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솝우화로 읽는 경제 이야기
서명수 지음, 이동현 그림 / 이케이북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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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에 공짜는 없다.

  미국 격언에 <There is no free lunch>라는 말이 있다. ‘프리 런치’란 서부 개척시대에 술집에서 내놓던 미끼 점심을 말한다. 일견 공짜로 보이지만 실은 비싼 술값 안에 점심 값도 포함되어 있다. 데이비드 콜랜더 교수가 쓴 경제학 책에도 그런 예화가 나온다.

 

  경제가 무엇인지 알고 싶은 왕이 학자들에게 책을 쓰라는 지시를 내렸다. 몇 년에 걸쳐 수십 권의 책이 완성되었다. 방대한 양에 질린 왕이 한 권으로 줄이라고 명했다. 한 권의 완성본을 보자 그것도 길다고 왕은 트집을 잡았다. 한 줄로 줄이지 않으면 교수형에 처하겠다고 했다. 어차피 죽을 몸, 점심이라도 먹을 요량으로 학자들은 음식을 배달시켰다. 점심 값이 없었던 그들을 보고 배달원은 투덜대며 음식을 도로 가져가버렸다. 그 때 배달원이 한 말에서 힌트를 얻어 학자들은 한 줄 요약문을 써낼 수 있었다. ‘공짜 점심은 없다’였다.

 

  미끼라는 걸 알면서도 인정에 얽매이거나 순간의 판단 실수로 공짜에 혹할 때가 있다. 추석 앞둔 대목에 그런 경우를 겪었다. 유명 대학 음료 사업부라며 콜 센터 직원이 몇 차례나 전화를 걸어온다. 내가 속한 모임에 판촉 행사 차 홍보 직원이 잠깐 들르겠단다. 십여 분 시간만 내주면 되고 부담 느낄 필요가 없는데다 점심 도시락까지 제공하겠다는 것이었다. 세상에 공짜 없다는 걸 알면서도 어차피 먹어야 할 점심, 그렇게라도 해결하자는 생각도 없지 않아 약속을 잡아 버렸다.

 

  홍보 직원이 준비해온 고급 일식 도시락을 돌리고 판촉 멘트를 한다. 그 어떤 강매도 강압도 없이 정중한 톤으로 설명을 한다. 난공불락인 아줌마 고객을 상대로 한 가계의 책임을 지고 있을 판촉 직원은 최선을 다한다. 듣고 있는 고객 입장에서 맘이 짠하다. 눈치껏 주변을 살피니 다른 사람들 맘도 같아 보였다. 그렇다고 한두 푼 하는 것도 아닌 블루베리 음료를 무턱대고 사겠다고 계약서에 사인할 수도 없다.

 

  다만 어릴 적 제 아비를, 지금의 제 남편을 보는 것 같은 가장의 무거운 어깨를 목도한 우리들은 도시락에다 코를 박은 채 별 말이 없다. 이런 먹먹한 분위기였으면 차라리 만날 약속을 하지 않는 게 나을 것이었다. 반도 먹지 못한 도시락을 밀어낼 때, 단내 나는 판촉남, 아니 한 집안 가장의 말끝이 흐려지고 손끝 또한 떨리는 걸 보았다.

 

  결코 공짜 점심은 없었다. 평생 내가 먹은 음식 중 가장 값나가는 점심이었다. 세상에 공짜가 없다는 것을 실감나게 해준 한 끼의 점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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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 만들어진 신화
송호정 지음 / 산처럼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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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고 지내는 필리핀 친구가 있다. 귀화한 지 몇 년 되었는데 타국에서 온 사람들 대개가 그렇듯 우리말이 서툴 수밖에 없다. 당연히 우리 역사와 문화에도 낯설다. 그런 그녀와 추석 연휴를 이야기하다가 개천절까지 넘어오게 되었다. 그녀가 묻는다. 개천절이 뭐냐고? 모국어를 맘대로 구사하는 사람들끼리도 개천절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난감한데, 이방인 출신이 진지하게 물어오니 당황스럽기만 하다.

 

  단군이 우리나라 조선을 세우신 날을 기념하는 국경일이라고 뻔한 설명을 하는데 뒤통수가 당긴다. 아무래도 평소에 그런 순수한 의미보다는 합법적 공휴일이 하루 주어지는구나, 하는 생각이 앞섰기 때문이다. 특히, 올해의 경우 추석 뒤에 개천절이 이어지는 바람에 고마운 휴일이네, 하는 정도의 생각만을 했던 게 사실이다.

 

  필리핀에도 독립기념일이 있는데 그것과 비슷한 것이냐고 묻는다. 그건 아니라고 말했다. 애매모호하기만 한 이름의 광복절이 그들의 독립기념일과 비슷할지 몰라도 개천절은 오롯이 제가 나고 자란 뿌리의 정체성을 살피는 것과 연관이 깊다. 유수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지 않으면 갖기 힘든 뼈대 있는 기념일이란 말이다. 하지만 그 진중한 의미를 정작 우리는 잊고 산다.

 

  기원전 2333년 단군왕검이 최초의 국가 조선을 건국했음을 기리는 뜻으로 제정한 날이 개천절이다. 하지만 ‘하늘이 열린다’는 개천의 본뜻은 이에 앞선 기원전 2457년 환웅 시대로 소급된다. 하늘신인 환인의 뜻으로 환웅이 처음으로 하늘을 열고 백두산 신단수 아래 신시를 열어 홍익인간의 정치를 펼치기 시작한 날이 음력 시월상달 초사흗날이었다. 상달은 으뜸달을 말하는데, 풍요와 수확의 계절인 시월이 상달이 되는 건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개천절은 이처럼 건국 신화의 경축일이자, 민족국가로서의 정체성 확립을 근거하는 자긍의 의미가 담겨 있다. 당시 시월상달은 당연히 음력이었겠지만 그것을 따지는 건 단군 이야기가 신화냐, 역사냐를 따지는 것만큼이나 일반 시민에게는 큰 의미가 없다. 우리가 물이라면 샘이 있을 것이고 우리가 나무라면 뿌리가 있다는 것을 일 년에 한 번쯤 되새기는 날이 있어야 하는 건 당연하다. 그런 자긍의 뿌리가 올해로 4345년째이다. 그야말로 반만 년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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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1
미셸 투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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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읽다 보면 등장인물 이름을 참 센스 있게 지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모험 항해 소설『로빈슨 크루소』의 ‘프라이데이’가 그렇다. 학생들 독서 토론용 책으로 자주 접하게 되는데 볼수록 책 내용보다는 이름에 눈길에 간다. 캐릭터 상황을 잘 살린 이름이라서 그런가 보다. 왠지 이 책은 펼치게 되더라도 앞부분은 읽기가 꺼려진다. 지루한 항해와 난파, 무인도 표착과 생활 과정 등은 별 특징이 없어 기억에 남지도 않는다. 로빈슨 크루소가 축제의 희생양이 된 프라이데이를 구출하는 장면부터 눈길이 확 끌린다.

 

  금요일에 발견하였다고 이름마저 프라이데이인 로빈슨 크루소의 충직한 노예. 주인공인 로빈슨 크루소를 넘어서지 못하고 그림자 역할에 머문 프라이데이는 연민과 안타까움을 불러일으켰다. 독자로서 더 큰 의미 부여를 하고 싶어 안달 나게 하는 캐릭터였다. 이런 갈증을 일찍이 성찰한 이가 있었으니 프랑스 작가 미셀 투르니에였다.

 

  18세기 초, 로빈슨 크루소가 탄생한 지 250년이나 흐른 뒤 투르니에는 그 소설을 재구성하기에 이르렀다. 원작 로빈슨 크루소가 나온 당시는 백인과 영국과 문명인과 기독교가 세계관의 기준이 될 때였다. 그러니 계몽주의적 입장에서 그 기준을 넘어서는 타인종과 기타 대륙과 비문명인과 비기독교인은 교화의 대상으로 보았다. 프라이데이가 주체성을 확립할 수 없었던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프라이데이에게 주체의식을 부여하고 싶었던 투르니에는 로빈슨 크루소를 패러디한『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을 처녀작으로 내놓았다. 프랑스 작가가 썼으니 프랑스 말로 금요일에 해당하는 ‘방드르디’란 이름이 등장하게 된다.

 

  작가는 방드르디에게 개성을 확실하게 부여한다. 프라이데이가 단순한 주인의 노예였다면 방드르디는 당당한 주체로서 행동반경을 확보하게 된 것이다. 프라이데이가 착한 수동성을 의미한다면 방드르디는 천진난만한 능동성을 부여받았다. 원작에서는 로빈슨 크루소가 주인공이었다면 패러디 작에서는 당연히 방드르디가 이야기의 주체자였다. 방드르디와 로빈슨 크루소는 주인과 노예가 아니라 인간대 인간으로서 연대하는 동료가 되는 것이다.

 

  세계관의 전복이 이루어진 것이다. 세상에 미개인과 문명인의 경계가 어디 있으며, 니 땅 내 땅이 어디 있으며, 가르치고 배우는 구분이 어디 있냐고 말하는 것이다. 사람은 사람이고 자연은 자연일 뿐 우위의 논리로 설명될 수 없는 게 문명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문명이라고 말할 때 그 구분법은 휘파람 부는 날의 미세한 심장의 떨림을 알아차리고, 개미에게도 그들의 길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고, 바람 부는 언덕의 풀냄새만으로도 공기의 흐름을 눈치 채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그 가늠자가 되는 나만의 친구 ‘금요일’을 찾아 옷깃을 여며 나서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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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오 크뢰거 / 트리스탄 /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
토마스 만 지음, 안삼환 외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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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이렇게 생겨 먹어서 사람들과 충돌만 일삼는 거지? 왜 선생님과 사이는 좋지 못하지? 왜 급우들 사이에 섞여 있으면 서먹서먹하기만 하지? 왜 건전하고 밝은 저 평범한 학생들처럼 되지 못하지? 왜 선생님들 하는 짓이 다 우스꽝스럽게만 보이지? 왜 얌전한 모범생이 되지 못하고 시 나부랭이나 끼적이다가 놀림감만 되지?

 

 

  독일 작가 토마스 만의 청소년기는 저런 생각으로 가득 찼으리라. 그의 중편 소설『토니오 크뢰거』는 당황스러울 정도로 내밀한 고백으로 가득하다. 그 은밀한 고백 밑바탕에는 평범한 시민성과 예술가적 기질 사이의 고뇌가 숨어 있다. 예술가적 성향의 사람이 그러하듯 토니오는 기본적으로 아웃사이더인데다 깊이 보고 자세히 본다. 상처 많은 영혼이 될 수밖에 없다.

 

 

  동급생 미소년 한스를 해바라기하지만 ‘가장 많이 사랑하는 자는 패배자이며 괴로워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소박하고도 가혹한 교훈만을 터득할 뿐이다. 금발 머리에 푸른 눈을 한 소녀 잉에를 맘에 품지만 상대는 악의 없이 무심할 뿐이다. 평온하고 건전한 시민을 대표하는 한스나 잉에는 예술가적 기질로 길 잃은 시민이 되어버린 토니오와는 다른 세계를 살고 있다. 겨우 열네 살에 토니오는 자신의 길이 평범한 시민성과는 다르다는 것을 자각한다.

 

 

  단춧구멍에 들꽃을 꽂은, 정돈되고 명상적인 부르주아 아버지와, 약간 방종한 듯 자유롭고 정열적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나 운명적으로 시민 계급과 예술가적 기질 사이에 방황할 수밖에 없는 토니오 크뢰거. 그는 두 세계 중 어느 곳에도 안주할 수 없다. 예술가 그룹에서는 경멸과 환멸을 맛보고, 시민 계급은 그에게 굴욕과 패배감만을 안겨 줄 뿐이다.

 

 

  일반적 예술가 소설의 말미라면 꼿꼿하게 예술가로서의 가시밭길을 가는 것이어야 한다. 하지만 토니오는 자신이 부러워해 마지않던 시민성을 경외와 긍정의 시선으로 수용한다. 예술이라고 꼭 비루하고 비리고 거칠고 환상적이거나 비정상적어야 하는 게 아니라고 강변한다. 정갈하고 향기롭고 단정하고 현실적이거나 정상적인 것이야말로 동경하는 세계임을 깨닫는다. 그것을 사랑하고 더러 질투하는 인간적인 예술가로 거듭 나겠다고 고백한다.

 

 

  길 잃은 시민성의 굴레를 쓰고 고뇌했을 토니오는 조금은 평범하지 않다고 믿는 우리네 자화상이기도 하다. 단춧구멍에 들꽃을 꽂은 채 단정히 책을 읽는 아버지와 때론 기타나 만돌린을 들고 거리로 나서는 집시 풍의 엄마가 공존하는 게 사람이다. 예술이냐, 현실이냐 길 잃은 토니오 크뢰거들이 어슬렁대는 한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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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글 바로 쓰기 세트 - 전5권 우리 글 바로 쓰기
이오덕 지음 / 한길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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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쁘다는 핑계로 페스트 푸드를 애용할 때가 있다. 해로운 게 너무 많이 들었다지만, 맛있는 데다 무엇보다 간편하니 찾을 수밖에. 요즘은 차를 타고 주문하는 ‘드라이브 스루’라는 편리한 제도도 있어 할인 스티커를 챙겨 가며 활용하는 편이다.

 

 

햄버거 가게에 가면 영양가 낮은 음식을 먹는다는 불안감보다 더 불편한 게 있다. 근무자들의 언어 습관이 그것이다. ‘고객님, 이번에 새로 나온 치킨 버거세요.’, ‘오늘 특별세트 메뉴는 새우버거세요. 점심시간이라 할인되십니다.’ 하나 같이 저렇게 말한다. 처음엔 조금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다가 자꾸 듣다 보면 실소가 나온다.

 

 

종업원 입장에서는 고객은 왕이니 무조건 높이면 좋다고 생각한다. 최대한 친절하고 공손한 표현을 찾다 보니 높임말 어미인 ‘시’자를 붙이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말 '-시-'는 주체의 동작이나 상태를 높일 때 쓰이는 어미인데, 기본적으로 사람에게만 쓸 수 있다. 주체의 사물까지 높여서 말하기엔 우스꽝스럽다. 과유불급이라 했다. 최대한 서비스를 해야 한다는 무의식이 그런 언어 습관을 낳은 것이다.

 

 

햄버거 가게를 예를 들어서 그렇지 보험회사, 백화점, 병원, 은행 등 서비스가 요구되는 직종에서는 어디든지 그런 어법을 만날 수 있다. 처리하는 데 2, 3일 걸리세요. 이 옷이 더 비싸세요. 이쪽으로 가시면 병동이 나오세요. 이 상품 이율이 더 높으세요. - 과잉 친절이 베푸는 높임말 향연을 듣다 보면 피로감이 몰려온다. 대접 받고도 놀림 받는 찜찜함을 업체 측에서는 알 리 없다. 그렇게 말하라고 요구한 자도 없고, 그렇게 말 하면 안 된다고 가르쳐 준 이도 없는 자연발생적 화법이므로.

 

 

항공업계나 백화점 등에서 고객들의 이런 불만을 접수하고 고쳐나가고 있다니 다행이다. 이런 작은 실천이야말로 고객 감동 서비스가 아니겠나. 소비자만 제대로 높여줘도 고마운 일이다. 그들이 취할 상품까지 높일 필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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