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르마늄의 밤
하나무라 만게츠 지음, 양억관 옮김 / 씨엔씨미디어 / 199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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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하나무라 만게츠의 [게르마늄의 밤].

이 소설은 19세 이상만 읽으라는 딱지가 붙어있지만 이유는 모르겠다.
물론 내용이 다소 과격하고 충격적인 면이 있지만
단지 소설이지 않는가?

하나무라 만게츠는 세상의 밝음보다는 어두움에 끌린다고 했다.
그의 이런 생각은 소설 전체에서 발견할 수 있다.

처음 이 소설을 내가 가지고 있었을 때
주변의 나같은 책의 노예 (?) 들이
책을 구하기 어렵다고
책을 빌려달라고 해서 곤혹스러운 기억이 있다.

예전에 장정일의 ‘내게 거짓말을 해봐‘가 출판정지를 당해 몰수 당했을 때도
재빨리 샀던 나에게 그 책을 빌려달라고 동료들이 들러붙어서
그때는 책을 빌려줄 마음이 0.1프로는 있었기에 빌려주었다가
이친구 저친구들이 돌려보다가
엉망이 된 책을 돌려받은 적이 있다.

그때 이후로는 내게 소중한 책은 절대 새로 사줄지언정 빌려주지 않는다.

집 서재도 안보이는 서재 안의 책들엔 소중한 책들을 꽂아놓고
거실 등등 쉽게 눈에 뜨이는 곳에는
대중소설이나 받은 책 중 별볼일 없는 책, 감동 못받은 책 혹은
아무도 탐내지 않을 대중소설로 꾸며두고 있다.
(얍삽하지만 내 소중한 책들을 보호하려면 어쩔 수 없다)

이야기가 이상한 방향으로 가버렸지만
[게르마늄의 밤] 은 [푸줏간 소년] 과 함께 꼭 한번 읽어볼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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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시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유유정 옮김 / 문학사상사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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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래 본인은 독서일기를 개인 파일이나 노트에 다양한 시선으로 논문형식으로 적는다.
하지만 게으른 내가 그걸 온라인에 또 올리는 일은 드물 것 같다.
주로 이곳 온라인 서재에는 100자 이내의 짧은 감상만 적는다.
하지만, 가끔은 이번 하루키 편처럼 원래 적어둔 독서일기를 그대로 올려볼 것이다.

  아래 부분은 작픔에 대한 다양한 인물들의 평을 위주로 본 [노르웨이의 숲 ㅡ 상실의 시대] 이다.
  [노르웨이의 숲] 독서 후기는 총 10장으로 나눠 썼으며, 며칠에 걸쳐 한장씩 옮겨보려 한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노르웨이의 숲] 은 1~3장 까지는 단편 [개똥벌레 ㅡ 반딧불이] 의 내용이다. 그 다음 부분은 장편소설로 쓰면서 첨가시킨 것이다. 이 작품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첫 장편으로서, <군조> 신인 문학상 수상작이다. 우리나라에는 1988년 삼진기획에서 이병익씨가 번역한 최초의 번역본이 나왔는데, 문학사상사에서 1989년에 [상실의 시대] 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이후 널리 알려졌다. 제먹을 바꾼 이유는 '상실감'이라는 단어가 독자에게 더 공감을 일으킬 것이라는 계산에서였을 것이다.
 
 일본에서 발간된 [노르웨이의 숲] 은 두 권짜리 장편소설로 겉표지가 상권은 붉은색, 하권은 녹색으로 되어 있다. 작품 겉표지의 라벨에는 하루키가 직접 쓴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다.

 "이 소설은 여태까지 제가 한 번도 쓴 적이 없는 종류의 소설입니다. 또한 어떻게든지 한번 쓰고 싶었던 종류의 소설입니다. 이 소설은 연애 소설입니다. 매우 구식 명칭이라 생각하지만 그 외에 좋은 말이 생각나지 않습니다. 격렬하고 고요하며 슬픈 100퍼센트 연애 소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노르웨이 숲] 은 남자와 여자의 연애에 관한 이야기를 중심적으로 다룬것, 그에 따라 녀성의 비중이 매우 커진 점이 이전의 작품들과는 다른 점이라 할 수 있다.
 
 요코조 가즈히로는 이 작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무라카미의 80년대 테마는 확실히 '큰 이야기'를 경험한 후로부터의 귀환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60년대 후반의 카은터 컬쳐, 베트남 반전 운동과 학생운동 등의 반체제 운동이 세계적으로 동시에 일어났던 것으로부터의 좌절, 축제가 끝나고 난 후의 공허함이라고 하면 이해하실 수 있겠으나 그 잃어버린 것, 상실의 이야기가 무라카미에게는 본질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노르웨이의 숲] 에서도 나오코라는 애인이 자살한 뒤에 남겨진 '나'의 슬픔, 서정은 아주 훌륭히 써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살한 애인 나오코는 도대체 누구였을까 하는 독자 측의 의문이 남습니다. 나는 '마음의 병을 앓는 나오코'는 분명 어떤 관념으로 속박되어진 과거의 우리들 모습의 상징이라고 해석합니다. 그에 대치되는 형태릉 보이는 '미도리'라는 여자가 등장합니다. 미도리는 현실적이고 생과 사, 정과 동 등 무라카미 하루키의 주특기인 좌우대칭적인 구조 속에서 새로운 생을 상징하고 있는 샘입니다."

 [노르웨이의 숲] 표지는 요코오 가즈키가 말한 것처럼 나오코와 미도리를 통해 생과 사나 정과 동과 같은 대칭적인 세계를 상징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초록색은 나오코에 대한 '조용하고 부드러운 맑은 애정'이고, 빨간색은 '서서 걸어다니고, 호흡하고, 고동치는' 애정을 상징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강은교씨는 [숲] 이라는 자연을 예로 들어 숲의 한 나무가 흔들리는 것이 다른 나무에게도 영향을 주는 것과 같이 인간 또한 하나의 존재로서만 살다가 죽는 것이 아니라, 다른 존재에게도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아가는 것이며, 그 죽음 또한 다른 존재에게 큰 영향을 주는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

 다케다 세이지는 <연애소설의 공간> 에서 [노르웨이의 숲] 은 하루키 자신의 연애소설이라 언급하고 있지만, 오히려 연애라는 관계를 불가능하게 하는 자폐적인 텍스트라고 주장한다.

 센고쿠 히데요는 <다림질하는 청년, 노르웨이 숲 속에서> 에서 작품 후기에 주목하여 후기가 있기 때문애 작품이 자기언급적인 이중소설화 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또한 주인공 와타나베가 세탁물을 다림질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 말하는 것으로 주름을 잘 잡아 정황을 청결하게 하는 작가의 수법과 겹친다고 주장한다.

 엔도 신지의 <노르웨이 숲 론> 에서 언어의 불완전성을 전재로 쓰인 작품이라고 주장함과 함께 등장인물의 언어와 행동에 초점을 맞추었다. 나오코, 미도리, 레이코, 하쓰미, 심지어는 와타나베와 만나자마자 하릇밤을 보내는 여자까지 모두 와타나베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자기요양'을 시도한다고 주장한다. 그 중 나오코는 와타나베에게 이야기함으로써 '자기요양'을 이루고자 하는 시도에서 실패한 대표적 인물이며, 미도리와 레이코는 성공한 케이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세 여상은 결국 '자기요양'을 시도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공통된다.
 가토 고이치는 <이상의 숲을 걷다, 무라카미 히루키편> 에서 이 작품의 원형인 단편소설 [반딧불이] 와는 달리 어째서 방대한 분량이 되었는가, 하는 의문을 제시한다. 이 의문의 해답으로는 와타나베가 [반딧불이] 에서는 화자였지만, [노르웨이의 슾] 에서는 청자의 입장임에 주목하고 등장인물들의 감정의 앙금을 쏟아내는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가토 노리히로는 <옐로 페이퍼 무라카미 하루키> 에서 이 작품이 이렇게 사람들의 마음을 이끄는 원인이 내적 세계로부터의 회복을 그린 이야기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ㅡ다음 인물의 심리별로 읽어본 내용은 "작품으오 본 작가"코너에 있다 ㅡman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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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기사단장 죽이기 - 전2권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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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단장 이야기]는 1부:현현하는 이데아
2부 : 전이하는 메타포
로 구성되어 있다.

화가인 주인공은 아내에게서 갑작스러운 이별을 통보 받고 당시의 체험을 서술한다.
하루키의 초창기 소설 이후로는 잘 볼수 없었던 1인칭 소설이다.


(솔직히 단편을 제외한 초,중반기의 1인칭 소설에서는
모든 작품의 주인공이 같은 사람이라고해도 될 정도로정형화되어 있었었다.

ㅡ 세상에거리를 두고 지내며,운동을 하고, 국적을 알 수 없는 분위기에(미국적 분위기가 좀 더 픙겼다),음식도 스피게티나 샌드위치를 먹었고,늘 신비한 여자가 나타났다.)
그래서 하루키가 한동안 1인칭 소설을 쓰지 않았던 것이 아닌가 짐작해본다.

작품 속 `기사단장`은 오페라 <돈조바니>의 등장인물이다.

아내와 헤어진 후 주인공은 저명한 화가가 소유한 집에서 생활하며 그림을 그리려한다. 그러다 (집의 주인은 요양시설에들어갔다) 그 집 천장위에서 `기사단장 죽이기`라는 그림을 발견하고,그 후로 주인공은 여러가지 불사사의한 일을 경험한다.

그리고,묵고 있는 집 이웃의 의뢰로 이웃의 초상화를 그리게 되는데, 
거대한 저택에 혼자 사는 이웃은 하루키가 [위대한 캐츠비]를 의식하고 설정한 것이라고 한다.

또한 `에도 시대 작가 우에다 아키나리의 [하루사메 이야기]에 수록된 이야기를 모티브로 삼기도 했다.
이번 [기사단장 이야기]에서 하루키는 고전을 인용하고 이용한다.
(그의 표현재로라면 오마주일 수도 있을 것이다)

주인공은 `기사단장 이야기`라는 그림의 작품 속 인물들에 이끌려 상상의 세계 같은 곳을 방황한다.
이것은 그의 작품들인 [세계의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1Q84]같은 작품에서 많이 본 구성이다.
소설은 몇년이 흐른 뒤, 주인공이 삶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며 끝난다. 
이번 소설은 그동안 그가많이 차용했던 열린 결말이 아니다.

이 작품을 온전히 이해하려면 작품 속에 등장하는 뮤지컬 <존 도바니>와 [위댜한 캐츠비]를 읽고 알아두는 것이 도움될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초창기의 하루키 단편들과 [노르웨이의 숲],[해변의 카프카] 등을 좋아했다.
언제부턴가 많은 작품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소설이든 산문이든 이이야기가 저 이야기 같고
반복되는 구성과 인물들 그리고 이야기가 식상했었다.

[1Q84]는 선인제 10억을 받아 유명세를 펼쳤지만,개인적으로는 실망감이 더컸었다. 
그 후의 [언더그라운드]도 마찬가지였다.

[기사단장 이야기]는 별 기대 없이 (1Q84 이후로 기대감은 없었지만,어떤 관성이나 습관으로) 읽었는데, 하루키가 오마주라고 표현한 이러저러한 시도가 익숙한 구조와 이야기를 조금은 인정할 수 있게 해주었다.
하루키 역시 자신의 스타일을 나름대로 벗어나 새로운 시도를 해보려했다는느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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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기
장 필립 뚜생 / 고려원(고려원미디어) / 199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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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심한듯 조용히 흐르는 하루을 그려내면서

삶과 죽음이라는 커다란 이야기를 섬세하게 그려내는 미니멀리즘 작가 `장 필립 투쌩`의 [사진기]


 그의 소설들 중 [욕조]와 함께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다.

 요즘은 이런 작픔을 찾기 어려워진 것이 무척 아쉽다.


 투생의 소설은 간결한 문장 속에서 느껴지는 삶에 대한 통찰력이 매력이기조 하지만,무엇보다도 그의 소설 속 인물들에게 매력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의 소설 속 주인공들은 어수룩하고 허점이 많이 보인다. 그의 인물들은 느릿느릿 (어떻게 보면 분통터질 정도로 느리게) 움직이면서도,맹수가 햇볕 아래에서 졸다 먹이를 잽싸게 낚아채는 것처럼 중요한 순간엔 날카롭게 보여준다.[사진기]의 주인공은 발가락을 주무를 때조차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하게"주무른다.

 

 무엇보다도 그의 주인공들은 유머와 냉소를 알고 있다. 유머와 냉소라는 것은 절망이나 좌벌,우울과 죽음이라는 감정의 극한까지 간 후에 그것을 극복하고 여유롭게 삶을 바라볼 때 느낄 수 있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왠지 투쌩의 인물들은 늘어나는 뱃살처럼 능청 밖에 남지않은, 버릴 수도 없고 미워할 수도 없는 남자인 것 같다. 이처럼 인물들에 대해 독자를 상상하게 하는 것은,간결한 단어 속에서도 인물들을 생생하게 묘사했기 때문일 것이다.


 투쌩의 소설 작법은 영화와 같다. 

 인물들의 감정을 발 드러내지 않고 독자가 영화장면을 보듯이 그들의 말과 행동으로 추측할 수 있게 한다. 큰 사건과 이야기가 없이도 독자는 깊은 감정을 느낄 수 있다. 이것이 투쌩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투쌩은 레이먼드카버처럼 고요한 일상을 이야기하지만,소설을 덮고 나면 독자는 표현할 수 없는 커다란 감정을 느끼게 된다.그것은 마치 어두운 연화관에서 빠져나와서 내리쬐는 햇볕에 눈을 찌푸리며 다시 현실로 돌아오는 동안 느끼는 혼란 속의 감동과도 같다.


 투쌩은 `미니멀리즘`과 `누보로망`작가인데, 누보로망과 미니멀리즘에 대해서는 페이퍼에 따로 작성하겠다. 또한 투생과 작픔에 대해서 역시 페이퍼에서 좀 더 깊이 있게 적어두겠다.

별로 힘들이지 않고, 억지도 쓰지 않으면서
마치 점진적으로 죽어가는 것차럼,아니 사는 것처럼
앞으로 나아감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내 삶도 앞으로 나아갔다.
그렇다. 똑같은 물거품이 끊임 없이 바뀌는 것처럼.

나는 그제서야 그토록 원하던 사진을 얻었음을 깨달았다.
내 존재의 깊숙한 곳에 파묻혀 있던 삶의 섬광을 포착했음을.

아름다운 것은 바로 흐름,바로 그거다.흐름,이 소란한 세계 밖으로 향하는 중얼거림. 사고를 멈추고 대명천지에 그 내용을 표현하고자 한다면 어떠할까? 말하자면,아니 그 파악할 수 없는 외곽선의 개방벅 혼돈을 유지하기 위해 오히려 말을 하지 않는다면,우리는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손가락 사이에 물,광선의 불타는 듯한 매력이 사라져버린 물방울 몇개만 얻으리라.

그 어느 것도,내존재나 내 비존재도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거기에는 오로지 삶 이전,그리고 내 눈 앞에 하늘만큼이나 가깝게 있는 삶 이후의 뮤한한 부동성이 있을 것이다.

나는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현재 이 순간을....고정시켜 보려고 애썼다.
마치 살아 있는 나비 몸뚱이를 바늘 끝으오 고정시키듯,
살아 있는 나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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僕は模造人間 (新潮文庫) (文庫)
시마다 마사히코 / 新潮社 / 198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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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국내에 [악마를 위하여] 로 오래전에 출간되었다가
그 후 [나는 모조인간] 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던
시마다 마사히코의 초창기 소설.

 현대사회의 인간에 대한 사유가 묘사되어 있는 작품인데
일본 사회의 패배주의도 느껴지고
이 작품에서는 시마다 마사히코가
유시마 미키오의 [가면의 고백] 에 영행을 받은 것 같다는 
느낌도 든다.

미개사회는 강한가 약한가, 잘하는가 못하는가 밨에 없었다.
그리고 그 양극단에 있는 자가 킹이다. 그렇디면 평균치에 지나지 않는 나는 아무리 굽히며 살아도 별볼일 없는 존재일 뿐이다.
권세를 누리지도 못하지만 놀림을 당하지도 않는다.
(본인 의역)

나는 나였던 적이 없었고 늘 타인이었다.

나는 당연히 패자쪽을 좋아했다. 명랑한 사람들의 단순함보다는
그들을 곁눈질로 바라보면서 뭔가를 중얼거리기도하고
음울한 분위기를 풍기는 수상쩍은 사람들에게 매력을 느꼈던 것이다.

나는 작은 행복보다는 추락할대로 추락한 불행쪽이
더 화려하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청춘의 추억? 어딘가 월급쟁이 냄새가 난다.
그것도 특출하게 말 잘 듣는 놈으로.
반항은 하지만 금방 속임수에 넘어가는 놈.
그래서는 안된다.
한번 시작하게 되면
이제 영구운동에 들어간다는 사실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된다.

* 나머지 작품 속애서 찾은 공감의 밑줄그은 문장들은
문장 페이퍼에 기록해두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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