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보는 것이 아니라 읽는 것이다 - 적어도 이 말은 내겐 현재 진행형이고 유효하다.  쓰는 데 관심이 많은 부류이다 보니 영화를 영화로만 이해하지 않고 자꾸 텍스트로 들여다보려는 무례를 범하곤 한다.   갑자기 이왕주의 책(철학 영화를 캐스팅하다)을 읽다가 이 글이 쓰고 싶어졌다. 시작했으니 말이지 이왕주 이야기부터 해야겠다. 오랜 옛날부터 그의 팬이다, 라고 말하기엔 왠지 자신이 없다. 왜냐면 철학교수이자 집필가인 그가 제법 많은 책을 냈을 텐데, 위에 언급한 책 말고는 '쾌락의 옹호'가 가진 전부이니 왕팬이라 하기엔 무리가 있으나 어쨌건 나홀로 팬이다, 라고 자부한다.  

  그가 한 지방지에 간단한 에세이를 연재한 적이 있는데, 그의 문체는 신선하고, 구체적이었다. 무엇보다 누구나 다 겪는 일상에서 아무나 할 수 없는 이야기거리를 이끌어내는 발군의 솜씨가 부러웠다. 그래서 프로필만 보고 냅다 전화를 걸었다. 그의 모든 저서가 갖고 싶었던 것이다. 인터넷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였으니, 알라딘에서 검색같은 건 생각지도 못했다.  아마는 그의 연구실에서 전화를 받았을 것이다.  내 얼토당토 않은 왕팬 고백에 그가 남아있는 모든 자신의 책을 보내줄 수도 있다고 말했지만, 나는 정중히(실은 부끄럽고, 민망해서) 거절했다.  몇 권의 책을 소개받은 것 같은데, 아마는 자신의 철학 전공과 관계 있었던 것일 게다.  내 호기심을 자극하는 책이었다면 지금도 기억할텐데, 전혀 기억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 당시 절실하게 필요한 책은 아니었던가 보다. 

  어쨌든 영화를 철학으로 풀어 쓴 이 책을 읽으면서 유난히 파인딩 포레스터가 기억에 남는다.  프로이트의 이디퍼스 컴플렉스를 엮어 독자를 설득한 그 살뜰함 때문인가?  아니다, 아니다... 그의 글빨로만 설명하기엔 뭔가 부족하고, 맞다. 지금 생각해보니 은둔 작가에 대한 소회 때문이다. 요즘 다시 읽고 있는 '앵무새 죽이기'(화장실 갈 때마다 그 무거운 책만 들고 가게 된다.  그것은  두 가지 의미이다. 심오한 읽을 거리가 아니라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얻을 게 있다는  그 거부할 수 없는 느낌) 와 매치가 됐던 것이다. 

  파인딩 포레스터에서는 의심할 여지없이 j.d 샐린저가 떠오른다.  앵무새죽이기의 하퍼 리나 호밀밭의 파수꾼의 샐린저는 단 한 권의 장편만 히트시키고 은둔형 작가가 되어버렸다.  그들의 속내와 상관없이 나는 그들이 이해된다.  그들이 천재인가, 아닌가는 별 관심이 없다. 설사 천재라 해도 인간적 고뇌에서 완전하게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에 다음 작품이 생산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운동 선수로 치자면 이년 차의 부진 징크스도 경험할 새 없이 조용히, 스스로 사라져버린 것이다.  굳이 말해야 한다면, 내 생각에 그들은 결코 천재가 아니다.(영화에서는 나레이션 상황으로 볼 때 그럴 수밖에 없겠지만) 다만 지극히 인간적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호밀밭의 파수꾼이 왜 문제작, 혹은 스테디 셀러가 되고 있는지 아직도 이해 못하긴 한다.  읽을 때마다 저 멋진 제목 말고는 누군가의 필독서가 되어야 할 자격은 없는데, 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인딩 포레스터는 영화로서는 매력적인 작품에 틀림없다. 긴가 민가 할 정도로 기억이 흐리긴 하지만 이왕주의 또 다른 영화 해석인 '일 포스티노'를 풀이한 것처럼 변증법적 흉내를 내보자면, 자말(정)은 포레스터(반)를 만나 또 다른 자말(합)이 되나니... 끊임없는 정반합의 계단을 오르다 보면, 그 꼭지점에 한 생애가 우뚝 걸려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모든 영화가, 아니 우리의 삶이 이런 공식의 수순을 밟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물론, 삐그덕 거리는 나무 계단을 만날 때가 더 많긴 하지만.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dfdf 2009-05-15 11: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hey,find wow power leveling click he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