성의'에 관한 진실찾기(?) 비슷한 내용인 것 같았는데 내용과는 무관하게 어린 나는 심히 충격을 받았다. 저토록 드넓은 극장에서 이토록 큰 스크린에 담긴 영화를 볼 수 있다는 게 마냥 신기하고도 경이로웠던 것이다.
한데, 그 신기와 경이가 식상해질 즈음 새로운 오감이 내 전신을 후둘거리게 했으니 그 영화가 중 3때 본 '야시'(밤시장)였다. 범생이다 못해 쑥맥인 우리 일당이 '문화교실'로 지정된 것도 아닌 성인영화 보기에 도전해서 성공한 것이었다. 미도극장, 그 극장은 시내를 향해 우리학교에서 일이십분 걸어가면 있었다. 재개봉관인데다, 두 개의 영화를 연이어 보여주는 동시상영관이었다. ('동시상영관' 세대인 나는 이 말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데 딸내미 왈 '어떻게 동시에 영화 두 편을 볼 수 있느냐' 의문을 제기해 한참 웃은 적이 있다.) 삼류극장에서 학생신분으로 성인 영화보기는 식은죽먹기만큼 쉬웠다. 그들도 먹고 살아야 했으니까. 삼류극장의 지지부진한 매출과 지리멸렬한 시간을 보상해주는 유일한 고객은 호기심 어린 학생들이었다.
갓 스물이 된 장미희와 중년으로 보이는 윤일봉이 파트너로 나왔는데, 그 어리고, 어어쁜 처자가 담배는 얼마나 잘 피우며 술은 또 어찌나 대담하게 퍼마시는지. 어린 마음에 스무살만 되면 여자는 대학교를 중퇴해도 되고, 원하기만 하면 담배나 술을 맘대로 피우고 마셔도 되는줄 알았다. 그 무엇보다 내 오감을 들썩이게 한 것이 '나를 가지세요'라는 장미희의 도발적 대사였다. (혹 고은정이 장미희를 대신해주었더라도, 여전히 내겐 장미희의 울림으로 남아있다는 게 중요하다.) 흰 잠자리 잠옷을 입은 장미희는 자주 흐트러진 자세로 윤일봉에게 말하는 것이었다. '나를 가지세요.'
하지만 절대지존 점잖은 신사였던 윤일봉은 결코 장미희를 가지지 않았다. 흐트러진 잠옷 매무새를 돌려놓으며 이러면 안 돼, 넌 아직 어려. 만 앵무새처럼 되풀이했다. 그 상황을 지켜보면서 나는 윤일봉이 멋있다, 라거나, 장미희가 앙큼하다던가, 하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로지 '나를 가지세요'라고 애원하는, 장미희의 입에서 나오는 그 여섯음절의 선서가 경이롭고도 충격적으로 다가올 뿐이었다. 세상에, 나를 가지라고, 애원하는 여자도 있구나... 요즘 잣대로 보면 신파도 그런 신파가 없겠지만 당시 영화 시나리오치고는 제법 고심한 대사였을 수도 있을 것이다. 요즘에야 '나를 가지'라고 애원하는 대사가 필요한 영화는 절대 만들지 않을 것이다. 그 대사가 그토록 내게 강인하게 아로새겨진 것은 포르노그래피, 혹은 섹슈얼리티에 관한 내 생애 최초의 선명하고도 감각적인 체험이 바로 그 여섯음절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 영화를 본 뒤로 나는 두려웠다. 내가 스물이 되었을 때 장미희처럼 '나를 가지세요'라고 말하는 상황들을 만들게 되는 것은 아닌가 싶어서. 불행하게도(?) 인생 전반에 걸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여전히 잘 지내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런 결론에 이르자 괜히 장미희에게 속은 기분이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생각한 것인데, 그런 찜찜한 기분은 즉각 보상받아야 한다. 곤히 자고 있는 우리집 아저씨를 깨워 말 건네봐야겠다. - 아저씨, 나를 가지세요.
* * 나를 가지세요, 가 환청처럼 따라다녔으므로
동시상영했던 다음 영화는 제목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그래, 너를 가지마>였던가, 젠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