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단독자로 살아가기를 꿈꾸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종일 사람과 부대낀 자든, 혼자만의 무료한 시간에 진저리를 친 자든 실상은 혼자일 때 가장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단절된 공간 속 자신만의 오롯한 섬 하나를 갖게 되었을 때의 그 희열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다수의 무관심이라는 횡포 속에 방치된 자아를 설명한 것이 '군중 속의 고독'이라면 반대로 대중의 관심 속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자발적 수인(囚人) 증세를 나름대로 '군중으로부터의 탈출'이라 명명해본다. 피치 못할 무리 속에 섞인 단독자의 자아는 끊임없이 덜컹거리고 욱신거린다.
미술관을 자주 갈 일은 없지만 아트 선재미술관에서 본 그림 한 덤은 이러한 인간 존재의 의문과 갈등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독일작가 요르그 임멘도르프의 '친구들과의 저녁식사' (Dinner with friends)가 그것이다. 여러 전시품 속에서 스쳐지나가듯 본 그림일뿐인데도 그 첫인상은 너무나 강렬했다. 한 편의 그림이 이토록 집요하고 은유적으로 인간의 부조리를 말할 수 있다니!
어두운 초록빛 배경 속, 식탁을 가운데 두고 친구들이 모였다. 협잡꾼, 정치가, 사업가 등의 타이틀을 단 친구들 맨 끝에 화가의 자화상도 등장한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의 모임인지라 면면이 화려하기 그지없다. 한데 왠지 그들의 만찬자리가 그리 편하지만은 않아 보인다. 불편한 시선을 감추느라 한 사람은 테이블 아래를 주시하고, 어떤이는 애꿎은 물컵만 만지작거리고, 또 다른이는 무의식적으로 구두코를 또각거린다. 혹, 동상이몽이란 동양의 사자성어를 배운 임멘도르프가 회화적 기법으로 그것을 표현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도 모두들 딴전이다.
화가는 희망을 얘기하고 싶었을까? 아니, 희망 없는 현대인의 '낭만적 관계' 부재를 초록빛 밀실로 표현했는지도 모른다. 정치인 친구의 속절없는 야심을 보면서 영원한 라이벌인 사업가 친구는 속이 뒤틀린다. 특유의 허풍과 위선으로 살아온 고급 룸펜은 이러한 정치인 친구에게 맞장구를 친다. 친구들과의 저녁 식탁은 하염없이 겉돌 뿐이다. 맨끝에 앉아있던 화가는 무심한 시선으로 이 상황을 스케치한다.
이 만찬의 처음과 끝을 이미 알고 있는 화가는 열 손가락에 낀 형형색색의 반지와 우스꽝스런 귀걸이로 퍼포먼스를 벌인다. 이 피로한 만찬에 초대된 인간 군상에 대한 비틀기를 시도하는 것이다. 친구이염서도 겉도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보니 정작 포크와 나이프는 어디에 있는지, 포도주 맛은 신지 쓴지조차 가늠할 길이 없다. 모두들 눈동자 굴리기에 바쁘자. 그림 속에서 화가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관계는 피로하다고. 손가락에 낀 반지보다도 오늘 밤, 내게 당신들의 존재는 성가실 뿐이라고. 그걸 알면서도 우리는 친구들과의 저녁 식사에 동참해야 한다. 그것이 부조리하기만 한 인생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자발적이지 않은 모든 만남은 부지불식 간에 견고한 성을 쌓는다. 누구나 원하든, 그렇지 않든 사회적 관계 속에서는 저녁 식사가 늘어날 수밖에 없다. 임멘도르프의 그림은 이러한 인간의 근원적 피로에 대한 메시지로 읽힌다. 정치적, 사회적, 역사적인 관계가 부담스럽게 느껴진다면 그 약속을 취소할 수 있는 배짱조차 필요하다고 임멘도르프는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원하지 않는 친구와의 저녁 식사 테이블에 앉아 있는 그대가 보인다. 그대는 무료한 나머지 목걸이를 만지작거리거나 진주귀걸이가 달린 귓밥을 문질러댈지도 모른다. 부러 반지 열 개를 낀 채 위악을 떠는 임멘도르프를 닮을 수 없을 방[는 차라리 저녁 식사 약속을 차지 않는 용기도 필요하리라. 거짓 만남은 죄악이다, 라고 이미 화가는 에둘러 가르쳐주고 있지 않은가.
피곤한 사람살이에 지친 날, 그런 날이면 임멘도르프를 만나러 한적한 미술관 모퉁이를 휘돌아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