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듯이 일기를 쓴 적이 있다.  아주 젊었을 적 이야기다. 늦게 일어나 밥 먹고, 음악 듣고, 책을 읽어도 남아 도는 시간을 주체할 수 없어 주야장천으로 일기만 쓴 적이 있었다. 아니다, 시간만 남아 돌았다면 그렇게 써대진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 돈도 없고, 남자도 없었기 때문에 괴로워서 일기만 썼다. 돈 있고, 남자가 있었다면 쇼핑을 하거나 산책을 했겠지. 더할나위 없이 화창한 젊은 날, 죽은 듯이 골방에 엎어져 쓰는 일기는 염세와 비관과 절망과 그리고 가난의 노래였다.

어느날부터 일기를 쓰지 않아도 되는 날들이 시작되었다. 남자를 만났고, 결혼을 했고, 아이를 낳는 동안 일기를 쓸 일이 없어졌다. 친정 다락방에 남아 있던 열 댓권의 일기장을 뒷마당에서 불태우면서 나는 웃었다. 생각하고 싶지 않은 청춘들아, 아듀. 홀가분했다. 결혼 생활. 가끔씩 삐그덕 거렸지만 행복했고, 조금 빈궁했으나 견딜만한 것이었으며, 아주 많이 게을러졌지만 심각할 정도는 아니었다.  청춘의 지난한 비망록을 쓸 때에 비하면 모든 것이 자연스러워졌고, 여유로웠다.  일기장은 이제 쉰 내 나는 행주 같은 것이 되어버렸다. 평생 일기 같은 건 쓰지 않고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다시 일기를 쓰려고 한다. 불특정 다수에게 오픈된 일기니까 완벽하게 솔직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청춘의 광기와 살기 서린 일기문을 기억하는 나로서는 차라리 잘 됐다고 위안한다. 자기기만까지를 포함하는 수준이되, 품위를 잃지 않을 것. 착한 척 하지 않되 연민도 버리지 않을 것. 위선보다는 차라리 위악적 허세가 스민 유머일 것. 이 신새벽 일기장을 열면서 스스로 다짐해본다.

몇 십 년 만에 쓰는 일기.  될 수 있는 한 솔직해질 것이다. 왜냐면 청춘의 일기처럼 이곳엔 염세도 비관도 절망도 가난도 없이 온전하게 자유롭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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