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을 할까, 커피나 한 잔 할까?

- 알베르 카뮈 ≪시지프 신화≫ 중에서  

 

 

오늘, 엄마가 죽었다.
전보가 그렇게 왔다. 내 탓은 아니지만, 가지 않을 수 있나. 사장은 좋아하지 않는 눈치였지만, 휴가를 내고 버스를 탄다. 피곤했을까. 계속 잠을 잔다. 도착해선 엄마의 시신도 보지 않는다. 눈물? 글쎄, 눈물샘이 마른 건가. 엄마의 주검이 담긴 관. 경비가 커피를 권한다. 홀짝. 커피엔 역시나 담배. 그래도 엄마 시신 앞인데... 잠깐 망설인다. 그렇다고 꺼릴 이유도 분명치 않다. 담배 한 모금. 후~ 커피가 담배를 부른 것인지, 담배를 피우기에 앞서 커피를 애피타이저로 마신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맞다. 뫼르소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문학사에서 가장 유명한 첫 문장 중의 하나인 "오늘, 엄마가 죽었다"로 시작하는 ≪이방인≫이다. 커피, 태양, 담배, 바다, 정사... 그리고 숱하게 명명된, 그래서 지겨울 법한 부조리. ≪이방인≫을 떠올리자면, 그렇다. 태양이 너무 강렬해서 살인을 저질렀다는, (문학)역사상 가장 병맛(!)스러운 살인의 이유를 들이댄 뫼르소. 다양한 병맛짓으로 그야말로 인생사 병맛을 실감케 한 재능은, 온전히 그에게서 나왔다. 이 책을 내놓았을 때, 카뮈는 스물아홉이었다. 스물아홉의 청년이 내놓았던 이 책에 대해 문학평론가 롤랑 바르트는 "건전지의 발명에 맞먹는 사건"이라고 호들갑을 떨었다. 그런데, 그 호들갑, 틀리지 않았다. ≪이방인≫은 에너자이저다. 부조리는 지독하게 현재적으로 점점 더 강도를 더해가니까. 프랑스에선, 이 책에 대해 매년 20만명의 새로운 독자가 생겨날 정도다.

 

 

그렇다. 그. 알베르 카뮈.
그는 커피 한 잔과 함께(물론 담배도 곁들여서) ≪이방인≫을, 뫼르소의 병맛짓을 휘적거렸다. 빠뤼의 골목, 생제르맹 거리에 위치한 '레 되 마고·Les Deux Magots(2개의 도자기 인형)'와 '드 플로르·de Flore'에서였다. 생제르맹 교회 앞 광장에 위치한 카페들.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카뮈는 담배를 뻑뻑 피워가며 커피의 힘을 빌어가며, 뫼르소를 탄생시켰다. 부조리의 탄생. 커피로 조리한 부조리? 물론, 이곳엔 카뮈와 한때 절친이었던 사르트르를 비롯해 보부아르, 랭보, 베를렌, 알퐁스 도데, 앙드레 지드, 헤밍웨이, 피카소 등 내로라하는 문인·사상가·철학자·예술가 등이 즐겨찾았다. 오죽하면 "집으로 삼았다"는 얘기(사르트르)까지 나왔겠나. 지금은 관광객들이 호기심으로 머무는 장소가 됐다지만. 뫼르소는 커피의 힘을 빌린 부조리였던 것이다.

 

 

카뮈는 반항아였다. 
윗 사진이 뿜어내는 포스를 보라. 대번에 알아차릴 수 있다. 반항 아니면 죽음을! 그는 부조리에서 세 가지 귀결을 이끌어낸다고 했다. 반항, 자유, 열정. 자유주의자이자 사회주의자였던 그를 오해하는, 아니 그를 이용해 먹은 한국 지배세력의 유언비어도 있었다. 스탈린주의에 반대했던 그를, 반공주의자로 끼워맞춘 것이다. 카뮈는 말하자면, 반스탈린주의적 사회주의, 반전체주의적 사회주의에 가까웠다. 폭력에 근간한 정복자의 모습을 한 절대주의적인 이데올로기에 대한 두드러기 혹은 알러지. 부조리에 반항하되, 반항의 기원을 잊지 말아라! 카뮈가 우리에게 속살거린다.

 

다만, 나는 안다.

커피가 카뮈를 꼬드겼다. 약간 과장하자면, 커피 없이 ≪이방인≫이 나왔을까. 다른 판본으로 말하자면, 그의 지성을 자극한 것은 커피였다. 어느 커피하우스에선, 또 다른 카뮈가 담배 한 모금과 함께 커피의 힘을 빌어 지금 이 시대의 부조리를 끄집어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1959년 한 인터뷰, "내 나이 마흔다섯, 아직 놀랄 정도로 활력이 남아 있습니다"라고 자신만만하던 카뮈는 이듬해 초, 소설(≪최초의 인간≫) 원고를 품고 가다가 차에 치여 아듀. 요절이었다. 커피가 그를 죽인 것은 아니었다. "나는 가난 속에서 자유를 배웠다"고 말한 이의 부조리한 죽음이었다. 

 

그런데 왜, 카뮈?
1월4일은 카뮈의 53주기다. 뭣보다, 올해 카뮈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11월7일)다. 그래서 특별한 커피를 볶았다. 이름하여, 부조리 커피다. 레시피는 알려주지 않겠다. 힌트가 있다면 알제리 커피가 가미됐다. 알제리는 커피를 '샤딜리에'라고 부르는데, 카뮈는 알제리에서 태어났다. 알제리로 이주한 프랑스노동자의 후손이다. 이 커피, 마셔보면 뫼르소의 심경이 이해가 간다. 지금 우리를 둘러싼 온통 부조리한 현실 덕분이다. '부조리 커피'가 그것을 명징하게 일깨워줄 것이다.

 

그나저나, 카뮈 사진의 저 포스, 저 간지.
아주 부러워 죽는다. 저 정도 간지, 누구나 '소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저 정도 간지가 돼야, 뫼르소라는 인간형을 내놓을 수 있다. 장례를 앞두고 밤을 새며 커피를 마시고(그래, 밤 새며 커피를 마신 것이 무슨 죄란 말인가!), 어머니 장례를 치르고 난 다음 날 섹스를 하며(섹스랑 밥 먹는 일이 뭐 그리 다른가? 장례 다음 섹스를 하면 정말 (관습법에서라도) 죄가 되는겨?), 어머니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울지 않는 인간도 있다. 분명!).

 

 

카뮈 탄생 100주년을 맞아 ≪일러스트 이방인≫이 출간됐다.

지난해 ≪이방인≫출간 70주년을 기념해 프랑스에서 나온 특별 에디션이 드디어 한국에도 나왔다. 프랑스에서는 무려 750만부가 팔려나갔다. 흑과 백, 두 가지 색깔만으로 모든 것을 표현했다. '부조리 커피'를 마시면서 ≪일러스트 이방인≫을 보시라.

 

다만, 햇살은 피해서.

꼭. 당부한다. 너무 강한 태양은 몸에도, 마음에도, 해로울 수 있다. '행쇼(행복하십쇼)'하고 싶거든, 지나치게 강렬한 태양은 피하고 볼 일. 비(정지훈)의 '태양을 피하는 방법'을 읊는 것은 좋지만, 비도 몰랐던 것이 있다. 김태희와 연애할 때 국방의 의무를 회피하는 방법까진 몰랐던 거지. 연애할 때 주의할 것, 내 안의 부조리. 아, 물론 연애질할 땐, 당연히 그따위 것 모른다. 세상이 온통 김태희뿐인데, 부조리가 보이겠나. 태양은 피해도, 김태희는 못 피했겠지. 비에겐. 뫼르소라면 몰라도. 그러니, '밤9시의 커피'를 마시면서 태양도 피하고, 피할 수 없는 '부조리'도 꿀꺽 마셔야 한다. 삶처럼. 딴 이유 없다. 알다시피, 삶은 부조리니까!

 

 

밤9시의 커피.

밤 9시가 넘으면 1000원으로 내려가는 커피 한 잔이 있는 곳. 그 커피 한 잔으로 생을 확인하고, 외로움을 위로받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커피 한 잔에 담긴 어떤 세계의 확장과 연결도 엿본다. 커피가 있어서 다행이다. 나는 밤 9시가 되면, 낮에 만든 커피와는 또 다른 커피를 내린다. 그 커피는 오로지 당신 하나만을 위한 커피다. 그리고, 당신과 나만 아는 이야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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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우리가 상상하고 싶어 하지 않는 식으로, 가령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 수전 손택 타인의 고통》중에서

 


크리스마스.


얼마 전, 친구와 크리스마스가 예전같지 않다고 구시렁거렸어. 즉, 크리스마스의 낭만이 사라졌다는 불평이었던 거지. 물론, 우리가 더 이상 예전같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겠지. 크리스마스의 낭만도가 떨어졌다는 것, 나이를 먹었다는 증명과도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어.


우리가 좀 더 크리스마스에 흥겨이 달뜨고 감흥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과 함께, 크리스마스가 사회적으로도 점점 더 삭막해지고 있다는 안타까움이었어. 본디 크리스마스는 나보다 남을 더 생각하는, 타인의 안녕과 평화를 바라는 그런 시기가 아니었던가? 그렇지 않았어? 예수의 탄생은 그런 의미 아니었어?  


그러나, 나는 이제 더 이상 크리스마스를 반길 수가 없게 됐어. 무엇이든, "크리스마스잖아요~"라고 퉁 칠 수 있었던 시대, 완벽하게 끝났어. 올해는 그것을 분명하게 확인했어.




어제(21일) 한진중공업 복직노동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서른 다섯, 두 아이의 아빠는 "돈이 전부인 세상에 없어서 더 힘들다"며 "돈이 무섭다"고 유서를 남겼어. 


그리고, 가족들에게도 덧붙여. "사랑하는 내 가족. 먼저 나쁜 생각해서 미안합니다. 나쁘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힘듦입니다. 이제야 내가 많이 모자란 걸 압니다. 슬픕니다." 눈물이 났어. 커피 한 잔을 마시면서 눈물이 뚝뚝.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슬프건만, 오늘(22일), 현대중공업하청지회 노동자가 19층 아파트에서 투신했어. 한중 노동자의 소식을 듣고 많이 힘들어했다고 했어. 무섭다. 슬프다. 


과연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이 세상, 우리가 살아갈 만한 곳인가. 노동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게 만드는 사회라니. 정치교체는 언감생심, 유신적 정치로의 회귀를 우려하며 '죽음의 번호표'가 발부되는 것 아닐까, 라는 트친의 염려가 산산이 흩어질 언어가 될 것 같지가 않아. 이게 그저 우려로 끝났으면 하지만 말이지.


그럼에도 이 국가는, 이 나라의 정치(권력)는 묵묵부답이야. 젊은 노동자들이 스스로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응답하라고 부르짖건만 말이야. 넌, 아니? 국가는 대체 왜 있는 것일까. 이 사회는 왜 남의 고통에 무덤덤하기만 한 것일까.


그래, 너와 나의 크리스마스가 다 무색해졌어.

모든 사람에게 평등한 크리스마스였었어. 크리스마스라는 그 이유만으로 흥겹고 즐거우며 벅찼던 시간은 모두의 것이었어. 그러나 이젠 크리스마스를 즐길 수 있는 부류와 그렇지 못하는 부류로 나눠지나보다.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도 자본(화폐)의 자장 안에 들어간 까닭에 온 누리에 선물을 베풀지 못하나 봐. 크리스마스가 슬퍼.ㅠ.ㅠ 


이 땅의 노동자에게, 크리스마스는 없어!   


이 엄혹한 세상, 커피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나는 고민하고 고민해.

커피 한 잔으로 이 모든 슬픔을 달랠 수 있을까. 위로할 수 있을까. 아니, 차라리 이 커피로 세상의 각성을 깨우고 혁명을 추동하는 것이 훨씬 더 낫지 않을까. '혁명 커피'가 필요한 것 아닐까. 커피에 시대의 통증이 고스란히 담겼다. 커피에서 느낄 수 있는 통각이란 이런 것일까. 


그러니까, 궁금해요. 

당신은 이 슬픔을 어떻게 견디나요?... 이 환멸을 어떻게 감당하고 있나요?...


우리의 커피, 우리의 음악, 당신과 함께 이 음악, 나누고 싶어.

우리의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우리의 아름다운 시절이 언제 올지는 몰라도. 그래도. 그래도. 



 

밤9시의 커피.

밤 9시가 넘으면 1000원으로 내려가는 커피 한 잔이 있는 곳. 그 커피 한 잔으로 생을 확인하고, 외로움을 위로받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커피 한 잔에 담긴 어떤 세계의 확장과 연결도 엿본다. 커피가 있어서 다행이다. 나는 밤 9시가 되면, 낮에 만든 커피와는 또 다른 커피를 내린다. 그 커피는 오로지 당신 하나만을 위한 커피다. 그리고, 당신과 나만 아는 이야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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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이건, 어른이건, 교과서건,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던 '전태일'을 맨처음,

알려줬던 어른, 조영래.

1992년 전태일 열사를 만났고, 인권 변호사 조영래를 처음 만났던 그때.

그러나 조영래 변호사는 이미 세상을 떠나고 난 뒤였다. 1990년, 마흔 셋, 세상에 이른 죽음은 없다지만, 조영래 변호사는 이미 떠난 뒤였다.

1990년 12월 12일. 오늘은 22주기. 그러고 보면, 1212는 늘 춥다.

 

그러나 전태일을 낳는 시절은 아직 끝나지 않는구나.

대한문 '함께살자 농성촌'을 철거하겠다는 중구청의 행정집행 예고가 있었던 오늘.

다행히 파국은 면했다. 농성촌 대표단과 중구청이 대화를 갖고, 행정대집행(강제철거)은 취소됐다.

한편으로, 이재영 진보신당 전 정책위의장이 돌아가셨단다.

사실, 잘 모르는 분이지만,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정책통을 맡으시면서 노동 감수성이 짙은 분이셨다는 트친의 전언이 있다. 노동계는 한 분의 정책통을 잃었다. 아쉽고 또 아쉽다.

조영래 변호사 기일과 맞물려,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이 늘 지옥임을 실감하게 한다.

< 드라마의 제왕 > 앤서니(김명민)도 또박또박 말하더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여기가 지옥이야."

더 이상 전태일이 없길 바라는 것은,

완벽한 남자를 기둘리는 여자의 마음과 같지 않을까 하는, 어쩌면 다림질로도 결코 펴지지 않을 절망감.

최근 <남자의 종말>이라는 책을 읽었는데, 찌질한 B급 마초로서 쪽팔리고 반성도 되고, MB시대 다시 강화된 '마초주의'를 사회적으로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도 고민해야 하지 않나라는 생각이 언뜻.

우석훈은 모든 정부 부처에 여성이라는 키워드를 가진 국이나 실을 하나씩 다 만들고, 사회적경제 등 여성성이 강조된 경제 정책부터 여성노동자, 여성 알바, 여성 농민 등 여성에 대한 세밀하면서도 디테일한 접근을 강조하는데. 마을에도 여성을 강조하는데, 여성성이 온누리에 퍼져 있다면 모를까, 마을여성실이라도 만들어야 하는 것 아닐까?

모르겠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한국 특유의 마초성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우선, 나부터. 고민이다.

오늘, 조영래 변호사를 추모한다. 이재영 노동자를 추모한다.

그나저나, 퍼펙트 가이는 없다!ㅋ

완벽한 남자 :
무릎 꿇고 청소하는 것쯤은 개의치 않는다.



완벽한 남자 :
일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중간에 쉬엄쉬엄 노는 짓은 하지 않는다.



완벽한 남자 :
옳지 않은 방향으로 비비지 않는다. 결코.



완벽한 남자 :
마트에 가서 장을 보는 것을 결코 꺼리지 않는다.



완벽한 남자 :
결코 수증기를 다 써버리지 않는다.
즉, 에너지나 열정을 결코 상실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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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완벽한 남자를 기다리는 여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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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끝났다. 겨울이 시작됐다. 


오늘, 비 온 뒤 온도가 '뚝' 떨어져서가 아니다.  


2012년의 플레이오프가 끝나자마자, 계절은 그렇게 바뀌었다.  


눈물 난다. 13년 만의 한국시리즈 진출, 20년 만의 우승은 산산조각났다. 


준플레이오프 승리로 충분하다고 설레발 쳤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노떼가 지는 야구, 겨울이 뜨는 신호. 


이젠 야구 없는 계절, 겨울.


겨울을 맞으라. 


야구 없는 계절, 아다치 미쓰루의 <터치>를 꺼내든다.



노떼 자얀츠, 너 없이 살겠지만.   


야구는 끝나지 않았다. 우리는 챔피언이었고 여전히 챔피언이다. 


물론, 노떼 자얀츠 아닌 노떼 자얀츠 팬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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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커피를 주시오, 아니면 죽음을 주시오"


- 패트릭 헨리(미국 독립운동 지도자)


그래, 당신도 동의할 거야. 

영원히 익숙해지지 않는 것들이 있어. 가령, 사랑이 그렇고, 죽음이 그래. 


오늘, 한 우주가 스러졌어. 

처음 가본 서울추모공원, 친구 아버님이 한 줌의 먼지가 되셨어. 

이 세계를 구성하던 하나의 우주가 희미해지면서 없어진다는 것, 비극.

느닷없이 닥쳐온 비극 앞에 인간은 무력할 수밖에 없지만, 이별 앞에서 필요한 것은 예의여야 함을 새삼 깨달았던 시간. 


아버님을 화장실로 보내기 직전의 곳, '고별실'이라는 팻말을 달고 있었어. 

그 '고별'이라는 말, 유난히 마음에 콕콕 박히더라. 

장례에서 죽은 사람에게 이별을 알림, 고별. 


이별해야 하는 곳. 한 우주의 스러짐을 마음으로 확인해야 하는 곳. 


그래, 익숙해지지 않는 이유를 분명히 알 수 있었어.

개별의 인간이기 때문이지. 구체적인 존엄이 새겨진 개별의 인간이기 때문이었어.

숱한 죽음 앞에 내가 익숙해질 수 없는 이유가 그것이었던 거야. 

한 우주가 구축한 세계, 그 삶의 구체는 내가 알 수 없는 심연이겠지만, 

구체적 존엄 앞에 나는 고개를 숙여야했고, 추모는 마땅한 것이었어. 

이별 앞에 반드시 예의를 필요한 이유도 거기 있었고. 


화장 후 곱게 갈린 뼈라고, 개별의 구체가 아닐쏘냐.  

그래서, 성당으로 향하는, 아버님의 유골을 태운 리무진에 나는 고개를 숙여야 했어.


 

그리고, 

45년 전 오늘, 타살 당한 혁명을 떠올렸어. 

1967년 10월9일, 볼리비아에서 날아왔을 혁명의 으스러짐. 


체 게바라. 

오늘, 그에 대한 추모도 함께.

당신과 함께 타살 당한 혁명을 추모하는 것이고, 위로하는 것이지.  


비록 우리에게 혁명의 새벽은 오지 않았고, 어쩌면 영원히 오지 않을지 몰라도,

만나지도 못한 혁명에게 이별을 말할 수는 없는 노릇.

그렇다고, 혁명과 만날 날을 포기할 순 없는 법. 

언젠가 올 혁명에 대한 예의!


그리하여, 

오늘 같은 밤에도, 노떼 자얀츠가 이겨줘야 할 것 같아.

내 마음에 꿀렁이는 이 슬픔과 추모의 마음에 대한 위로.  

당신도 여전히 우리 자얀츠 팬이지?   


그래 내겐,  

당신이 혁명이었어. 내 마음은 그래서 이미 혁명을 경험한 거야.


당신 하나로 내겐 충분히 가능했던 혁명. 


당신과 함께 보고 싶은 이 영화. 끝내 개봉하지 못하고 DVD로 직행한 이 영화, <체>.


오늘, 서울추모공원에서 만났던 커피, 향긋했어.

커피 자체 맛보다는 카페인이 필요했거든. 내 정신을 깨우고 싶은.

내 마음의 추모도 담아 마셨던 그 커피, 오늘의 나를 지지해 준 커피.

수골실 앞에서 커피 마시던 유족들 모습에서, 나는 커피가 주는 위로를 생각했어.


슬픔을 안녕~할 순 없지만, 커피는 슬픔을 위로할 수 있구나.

당신이 슬플 때, 나는 커피를 건네고 싶다...     

  

언젠가 이 세계에 변혁을 초래할 인간이 찾아올 것이다.

그 인간에게도 방황하는 밤이 있을 것이다.

그 밤에 문득 펼쳐본 책 한 줄의 미미한 도움으로 변혁이 가능해질지도 모른다.

그 하룻밤, 그 책 한 권, 그 한 줄로 혁명이 가능해질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는 일은 무의미하지 않다.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

- 프리드리히 니체


 

밤9시의 커피.

밤 9시가 넘으면 1000원으로 내려가는 커피 한 잔이 있는 곳. 그 커피 한 잔으로 생을 확인하고, 외로움을 위로받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커피 한 잔에 담긴 어떤 세계의 확장과 연결도 엿본다. 커피가 있어서 다행이다. 나는 밤 9시가 되면, 낮에 만든 커피와는 또 다른 커피를 내린다. 그 커피는 오로지 당신 하나만을 위한 커피다. 그리고, 당신과 나만 아는 이야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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