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사가 있어서 조금 늦게 들어왔다.  픽업하러 온 우리집 아저씨, 운동하고 와서 피곤한 나머지 한숨 자느라 밥도 못 먹고 있었단다. 국밥을 퍼주고 있는데 손전화기가 울린다. 얼마전 알게 된 J선생이다. 영어책을 선물하겠단다. 방금 산 따끈따끈한 책을 들고 오는 중이란다. 그녀와 나는 한 동네에 산다. 어느 소박한 강의에서 나와 J선생은 강사와 수강생으로 만났다.  한 동네에 사는 것을 진작에 알고 있었다며, 그녀가 전화를 걸어와 친분을 쌓게 되었다.  몇 번의 통화와 또 몇 번의 만남이 있었는데 그 때마다 참 열심히 사는 분이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  알고 보니 내 딸아이가 졸업한 학교의 선생님이었는데, 딸아이는 아, 그 선생님, 무척 성실한 분이셨어, 라고 기억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대단히 열정적인 사람이다. 우선 공부 욕심이 많다. 욕심이 많다 못해 공부가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단다. 해서 근무하랴, 아이 키우랴, 집안 일 하랴, 무척 바빴을텐데도 끝내 원하던 공부를 마치고야 말았단다.  아니, '공부를 마쳤다'고  표현하는 것은 그녀에 대한 모욕이다.  박사 학위까지 받았지만 그녀는 아직도 더할 공부가 남았다고, 이것저것 재도약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으니 말이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공부에 대해서는 재미있다거나, 지긋지긋하다거나 따위의 별 정서적 반응이 없다.  그저 학생이니 공부하고, 졸업하니 고것 참 시원하구나, 정도의 싱거운 감응이 있을 뿐이다.  다만,  대학 이학년이 되었을 때 공부가 하기 싫은 적은 있었다.  불어불문학이 전공이었는데, 그 멋진 학문이 나로서는 도무지 적성에 맞지 않았던 것이다. 어려웠다는 게 솔직한 고백이다. 교양과목 위주였던 일학년 때는 성적이 매우 우수했다. 왜냐면 교양과목 대부분은 시험지를 우리말로 채우는 것이었다.  이데올로기 비판이니, 고대사나, 철학개론이니, 불문학개론이니 등은 재미가 있었기 때문에 강의 열심히 듣고, 교재 몇 번만 더 읽으면 시험지를 메워나갈 자신이 있었다.

  한데, 이학년부터 본격적인 전공 공부가 시작되자 자신이 없어졌다. 회화는 어려웠고, 문법은 인내를 요했으며,  단어와 어휘는 게으름 때문에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우리말로 시험지를 메우는 것이 아니라, 외래어도 아닌, 내게는 외계어로 보이는 불어가 들어간 답안지를 작성한다는 것은 실로 엄청난 스트레스를 안겨 주었다. 고종석은 그가 쓴 에세이에서  대학교 때, 불어로 된 작품을 읽고 토론하는 써클 활동을 했는데  유익했었노라고 회상했다. 나로서는 무척 신기하고 부러웠다. 영어도 아니고 불어를 그렇게 재미있게 공부할 수있다니. 전공 공부를 싫어했던 내가  나쁘지 않은 성적으로 그나마 졸업까지 한 것은 그 외에 달리 방책이 없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공부가 미치도록 하고 싶지도 또 반대로 환장하도록 하기 싫지도 않았기 때문에 그냥 시간만 보낸 것이다.

  한데, 이제와서 슬슬 공부란 게 하고 싶어진다. 특히 영어 공부, 이 글로벌한 시대에 영어를 제대로 씨부리지(?) 못하니 심히 쪽 팔린다. 이런 얘기를 J선생과 나눴는데, 그녀는 글쎄,  진작부터 열심히 영어 공부를 하고 있단다. 개인 과외도 해봤고, EBS도 열심히 듣는단다. 그러더니만 덜컥, 책을 사주겠다고 했다. 아휴, 그냥 추천만 해줘요, 했더니 남이 사주면 책임감 때문에 열심히 하게 된다나. J선생이 사들고 온 책은 회화책 한 권과 문형 외우기 교재 한 권이다. 마음씀씀이가 고마워 나도 그녀의 아들에게 줄 책을 세 권 준비했다. 그녀의 선물은 유익해보인다. (아직 시도를 하지 않았으니 이렇게 밖에 표현 못하겠다.) 우리집 아저씨가 수강권을 끊어준 인터넷 토익이랑, 이 두 권의 책으로 올 가을부턴 영어 공부를 한 번 해볼까나 싶다. 작심삼일이라도 상관없다. 자신의 불타는 향학열을 J선생은 몸소 내게 이전시켜주고 싶어하는데 그에 대한 보답으로 열심히 해야할텐데 글쎄, 잘 할 수 있으려나?  그리하여 이제는 패키지 여행이 아니라, 배낭 메고 당당하게 저 먼 땅을 꼭꼭 밟고 싶다.

  J선생 고마워. 하지만 나 영어 공부 제대로 안 한다고 실망하지는 마. 그렇게 안 봤다고 말하지만, 실은 내가 좀 게으른 데가 있거든.

  각설하고, 진짜로 영어공부 제대로 하는 법, 누가 좀 가르쳐주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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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6-10-15 0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 공부든 잘 하는 비법은 두 가지인 거 같습니다. 연애하는 마음이든가 복수심이든가. 영어(공부)와 한동안 연애를 하시거나(내 사랑, 영어!) 영어에 복수를 해주시면 되지 않을까요(영어, 네가 그렇게 잘 났냐?)...

다크아이즈 2006-10-15 0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로쟈님 이렇게 확실한 비법을? 사실 영어는 쉬운데 공부하는 방법이 어렵잖아요.(말 된다.) 그 방법 잘 모르면 여쭤볼테니 살짝살짝 가르쳐주세요.

로쟈 2006-10-15 2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쎄요, 제대로 된 '연애'나 '복수'를 해본 적은 없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