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자발적 리뷰 쓰는 게 낫지, 타의에 의한 원고 쓰기는 내게 험난한 산과 같다.

  연말이라 그런지 원고 청탁이 조금씩 늘어난다. 걔중에는 고료가 주어지는 것도 있고, 안 주어지는 것도 있다.  세 건의 청탁 중 한 건은 현금 고료이고(역시나 돈 되는 것은 부자 회사들의 회사 신문이나 사보이다.), 한 건은 현물 고료(지방 신문사인데 워낙 열악해 설이나 추석 때마다 선물을 배송해준다. 김, 멸치, 과일, 수건 등등 닥치는 대로), 나머지 한 건은 어림 반푼 어치도 없는 고료이다.(그도 그럴 것이 딸내미 중학교 신문 편집 담당 선생님이 졸업하는 학생들을 위한 학부형의 메시지를 원했다.) 

 셋 다 내가 원해서 쓰는 글이 아니니 머리 짜깁기 하느라 죽을 쑨다. 새벽 4시까지도 모자라 잠시 한 숨 돌리고 지금 겨우 끝냈다. 그것도 결국 두 번째 원고는 펑크를 내버렸다.  첫 번째 원고는 고료가 금세 입금되니 망설일 수 없고,  세 번째 원고는 학부형으로서 교육계의 황송한 눈치를 보느라 거절할 수 없고,  세 번째는 써주면 그 쪽에서 고맙게 활용할 것이고, 안 써줘도 내 쪽에서 원망 한 번 들으면 끝나는 장사니 배짱을 부릴 수가 있었다. (정말이지 고료가 곶감보다 무섭긴 하다!)

  멋 모르고 쓰던 시절, 글쓰기를 좋아하니 재능도 좀 있는 줄 알았다. 한데, 절대 아니라는 것을 절감한다.  자의든 타의든 원고를 써야할 때, 최대한 미루고 미룬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이다. 자신 있고, 즐기는 일이라면 그렇게 할 수가 없다. 글쓰려고 컴 앞에 앉았다가 인터넷만 주야장천으로 붙들고 늘어진 날이 하 몇 날이던가?  이대로는 안 된다고 다짐하면서도 쉽게 독해지지 못하는 스스로를 보면서 실망하는 날들이 많았다. 게다가 쓰려고 앉아도 쉽게 써지지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내켜서 쓰는 글은 술술 써지는데 강요(?)에 의한 글은 그렇게 헤맬 수가 없는 것이다. 원고지 10매 메우는데 세 시간을 넘기는 것은 다반사다. 아무리 아마추어 글쓰기라지만 진정 고지는 멀었구나, 하는 생각에 부끄럽기만 하다. 

   전문 작가들은 말할 것도 없고(하기야 전문 작가도 나름이다), 알라딘을 넘나드는 숱한 ~디너들(!) (내가 부러워하는 이란 단서를 붙은 이들)은 어찌 그리 쉽게 글을 쓰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아직 덜 읽어서 그럴 것이다. 더한 내공을 쌓아, 씨불이는 것마다 문장이 되고, 누르는 것마다 글이 되는 날이 내게 왔으면 좋겠다.

  뭔 헛소리 해쌌노?  남은 배추 속이나 넣으러 가야겠다.  장장 10시간이나 투자하고도 만족할만한 글을 못 건진 눈으로 배추 속이나 제대로 보일지 모르겠다.  

 

  **덧붙임  - 디너질 몇 달만에 연말 부록으로 , 그간 내가 지켜본 몇몇 디너들의 발군의 글솜씨에 대해서 '칭찬 한 마디' 해볼까나 하는데, 시간이 날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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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6-12-22 2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큰 돈도 되지 않는 타의적 글쓰기...머리 허옇게 세죠. 흐흐흐
검은 눈동자님 기운 내셔서 연말부록 거하게 한 번 써 주세요(또 다른 압박!)^^*

다크아이즈 2006-12-25 2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연말부록 진짜 쓰고 싶어요. 물론 그 중심에 '파란여우'가 떡하니 버티고 있는...

로쟈 2007-01-19 2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글쓰기 장애 환자랍니다. 매번 마감을 놓치고 괴로워하는.^^;

다크아이즈 2007-01-20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감을 놓치고 괴로워하는 건 고수나 신참이나 한 가진가봐요. 위안 모드^^*

내가 지켜 본 ~디너들, 코너에 로쟈님 이름도 당근 있는데, 게으름 때문에 미루고 또 미루고.
 

 



개나리가 피었다.  산수유 열매도 아직 지지 않았다.

일주일 전 쯤 아파트 꽃밭에 오질없이(?) 핀 개나리를 보고 여고시절 생각이 났다.

그 때도 개나리는 계절 감각이 없었다.  고1이던가 기말고사 수학 시험을 망치고

(한 35점 쯤,  그 때 평균이 40점 쯤 되었을 거다.)

망연자실 화단을 쳐다보는데 지랄할 개나리가 화들짝 피어있었던 것이었던 것이다!!  12월 한 겨울이었다.

그 때 알았다.  계절에 상관없이 개나리는 날씨와 온도만 맞으면 마구마구 피어댄다는 것을.

내 마음도 몰라주고, 그 겨울 샛노랗게 발랄하던 개나리만 보면 그 해 성적표 수학과목  평어 '양'이 자꾸 떠오른다. (내 생애에 '양'이와 친구가 된 적은 그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100미터를 22초에 주파해주시는 놀라운 '나무뎌'과이지만 체육과목조차 '양'이와 친구한 적은 없었다. 흑흑...)

그 때 결심했다. 개나리 같은 줏대없는 꽃일랑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아, 아직도 유효한 결심이다.)

 

 

봄이면 개나리 못지않게 일찍 샛노랗게 피는 꽃이 산수유다.  봄이면 이곳 주변 산은 온통 산수유 꽃으로 샛노랗다. (걔들은 꼭 이른 봄에만 피어주는 센스를 잊지 않는다.  그 줏대, 고마우셔라!)  늦가을이면 타원형의 붉은 열매를 맺는데 그것이 아직도 아파트 화단에 매달려있다. 

다른 곳에는 폭설 난무하다는데, 좀 전 꽃밭에 내려가 보았더니 개나리와 산수유 열매 모두 무사하시다.  오늘 제법 매서운 날인데도.... 며칠 추위가 더하면 개나리 얼어 붙으려나?   개날아, 네 오질없음을 이 한 장의 사진으로 용서하련다!

산수유 열매에 내려앉는 눈꽃도 볼만한 터인데 이곳에서는 힘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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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몹시 춥다.  동해안 쪽으로는 폭설까지 겹쳐 이중고를 겪고 있다 한다.   이곳은 눈은 오지 않았지만 찬바람까지 비껴갈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누군가에게 자료를 건네받기로 되어 있어 외출을 했다. 추위를 심하기 타기 때문에 중무장을 했다. 토끼털 외투에 캐시미어 목도리까지 휘감았는데도 등짝이 시렸다.  약속인을 위해 제과점에 들러 맛깔스런 만쥬를 포장하고, 마트에 들러 비타민 음료를 챙길 때까지는 룰루랄라였다. 

 주차 공간이 마땅찮아 대로변 갓길과 맛닿은 차선에 비스듬히 차를 세웠다. 그야말로 자료만 건네받으면 되니까 잠깐 동안 실례한들 어쩌랴 싶었다.  시동도 일부러 끄지 않았다. 차가워진 차를 다시 데우는(?) 게 끔찍했던 것이다. 히터를 약하게 틀어둔 채 비상깜박이를 켜두고 차에서 내렸다. 숄더백도 차 안에 그대로 두었다.  평소 내 가방은 보통 여성들 것보다 좀 더 무거워 쇼핑백과 더불어 들기엔 무리가 있겠다 싶었다. 

  자료를 건네받고 돌아서 나오는 시간, 십 여분도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추위에 덜덜 떨면서 차 문을 열었다. 손잡이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뿔사!  내릴 때 차문을 잠가버렸던 것이다. 보조 열쇠조차 가방 안, 지갑에 있었으므로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차선에 비스듬히 걸친 채, 눈치없이 비상깜박이만 똑딱거리는 고물차가 그토록 한심하게 보인 적은 일찍이 없었다. 

  우리집 아저씨에게 sos를 청할 수밖에 없었다.  내 보조열쇠를 열쇠꾸러미에 달고 다니기 때문이다.

  " (동정심 유발하는 목소리로) 내, 일  또 저질렀다.  시동 켜놓고 문 잠갔뿟다! "

  "벌써 몇 번째고? 어디고?

  "## 초등학교 앞인데, 빨리 와서 열어줘."

  "내, 열 한시부터 회의라서 못 간다."

  시계를 보니 그 때가 10시 25분 경이었다. 바람같이 달려오면 십 오분 정도 걸릴 거리였다.  저렇게 말해도 달려올 사람이라는 걸 알기에 느긋이 기다렸다. 기다리는 동안 근처 편의점에 들렀다.

  "진짜 춥네, 따뜻한 캔 커피 하나..."

  이렇게 말하려다 말고 얼른 말을 집어삼켰다. 수중에 지갑도 없는데 웬 캔커피?  아침부터 남의 사정 줄줄이 들어주고 물건부터 냅다 줄 사업주가 어디있겠나 싶어 그냥 밖으로 나왔다.  편의점 앞 야외용 플라스틱 벤치에 앉아 기다리니 우리집 아저씨가 도착했다. 열쇠꾸러미를 건네는  눈길이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본 터키산 칼날보다 매섭다. 우쒸, 그래서 어쩌라는 건데? 겁먹을 내가 아니다. 누군 실수하고 싶어서 하냐고?  시계를 보니 열시 45분. 빛의 속도로 달려가면 회의 시간에 늦지는 않을 것 같았다. 따뜻한 커피라도 건네주고 싶었는데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저만치 달려가버린다.

  차 열쇠와 관련된 내 건망증은 추위와 관계가 깊다. 이를테면 상습범이다.  추위를 피해야지, 하는 단순한 생각에 시동을 켜둔채 내린 뒤, 수동으로 차문을 잠가버린 경우가 한 두 번이 아니다.  한 번은 내리막길에 주차해둔 차를 시동도 켜지 않은 채 핸드브레이크를 내린 채 운전대를 돌리다 구석에 처박을 뻔도 했다.  (이 때도 겨울이었고 너무 추운 나머지 시동켜는 걸 깜박하고 그딴 무모한 짓을 했다!) 그 때마다 우리집 아저씨를 불러내야했다. 남들은 보험회사에 전화한다지만 번거로운 절차도 싫고 해결 속도도 우리집 아저씨보다 빠를 것 같지 않아 그렇게 해본 적은 없다.  싸한 눈길 한 번만 참으면 내가 편한데 싶어 그간 애꿎은 우리집 아저씨를 괴롭혔다. 

  앞으론 절대! 라고 외치지만 이 몹쓸 병,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아이고, 내 팔자야!   한 번에 두 가지 일을 잘 하지 못하는 것은 나이탓이려니 한다.  비슷한 처지의 다른이들은  출산 탓이라고도 하는데, 그것은 차마 인정하지 못하겠다. 안 그래도 출산율 저하 때문에 심각한 이 땅,  아리따운 젊은 여성들 자극하는 그런 망발을 할 수는 없고... 젊은 날엔 건망증 때문에 고생한 적은 없었으니 나이탓이 아닐까 짐작해보는 것이다.

  오, 신이시여! 이 겨울 가기 전 다시는 이 병 도지지 않게 도와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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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단독자로 살아가기를 꿈꾸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종일 사람과 부대낀 자든, 혼자만의 무료한 시간에 진저리를 친 자든 실상은 혼자일 때 가장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단절된 공간 속 자신만의 오롯한 섬 하나를 갖게 되었을 때의 그 희열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다수의 무관심이라는 횡포 속에 방치된 자아를 설명한 것이 '군중 속의 고독'이라면 반대로 대중의 관심 속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자발적 수인(囚人) 증세를 나름대로 '군중으로부터의 탈출'이라 명명해본다. 피치 못할 무리 속에 섞인 단독자의 자아는 끊임없이 덜컹거리고 욱신거린다.

  미술관을 자주 갈 일은 없지만 아트 선재미술관에서 본 그림 한 덤은 이러한 인간 존재의 의문과 갈등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독일작가 요르그 임멘도르프의 '친구들과의 저녁식사' (Dinner with friends)가 그것이다. 여러 전시품 속에서 스쳐지나가듯 본 그림일뿐인데도 그 첫인상은 너무나 강렬했다. 한 편의 그림이 이토록 집요하고 은유적으로 인간의 부조리를 말할 수 있다니!

  어두운 초록빛 배경 속, 식탁을 가운데 두고 친구들이 모였다. 협잡꾼, 정치가, 사업가 등의 타이틀을 단 친구들 맨 끝에 화가의 자화상도 등장한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의 모임인지라 면면이 화려하기 그지없다. 한데 왠지 그들의 만찬자리가 그리 편하지만은 않아 보인다. 불편한 시선을 감추느라 한 사람은 테이블 아래를 주시하고, 어떤이는 애꿎은 물컵만 만지작거리고, 또 다른이는 무의식적으로 구두코를 또각거린다. 혹, 동상이몽이란 동양의 사자성어를 배운 임멘도르프가 회화적 기법으로 그것을 표현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도 모두들 딴전이다.

  화가는 희망을 얘기하고 싶었을까? 아니, 희망 없는 현대인의 '낭만적 관계' 부재를 초록빛 밀실로 표현했는지도 모른다. 정치인 친구의 속절없는 야심을 보면서 영원한 라이벌인 사업가 친구는 속이 뒤틀린다. 특유의 허풍과 위선으로 살아온 고급 룸펜은 이러한 정치인 친구에게 맞장구를 친다. 친구들과의 저녁 식탁은 하염없이 겉돌 뿐이다. 맨끝에 앉아있던 화가는 무심한 시선으로 이 상황을 스케치한다.

  이 만찬의 처음과 끝을 이미 알고 있는 화가는 열 손가락에 낀 형형색색의 반지와 우스꽝스런 귀걸이로 퍼포먼스를 벌인다. 이 피로한 만찬에 초대된 인간 군상에 대한 비틀기를 시도하는 것이다. 친구이염서도 겉도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보니 정작 포크와 나이프는 어디에 있는지, 포도주 맛은 신지 쓴지조차 가늠할 길이 없다. 모두들 눈동자 굴리기에 바쁘자. 그림 속에서 화가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관계는 피로하다고. 손가락에 낀 반지보다도 오늘 밤, 내게 당신들의 존재는 성가실 뿐이라고. 그걸 알면서도 우리는 친구들과의 저녁 식사에 동참해야 한다. 그것이 부조리하기만 한 인생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자발적이지 않은 모든 만남은 부지불식 간에 견고한 성을 쌓는다. 누구나 원하든, 그렇지 않든 사회적 관계 속에서는 저녁 식사가 늘어날 수밖에 없다. 임멘도르프의 그림은 이러한 인간의 근원적 피로에 대한 메시지로 읽힌다. 정치적, 사회적, 역사적인 관계가 부담스럽게 느껴진다면 그 약속을 취소할 수 있는 배짱조차 필요하다고 임멘도르프는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원하지 않는 친구와의 저녁 식사 테이블에 앉아 있는 그대가 보인다. 그대는 무료한 나머지 목걸이를 만지작거리거나 진주귀걸이가 달린 귓밥을 문질러댈지도 모른다. 부러 반지 열 개를  낀 채 위악을 떠는 임멘도르프를 닮을 수 없을 방[는 차라리 저녁 식사 약속을 차지 않는 용기도 필요하리라. 거짓 만남은 죄악이다, 라고 이미 화가는 에둘러 가르쳐주고 있지 않은가.

  피곤한 사람살이에 지친 날, 그런 날이면 임멘도르프를 만나러 한적한 미술관 모퉁이를 휘돌아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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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는 아이를 데리고 시험장(?)에 다녀왔다.

  교육청 산하 영재교육원생 선발 시험이라 그런지 학부형들의 열의가 대단했다.  치열한 학교별 예선을 거친 자들의 자부심이 여유를 가장한 그미들의 미묘한 제스처에서 읽을 수 있었다. (그네들 눈에도 내가 그렇게 비쳤을지도 모른다.) 운동장에서 대기하는 동안 아이들은 소풍나온 것처럼 마냥 신났는데,  삼삼오오 모인 부형들은 심각하고도 진지하게  그간 갈고 닦은 교육 정보를 교환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일찌감치 교육열 따위에서는 한발, 아니 두 발쯤 물러난 자칭 자유주의자인(무관심을 이렇게라도 위안하련다.) 나는 그미들이 하는 얘기에  적당한 추임새를 넣으면서 열심히 들었다. 새길 얘기도 많았지만 집에 가면 다 까먹을 게 뻔했기에 맘만은 편했다.

 시험을 치고 나온 아이들 얼굴이 발그스름 상기되었다. 

  "아휴, 어려워!"

  대부분의 아이들 입에서 나온 말이다.

  아들도 예외가 아니다. 웬만한 경시문제를 풀면서도 어렵다는 얘기는 별로 하지 않는데(문제 해결 능력은 별로 없지만 상황자체에 몰입하는 걸 즐기는 것 같다.) 시간이 없어서 서 너 문제는 손도 못댔단다. 45분만에 15문항을 풀기엔 시간과 머리가 턱없이 부족했던 모양이다.  에너지가 소진되었는지 돌아오는 차 안에서도 피곤끼가 역력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가방을 휙 던지면서 녀석이 말했다.

  "따뜻한 데서 몸이나 지져야겠다! (실은 경상도식으로 <찌져야겠다>고 된 발음을 했음.)

  순간, 허걱! 하는 심정이었다. 오학년짜리 남자애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올 것까지는 없었던 것이다. 아무리 힘들고 진이 빠져도 그렇지 '따뜻한 데서(마루에 깔아놓은 옥장판을 두고 한 말이다) 몸이나 지져야겠' 다니!  얼른 따뜻한 바닥에 드러누우면 힘들다는 걸 엄마가 인정하게 되고, 따라서 학원에 가지 않아도 되고, 밀린 숙제나, 학습지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속셈이 깔려있었다.

  그렇더라도 차라리 엄마, 나 힘들어요. 좀 쉴게요. 이렇게 말했으면 동정심이라도 생겼을텐데... '따뜻한 데서 몸이나 좀 지져야겠다' 라는 달관적( ! ) 인생관은 오학년 짜리 남자애 입에서 나올 말로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물론 스스로 개척한(?) 말도 아니었다. 그 어투의 진원지는 다름 아닌 '엄마'였던 것이다. 평소 체력단련을 운동이 아니라 잠으로만 하는 이 애미에게서 아들은 그런 깜찍한(?) 발언을 은연 중에 전수받았던 것이다.  추위를 많이 타는 요즘,  조금만 피곤해도 '따뜻한 데서 몸이나 지지고 싶은' 내 욕망을 알게 모르게 그렇게 표출했던 게 아들에게 자연스레 학습되었던 모양이다. 끔찍하셔라!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엄마 심부름 가는 아이의 동선을 카메라가 따라 잡은 것을 본 적이 있다. 어여쁜 꼬마 아이는 심부름 가는 내내  '아이, 상큼해!'를 연발하는 것이었다.  상상해보라.  대여섯살 여자아이가 갈바람에 살랑이는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아이, 상큼해!' 와 더불어 심부름 가는 모습을.  화면을 지켜보던 아동심리학자는 '평소 엄마의 긍정적인 표현법이 자연스레 아이에게 전수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절대 공감이었다.

  근데, 나는?

  '아이, 상큼해!' 정도는 못 되어도 적어도 '따뜻한 데서 몸이나 지져야겠다'라는 망발(?)은 막았어야 하지 않았을까? 입 앙다물고 지금부터 지지던 몸 벌떡 일으켜 연습해야겠다.

  '힘들어도 할 만해!'

 '왜 이렇게 공부가 재밌지?'

 저 두 말이 자연스레 아들 입에서 나오려면 엄마는 얼마나 내공을 쌓아야 하는 것일까?

 

  덧붙임 **  결국 녀석은  옥돌매트에서 '몸을 푹 지지느라' (장장 두 시간 반이나)  학원, 숙제, 학습지, 샤워 등등 남은 하루 일정 모두에서 자유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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